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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호로비츠

last modified: 2015-11-13 21:13:02 by Contributors


Vladimir Samoylovych Horowitz (영)
Володимир Самійлович Горовиць (우크라이나)
Владимир Самойлович Горовиц (러시아)
1903년~1989년

Contents

1. 설명
2. 치프라와 호로비츠
3. 여담


1. 설명


우크라이나 출신의 러시아-미국계 피아니스트. 1903년생으로 우크라이나 국적이었으나 20년대에 서유럽으로 망명했고, 이후 미국에 정착했다. 일각에선 미국 데뷔 전 원래 이름이 고로비츠(Gorowitz)였으나 호로비츠로 개명했다고도 한다.[1]

6살 때부터 제대로 된 음악 레슨을 받기 시작했는데, 세르게이 타르놉스키 아래에서 제일 오래 공부하였으며, 마지막으로는 펠릭스 블루멘펠트에게 사사하였다. 이 때 대부분의 기교나 스타일은 완성기에 접어들어, 블루멘펠트는 "피아노에 관해서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 서유럽으로 떠날 때 블루멘펠트는 "너는 더 이상 배울 게 없으니 어떤 스승도 모시지 말라"고 했다(!). 다만 꼭 찾는다면 베를린에 있는 페르치오 부조니[2]를 찾아가라고 했다. 그런데 부조니는 호로비츠가 서유럽으로 떠날 채비를 하던 시기 이미 사망했다. 먼치킨 탄생.

본래 작곡가가 되고 싶어 했다지만 이후 러시아 혁명 때문에 집안이 쫄딱 망하면서 생계를 위해 피아니스트로서, 소년가장으로 데뷔하게 된다.[3] 잠깐 눈물 좀 닦고... 이처럼 러시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와중, 본격적으로 서방 세계에 이름을 알린 것은 1925년베를린에서 열린 공연이었다. 자기 이름 걸고 준비한 무대도 아니고, 그곳에서 갑작스레 병이 난 피아니스트 함부르크를 대타로 연주회 거의 직전에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고 대단히 호평받았다. 호로비츠가 첫 카텐차를 시작하자 지휘자였던 유겐 팝스트는 그 힘에 너무나 놀라서 자신의 귀를 믿지 못해 연주 도중임을 잊은 채 그의 손[4]을 보러 지휘대에서 내려왔다고.

이후 미국 데뷔를 하고 우상이었던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그의 미래의 장인어른 되시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등과 만나면서 음악적으로 한층 성숙하게 된다. 그런데 1930년대부터 소속사가 안티 과도한 스케줄에 허덕이다가 은퇴와 복귀를 밥먹듯이 하게 된다. 심지어 1953년부터 1965년까지 12년간 은퇴한 적도 있었다.[5] 1965년 5월에 카네기 홀에서 열린 복귀 리사이틀은 20세기 클래식 음악 역사에 길이 남는 이벤트였다. 이틀 전부터 카네기홀 안에 있는 매표소에서 서쪽 57번가로 이어져 6번 도로 모퉁이로 내려가서 모퉁이를 돌아 다 블록까지(출처-네이버캐스트)이때쯤이면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줄을 서 있었다고 한다. 호로비츠는 표를 사려는 이들을 위해 이동식 매점트럭을 보내줬다고오오 갓로비츠 오오

음악적으로나 테크닉적으로나 가장 인정받던 한참 전성기였던 때는 1940(혹은 1930년)~1950년대, 쉬면서 제자들을 받을 나이인 80세 이후에도 음반사와 전속계약까지 맺어가며 열심히 연주했다. 마지막 연주 여행은 1986년~1987년에 있었으며 [6] 그 이후로도 녹음 활동을 계속하였고 1989년에 페라이어 부부의 저녁약속을 앞두고 아내 완다와 이야기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음반은 RCA와 도이치 그라모폰 등에서 나와 있다. RCA의 녹음들은 주로 20~50년대, 그리고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 소니(원래 CBS)는 60년대 초반~70년대 초반, DG(도이치 그라모폰)에서는 85년부터의 레코딩이다.[7]

RCA는 초기여서 음질이 좋지 않다는 지적이 있고[8], 소니는 스테레오 시절 이후라 꽤 괜찮은 편이다. DG 판은 정말정말 손쉽게 구할 수 있는데 모스크바 실황연주와 그 이후의 음반들로서 전성기의 기교보단 노장으로서의 훌륭한 통찰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특히 전세계인들의 찬사를 받은 모스크바 연주에 모스크바 대학의 한 교수는 '그의 연주는 단단하고 투명한 다이아몬드 같았다.'라고 평했다.

