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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last modified: 2015-02-22 22:49:00 by Contributors


KBL의 프로농구이었던 팀. 기아자동차 실업 농구단을 기반으로 1996년에 창단했다.
유명 선수로는 허재 - 강동희 - 김유택을 필두로 한 허택 트리오와 사마귀 슈터 김영만이 있었다. 창단 감독은 최인선 감독이었다.
프로 팀으로 창단한 후 원년 시즌이었던 1997 시즌 정규리그 1위로 챔피언결정전에 진출, 챔피언 결정전에서 원주 나래 블루버드(현 원주 동부 프로미)를 4승 1패로 꺾고 원년 우승을 달성했다.[1]

1997-1998시즌에는 정규리그 3위로 마쳤으나 정규리그 2위였던 경남 LG 세이커스(현 창원 LG 세이커스를 따돌리고 2년 연속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 2연패를 노렸지만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대전 현대 다이냇(현 전주 KCC 이지스)에 패배, 준우승에 그쳤다. 부상 투혼을 보여줬던 허재는 비록 팀은 준우승했지만 챔피언 결정전 MVP를 획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8-1999 시즌을 앞두고 허재가 팀과 불화를 일으키며 이슨 윌리포드정인교를 상대로 나래에 트레이드되었고,[2] 모기업 기아자동차현대그룹에 인수되는 등 시즌을 앞두고 뒤숭숭한 소식만 들려오게 되었다. [3] 하지만 그게 다 일단락되고 보니 PG 강동희, SG 정인교, SF 김영만, PF 이슨 윌리포드,[4] C 리프 리드라는, 개사기 정도가 아니라 치트 수준(...)의 팀이 완성되었고,[5] 정규 리그 2위를 차지. 3년 연속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으나 이번에도 역시 현대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 시즌을 정리해 보면 젊은 감독이 늙은 팀을 맡은 것이 준우승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김영만을 제외한 강동희, 정인교, 그 외 벤치 멤버들이 나이가 많이 들어 시즌 후반에 체력적인 안배가 필요했는데, 젊은 인규 감독은 시즌 막판까지 주전들을 활용하여 경기를 했고, 결국 결승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너져내렸다. 또한 허재의 공백으로 팀의 명확한 중심점이 없다는 것 역시 정신적으로 흔들리게 된 원인. 다만 노장들과 스타들을 잘 활용하여 팀을 결승까지 끌고 간 것은 인규 감독의 기량이므로 노련미가 부족했지 무능은 아니었다.

1999-2000 시즌을 앞두고 농구계의 검은 손 박수교 감독이 취임하며 용병을 전원 교체하게 되고, 정규리그 6위로 시즌을 마치며 6강 플레이오프에 합류했으나 1회전 탈락.
2000-2001 시즌은 기아자동차의 이름으로 치른 마지막 시즌이었는데, 팀은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지며 정규 리그 9위라는 처참한 기록을 내고 말았다. 특히 용병 센터였던 안 스펜서박수교 감독과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시즌 막판 박수교 감독과 벤치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등 깽판을 치다가 그대로 퇴출되고 말았다.

그 이후 울산광역시로 연고지를 옮겼고, 현대자동차그룹이 야구단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하게 되어 KIA 타이거즈로 팀 명칭을 바꾸게 됨과 동시에 현대자동차그룹 산하 자동차 부품 전문 계열사인 현대모비스로 구단이 이관되어[6] 기아자동차 시절부터 이어져오던 기아 농구단은 농구대잔치 시절 기아 왕조라는 이름과 더불어 원년 우승의 위업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후, 2004-2005 시즌부터 현재의 울산 모비스 피버스로 팀 이름을 변경했다.

울산광역시로 연고지를 옮겼던 결정적인 이유는 부산광역시의 미비한 지원 탓이었다. 당시 홈 코트로 사용하던 직체육관의 경우 농구 시즌인 한겨울에도 불구하고 난방을 제대로 틀어주지 않는 등 지원을 제대로 해 주지 않았다. 이로 인해 기아 선수들은 체육관 시설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모비스로 바뀌면서 부산 연고 농구 팀이 없다가 2003년 코리아텐더가 여수시에서 부산광역시로 연고지를 옮기고 KTF에 인수된 이후에는 한동안 정체육관을 홈 코트로 이용하였다.

기아 엔터프라이즈가 한참 잘 나가던 시절에는 그야말로 부산광역시 연고 프로 스포츠의 리즈 시절이었다. 당시 K리그 팀 대우 로얄즈는 물론이고, 롯데 자이언츠도 1999년에 삼성을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등 부산광역시를 연고지로 하는 팀들은 전부 잘 나갔다. 대신 우승은 못 했지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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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마지막 농구대잔치 시즌이었던 1996-1997 시즌 허재가 무면허 음주운전으로 구속되어 하위권으로 떨어졌던 흑역사가 존재한다.
  • [2] 지난 시즌 결승의 맹활약은 팀에게 마지막 선물을 안겨주고 떠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진심일 수도 있고, 농구판에 남아있는 한 계속 볼 사람들끼리 서로 얼굴 안 붉히려고 좋게좋게 넘어가기 위해 만들어낸 말일 수도 있지만, 그 활약만큼은 진짜였다.
  • [3] 최인선 감독도 이 때 서울 SK 나이츠로 옮겨 갔다.
  • [4] 윌리포드는 골밑을 주로 맡았지만, 3점슛도 잘 던졌고 강동희를 대신해 PG를 본 적도 있을 정도로 외곽 플레이에 능했다.
  • [5] 다만 이 때의 정인교는 이적의 영향과 제2외곽슈터로 변한 역할 적응실패 등의 이유로 부진한 성적을 보였다.
  • [6] 구단 홈페이지의 연혁에는 인수라고 되어 있으나, 실은 1사 1팀 정책에 따라 구단의 관할 모기업이 조정된 것일 뿐이다. 이에 따라 현대자동차전북 현대 모터스 프로축구단을 전담하게 되었으며 현대자동차 배구단은 대캐피탈이동했다. 똑같은 이유로 SK 빅스는 전자랜드에 매각하여 현재의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가 되었다.
  • [7] 2002년의 경우는 대구광역시 연고 프로 스포츠 팀들의 리즈 시절이었다. 한 술 더 떠서 삼성과 오리온스가 모두 우승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구 FC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월드컵이 끝난 후 창단 작업 중이었다. 대구 FC는 2003년부터 K리그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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