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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브 루스

last modified: 2015-04-10 16:13:04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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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개요
2. 일대기
2.1. 시작
2.2. 밤비노의 저주
2.3. 양키스 이적
2.4. 은퇴
3. 루스빠
4. 후일담
5. 어록
6. 통산 1위 기록
7. 기타 등등


스포츠 선수를 목표로 하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종목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과 비교해서 어떤 것이 가장 나은지, 어떤 것을 가장 좋아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 종목에 빠져들 수 없다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힘이 나오지 않습니다. 저요? 저는 공치는 걸 가장 좋아합니다. - 베이브 루스

이름 George Herman Ruth
조지 허먼 루스
출생 1895년 2월 6일(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사망 1948년 8월 16일(뉴욕주 뉴욕시)
국적 미국
포지션 투수, 외야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14년 자유계약(보스턴 레드삭스)
소속팀 보스턴 레드삭스(1914~1919)
뉴욕 양키스(1920~1934)
보스턴 브레이브스(1935)

1936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헌액자
득표율 95.13%(1회)

1923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지 시슬러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베이브 루스
(뉴욕 양키스)
월터 존슨
(워싱턴 세너터스)

뉴욕 양키스 영구결번
No.3

1. 개요

BabeRuth1920c.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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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e" Ruth. 1920년. Colored History.[1]

충격과 공포의 스탯

다음과 같은 수식어로 이분을 정의할 수 있다.

야구라는 스포츠의 화신.
역사상 최고, 최강의 야구 선수.[2][3]

지금까지도 야구의 신으로 추앙받으며야신, 베이브 루스의 등장으로 메이저리그는 일대 전환이 일어나며 홈런의 시대가 개막되었다.[4]

통산 타율 .342 출루율 .474 장타율 .690 (1위) OPS/조정 OPS 1.164(1위)/206(1위) 2873안타 714홈런 (3위)[5]

통산(10년간) 2.28 ERA 94승 46패 488탈삼진 1221.1이닝 107완투 17완봉 WHIP 1.159[6]

2. 일대기

2.1. 시작

1895년 2월 6일 메릴랜드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가족이 술집을 했기 때문에 자라는 환경이 대단히 좋지 않아 동네의 문제아로 손꼽히던 아이였다. 그러다 7살 때 들어간 성 마리아 실업학교(St. Mary's Industrial School)에서 선생으로 일하던 머사이어스 보틀리어(Matthias Boutlier) 신부를 만나 야구에 입문, 야구선수로의 인생을 시작한다. 남들보다 두 배는 되는 덩치 탓에 처음에는 포수를, 그 후 왼손 투수를 하게 된다.

이후 성 마리아 실업학교의 야구팀에서 뛰어난 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던 중 볼티모어 오리올스(Baltimore Orioles)[7]의 잭 던 감독의 눈에 들어 1914년 2월부터 이너 리그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 때 베이브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8]

투수 베이브

그리고 1914년 7월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좌완 투수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승승장구하나 그 당시 남다른 타격의 재능을 보여 마침내 타자로 전향했다. 1918년 시즌, 워낙 독보적인 타격 재능을 숨기지 못하고 투수로서 13승을 올림과 동시에 타자로서도 단 95경기만을 뛰고도 11개의 홈런을 쳐내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에 등극하게 된다. 당시 최고의 좌완 투수로서 투수로서의 기간 동안 승률 1위(.659), 피안타율 1위였다(9이닝당 7.07개). 같은 기간 아메리칸 리그에서 이거랑 비슷한 성적을 낸 사람은 단 한 명, 월터 존슨뿐이었다.[9]

야구 기자 제이슨 스타크는 역사상 가장 과소평가된 좌완 투수 1위에 베이브 루스를 선정했다.[10] 레드삭스 시절 월드시리즈에서 1916년에는 14이닝 1실점 완투승, 1918년에는 9이닝 완봉승, 8이닝 2실점으로 3경기 선발 등판해 31이닝을 던지며 3승 평균자책점 0.87을 기록했는데 이것은 월드시리즈 역사상 4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레너드 코페트는 당시에 지명타자 제도가 있었다면 하루는 선발투수로 등판, 이후 휴식일에는 지명타자로 출장해 400승 800홈런이 가능했을거라고 예측했다.(…)

2.2. 밤비노의 저주

그러나 1920년 1월, 레드삭스의 구단주 해리 프레이지(Harry Frazee)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투자했다가 본 손해를 갚기 위해[11] 루스를 12만 5천 달러에 뉴욕 양키스현금 트레이드했다. 이후 베이브 루스의 미칠 듯한 홈런 행진으로 양키스는 20세기 최고의 명문 팀으로 거듭났지만 보스턴은 1918년 월드시리즈 우승 이후로 2004년까지 86년 동안 월드시리즈에서 단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이 루스의 애칭을 따서 지어낸 것이 그 유명한 '밤비노의 저주'다.