데뷔 당시 테크닉으로 명성을 얻은 그의 전성기 연주에 있어선 볼레[9], 루빈스타인 같이 그와 겨룰 만한 경쟁자들을 포함한 거의 모든 음악가들에게 음악 사상 가장 위대한 테크닉으로 인정,칭송받았다. 특히 호로비츠의 기교를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은 옥타브 연타나 빠른 속도의 화음 등의 기교에서(43년도 녹음본 기준으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연주의 3악장 피날레 옥타브 난사를 0.1초에 한 번 꼴로(...) 건반을 터치한다. 아쉽게도 시기상 호로비츠는 20세기 전반에 속하는 사람이고, 또한 60년대 들어서서 그의 음악적 성향 또한 전환됐기 때문에[10] 60년대 이후의 그의 대표적 녹음들에선 그의 압도적인 속도, 완벽함을 보기 힘들다.

그의 전성기를 포함한 1930~50년대의 그는 우상으로 섬겼었던 라흐마니노프 풍의 전통을 많이 물려받았다. 즉, 직선적이고 박력있으며 모든 부분에서 깔끔하고 완벽함을 이상삼았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런 그의 스타일은 그가 가진 완벽한 테크닉과 배합을 이루면서 더욱 찬란히 빛났다고 할 수 있다. 그랬기에 그는 라흐마니노프의 권위자로서 작곡가에게까지 인정받았고 [11] 심지어 라흐마니노프는 그의 연주에 너무 감명받았는지[12] 자신의 모든 작품에 대한 편집권을 호로비츠에게 맡겼다. 흠좀무

이후 호로비츠는 대중들의 의견과 작곡가의 견해, 그리고 자신의 해석을 곁들여 그 당시 완성도에 있어서 상당히 논란을 일으켰던 라흐마니노프의 2번 피아노 소나타[13]에 대한 '원 작곡&개정판 작곡'의 혼합 버젼을 내놓기도 했다.


1930년대 녹음된 그의 리스트-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대 연습곡 2번 음반이다. 당대의 가장 완벽하고 화려한 리스트 연주가로서 불린 것에 부합하는 듯 연주는 엄청난 속도에 비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완벽한 테크닉, 그가 가진 특유의 음색의 반짝임,깔끔함,박력 등이 돋보인다. 별 다른 생각없이 이 영상을 클릭햇다면 연주하는 영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1분도 지나지 않아 팬티를 다시 갈아입게 될 것이다.


역시 1930년대 그의 음반이자, 그의 장기곡 중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라흐마니노프 3번 협주곡 녹음판이다. 음질이 상당히 좋지 않아 실망할 수도 있지만 그의 전성기 시기에 가진 장기인 휘몰아치는 듯한 속도와 라흐마니노프 곡에 대해 그가 가진 특유의 권위가 그의 전성기 음반이라는 명성을 대변해 준다. 4번째 영상의 3:35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피날레 부분은 이 음반의 최대 정수 중 하나이며, 특히 마지막 영상 4분 28초~32초 사이에 당시 그만이 낼 수 있다는[14] 천둥처럼 울리면서 오케스트라를 압도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포르테시모(대략 ffff[15] 정도의 소리(...) 소리의 클라이막스 코드는[16] 쇤베르그가 '라흐마니노프조차 결코 그런 식으로 도달하지 못할 부분.'이라고 그의 저서 '위대한 피아니스트.'에서 격찬한 부분이자, 생애 그만이 가능하다고 칭송받게 만드는 섬뜩할 정도의 테크닉 자질에 대한 방증이자, 전성기 시기의 트레이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했다. 물론 그는 전성기 이외의 연주엔 기력 쇠약으로 인해 그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을 보고 싶어한다면 가장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80년대 주빈 메타와의 라흐마니노프 3번 협주곡 연주의 이 구간에선 쉽사리 그런 소리를 내진 못한다. 그러나 12:21~12:40초 구간의 1악장 부분에서 언뜻 전성기를 연상시킬 만한 커다란 포르티시시모(혹은 전성기 그 소리와 견줄 만한) 소리를 들려주기도 한다.

