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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last modified: 2015-06-15 10:46:19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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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佛敎
산스크리트어 बौद्धदर्शनम्(Bauddhadarśanam)
영어 Buddhism

Contents

1. 개요
2. 타종교와의 관계
2.1. 왕즉불 사상
3. 한국 내에서의 불교의 위치
3.1. 전근대 시기의 불교
3.2. 일제 강점기 시절
3.3. 현대에 들어
3.4. 탁발승 문제
3.5. 훈민정음 불교 관여설
3.6. 신분제도 속의 불교
4. 분파
4.1. 티베트 불교
5. 관련 용어
5.1. 부처, 승려를 뜻하는 용어
5.2. 교리 관련
5.3. 죽음과 불교 용어
5.4. 절 관련 불교 용어
5.5. 숫자와 불교 용어
6. 관련 인물
6.1. 석가모니와 불제자
6.2. 고승 및 불교 사상가
7. 신적 존재
7.1. 불·여래
7.2. 보살
7.3. 명왕
7.4. 그 외
8. 종단 목록
8.1. 유관 단체
9. 영향을 주고받은 종교와 사상(가)
10. 불교/신도
11. 사족

1. 개요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음으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짐으로 저것이 사라진다.
불교의 대표적 사상 중 하나인 연기법을 설파한 문장. 깊이 들어가면 한도끝도없지만 결국 한 문장으로 묘사하면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더욱 더 줄여말하자면 '원인없는 결과는 없다'라고 대충 요약할 수 있다.

정각자(正覺者) 붓다(बुद्ध, Buddha)(두 단어 모두 '깨달은 사람'을 뜻함)를 교조(敎祖)로 삼고 그가 설(說)한 교법(敎法)을 종지(宗旨)로 하는 종교. 붓다는 흔히 석가모니(釋迦牟尼)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샤캬족의 성자'라는 의미인 '샤캬무니(Shakyamuni)'를 한자로 음역한 말이다.

세계의 대표적인 3대 종교 중 하나. 종교라는 한자어를 맨 처음 발명해 낸 종교이기도 하다. 유교, 도교, 경교 등이 모두 부차적인 가르침이고 불교가 으뜸가는(宗) 가르침(敎)라고 표현한 데서 시작되었다. 최근에는 힌두교의 신자 수가 재평가되어 4대 종교로 보기도 하지만 중국의 불자 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 이 통계에 따르면 중국의 불자 수는 최소 1억 명에서 최대 12억 명까지 들쑥날쑥하지만 보통 4억은 넘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중국 정부도 그리스도교 견제 및 전통문화 발전을 위해 불교를 밀어주고 있기 때문에 이를 감안할 필요가 있다.

불교라는 말은 첫째로는 석가모니가 설한 교법이라는 뜻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釋敎 또는 석씨교라고도 한다. 단 이 표현은 조선시대에 사대부들이 여래라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고 석가모니를 일개인으로 취급하며 쓴 말로, 요새는 잘 쓰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최초 전래되었을 때는 반대로 "얼핏 석씨의 말과 유사하나 오직 기복(기도로써 복을 구함)만을 강조하며 석씨의 깊은 사색에 훨씬 못미친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였다.

둘째로는 부처가 되기 위한 교법이라는 뜻이 포함된다. 불(佛:불타)이란 각성(覺性)한 사람, 즉 각자(覺者)라는 산스크리트 ·팔리어(語)의 보통명사로, 고대 인도에서 널리 쓰이던 말인데 뒤에는 특히 석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불교는 석가 생전에 이미 교단(敎團)이 조직되어 포교가 시작되었으나 이것이 발전하게 된 것은 그가 죽은 후이며, 기원 전후에 인도 · 스리랑카 등지로 전파되었고, 다시 동남아시아로, 서역(西域)을 거쳐 중국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고(한국 불교의 역사 항목 참조), 한국에서 일본으로 교권(敎圈)이 확대되어 세계적 종교로서 자리를 굳혔다.

14세기 이후로는 이슬람교에 밀려 점차 교권을 잠식당하고 오늘날에는 발상지인 인도에서는 크게 세력이 약화되었다. 일부 카스트 제도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하층 계급, 일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불교 신도가 느는 현상은 있다. 마하라슈트라주에는 불교 정당이 있을 정도. 그 외에도 티베트에서 망명해온 티베트 불교 승려들의 포교도 인도 불교 신자 수 증가의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물론 그래봤자 인도 전체 인구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1]

인도 이외의 지역에서는 현재 스리랑카 · 미얀마 · 태국 · 캄보디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티베트 · 몽골 · 한국 ·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에 많은 신자가 있으며, 요즘에는 서양에서 크게 평가되어 유럽 · 미국 등지에서도 교세가 넓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티베트 불교나 일본 불교(젠 부디즘)이 중심이었는데, 근래에 들어서는 한국에서 출가한 서양인 승려들이나 불자 교민들의 불사와 노력을 통해 한국 불교도 점차 퍼져나가는 중이다. 그리고 대체로 서양인들은 불교를 '믿는다'(Trust)라고 하기보다는 '공부한다'(Study)라고 표현한다.

아프리카에는 불교 신자가 별로 없다.(네이버 지식iN 베스트에도 선정된 내용이다)다만 최근 짐바브웨에서 불교 신자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종교 분포에서조차 표시가 되지 않을 정도다. 그나마 불자가 제일 많은 곳이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도 전체 불자 수로 보나 인구대비 불자 수로 보나 Atlas of religions 아직까지는 세계에서 순위권에 들지 못하고 있다. 위키백과세계의 불교(영어) 내용에 따르면 9억여 명의 인구가 있는 아프리카에서는 불자 수도 10만여 명에 불과하고 인구에서 불자가 차지하는 비율도 0.012%로 가장 낮다.

(ɔ) TheGreenEditor from

인구 대비 불자 수가 많은 나라들은 스리랑카를 제외하면 동아시아동남아시아에 있다. 이 지도에서 색이 짙을수록 인구 대비 불자 수가 많다는 뜻이다. 예전 자료에는 북한에 약 60% 가량의 불자가 있다고 되어 있었지만, 물론 실제 북한에 그 정도 불자가 있다는 건 오류. 종교인만 집계하면 저 정도 나오겠지만.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남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불자가 많은 섬이 하나 보인다. 오스트레일리아령 크리스마스 섬. 이름은 '크리스마스 섬'인데 불자가 그리스도인보다 많다는 게 유머 전세계적으로 골고루 퍼진 천주교개신교와는 달리 불교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중심으로 소규모로 퍼져있으며 저기 바다건너 대륙에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유럽에서는 칼미크 공화국(러시아의 자치 공화국)이 유일한 불교 국가이다. 이유는 칼미크 공화국은 몽골계 민족 칼미크인이 중심이 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과거 약 5만명의 오이라트 인이 이 지역으로 이주한 것이 칼미크 족의 기원으로 이들이 불교를 믿고 있어 불교를 국교로 삼게 되었다. 칼미크 남쪽은 다게스탄 공화국, 체첸 공화국 등 이슬람 신자가 많고, 칼미크 북쪽은 정교회가 지배적이라 이슬람정교회 사이에 불교가 끼어있는 오묘한 상태. 일찍이 러시아엘리자베타 여제 시절에 불교를 러시아 제국의 종교들 중 하나로 인정하였고 칼미크뿐 아니라 동시베리아의 투바부랴티아에서도 불교 세가 강하다.

다른 여러 종교와 비교하여 불교가 지니는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神)을 내세우지 않는다. 석가모니가 후에 이상화(理想化)되고 확대되어 절대(絶對) ·무한(無限) 및 그 밖의 성격이 부여되고, 각성과 구제의 근거가 되고 있으나 창조자 ·정복자 ·절대자와 같은 자세는 취하지 않는다.
  2.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로 대표된다.
  3. 자비는 무한이며 무상(無償)의 애정이라 할 수 있어, 증오(憎惡)나 원한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일반적으로 광신(狂信)을 배척하고 관용(寬容)인 동시에 일체의 평등을 관철하고자 한다.
  4. 지혜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발전하는데, 일체를 종(縱)으로 절단하는 시간적 원리인 '무상(無常)'과, 일체를 횡(橫)으로 연결하는 공간적 원리인 '연기(緣起)'가 중심에 있어, 이것은 후에 '공(空)'으로 표현된다.
  5.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경향이 강하다.
  6. 모든 일에 집착과 구애를 갖지 않는 실천만이 강조되고 있다.
  7. 조용하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 각성(覺性:解脫)을 이상의 경지(境地)로 삼아 이를 열반(涅槃)이라 한다. 그 교의(敎義)는 석가모니의 정각(正覺)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8만 4,000의 법문(法門)이라 일컫듯이 오랜 역사 동안에 교의의 내용은 여러 형태로 갈라져 매우 복잡한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불(佛)도 본래는 석가 자체를 가리켰으나 그의 입적(入寂) 후 불신(佛身)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 2신(身) ·3신 등의 논, 또는 과거불 ·미래불, 또는 타방세계(他方世界)의 불, 보살(菩薩) 등의 설이 나와 다신교적(多神敎的)으로 되었다.
  8. 모든 것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는 원융무애 사상을 따른다. 이로 인해 과거, 현재, 미래[2]의 고통스러운 굴레(생로병사)를 맴돌기 때문에, 해탈(부처의 경지에 오름)에 이르기 위해 불교의 가르침이 있으며 수행(배움) → 깨달음 → 실천을 통해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이 깨닫는 순간 생로병사를 반복하는 굴레에서 벗어난다고 본다.

원래 원산지(?)가 인도인지라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종교 자체는 "중도"를 중시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고행을 배척하는 면이 있다. 또 여성을 멀리하고 어느 정도 천시한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초기 불교 시절에는 "여성은 성불할 수 없기 때문에, 성불할 때는 다음 생애에서 남성으로 태어나 불도를 이룬다"는 설명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엄격한 신분제도 및 남녀구분이 극심했던 초기 불교 시대에서는 가히 코페르니쿠스적인 사상적 전환이나 다름없었다.

각 나라별로 퍼지면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사후 세계가 상당히 복잡한 편이다. 기본적으로 욕계, 색계, 무색계로 나뉘어져 있으며 흔히 말하는 '육도'는 욕계의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과 28개의 천계(하늘나라)를 묶어 가리키는 말이다. 세상을 순환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좋은 세계에서 신으로 태어난 존재라도 수명에는 한계가 있으며 결국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무수한 삶을 되풀이 한다고 본다. 초기 부처의 설법 내용을 담은 게송에는(출처 <법구경>) "우주를 다스리는 제석천이 되는 것보다 깨달음의 흐름을 붙잡은 경지를 이루는 것이 더 낫다"는 내용도 있었다.

