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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전투

last modified: 2015-04-14 01:01:43 by Contributors

베를린점령.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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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제국 의사당(Reichstag;라이히스탁, 러시아어로는 레이흐스타흐(Рейхстаг))에 적기赤旗를 게양하는 붉은 군대 장병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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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를린의 여인' 中



"그리고 나는 외치고 싶었다. 러시아, 벨로루시, 폴란드의 땅 속에 누워 있는 이들, 우리가 거쳐온 전장에서 영원히 잠든 이들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동지들, 우리가 해냈소!'"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신들의 몰락: 베를린의 최후
3.1. 젤로 고지 전투
3.2. 포위되는 베를린
3.3. 나치 독일의 최후
3.4. 유럽 전선의 종결
4. 여담
4.1. 소련군의 비행
4.2.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
5. 대중문화


1. 개요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였던 1945년 소련군제3제국의 수도 베를린을 함락시킨 전투이다. 제3제국 총통이었던 히틀러는 베를린 함락이 임박하자 자살했고, 히틀러에 의해 후임 대통령(총통이 아니다.)에 임명된 해군 원수 칼 되니츠 제독을 수반으로 하는 플렌스부르크의 독일 정부는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다. 이로서 1939년에 시작된 유럽 전선의 전쟁은 끝이 났으며, 전세계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던 나치 독일은 멸망하였다.

2. 배경

1944년 여름 소련군의 공세인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독일군의 주력인 중부집단군이 붕괴했고, 벨로루시에서 철퇴하여 비수아 강을 경계로 소련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곧바로 벌어진 소련군의 남부 공세 때문에 우크라이나에서도 물러났고, 이때 독일군의 동맹국 노릇을 한 루마니아핀란드는 소련과 강화를 맺고 연합군 측으로 돌아서서 독일군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동부전선의 붕괴와 함께 설상가상으로 서부전선에서는 영미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순식간에 프랑스를 해방시켰다.

소련군은 1944년 가을을 끝으로 공세를 중지하고 재편성에 들어갔다. 이는 모스크바 전투 이후의 반격작전과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공세종말점을 억지로 넘어가면서까지 진격을 고수하다 독일에 역습당해 참패하고 탈환한 영토를 다시 빼앗긴 전훈에 따른 것이었다. 문제는 히틀러가 이것을 가지고 전세를 오판한 것이다. 이 때문에 "동부에서는 우리 독일군이 소련군을 패퇴시켰음. 그니까 서부에서만 영미군을 패퇴시키면 독일은 다시 리즈시절임!"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급문제로 진격이 둔화된 서부의 영미군에 공세작전을 계획했다. 이는 독일 최후의 공세였고(...)

이것은 상당히 도박적인 작전이었는데 당시 기갑웨이브로 파상공세를 펴던 소련군에 맞서고 있던 동부전선의 정예부대와 기갑부대를 빼내어 투입했기 때문에, 당시 동부전선의 총책임자였던 총참모장 하인츠 구데리안은 히틀러에게 항의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동부전선의 방어를 포기하고 서부전선에 올인한 셈이며, 이게 성공했다면 아마도 제3제국의 수명이 몇달 더 연장될 수 있었겠지만, 초반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제공권이 없던 독일군은 참패했고, 서부전선뿐만 아니라 동부전선에 거대한 전력공백을 초래했다.

한편 독일군의 서부 공세에 당황한 서방 연합국은 압력을 덜기 위해 소련군에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개시해줄 것을 요청했고, 소련군의 위력을 과시하고 싶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흔쾌히 이에 응해 공세를 개시했다.

이후 젤로 고원 전투 직전까지의 상황은 비수아-오데르 대공세 항목을 참고.

3. 신들의 몰락: 베를린의 최후

3개월 간의 대규모 공세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4월, 스탈린은 로코솝스키, 주코프, 코네프 등 전선군 사령관들을 모스크바로 소집해 베를린 공략에 대해 논의했다. 모든 사령관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베를린 공략을 맡고 싶어했지만, 스탈린은 특정 사령관에게 베를린 공략을 맡긴다고 하지 않고 그냥 "베를린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전선군이 베를린 공략을 맡을 것이다."라고만 이야기했다. 이 때문에 전선군 사령관들은 회의를 마치자마자 자신들의 사령부로 돌아가 부하들을 갈굼 닥달하며 이 경쟁에 이길 생각만 했다.

