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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공화국

last modified: 2015-11-22 23:26:15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역사
3. 남베트남 부패의 역사
4. 베트남 전쟁
5. 멸망
6. 숙청
7. 왜 망했는가
7.1. 정치적, 역사적 문제
7.2. 전략적 문제
7.3. 지리적 문제
8. 남베트남의 해외 후예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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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공화국의 국기인 당직부관 황저삼선기.
카탈루냐 깃발 닮았다. 그쪽은 줄이 네 개지만

베트남 공화국(Việt Nam Cộng hòa, 비엣남 꽁 호아, 越南共和). 북베트남이라 불리던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대립하며 현 베트남의 남부에 존속하던 국가. 간단하게 남베트남(Nam Việt Nam)이라고도 불린다. 근데 본래 참파땅이었다.[1]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월남(베트남)의 정통 정부로 간주했기 때문에 남베트남을 월남이나 자유월남이라고 불렀고, 북베트남(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월남(베트남) 독립 동맹'의 정권이라 하여 월맹(베트민, Viet Minh)이라고 불렀다. 현재도 베트남 전쟁 관련 자료 등(특히 국방부에서 발간한 것들)에서 당시 명칭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베트남이 통일한 이후부터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베트남이라고 부른다.

2. 역사

북위 17도 선을 경계로 현재의 베트남 남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도는 지금은 호치민 시로 개명된 사이공(Sài Gòn, 柴棍. 중국에서는 西貢이라고도 한다). 국가는 청년행진곡.

베트남에는 원래 프랑스의 괴뢰 정권인 베트남국이 들어서 있었다. 베트남국은 바오다이(保大) 황제[2]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친프랑스적인 행보로 사람들의 지지가 옅어지자 반프랑스 성향의 응오딘지엠을 총리로 앉혔다. 이 점 때문에 호치민도 초기에는 응오딘지엠에게 손을 내밀기도 했다.

그런데 1956년 10월, 응오딘지엠은 국민투표를 통해 바오다이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선거 쿠데타로 베트남국을 폐지하고 베트남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가 있었으니...공화정을 세운 것까지는 좋았는데, 베트남국의 무지막지한 부패를 베트남 공화국이 그대로 계승하고 만다.

3. 남베트남 부패의 역사

초반에는 미국의 막대한 원조와 풍부한 쌀 수확 덕분에 북베트남보다 경제력이 앞섰지만 군인들이 대체로 무능하고 정치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특히 초대 대통령이던 응오딘지엠의 병맛스런 정치 때문에 더 미칠듯한 상황이 벌어졌다. 극에 달한 부정부패에다가 공직을 맡을 사람을 뽑는 기준이 '친인척이냐? 아니냐?' 혹은 '가톨릭을 믿는가?'였으니 말 다했다. 참고로 이 당시 남베트남의 종교 비중은 불교 신자가 90% 이상.

바베큐 애호가 쩐레쑤언

1963년 5월에 접어들어 지엠 정권의 불교 탄압에 분개한 베트남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고승인 틱꽝득(Thích Quảng Ðức, 釋廣德)소신공양으로 세계에 베트남의 상황을 알리고자 했으나 응오딘지엠 일당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으며, 응오딘지엠의 동생인 응오딘뉴(Ngô Đình Nhu, 吳廷瑈)의 아내이자 그 역시 부패의 핵심 축 중 하나였던 쩐레쑤언(Trần Lệ Xuân, 陳麗春)[3]은 매스컴에 대고 이런 식의 소리를 지껄이는 병크를 작렬시켰다.

"그깟 중놈들이 한 게 뭐가 있어서요? 고작 자기들 중 한 사람 바베큐로 만들어 버린 것 말고."
(What had the buddhist leaders done comparatively? The only thing they have done: They have barbecued one of their monks.)

쩐레수언의 발언을 접하자 그동안 쌓인 대중의 분노가 전국적인 규모로 폭발했으며, 여론의 분위기를 보고 드디어 때가 왔다고 판단한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 장군과 고위 군사 사령관들이 작당하여 그해 11월 1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응오딘지엠 정권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응오딘지엠과 동생 응오딘뉴는 도망쳐서 교회에 숨어있다가 다음날 발견되어 사살당했다. 이 쿠데타는 사실 CIA의 지원을 받았다고 하며, 총 42,000달러나 되는 뇌물을 건넸다고 한다. 또한 응오딘지엠 정부의 저런 망언에 남베트남을 지원하던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조차 분노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 감안하면 CIA가 쿠데타를 지원한 것은 단순한 독단이 아니라 미국 정부도 못해도 묵인한 것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쿠데타 지원 자체를 행정부 차원에서 지시했을지도 모른다.