한국의 불교 종단은 2008년 기준 총 106개이며, 그 이상일 수도 있다.

2. 타종교와의 관계

불교는 모든 '깨달은 자'를 부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종교의 신에게 무척 관대한 편이라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불교도들의 생각일 뿐 사실은 본지수적 적, '부처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다른 종교의 창시자나 성인으로 환생하거나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여 불교 외의 모든 종교를 불교의 열화상태, 혹은 하위호환으로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불교가 중국에 들어올 시기에, 불교측에서 도교의 창시자인 노자를 가섭보살의 환생이라고 우기는 일이 있었다. 위경까지 쓰면서 그래서 불교가 상당히 광오한 가르침이지만, 그것이 결국 자신과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타 종교보단 온건적인 대응을 하면서 타 종교를 배척하며 폭력을 벌일 이유가 없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교는 원래 석가모니으로서 모시지는 않는다. 원류는 아리아족의 윤회신앙이지만, 발전하는 과정에서 탄탄한 존재론과 인식론같은 철학적 바탕까지 자생적으로 갖추었다.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 같은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가 오로지 '신앙'에서 시작하여 중세에 가서야 그리스도교와 고대 철학이 가미되어 합리성을 갖춘 것(예를 들어 교부철학, 스콜라철학)과는 사뭇 다르다.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서양에서는 종교 보다는 하나의 철학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religion이 "종교"라 번역되었지만 사실 "믿는 것" "믿음"에 가까운 의미이며 우리의 종교란 단어는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불교가 "종교"라는 한자어를 잘 반영하고 있는 셈. 아니 애초에 종교라는 단어 자체가 불교를 지칭하다가 후에 의미가 확대된 것이다. 어차피 과학적으로 검증이 안되는 윤회를 믿는 것 자체만으로도 얄짤없이 종교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현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유화적인 게 특징이다.그러나 평신도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이들이 석가모니 중심의 다신교를 믿고 있는 것은 아닐지 의심되는 면이 없지는 않다. 냉정히 말해 평신도들의 기복적인 신앙 모습은,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불자가 아니면 다신교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럴 때는 이 부처/보살에게 빌고, 저럴 때는 저런 부처/보살에게 빌고(…). 하지만 이를 크게 탓하기도 뭐한 것이, 불교의 기본은 자력으로 스스로를 구제하는 자력 귀원이 중심이긴 하지만 초기부터 이미 부처/보살의 가피력으로 구원받는 타력 구원관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의 모습처럼 복을 내려주는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아마도 이러한 다신교적인 특징은 발생지인 인도에서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 전설이나 의례, 관념에서 비슷비슷한 부분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밀교.

일단 이 대한민국이라는 토양 자체가 그 어떤 종교가 들어오든 무조건 기복신앙으로 변질복을 주지않는 다면 썩꺼져라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측면도 있다. 이건 종교 문제가 아니라 한국인 자체의 특수성으로 봐야 한다.

물론 불교는 부처의 가르침에 귀의하여 그 제자가 되고 가르침을 실천할 것을 주장한다. 즉, '가르침' 그 자체를 믿고 따르는 것. 그런 면에서는 확실히 종교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타종교 배척적 성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 당나라 시절 도교, 경교와 함께 타 종교 배척, 숙청전이 꽤 화려했다. 지금의 힌두교를 보면 알겠지만 다신교라고 타 종교에 융화적인건 절대 아니다. 현대로 보면 타문화에 대해 가장 유화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면은 현대 문명과 실시간으로 치고 박으면서 가장 잘 적응한 모습을 보여준 그리스도교를 능가할 정도. 메이저 종교 중 폭력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적은, 몇 되지 않는 케이스 중의 하나이다. 나의 분노, 나의 자긍심으로 이슬람교 선교 와중 및 현재 보수적이란 이름으로 벌어지는 폭력에 대하여 비판하였던 이탈리아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더불어 그녀의 책에서는 그리스도교도 유태교도 비판하였다. 자신은 가톨릭을 믿지만 십자군 전쟁이니 제국주의로 보여준 그리스도교의 구역질나는 행태를 절대로 좋게 봐줄 수 없다고 했다)는 불교를 참 대단하다고 평했는데, 불교도 갈등이나 권력자들의 이용을 당한 것(일본 전국시대 당시 승병들)도 있지만 이건 그리스도교, 이슬람, 유대교, 힌두교를 비롯한 무수한 종교가 다 같은 적이 있기에 불교만 문제라고 할 것도 없고 적어도 불교는 다른 종교를 학살한 기록이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 하나로도 놀랍고 칭송받을 점이라고 호평했다. 종교 자체가 불살을 기본 교리로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태국에서는 태국 남부에 이슬람교 믿는 지역들에 불교도를 이주 시키고 승병도 나타나는 등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불교가 역사적으로 벌였던 폭력이 아예 없는 게 아니다.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와 쿠샨 왕조 같은 경우엔,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주변국들은 정벌하고 먼 나라에서는 고승들을 파견해 전도하는 방법을 썼다. 한반도의 경우, 고려 시대 신 정권 시절 교종 계열 종파 승려들이 무신 정권에 대항해 난을 일으키기도 했고, 조선이 건국된 후 일부 고위 승려들이 하급 승려들을 모아서 조선 정부를 타도하고 불교국가의 부흥을 꾀하고자 당취(黨聚)라는 조직을 만들어, 계율을 어겨 타락한 승려를 응징함과 동시에, 주변 절들과 마을에 약탈과 방화, 살인을 벌이기도 했다(여기에서는 땡초를 참고).

여기서 당취는 땡추중, 즉 땡중의 어원이 되는 단어다. 당취 → 당초 → 땡초 → 땡추 → 땡중. 일설에 따르면 이 당취는 임진왜란승병의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조정에서 불교의 대우를 개선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어 거병케 했고, 전쟁이 끝나고 어느 정도 개선이 이루어져 많은 당취들이 양지로 나오게 되었지만,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여전히 승려들을 무시했으며 큰 개선은 없었다. 금강산 당취의 잔재세력인 운부(雲浮)는 조정의 태도에 불만을 품고 장길산과 손을 잡아 1696년(숙종 22) 봉기하여 거사를 도모하려 했다.

그러나 일면에서는 국초보다 불교에 대한 실질적 상황이 좋아졌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다시 지어진 '법주사 팔상전'을 보면 새롭게 힘을 얻게 된 부농층과 상인계층이 공사에 크게 힘을 실어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사대부들 중에서도 남들 앞에서는 불교 엄청 까대면서도 정작 본인 죽고난 뒤에는 49재를 반드시 올리도록 지시한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그런데 이건 불교의 상황이 좋아진 게 아니라 그냥 보험취급 아닌가요? 일단 왕실부터가 불교 신도들이 많았으니...

또 불교가 메이저인 동남아 근방에선 전쟁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도쿠가와 막부 초기에 키리시탄 탄압때 제일 먼저 나선 종교가 불교였고, 상당수의 스님들이 앞장서서 후미에를 실시했다. 그 이유는 오다 노부나가가 원래 무신론자에 반불교 성향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반대하는 불교 세력들이 많아, 이 불교 세력들을 억제하기 위해 기독교를 지원한 데에 있다. 그러니 오다-도요토미 정권에 반하는 입장인 도쿠가와 막부에선 키리시탄들이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으며(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리스도인들의 횡포 때문에 바테렌 추방령을 내리는 등 기독교 신앙에 압박을 가했지만 이것은 치안 유지의 차원이었지 신앙 자체는 인정한 상태였다.), 이때 불교는 더더욱 반 기독교 성향이었다. 기독교 금교령을 내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모든 백성들이 불교도가 되도록 할 정도로 독실한 불교도였지만, 당시 기독교 교리 자체가 일본 사회에 맞지 않았던 이유가 크다. 기독교 자체가 유일신 신앙이라 다신교 성격을 띈 불교와 아예 다신교인 신토를 부정할 수 밖에 없으며, 생명을 중시했기 때문에 할복을 금지시켰고, 일부다처제도 부정하기까지 했으니 기독교의 확산은 당시 근세 일본 사회에 있어 위협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본은 불교 국가중 메이지 유신 때는 오히려 불교를 억누르고 신토를 분리시키려 하기도 했다지만, 일본이 조선을 침탈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정책이 바로 승려에 대한 도성 개방이었다. 그러고선 정작 신사참배를 시켰지.

현대에 들어서 불교와 연관된 종교전쟁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어서, 스리랑카 힌두교 계열 소수민족 타밀족과 불교국가 스리랑카 정부간의 분쟁이 한때 격심했다. 현재는 충돌이 많이 약해졌지만, 흔히 아는 폭탄조끼 자폭 테러도 실은 스리랑카가 원조(라고 하지만, 물론 불교도가 한게 아니라 묘하게도 타밀족 힌두교 신자들이 벌이던 자폭테러를 이슬람 과격파가 따라하면서 이슬람 과격파 이미지가 되었다는 것)(...)

게다가 스리랑카 측도 불교급진파가 늘면서 힌두교 말고도 소수 이슬람이나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굉장한 거부감을 보이고, 교회나 마스지드를 불교성지에 지었기에 불교시위대가 가서 없애버릴 것을 요구하는 게 늘어났다. 역시 인구 대다수가 불교도인 타이에서도 소수 이슬람과 갈등으로 이슬람 급진파 공격을 받자 승려들이 무장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다만 타이 항목이나 스리랑카 항목을 참고하면 좀 복잡한 면이 있다. 스리랑카의 경우 싱할라불교 근본주의 단체인 부두발라세나의 영향이 크다. 스리랑카 내에 반이슬람 여론을 강력히 이끌어가고 있으며, 종교의 영역뿐만 아니라 수틀리면 정치의 영역으로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천명하고 있다. 미얀마의 극단주의 불교세력인 969과도 협력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탈레반이랑 다름없는 수준.

또한 이슬람교, 기독교와는 상당히 악연으로서 이들의 우상파괴 논리에 의해 수많은 미술품이 파괴되고 박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아프간 탈레반들이 바미안 석불을 파괴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 적어도 불교와 불상에 있어서만은 이와는 반대로 동남아미얀마 등지에서는 불교도들이 이슬람교도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혹은 모스크를 불태우거나 하는 일도 있었다.

