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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last modified: 2015-04-12 05:16:37 by Contributors

중국의 역사
//서하
오대십국시대 10 ~ 12세기 남송
  북송   

北宋

Contents

1. 개요
2. 역사
3. 관료제의 발달과 약화된 군사력
4. 잘못된 외교정책과 두 차례의 멸망
5. 왕안석의 신법(新法)
6. 막강한 경제력
7. 찬란한 과학기술
8. 평가
9. 고려와의 관계
10. 역대 황제
11. 추존 황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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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년, 멸망 16년 전의 강역(주황색)

960년 오대십국시대 후주(後周)의 무신 조광윤이 후주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한 중국의 통일 왕조. 수도는 개봉(카이펑).

보통 960~1127의 북송 167년, 1127~1279 의 남송 152년을 더해 960~1279, 총 319년간 존속했다.

2. 역사

송나라는 비록 선양으로 건국되었으나, 육조시대 유송[1] 이래로 계속되던 전 황제에게 선양을 받고 그 일족을 (!)하던 관행을 중지하고, 후주의 황족인 시씨 일족을 보존하고 우대한 면은 그럭저럭 인도적이었다.조광윤의 유언에 따라 송나라존속 기간동안 시씨 가문은 계속 유지되었으며 남송 멸망시 다수의 시씨가 송나라와 마지막을 함께 하였다.[2] 애초에 후주 자체가 단명 왕조이기도 했지만, 후한의 유지원 - 후주 태조 - 후주 세종 시영 처럼 양자제로 대를 이어왔던 상황이었다. 곽위에 비해서도 매우 온건한 계승을 한 셈.

송태조는 스스로 장수 시절부터 거란족을 물리치고 후주의 북조 전역을 완수하는 제1공신이었으나, 광주남한과 남부 최대의 국가였던 을 멸망시키는데 그치고 자기대에 통일을 완수하진 못했다. 2대 황제는 조광윤의 동생인 조광의(송태종).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이번에도 송태조 조광윤의 의지로 조광의가 선양 받았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조광의가 방에 들어간 다음 갑자기 조광윤이 급사하고 다음 황제가 되는 식의 기록으로 볼 때, 아무리 봐도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수나라 문제 어게인? 다만 이 자체가 조광의를 디스하는 이들의 떡밥이란 말도 있다. 송태종은 오월북한을 멸망시키고 통일을 완수한다.

태조 조광윤과 태종 조광의는 원래 무인 군벌 출신이기에 초반에는 강한 군사력을 선보였으나, 태종의 아들 송진종은 걸핏하면 잠만 퍼자는 나약한 왕이라 거란의 대대적인 침략을 수수방관하다가 굴욕적인 '연의 맹(澶淵之盟)'[3]을 맺게 된다.

심지어 요와 금에게 눌려서 기를 못펴던 서하조차 여러 전투에서 참패, 공물을 바칠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4] 물론 송 초기에 서하와 금에 바치는 세폐는 큰 부담은 아니었지만 송의 재정이 나빠지자 문제가 되었다.

1127년에 정강의 변으로 여진금나라에 밀려 항주로 천도한 이후의 시기를 남송, 그 전은 북송이라 일컫는다. 이 정강의 변은 송휘종송흠종, 그밖의 여러 황족과 신하들이 포로로서 북쪽으로 끌려간 사건으로, 한족 사상 최대급의 치욕이라고 여겨지지만... 이 사건의 배경에는 요를 제압하고 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금과 결탁했던 송의 병크가 터진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현실임에도 송의 체제는 크게 달라지지 못했다. 다음 항목에서 자세히 이야기하자.

3. 관료제의 발달과 약화된 군사력


▲ 북송의 서울인 개봉을 그린 청명상하도(清明上河圖) 부분

당나라 멸망 후 거의 60년에 가까운 전란을 수습하고, 이 혼란이 나라 각지에 군벌(절도사)들이 할거해 생긴 것이라는 판단 하에, 조광윤은 모든 절도사를 해체하고 전군을 황제의 통솔하에 두어 을 설치해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 과거로 관료를 발탁해 그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군주독재체제를 완성한다. 원래 과거제도가 시행된 시기는 수나라 때지만, 진정한 관료발탁의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한 때는 송나라라고 할 수 있다.

후기에는 병력수가 무려 126만 명에 달했지만 그들 대부분이 실전경험이 없는 오합지졸이라서 송나라 시기 내내 북방민족과 붙는 족족 박살이 났다. 실제로도 송군이 이긴 전투는 거의 없다.[5] 정말 안습. 당나라 군대라는 말이 널리 쓰이지만 실제로는 그 용어는 당군이 아닌 송군에게 사용되어야 합당하다. 송대 이후로, 중국 정통 왕조에서는 정규군보다 정계 및 재야 유력자가 모병한 의용군이 더 잘 싸우는 현상이 매번 발생하게 되었다.[6]

이를 증명해주는 극단적인 사례가 실제로 있었다. 송 지방관 중 한 명이 공을 세우려고 지나가던 금의 사신을 공격했는데[7], 이 때 병력 보병 2000명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기병/기병이긴 했지만) 호위무사 17명에게 가볍게 발렸고, 금의 사신은 제 갈 길 갔다...[8]

더욱이 송나라는 문치사회라서, 무인을 매우 폄하했다. 물론 그렇다고 심하게 푸대접한것은 아니다. 그예가 정1품 재상의 식비보조금은 매월 300관인데 장군인 정2품 절도사의 식비보조금은 400관이었다. 장군들의 녹봉도 등급에 따라 매월 3000관 내지 1만 관을 받았다. 그래서 군인을 폄하만 했지 무시하지는 못했다. 군사비도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 군인들의 정치, 사회적인 지위가 낮은 대신에 많은 봉급이라는 반대급부를 주었던 것이다. 송태조가 휘하 번진 절도사들에게 병권을 회수하는 대신에 많은 재산을 줘서 고향에서 행복하게 살게 한 것과 비슷한 이치.