응오딘지엠이 암살당하자 이번에는 장군들 간에 권력다툼이 시작되어하라는 전쟁은 안하고... 쿠데타가 줄을 잇다가 1965년에 응우옌반티에우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다소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막장을 다시 시작하였다. 자기 힘으로 전쟁을 치르겠다는 진지한 태도를 가지지 않고 미군의 전투력과 쇼미더머니 신공에 지나치게 의존한 탓에 독자적인 전쟁수행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여담으로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재정적자, 무역적자, 인플레이션의 3박자가 겹치면서 경제도 점차 안습이 되고 농촌지역의 상당수가 베트콩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자 쌀 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전락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정치적 혼란과 여러 이유[4]로 병역기피가 만연하였으며 이 때문에 군대는 자주 농촌 마을들을 수색하여 징병을 해야했다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수도인 사이공과 메콩델타 일대만 하더라도 남북 베트남 분단 이전에는 오히려 베트남 공산주의자들 사이 단일 최대의 규모를 자랑했던 사이공 소비에트와 이를 지지한 빈농들이 다수인 지역이기 때문에 월맹이 50년대의 토지 개혁을 둘러 싼 혼란을 극복하고 60년에 본격적인 해방전쟁을 선포하자 순식간에 수도권은 최전방이 되어버리고 60년대 중반 쯤에는 아예 나라 전체가 베트콩에게 넘어갈 뻔 하다가 미국이 이제까지 해 왔던 간접 지원에서 아예 대규모 지상군 파병을 하면서 겨우 살아 남았다. 그러나 응오 딘 지엠이 무능하고 광범위하게 미움을 샀지만, 미국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국정을 추구할 만큼 그릇과 세력이 있었던 인물이 남베트남에는 지엠 뿐이었던 것도 사실이기에 이 시점 이후로는 그나마 미국에게 받아 먹을 건 받아 먹으면서도 독자적인 정책을 시도하던 지엠 시절과 달리 북베트남측에서 선전하는 그대로 아예 69년 파리 평화 회담 같은 전쟁의 경과에 직결 되는 정책 형성 과정에도 아예 무시 당하는 등 전형적인 괴뢰 국가로 전락해 버렸다. 결국 남베트남은 존립 시기 내내 결코 정상적이고 제대로 작동하며, 자립 가능한 행정 체계를 새우지 못했다.

4. 베트남 전쟁

5.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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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궁(現 통일궁) 정문을 쳐부수고 들어오는 베트콩군(1975년 4월 30일 11시 30분 사이공)

결국 1973년 1월에 파리 협정을 체결한 미국이 전쟁에서 손 털고 떠나버리자 베트남 공화국은 완전히 새 되고 말았다. 1975년 봄에 시작된 북베트남의 막판 공세에서 남베트남군은 쑤안록에서 치열하게 싸운 18사단[5] 같은 일부 부대의 영웅적인 항전을 제외하면 일패도지,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 병합되고 말았다. 미국이 철수하면서 엄청난 군사지원을 해줘서 일시적으로 세계 순위권의 군사력을 가질 수 있었는데도 패퇴하고 만 것이다.

당시 베트남 공화국은 미국이 준 장비만으로도 공군력 세계4위, 총 병력수 1백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 순위권의 군사력이란 것은 잘 알고보면 빈 껍데기였다. 겉은 번드르르했지만 안은 엉망이었다. 미국이 준 무기의 규모는 정말 세계 순위권에 들 수준이었으나, 정작 그 순위권에 드는 규모의 무기를 굴릴 돈과 물자는 주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도 일부러 안 준게 아니라 베트남 전쟁의 수렁 때문에 경제난이 심각해서 주려고 해도 줄 수 없었던 것이지만.(…) 이런 상황이다보니 최종공세 당시 남베트남군은 연료와 부품이 없어 비행기도 제대로 띄우지 못했고 탄약의 부족으로 전투에도 제한을 받았다. 탄약 아껴쓰라는 명령이 내려올 지경이었다. 전술적으로도 미국식 전술과 미군의 지원에 너무 의지하게 된 것이 약점이 됐다. 미군만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군대가 미군처럼 싸우는데 익숙해져버렸으니.