힌두교하고도 사이가 좋지 못해서 힌두교 경전을 보면 불교를 비하하는 대목이 상당히 많다. 이것은 불교도 마찬가지. 불전에는 흔히 바라문교라고 나온다. 흔히 사람들에겐 힌두교에서 비슈누의 화신 중 하나가 붓다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 비슈누가 붓다로 변신해서 악마들을 타락시켜 그들의 힘을 빼앗으려던 것이다. 불법은 정법(正法)이 아니므로 악마들이 불법을 믿게 되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서 힘을 잃게 된다는 논리. 결국 엄청난 불교 모독인 셈이다. 로저 젤라즈니의 소설인 신들의 사회에서도 이러한 관계를 차용한 장면이 나온다.

유교와는 역사적으로 사이가 나쁜 편. 특히 고려 왕조 때 국교 격까지 갔었던 유교조선왕조에 들어서 불교를 밀어내고 국교로 지정되면서, 조선왕조 시절 양반들과 호걸 및 관료들이 불교와 승려를 탄압하고 천시하게 되면서 사이가 나빠진 편이다. 게다가 신분제도에 있어서도 승려는 하층민 계통인 천민에 속하기 때문에 조선왕조 시절에는 유림과 양반들로부터 천대와 멸시를 당해왔고 일부 승려들은 노비, 백정, 평민들과 함께 궁궐 복원공사 등에도 동원되는 등 우여곡절이 있다.

양반들은 이렇듯 불교와 승려들을 천대하고 억압하였지만, 유림과 관련없는 평민들과 천민들은 불교에 대해서 우호적이거나 신앙적인 면이 있었다. 조선왕조 때는 양반과 유림을 제외하고 평민과 천민들 사이에서 믿었다.

도교와의 관계는 지금이야 별 것 없지만 한때 잘 나갔을 때는 역사상으로 엄청나게 치고 받았다. 불교가 공격성을 보였던 드문 사례. 그런데 도교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어느 정도 불교를 압도하던 중국 당송 시기에도 당송 이후 도교 지원이 줄어든 다음에는? ...노 코멘트. 참고로 그 시기 도교는 이렇다 할 국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으니 유일하게 비빌 언덕이 민간이라 철저하게 민간신앙으로 파고들어 민간도교 시대로 접어든다. 안습.

도교 역시 불교에 대한 음해(?)는 존재하여서 노자의 사망이 불분명한 것을 이용, 석가=노자(혹은 가섭존자=노자)라고 주장하거나 불경을 "서쪽으로 떠난 노자의 이론이 되돌아온 것"이라 하곤 하였다. 이것을 노자화호설이라 하는데, 이 노자화호설은 불교 대중화를 위해 불교 쪽에서 먼저 퍼뜨렸다는 주장도 있어 애매하다. '불교의 중국 정복'(에릭 쥐르허 저)이란 연구서에서는 노자화호설의 문헌 등장이 불교에서 먼저 나왔다는 점을 들어 불교측의 창작 설을 지지하고 있다. 암튼 이 설은 도교에서 잘 써먹다가 결국에는 원나라 당시 도교와 불교(정확히 말하면 티벳 불교)와의 교리논쟁에서 비판받았지만, 지금도 중국에서는 널리 퍼져있는 이론이다. 뭐, 지금 와서는 민간 신앙과 도교와 불교가 사이좋게 이리저리 뒤섞여서 구분하기도 힘든 상태지만.

한국에서도 역사적으로 도교와 충돌이 있었다. 고구려 연개소문이 옛 귀족세력과 연결된 불교를 억제하기 위해 도교중국에서 수입하다가, 이것이 상당히 갈등을 일으켜서 고구려 멸망의 원인의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건 도교와 불교의 충돌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정치적인 사건이다. 연개소문영류왕을 쿠데타로 시해한 것은 당시 불교의 왕즉불 사상에 위배되는 행위였기 때문에 수많은 불교도들의 반발이 있어왔다. 연개소문도교를 들여온 것은 바로 이 반발을 억제하기 위한 일종의 사상통제책이다. 더욱이 연개소문과 사이가 좋을 리 없는 기존 정치세력들의 종교는 불교와, 불교랑 결합한 상태인 토착신앙이었다. 그런데 도교와의 충돌에 대해서는 고구려 후기부터 고분벽화에서 불교적인 요소가 점차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이기에, 이에 대해서는 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아도 다소 비판적인 주장도 있다.

당나라를 배경으로 한 명나라 때의 서유기에서는 불교와 도교가 중심적 위치를 반반씩 갖고 있다. 당장 손오공의 스승인 수보리 조사가 불교+도교적인 인물로 나온다. 손오공이 요괴에 홀렸던 왕에게 "삼교(유교까지 합쳐서)를 골고루 신봉하여 도사도 공경하고 스님도 존경하며 유능한 인재를 많이 기르시라"고 훈계하는 장면도 2번 정도 나온다. 이는 동북아시아의 전통적인 삼교론에서 나온 것으로, 당시에는 특별히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 후한 시대에 불교가 들어올 때만 해도 중국인들은 오랑캐의 가르침이라면서 불교 유입에 민감했다. 한대에 융성했던 유교 문화는 현실적, 윤리적인 도덕 철학을 강조했는데 그 때문에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중국인들은 불교 이론을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위진남북조시대, 오호십육국시대를 거치며 중국 대륙이 쑥대밭이 되는 과정에서 불교가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그 이유는 불교의 사상이 민중의 정신적인 귀의처가 되어주었고, 윤회론에 입각한 내세관, 방대한 경전체계, 인도 의술에 능통한 승려들의 의약구제, 위정자들에게 부담이 없는 구세이념[3], 전술 지식을 알려주는 신승들의 전술적 가치, 한족 중심적이었던 유교와는 달리 호(胡)족들에게 친화적이었던 이방 이념들이 당시 중국인들의 필요조건에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은 불교 도입에 상당히 온건했다. 유달리 한국에서는 불교와 토속신앙 간에 융합이 빠르게 이루어졌기에, 토속신앙의 불교화와 불교의 기복적/주술적인 토속신앙의 의례/관념 수용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당장 현재 한국동남아 불교의 같은 의례를 놓고 비교해도 엄청나게 다르다. 물론 그렇다고 뵌교와 티베트 불교의 경우처럼 완전히 동일화되어 버리진 않았다. 현재의 무속이나 민족종교를 봐도 불교를 일부 차용했을 뿐, 불교와 완전히 동화된 것은 아니다. 물론 승려보살로 칭하는 무속인들의 경우에는 상당히 불교색이 강하지만, 무당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지역별/개인별 차이는 크며, 오히려 근래에는 민족종교로서의 의식으로 차별성이 두드러지는 추세이다.

사실 현재 한국불교와 토속신앙의 강한 유착관계는 불교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토속신앙과 섞인 것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미륵 신앙. 기복적인 토착 천신/용신 숭배사상과 완전히 결합하였다. 이러한 문화가 고착화된 것은 조선시대 숭유억불의 영향이 컸다. 숭유억불 정책 하에서 불교와 토착신앙이 살아남기 위해 융합하면서 남사당패, 점이나 굿을 하는 스님들이 대거 등장하게 된 것. 현재 한국 불교와 무교 양측에서는 예전처럼 꼭 결합해야만 할 일도 없기에 각자 개성을 살리는 쪽이긴 하나, 불교 종파마다 차이가 크다. 일례로 대한불교조계종 같은 경우 순수불교 정신을 내세우며 절에서 하는 천도재, 49재 등도 대폭 간소화한 데 반해, 한국불교태고종 같은 경우 예전부터 내려오던 기존의 의례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민속원에서 출판한 연구논문서인 '한국인의 죽음과 사십구재'(구미래 저)에 따르면 이 때문에 신도들이 조계종의 단순한 의례에 만족을 못해, 태고종 스님들을 모셔오거나 의례를 배워와서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국 불교계에서는 이러한 부분을 불교 포교를 위한 방편으로서의 측면만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다. 학계에서는 역사적 사례나 불교하고 아예 접점이 없는 가택신 신앙(특히 조왕신)이나 북두칠성 신앙, 민간신앙에서 불교를 철저하게 무속신의 일부로 보는 점 등을 근거로 인정하지 않거나, "불교의 대중화"와 "불교화된 민속신앙"을 엄연히 구분해야 한다고 본다.(참조도서 : 불교문화와 민속(홍윤식 저)). 실제로 현재 국내에 조왕신 신앙의 흔적을 사찰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오히려 일반 민가보다 더 쉽게 찾을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또 북두칠성연명경처럼 기복적인 토속신앙의 영향하에 만들어진 경전도 있다.

게다가 산신이나 칠성같은 경우 포교를 위한 방편이니 신중이니 하는 것은 말뿐이다. 대웅전 내 한 구석에 작게 신중전을 차려놓는 선에서 끝나는 게 일반적이고 절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적어도 현재에는)거의 없는 불교 신중들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우가 좋다. 당장 우리나라 절에서 산신과 산신재 혹은 산신법회가 차지하는 비중을 떠올려 보면 답이 나온다. 오리지널 불교 신중들(천룡팔부)에게 그 정도 대우가 없다. 삼국유사를 봐도 제석이나 사천왕은 토속신앙의 천신/오방신 신앙과 결부되어(사천왕사에 토속신인 오방신을 모셨다고 나온다) 해당 위격을 모시는 절이라도 있었지, 나머지 신중들은 그런 것도 없었다. 재를 지낸다 해도 소규모인데다 대부분 예불 때 신중단을 바라보며 반야심경 읽는 정도가 고작. 그마저도 신중단에 반야심경을 읇는 것은 신중을 높이는 의미에서 독경하는 게 아니라, 신중에게 설법을 하는 의미로서 읽는 것이다.(최준식 저, <조선의 도인들>참조.) 근대 조계종의 불교개혁운동 이전에는 신중단에도 절을 하였으나, 성철스님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승려가 부처님을 수호하는 신중에게 절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되었다.

이에 비해 토착신앙에서 유래한 산신이나 칠성신은 대부분 전용 건물도 따로 있는데다 관련된 재와 법회도 정기적으로 지내주고, 불교를 잘 믿고 선행을 하면 복을 주고 도와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독자적으로 징벌을 내리는 강력한 호법신으로 인식하고 있다. 원광대 조용헌 교수는 저서 <조용헌의 사찰기행>에서 이러한 인식을 법(부처)은 멀고 주먹(산신)은 가깝다줄요약한 바 있다.(...)