하지만 좋은 은 못으로 쓰지 않고, 훌륭한 인재는 군인으로 만들지 않는다라는 말까지 있었고, 이 때문에 질 나쁜 범죄자들이 주로 병사가 되었기에 규율이 서지 않았다. 게다가 보병 위주라서[9], 기병 위주인 여진족이나 거란족 같은 이민족과의 전투에서 훨씬 불리한 요인이 되었다.[10] 보병이 야전에서 불리하다고 하지만 사실 평지에서의 대규모 야전에서도 보병이 기병의 상대가 안된다는 것은 편견으로 보병대가 장창 등으로 진형을 구성하고 버티기 시작하면 기병대도 손을 쓰기 어렵다. 또한 궁병이나 쇠뇌로 사격하면 충분히 기병을 상대할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보병 위주로 전력을 짜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기동력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보병이 대응을 잘해서 만만치 않다면 기병대는 그 진형을 우회해서 보병대의 거점을 타격하는 것이 가능하다. 보병이 대응을 위해 이동하여 도착할 무렵 기병대는 이미 상황을 끝내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상황이 연출된다. 그렇게 거점이 당하면 보병대는 버틸 수가 없다. 고려는 기병이 약하지 않기도 했고[11] 산성에서 버티는 전법을 썼지만 송나라는 그런 체계적인 방어 시스템이 부족했고 심지어 잘 싸우던 장군을 불러다 숙청하기도 했다.[12]

이렇게 말이 부족한 문제점을 막기 위해 왕안석은 보마법을 시행했다. 호구마다 말을 기르게 하여 농사짓는데 이용하고 전쟁시 말을 기병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들어보면 그럴 듯 한데 현실은 시궁창이다. 왜냐하면 목초지가 심각하게 부족해서 말을 기를 여건이 안되는데다 농사짓는 말과 기병의 말은 사용하는 근육이 다르다. 따라서 평생 농사짓던 말로 전쟁에 나서면 나가는 족족 발리기 십상이다.[13] 하물며 요, 금, 원의 기병 앞에선... 말도 민간마군마가 다르듯이 게다가 군마를 먹이는 것은 일반 말을 먹이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병량 품목에 왜 마초가 항상 끼어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느낌이 잡히는가? 애초에 먹이도 다르고, 심지어 군마에 적합한 품종과 농업에 적합한 품종이 다르다. 농업용 말은 덩치가 크고 소와 비슷한 체형을 가졌다. 빨리 달리는 데에는 적합치 않다.

하여간 진짜 개막장 군대. 거기다 병력 중 절반인 60만을 수도방위 겸 해서 수도인 카이펑 근처에 밀집시키고[14], 군사지휘권을 여타 장수들이 아닌 황제가 직접 가지게 하였다. 이는 전 통일 왕조인 당(唐)의 실책에서 배운것이라 하였으나, 진짜 위협인 이민족 방어에 허술하였다. 거기다 국경 지대에 배치하는 군사는 서류상으로는 수만 대군이었으나 실제 배치 병력은... 또 앞서 말했듯 장수들의 반란을 견제하기 위해 장수 직속부하들을 대폭 줄여 군사 훈련과 상하 교류를 적게 만들어 버렸고, 이민족의 침략 당시에는 멀리서 파병한 생판 처음보는 군사를 억지로 조련하여 싸워야 했으니...이게 게임이 될리가.[15]

또 한가지 송의 군대가 약한 이유는 병사들의 연령이 높다는 데 있다. 당시 군대는 철밥통이라 군대에 오래 남아 있다. 자연스럽게 연령은 높아지고 병사들이 죽은 다음에야 충원이 가능하기 때문에 약체화를 초래했다.

다만, 송이 아주 매번 털리는 군대는 아니었다. 초기에도 요를 상당히 몰아 붙였고 하지만 그냥 상국 대접만 받고 공물을 토해냈지, 금과 몽골의 침략을 막고 심지어는 북방 중원을 일부 회복하는 경향도 있었다. 물론 그 타이밍이 몽골이 성장하는 타이밍 + 금이 쇠퇴하는 타이밍인건 안 자랑 물론 그 이전대인 한, 당이나 후의 명처럼 밖의 이민족들에게 진출하여 간섭하는 수준이 되지 못하고 셔틀화 된건 사실이나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질 낮은 군대와는 다르다. 남송시대 군사력에 대한 나름의 검토 #

송의 조공 모델은 사실 근본적으로 한나라˙당나라 때도 있었고, 명나라 때도 조공 무역의 형태로 있었다. 또한 북남송 합쳐 직계왕조로 300여년을 유지한 것도 결코 쉽게 볼 수만은 없는 부분이다. 중국의 통일왕조들 중에서 300년 이상을 유지한 건 한과 송 뿐이다. 남송은 금나라에게 바로 망하지 않고 전투민족인 몽골에게 망했다. 경제력 + 군사력으로 주변국에 패권을 행사하는 강대국은 아니었어도, 적어도 경제력으로 자기나라 국방을 300여년간 땜빵할 정도는 되었다는 것이다. 송대를 문치주의, 그것도 부정적인 의미로만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피상적인 견해다.