게다가 남베트남은 게릴라를 잡으려고 전군을 국토에 넓게 분산시키는 잘못을 저질렀고, 부족한 병력을 무리하게 넓게 펼치다보니 전국토의 치안 유지 능력이 악화되었다. 결국 전략을 수정하여 주요 거점을 안전하게 확보한 다음 토벌에 나서기로 결정하고 대대적인 부대 재배치를 감행하였으나, 그 첩보를 입수한 북베트남이 부대 재배치가 이루어지는 빈틈을 노려 침공해왔다. 방어체계를 제대로 굳히기도 전에 전격전을 당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부패하고 친서방주의의 베트남 공화국에 이미 민심은 떠나 있었다. 이로 인해 개전 초기에 1백만이 넘는 병력 중 반 이상이 탈영을 하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다. 북베트남의 지도자였던 호찌민은 생전에 베트남 공화국을 정복하는데 3년 이상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죽은지 몇년 뒤인 1975년 4월 30일 개전 1달 만에 정권이 무너졌다. 이후 남베트남에는 북베트남의 괴뢰 정권인 '남베트남 공화국(Cộng hòa Miền Nam Việt Nam)'이 세워져 이듬해인 1976년 7월 2일 북베트남과 통합하여, 베트남 통일을 이루었다.

국민의 지지를 못 받는 정부는 허무하게 무너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

6. 숙청

같은 해 같은 달에 들어선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 정권 치하에서 악질 공산주의자들이 설쳐서 진짜 200만명이 처형되거나 굶어죽은 것에 비한다면 규모는 작은 편이나 숙청 자체는 엄연히 이루어졌다.

1975년부터 10년간 사법적 과정없이 처형된 자들은 65,000명 정도며, 많이 잡으면 10만명 정도라고 한다.[6] 다수가 처형되거나 혹은 수용소에 간 것도 사실이다. 남베트남에서 근무했던 군인, 공무원이 재교육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양민학살이나 심각한 부패 혐의가 없는 남베트남 관리나 지주 대부분도 재교육 캠프에 들어갔다가 80년대에 들어서야 석방되었고, 이 숫자는 100만명 정도 된다. 다만 공산정권은 특별히 베트콩에 잔혹행위를 하지 않았거나 그다지 부패혐의가 없는 남베트남 고위 관리들은 해외로 망명을 허가해주기도 했다. 베트콩 정부와 군대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은 북베트남군에서 남파한 인력이므로 애초에 숙청대상이 아닌 것은 당연했다.

다만, 명심해야할 것은 베트콩(정부)은 남파된 북베트남군+자생적 반정부주의자(소위 민족주의자)의 공생조직이다. 남베트남이 패망할 무렵부터 베트콩은 서서히 공생조직에서 북베트남군 일색으로 교체되어 간다. 이는 베트콩 정부에서 법무장관으로 활동했던 민족주의자 계열의 반정부 지식인이 직접 목격한 것으로 얼마전까지 남베트남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됐던 부대가 머지않아 다시 봤더니 온통 북베트남인(군)으로 채워져 있었고, 북베트남군 정치장교가 통제하고 있더라는 증언을 했다.
피해를 봤다면 민족주의 세력이 피해를 본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남베트남의 패망이 유력해질 무렵부터 베트콩 정부와 군대의 요직에서 밀려나기 시작했고, 이들이 밀려나면서 베트콩 정부가 북베트남화 되자 북베트남은 베트콩 정부와의 상의도 없이 남베트남 패망 2년 후 일방적 합병선언으로 통일을 완수했다. 북베트남의 강력한 재교육 정책에 항의했던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은 재교육 캠프에 수용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민족주의 계열인사(베트콩 정부의 법무부 장관)는 결국 승리했음에도 보트 피플로 망명해 최종적으로 현재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 이 내용은 그가 프랑스에서 발간한 자서전의 일부이며, 실제로 그 외에도 북베트남 정규군 출신으로 통일후 남베트남에 대한 정책에 회의를 품고 망명해 프랑스에 거주하는 전직 북베트남 장교들도 유사한 증언을 한 바가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베트콩 정부(와 군대) 내의 공산주의자 계열(대개 북베트남 남파인원)들은 당연히 문제가 안 됐고, 자생적 민족주의자(반정부) 계열은 통일 이후 가치 하락과 반항 정도에 따라 요직에서 제외 혹은 재교육 캠프행이 결정됐다고 보면 된다.

최후의 남베트남 대통령이었던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은 80년대 한국의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서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나왔지만 실제로는 사이공 함락 후 간단한 조사를 거쳐 귀가조치 되었고, 후에 프랑스 망명을 허가해줬다. 그리고 나중에 즈엉반민이 해외에서 사망했을 때도 베트남 정부에서 유감을 표명했을 정도.[7]# 남베트남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응우옌까오끼(Nguyễn Cao Kỳ)의 경우도 2004년 베트남 방문을 허가해줬다.