밤비노는 이탈리아어로 '어린애, 애송이'에 해당한다. 루스가 본명으로 불리지 않고 babe라 불리는 애칭에다가 당시 양키스 외야 관중석의 다수를 이탈리아계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은 이탈리아아 식으로 그를 밤비노라고 불렀다.[12]

…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1970년대까지 '밤비노의 저주'란 말은 언론계나 야구계 어디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처음으로 루스가 레드삭스를 상대로 저주를 걸었다고 대중들이 인식한 것은 1986년 월드시리즈에서 레드삭스가 믿을 수 없는 알까기 어메이징을 당하고 나서 뉴욕의 한 스포츠 칼럼니스트가 신문에 기고한 자신의 글에서 '밤비노의 저주'란 말을 사용한 이후부터로, 이것이 밤비노의 저주란 말이 널리 퍼지게 된 계기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 전까지는 루스의 이적은 단순히 돈이 급했던 보스턴 구단주의 뻘짓 정도로 인식되는 정도. 사족으로 베이브루스의 케이스는 트레이드가 아니라 엄밀하게는 그저 '팔렸다(sold)'라고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1920년 양키스로 갔을 당시 1월 6일자 보스턴 포스트의 기사 제목은 'Babe Ruth sold to the Yankees(베이스 루스 양키스에 팔리다)'이기도 했고. 관련 동영상, 마지막 1등 내용 참조.

2.3. 양키스 이적


루스는 양키스로 이적한 후 그야말로 대폭발, 이적 첫 해에 홈런 54개를 기록하며 당시 기준으로 전년해에 기록한(타자로써 풀타임 첫해) 29개의 메이저리그 홈런 기록(루스 이전까지 메이저 공식기록은 27개 아메리칸리그 공식기록은 24개...풀타임 첫해 메이저기록 갱신 2년째 25개 추가...)을 재경신했다. 그리고 당시까지만 해도 약체였던 양키스가 월드시리즈를 제패하고, 나아가 메이저리그 최고의 구단으로 만든 것은 루스였다. 루스의 재능은 매우 뛰어났던지라, 전성기 때에는 도루도 자주 했었던 호타준족이었다. 하지만 1924~25년엔 자신의 재능을 믿고 연습을 게을리 하며 지나친 음주로 자신을 망쳤던 시기도 있었다. 이때(1925년 그리고 규정타석 미만이다.) 홈런왕을 한 차례 내줬는데, 홈런왕은 33개를 친 팀 동료 밥 뮤젤이었다. 그 당시 루스에게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늘 따라다녔으나 1926년부터 마음을 독하게 먹고 다시 연습을 시작하여 슬럼프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1927년에는 당시로서는 말도 안되는 시즌 60홈런(리그전체의 15%에 해당한다.)을 기록했고[13], 루 게릭과 함께 살인타선(murderers' row)을 구축하며 양키스 전성기의 상징이 되었다. 이 당시 60홈런이 얼마나 대단한 기록이었는가 하면, 양키스가 속한 아메리칸리그의 팀홈런 2위가 56개를 기록한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였다. 내셔널리그 홈런왕은 루스의 딱 절반인 30개를 때려낸 핵 윌슨[14]이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신체능력과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감독이었던 매카시와 대립이 불거지기 시작, 1934년에 커리어 로우를 기록하자 양키스는 루스를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시켰고 거기서도 변변한 성적을 남기지 못하고 시즌 도중 은퇴했다. 메이저리그에서 총 22시즌을 뛰며 통산 714개의 홈런을 때려내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루스의 등장은 그때까지만 해도 안타와 도루가 중심이 되었던 스몰볼 야구가 홈런 등 장타 중심의 빅볼 야구로 바뀌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의 등장 이후로 로저스 혼스비, 핵 윌슨, 지미 팍스, 루 게릭 같은 20~30년대를 풍미한 슬러거들이 등장했음은 당연한 결과다.