4. 잘못된 외교정책과 두 차례의 멸망

병맛나는 국방력을 메꾸기 위해, 송나라는 문인들이 적당히 잔머리 굴려 외교책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곤 했다. 시도는 좋았지만, 이렇게 잔머리 굴릴 때마다 나라를 꼬박꼬박 절반씩 말아먹는 병크를 터뜨렸다.[16]

처음에는 중원 북쪽을 집적거리는 요를 해결하기 위해 여진(금)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 사실을 안 여진과 직접 싸워본 고려에선 사신을 보내 여진은 믿을만한 족속이 아니라고 설득했지만 듣지 않았다. 송은 요가 쿠션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제일 큰 문제는 송과 금 연합군에 의해 요가 무너졌을때 금에게 바치기로 한 공물을 그냥 씹어버렸던 것이다. 덕분에 빡친 금에게 수도까지 관광당하면서 나라 반쪽을 조공했다.[17] 이 사건이 바로 정강의 변이다.

이후 금과 철천지 원수가 된 남송은 금을 제압하기 위해 몽골과 결탁하였다.[18] 제딴엔 이이제이라고 했고, 일단은 금이 없어진 것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이후 '우왕ㅋ굳ㅋ 이틈에 삼경팔릉 수복ㅋ' 하면서 기어올라오자마자[19] 빡친 몽골에서 밟으러 내려왔다.

1259~60년에 있었던 몽케 의 공세는 명장 맹공과 가사도 등으로 다행히 막아냈다.(사실 가사도는 몽케칸사망으로 인해 몽골제국의 다음 칸을 선출해야 하는 문제로 선출되야 하는골머리를 앓던쿠빌라이와 대충 협약을 맺고 송나라 조정에는 자신이 몽골군을 격퇴했다고 보고했다...그러고는 개선해서 16년간 송나라 재상이 되어 절대권력을 휘둘렀다!).자기 맘대로 쿠릴타이를 열어서 몽골제국의 다음 으로 선출된 쿠빌라이는 1268년 내부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송나라양양으로 쳐들어 왔다. 이 과정에서 양양의 군사와 주민들은 무려 4년동안이나 외부 지원없이 막아냈으나 1273년 1월,끝내 함락당하고 말았다. 이 패배 이후로 남송은 3년만에 멸망했다. 그래도 몽골에 맞서서 20년을 버틴게 어딘가 신기하다

결국 1279년 2월, 쿠빌라이원나라에 의해 황족이 다 바다에 빠져죽는 등의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남송은 멸망한다. 마지막 황제인 조병은 8살의 아이에 불과했는데 다시는 후장상의 씨앗으로 태어나지 않으리라 라는 비참한 유언을 남기고 스승 육수부와 함께 빠져죽는다.

다만 그래도 몽골의 주공을 두번이나 격퇴했다는 사실은 상기된 남송 군사력 항목에서 서술된 대로 북송보다는 낫다는 의의가 있을 것이다.

하도 몽골에 저항을 심하게 한터라 남송 출신의 한인들은 원나라 때 심한 차별을 받고 만다.

5. 왕안석의 신법(新法)

송(북송)의 역사를 이야기 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신법이다. 인종이후 송은 재정상 큰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비대해진 관료제와 군대, 지주들의 토지겸병, 대상인의 독점행위, 세폐문제등이 재정적자를 초래하여 이에 대한 해결이 필요했다.

왕안석은 신종의 신임을 얻어 신법을 시행했다.
신법은 부국책과 강병책의 두 종류로 나뉘는데 부국책은 청묘법과 시역법, 모역법, 균수법이 시행되었고 강병책으로는 보갑법과 보마법이 시행되었다.

그 중에서도 청묘법은 20%라는 싼 이자로 농민들에게 자금을 대출해주어 자연재해로 인한 농민들을 구제함과 동시에 대지주들의 토지겸병을 막음으로서 국가재정을 충실히 하려는 의도였다.
송 대에는 호구를 따질 때 주호와 객호로 따졌다. 그 중, 주호가 주 납세층이었는데 주호 또한 5개 등급으로 나뉘었다.
(1, 2등급이 대지주, 3, 4등급이 대부분의 보통농민, 5등급이 영세농민)
그러나 대지주들은 토지장부를 위조해 은닉하기 일수여서 세금을 내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5등급의 영세농민들은 세금낼 능력이 없다보니 자연스레 3, 4등급의 농민들이 1, 2등급의 대지주의 세금까지 떠맡게 되었고, 이들마저도 몰락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폐단을 막고 대지주의 성장을 막기 위해 실행된 청묘법은 안정된 세수확보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시역법을 실시해 중소상인들을 보호하였다.

무엇보다도 왕안석이 가장 심려를 기울인 신법은 모역법이다. 당헌종때 양세법이 시행되어 원칙상 양세를 제외한 잡세는 폐지되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송대에도 여전히 양세법 하에 여러 잡세들이 많았다. 그 중 백성들을 괴롭힌게 역이었다. 일반 농민 뿐 아니라 지역의 유지들도 역을 져야 했다. 돈많은 지주야 거주지를 도시로 옮겨 역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일반 농민들을 그렇지 못해 자살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따라서 왕안석은 광범위한 여론조사와 시범운영을 통해 모역법을 시행하게 된다.
모역법은 납세층을 재산에 따라 5등급으로 나눈 후 각 등급에 맞게 세금을 거두고, 국가는 거두어진 세금으로 역을 수행할 사람을 고용하는 제도였다.