일본의 경우 신토와는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앙숙으로 지내 왔다. 실제로 불교가 처음 일본으로 도입될 당시 위에서 나온 대로 귀족 정치싸움과 맞물려 친불교파인 소가씨와 반불파인 모노노베씨 간에 엄청난 충돌이 일어난데다, 일본에서 인기가 많았던 불교 교파는 현세구복과 주술력을 강조하는 진언종 같은 밀교 교파가 주류였다. 당연히 현세구복을 중요시하던 토속신앙인 신토와 이권다툼(?)을 벌일 수 밖에 없었는데, 이때 모노노베 씨와 신토가 소가씨/불교 세력에 밀려나 버리고 만다. 이때부터 소위 본지수적(불교의 부처/보살이 중생 구제를 위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불교 교리에 입각하여 기존 신토의 신들을 모두 불교의 부처/보살의 화신(아바타)로 격하시키고, 나중에는 아예 전원 신중으로까지 눌러댔다. 우리나라의 경우 토속신앙의 신 중 신중 취급을 받은 신은 산신/용신, 칠성신 정도고, 그나마도 대부분 독자적인 전각(칠성각, 삼성각 등)을 세워 따로 모신 것에 비하면 큰 차이점이다. 일본에도 사찰 안에 작은 신사를 세운 사례는 있으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고, 그 빈도도 웬만한 절이면 거의 토속신앙의 신을 모신 제대로 된 전각이 있는 한국에 비하면 좀 안습인 경우가 많다. 적당한 데 석등만한 가미다나 차리고 끝이라든지. 물론 우리나라도 비슷한 경우는 있지만 이 경우 밀교적인 종파(진각종, 천태종)거나 절이 작아 대웅전 안에 합사하는 경우고, 일반적인 종파의 경우 그런 절이라도 역시 산신과 산신법회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신중은 웁니다 엉엉엉

이후 신토는 지속적으로 불교의 위세 앞에서 큰 힘을 내지 못했다. 에도 막부 중기에 민간의 아마테라스에게 복을 비는 관습이 등장해 사정이 나아진 적이 있었다. 당시 일본인들의 기복신앙은 대단해서, 아마테라스에게 복을 비는 순례시 봉건질서를 무시하는 행위를 민중들이 저질러도 막부에서 어지간하면 눈감고 넘어갈 정도였다. 이런 시절에도 일본 정토진종의 승려들이 부처극락 신토지옥!!!을 외치며 민중들의 신사 참배를 제지하는 행위를 하다 문제가 생겼을 정도.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신토가 불교를 누른 것은 에도 말~메이지 유신 초기를 거치면서 일본 철학계에서 자체적으로 불교에 대한 검증과 비판이 일어나고, 한국에서 넘어간 성리학 사상을 기초로 한 반불교적/국수주의적 국학 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였는데... 그 결과물은 바로 국가신토. 안습. 물론 형식적으로는 국가신토가 몰락한 지금은 별탈없이 잘 지내는 편이다.

동아시아 불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처음 불교가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도입될 당시 부처=신이라는 관념 하에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불교의 부처/보살이 기존의 신선과 동일시되고, 불교 도입시 주술적인 기복신앙이 중심이 되었던 점이나, 토속신앙에서 신과 부처를 혼용/동일시하거나, 삼국유사의 불교 도입 당시 신라 귀족들이나 일본 사서에서 모노노베씨의 불보살들을 외국의 신으로 부르고, 불교 도입에 찬성한 소가씨 역시 외국의 신이라는 주장 자체에는 반발하지 않는 모습이 보인다. 다만 이는 동아시아에서 유달리 두드려져서 그렇지, 동남아권 남방 불교나 인도 본토에서도 어느 정도 나타난 현상인 것은 사실이다. 미얀마 같은 경우에도 토속신앙인 낫(정령)이 불교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인도 본토에서도 인도의 토속신앙의 신들을 부처/보살, 명왕, 신중 등의 표현을 붙여서 흡수하기도 했다. 지모신 숭배가 모태가 된 지장보살이나 바라문교의 천신이었던 제석천, 아수라의 왕이었다고 나오며 북두칠성 숭배와 연관되어 특히 밀교에서 중시하는 대일여래 등이 대표적인 케이스.

이에 덩달아 석가모니 역시 신격화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물론 석가모니 본인은 이를 엄금했었던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 석가 본인이 자신의 상을 만들어 숭배하지 말라는 율령을 남겼다. 초기 불교 시대에는 이것이 철저하게 지켜져 기껏해야 부처의 발 모습을 본뜬 족적이나, 불법을 상징하는 수레바퀴(법륜) 문양을 만드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2.1. 왕즉불 사상

동아시아 지배계층에서 불교가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왕즉불 사상을 이용한 것이다. 유교는 천명(天命) 사상에 따라 군주에게 유교의 도덕 규범에 따라서 행동할 것을 요구하며 군주의 즉위와 행동에 혈통적 정통성을 강하게 강조한다. 하지만 불교는 숭불의 군주를 부처와 동일시 하며, '불법'을 존중하는 군주를 훌륭한 군주로 볼 뿐. 혈통의 정통성이나 군주 개인이 지켜야 할 도덕 규범은 크게 중요시 하지 않는다. 물론 불교 역시 상당한 도덕성을 요구하지만, 불교의 계율은 '수행자'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세속인'에게는 상당히 널럴하다. 왕의 모든 행동을 일일이 제약하는 유교의 예절과 비교하면 속인인 왕으로서는 매우 편하다.

이는 전륜성왕에서 비롯된 말로. 고타마 싯타르타가 부처 아니면 전륜성왕이 될 운명에서 따와, 왕은 곧 부처이니, 백성들은 그런 왕을 잘 따르고 복종해야 한다 는 주장을 기초로 하는 사상이다. 이는 불교에 우호적이었던 지배계층의 수요를 만족시켜 주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인 왜곡이었다. 인도 아소카 왕이 가장 대표적이다. 전륜선왕을 최초로 자처한 왕. 원래는 엄청나게 잔인한 왕이었다. 지옥의 개념을 이 사람이 만들었다고 할 정도(...) 그리고 백제 성왕(이름 자체가 전륜성왕에서 따옴), 신라의 경우엔 법흥왕부터 진덕여왕까지 왕권 강화 차원에서 불교식 왕호를 사용했고, 진흥왕의 경우엔 전륜성왕을 자처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도 태조 왕건의 청동상을 부처처럼 만들거나 고려사 악지에 임금을 제불(海東天子當今帝佛)이라 칭하기도 했다.

특히 심했던 중국같은 경우 아예 불상이나 불화를 제작할 때 왕족이나 궁중의 사람들의 얼굴을 모델로 만드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따라서 불교 세력은 왕이 투자를 해주는 만큼 거의 무제한적인 충성을 얻을 수 있으므로 어떻게 보면 유교보다 훨씬 지배자에게 편리한 면이 있는 것이다. 또한 왕실이 주도하여 건립한 사찰에 소속된 승려들은 매우 강력한 근왕 세력이 될 수 있다.

3. 한국 내에서의 불교의 위치

3.1. 전근대 시기의 불교

한국 불교는 굉장히 재밌는 성향을 가졌는데, 바로 현세구복적, 호국적이라는 점이다. 이는 동북아시아의 불교가 종교나 학문으로써 한반도에 전래된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에 의해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등 고대국가의 군주들은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개발해 왕이 곧 부처라고 선전했고, 따라서 부처를 모시는 승려들은 왕의 병사가 됐다. 이 때문에 삼국시대에는 불교의 상징인 사찰을 수도 한복판에 거대한 규모로 지었다. 박노자 같은 극단적 평화주의자는 한국의 호국불교 전통에 대해 '평화의 종교인 불교가 그 성직자가 살인을 하도록 가르치게 하는 것이 어째서 칭송받을 일이냐'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심지어 도올 김용옥호국불교는 지배권력과의 야합이라면서 비판하기도 했다. 김용옥은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라는 본격불교 비평서적에서 이차돈도 순교자가 아니라 쿠데타에 동원된 행동대장에 불과하며, 불교 공인은 권력에 의한 보상이라고 주장했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불교계는 단순한 종교집단에서 벗어나 사회지배계층으로 대두하여 각종 특혜를 누리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즉 고려시대까지의 불교계의 위상은 현재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과는 매우 달랐다는 얘기다. 광종 때 이미 승과제도를 도입해 승려의 신분을 보장해 주었고 국사, 왕사 제도를 통해 불교계의 권위를 상징적으로나마 왕권보다 위에 두었다. 또한 국가로부터 토지와 면역이라는 엄청난 특혜를 받아 경제적인 성장의 발판도 마련했다. 대토지를 소유하고 고리대금 등 상업활동에 관여하자 사원의 세속화 문제가 대두되었고 종파적 분열의 양상까지 보여 불교계 내외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통해 불교계의 경제적 폐단과 정치권에 대한 관여를 비판했다. 불교계의 폐단에 대한 비판은 고려 내에서 개혁운동이 있을 때마다 꾸준히 제기되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불교의 사상 자체에 대한 비판은 고려 시대까지는 거의 가해지지 않았다는 것. 불교의 사상이 도전받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부터다. 불교계 내부에서도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수 차례 결사운동이 일어나, 의천은 천태종을 통해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려 했고 지눌은 무신정권기의 사회적 혼란상을 타파하기 위해 신앙결사운동을 전개해 갔다. 지눌의 혁신운동은 이후에도 지속되며 상당한 성과를 보았고 사상적으로도 그 제자인 혜심의 유불일치설로 이어져 성리학이 수용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간섭기가 되자 몽골의 영향으로 불교계는 점차 사대적인 귀족불교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인다. 법상종은 라마교의 영향을 받아 세속화되었고, 사원은 권문세족과 결탁하여 대토지를 소유하고 고리대금업에 관여하는 등 부패가 심화되었다. 고려 말 대두하기 시작한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은 이러한 불교계의 폐단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이들은 과거의 유학자들이 그랬던 것과 달리, 불교계가 가진 조직으로서의 폐단 뿐 아니라 그 사상 자체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진사대부가 건국한 국가인 조선에서 불교계의 위상은 점차 추락하여 교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불교 윤리사상을 유교 윤리사상으로 전환시켜 국가 지도이념으로서의 역할을 빼앗고, 경제적으로도 사원에 예속된 토지와 노비를 국가재정으로 환속했다. 일시적인 숭불책이 수 차례 있었으나 억불의 조류는 꾸준히 지속되었고 불교계는 경제적 기반과 인적 자원을 상실하여 사회적 위상을 잃었다. 그러나 국가 이데올로기로서의 지위를 잃었을 뿐 신앙의 대상으로서는 여전히 궁중과 민간을 가리지 않고 신봉되었고 교리의 발전 또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불교계가 보여준 호국적인 양상 또한 역사가 깊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의 침입 당시 몽골군 장수 살리타이를 해치운 사람도 승장 김윤후였다.(김윤후 본인은 자신이 살리타이를 죽인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겸양인지 아닌지는 추가바람).조선시대의 임진왜란 당시 사명당은 전국 사찰에 격문을 돌려 승병 궐기를 촉구했고, 그렇게 결성된 승군의 규모도 엄청났다. 사명당은 이들 승군을 통솔하는 명목상 직책인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에 임명되기도 했다. 조선조의 억불정책에 많은 피해를 입긴 했으나 임진왜란 당시의 활약으로 이전에 비해 억압적인 면모가 꽤 줄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로 가서 성리학이 쇠퇴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커져, 한때 불교 억제정책을 강화했던 정조마저 나중에는 이를 사실상 철회하고 수원용주사를 건립했으니 말 다한 셈. 하지만 승려 자체는 계속 낮은 신분이었기에, 사찰의 재물을 노리고 공격을 당하거나 아에 절을 빼앗아 무덤을 만드는 경우도 늘어났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주장이 나왔는데, 조선시대의 호국불교는 당시 불교가 지니고 있던 사회적인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다. 당시 불교는 조선 정부의 전형적인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서 여러가지로 탄압을 받아왔기 때문에 극히 반조선적 성향을 띠었으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해서 속칭 말하는 '이렇게 우리가 도와주고 나면 우리의 사정도 괜찮아지겠지?'라는 생각으로 물심양면으로 조선 정부를 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 이후에는 오히려 조선 정부 측에서는 '오! 이런 양질의 노동력이 있었나?' 하면서 승려들을 부역에 더더욱 많이 동원했다는 후새드한 과거가 있다... 심지어는 임진왜란 등으로 할 장인들이 모자라자 등에 공납의 의무를 부과하기도 하였다(...) 낮에는 예불 밤에는 공작

