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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 추격전

last modified: 2015-04-10 17:36:02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독일 해군의 지원 준비
4. 영국 해군의 반응
5. 추격 시작
6. 덴마크 해협 전투
7. 비스마르크와 유보트 부대와의 공조 시도
8. 다시 시작된 추격전
9. 비스마르크의 발목을 잡아라
10. 독일 해군의 유보트 배치
11. 비스마르크의 최후
12. 뒷 이야기


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1년, 라인 연습작전(Operation Rheinübung)에 따라 독일 해군의 대형전함 비스마르크가 출항하자 영국 해군이 추격에 나서면서 1941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대서양에서 벌어진 숨바꼭질이다. 결국 비스마르크가 자침 또는 격침당함으로써 종료되었다.

2. 배경

1941년을 기준으로 영국은 추축국 독일이탈리아에 대항하고 있는 사실상 유일한 유럽국가였다. 그래도 영국은 전통적으로 섬나라였고 해양국이었기 때문에 고립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으며, 수많은 상선들을 이용하여 물자와 원료, 군수물자들을 영국본토로 가져오거나 또는 주요 전선에 배치하고 있었다. 독일 역시 이러한 영국의 해상보급선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보트와 소수의 수상함들을 이용하여 통상파괴작전을 수행하였으나, 영국을 완전히 말려죽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1941년 3월,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의 통상파괴작전이 무사히 마무리되었고, 1941년 5월에는 중순양함 아드미럴 히퍼까지 가담하여 대서양에서의 통상파괴작전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막 취역한 대형전함 비스마르크와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 등도 참여를 하게 되었다. 원래 계획으로는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와 대형전함 비스마르크,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으로 구성된 4척이 동시에 출항해서 전대를 구성하기로 되어 있었으며, 실제로 이렇게 출격할 경우 영국 해군이 수송선단을 전함으로 호위하더라도 이를 제압하고 수송선단을 전멸시킬 수 있었다. 이는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가 출격했을 때 수송선단에 영국 전함이 호위함으로 붙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공격을 포기한 사례도 있었기 때문에 수상함선에 의한 수송선단 공격이 계속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치이기도 했다.

하지만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는 귀환후에 영국 공군의 폭격을 맞거나 기관수리에 시간이 걸리는 등의 사유로 인해 예정대로 출격하기 곤란하게 되었다. 그래서 독일 해군은 통상파괴작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전력의 저하를 각오하더라도 공격전대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우선 출격시키기로 결정하였다.

3. 독일 해군의 지원 준비

이같은 작전 목표에 의해,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의 지휘를 맡은 군터 뤼첸스 대장은 "비스마르크의 목표는 영국의 함대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상선을 공격하고 군함과 마주쳤을 때는 가급적 교전을 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전술적 목표를 위해서는 대서양에서 작전중인 유보트 전력과 협조할 필요가 있었다.

1941년 4월 8일, 뤼첸스 제독은 오랜 친구이자 해군사관학교 동기인 잠수함대 사령관 카를 되니츠 중장파리[1]에서 만나 회의를 갖고 비스마르크 투입에 따른 유보트 지원을 논의했다. 잠수함대 선임장교가 연락 장교 역할로 비스마르크에 승함, 별도 주파수를 이용한 함대 사령관과 잠수함 전대장과의 상시 교신 등이 결정되었지만, 모든 유보트의 작전 행동은 잠수함 사령부의 명령이나 뤼첸스 제독의 요청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 그대로 진행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이후 독일 해군은 두 군함에 연료와 군수물자, 탄약 등을 보급해줄 수 있도록 래브라도 해협 근처와 카보베르데 섬에 보급선단을 배치하였다. 모든 준비가 완료된 후,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은 구축함 6척과 함께 발트해를 출항하였다.

4. 영국 해군의 반응

이러한 움직임은 스칸디나비아 반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저항세력에 포착되었고 영국 해군성에 전달되었다. 그 즉시 영국 공군에서 정찰기를 발진시켰으며 5월 21일 베르겐 근처의 피요르트에 정박중인 2척을 확인하였다.