철종 즉위후 사마광등 구법당이 신법을 폐지할 때 모역법을 폐지했다는 소식을 듣자 왕안석이 탄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무튼 왕안석의 신법은 전체적으로는 적절한 개혁이었지만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고, 관리들이 실적만 노리고 부실 운영하는 등 무수한 부작용을 낳아 결국 철종 때 구법당이 세력을 잡자 폐지된다. 그 후 다시 신법당이 등장하지만 이 때가 되면 개혁의지는 사라지고 오로지 정쟁을 위해 신법을 이용하게 된다. 결국 구법당과 신법당의 당쟁심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국가랑 백성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게 된 셈이다.

6. 막강한 경제력


▲ 북송의 서울인 개봉을 그린 청명상하도(清明上河圖) 부분


▲ 청명상하도(清明上河圖) 부분2 (수력을 이용하는 물레방앗간)

수양제가 말아먹은 중국 경제는 이때 융성해졌다. 수도 개봉은 사상최초로 24시간 불야성이 되어서 상점에는 사람들이 빼곡했고, 각종 문화와 예술이 이때 꽃피우기 시작했다. 중국 수화성리학도 이때 기틀이 서기 시작했다.[20]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언제나 양쯔강 이북에 비하면 촌동네였던 강남이 확실하게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서역과의 무역이 활발해져서 막대한 무역 수익을 얻으며, 소위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불야성'이 나타난 것도 이 시기.

다시말하지만, 금이나 서하에 막대한 조공을 바치고 난 후에도 남은 양만으로도 이럴 수 있었다. 흠좀무 아니, 사실 그 양 자체가 송나라 예산에서는 막대한 조공이 아니었다. 이후 강북은 이민족한테 맨날 털려, 수천년간 농사를 짓다 보니 지력도 약해져, 강남의 경제력과 생산력을 따라잡지 못하게 된다. 평화? 이젠 돈으로 사겠어. 돈으로 사면 될 거 아냐! 얼마면 돼? 얼마면 되냐고![21]

생산력의 급증과 함께 중국의 인구 폭발도 이 때쯤 시작되어, 중국 역사 최초로 인구가 1억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세계 최초로 종이돈(지폐) "교자"가 발행된 시기도 바로 이 때다. 근대적 회계 방식인 복식부기를 시행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한의학에서 기존과 선을 긋는 사상적 전환이 일어난 것도 이 시기. 상업 발달의 산물로서 상인동업조합(행, 작)도 번성했다.

송대 이후 중국의 경제력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예컨대 화북 지방의 철강 생산량은 송대에는 3만 5천톤이었지만 원대에는 8천톤으로 격감했다.(이는 철강이나 석탄이 고갈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과장된 측면도 있다. 원나라 뿐만 아니라 명청대에도 송대의 경제력을 따라잡지 못했다는 말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수치 상으로는 따라잡지 못했다"는 말이다. 송대에는 아직 화폐 경제가 완성되지 못해서 화폐상의 경제력과 실제 경제력에 거품이 끼어있었고, 도량형의 단위도 더 작았기 때문이다. 결국 송대에 경제가 융성했던건 사실이지만 명/청을 능가했다는 것은 과장. 앞서 말한 철강도 명대가 되면서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며, 이 때가 되면 송대보다 철강의 제조법이나 품질의 차원이 달랐다. 생산량으로는 마오쩌둥기의 중국도 엄청났다. 하지만 실제 내용은 마오쩌둥 및 대약진 운동 항목 참조.

비슷한 예로 북송의 동전 발행량이 명/청대보다 많았다는 떡밥이 있는데 그건 단지 명/청대에 의 가격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애초에 동전의 원료인 동이 만성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사천에선 철로 만든 철전이 유통되었고 지폐인 교초가 발행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송대의 경제력이 전세계의 50%였다는 계산도 과장된 감이 있다는게 최근의 연구. 하지만 그 거품을 빼고도 상당했던 것은 사실이다.(다만 이는 국내 비전문가들의 논의중 나온 이야기 이다, 송대 경제력이 과대 평가란 주장을 하는 전문가들은 소수의 비주류로 취급되고있다, 일반 전문가들사이에선 과장이란 소리는 들리지 않고있다)

여담으로 이 경제사 대목은 2009년말 ~ 2010년 당시의 이글루스 역사밸리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활황 분야로, 이후 수정전쟁 속에서 절반 가량이 소실된 분량이다(...) # # 송대 경제사연구의 문제와 함정 1,2


7. 찬란한 과학기술

서구 중국사가들과 과학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점은 송대가 중국 과학기술의 절정기였다는 사실이다. 송대에는 다방면에 능통한 학자들과 박학가들이 무수히 출현하였고, 이들은 인문학적 성과를 차치하고서라도 수학, 물리학, 화학, 공학, 동역학, 건축학, 지리학, 고고학, 야금학, 기상학, 사회학, 고고학, 군사학 등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분야에서 가늠할 수 없이 다대한 업적을 남겼으며 이들이 저술한 서적과 당대의 과학적, 기술적 성취를 기록한 문헌의 상당수는 현대까지도 면면히 전해내려와 중국의 과학 발전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당대 송나라의 찬란한 과학력을 단적으로 대표하는 물건이 바로 위대한 공학자 소송이 제작한 시계탑이다. 시계탑은 동아시아 최초의 자동 시보 장치이자 이슬람 황금기에서조차 비견할 만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근대 기계장치의 끝판왕이었으며, 송대에 제작된 수많은 정교한 자동 기계들 중 가장 거대하고 뛰어나며 정묘한 오버 테크놀로지의 산물이었다.