이 때문에 한국 불교에서는 수도에 전념하는 이판승과 행정이나 대외 부역참여 등에 무게를 두는 사판승의 이원론적 체계가 생겨났다. '이판사판'이라는 말의 유래이기도 하다. 지금도 그 영향이 남아 한국 불교에서는 각 절의 관리자가 2명씩 있다. 행정업을 맡는 주지와, 종교적 업무/승려 교육을 전담하는 방장. 종교 지도자도 마찬가지라 조계종의 경우 행정업 전담인 총무원장과 종교적 업무 전담인 종정이 따로 있다. (타 종파의 사례는 추가바람)

일단 전조인 고려시대에 불교가 행했던 영향력과 악행들도 있고,(나라에서 빠른 공무 전달을 위해 배치한 역을 승려들이 멋대로 이용하거나, 가난한 농민들에게 살인적인 이자의 고리대를 걸거나, 심지어 불교에서 엄금하는 오신채를 재배해 팔기도 했다.) 유교의 원칙을 국가 이념으로 택했던 조선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본다. 이러한 호국 불교에도 불구하고 불교 자체에 대한 정부와 사회의 취급은 그때도 여전했다. 그 예로 도첩제가 있다. 승려가 되기 위해서 거액의 포를 바치거나(세조 때는 승과에 합격한 자도 30필이나 되는 포를 바쳐야 했다. 그냥 100~200필보다는 적지만 당시엔 30필도 거액에 해당되었다.) 부역에 몇개월동안 무보수로 일해야 도첩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엔 부역의 노동환경은 극악에 가까워서 부역 중에 죽은 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는 숭유억불정책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것보다 도첩제 자체가 양인의 승려화를 막기 위한 경제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승려는 세금을 안내니까.

대한제국 이전까지 승려는 천민계급 중 하나였다. 신량역천도 아니고 법제적인 천민도 아니지만, 성리학적 규범과 양반 사회가 확립되면서 사회적으로 규정된 팔반사천(八般私賤)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도성 출입도 불가능했다. 그런데 왕실의 원찰이나 승려가 도성에 들어온다고 승려 도성출입 금령을 자주 내린 걸 보면 잘 지켜지긴 했는지 의문이다.

승려의 도성 출입이 공식적으로 허가된 것은 구한말 시기로서, 일본 불교인 일련종의 일본인 승려 사노가 일본 공사관의 후원을 통한 적극적인 로비로 출입 허가를 받아냈다. 물론 이렇게 사노가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일본 불교의 종지로 한국 불교를 개종시켜(일본 불교의 교리를 한국에 심어), 결과적으로 한국 불교를 일본 일련종이 집어삼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당시 조선 정부는 봉원사의 승려인 동인의 건의로 이미 종교 자유의 일환으로 승려의 도성 출입 허가를 논의중이었다. 그런데 공로는 다 사노에게 넘어갔으니(...)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사람이 챙긴 셈. 그러게 진작에 논의를 끝냈어야지? 그런데 애초에 이 이동인이라는 승려부터가 일본식 불교승려였다. 또한 최초의 창씨개명을 한 인물로 일본 이름은 아사노 도진.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밑밥깔기에 가까웠다고 하겠다.

이후 1898년 고종이 원구단에 제사를 올릴려고 할 때 한 승려가 겁도 없이 주위를 둘러 친 장막의 틈새를 열고 들어와 초능력으로 황제의 운명을 점치겠다고 난동을 피운 일이 발생했다. 잡아서 문초를 하니 개운사 출신이란 것이 밝혀졌다. 그 외는 미상. 이런 흠좀무한 사건이 일어나 3년만에 다시 승려 출입이 금지되었고, 실질적으로 완전히 승려 출입이 자유롭게 된 것은 1905년이다.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은 흔히 잘 모르고 넘어가지만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다. 개국공신 정도전부터가 유억불을 내세웠으며 불교를 논리적으로 공박한 씨잡변을 쓰기도 했다. 태종은 특히 불교를 혐오하여 불교 종단의 해체, 파괴를 시도했다. 많은 절이 폐쇄되었으며, 심지어 유학 양반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산 속에 숨어있는 절까지 올라와서 행패를 부리거나 불태웠다(...) 태조가 기거했던 회암사조차 고의적인 테러로 불태워졌으니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조선 시대에 불교가 기댈 수 있었던 곳은 오직 왕실 뿐이었다. 조선 후기 왕실의 손이 귀해지자 왕실은 불교에 기대었고, 신하들도 강력히 반대하지 못했다. 영조의 경우 아들이 안 태어나자 신하들이 불사를 권하기도 했다. 왕실의 여성이나 몇몇 임금의 개인적인 신앙심이 불교를 유지해주었던 것이다. 나름대로 불교를 믿었던 태조세조, 많은 왕후들의 비호 아래 암암리에 왕족들은 불교를 믿어왔으나, 문정왕후를 마지막으로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왕릉 근처에서 왕실의 제사를 지내고 왕실을 위해 기도하는 원찰이 딸려 있었다. 선비들이 평범한 절이라고 생각해서 이런데 들어가서 행패를 부렸다가는 "니놈이 감히 왕실을 능멸하느냐?!"고 불호령을 당하고 곤장을 얻어맞았다.(…)

비슷한 것으로 조포사라는 절도 있었는데, 왕릉 근처에 있으면서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며 제사가 있을 때 제수용품으로 쓸 두부를 마련하는 사찰이라 해서 두부 포 자를 써서 조포사라고 불렸다. 이 역시 왕실과 관련된 사찰이었기에 선비들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수원에 있는 용주사가 대표적인 조포사. 또한 조선왕조실록을 지키고 보관하는 수호사찰이 있었다. 봉화(奉化)의 각화사(覺華寺), 무주(茂朱)의 적상산성(赤裳山城), 강화(江華)의 전등사(傳燈寺), 강릉(江陵)의 월정사(月精寺)를 말한다. (출처:이버 지식백과 실록수호총섭 錄守護摠攝 (두산백과)) 이 수호사찰의 경우 주지승에게 실록수호총섭이라는 직책을 주었다. 이 직책은 단순한 명예직이 아니라, 병부를 갖고 있어 유사시 실록 수호를 위해 지역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상당히 강력한 권한을 가진 실무직이었다.

세종대왕은 기본적으로 유학자 입장에서 불교에 비판적이었으나 한글로 불경을 많이 지었다.(심지어 두번째 한글 작품은 불은(佛恩)을 기리는 '월인천강지곡') 또 세종대왕 당시에는 효령대군이 불교를 많이 후원하였다.

세조는 드물게 불심이 깊었던 왕으로 불교를 많이 밀어줬다. 하지만 성종 때 한 번 날아갔다. 연산군은 딱히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모든 인간을 다 괴롭혔기 때문에(…) 불교도 된서리를 맞았다. 원각사를 헐어 버린 것이 대표적인 예. 문제는 연산군 이후에 유학자들의 입김 때문에 타격을 받은 게 복구되지 않았던 것이다. 연산군일기에서는 연산군이 정업원의 늙고 추한 비구니를 몽둥이로 패서 내쫓고 7~8명의 젊은 비구니를 겁탈한 이야기도 있다. 겁탈의 배경이 되는 정업원(淨業院)이란 곳은 자식이 없는 후궁이나 남편을 일찍 잃은 왕족들이 비구니가 되어 여생을 보내는 곳이다. 연산군의 일은 한마디로 자기 친인척을 겁탈했다는 이야기.

명종렴첨정을 했던 문정왕후보우무학대사 이래로 비어 있었던 국사 자리에 임명하는 등 강력한 불교 진흥책을 펼쳤다. 그러나 문정왕후 개인에게 의지한 불교 진흥은 한계가 있어서 문정왕후 사후에는 오히려 강한 역풍을 맞았다.

정조같은 경우 초기에는 억불정책을 시행하였으나 강하게 장기적으로 추진하지는 않았다. 수원에 조포사인 용주사를 지을 때는 오히려 앞장서서 후원하였고, 부모은중경을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에는 지방에서도 사찰이 어느정도 늘어갔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에서는 완전히 쫓겨났지만 민간 신앙적으로는 비교적 관대하게 대한 셈이다.