60년대 이후부터 그는 음향에 대해 집착을 보였다. 나이가 들어 힘이 쇠퇴한 만큼 더 이상 전성기 만큼의 속도, 힘, 지구력 등을 보여주진 못했지만(테크닉 자체가 쇠퇴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광적인 다이나믹 대비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였다고 할 정도. 특히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악마적인 저음은 호로비츠의 트레이드 마크. 32년도의 젊은 시절 호로비츠의 리스트 소나타 녹음과 74년도의 말년 호로비츠의 리스트 소나타 녹음을 들어보면 연주 방식의 어마어마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1986년 모스크바 연주 이후 그동안의 연주에서 자주 나타나곤 했던 괴팍함이나 불안정감 등을 훌륭히 잘 극복했다.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피아니스트이다. 곡의 해석 문제 이외에도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같은 경우는 상업적이고 저속한 냄새가 난다고 깠다. 그의 연주비가 엄청나게 비싼 이유 중 하나였던 거의 항상 TV와 제휴를 맺어 추가 수입을 올렸던 방법을 꼬집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사실 리히터의 의견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이 사람은 자신이 아는 피아니스트는 다 깠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물론 호평도 하면서 깠다. 병 주고 약 주고 또한 리히터의 경우 호로비츠로 대표되는 서방세계의 피아니스트들의 대척점에 있는 동구권 피아니스트들의 정신적 지주였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일종의 자존심 싸움으로 볼 수 있는 셈. 1960년 실제로 호로비츠가 소련에서 넘어온 유명 인사 중 한 명인 만큼 자유주의의 프로파간다를 위해 의도적으로 부풀려졌다는 의견도 있다.

또 그의 해석은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1960년대 이후로 과장된 다이내믹(강약대비), 불안정감, 신경질적인 면이 상당히 많이 돋보였다. 때문에 몇몇 해석, 특히 쇼팽 해석은 호불호가 심하게 갈려 사람에 따라서는 호로비츠는 쇼팽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너무나 자세히 곡을 쪼개놓아서 자유스러움이 결여되고 심지어는 곡 중간중간마다 절단된 듯이 들려진다는 것이다. 쇼팽 곡에 내재된 릴리시즘에 자유로움이 필수불가결함을 고려했을 때 어느정도 타당한 의견이기도 하다. 또한 호로비츠의 연주시기상 현대악파의 전성기여서 자연히 낭만주의까들이 득세하던 시기라 낭만주의적 해석을 고수하는 호로비츠의 해석이 구미에 맞지 않는 비평가들이 여럿 있었다는 것이다. 내성부를 강조하거나, 클라이막스까지 논리적으로 크레센도를 몰고 올라가거나 악보를 신성불가침으로 여기지 않는 행위, 노골적인 박자 변동 등은 상당히 많은 비평가들을 자극했고, 거듭 강조했다시피 호로비츠의 문제삼을 만한 해석은 그를 테크닉적인 대가로만 한정짓는 비평가, 까들을 상당히 양성했다. 다만 당대의 전문가들은 그의 러시아의 대표적이라 할 만한 피아노 음악 작곡가들, 즉 크리아빈[17],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예프, 그리고 리스트는 거의 모든 권위자들에게 화려함과 박력에 있어서, 특히 리스트 곡에 대해선 전문가과 일반 대중들에게 크게 환호받았다. 이 외에도 전성기 때 자신의 기교적인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리스트의 헝가리 랩소디 몇곡에 붙인 자신만의 카텐차, 소품 편곡, 수자의 '성조기여 영원하라'에 붙인 매우 화려하고 기교적인 편곡 등이 레퍼토리에 있었고, 소품을 좋아하여 슈만의 소곡, 모츠코프스키의 소품곡, 쇼팽의 마주르카, 스카를라티 곡 등을 자주 연주했다. 특히 스카를랏티 곡에 대한 재발견으로 주목받기도 하고, 말년에 그가 연주한 슈만의 소품곡 중 어린이 정경의 트로이메라이(꿈)는 그의 라스트 트레이드마크로 그 아름다움과 색채감에 있어서 최고의 절찬을 받는 곡이기도 하다. 유튜브에 그가 연주하는 영상이 남아있다.