8. 평가

중국 역사상 마지막 한족 통일왕조였던 명(明)이 워낙 실망스럽기 때문에 왠지 송을 더 쳐주는 분위기다. 이에는 지나친 서구 중심의 역사관에 대한 반감도 함께한다. 한(漢)/당(唐) 대에 이미 산업혁명의 기반이 있었다는 식의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이는 송의 발달된 과학력과 철광, 석탄의 소비량이 산업혁명 시기 영국과 비슷한량 이라 나오는 소리다. 실제 증기를 이용한 동력은 이미 당나라때 귀족들의 장난감으로 이용되어졌을 만큼 증기기관에 대해선 알고있었다 다만 산업혁명시기 영국에 비해 값싼 노동력이 상대적으로 많아 산업혁명은 사실상 힘들었다

송대가 정치적으로 꽤 안정되고 유교적 이상에 가까웠던 시대였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사실이다. 일단 정치에서부터 권력을 전횡하는 환관도 없었고, 황제의 힘을 넘보는 황후도 없었다. 이 점 역시 중대한 의미가 있다. 특히 잔혹한 혹형이 이후 시대보다 훨씬 적었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또 송 이전에 눈이 돌아가는 위진남북조시대, 수·당, 오대십국시대의 막장 행각을 보고 특히 남조의 육조시대가 아주 볼만하다., 송나라의 뒤를 이은 원·명·청나라의 피비린내나는 사태들을 생각해보자. 최소한 송나라는 피비린내는 훨씬 덜난다. 그래서 별로 기억에 안 남는다

경제적으로 상당히 융성했었고, 이를 기반으로 각종 문화들이 무르익기 시작한 시대였다. 서민 문화도 발달해서 그래서 그런지 송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이 많다. 수호지가 대표적이고... 건축적으로도 이전 시대에 비해서 복잡한 구조의 누각 등이 많이 출현하고, 의장면에서 풍부해진다.

9. 고려와의 관계

  • 중세판 동북아 균형론

고려와 송은 국초에 관계가 좋았... 지만 거란이 등장하고 여요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국제 정세에 따라 국교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게 된다. 어쨌든 고려는 송을 이용해 요를 견제하는 동시에 공무역을 통해 송에게서 막대한 이익을 취할 수 있었고, 송 역시 요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려에게 좋은 대접을 해줬다. 의천이 송으로 건너갔을 때 고려사란 절도 지어주고, 급기야는 고려의 사신을 서하의 사신보다 높이고, 조공사가 아닌 국신사란 별도의 명칭을 붙여 격을 높여주었다.[22]

그렇지만 고려는 간을 봤다.송이 원하는 군사적 대응에는 미온적이었다. 사실 송도 군사적으로 어떻게 해볼 계획은 없었으므로 쌤쌤이었다(..). 어쨌든 고려나 송, 모두 상대방에게 원한 것은 거란에 대한 견제였기 때문에 외교상의 실리가 있었다.

그런데 고려 사신에 대한 융숭한 대접과 고려와의 공무역은 송의 국가 재정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 한번은 남송의 상인들이 고려인들에게 물품을 빼앗겨 물어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송의 신하들 사이에서도 고려를 깠다. 논란이 있었다. 대표적인 게 소식(소동파). 그는 고려를 대놓고 맥적(貊狄)이라 부르며 다섯가지 이유를 들어 고려와의 관계를 개선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 내용은,

1.돈이 너무 많이 든다.
2.백성이 힘들다.
3.고려가 송에서 가져간 물품을 거란에게 갖다 주고 있다.
4.고려는 입으로는 '송을 받든다' 하면서 정작 실리만 챙길 뿐이며, 심지어 송의 지형을 그려 가고 허실을 조사하고 있다.
5.거란이 고려와의 관계를 트집잡을 위험이 있다.


하지만 정작 고려인들은 이러거나 말거나 소동파를 흠모했는데, 김부식과 동생 부철은 소식과 소철 형제에게서 이름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참고로 송과 고려의 이런 미묘한 관점 차이는 요 대신 금(여진)이 들어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흠종때도 소식이 주장했던 것과 같은 이유를 들어 고려 사신을 개봉으로 불러들이지 않고 객관에 1년이나 머물게 하다가 돌려보낸 적이 있다.

한편, 고려 입장에선 이런 북송이 갑갑하기만 했을 뿐. 시간이 날 때마다 요와 금의 상황을 알려주면서 군사를 들어 쳐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북송이 말을 들어처먹지를 않았다. 게다가 이러면서 송나라가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정강의 변이 일어나면서 수도 카이펑이 함락되고 북송 체제가 사실상 멸망하고 만다(..).

  • 북송의 몰락 - 고려의 이탈뒤통수
정강의 변 직후, 송고종은 끌려간 휘종흠종을 돌려받겠다며 고려에 사신을 보낸다. 고려와 우호를 다지는 한편, 고려를 경유하여 여진으로 가는 것이 더 빠르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물론 고려를 거쳐가면 더 느리다 사실은 고려가 남송에 줄을 설 것인지 금에 줄을 설것인지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그 정도까진 아니라도 송을 위해 여진에 중개 역할을 해달라는 의도. 간단히 말하면, 이미 전세가 뒤집힌 상황에서 균형자(고려)에게 태도를 정하라고 압박을 가한 것이다.