그리고 부녀자들 측에서도 불교에 대한 신앙은 깊었으며, 이는 심지어 사대부 부녀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향유되었던 규방소설 같은 작품들을 보면 사대부 남성들은 기를 쓰고 불교를 반대하지만, 여성들은 그 신앙을 존중하거나 직접 믿는 한편 절에 불을 지르려 들다가 봉변을 당하는 사대부들을 그리는 등의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정치제도상으론 열심히 억제하려 했어도 실제로는 여전히 신자가 많았던 셈.

하지만 이전 시대와 달리 유력 귀족이나 국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기에 조선후기의 큰 절들은 절의 유지와 확장 등을 위한 돈을 주로 신자들의 시주에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심청전 등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과도한 기부물의 요구에서 그러한 면을 발견할 수 있다.

3.2. 일제 강점기 시절

특히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숭유억불의 조선도 사라지자 친일과 결합하여 주변을 착취하는 경우도 적잖이 나타났다. 사실 조선시대에서 불교의 사회적 취급은 아무리 나아졌다고 해도 개차반이라 일제시대의 대접이 더 나았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 조선인들을 이간질시켜 통치를 용이하게 하려던 일본의 계책이긴 해도 어쨌든 대접해 주긴 했으며, 그 결과 수많은 승려들이 친일로 변절하고 당시 한국불교는 거의 일본화 되었다. 심지어 중일전쟁에선 친일 승려들이 '탁발보국'이란 명목으로 비행기 등 군수품과 위문금 헌납을 벌여나갔다. 그런데 이건 뭐 거의 모든 종교가 그랬다.

친일 승려의 악행은 임혜봉 스님의 저서인「친일불교론」과 「친일 승려 108인」에서 낱낱히 고발되었다. 임혜봉 스님은 「친일 승려 108인」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너 고소를 당했지만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였다.#] 문제가 되었던 효당 최범술 스님은 독립운동가이면서도 정치가였는데, 불령선인회에서 천황 암살을 모의했으며, 불교 계열 항일비밀단체 '만당'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엔 정치가로서 제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일본 다이쇼 대학에서 불교를 배워온 대처승이란 이유로 같은 불교 내에서 평가절하되었는데, 북지황군위문단이라는 관립 친일 불교단체에서 활동해서 친일 논란에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임혜봉 스님은 「친일 승려 108인」뿐만 아니라 대놓고「최범술 : 불령선인회와 만당에서 활동 그리고 친일」이란 저서에서 최범술 스님의 친일행각을 고발하였다. 「친일 승려 108인」에 대한 소개.

그 와중에 불심 깊은 촌부들을 꼬셔서 전 재산과 같은 논, 밭 등을 헌납하게 하는 경우도 적잖이 있었다. 이것이 꼭 일제시절만의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심청전에서의 '공양미 삼백 석'을 떠올려 보자. 판소리에서도 나올 정도로 그 시절에조차 치부(治富)하는 엉터리 땡초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작가 김정한하촌에서 이런 추악한 면을 폭로하고 있다. 그 동안 조선이라는 왕조 하에서 수백 년을 억눌려 있었으니 쌓였던 불만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일을 하며 사리사욕을 탐한 점은 용서받을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용운의 예와 같이 일본과 일본의 불교에 맞서서 민족의 독립과 한국의 불교를 수호하고자 했던 승려들도 있었다. 해외의 불교계는 교민 사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3.3. 현대에 들어

일제강점기 당시 대부분의 한국 불교는 사찰령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 사찰령은 이른바 승려들의 활동부터 주지 임명까지 전부 총독이 관리하고 "기혼자"에게 절의 주지 역할을 맡기도록 하는 것. 이때 임명된 주지들은 전부 일본인 아니면 결혼한 대처승이었다고 한다. 해방 후에도 대처승들이 엄청 많았다고 한다. 민중의 꾸준한 지원으로 각 사찰이 소유한 토지 및 재산은 적지 않았는데, 여기에 주목한 자유당측에 의해 사단(불교 정화운동)이 발생하게 된다.

불교 정화운동의 명분은 일본의 잔재를 없앤다는 것이었지만 참 목적은 기존 사찰 보유 자산을 활용한 "정치자금 확보" 및 휘하 단체 지원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이승만 박사를 의식한 최인규 내무부 장관의 작품이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실제로 오늘날 대도심의 시내에 있는 보이스카웃, YMCA 건물 중 연혁이 오래된 곳은 본래 사찰 소유 건물 혹은 토지였던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본래 해방 후 비구승과 대처승간에 타협을 보아 "송광사해인사 등 주요 사찰을 우선 돌려받고 나머지는 추후 시간을 두고 조계종으로 전환한다"는 요지의 결론까지 내려진 상태였던 것. 이 사실을 안 최인규 내무부 장관 측이 불교성지순례 등 타협에 참가한 조계종 지도층의 공백기를 이용해 혈기왕성한 젊은 승려들을 부추겼고, 일부 사찰에는 지원을 명목으로 "머리깎은 주먹들을 승려로 위장시켜" 보냄으로써 비구승VS대처승 간에 큰 충돌이 나는 사단이 난 것이다.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정부 측의 여론몰이까지 겹쳐 결국 대처승측이 한국불교태고종을 만들어 떨어져 나갔으며 오늘날 좌선수행 및 출가를 근간으로 하는 한국 불교의 기본 형태가 다시 조성되었다.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들은 조계사 항목을 참조). 태고종 자체는 삼국시대 고구려 소수림왕에 전해져 계속 법맥이 이어졌지만 한국불교태고종이란 종단은 불교정화운동에 밀려나 잔존한 대처승들이 1970년대에 조선시대 명승 보우대사를 종조로, 박대륜을 종정으로 삼아 창시되었다. 태고종은 현재도 '대중교화'를 이념으로 삼고 있어서 머리를 기를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대중불교주의는 만해 한용운이 주장한 것이니 태고종 자체를 친일의 잔재로 볼 수는 없다. 또한 현대의 한국 태고종은 더이상 대처승을 인정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출가하기 전 아내와 자식을 둔 가장이 출가해서 스님이 될 경우 가족과 함께 살며 부양할것을 허가한다지 이미 스님이 된 사람이 결혼을 하거나 자식을 두는것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조계종측에서 태고종을 언급할때에는 아직도 태고종의 이런 편견을 일반화시키는 경우도 있으니 그런 편견을 듣게 된다면 적당히 가려서 듣는것이 좋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나라의 지원금을 제일 많이 받는 종교이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중요 문화재 중 불교계에 예속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유지/보수를 끝마치고 나면 오히려 불교계는 가난한 편이다. 전통사찰 대부분을 가지고 있는 조계종 일년예산이 200억 정도이다. 국가예산은 한정되어 있기에 작은 절같은 경우는 시주도 뜸해 그야말로 폐허화되는 경우도 있는 듯. 사실 절마다 형편이 큰 절은 웬만한 교회보다 잘 살고 작은 절은 못 사는 부익부 빈익빈인지라(...) 불교가 한국의 주요 산을 전부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돈 많은 종교라고 주장하는 모양이지만 도심지와 산지의 땅값 차이만 고려해봐도 이게 얼마나 신빙성이 떨어지는 알 수 있다. 땅을 대상으로 정부와 지자체와 법적 분쟁을 일으킨 적은 몇번 있었다. 예를 들어 지율 스님 도롱뇽 사건이나 진주 성전암 임야지 사건. 혹자는 삶의 터전 때문이라고 하지만 지율스님 같은 경우엔 환경단체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님비 그이상 그이하도 아니었고, 진주 성전암 임야지 사건은 한 예수쟁이가 성전암 주지와 말다툼을 하다 홧김에 불을 질러 암자 건물이 전소된 탓에 진주시에서 복구하는 상황에서 임야지를 불법적으로 썼다는 사실이 들통났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 딱히 삶의 터전이라 보긴 어렵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가난한 종교이기 때문에 비교적 높은 액수의 기도비 걷기, 대규모 재 봉행, 기왓장 불사, 사찰 근처의 전통찻집이나 불교용품점, 식당 운영 등의 행동을 보인다. 도심과 좀 떨어져 있는 오프라인 매장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가격이 꽤나 높아서 폭리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지만 어디까지나 신도들의 신앙심에 맡기는 자율행위인데다 구속력도 없다. 다만 오히려 그런 구속력이 없어도 폭리가 잘 이루어지는 환경이다. 절 인심이 좋지 않으면 다른 절로 옳기기 쉽다. 대신 신앙적으로 본다면 일리가 있는 말이다. 성직자의 신성과 같은 성도와의 관계도 중요시 여기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특히 기독교) 불교는 소승이든 대승이든 신앙의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종교이기 때문이다. 도시 곳곳에 있는 교회와는 달리 절은 머나먼 산간벽지에 많은 편이라 절쪽에서 섣불리 행동하기 어렵다는 견해가 있으나, 오히려 멀리 떨어져 있기에 석가탄신일이나 중요한 불사가 있는 날엔 차를 돌려서 다른 절로 가기가 어렵다. 게다가 49일, 100일, 1000일등등의 신앙심이나 기복을 위한 장기 기도에 들었을 땐 절이 신도를 붙잡아두는 역할도 있다. 기독교도 불교의 XXX일 기도를 따라해서 신도들을 붙잡아두기도 한다. 때문에 이런 경우엔 이사 등 특별한 사정이 아닌 이상 쉽게 다른 절로 옳기는 경우는 드물다. 어느 절에 기도비 내고 100일 기도를 하다 중도에 다른 절로 옳겨서 승계하는게 그쪽에서 봐줄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

여하튼 이러니 저러니 해도 현재 한국 내 불교 신자는 감소세라고는 해도 다른 종교들의 신도들보다 많다. 사실 말이 감소지 큰 증감은 없어 현상유지는 그럭저럭 하고 있다. 천주교와 개신교는 단독으로는 불교 신자 수를 넘지 못하며 둘을 합쳐야 능가한다. 선거철만 되면 불교 행사 찾아가는 정치인들이 늘어나는 것도 이 것 때문. 2010년도에 들어 천주교 신도 수가 상당히 늘었다지만 양쪽 총합은 큰 차이가 없다. 거기다 천주교는 타 종교와 달리 주기적으로 신도 관리를 해서 개종하거나 연락이 끊긴 신도는 재적부에서 공식적으로 지운다.