그의 모스크바 실황연주, 앞부분을 보다보면 몰려드는 인파에 차가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모이는흠좀무 아이돌 팬덤에 맞먹을 정도인 호로비츠의 가공할 인기를 확인할 수 있고 5:48초부터 나오는 어떤 할머니가 뭐라 얘기하는데 대략 '전 호로비츠 연주회에 가는 꿈을 꿨어요. 이제 그 꿈이 이루어졌습니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호로비츠의 모스크바 실황연주 중 '슈만-어린이정경_트로이메라이'이다.[18]

만년의 호로비츠는 "나는 베토벤에서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다"며 베토벤을 거의 연주하지 않았고, 이는 레퍼토리에 다소 악재로 작용했다. 특히 20세기 중반 넘어서서 고전 레퍼토리에서 소나타 전집 등의 유산을 남기지 않으면 다소 까이던 분위기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53년의 은퇴 전에 호로비츠도 물론 다른 피아니스트보다는 아니지만 베토벤을 제법 자주 연주했고, 65년 복귀 이후에도 몇몇 소나타를 연주하고 있다. 그러나 브람스를 가리켜 '3B(바흐, 베토벤, 브람스)중 가장 작은 B'라고 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가 베토벤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워낙 변덕이 심하고 마음 내키면 자기가 했던 말도 그냥 싹 바꿔버리는 기질의 소유자이니 그의 발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있다. 대신 말년에 모짜르트를 상당히 많이 연주했다고.[19]


호로비츠의 모차르트 연주. 색체감으로 가득 차 있어 아름답고, 황홀하다.

2. 치프라와 호로비츠


가끔 인터넷에서 호로비츠나 치프라에 관한 게시물에 가보면 치프라 빠들이 호로비츠를 까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대략

1. 호로비츠의 테크닉이 치프라에 견줄 만하다고 여겨지는 영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2. 호로비츠는 고도프스키의 파사칼리아에서 '희망이 없다. 손가락 6개가 필요하다.'라고 자신의 한계를 표방했다.[20]

정도의 이유를 들이대며 호로비츠가 명성에 따라 과대평가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어떤 면에서 보면 타당하다고 보여질 소지가 있다. 분명 네이버나 다음 사이트 등지에 검색해서 나오는 호로비츠의 연주 영상들은 치프라만큼 빠르지도 않고 포스도 그닥 크지 않으며 심지어 완벽한 테크닉이라고 칭송받은 피아니스트의 명성에 반하는듯 간간이 미스터치도 심상찮게 들린다. 게다가 위의 2번째 이유는 신빙성이 매우 높은 정보이며 실제일 경우, 호로비츠가 시대에 맞춰 어느정도 과대평가 되었다는 주장에 힘을 더할만한 요지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이 정도로 호로비츠의 진가를 평가하기엔 너무 이르다. 첫 번째 이유의 경우엔 유튜브에 검색하지 않았을, 특히 horowitz 1930년 등의 검색어로 검색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21] 검색에서 나오는 그의 전성기 리스트 음반은, 맨 위 영상에서 보듯, 그의 명성에 걸맞게 치프라만큼, 혹은 그 이상의 속도와 함께 화려함과 깔끔함, 그리고 믿기지 않을 만큼의 완벽함을 보여주며, 그러한 영상이 아닐 지라도 테크닉을 단지 피아니스트의 치는 속도, 미스터치 가지고만[22] 평가하는 것에도 문제는 있다. 그의 엄청난 강약 다이내믹 폭, 프레이즈 구성, 연주 상 어려운 곡이라도 쉽게 들리게 착각되는 현상 등은 그의 테크닉의 유무를 방증,혹은 증명한다. 이는 단순한 매니아나 아마추어의 견지에서 파악하기 힘든 부분이라 전성기 이후의 연주 영상에서 호로비츠가 테크닉이 낮다고 오해하기끔 만드는 원인 중의 하나이다.

또한 2번째 이유의 경우엔 그 이유가 사실일 지라도 호로비츠를 치프라에 비해 깎아내리는 것도 지나친 비약이다. 분명 음반에서 보여주는 호로비츠의 전성기 테크닉은 치프라와 서로 아주 미세한 차이 정도로 어깨를 겨루는 정도이다. 이로 따져봤을 때 상식적으로도 호로비츠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정도면 치프라가 그 곡을 도전했다고 성공했을 거란 보장은 하기 힘들다. 실제로 치프라는 그 곡을 도전조차 한 적이 없는데 치프라가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말하지 않았다고 호로비츠가 한계가 있는 이유로 치프라보다 테크닉이 낮다는 이유는 억지 주장에 가깝다.

