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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옐친

성명: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옐친
키릴 문자: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Ельцин
로마자: Boris Nikolayevich Yeltsin

러시아대통령
(소련) 1대 2대
(미하일 고르바초프) 보리스 옐친 블라디미르 푸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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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방의 첫 번째 대통령. 러시아의 대표적인 급진 개혁파 정치인이자 능력자의 표본. 만들어내는 자와 수성하는 자의 차이를 가르쳐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젊었을 시절에 건축기사로 지내다가 1961년에 공산당에 입당하고 나서 뛰어난 흡인력으로 빠르게 승진하여 1976년에 스베르들로프스크주 제1서기가 되었고, 1981년에 공산당 중앙의원이 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훗날 그와 원수지게되는 고르바초프가 지도자가 되면서 고르바초프는 옐친을 등용하여 모스크바 제1 서기가 되었다. 엘친은 모스크바 제1 서기시절에 정치개혁을 주장하다가 보수파들의 반발에 1987년에 해임되었지만 옐친은 이에 굴하지 않고 대중적인 인지도를 쌓아올려갔고, 개혁의 상징이 되었다. 그 결과, 1989년 소련 첫 자유 총선거때 89%의 득표를 얻어 초압승을 거두었고, 그의 동료들도 대거 의원직에 등극하는데 성공하면서 보수파의 세를 누르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 때부터 급진적인 노선을 본격적으로 주장하여,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하던 고르바초프와 점차 갈등을 빚기시작하여 1990년에 공산당을 전격 탈당하고, 1991년 6월 12일에 57%의 득표로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해 8월에 보수파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쿠데타를 저지했으며, 그 해 12월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지도자와 만나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와 독립국가연합의 결성을 선언했다. 이 때만 해도 그는 멋쟁이였다.[1][2]

그리하여 옐친 등의 밀약으로 인해 소련은 해체되었고 '신연방조약'의 체결을 준비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도 사임하게 되었다. 그 때 옐친 왈 "소련의 미래를 걱정하는 데 시간의 절반을 할애했으니 이제 그만합시다".

이어서 옐친은 소련의 색채를 지우기 위해 국가러시아 정교 성가(애국가)로 바꾸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모험을 강행하긴 했어도 휼룡한 정치인으로 기록될수 있겠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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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미지를 적절히 말해주는 만평. '닥터 옐친의 의학 클리닉'

그 이후에는 말그대로 러시아를 바닥으로 말아쳐먹었다[3]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까지 나라를 망칠 수 있을까?' 싶을 정도.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꺾고 초대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이 되었을때는 친서민적인 이미지로 인기가 많았으나 당선 후에 후 보인 가족들과 측근들의 부정부패, 그리고 소련의 해체 역시 실질적으로는 고르바초프가 권력을 잃은 틈을 타 옐친이 주도했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러시아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정치인이다. 거기에다가 1994년 발발한 체첸 사태 당시 체첸에 많은 돈을 투자하지만 쑥대밭만 만들어 욕 먹었다. 더군다나 그러면서 쳐발리기만 하는데다가 1996년 8월에는 굴욕적인 평화협상을 맺는 바람에 더더욱 인기가 떨어졌다. 거기에 집권초에 시행한 충격요법의 일환[4]으로 시행한 가격자유화와 소련붕괴에 따른 산업붕괴[5]로 초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예금이 모조리 휴지조각이 되었고, 대다수 러시아인들도 빈민층으로 굴러떨어졌으며 1인당 국민소득도 처참한 수준으로 떨어졌다.[6]

거기에다가 무분별하게 민영화를 하다 보니 대량의 국부가 유출되었고 빈부격차도 극심해졌으며 올리가르히(과두재벌)들이 정치계와 언론계를 장악하는 바람에 부정부패도 소련시대보다 심해진데다가 쓸수있는 예산이 줄어서 각종 복지정책등 사회안전망까지 붕괴되다보니, 재빠르게 나선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들의 삶은 막장화 되었다. 90년대 중반에 일시적으로 상황이 호전되는 듯 했지만, 그래봐야 사회적인 지표가 개판에 가까웠고, 금융범죄도 대거 일어날 정도로 그 내실은 결코 탄탄히 않았다. 그나마도 외환위기가 일어나는 바람에 다시한번 쑥대밭이 되어 모라토리엄까지 선언했을 지경이고 여기에 국민들의 생활 수준이 말 그대로 진짜 벼랑끝에 내몰리는 바람에 발생한 출산율의 급감과 사망률의 급증으로 매년 인구가 70만에서 90만명선까지 줄어드는 수준이 되어서 한 동안 2050년이 되면 러시아 인구가 1억명 이하로 떨어질것이라는 전망도 나올 수준이었다.