근래에는 포교당(혹은 도심 선원)이라고 해서 산중이 아니라 도심이나 마을에 위치한 암자와 비슷하거나 좀 더 큰 수준의 절도 있다. 평은 극과 극. 조계종 소속의 한마음선원처럼 좋은 평가를 받는 곳이 있다. 여기는 아예 자체적 네크워크가 있어 각 지역/외국의 사원들과 본원이 연결되어 있다. 일반적인 포교당과는 달리 개신교보다는 천주교나 증산도와 비슷한 구조. 반면 무속인이 사찰 형태로 운영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 점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무속인은 애초에 불교와 관련없는 사람들이다.

태고종의 경우에는 아예 도심이나 마을안에 정식으로 절을 짓는 경우가 많아서 신도들이 사는곳을 벗어나지 않고 간편하게 다닐수 있도록 해놓았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불교도 비율이 높은 지방은 영남(경상도)지방으로, 말 그대로 타 지역을 압도할 정도로 불교 신앙이 깊은 곳이다. 아마 한국사상 가장 독실한 불교 국가였던 신라의 영향이 남아 있는 듯. 영남의 위력# 이러한 이유로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천주교+개신교)도 비율이 가장 낮은 곳도 영남이다. 반대로 호남(전라도)지방은 불교도 비율이 가장 낮고 기독교도 비율은 가장 높다. 사실 수도권충청도의 기독교 신자 비율과 큰 차이는 없긴 하다. 그리고 불교-기독교 신자 비율의 차이가 호남보다는 영남이 압도적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사실 개신교 비중이 가장 큰 도인 전라북도에서도 농촌 및 산간 지역은 불교세가 꽤 강한 것에 비해, 영남 지방은 대도시 지역에서도 불교세가 강하다.

2012년 5월 들어와서 석가탄신일 얼마 안 남겨두고 몇몇 사찰에서 승려들의 도박 및 온갖 추태들이 드러나서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가운데 노태우 전 대통령이 불교도였으며 (2010년 기독교로 개종), 전두환은 장로교 신자에서 백담사에 은거하면서감금당하면서 불교로 개종한 케이스다(해외신문에서는 한국의 고대국가에서 왕들을 처벌할 때 쓰던 방법을 현대에 재현했다는 기사를 냈다). 흔히들 박정희, 박근혜도 불교 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박정희 본인은 종교가 없었다고 하며(대신 육영수 여사와 이후락이 불교도였다), 박근혜는 이것저것 다 믿는 편이라 딱히 불교도라 할 수가 없다. 사실 전두환도 비록 퇴임 후 백담사에서 불교로 개종했다지만 워낙 종교적으로 오락가락하는 위인이라 그다지 독실한 불교도라 보기는 어렵다.

2005년 기준으로 한국 주요 불교 종단은 다음과 같다.

  • 대한불교조계종 : 사찰 735개 (81%)
  • 대한불교천태종 : 사찰 144개 (16%)
  • 한국불교태고종 : 사찰 102개 (11%)
  • 대한불교법화종 : 사찰 22개 (2%)
  • 선학원 : 16개 (2%)
  • 대한불교원효종 : 5개 (1%)
  • 기타 : 27개 (3%)

3.4. 탁발승 문제

탁발이란 승려가 먹고 입는 것을 돌아다니며 동냥으로 받은 것만으로 해결하는 것을 말하며, 초기불교에서는 필수적인 것이었고 지금도 일본과 남방불교계에서는 계속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에서 공식적으로 탁발을 중단한 이후로, 대부분의 종단에서 탁발을 중단한 상태다. 물론 종단에서 특별한 의미를 담은 행사를 겸해 탁발을 한 적은 있지만, 원칙적으로 승려 개개인의 탁발은 지금도 금지되어 있다.

그 이유는 승려를 사칭하는 가짜들이 무리한 탁발을 요구해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불교의 위상을 저하시켰기 때문. 그러나 이 사실을 의외로 모르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 지금도 이나 공원 등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곧잘 불전함이나 바릿대를 놓고 목탁을 두들기거나, 가게에 불쑥 들어와 목탁을 두들기며 시주를 요구하는 정체불명의 승려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특히 두 번째의 경우 손님이 있으면 일부러 더욱 목청높여 독경을 하며 돈을 줄 때까지 안 나가거나, 대놓고 들어오자마자 돈을 요구하면서 행패를 부리는 경우가 있다. 독경하는 것도 잘 들어보면 불교상에서 파는 불자보감이나 얇은 독경용 불경에 실린 일반 불자들도 자주 읽는 경전들로, 가장 많이 읽는 것은 천수경이다.

이 경우 위 사실을 말해주면 바로 나가니 이런 가짜 중들에게 시달리는 위키러가 있다면 참고할 것. 하지만 나가면서 투덜거리거나 욕하는 정도는 감안해야 한다. 이런 가짜 중들의 불법탁발(?)은 조선 시대부터 이미 사회문제였으며, 심지어 1900년대에는 아예 탁발을 하려면 공인증서를 갖추어야 했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링크 타 종교인이라 하더라도 이런 점을 기억해두어서 유사시 가짜에게 속지 말도록 하자.

물론 수행하면서 개인적으로 탁발을 부탁하는 스님들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조계종에서 금지한 이래 현재는 과거 악명을 떨친 두타스님처럼 가짜 중들이 탁발을 요구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게 사실이고, 특히 남의 가게에 들어와 민폐를 끼친다면 그건 누가 봐도 승려라 볼 수 없다. 애초에 승려 시험은 아무나 쉽게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게 아니다.

현재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자체 조리시설을 갖추고, 스님과 신도에게 공급되는 식사를 자체 조리하여 공양한다. 신도들에게 보시받은 돈을 가지고 식재료를 자체구매하는 경우도 있고, 신도들이 보시한 쌀과 식재료 등을 가지고 조리하는 경우도 있다. 장이나 김치의 경우 대부분 자체적으로 담그거나 관련 업체에서 구입해 충당하며, 일부 대형사찰이나 단체에서는 팔기도 한다.

3.5. 훈민정음 불교 관여설

일단 이름부터가 흠좀무한 이 주장은 현재 한국 최대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의 정식 인가를 받은 서적에도 실려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에서 펴낸 '한국불교사-조계종사를 중심으로'라는 책(2011년 2월 28일 1판 1쇄본 기준)에 실려있다. 대략 구성을 보면 이렇다.

  • 통념과는 달리 집현전 학사들은 한글 창제에 관여하지 않았다.
  • 세조 시절 불서 변역/간행에 깊이 관여하여 원각경, 선종영가집, 수심결을 직접 번역한 사람은 신미대사로, 이는 훈민정음을 잘 몰랐다면 불가능하다. 훈민정음을 익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이 없다. (훈민정음은 창제 원리와 목적상 매우 배우기 쉬운 문자이다.)
  • 더욱이 신미대사는 세종 당시 왕의 침전에서 법문을 하기도 하였다.
  • 세종은 한글 창제 후에도 활용/배포에 승가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것은 다양한 불경 간행으로 나타났다.
  • 신미대사는 어학에 능해, 범어와 티베트어에 능했다.(그런데 한글은 범어/티베트어 모방이 아니라 세종의 순수 창작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 그런데 공적기록은 없고 어용승이라는 비난 기록만 있는 것은 왜냐고? 그건 세종의 밀약으로 자신의 행적을 다 감춘 거라능!(물론 이를 증명할 근거는 없다. 정황상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사관들이 승려인 신미를 곱게 보지 않아서 그랬으리라는 추측만 있을 뿐) 한글 창제의 과정이나 그 주역이 아직까지 정확하지 않은 지금, 신미 대사의 역할에 대해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 (결론이자 이 책 모든 내용의 핵심) 그런고로 훈민정음 창제에는 한국 불교의 지원이 크며, 한국 불교의 정통인 조계종은 정통 한국 민족종단이다! 기승전조계종

자세한 내용은 이쪽에서 확인, 물론 신미 대사가 불경 언해에 깊숙히 관련되었다는 사실만큼은 왕실에서 불경을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인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한글본 불경의 간행기에서 빠짐없이 신미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확고한 팩트다. 다만 훈민정음이 배우기 쉽다고 하더라도 불경에서 사용하는 각종 불교 용어를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은 신미가 집현전 학자만큼이나 훈민정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예 불교계에서 훈민정음 창제 자체에 영향을 주었다는 건 분명히 엄청난 논리 비약이다. 물론 한국 사학계에서도 환빠들의 주장과는 별개로 한국에 고유문자 자체는 있었다는 주장도 있고, 조선시대 실학자인 신경준도 저서인 '훈민정음운해'에서 한글 창제 이전에도 민간에서 쓰던 속용문자가 있었다는 기록을 남겼으나 훈민정음 창제 시 이를 참고했다거나 가림토의 원형이라는 주장은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속용문자는 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쓰기 불편하다고 기록했다. 이 외에 1910년대까지 5진법에 기초한 결승문자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있지만, 결승문자는 소수의 관념 이상을 설명하기는 힘들다. 이두의 경우 사실상 중국과는 다른 독창적인 문자 기록법이긴 하지만.

3.6. 신분제도 속의 불교

고려왕조 때까지는 공식 국교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승려들은 고려왕이나 왕족 및 호족들 못지않은 우대를 받았으며 이 당시까지만 해도 국사(國師) 및 국승(國僧)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후에 조선왕조를 건국하게 된 이성계의 정치적 동반자로 알려진 무학대사도 고려왕조부터 승려로 지내왔다.

그러나 조선왕조 때부터는 사정이 달라져서 유림을 위시한 양반들이 조선왕과 왕족들 못지않은 우대를 받게 되었으며 불교는 유교에 밀려 국교지위까지 상실하였고 승려들은 천민층으로 분류되어서 궁궐, 양반댁, 관료댁 등은 들릴 수 없고 포교활동도 할 수 없었다. 또한 양반 및 유림들은 대부분 유교사상에 숭상한 영향 때문에 불교와 승려를 매우 적대시하거나 천시하는 편이어서 이들에게 포교전래는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교 및 유림과는 관계없는 단순한 일반평민과 천민층으로부터는 신앙대상이 되어서 대체로 우호적인 편이었다. 국교지위를 상실하고 승려들의 신분도 천민으로 내려갔지만 평민과 천민층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이 이어지기도 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과 1895년 을미개혁 때 신분제도의 폐지화와 함께 유교에 자리를 내주었던 국교지위를 되찾았으며 오늘날에는 가톨릭, 개신교 등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로 꼽힌다.