3. 여담


한국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의 호로비츠가 이 호로비츠다. 손 크기에 대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손이 11도 이상을 한 번에 짚는 기록은 없다. 그냥 보통 외국 남성 피아니스트 평균 사이즈(응?) 정도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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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실 개명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게 러시아어로는 고로비츠가 맞다.
  • [2] 이탈리아 출신 명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교육자인 고도프스키와 양대산맥이었던 먼치킨, 무려 15살에 대학교수가 되었다고(...)한다. 이상하게도 고도프스키와 업적은 고도프스키와 버금가는데 매니아들 사이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진 않다. 아마 고도프스키의 경우엔 대표작품이 낭만음악 편곡인데 비해 부조니는 바로크음악인 바흐음악 편곡이 주라서 그럴수도 잇고, 고도프스키의 작품이 워낙 자극적으로 어렵다고 광고한 매스컴 때문일 수도 있다. 부조니의 곡들도 그의 곡과 비교했을 때 기교면에선 절때 뒤지지 않는다. 그의 라캄파넬라 편곡버젼을 보면 알수 있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곡은 라이벌이기도 했던 고도프스키가 재편집을 했어서 누구의 곡이라고 하기 뭐할지도 모른다. 여차하면 딴 곡으로 평가해보기를 추천.
  • [3] 소년 가장이라고 하지만, 이 때 양친은 멀쩡히 생존. 호로비츠는 훗날 이 시절에 무슨 정신으로 콘서트 준비를 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회고했다. 당시 준비한 프로그램은 총 열 개. 두 시간 길이 기준이다.
  • [4] 당시 많은 피아니스트들은 그가 구현해 낸 테크닉을 손만 따졋을 땐 도저히 이해하질 못하다시피 했다. 이유는 호로비츠의 연주 시 손모양은 당대뿐만 아니라 역대급을 통틀어 거의 모든 피아니스트들과 반대되는 연주법이었기 때문, 일반적인 주법은 손가락과 손, 팔굽 등에 힘이나 압력을 조절해 치는 방법인데 호로비츠는 손가락을 튕겨서 치는 방법이었다. 이런 손모양을 사용하는 피아니스트는 호로비츠의 그 손모양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뤄진 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조차 호로비츠 외엔 시도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최소한 유튜브나 음반으로 접할 수 있는 흠좀무한 피아니스트들 중에서 한사람도 없다(...). 게다가 그런 튕겨 치는 주법으로 극찬을 받는 톤 하며, 완벽한 레가토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때리는 소리까지 나지 않게 한다는 건.... 굉장히 후덜덜하고 대흠무한 능력
  • [5] 그동안 음반은 열심히 제작했다고 한다.
  • [6] 마지막 리사이틀은 1987년 함부르크
  • [7] 흥미롭게도 그의 마지막 녹음은 소니에서 나왔다. DG에서는 이 변덕 많은 거장의 심기를 맞추기 위해서 오랫동안 같이 작업했던 사람을 고용해서 녹음을 했는데, 호로비츠 사후에 이 사람이 소니로 회사를 옮길때 이 녹음까지 같이 가져갔기 때문.
  • [8] 호로비츠가 RCA의 음질과 악기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기록도 꽤 있다.
  • [9] 이 사람은 테크닉적인 면에서 거의 호로비츠랑 동급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면서 호로비츠와 똑같이 낭만주의를 표방했는데 이상하게도 호로비츠와 달리 현대악파가 살짝 물러나고 낭만주의 연구가 부흥한 덕에 거의 말년에 인정받은 피아니스트이다. 여담으로, 호로비츠랑 시기를 같이 한, 그러면서도 기교적인 면에서 거의 동등한 인정을 받은 슈퍼 비르투오죠를 꼽아보자면 볼레를 포함해서 얼 와일드, 아르투토 베네데티 미켄란젤리, 조르주 치프라 정도가 있다.
  • [10] 히로히토히틀러와도 나이차가 몇 년 안 난다