게다가 소련 붕괴때 약속한 NATO의 동유럽 전진을 90년대에 허가해준 장본인. 물론 러시아가 대들수 없을 정도로 군사력이 약화되었다지만, 그 위기를 초래한 사람은 바로 옐친이다. 소련이 건재했다면, 아니 하다못해 옐친이 조금만 더 유능했으면 최소한 발트 3국을 비롯한 구소련 지역에 나토가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경제의 붕괴는 러시아 군에게도 영향이 미쳐줘서 러시아군이 소련 시절보다 50분의 1로 줄어들었다. 거기다가 독트린 94를 내세워 핵무기와 기술연구에만 투자해서 러시아군은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7] 결국 1999년 8월에 KGB 출신인 블라디미르 푸틴을 총리로 지명하고, 이후 체젠전쟁에서 푸틴이 반군에게 강경하게 대응하면서 깜짝스타로 등극하여 총선에서 친 옐친파 정당들이 선전을 하여서, 옐친은 그나마 탄핵으로 물러나가는 꼴은 면하게 되었다. 그해 말인 12월에 옐친은 건강문제로 푸틴을 권한대행으로 지명하고, 조기 퇴진했으며 이후에 야인으로 지내다가 2007년에 사망했다. 생전의 실정때문에 대다수의 러시아 국민들에게 나라를 말아먹은 놈, 심하면 개혁을 한답시고 개인 소유 재산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놓고선 자기와 친인척, 재벌들의 배만 불린 천하의 개쌍놈 정도의 취급을 받지만 그와 별개로 푸틴에게는 자신을 대통령으로 올려준 아버지같은 인물이다보니 옐친이 퇴임한 후에도 현안이 있을때마다 옐친과 얘기를 나누면서 조언을 구할정도로 대접을 용숭하게 해주었으며 장례식도 꽤 성대하게 치러졌다.

다만 1993년엔 이런 적도 있다. 옐친은 재신임에 성공한 직후 대통령에게 의회해산권을 부여하고, 기존 소련체제의 잔재였던 인민대의원 대회를 폐지하고 상하원을 신설하는 개헌을 시도했다. 이에 다수당인 공산당 등이 러시아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농성하며 대륙의 기상을 보여주려 하자, 모스크바 주위 근위 갑사단T-80들을 데려다 일제포격으로 국회의사당을 작살내며 진짜 대륙의 기상이 뭔지 보여준 적이 있다.사건의 내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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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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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뿌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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뽜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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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Это РоссияЯЯЯЯЯЯЯЯЯЯЯЯЯЯ~"[8]

2년 만에 탱크 앞에서 맞서던 입장에서 탱크를 끌고 가서 포격하는 입장이 된 게 괴이하지만 알 게 뭐야. 이 때 군부가 옐친을 지지하면서 모스크바로 진격, 옐친의 이 짓거리에 반발해 시위중이던 시민들[9]을 향해 발포했고 2,000여명의 사상자가 났다. 군인은 12명의 사망자를 기록. 이쯤되면 친위 쿠데타다.

하지만 이런 진압은 그의 인기만을 떨어뜨렸으니, 그 해 12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옐친파 장당은 고작 15.5%의 득표를 올리며 패배했으며, 극우정당인 러시아 자유민주당이 23%로 제1당이 되었다. 공산당-농민당 연합도 22%를 차지했으며 나머지 정파는 대다수가 사민주의 정파였다.