베를린 주위에 포진한 소련군은 3개 전선군으로 구성되었고 병력은 약 250만 명, 전차 6,250대, 전투기 7,500대, 각종 포 40,000문 등 거대한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는 독일군 수비대는 70만 명의 병력과 1,519대의 전차, 2,000여 대의 전투기, 9,000문의 화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모든 분야에서 3:1 ~ 4:1의 전력 차이가 나고 있었고, 그나마 저 독일군 병력 수치에는 지상전투에 숙달이 덜 된 해군공군 차출 병력, 그보다도 못한 전투 경험이 부족하거나 전무한 국민돌격대히틀러 유겐트의 소년병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소련군에 숫적으로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확실한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서방 연합군이 담당한 서부전선도 베를린 방면으로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적은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돌렸다가 동부전선으로 복귀시키는 힘든 작업을 수행해야 했다.


베를린 전투에서 사로잡힌 독일군 포로들. 사진 속 포로 대다수가 해군과 공군 장병들이다. 1,000여명의 해군을 포함해 꽤 많은 수의 해공군 인원들이 방어 전투에 육전대로 투입되었다.

3.1. 젤로[3] 고지 전투

사령부에 돌아온 원수들은 서둘러 공세를 준비하였고, 4월 16일 북에서 남으로 제2벨라루스(로코솝스키), 제1벨라루스(주코프), 제1우크라이나(코네프) 전선군들은 일제히 공세를 시작하였다. 이 작전들을 통틀어 데르-나이세 작전이라고 한다.


Handshake over the Elbe

북쪽의 로코솝스키 군은 오데르 강을 건너 25일 제틴을 탈취하고, 베를린의 동북쪽으로 진출하였다. 남쪽의 코네프 군은 독일의 쇠르너 군을 쉽게 돌파하고 4월 25일 휘하에 있던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병력이 동진하던 미군 정찰대와 엘베 강 연안의 슈트렐라(Strehla)에서 조우하고, 그 다음 날 엘베 강 연안의 토르가우(Torgau)에서 제 5근위군 휘하 제58 근위소총사단장이 미군 제69 보병사단장과 만나 그 유명한 악수(Handshake over the Elbe)를 나눈다. 이로서 독일군은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로코솝스키 군도 영국군과 엘베 강 연안에서 만났다.

문제는 전선 중앙에 있던 주코프의 제1벨라루스군이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점작전에서 패주한 후 젤로 고지로 후퇴하여 포진하고 있던 독일의 비스툴라 부대였다. 이 부대는 독소전쟁 초반부터 수비의 달인이라고 알려져 있던 고트하르트 하인리치가 3월 말에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지휘하고 있었으며, 병력 수는 소련군이 거의 10:1로 압도적이었으나 지형 면에서는 소련군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쉬웠던 고지에 위치한 독일군이 훨씬 유리하였다.

하인리치는 공병 부대를 투입해 오데르 강의 연안의 저수지를 역류시켜 진격로를 습지로 만들어 놓았고, 이 뒤로 참호벙커, 대전차호로 이루어진 세 겹의 방어선을 만들어 놓고 소련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전략적으로 조성된 인공적인 습지뿐만 아니라 봄철의 해빙까지 겹쳐 도로가 진창이 되는 바람에 소련군의 진격은 한층 어려워졌다. 하지만 주코프는 누구보다 베를린을 먼저 공략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사로잡혀 이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고, 압도적인 병력을 이용한 진격으로 이를 돌파하려고 하였다.