어쨌든 이건 무리수였다. 왜냐면, 금도 이 사실을 알게되면 여태까지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던 고려에게 조서를 내릴텐데, 실리적으로 과연 고려가 어느 제국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 바로 이 위험성 때문에 송 내부에서도 반대가 심했다.

若高麗辭以金人亦請問津以窺吳·越, 其將何辭以對?
만약 고려가 오·월을 엿보기 위하여 금나라 사람도 나루터를 물어 왔다고 말한다면 앞으로 무슨 말로써 그에 대답하겠습니까?" ㅡ 《송사》 외국열전 고려조 건염2년 10월.[23]

당연히 고려도 당황했다. 고려 인종은 난처해하면서 아예 송고종의 조서를 거부했다.[24] 명목상 신하인 고려국왕이 황제의 조서를 거부한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이후 김부식[25] 등이 사신을 접대하면서 "여진에서도 상국을 막부르는 패기의 친송주의자 우리 보고 군사를 요청하면 어쩔거임? 우리도 우리의 신하였던 여진을 섬기고 있으니 딱 보면 답이 나오지 않음? 너네는 왜 군사를 조직해서 여진을 칠 생각은 않고 여기와서 이러는 거임?" 이라며 송의 사신을 돌려 깠다(...).

그리고 이 사실을 전해들은 송고종은 고려가 은혜를 저버렸다며 크게 화가 나 길길이 뛰었는데, 심지어 어떤 신하는 고려를 공격하자고 주장했다.[26] 그만해 이 바보들아 당연한 얘기지만, 거지꼴로 강남으로 도망쳐 온 상황에서 고려를 정벌할 군사력 따윈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송에서 이렇게 격분한 것도 이해할 법은 하다. 송의 입장에선 나라가 결딴난 상황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고려에 가서 도와줄지 어떨지 운 한번 띄워봤는데, 신하에게 자존심을 버려가면서 협력을 구한 송을 고려 쪽에서 딱 잘라 거부한 것이다. 다행히 멀쩡한 다른 신하가 말렸고, 고려 쪽에서도 이내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였으므로 무마되었다. 고려의 어장관리를 얕보지 마라

  • 남송시대 - 외교 단절
하지만, 이후 다시는 북송 - 고려 관계는 복원되지 않았다. 남송은 내내 고려가 금의 첩자 노릇을 할 거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고려는 위의 사건 직후 송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모습을 보였고, 몇 차례 조공을 보내보지만, 남송은 끝끝내 이를 거부한다. 그러다가 1195~1200년 무렵에는 아예 상인들이 고려에 동전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조차 금지해버린다. 뭐 실제로 이 명령이 잘 이행되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국가와 국가 간의 정식 관계는 단절되었다. 그래서 남송 문서에 고려와의 관계 항목이 없다

남송이 이런 조치를 취한 이유는, 고려에게 베푼 조공무역에도 불구하고 실익을 얻지 못 한 점 그러니까 국경선이 가까울때 쳤으면 좋았잖아[27][28] 그리고 신하였던 고려에게 황제의 권위가 거절당한 굴욕 때문에, 가뜩이나 금나라에게 수치를 당한 황권의 위신 문제로 인하여 고려와 화친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한마디로 금나라에게도 쳐발리고 있는데 고려한테라도 복수를 못하면 대송의 권세가 어떻게 보이겠냐 라는 생각 하지만 이는 별로 중대한 문제가 아니었는데, 송이나 금이나 고려나 서로에게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 새로운 동맹 - 남송의 몰락
결국 궁지에 몰린 남송은 결국 고려 대신 새로운 군사협력 상대를 찾아낸다. 그런데 그들은 바로... 그만해 미친 놈들아 결국 남송은 서로 죽일 각오로 싸우던 금나라를 멸하지만, 마찬가지로 실익은 제대로 얻지 못하고, 오히려 금나라보다도 지독한 몽골에게 멸망 당하고 만다. 애초에 금이 무리하게 확장하여 중원의 균형을 무너트린 정강의 변까지 송나라가 원인으로 본다면, 금나라와 함께 몽골을 제국으로 키워준 1등공신이자 사이좋게 동아시아 자폭 외교를 달성한 셈이다. 또한, 눈치만 보던 고려도 이후에 여몽전쟁에 휘말린다.

10. 역대 황제

참고사항으로 황제 재위기간에 연호가 여러 차례 바뀐 관계로 명이나 청처럼 연호를 붙여서 "XX제" 형식으로 부르지는 않는다.