또 이런 반공단체 소스에서 나온 이야기로, 북베트남 정부는 남베트남 내 좌파, 베트콩까지 숙청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과 다르다. 남베트남 전복 이후 잠시 존재했던 남베트남 공화국 각료들은 대부분 별탈 없이 잘 살았다.[8]

이렇게 수치는 과장되었지만, 어쨌든 상당히 많은 사람이 처형되거나(약10만), 수용소(약 100만)로 간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캄보디아나 북한 정도는 아니지만 비난받아도 할 말은 없다. 호찌민은 통일후 대량숙청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는지 베트남전 종전 몇년 전에 죽을 때 남베트남 사람을 탄압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당부했지만 잘 지켜지지는 않은 것 같다.[9]

다만 아주 지옥도가 벌어지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도 완전한 저개발국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옆동네보다는 상대적으로 조금 사정이 나았고 이후 개방 정책으로 국가 수준이 어느 정도 나아지면서 분에 넘치는 재평가를 받다 보니 이전과 정반대로 과소평가(...)가 나온다고 볼 수 있다.

7. 왜 망했는가

당시 남베트남은 그 정체성 자체가 애초에 프랑스와 미국의 정치적 필요로 인해서 급조된 속빈 강정이었고, 당연히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국민 전반의 공감과 지지 또한 없었다. 한마디로 이 당시 남베트남 국민 대부분이 보기에 남베트남 정부는 그저 이름만 있는 기구 정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응오딘지엠이 초기처럼 제대로 통치했으면 그래도 나라의 기틀을 잡았겠지만, 엄청난 비리를 저지른데다가, 거기다 베트남인들이 대다수 믿는 불교를 탄압한지라 사실상 국민의 지지를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전면적 마비에 가까운 남베트남 정부 기관과 관료제의 취약함,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남베트남 농촌과 도시에 대한 너무나도 쉬웠던 침투, 그리고 수 많은 농촌과 도시에서 실질적으로 국가 내의 국가를 세울 수 있었던 베트콩의 세력은 바로 이러한 남베트남 정부의 국가적 정체성 및 국민 공감의 부재를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과 비교하자면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지도자 이승만이 문제가 많기는 해도 어쨌든 독립운동을 했고[10], 수도인 서울 자체도 정통성이 있고, 국민의 국가에 대한 공감도 남베트남과 달리 있었다. 또한 국제적 정통성도 남북총선거에 응하려 했지만 소련과 북한 지역의 공산당의 거부로 어쩔 수 없이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를 하여 설립된 정부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따라서 아예 정통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남베트남과는 상당히 다르다. 참고로 한반도와 달리 베트남은 남쪽이 총선거를 거부했다.

비단 식민화 이후 근대사 내부의 궤적 뿐만이 아니라 근대 이전을 포함한 베트남 민족사적 궤적에서 봐도 정통성이 많이 부족했다. 북베트남은 당장 집권 시작 부터 1945년 8월 대봉기 당시 독립 선언과 동시에 고도 하노이의 탕롱궁에서 지금까지 프랑스의 꼭두각시로 있었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에게 정식적인 이양식을 받고, 옥쇄와 왕검王劍을 대중 앞에서 넘겨 받은 걸로 시작하고, 당장 토지 분배, 인구 집계, 행정 구역 재편 등 실질적인 행정 부분은 당연하고, 이념적으로도 대대적인 국사학 재편을 실시하며, 이를 맞추어 1960년 10월에 개전 준비에 정신 없을때도 [11] 하노이 수도 건설 950주년 행사를 거대하게 치루며 대중에게 베트남 민족 국가의 후계성을 제대로 과시했다[12]. 반면 남베트남의 입장에서는 당장 국토인 베트남 남부와 사이공 일대 부터 19세기 프랑스 침략 직전에야 참파의 저항을 제대로 뿌리 뽑고 베트남 본토에 흡수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땅이고, 정부 구성원들이라고는 대거 뭐 응오 딘 지엠 같은 간판만 빼고는 태반이 구 프랑스 식민 정권 인사에, 당장 정부 통제력 자체가 개판이니 저런 민간 차원의 학술적, 이념적 레벨의 근대 민족 국가로서 재형성 과정은 꿈도 못 꾸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이 깃발이라도 북베트남 쪽은 다른 공산권과 마찬가지로 뻘건 깃발로 바꾸는 와중 옛날 괴뢰 정권 베트남국의 깃발을 이어 받았다. 그런데 이 베트남국의 황저삼선기(黃底三線旗)도 애초에 1890년, 이미 나라가 프랑스에게 넘어 가고 왕실이 있는 후에시를 중심으로 한 중부 지방만 안남 보호국이란 이름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시점에 프랑스가 대충 꼭두각시로 옹립해 두었던 황제 성태제[13]가 디자인하고 도입했던 것이기 때문에 월맹 입장에서는 애초에 그리 애착도 없는 깃발이었다[14].