4월 16일에 소련군은 카츄사 다연장로켓을 시작으로 10000문이 넘는 각종 화포로 맹포격을 한 뒤 젤로 고지로 쳐들어갔지만, 습지 때문에 진격이 지체되었다. 진격 속도가 예상보다 심하게 느려지자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전화를 걸어서 "동무, 왜 이리 느림? 코네프 동무가 대신 베를린 가도 됨?"이라고 닥달했다. 주코프는 이 말을 들고 더욱 조급해져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예비 병력까지 투입하는 병크를 저질렀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회를 하거나 조금만 기다렸다가 먼저 적진을 돌파한 다른 전선군의 도움을 받았으면 쉽게 공략할 수 있었던 곳에서 결국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이 때문에 이 전투에서 독일군의 사망자가 만명에 불과했던 반면, 소련군은 적어도 3만명의 사망자를 냈다.[4] 병력 차이가 10:1인 압도적 우세 상황에서 이렇게 적군보다 더 큰 피해를 낸 것은 명백한 지휘 부실이며, 주코프의 흑역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병력이 워낙 열세인데다가 보급과 증원도 거의 없었던 독일군은 더 이상 소련군을 저지하지 못했고, 소련군은 3일 간의 맹공과 큰 희생 끝에 결국 이곳을 가까스로 돌파하여 주코프가 베를린 공략의 주공을 맡게 되었다.

3.2. 포위되는 베를린

4월 21일 젤로 고지를 돌파한 주코프 지휘의 제1벨로루시 전선군 포병은 드디어 베를린을 무차별 포격하기 시작했다. 이 포격에 사용된 포탄 숫자는 영국군/미군 폭격기가 투하한 폭탄보다도 더 많았다. 제1벨로루시군이 동쪽에서 베를린으로 전진하는 동안 코네프 지휘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베를린의 남방을 우회하여 서진하였다. 주코프 군의 북쪽에서는 로코솝스키 원수의 제2벨로루시 전선군이 베를린 북쪽을 우회하여 베를린 서쪽으로 진출하였다.

독일 중앙 집단군을 지휘하던 쇠르너는 "공격이 곧 최선의 방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바우첸에서 다시 선빵을 날려 코네프 군을 저지하려 했다. 쇠르너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나, 히틀러는 이것을 보고 여기서 더욱 더 대담한 계획의 명령을 내려서 주코프 군까지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독일군은 이미 그럴 만한 역량이 없었고, 그런 작전을 하다가는 소련군에게 포위섬멸될 것이 명백했다. 이런 병크를 보다못한 하인리치는 히틀러의 부관들에게 직언을 하여 이를 막았다.

하지만 히틀러는 여전히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고 오데르 강변에 부셰의 9군은 후퇴를 요청하지만 전선을 유지하라 해서 결국엔 고립된다. 체코 방면의 쇠르너가 말빨로만 히틀러를 안심시키고 측면에서 소련군을 한방 먹인다고 허풍을 친 것도 히틀러의 오판을 도왔다. 한편 엘베강서 미군과 대치 중이던 벵크를 베를린으로 불러들이고 무장친위대 장군인 펠릭스 슈타이너에게 새로운 부대를 창설해 소련군의 진격을 막을 것을 명했다. 하지만 이 명령은 병력과 물자 모두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유명무실한 허세에 불과했고, 히틀러는 제대로 보고도 받지 않은 채 이 부대가 이미 편제를 완료했다고 판단하고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슈타이너는 그 때까지도 한 줌밖에 안 되던 병력 밖에 없었고, 사방팔방으로 밀려드는 소련군을 보고는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호헨리헨에 짱박혀 있던 힘러는 항복협상을 위해 자신이 꼼쳐둔 병력 1만5천에서 2만을 몰래 빼돌려놨고 자신과 친한 슈타이너에게 히틀러와 사령부 명령을 쌩까라고 시켰다.

4월 23일에 열린 작전 회의에서 슈타이너가 공격하지 않았던 걸 알고 욕을 퍼부으면서 직접 페겔라인[5]을 파견한다. 참모진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슈타이너의 부대가 아직 제대로 편제도 되지 않았고 공격도 당연히 실행되지 않았다고 했고 24일에도 슈타이너가 공격에 나서지 않자 "나는 전쟁에서 졌다!"고 소리쳤고, 탈출하느니 차라리 자살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몰락'에도 나오는 그 장면(...)의 실제 상황.)