2.4. 은퇴

은퇴 후 감독을 하려 했으나, '스스로를 컨트롤 하지도 못하는 인간이 팀을 감독한다고?'라는 평이 대다수라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선수 시절에 개인 관리가 잘 안되어 술도 자주 마시고 했으며, 말년에 보스턴 브레이브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할 때도 성적이 안좋았다. 은퇴 후에는 잠시 브루클린 다저스의 코치를 했지만 뭐…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역시 야구 실력과 개인 수양은 별개의 문제다. 조 디마지오데릭 지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섹느님의 여자 문제는 별도로 따지자?

이후 명예의 전당에 입성된다. 최초의 5인중 한명.


1948년 8월 후두암으로 타계했다. 위의 사진은 루스가 타계하기 직전인 같은 해 6월 양키 스타디움 개장 25주년을 기념하는 초청행사에서 찍힌 사진인데, 이것이 루스가 마지막으로 팬들 앞에 모습을 보인 자리였다. 루스의 뒤쪽에서 촬영하여 그의 상징과도 같은 등번호 3번과 그를 보기 위해 찾아온 수만명의 관중들을 함께 보여준 것이 포인트. 참고로 이듬해인 1949년 퓰리처상 보도사진 부문을 수상했다.

3. 루스빠

워낙 남긴 기록이 엄청나다 보니 미국 내 보수적인 백인들은 자연스레 루스 빠돌이[15]가 되었고, 한때 루스의 홈런 기록을 넘어서려는 선수들에게는 온갖 원색적인 비난과 협박이 쏟아지기도 했다.

로저 메리스의 시즌 61호 홈런.

이에 대한 대표적 사례가 바로 로저 매리스. 로저 매리스가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61개로 홈런 신기록을 세웠을 때,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루스는 151게임 만에 60개 쳤는데, 너는 161게임 만에 61개 쳤으니까 무ㅋ효ㅋ'(루스의 친구였던 포드 프릭 커미셔너-mlb회장격-은 공개적으로 155경기 이내에 쳐야 유효하다고 선포했다.)라고 개드립을 날렸고, 결국 그의 기록에 딱지를 붙였다. 61*로. 미키 맨틀과 로저 매리스에 관한 영화 제목도 정확히는 '61'이 아니고 '61*이다. 결국엔 신기록으로 공인되어서 별표는 떨어졌지만 (1993년) 정작 매리스는 자기 기록에서 별표가 떨어지기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리고 1974년에 행크 애런이 통산 714홈런 기록을 넘어설 땐 인종 문제까지 들어가면서 루스 빠돌이들이 하루에도 수천 통의 살해 협박 편지를 보냈다. 애런이 715번째 홈런을 쳤을때 마운드를 돌던 중 2명의 관중이 난입하는데, 경기장에서 지켜보던 아버지는 그 관중이 애런을 칼로 찌를까봐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 이에 루스의 아내인 클레어 매릿 루스(1897~1976)는 남편 기록이 깨지는 걸 남편이 가장 기대할 것이라면서 이런 협박은 그만두라는 말로 응수했다.

또한, 일본에서도 인기가 많아서, 그를 포함한 메이저리그 올스타를 초청하여 일본 올스타팀과 함께 친선경기를 열기도 했으며[16][17],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일본군에게 "천황 폐하께 저주를"이라고 도발하자, 일본군이 이에 대흥하여 "베이브 루스에게 저주를"이라고 맞받아친 일화도 유명하다. 하지만 일본군이 저주를 받았지 참고로 메이저리그 올스타와 친선경기를 가졌던 일본 올스타팀은 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모체가 된다.