하지만 위에서도 서술했듯이 남베트남이 종교 정책에서 크나큰 병크를 저질러서이것이 대부분의 국민들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 하는 원인이 된 것만큼은 사실이다. 이승만 같은 경우는 친개신교 정책을 취하긴 했어도 자기 주변 인사들을 개신교도들로만 뽑는 병크는 최소한 저지르지 않았다. 애초에 그 자신이 개신교도긴 했지만 유교와 불교의 영향도 같이 받았다. 원래는 유생 출신이었고, 친 개신교 성향이기는 했으나 불교를 공개적으로 탄압하고 그런 성향은 없었다.

사실 해방 이후에서 9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개신교는 이미지가 크게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개신교는 신사참배 문제에서 일본의 종교적 어그로에 굴복한 사례가 있기는 하나, 3.1 운동에 참가하고 독립운동에 나선 사람도 많아 당시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개신교 신자였다. 서양에 직접 식민지배를 받지 않은 대한민국은 서양과의 소통, 서양 문명 도입을 통한 문명 개화와 민족 역량 강화로서 일본에 대항하려 했는데 이 과정에서 개신교는 서양과 직통할 수 있는 유효한 루트로 쓰였다. 즉 20세기 초 개신교는 '문명 개화의 상징'으로서 상대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불교, 유교 역시 개신교와 극단적으로 대립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불교의 경우 일제 시대 때 일본의 대처승들이 마구 들어와 전통 비구승들이 멸망 가까이 간 것에 대해 '우리 불교의 전통은 화엄이야' 라고 일갈하며 대대적 불교 복원을 단행했다. 그러나 워낙 대처승과 비구승의 세력 차이가 커서(거의 170~180배 가량 일본식 대처승이 많았음) 무리하게 강압적으로 단행한 결과 불교계에 조폭이 일부 흘러들어가는 부작용을 낳았다. 다만 불교계의 맥을 바로잡아 남베트남보다 종교 정책에서는 대체적으로 훨씬 낫게 되었다.

남베트남의 경우는 달랐다. 서구의 직접 지배를 받은 남베트남에서 기독교 가톨릭제국주의이었고, 불교유교는 전통 종교로서 민족저항의 상징이었다. 이 부분만큼은 당연히 정반대일수 밖에 없었던 것. 프랑스 식 교육을 받은 식민지 정부 관료들은 가톨릭 신도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이러한 지배층은 불교-유교 신앙을 가진 일반 대중들과 사상적으로 거리감이 많았으며 극명하게 대조되었고 정부와 대중이 종교 정책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려웠다.

즉, 한국인은 국가 자체는 인정하되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지도층과 그 지도층의 영향을 받는 정부 및 사회에서 보이듯, 사회 지도층과 국가에 대한 불신 때문에 자국을 싫어하는 거라면, 남베트남인은 지도층 뿐만 아니라 아예 국가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180도 차이가 난다. 외세의 침략이 있으면 전자에 경우 남의 노예되기는 싫어서라도 국가와 국토는 지키려 하겠지만, 후자에 경우 아예 국가가 망하든 말든 아예 신경도 안 쓸 것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결론을 내자면 남베트남이 북베트남과 공산당에게 허망하게 망한 것은, 남베트남 자체가 애초에 정통성이 부재해 속빈 강정이에 가까웠던데다가 행정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고 설상가상으로 극도의 부패와 막장행동으로 인해 지지받을 여지를 스스로 상실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현실을 무시한 종교정책은 결정적인 크리티컬이 되었다.가끔 한국의 현 상황과 부정부패 등을 바라보며 언젠가 남베트남과 같은 꼴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얘기하지만 실질적으로 남베트남과 같은 꼴을 보게 될 나라는 한국이 아니라 바로 북한이다. 아무리 1950~70년대 당시나 지금이나 한국이 부정부패가 심하다고 하지만 적어도 이쪽은 공산권 막으려고 준 무기를 적국에 돈 받고 팔아넘기는 짓은 하지 않았다.

7.1. 정치적, 역사적 문제

다만, 윗 문단으로만 설명이 되지 않은 사실들도 분명히 있다는 반론도 있다. 먼저 베트남은 이념논쟁 이전에 남북 간의 이질적인 격차가 심한 편이었다. 맨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순수하게 정치적 논리에 따라 영토가 갈려버린 한반도와 달리 베트남은 남부지방이 아예 다른 나라였었다. 한국사에서 좀 억지스럽게 비유를 해보자면 대한제국이 멸망 직전에 병신이 된 청나라를 제치고 만주의 전체, 혹은 일부를 병탄하는데 성공했는데 그 상태에서 일본에게 합방되고 나중에 독립될 때 압록강이나 청천강 쪽을 국경으로 분단된 격이랄까...