대수 묘호 이름 연호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기간 능호
01 태조(太祖) 조광윤
(趙匡胤)
건륭(建隆, 960~963.11)
건덕(乾德, 963.11~968.11)
개보(開寶, 968.11~976.12)
960.2.4 976.11.14 16년 284일 영창릉(永昌陵)
02 태종(太宗) 조경(趙炅)
[29]
태평흥국(太平興國, 976.12~984.11)
옹희(雍熙, 984.11~987)
단공(端拱, 988~989)
순화(淳化, 990~994)
지도(至道, 995~997)
976.11.15 997.5.8 20년 174일 영희릉(永熙陵)
03 진종(眞宗) 조항(趙恒) 함평(咸平, 998~1003)
경덕(景德, 1004~1007)
대중상부(大中祥符, 1008~1016)
천희(天禧, 1017~1021)
건흥(乾興, 1022)
997.5.8 1022.3.23 24년 319일 영정릉(永定陵)
04 인종(仁宗) 조정(趙禎) 천성(天聖, 1023~1032.11)
명도(明道, 1032.11~1033)
경우(景祐, 1034~1038.11)
보원(寶元, 1038.11~1040.2)
강정(康定, 1040.2~1041.11)
경력(慶曆, 1041.11~1048)
황우(皇祐, 1049~1054.3)
지화(至和, 1054.3~1056.9)
가우(嘉祐, 1056.9~1063)
1022.3.24 1063.4.30 41년 37일 영소릉(永昭陵)
05 영종(英宗) 조서(趙曙) 치평(治平, 1064~1067) 1063.3.1 1067.1.25 3년 331일 영후릉(永厚陵)
06 신종(神宗) 조욱(趙頊) 희녕(熙寧, 1068~1077)
원풍(元豊, 1078~1085)
1067.1.25 1085.4.1 18년 66일 영유릉(永裕陵)
07 철종(哲宗) 조후(趙煦) 원우(元祐, 1086~1094.4)
소성(紹聖, 1094.4~1098.5)
원부(元符, 1098.6)
1085.4.1 1100.2.23 14년 331일 영태릉(永泰陵)
08 휘종(徽宗) 조길(趙佶) 건중정국(建中靖國, 1101)
숭녕(崇寧, 1102~1106)
대관(大觀, 1107~1110)
정화(政和, 1111~1118.10)
중화(重和, 1118.11~1119.2)
선화(宣和, 1119.2~1125)
1100.2.23 1125.1.18 25년 329일 영우릉(永祐陵)
09 흠종(欽宗) 조환(趙桓) 정강(靖康, 1126~1127.4) 1125.1.19 1127.1.9 1년 355일 오국성부근