1995년 12월 의회()에서는 공산당이 22%를 득표하며 1당이 되었다. 11%로 자민당이 2당을 차지했으며 10%의 여당 '러시아 - 우리집'은 3당에 그쳤다. 하지만 당명부제의 특성상 어느 한쪽도 과반을 유지할 순 없었고 혼란은 더 가중되었다. 이런 기조는 1999년 총선까지도 이어지만 1999년 총선에서 친 옐친파 정당이 선전하고 2000년 푸틴이 들어서면서 정치는 안정된다. 거꾸로 말하면 이전까지 러시아는 혼란이 심각했단 이야기다.

'총칼로 왕좌를 세울 순 있지만, 그리 오래 앉아있진 못 할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어찌 그 말대로 되는 걸 두번이나 겪었다... 1991년 8월 19일의 공산당 보수파의 친위쿠데타도 그렇고 본인이 땅크로 의회 밀었다가 인기 개판된 것도 그렇고...

이오시프 스탈린 못지않은 지독한 애주가로 농담삼아 보리 옐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얼마나 술을 먹었는지 공식 석상에서도 취해 있어서 추태를 부리는 등 러시아라는 나라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데 일조했을 정도. 심슨 시즌 8의 10화에서도 음주 단속기의 최종단계로 이 사람 수준이라고 나온다. 말년에는 하도 병을 많이 달고 다녀서 걸어다니는 종합병동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집권 초기에 권총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다.관련 기사

클린턴 대통령 시절 미국을 방문해서 백악관에서 잠을 자다가 술을 진탕 마시고 맨발에 잠옷차림으로 백악관 문앞까지 나간 적도 있었다. 이 사건은 국가기밀로 취급되어(…) 언론에는 비공개 처리되었다가 나중에 기밀해제가 되면서 알려졌다.


사진은 로스토프를 방문했다가 만취한 상태로 야외 콘서트장에 난입해 댄스타임을 가진 옐친의 모습. 1996년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으며 영상 자료로도 매우 확실하게 남아 있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옐친은 덩치빨이 상당했는데 실제로도 옐친은 키가 188cm의 거구였다.

이는 그해 7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옐친측의 홍보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옐친은 심장마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이미지 플레이로 초반 지지율 6%에서 결선투표 진출은 물론 공산당의 주가노프를 54%대 41%로 14% 가량 압서며 승리했다.[10]

러시아는 나라 특성상 블랙 유머가 많이 통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바로 옐친이다. 돈을 잘못 쓴 것을 비난하는 그 유머의 한 대목.

옐친이 도시를 시찰하다가 한 농부를 만났다.
"요새 먹고 살기 힘드시죠?"
"예."
"그렇다면 지푸라기를 먹고 살 것을 제안합니다."
그러자 농부가 펄쩍 뛰면서 하는 말이
"이봐요, 옐친 동무. 그렇다면 나는 '음메' 하고 울지도 모르겠군요."
그리고 이어지는 옐친의 대답.
"무슨 소리. 난 지난 겨울 내내 만 먹었지만 윙윙거린 적은 한 번도 없었소."

(출처: <웃기는 리더가 성공한다>, 김진배)


참고로 공산주의 유머항목에서도 옐친을 비꼬는 유머를 볼수있다.

러시아 = 공산당 = 북한 편 이라는 소련 시절 스테레오 타입을 가진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다르게 옐친은 개인적으로 북한을 굉장히 혐오했다. 스탈린김일성의 회담 내용등을 포함한 한국전쟁 관련 문서를 대거 공개해 한국전쟁의 원인이 북한의 남침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못박았고 남,북한간 전쟁시 러시아가 북한편으로 자동 개입하는 우호조약을 폐기시켜 버린것도 옐친. 옐친 개인의 혐북 감정과 더불어 한국과 교류를 늘리려던 러시아의 외교 정책이 적용된 결과이다. 일단 옐친의 성향 부터가 우파로, 공산당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참고로 정권을 잡고 있던 옐친네 여당과 달리 공산당을 포함한 러시아의 주요 야당들은 대체적으로 친북 성향이었다.