또한 전쟁 직후 테트 공세에서도 베트콩은 주요 도시를 공격하며 '민중 봉기'가 일어나기를 기대했지만 실제 베트콩에 호응하는 민중 봉기는 도시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남 베트남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민중봉기가 아니라 분명 평화조약을 무시한 북 베트남 군의 직접 침략이었으며,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남 베트남이 패망함으로서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남베트남 정권이 민중의 지지를 잃은 것은 사실로 봐야겠지만, 그것이 곧 북 베트남의 지배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었는지는 확신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남한에서 4.19혁명이나 반유신운동, 광주민주화운동 등을 사례로 민중이 북한을 지지했다고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북베트남을 민중이 지지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 남베트남 정권이 민중의 지지를 잃은 가장 큰 이유는 90%가 넘는 국민이 믿고 있던 불교를 탄압했기 때문인데, 당시의 북베트남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국가였다.[15]

응오딘지엠의 가톨릭 우대와 측근 정치는 일단 쿠데타로 좀 유혈사태가 일어나기는 했지만 아무튼 수습은 되었고, 이것이 결정적인 원인이라고는 볼 수 없다.

실제로 남베트남에서 쿠데타의 빈도 문제와도 연계를 볼 수 있는데 최소한 구엔 티우 대통령과 구엔 카오키 부통령 체제가 1967년 9월에 들어서면서 민의에 의한 내각을 보는 그들의 시선이 달라졌던 사례를 봐도 북베트남의 지배를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로 보기는 어려운 경우가 강하다.

단적으로 1973년 통계에서 집계된 남베트남 인구가 19,370,000명인데, 통일 이후 바다로 도망친 보트 피플만 최소 100만 이상. 바다에서 그냥 죽은 사람은 그 몇배가 될 지 알 수 없다.

7.2. 전략적 문제

전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북한의 김일성은 6.25 전쟁에서 선전포고 없이 기습적으로 남침을 함으로서 스스로 '침략에 대한 방어'라는 확고한 반격 명분을 대한민국과 미국에게 넘겨주는 치명적인 바보짓을 벌였다. 그 결과는 UN군의 반격이었으며, 적어도 침략자 북한을 응징하자는데 자유진영 각국의 동의는 확고하게 되었다. 북한은 걸레가 되었고 중공의 지원으로 겨우 복구에 성공했다. 반면 남 베트남의 경우,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에 이미 응오딘지엠 일가의 독재와 부패가 전세계적으로 대대적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적어도 전쟁 초기엔) UN에서 남베트남을 대대적으로 지원할 명분이 없다시피 했다.

그리고 북베트남은 직접적으로 공세에 나서는 것을 피하고 베트콩을 지원하여 사회 혼란을 일으키는데 주력했으며, 북베트남 자체는 공식적으로 미국에 대하여 방어적인 움직임만을 보였다. 즉, 베트콩을 '자발적으로 남베트남 정부에 저항하는 집단'으로 포장하여 방패로 삼았던 것이다. 또한 응오딘지엠 정권이 붕괴된 이후에는 어느 정치 세력도 정국의 주도권을 확고하게 쥐지못해 쿠데타가 여러번 일어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북베트남은 베트콩을 은밀하게 지원해 결국 베트콩이 상당부분 정국의 주도권을 쥐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현실 탓에 미국의 개입은 국제적으로 비판을 받고 미군이 원하는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7.3. 지리적 문제

지정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한반도는 동쪽, 서쪽, 남쪽이 모두 바다이기 때문에 육상으로 우회할 수 있는 공간이 없고, 해상은 미국의 강력한 해군으로 철저하게 봉쇄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남쪽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던 빨치산은 물자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말라 죽어갔으며, 오히려 남한 쪽에서 북한의 해안 도서를 점령하고 게릴라전을 펼칠 정도였다. 이후에도 1960년대 북한은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 게릴라전을 시도했으나, 확실한 보급로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 공비는 남한 지역에 정착하지 못하고 모두 단기간 내에 소탕되었다.

남북베트남은 친좌파적인 정책을 펼치던 라오스, 캄보디아를 통해서 육로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북베트남은 육상을 통해서 치민 루트를 만들고 베트콩을 지속적으로 키워줄 수 있었다. 길이가 길고 정글로 뒤덮힌 베트남의 국경 지대는 경비가 무척 어려웠다.

남한(과 UN군)은 비교적 좁은 휴전선만을 주 전선으로 삼을 수 있고 바다를 통해서는 제2,제3의 전선을 형성하여 북한을 반포위해버린 상태였던 것이다. 반대로 남베트남은 넓은 서부 국경이 남베트남을 공격하는 제2,제3 전선이 되었던 것이다.