11. 추존 황제

묘호 시호 이름 비고
성조(聖祖) 상령고도구천사명보생천존대제
(上靈高道九天司命保生天尊大帝)
조현랑(趙玄朗) 태조 추숭, 송왕실의 시조
희조(僖祖) 입도조기적덕기공의문헌무예화지효황제
(立道肇基積德起功懿文憲武睿和至孝皇帝)
조조(趙朓) 태조 추숭, 태조의 고조부
순조(順祖) 혜원예명황제(惠元睿明皇帝) 조정(趙珽) 태조 추숭, 태조의 증조부
익조(翼祖) 간공예덕황제(簡恭睿德皇帝) 조경(趙敬) 태조 추숭, 태조의 조부
선조(宣祖) 소무예성황제(昭武睿聖皇帝) 조홍은(趙弘殷) 태조 추숭, 태조의 부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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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공교롭게도 이름이 똑같이 宋이다.
  • [2] 수호지의 소선풍 시진은 이 시씨 황족의 후예라는 설정이 있다.
  • [3] 거란이 송을 형으로 모시는 대신에 송이 거란(요나라)에게 비단 20만필과 10만냥등을 바치는 요상한 조약으로 참으로 이뭐병인 것이 재상 구준의 강력한 요청으로 마지못해 싸워서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저런 불리한 조약을 맺은 것이다.
  • [4] 사실 지휘관인 범중엄이랑 한기가 군대를 전혀 모르는 문관출신인데다 작전에서 장군들의 말을 안듣고 제멋대로 하니 당연히 발릴수밖에.
  • [5] 사실 송의 군대는 보병 중심이라도 나름대로 전술을 연구하고 대응을 잘했기에 충분히 싸울수 있었다. 문제는 송의 정부가 반란을 두려워하여 사령관을 전투경험이 없고 군대를 모르는 문관을 임명해서 보내는데다 무관들한테 지휘권도 많이 주지 않았다. 또한 지휘관과 병사들이 서로를 모르는데다 의견도 일치되지 않아 명령체계까지 개판이니 군대의 단합이 도무지 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붙으면 깨질수밖에. 그예가 바로 '''동관이다. 그에 반면에 고려는 사령관을 무관으로 임명하거나 군대를 잘아는 문관을 임명하고 무관들한테도 상당한 지휘권을 주었기에 거란, 여진과의 전쟁에서 충분히 대응을 하고 잘 싸울수 있었다.
  • [6] 단, 정규군의 전과는 국가의 공식적인 기록에 의존하는 반면 악비 등의 의용군의 전과는 후손들의 사적인 기록에 의존하는 부분이 많아서 상당히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교차 검증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 [7] 대체 무슨 배짱인지는 모를 일이다. 고려가 왜 거란, 몽골과 그렇게 피 말리는 사투를 벌여야 했는지를 잘 생각해보자.
  • [8] 이 때 금 무사 17명은 중앙에 7명, 양익에 5명씩 배치하는 진까지 짰다. 이 보병들도 제대로 훈련이 되었으면 싸울수 있었는데 문제가 훈련이 제대로 안된 병사들을 동원하니 당연히 깨질수밖에. 싸우라니까 오히려 겁을 먹고 튀어버리니....
  • [9] 어쩔수 없는 것이 목초지를 당 말기랑 오대십국 시대때 유목민족들한테 빼앗기다보니 목초지의 부족이 심각해져 기병을 양성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러니 보병 중심이 될수밖에.
  • [10] 사실 이런 문제는 송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통일 왕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로마나 다른 왕조들처럼 이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하면 되는데 문제가 송이 이민족에게 워낙 폐쇄적이다보니 그들을 멸시하면서 고용하지도 않았다. 잠깐 이용한 적이 초기에 해족 기병을 용병으로 고용한 것외에는 단 한번도 고용한 일이 없었다. 이러니 기병 전력이 확보가 안되지....
  • [11] 다만 기병 비율이 낮은데다 함부로 운용할수 없어 송나라처럼 보병중심이었다. 오죽하면 기병과의 야전을 최대한 피하고 대기병 무기로 검차를 개발했을까.
  • [12] 그예로 주전론자였던 악비를 처형한 것.
  • [13] 평야가 넓다 하지만 그만큼 사람이랑 다른 가축도 많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된다.
  • [14] 이건 변방의 군대가 지나치게 막강해져서 안녹산의 난이라는 사태가 터졌기에 그걸 방지하려고 한 조치이다. 문제는 이걸로 인해 변방의 수비력이 약해지고 만다.이동하려면 무조건 행군해야 하던 시절이니... 순환근무같은 건 꿈도 못꿨을 듯
  • [15] 이런 사태가 제승방략 체제로 대표되었던 조선의 임진왜란 때 재현된다.
  • [16] 외교에서 병크를 터뜨리고 다닌게 송이 화를 자초한 큰 원인이다.
  • [17] 사실 이때의 북송이 잦은 반란이랑 황실과 문벌 귀족의 부정부패, 사치로 내부 사정이 개판인터라 당연히 금의 침략을 막지 못한것은 뻔한 일.
  • [18] 다만 금이 순망치한 운운하기엔 좀 재수없게 굴었던 것도 사실. 송이 "즐" 할 정도였다면 금이 얼마나 남북으로 어그로만 사왔는지를 알 수 있다.
  • [19] 사실 이건 몽골과 손발이 안 맞았던 까닭이 크다. 결국 말로만 동맹군이 바로 얼라이 풀고 전쟁 크리.. 만약 이때 국경을 정하고 화의를 맺었으면 몽골이 밟을 빌미가 없었을 수가 있다는 이야기도 많다. 그만큼 송이 외교에서 저지른 병크가 크다는 것.
  • [20] 사실 성리학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한 이유가 알고 보면 흠좀무하다. 이래로 중국인에게 있어 대륙의 중심은 언제나 북중국이었다. 간단한 예시로 유비가 조를 칠 때의 대의명분은 항상 '한황실 수복'. 그러나 금이 개봉을 비롯한 북중국을 통째로 집어먹자, 남송의 성리학자들은 '이'와 '기'를 분리하여 정신적인 측면과 명분을 강조하는 '이'를 중심으로 발전시킨다. 이를 국가 단위의 논리로 발전시키면 '지정학적인 중심과 정신적인 구심점은 다를 수도 있다'는 프로파간다 전략으로 볼 수 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즉 일종의 정신승리 덕분에 정신적으로 이겼을지는 몰라도 남송 이후 내내 금에게 핍박당하고 서하에도 발리다가 결국 원나라에게 멸망당했다. 참고로 이와 비슷한 소중화 테크를 17세기 조선에서도 탔다.
  • [21] 이 시대부터 국지 평화같은 프로토타입으로 점차 모습을 잡아가던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런 이미지를 반영하여 나라가 '비옥한 강남의 토지'를 끼고 어쩌구하는데, 역사적으로는 과장된 표현이다. 양자강 지역은 원래 한족이 살던 곳도 아니었기에, 삼국시대에는 그다지 개발되지 못한 그저 그런 동네였다. 강남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어디까지나 육조시대 이후, 강북을 능가한 것은 남송 이후의 이야기이다.
  • [22] 서하도 명목상으로는 황제국이었기 때문에 의미가 크다.
  • [23] 중의적인 표현으로 속뜻은 이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금이 고려한테 강남 공략을 도와달라고 하면 어쩔겁니까?"
  • [24] 송사 외국열전 고려조 건염 2년. 대놓고 <楷有難色> "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25] 고려로선 최선의 인선이었다. 김부식은 지금까지도 악명 높은 유명한 친송주의자이다.
  • [26] 고려조 건염2년 10월. <右僕射 黃潛善曰, "以巨艦載精兵數萬, 徑擣其國, 彼寧不懼."> 우복야 황잠선이 말하기를, 큰 전함에 정예병 수만명을 싣고 가 곧바로 고려의 도읍지를 공격하면 저들이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 [27] 당시 중국대륙은 편지로만 정보를 주고 받아서 타국과의 군사적인 협력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 시대였다. 심지어 나당연합군처럼 한반도 내의 왕국을 하나씩 격파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는 제국으로 거듭나며 성장하는 기마민족이다. 한마디로, 카이펑이 함락되어 송나라가 강남까지 밀려나고 고려와 수천만리 떨어진 순간부터, 송-고려 연합이 금에게 압박을 가한다는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 [28] 물론 고려의 중립외교도 실리적이긴 하지만, 상국에 대한 의리에는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애초에 고려에서는 송의 외교적 해결론이란 생각을 전혀 이해하지 못 하고 있었다. 송은 문화승리를 노리고 있는데 고려는 왜 군사를 안 일으키냐고 답답해 했다
  • [29] 초명은 광의(匡義)였으나 형의 이름을 피휘해 광의(光義)로 바꿨다가 즉위 후 경(炅)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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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2 05: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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