4. 분파

  • 원시 불교
  • 부파 불교
    • 상좌부 불교
      • 설일체유부 - 구사종
        • 독자부
          • 법상부
          • 현주부
          • 정량부
          • 밀림산주부
        • 화지부 - 법장부
        • 음광부
        • 경량부
      • 설산부
    • 대중부 불교
      • 일설부
      • 설출세부
      • 계윤부
      • 다문부
      • 설가부
      • 제다산부
      • 서산주부
      • 북산주부
  • 대승 불교
    • 중관불교 - 삼론종
    • 유식불교 - 법상종
    • 천태종
    • 화엄종
    • 율종
    • 열반종
    • 정토종
    • 선종
  • 여래장 불교
  • 밀교 - 진언종

4.1. 티베트 불교

티베트로 전파된 불교. 자세한 점은 티베트 불교 항목 참고.

티베트의 불교는 소승 불교, 대승 불교, 밀교를 시대별로 차례차례 받아들인 북전 불교와는 달리 인도를 통해 모든 사상을 한꺼번에 받아들였으며 독자적인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실질적으로는 밀교가 강하긴 하지만…

티베트뿐 아니라 몽골청나라 등에도 전파되었다.

정작 본산지인 티베트에서는 크게 억압당하고 있지만 서양으로 전파되어 서양에서 가장 대중화된 불교 종파가 되었다. 프랑스 같은 경우는 불교도의 수가 개신교 신자의 수를 넘어 섰다고 한다. 동양계 이민자까지 합한 수. 사실 원래 프랑스에서는 위그노 전쟁 이후로 개신교 신자가 극히 적어졌다. 서양의 유명인들이 믿는 불교 역시 대부분 티베트 불교이다. 브래드 피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처드 기어, 스티븐 시걸

5. 관련 용어

5.1. 부처, 승려를 뜻하는 용어


부처
개조(開祖)
석가모니
본존불本尊佛
와불
불보
스님
승려
파계승
승병

고승
조사 (祖師)

5.2. 교리 관련

5.3. 죽음과 불교 용어

5.4. 절 관련 불교 용어



사원
사찰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대웅전

법당

암자
석굴암

요사채
삼성각

명부전
관음전

범종루
목어
운판

5.5. 숫자와 불교 용어

무량수
불가사의
찰나
모호
영겁

기타 정리 요망
대중

법회
에밀레종
대장경
이판사판
인연
찰나
이심전심
야단법석
법석
염화미소
아비규환
면목
방편
삼매경
공양
법화경
마하가섭
설법
입멸
다비(茶毘)
화장 火葬
다비茶毘
자비
불토
아미타불
법문
탱화
아수라
육도팔부중
제석천


6. 관련 인물

6.1. 석가모니와 불제자

6.2. 고승 및 불교 사상가

7. 신적 존재

7.1. 불·여래

  • 대일여래= 비로자나불, 치성광여래
  • 아미타불 - 도로 아미타불
  • 미륵 - 다소 애매한데, 초기 불교에서는 일단 부처로 인식되었다. 해당 항목 참조.
  • 주동방가모니불 主東方迦牟尼佛, 일본에 잡혀갔던 유학자 강항이 쓴 간양록에 나오는 부처. 저자 강항이 일본에 잡혀 있던 중 도요토미에 대해 너무나 화가 나서 하루는 일본을 저주하는 글을 써서 한 성에 붙였는데, 그 내용을 대략 보자면 "너희들이 죄없는 나라(조선)을 그렇게 괴롭히고도 무사할 거 같음? 석가도 내가 내려보냈음. 살상하지 말고 생명을 소중히 여겨 살리라는 뜻을 널리 펴기 위해 내가 석가를 보냈는데 쌓으라는 덕은 안쌓고 그렇게 만행이나 저지르다니! 바다 안팎을 통틀어 내 소관 아닌 데가 없는데 나 주동방가모니불이 너희에게 경고하나니 당장 그만두라능. 횽은 두번 말 안함." 참고로 간양록에 따르면 이 글을 써 붙인 때가 5월 하순인데, 토요토미가 6월 초부터 병을 앓아 골골거리다 가을바람 불자 죽었다고 좋아하는 기록이 나온다. 흠좀무.
  • 약사여래

7.2. 보살

  • 관세음보살
  • 지장보살
  • 문수보살
  • 담무갈보살(법기보살) - 당나라 때 중국에서 편찬된 화엄경에 등장하는 보살로, 금강산에 머물며 설법한다고 한다. 실제로 금강산에는 이 보살이 현신했다거나, 만났다는 설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8. 종단 목록

9. 영향을 주고받은 종교와 사상(가)

1. 종교 - 사실상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종교들은 작건 크건 다 불교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종교 전래 과정에서 주술의식이나 특정 용어같이 역으로 불교에서 받아들이거나 영향을 받아 초기 불교와는 별개로 생긴 부분도 있지만...
  • 자이나교
  • 힌두교 -
    브라만 교 때는 영향을 주었다가, 불교가 크게 성장하자 역으로 흡수한 케이스.
  • 마니교
  • 무속신앙/사머니즘
    불교 자체의 영향력도 있고, 몽골이나 부리야트 지역에는 불교와 사머니즘을 융합시켜 만든 종교도 있다.
  • 도교
  • 동학(천도교)
  • 증산도
  • 원불교
  • 유교
    초기 유교는 당연히 영향이 없다. 그러나 중세시기 송나라 때 등장하는 신유학은 도교와 불교의 영향이 상당히 컸다. 특히 심학 계통은 선불교의 영향이 크다. 조선시대를 지배하고 불교를 배척한 신유학(주자학)이 이 불교의 영향력 하에서 생성되었다는건 꽤나 아이러니하다. 싫어하거나 까고 싶은 사람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 슈겐도
  • 신토
  • 선(仙)불교선종(禪宗)과는 다르다 선종과는!!!
    원불교와 비슷하게, 불교의 영향을 받은 다른 종교이다. 원불교처럼 선불교도 불교의 한 갈래가 아니다. 1994년 11월 교주이자 창시자 만월 도주가 출가하였으며, 이 때를 선불교가 만들어진 날이라 해서 창교일로 잡는다. 한국 토속신앙의 하느님을 신앙하며, 단군을 불광선인이라 부르면서 성인으로 받들어 모신다. 공식 홈페이지 교리의 유사성 등을 들어 단월드와 관련이 있다는 의혹이 있지만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한 적이 없어서 확인되지 않았다.

2. 사상(가)

10. 불교/신도

항목 참조.

11. 사족

시뮬레이션 게임 《문명》 시리즈 중 하나인 《문명 4》에선 종교 중 하나로 등장하는데, 종교 중 제일 먼저 등장한다. 이는 신비주의 → 명상을 통해 곧바로 창시되기 때문. 《문명 5》에서는 불교의 영향을 받았던 나라들은 불교를 만든다. 문제는 시스템상 불교를 만드는 문명이 시암밖에 없다... 따라서 게임을 하다보면 불교는 주로 시암이나 기독교를 창시하지 못한 유럽 문명(...)이 창시하게 된다.

이탈리아 여기자이던 오리아나 팔라치는 불교를 가장 평화로운 종교로서 꽤 긍정적으로 봤다. 자신은 기독교 신자(천주교)이지만, 기독교나 이슬람이나 유태교 같은 종교는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가지고 있던 걸 그리도 혐오했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종교 자체를 들이대며 학살이란 걸 저질러본 적이 없는 불교(도리어 쇼카 대왕이라든지 피비린내 나던 전쟁 일으키던 군주가 불교 믿고 전쟁을 안하던 것도 있다.)는 위대하다고 엄청 칭송했다.

물론 일본에서 승병(그런데 얘들은 말이 승병이지 무사들이 그냥 머리만 밀고 승려인 척한 가짜들이 태반이었다.자세한 건 '소헤이' 참고)이라든지 티베트 불교에서 정부를 등에 엎은 부정부패라든지 불교 세력도 정치화하면서 부조리가 드러났지만. 그 정도는 인류 역사 무수한 종교에서 흔한 일이었다. 조계종 폭력사태도 있긴 하지만 조폭이 머리밀고 숨어있다가 연루되면서 벌어진 일이고 기독교 쪽도 이 문제(유명 조폭두목들이 자서전 관련으로 보면(...)에 벗어날 수 없기에(...)

불교가 중앙아시아로도 전파되었던적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현재는 이슬람으로 변해서 그렇지http://www.joysf.com/club_military/4751116

불교 광신도도 간혹 있는데, 대표적으로 운게른 슈테른베르크가 있다. 이와는 별개로, 근래 불교에서도 근본주의적 움직임이 고개를 들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해당 항목 참조)

한국불교계가 카타피에게 인권상을 수여한 적이 있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110301081115190&p=newsen&RIGHT_TOPIC=R2 하지만 카다피의 초기 집권은 나쁘다고만을 볼 수 없다. 남녀평등을 위해 여성에게도 교육을 실시, 대규모의 문맹 추방, 그리고 석유회사 국유화로 남는 이익을 국민을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이 녀석도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어 물론 그러다보니 그의 부정적인 면이 잘 드러나지 않았고, 불교에서도 이를 잘 모른듯 하니..

영화 매트릭스(영화)의 주제도 불교사상과 관련이 있다.

아인슈타인은 불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미래의 종교는 우주적인 종교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하느님을 초월하고, 교리나 신학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자연의 세계와 정신적인 세계를 모두 포함하면서, 자연과 정신 모두의 경험에서 나오는 종교적인 감각에 기초를 둔 것이어야 한다. 불교가 이런 요구를 만족시키는 대답이다. 만일 현대 과학의 요구에 부합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곧 불교가 될 것이다."

상좌부불교나 티벳불교에서는 육식을 한다는 오해가 있는데 육식을 하는것이 아닌 시주받은 음식을 가리지 않는것으로 보아야한다는 의견도 있다. 중국과 한국의 불교에서 육식을 금하는것은 3무 1종의 법난당시 살아남은 승려들이 산에 숨어 살면서 종파를 유지해나가면서 넉넉하지 못한 식량사정으로 최소한의 식량으로 버텨야하기때문에 육식을 금했다는 의견이 있다.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0903&docId=213831117&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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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0.5%도 안되던 20세기 초반에 비하면 늘긴 늘었다.
  • [2] 과거, 현재, 미래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것이 불교다. 이는 단순한 시간축만이 아니라 좁게는 어제, 오늘, 내일의 시간축과 넓게는 전생, 현생, 미래생을 반복하는 환생을 포함한다.
  • [3] 말그대로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치세'의 이념과는 다르다. 군주에게 엄격한 도덕을 강조하는 유교에 비해서 위정자들에겐 상대적으로는 널널한 것이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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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6-15 10:4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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