4. 후일담

2000년대 들어 마크 맥과이어, 새미 소사, 배리 본즈 등의 홈런쇼로 루스도 점점 묻혀가나 했으나, 이들의 기록이 약물 복용으로 이루어졌다는 의혹이 짙어지면서 다시 '진정한 홈런왕은 루스와 애런이다'라는 여론이 강해지고 있다.[18]

그가 죽은 1948년의 이듬해인 1949년부터 월드시리즈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선수에게, 2007년부터는 월드시리즈뿐만이 아니라 포스트시즌을 통틀어 가장 활약한 선수에게 베이브 루스 상(Babe Ruth Award)을 수여하고 있다. 베이브 루스는 월드시리즈 통산 투수로서 3경기 31이닝을 던지며 3승 평균 자책점 0.87, 타자로서 타/출/장 326/467/744, 15홈런 33타점을 기록하였으므로 투타 통틀어 최고의 선수였던 것을 기리는 점이다. 월드시리즈 MVP와 다른 점이 있다면 월드시리즈 MVP는 MLB 사무국에서 주는 거고, 베이브 루스 상은 미국 야구 기자 협회(BBWAA)에서 수여한다는 것이 차이점. 또한 1947년 4월 27일은 후두암으로 고생하던 베이브의 쾌유를 위해 베이브 루스의 날로 개최되었다.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이걸 읽어보자. 참고

5. 어록

앞서 언급했듯이 험하게 자란 베이브 루스인지라 어록 역시도 험한 것이 많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돈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이 벌어들인 이득의 일부를 받아야 합니다. 야구가 은행이나 보드빌 쇼랑 다르다고 하지 말라고요. 말하건대 이건 비즈니스입니다. 고상한 감정따위 없어요. 잡소리 그만합시다."
ㅡ 1922년, 5만 2천 달러를 요구했을 때.

"제기랄. 대통령은 그 연봉 받고서 한 일이 뭐요? 내 성적은 대통령보다 훨씬 낫지 않소?"
ㅡ 1930년, 연봉 8만 달러가 너무 많지 않냐는 비난에 응답하면서. 당시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의 연봉이 7만 5천 달러였고, 미국은 막 대공황의 불황으로 접어든 상태였다.

"모든 메이저리거의 아내와 아이들은 식사하기 전에 '루스에게 행운이 있기를'이라고 기도해야 한다"
ㅡ 팀 동료였던 웨이트 호이트[19]

"그래, 그 놈은 또라이긴 하지만 당연히 (공을) 칠 수 있다구. 하느님 맙소사, 그딴 녀석이 (공을) 칠 수 있다니!"
ㅡ 1950년 7월 12일, 타이 콥을 두고 한 말. 물론 신문에 나갈 때는 검열 처리되었다.[20]

"야구가 아니었다면 저는 교도소나 공동묘지에 있었을 겁니다. (후략)"
ㅡ 1996에 프레드 리브(Fred Lieb)가 쓴 "내가 알고 있는 야구(Baseball as I Have Known It)"에서 발췌된 말. 당연하지만 거기서 일한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되었을 거라는 말이다.

"애송이, 충고 하나만 해 줄까. 놈들(기자들)이 너에 대해 좋게 쓰든 나쁘게 쓰든 아무것도 믿지 마. 두 번째, 송구(getting?)가 좋을 때 돈을 벌더라도 그걸 억지로 얻으려고 고생하지는 말고. 그리고 수표를 너무 많이 끊지 마!"
ㅡ 레드 그레인지에게 충고를 했을 때.[21]

"저는 최대한 휘두르고, 최대한 공을 맞추려고 합니다. 권투에서 당신의 주먹이 사람을 때릴 때는 대개 멈추게 되지만, 손을 멈추지 않는다면 어렵게나마 맞출 수 있습니다. 저는 같은 식으로 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배트를 단단히 잡을수록 공을 잘 맞출 수 있으며 멀리 날아가게 합니다. 전 제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세게 휘둘렀습니다. 전 세게 치거나 크게 놓쳤습니다. 전 가능한 한 크게 사는 걸 좋아합니다."

"스트라이크를 먹을 수록 나는 다음 번 홈런에 가까워진다."