이 와중에도 소련군의 각 전선군들은 베를린 포위 작전을 계속하였고, 4월 23일에 히틀러는 무트 바이틀링 대장을 최후의 베를린 수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4월 24일 주코프군과 코네프군이 베를린 남쪽에서 만나게 되자 베를린은 소련군에 의해 몇 겹으로 포위되었고, 이제 히틀러는 베를린을 탈출하기도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게다가 소련군의 포위를 저지해 보려던 쇠르너의 선빵은 소련군의 역습을 받아 박살났고, 베를린은 이제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3.3. 나치 독일의 최후

이쯤 되면 사실상 항복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지만, 독일군은 계속 저항했다. 나치가 전쟁 내내 동유럽에서 자행한 잔인한 짓들이 워낙 많았고, 소련군도 재반격을 시작한 이후 독일인들과 그 추종자들에 대해 닥치는 대로 약탈과 보복 살해를 감행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군으로써는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오래 버텨서 더 많은 국민들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서부의 영미 연합군 점령지역으로 탈출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야 했다.

한편 히틀러는 패배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자 측근들의 탈출 요청도 거부하고 베를린에서 죽을 것이라며 완강하게 버텼다. 또한 좀 더 많은 병력과 주민들을 보존하기 위해 후퇴해야 한다는 측근들이나 현장에 나간 지휘관들의 말을 무시하고, 모든 독일인들에게 죽을 때까지 싸우라고 명령을 내렸다. 물론 이에 항명하는 지휘관들은 모두 해임되었다. 연이은 패배에 히틀러는 후퇴의 후자만 나와도 병적인 거부반응을 보였다.

한편 소련군은 베를린에 본격적으로 진입해 소탕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최후까지 처절하게 저항하며 싸웠지만, 이제 소련군의 물량 공세를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소련군은 건물 하나하나를 청소하면서 느리긴 했지만 계속 진격하기 시작했고, 독일군은 점점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티어가르텐 중앙으로 몰리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히틀러는 4월 29일 비서에게 총통 직책을 다시 둘로 쪼개 칼 되니츠에게 대통령 직위를, 파울 요제프 괴벨스에게 총리 직위를 물려주는 유서를 작성하게 했다. 헤르만 괴링은 히틀러에게 총통 자리를 넘겨달라고 했다가 찍혀서 이미 신임을 잃고 있었고, 하인리히 힘러도 총통 몰래 스웨덴의 중재로 연합국과 강화 협상을 하려던 것이 발각되어 마찬가지로 승계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이어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4월 30일 그녀와 함께 동반자살했다. 자살 직후,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의 시체는 유언에 따라 측근들에 의해 화장되었다.


victory_reichstag_berli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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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리즈시절. 베를린 국회의사당(라이히스탁) 함락 장면의 기록화. 실제로 이 건물이 소련군 수중에 떨어진 시간은 한밤중이었다. 어쨌든 국회의사당 함락은 독소전에서 소련군의 승리를 상징하는 순간이다.


히틀러가 죽은 직후인 5월 1일에 베를린 국회의사당이 제150 소총병사단[6] 병력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사실상 베를린은 소련군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이를 전후해 육군참모총장이었던 한스 크렙스 장군이 소련에게 협상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 바실리 추이코프 대장의 사령부로 찾아갔지만, 추이코프는 협상의 여지는 전혀 없고 독일의 무조건 항복만이 유효하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협상 결렬 후 추이코프는 크렙스에게 들었던 히틀러의 사망 소식을 스탈린에게 전했다. 괴벨스는 공군 중사로 전선에 나갔다가 포로로 사로잡혀 있던 양아들 하랄트 크반트를 제외한 자기 자식들을 모두 독살한 뒤 아내와 함께 동반자살했고, 협상이 실패한 뒤 돌아온 크렙스와 그의 사관학교 동기인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대장도 마찬가지로 자살을 택했다. 나머지 잔존 병력과 인사들은 탈출을 시도했지만, 이들도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소련군에게 사살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3.4. 유럽 전선의 종결