8. 남베트남의 해외 후예들

프랑스의 경우는 과거 베트남을 식민지로 하고 있었던 관계로, 지금도 베트남계 혼혈들이 있으나, 그 이외의 지역에서(예를 들자면 미국) 베트남계가 보인다면 높은 확률로 남베트남 시절 넘어왔거나, 남베트남 패망 이후 도망쳐 어떻게든 그 지역까지 흘러들어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현 베트남 정부는 그들을 외국으로 도망가게 만든 1등 공신인 관계로, 아직도 공산 베트남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상당한 수준이라고 한다.# 특히 미국에 남아있는 남베트남 시절에 넘어온 베트남 사람들 가운데 몇명은 네오콘보다 훨씬 극단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흠좀무. 반대로 당시 동맹국이자 파병국인 한국에 대해서는 나쁘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다. 남베트남의 국기인 황저삼선기는 현재 베트남계 미국인의 기로서 여러 주에서 공인되었다.[16] 한국 웹에서 아시안 프린스의 노래라고 잘못 알려진 25years가 바로 이러한 이민자(들의 2세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무래도 앞서 말했듯 남베트남 패망 후 도망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베트남계 미국인은 정치적으로 다른 아시아인들과 달리 공화당 지지세가 강한 편이다. 2012년 미국 대선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 아시아계 미국인의 77%가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후보를 뽑았지만 베트남계 미국인 사이에서는 공화당 롬니(54%) 후보의 득표율이 오바마(44%) 후보를 앞섰다. 참조 이것도 2000년대 초반까지는 공화당 득표율이 70%대가 나오던 거에 비하면 내려간 편이라고.