"정말 감사합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여러분 들으시기에 제 목소리가 영 좋지 않지요. 뭐 저도 썩 좋은 느낌은 아니랍니다.[22] 우리네들의 야구경기는 어린시절로부터 시작되지요. 아주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말이에요. 그 어린 아이가 자라면서 야구경기란 어떤 것인가를 배우고 또 이렇게 선수가 되어 팀들을 대표해서 뛰는 다른 이들의 모습을 관람하러 경기장을 찾기도 하지요. 제 생각에 이 세상에서 진정한 운동경기란 야구가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아이들에게 풋볼공이나 야구공같은 것을 던져 주고 금세 자연스레 운동선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곤 하지요. 하지만 야구에서 그런 것은 통하지 않아요. 야구는 예닐곱 살 시절부터 저 아래 바닥에서 시작해야만 합니다. 열 네다섯 살이 되기까지 기다려서는 안되지요. 어렸을 때부터 야구와 함께 자라나야 합니다. 만약 정말 열심히 한다면, 여기 함께한 이들처럼 마침내 꼭대기의 자리에까지 도달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요. 오늘 저에게 정말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셨는데 이렇게 모두에게 감사의 표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기쁩니다.(Thank you very much, ladies and gentlemen. You know how bad my voice sounds. Well, it feels just as bad. You know, this baseball game of ours comes up from the youth. That means the boys. And after you're a boy and grow up to play ball, then you come to the boys you see representing clubs today in your national pastime. The only real game in the world, I think, is baseball. As a rule, people think that if you give boys a football or a baseball or something like that, they naturally become athletes right away. But you can't do that in baseball. You got to start from way down, at the bottom, when the boys are six or seven years of age. You can't wait until they're 14 or 15. You got to let it grow up with you, if you're the boy. And if you try hard enough, you're bound to come out on top, just as these boys here have come to the top now. There have been so many lovely things said about me today that I'm glad to have had the opportunity to thank everybody.)"
ㅡ 1947년 4월 27일 양키 스타디움에서의 고별사 중.

6. 통산 1위 기록

  • 통산 장타율 (.690)
  • 통산 OPS (1.164)
  • 시즌 득점(1921, 177점)
  • 시즌 총루타(1921, 457루타)

7. 기타 등등

  • 일명 '예고 홈런(Called Shot)'이라는 퍼포먼스가 유명하다. 1932년 10월 1일, 리글리 필드에서 열린 시카고 컵스와의 월드 시리즈 3차전에서 4대 4로 동점인 상황에서 상대 투수 찰리 루트를 상대로 홈런을 친다. 당시 상황은 투스트라이크에서 배트로 센터 펜스를 가리킨 후 컵스 포수 가비 하트넷[23]에게 "홈런을 날리는 데는 공 하나이면 충분하다."는 말을 한 후 149m 홈런을 쳤다고 한다.[24]

    그러나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며, 당시 정황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가장 신빙성 있는 말은, 경기 전에 그런 내용의 장담을 하긴 했지만, 실제로 배트로 센터 펜스를 가리키거나 한 적은 없었다는 것. 기자가 별 생각없이 끼워넣은 일화였다는 설이 대세다. 그러나 루스의 뒤에서 타격을 준비중이던 게릭은 보았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상대선수가 루스를 약올리는 말을 해서 홧김에, "네 머리를 날려버리겠다."라는 말과 함께 배트로 상대선수를 가리킨 것 뿐인데, 우연히 타구가 그 선수 뒤쪽으로 날아가 홈런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특히 병상에 있던 어린 팬과의 대화 후 예고 홈런을 날렸다는 설은 만들어냈다는 의혹이 짙으며, 주변인들은 말이 많았지만 정작 베이브 루스 본인이 남긴 말이 별로 없었기에 홈런왕의 신화성을 부각하는 장치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도 어린애들에게는 관대했던 만큼, 미담으로서 아직도 회자되는 야구계의 전설이다.

  • 실제로 베이브는 어릴 적에 자신이 힘든 소년기를 보낸 만큼 아이들을 많이 챙겼다고 한다. 선수가 된 이후에도, 그만둔 이후에도 종종 아이들을 찾아서 야구하는 법을 알려주거나 아이들을 돕는 재단을 만들기도 했다. 물론 자신이 자랐던 성 마리아 실업학교도 예외는 아니었고.

  • 양키 스타디움이 좌타자이던 그를 위해 우측 펜스도 짧게 지어주고, 우익수 쪽에 차양막도 쳐줬다. 하지만 원정 경기에서 우익수 쪽에 햇빛이 비치면, 좌익수였던 밥 뮤젤이랑 자리를 바꿔서 루스가 좌익수로 뛰었다.