소련군은 공식적으로 베를린을 점령했지만, 아직도 골목 등 일부 지역에서 패잔병들이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외곽 지역에선 한 명이라도 더 서방 연합군 점령지로 보내기 위해 저항하는 독일군 잔여 부대와 소련군의 전투가 지속되었다. 이후 독일 정부가 공식적으로 5월 8일에는 서방 연합군에, 9일에는 소련군을 포함한 전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면서 유럽의 전쟁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이후에도 미국, 영국 등 서방 연합국은 5월 8일을, 소련과 러시아는 5월 9일을 전승 기념일로 삼고 있다. 2000년대 이후로는 러시아의 5월 9일 전승 기념 행사에 미국, 서유럽 정, 관계 인사들도 초청받아 참석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 병사 8만여 명이 작전 기간 동안 전사했다. 그리고 이들 중 3만여 명이 베를린 시가전에서 운명을 달리했으며, 그 외 28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중에서도 시가전인만큼 기갑전력의 피해가 특히 커서 전투기간동안 약 2000대(...)[7]에 달하는 전차가 파괴되었다.한편 베를린에서는 소련군이 전투원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공격을 했기 때문에 군인들은 물론 민간인의 피해도 심각해 45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렇게 독일 정부가 공식적으로 항복했으나 우크라이나 방면군은 항복 후에도 자신들이 소련군의 포로가 돼서 시베리아로 가기 싫었으며,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5월 11일까지 계속 전투를 벌였다. 이외에도 독일군이 점령한 채 고립돼서 남은 지역인 미수복지구의 독일군이 한동안 더 버텼다. 심지어 덴마크 보른홀름 섬에 주둔한 독일군은 항복 후 4개월이 넘게 지나서야 항복을 했다. 물론 이들의 저항은 독일 본토가 모두 점령당한 이상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

교전 당시 소소한 에피소드 하나. 베를린 시내에서 교전이 벌어질 당시, 난데없이 코끼리와 얼룩말 등의 동물들이 시내를 뛰어다니는 일이 있었다. 교전 과정에서 베를린 티어가르덴 구역에 있는 동물원 우리가 부서져 우리 안에 있던 동물들이 뛰쳐 나온 것. 이를 소재로 한 오라마제작하기도 했다. 다만 전투 전에 동물들을 살처분하여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없는게 정상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논란이 되었다.

4. 여담

4.1. 소련군의 비행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한 뒤,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군 병사에 의해 수많은 약탈과 강간이 자행되었다. 그나마 처음 들어온 점령군 부대들은 군기가 엄한 편이라 별로 문제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뒤따라 잔존 병력을 소탕하며 들어온 후발대가 특히 사고를 많이 쳤다고 한다.[8]

그리고 독일군의 점령지에서 일어난 학살극을 직접 보고 들으며 진격해 온 병사들의 보복성 학살과 집단 강간도 일어났다. 독일 측 추정치로는 최대 2백만 명이 강간을 당했다. 또한 그 당시 태어난 아이들의 10% 가까이가 아버지가 소련군이라는 설이 있다.

사실, 소련군에서도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있었고 원만한 점령 통치와 위성 국가화를 위해 민심 잡기에 신경을 써야 함을 깨닫기에 종전 전부터 장병들의 사적인 약탈과 강간, 살인 등 범죄 행위를 금지하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시점에다가 적국의 수도라는 점에다가 그간 쌓인 게 많았다. 더군다나 타군에 비해 군기가 비교적 느슨한 편이었기에 소련군 장병들이 말을 안 듣는 경우가 많았고, 결국 헌병들을 동원해 강간범에 대한 현장 즉결 처분까지 감행하며 질서를 유지해나갔고, 시민들에게 식량 배급을 실시하며 흉흉한 민심과 소련에 대한 반감을 달랬다.

4.2.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

베를린 공략을 직접 맡은 부대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용명을 떨친 소련군 제62군이 개편된 제8친위군이었다. 스탈린그라드의 맹장 바실리 추이코프 대장(후에 원수로 승진)은 그 이후에도 이 부대를 맡아 2년간 계속 지휘했고, 이 부대는 결국 베를린 공략부대라는 명예로운 역할을 맡았다. 이 부대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익힌 시가전술에 매우 능했으며, 그 때 익힌 노하우를 적극 이용했다. 수류탄, 박격포, 기관총, 화염방사기를 갖춘 10여 명의 분대가 분대장의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판단하에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건물에 돌입하여 적을 소탕하는 작전이었다. 이 부대는 베를린에 눌러 앉았고, 독일 통일과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군으로서 남아 있다가 군사 협정 후 철수할 때까지 계속 주둔하였다.