1990년대 초반, 한국에서는 이 사람을 한때 옐트신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이 사람의 이름을 영어로 Yeltsin 으로 표기 하기 때문(...) 러시아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 당시 사람들이 영문 알파벳을 보고 이상하게 받아들인것이다. 2010년대에도 쩐 티 낌 응언(Trần Thị Kim Ngân)을 트란티 킴 냐온(...)이라고 읽는것을 보면 별반 달라지지 않은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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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소련이 붕괴하면서 독립 운동이 적거나 없었던 지역까지 모조리 독립하게 되었다. 고르바초프의 신 연방조약에 옐친도 동의했었는데 옐친이 뒤통수를 친 것이다. 국민투표 따윈 없었다.
  • [2] 참고로 이전의 소련 유지를 묻는 투표에서는 76%가 찬성을 했다.
  • [3] 물론 그 이전에도 경기침체가 심각해있어서 고르바초프가 개혁개방정책을 시행할 지경이었지만 적절치않은 정책으로 러시아 주민들 다수를 빈민층으로 만들어낸 건 옐친의 책임이다.
  • [4] 이는 옐친이 경제를 개혁하겠다고 워싱턴 컨센서스에 충실한 학자들이나 기관들(예를 들면 세계은행, 미국 재무부, IMF)에게 조언을 구했었는데, 옐친은 이들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충격요법을 시행했다. 문제는 이들 학자들이나 기관들은 이러한 충격요법을 시행하면 일어날 파장을 예측하지 않은것이 아니었음에도 이걸 단순히 불가피한 일, 혹은 단기적인 일로 여겼으며, 장기적으로 보면 시장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지나치게 낙관했다.물론 이건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게 없어보이지만그리고 옐친은 이들이 제시한 방안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충격요법에 따라 가격자유화가 즉각적으로 시행되자, 물가폭등으로 예금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면서 구매력이 급속히 떨어졌고(소련시절에는 그래도 싸게 공급되는 물건은 부족했어도, 풍족하게 물건이 공급되지만 가격이 비싼 암시장에서 물건 살때 웃 돈이라도 줄수 있었지만 예금이 휴지조각 되어버리고, 봉급도 사실상 몇 토막 나버리는바람에 돈이 없어 물건을 제대로 사지 못했다.), 범죄율도 대폭상승하게 된다.
  • [5] 소련시절에는 각 공화국별로 산업을 분업화했는데 갑자기 소련이 붕괴되면서 연계가 끊어지는 바람에 아예 산업기반 자체가 붕괴되어 버리고 말았다. 물론 러시아는 2000년대 이후에 회복되었지만 대다수의 중앙아시아 국가들이나 몰도바 같은 경우에는 경제수준이 독립을 안햐느니 못한 상황이다.
  • [6] 1990년 당시 9300달러였던 1인당 GDP가 1992년에는 600~700달러까지 떨어졌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7] 물론 이는 합리적인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장 대규모 정규군을 유지할 수 있는 비용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양적 감축을 통해 유지비를 최소화하되, 최소한의 국제적 영향력 유지를 위한 핵전력/이후 군 조직의 재건을 위해 필수적인 기술적 우위만은 놓치지 않겠다는 마인드에서 세워진 게 당시의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군의 중추가 되는 장교/부사관들을 제대로 유지한다는 마인드가 없었던 게 큰 문제였고, 결국 러시아는 중간간부진이 무너진 군을 재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 [8] 사실 맨마지막 사진은 1991년, 즉 보수파의 쿠데타에 대항할 때의 사진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누가 옐친이 나중에 자신들을 진압하게 되었을지 알았으랴...
  • [9] 1992년 1월 가격 자유화에 따른 급속한 물가상승과, 무책임한 민영화 정책, 공약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던 옐친에 대한 분노가 극도로 쌓여 있었다. 오죽했으면 경찰과 군인 일부가 이 시위대에 참가했을 정도였다.
  • [10] 여담으로 1996년 53세의 나이로 선거에 나왔던 주가노프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와 대결함은 물론 아직도 2012년 대선에 출마하여 푸틴과 대결하는 등 정치현역이다(...) 다만 꾸준히 10% 후반대의 애매한 득표율을 얻고 있긴 한데 2000년 이후로 푸틴과 메드베데프가 모든 선거에서 50% 이상의 득표로 이겼기 때문에 결선투표까지 가진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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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09 13: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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