  • 베이브 루스의 기록적인 홈런의 원천은 첫째가 라이브볼의 도입, 두번째는 당시의 타격 기본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배터박스 앞에서 무게중심을 최대한 앞으로 당기는 파워스윙(브라이스 하퍼문서의 타격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세번째는 놉(knob)이 있는 배트를 최초로 사용한 것. 배트를 길게 잡은채 풀스윙해도 배트가 손에서 빠지지 않게 해주는 놉 덕에 루스는 마음껏 파워풀한 스윙을 할 수 있었고 라이브볼 최고의 홈런타자가 될 수 있었다[25].


  • 야구계의 전설이다보니 1992년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베이브'가 제작되었다. 주연은 굿맨. 다만 구글에서 'babe movie' 키워드로 검색하면 동명의 새끼돼지가 나오는 영화가 더 많이 걸린다. 사실 베이브 루스의 전기 영화는 "The Babe"로 돼지 영화(..)와는 제목이 다르다. 당연히 the를 넣어서 검색하면 제대로 된 검색결과가 나온다.

  • 미국 ESPN에서 베이브 루스의 기록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 결과를 내놓았는데 베이브 루스가 현역으로 뛴다면 13년 계약시 현재 환율로 계산하면 10억 6천만 달러를 받았을 것이라는 분석이다.[26]