© Roger Wollstadt (cc-by-sa-2.0) from

동베를린에 세워졌던 소련군 전사자 추모동상. 사진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T-34/76 1대가 함께 전시되어 있다. 독일 통일 당시 무트 콜 수상은 소련에게 이 동상을 절대로 철거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5. 대중문화

  • 독일 영화 몰락(Der Untergang, 2004)은 베를린 전투 중의 독일 내부사정을 잘 묘사하였다. 배우 브루노 간츠의 명연기를 통해 보이는, 파멸을 앞둔 히틀러의 심리묘사가 일품이다.

  • 독일 영화 를린의 여인은 당시 한 익명의 여성이 쓴 일기를 원작으로 한다. 소련군의 강간과 살기 위한 매춘 등이 묘사된 원작은 출간되자마자 독일과 여성에 대한 모독이라며 공격 받았고, 더는 출판되지 않았다. 작가의 사후에야 다시 재평가 받았다.

  • 베를린 1945(게르만의 기사에 수록)-유명 전쟁만화가인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작품.베를린 전투를 매우 자세하게 묘사했다. 핀란드 의용사단인 '노르트란트' 소속 무장친위대 대위 하르츠가 주인공으로 나온다.[9] 베를린 전투 막바지에 부하들은 탈출시키고, 국회의사당 옥상에 소련기를 세우려는 소련군들에게 달려들어 같이 떨어지며 자폭한다.

  • 1981년작 TV영화 'Le Bunker' 또한 마지막을 앞둔 히틀러를 그리고 있는데, 여기서는 안소니 홉킨스가 히틀러 역을 맡아 열연한다.

  • 소련 영화 베를린 함락(Падение Берлина, 1949)은 총 두 편으로 된 영화로서 베를린 전투뿐만 아니라 2차대전 전반을 다루고 있다. 물론 마지막은 베를린 함락으로 끝난다. 스탈린이 함락된 베를린에 비행기를 타고 와서 뛰어나오는 저글링들 앞에 신처럼 강림하는 마지막이 꽤 인상적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 영화를 들어 스탈린이 베를린에 온 적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스탈린은 포츠담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오긴 했다. 단, 비행기가 아니라 기차로 왔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되어 나온 영화라 소련군 장비나 복장 고증은 꽤 충실하다.
    그리고 나치 고위급(히틀러,괴링 등)은 찌질이로 묘사되고 있다.뭐 이건 솔직히 고증에 충실한것 같지만.(...)(특히 괴링. 여기서 괴링은 비단옷을 입고 다니고 집을 온통 미술품으로 도배하고 있다.)


    이 영화는 스탈린의 우상화가 극에 달했을 때 제작된 지라 스탈린이 거의 신처럼 묘사되는 선전 영화나 마찬가지였고, 스탈린을 다룬 영화의 단골 감독이었던 미하일 치아우렐리가 감독을 맡았고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OST 작곡을 맡는 등 소련 기준으로 최고 스탭들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그야 제작 거부하면 굴라그로 갈테니까 여담이지만 출연배우들이 실제 인물들과 매우 비슷하게 생겼다. 1편, 2편

* 영화 레지스탕스에서는 주인공이 베를린 공방전에서 히틀러 유겐트로 소련군과 싸운다.그러나 자신의 첫사랑은 눈앞에서 강간뒤 살해당했고 자신은 소련으로 끌려가 KGB 중위가 된다.

  •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2에서는 마지막 미션으로 나온다. 라이히스탁을 점령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지만 소련을 의도적으로 비하하는 게임 플롯상 영광에 찬 국기 게양 같은 건 없고 오히려 베를린 전투의 클라이막스가 되어야 할 국기 게양을 매우 허무한 일로 묘사하고 있어플레이어에게 감동을 전혀 주지 못한다는게 문제.[10] 라이히스탁은 중립건물 블록이 여럿 합쳐진 거대한 건물로 묘사되며, 그 앞에 펼쳐진 참호의 밭을 무시무시한 손실을 각오하고 뚫어야 한다. 특이사항이라면 라이히스탁 주변의 적을 정리하고 안심할 무렵 갑자기 티거가 2대 튀어나오는데, 미션 흐름상 대전차 전력을 그때까지 딱히 마련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확 쓸릴 가능성이 높다.