그런가 하면 더 이상 나라도 없고, 거주하는 나라에 배경도 전혀 없는 관계로 잃을게 없다라는 심정으로 사는 사람도 많다. 베트남계 갱들이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한다거나, 잔인하기로 유명한데는 이런 뒷이야기도 약간 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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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실 베트남 남부지역이 처음부터 베트남의 땅은 아니였고, 서기 192년부터 1832년까지 참파라는 나라가 따로 존재했다. 물론 베트남의 꾸준한 남진으로 인해 17세기에 빈사상태에 빠졌고, 1832년 베트남에 완전히 흡수되었지만. 그리고 나라를 잃은 참족은 안습 마찬가지로 수도 사이공(지금의 호찌민 시)이 있는 메콩강 유역도 원래 프레이 노코르라 불리던 캄보디아 땅이었지만, 18세기에 베트남이 캄보디아에게 각종 이유를 들며 뜯어갔다(…). 베트남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남쪽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결국 찐씨의 북부와 응우옌씨의 남부로 분열되었고, 최종적으로 1802년이 되어서야 오늘날 베트남의 영토를 완성하고 통일을 이뤘다.
  • [2] 한국으로 치면 조선과 비슷한 포지션에 있는 베트남의 마지막 봉건 국가 응우옌(阮)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다. 1945년 일본군과 결탁하여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을 합쳐서 만든 베트남 제국의 황제를 하기도 했다. 동남아판 만주국.
  • [3] 1924~2011. 마담 뉴(Madame Nhu)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남편과 시아주버니가 사살당한 뒤로 해외로 달아난 쩐레쑤언은 베트남 정부를 비난하면서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과거 냉전 시절에 반공 투사인양 행세하기도 했으나 미국에선 용녀(드래곤 레이디)같은 악랄한 여자라고 비아냥이 쏟아졌고 냉전이 막을 내리면서 거지꼴로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2011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초라하게 죽었다.
  • [4] 휴가를 제대로 보내주지 않는다거나 가족에게 가야할 전사자 보상금을 장교가 빼돌린다든지...
  • [5] 역설적이게도 18사단은 원래는 최약체 사단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 [6] 미국의 연구자가 1990년에 발표한 논문이며, 굉장히 많이 인용된다. (당시 남북 베트남의 인구는 1973년 기준으로 북쪽이 2,393만, 남쪽이 1,937만이었다.) http://www.worldstatesmen.org/Vietnam.htm
  • [7] 단, 즈엉반민의 경우 사이공 함락 당시 무조건 항복한 당사자라는 점, 그리고 해외 망명생활에서도 공산 베트남 정부에 대해 크게 비판적인 말을 하거나 하지도 않고, 비교적 조용히 살았기 때문에 베트남 현 정부에서도 크게 거슬려 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남베트남계 이주민들은 즈엉반민을 곱게 보지 않는다.
  • [8] 이런 임시정부의 각료로서 후인떤팟(Huỳnh Tấn Phát, 1913년-1989년) 수상, 풍반꿍(Phùng Văn Cung, 1909년-1987년) 부수상, 응우옌티빈(Nguyễn Thị Bình, 1927년 - ) 법무장관, 쩐남쭝(Trần Nam Trung, 1912년-2009년) 국방장관, 르우흐우프억(Lưu Hữu Phước, 1921년-1989년) 교육장관, 즈엉꾸인호아(Dương Quỳnh hoa, 1930년-2006년) 보건장관 등이 있는데 사망 연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모두 연사이다. 논리적으로 봐도 이런 주장이 말이 안되는게, 사실상 구정 공세 이후 남베트남내 좌파는 대부분 궤멸된 상태였고,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Việt Cộng)의 경우도 거의 와해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미 대사관 습격이 그들에게는 모험주의적 병크로 심각한 손실을 초래한 것이다. 결국 이들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북베트남에서 파견된 요원'들이 내려와서 남은 베트콩을 지도했는데, 이들은 전쟁이 끝나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면 되기에 숙청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고, 실제로 숙청을 당하지도 않았다.
  • [9] 그러나 러시아나 중국 같은 경우는 공산혁명후 처형당한 자들은 적게 잡아도 수백만인 것을 비교해 보면 그나마 좀 덜한 편이긴 하다. 물론 프랑스 혁명 때도 수십만 단위의 처형자가 나왔지만 나름 재판을 거친 경우도 많고 애초에 근대와 현대를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 [10] 김일성의 경우에는 소규모 행위를 대대적인 미화 우상화 사업을 통해서 기반을 구축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지도자도 못되었을테니까 그러나 그 역시 문제많은 지도자라는건 변함이 없다.
  • [11] 54년 프랑스 철군과 남북 베트남 분단 이후 1959년 베트남 노동당 남부 지구, 즉 베트콩의 정치적 지도부에게 국 남부해방 개전 지령을 하달하기 전까지 남북베트남은 소강 상태에 있었다
  • [12] 위의 월맹 정권 치하 베트남의 민족 국가로서의 이데올로기적, 역사학적 재편성 과정은 P.M. Pelley, Postcolonial Vietnam: New Histories of the National Past, (Durham: 2002)에 자세히 저술 되어 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당시 사이공 정권의 철권 반공 색출, 절멸 작업에 숨어서 모가지 간수 하는데도 바쁜 남베트남 공산당 지하 조직원들에게 유적 답사를 시켰을 만큼 치밀하게 전국에서 고고학적, 역사적 자료를 긁어 모은 뒤 식민 당국 치하 고급 교육을 받아 전적이 구릴 수 밖에 없는 역사학자들 마저도 복권 시켜주며 민족 국가적 역사관을 짜맞춘 뒤 이를 보급했다. 물론 그 과정 중에 근대 민족적 관점에서 월족, 즉 과는 궤도나 정체성이 확연히 다른 참파도 은근슬쩍 자기들 역사로 포장하는 등 학자적 관점에서 보면 어두운 면이 있으나, 이 문맥에서 중요한 건 북베트남 정권은 오히려 기존의 문화와 역사를 부르주아 봉건 반동 드립이나 치며 멀쩡한 절, 교회, 문화재 박살내기 일쑤였던 다른 곳의 공산주의자들과 달리 저만큼 치열한 역사적 정통성을 설립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는 점이다.
  • [13] Thành Thái, 타인타이 1879~1954
  • [14] 식민화 이전 쯔엉조의 황제들은 주황색 바탕에 붉은 원이 있는 깃발을 사용했고, 그 이전에 베트남은 다른 전근대 아시아 국가들 처럼 딱히 국기라 할만한게 없었다
  • [15] 베트남은 1992년 헌법을 개정하고서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게 된다. 하지만 현재도 선교활동이 금지되어 있는 등 완벽히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 [16] 이로 인해 베트남과 미국의 관계가 정상화된 뒤 미국에 건너온 베트남계 이주민과 베트남 공화국 패망기에 건너온 구 베트남 공화국 출신 이주민들 사이에 반목도 종종 벌어진다고 한다. 예를 들면 구 베트남 공화국 출신 이주민들이 가게에 황저삼선기(黃底三線旗)를 걸면 현 베트남 출신 이주민들이 뭐라 하고, 현 베트남 출신 이주민들이 금성홍기를 걸면 구 베트남 공화국 출신들이 비난하는 등...
  • [17] 관련이 있을지 모르지만 블랙 라군의 배경이 되는 도시 로아나프라는 베트남 전쟁에서 패전하여 피난온 군인들에 의해 형성된 도시라고 한다. 이 도시가 어떤 곳인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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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1-22 23: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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