  • [11] 라흐마니노프는 호로비츠가 친 그의 3번 협주곡에 대해 엄청난 찬사와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20년대 호로비츠의 미국 데뷔(뉴욕) 직전에 만난 후 라흐마니노프가 43년에 죽을 때까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 [12] 그는 호로비츠의 연주를 듣고 너무나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말수가 적고 점잖은 그가 이런 수식어까지 써가며 호로비츠의 연주를 칭찬했다는건 그의 영향이 얼마나 음악사에서 지대했는가를 보여주는 척도로도 해석가능할 듯
  • [13] 음악가 사이에서 독설로 상당히 유명한 프로코피예프는 이에 대해 동료 음악가였던 스크리아빈과 비교해 '스크리아빈의 5번 소나타는 하늘을 날아다니는데 라흐마니노프의 소나타는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것 같다(...).'라고 상당히 악의적인 평가를 한 바 있다
  • [14] 자신의 스타일에 맞지 않아 일부로 그런 소리를 내지 않은 그에 견줄 만한 피아니스트들도 있지만, 거의 다섯 손가락 안에 꼽기도 힘들 만큼 극소수 이다
  • [15] 이런 음반이야말로 작곡가들이 이런 기호를 작품에 표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16] 이어폰을 안 끼고 들으면 소리가 울려서 잘 안들리니까 되도록이면 끼고 듣길 추천한다. 헤드폰이 있는 분들이면 더욱이나 끼고 듣길 추천한다.
  • [17] 그는 특히 스크리아빈의 곡 중 에튀드 Op.8 12번을 좋아해 연주회마다 거의 빠드리지 않다시피 했다고 한다. 전 위키에는 호로비츠가 아니었으면 스크리아빈이 묻혔을 거라고 써있었는데 당시 소련 정부의 허가를 얻어 활동하던 러시아 피아니스트들 몇몇이 스크리아빈을 연주했다는 정보도 있고 특히 그 당시 슈퍼 비르투오죠인 라자 베르만 같은 경우는 스크리아빈과 라흐마니노프의 권위자로 평가받았다. 스크리아빈의 해석기준은 당시 호로비츠의 해석기준과 상당히 일치되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 [18] 위의 영상과 중복해서 올려놓는 이유는 영상이 너무 긴 탓에 트로이메라이가 몇초쯤에 하는지 못 찾아서 따로 올려놨기 때문.
  • [19] 근데 굳이 취향이라고 정의하기 전에도 모짜르트같은 고전음악 자체가 그 내재된 내용에 있어서 쇼팽같은 음악보다 훨씬 더 높게 평가받는다. 고로 그런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되어, 또는 발전된 실력을 바탕으로 하거나 낭만,현대음악은 이미 탐구할 만큼 탐구해서 남은게 고전음악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피아니스트들이 모차르트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슈나벨 등 말년에 모차르트를 많이 연주하는 음악가들은 상당히 많이 있다. 여담으로 음대가면 제일 먼저 받는 곡이 모차르트나 하이든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허나 대부분의 학생들이 엄청나게 마이너스를 받는다고.(...) 실제로 모차르트의 곡은 일견 쉬워 보이지만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 [20] 파사칼리아는 아마 전성기 이후에 도전했던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 [21] 그의 전성기 연주를 보여주는 파일이 영상이 아니라 음반이 주를 이루는 이유는 아마도 그의 최전성기인 30~50대 즈음에 공백기를 밥먹듯이 했었음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아니면 그의 소심한 성격상 그런 류의 녹음이 그 당시에는 그에게 익숙하지 않아 의도적으로 거부했다던가 혹은 그가 의도적으로 그의 공백기간에 신비주의를 부여할려고 일부러 얼굴이 비춰질 수 밖에 없는 영상물은 거부했을 수도 있다.
  • [22] 둘 다 테크닉 부족과 직결될 가능성이 높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어려운 곡에서 빠른 속도의 경우는 힘과 지구력을 필수불가결로 하기에 자연 나이가 들어 힘이 쇠퇴하면 필요 이상으로 빠르게 못 치기 마련이다. 미스터치는 이미 테크닉이 어느정도 완숙한 피아니스트들의 경우엔 테크닉적인 부분보단 음악적 구성 등에 더 중점을 두기 때문에 단순히 부주의로 틀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런 피아니스트들은 대부분 미스터치 따윈 크게 신경 안 쓴다. 자기의 진가가 음 몇개 틀리는 정도로 평가절하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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