  • 콜 오브 듀티 시리즈에서는 콜 오브 듀티1콜 오브 듀티 : 월드 앳 워에서 베를린 전투가 묘사된다. 콜옵1에서는 소련군 마지막 미션이 제국 의사당 공격을 다루고 있다. 다만 여기서는 아쉽게도 주인공이 다른 병사가 의사당 건물에 소련기를 게양하는 걸 그냥 지켜보기만 한다.

    월드 앳 워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다룬 첫번째 미션을 제외한 모든 소련군 미션이 베를린 전투를 다루고 있다. 젤로 고지 전투부터 시작하여 베를린 시가전, 그리고 제국 의사당에서의 최후의 전투가 묘사된다. 그리고 이쪽은 주인공인 디미트리 페트렌코가 직접 의사당 옥상에 소련기를 꽂는다! 1하고 적절히 섞었으면 명장면일텐데

  • 유명 전투를 소재로 즐겨삼는 락밴드 새버턴의 노래 Attero Dominatus은 이 베를린 전투를 소재로 삼고있다. 1절에는 주코프가, 2절에선 스탈린이 손해가 얼마나 나든 상관말고 베를린을 차지해라!라고 말하는 가사가 나온다. 그 만큼 베를린은 소련에게 중요한곳이였다.



유투브에 올라온 Attero Dominatus의 매드무비. 이 노래의 성격을 매우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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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베를린_점령_사진_원본.jpg
    [JPG image (166.25 KB)]
    사진에서 오른쪽 아래 장교의 오른 손목이 좀 이상한데, 원래 시계가 하나 더 있던 것을 사진가가 높으신 분들에게 험한 소리를 듣고 나서 인민의 에어브러쉬로 지웠다. 점령군 군인이 시계를 두개 차고 있다는 건 '약탈'했다는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약탈했을 것이다. 덧붙여 깃발은 식탁보 3개를 이어서 현지에서 급조했다. 그외에도 몇가지 일화가 더 있는데, 실은 이오지마 전투성조기처럼 적기를 두번째로 걸고 있는 사진이며 #, 이 사진을 찍은 사진가 예브게니 할데이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도 취재했다. 그는 유대인인데, 나치 전범들을 위한 소련의 특별한 배려일지도. 참고로 위에 있는 병사는 그루지야 출신 밀리톤 칸타리야고 아래에 있는 장교는 러시아 출신인 미하일 예고로프다. 두 사람 모두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밀리톤 칸타리야는 이후 압하지야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 회의 의원을 지내다가 소련 붕괴 이후 그루지야-압하지야 분쟁 중 고향에서 쫓겨나 트빌리시로, 다시 모스크바로 이주하던 중 1993년 12월 27일 사망했다. 미하일 예고로프는 유제품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다가 1975년 6월 20일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 [2] 우상단에 서있는 두 인물은 사람이 아니라 조각상이다.
  • [3] 많은 자료들에서 젤로프라고 쓰고 있지만, Seelow에서 w는 o의 장음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발음되지 않는다.
  • [4] 많이 잡으면 7만명까지 나왔다고 한다.
  • [5] 총통사령부 힘러 연략장교 SS 중장
  • [6] 제3 충격군 소속 부대
  • [7] 정확히는 오데르-나이세 공세부터 베를린 시가지 소탕작전 완결까지의 총 전차 손실이 1997대, 항공기 손실이 997대이다.
  • [8] 대민 범죄는 대부분 주둔군이나 후발대같은 2선 부대에서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 [9] 장갑척탄병의 주인공 프란츠의 친구. 프란츠는 베를린 1945에서도 잠깐 등장한다.
  • [10] 나찌가 집권한 뒤로 쓰이지도 않던 건물이라는 식으로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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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4 01: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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