    뒤뚱뒤뚱 월터 존슨과의 맞대결
  • 안타를 치고 1루를 향해 뒤뚱뒤뚱 걷는 모습이 꽤나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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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옛 흑백사진을 컬러화 하는 작업을 말한다.
  • [2] 이와 비슷한 포스를 내는 인물로는 마사장님이 계신다. 농구를 잘 모르는 사람도 마사장님은 잘 안다. 또한 커리어면에서는 배리 본즈라는, 그에 필적하는 또 하나의 괴물이 있지만 이 사람은 씻을 수 없는 주홍글씨를 뒤집어 쓴 사람이다.
  • [3] 그리고 약물 본즈를 인정해도 야수 베이브 루스라면 몰라도 야구선수 베이브 루스를 능가하지는 못한다. 루스에게는 투수 업적이 존재하기 때문에.
  • [4] 일각에서는 1920년부터 도입된 라이브볼 때문에 루스가 아니더라도 홈런의 시대가 왔을 것이라 주장하지만 그들도 루스가 그 시작을 훨씬 앞당겼다는 것만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데드볼 시대 말기인 1919년에 29홈런을 쳤는데 그 전까지 다른 선수들은 기껏해야 두 자릿 수 홈런을 겨우 쳐낼 지경이었으니...
  • [5] 1위는 배리 본즈(762), 2위는 행크 애런(755)
  • [6] <야구란 무엇인가>의 저자 레너드 코페트는 "베이브 루스의 시대에 지명타자 제도가 있었다면 400승 800홈런을 기록하고 투수와 타자 양쪽으로 모두 명예의 전당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라고 했다.
  • [7] 현 메이저 리그 구단인 볼티모어 오리올스와는 관계없다.
  • [8] 초창기엔 멸칭이었다. 베이브가 처음 들어가게 된 팀이 오리올스 팀이었는데, 그 때는 뭘 모르는데다 아직 촌티를 못 버리고 감독만 따라다녔기 때문에 "어린애"라고 불리게 된 것.
  • [9] 심지어 베이브루스는 1916년에 월터존슨을 제치고 아메리칸 리그 방어율 1위를 한 적도 있다.
  • [10] 과대평가거품된 좌완으로는 샌디 코팩스 선정.
  • [11] 당시 보스턴의 새로운 홈구장인 펜웨이 파크를 짓느라 빌린 공사비를 변제하려고 루스를 팔지 않았겠느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펜웨이 파크는 당시로서는 거금인 65만 불이 들어가긴 했으나 1912년에 완공되어 있었고, 프레이지는 그 후인 1916년에 구단을 현금박치기로 50만 달러에 전 구단주로부터 사들인 상태였다. 1918년 보스턴의 우승을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프레이지는 뮤지컬 쪽으로 한눈을 팔았다가 망하면서 단번에 파산 위기에 처해버렸고, 루스의 직접적인 트레이드 사유는 이 때문이었다.
  • [12] 수정 전까지 베이브 루스가 이탈리아계라서 '밤비노'로 불렸다고 적혀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엄연히 루스의 부모(George Herman Ruth, Sr., Katherine Schamberger) 둘다 독일계고 당연히 루스 역시 독일계다. 즉, 그의 밤비노 명칭은 그의 혈통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베이브 루스는 같은 독일계인 루 게릭과 함계 양키스내 독일계 미국인의 상징적 존재였다.
  • [13] 이 기록은 1961년 로저 매리스가 61홈런을 치며 갱신, 또한 이 당시에는 그라운드에 떨어져도 튕겨 담장밖으로 넘어가면 홈런으로 인정되었지만 루스의 홈런 중 바운드 홈런은 없었다. 오히려 당시엔 끝내기 홈런을 안타로 처리했는데 이때문에 홈런 1개를 손해봤다.
  • [14] 20년대 후반을 빛낸 강타자였지만 자기관리 실패로 인해 일찍 은퇴한 비운의 타자로, 1930년 역대 단일 시즌 최다 타점 기록인 191타점(...)을 기록했다.
  • [15] 그런데 루스는 백인이지만 두툼한 입술에 흑인같은 모습이라서 상대 선수들이 '검둥이가 흰칠하면 저놈이다'라며 야유했다. 루스와 사이 나쁘기로 유명한 타이 콥 같은 경우는 '너 정말 백인 맞냐?' 비꼬는 바람에 루스는 '나를 개나 돼지라고 하면 모를까 검둥이라고 하면 죽여버린다'라고 응수했다고.
  • [16] 이때 베이브 루스는 굴욕을 겪었는데, 바로 대학생 선수에게 두번이나 삼진을 당했기 때문(...)
  • [17] 참고로 일본측에서 유일하게 빛났던 선수가 있는데 바로 일본 사와무라상에 이름이 붙여진 사와무라 에이지였다.
  • [18] 하지만 애런 역시 자서전에서 암페타민 복용을 시인하기도 했다. 그리고 루스의 경우 양의 고환 추출물을 주사했다는 말이 있으니...현재 확인되는 영문 출처는 여기.
  • [19]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였던 루스의 연봉은 매년 폭등했는데 그것은 자연스럽게 메이저리거 선수 전체의 연봉 상승을 불러왔었다.
  • [20] 여담으로 1961년, 타이 콥이 죽기 전에 쓴 자서전 "야구에서의 나의 생애 : 진정한 기록(My life in Baseball : The True Record)"에서 16장 "베이브와 나"에서에서 "솔직히 난 그가 -과학적인 경기에서부터 그의 강력한 강타의 확장까지- 야구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평가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야구를) 타고났으며 진실한 사람이었다. 살면서 그렇게 사랑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많은 아이들을 분발시킨 사람도 없었다. 나는 그의 놀라운 능력에 존경을 표한다.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며 경이를 표했다.
  • [21] 실제로 베이브 루스는 앞서 본 대로 슬럼프가 잦았는데 이를 가속시킨 사람들이 바로 기자들이었다. 베이브가 한 번 실수하면 "그렇습니다, 양키스는 망했습니다."라는 식으로 깎아내리기에 바빴던 것. 이 때문에 베이브는 한 스포츠 기자를 죽이려 들기도 했는데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 [22] 후두암으로 사망하기 불과 열 몇 달 전이었던 이 시기, 그는 이미 목소리를 잃어 인공후두를 사용하고 있었다.
  • [23] 1938년 시즌 마지막 경기에 친 끝내기 홈런인 '황혼의 홈런'으로 유명하다.
  • [24] 여담으로 홈런을 맞은 투수는 다음날 선발로 나와 루스를 빈볼로 맞추었다고 한다.
  • [25] 물론 이건 결과적인 분석이다. 애초에 베이브 루스가 홈런왕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시점은 데드 볼 시기의 말기이다. 라이브볼 시대여서 루스가 유명해졌느냐 루스가 유명해져서 라이브볼 시대가 열렸느냐에 대한 논란도 아직 끊이지 않고 있다.
  • [26] 이는 WAR 1당 600만 달러로 쳐서 계산했으며 최근 다년 계약의 일반적인 현상인 연간 연봉 5% 상승 등을 고려해 산출했다. 이 계산법으로 치면 메이저리그 통산 660홈런을 친 윌리 메이스는 13년 총 9억3천100만 달러, 배리 본즈는 13년 총 9억1천600만 달러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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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0 16: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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