이 사실을 파악한 영국 해군 사령부는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선 이 두 군함의 임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당시 영국 본토주둔함대(Home Fleet)는 막 건조된 전함 킹 조지 5세(KGV),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순양전함 후드, 리펄스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항공모함 빅토리어스와 10척의 순양함, 12척의 구축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비스마르크 정도의 대형 전함은 보유하고 있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후드의 경우는 영국 해군 최대의 함선이지만 함령이 30년을 넘고 제대로 된 대개장도 못받아서 낡고 속도도 떨어진데다가 순양전함이라 장갑이 빈약하므로 비스마르크를 상대로 전면에서 함포를 주고받을 수 있는 후보로는 KGV만이 거론되고 있었으며, 동급인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막 취역한 상황에다가 포탑작업이 마무리 되지 않아서 효과적인 화력을 제공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거기다 POW는 추격동안에도 내부 마무리 공사중이라 민간인도 타고 있었다.) 그리고 기대를 걸 수 있는 항공모함 글로리어스 역시 막 취역하여 함재기를 딱 한 번 발진시켜봤을 정도로 준비가 부족하였다.

5. 추격 시작

5월 22일에 이루어진 항공 정찰에서 비스마르크가 어디론가 떠났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대기중이던 Home Fleet가 출항하였다. 여전히 독일 해군의 꿍꿍이를 몰랐지만 일단 호송선단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노르웨이 북부의 증원병력이나 아이슬란드 상륙을 시도할 것으로 추측한 함대 사령관 존 크로닌 토비 대장은 KGV와 빅토리어스는 아이슬란드 남쪽의 항로를 수색하도록 하였고, 후드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덴마크 해협을 수색하도록 지시하였다. 그 외에 다른 군함들도 여러 지역에 분산시켜 사라진 독일 군함을 찾도록 하였다.

그 중에서 영국 순양함 노포크와 서포크는 아이슬란드 북쪽과 북극해 사이의 해협에 대한 수색을 명받은 상황이었다. 당시 노포크와 서포크에는 레이더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초기형이라 탐지거리가 20km 이하였는데, 날씨만 좋다면 차라리 망원경을 이용하여 관찰하는 것이 더 나은 수준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5월 23일 아침, 서포크의 견시가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발견하였다. 당시 안개가 끼어있었던 까닭에 독일 군함은 그들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하였으며, 무선으로 발견보고를 한 이후 레이더에 포착된 두 개의 점을 목표로 미행을 시작하였다.

미행을 하던 중에 노포크가 실수로 안개를 뚫고 비스마르크의 10km 거리까지 접근하는 바람에 포격을 받기도 하였으나 곧 안개속으로 모습을 숨겼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이를 제외하면 양측의 충돌은 없었으며 험난한 북극해를 뚫고 추격이 계속되었다. 이 때 주포 사격의 후폭풍으로 비스마르크의 레이더가 고장나는 바람에, 함대는 선도함을 프린츠 오이겐으로 바꾸었다. 어쨌든 이 두 척이 밤새도록 현재 위치와 침로, 속도 등을 보고해준 덕분에 영국 해군은 대응 계획을 세울 수 있었으며, 당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해군중장 홀랜드 제독이 지휘하는 후드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에 요격 명령이 떨어졌다.

6. 덴마크 해협 전투

공격명령을 받은 홀랜드 제독은 즉시 덴마크 해협 남쪽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5월 24일 새벽 5시 35분에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발견하였으며 5시 49분 양측은 포격전을 벌일 수 있는 위치까지 접근하였다.

후드에서 작전을 지휘하고 있던 홀랜드 제독은 전방을 바라보면서 비스마르크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로 인해 후드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전방 함포만으로 공격하게 되었는데 만약 모든 포문을 열었다면 독일 함대에 비해 함포 위력에서 앞설 수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이후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일단 영국 해군 입장에서는 배수량은 비슷하지만 30년 후에 건조돼서 최신기술이 집약되고, 대응방어가 갖추어졌다고 판단되는 독일의 비스마르크 전함에 대항해서 낡고 장갑이 빈약하며, 건조중에 유틀란트 해전이 발생해서 해당 해전의 교훈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었던 순양전함인 후드가 원거리에서 정상적인 함포 교전을 시작하면 독일 전함은 별 타격을 안입었는데 혼자 가라앉을 수 있으므로 낡고 약한 전함이 선택하는 방법인 근거리까지 돌격해서 치명타 먹이기를 시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사실 비스마르크가 격침될 때까지 영국에서 해당 함선의 정확한 제원을 알지 못했으므로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은 당연하다.

어쨌든 23km까지 접근한 후드에서 제일 먼저 사격을 시작하였고, 이어서 나머지 군함들도 일제히 포문을 열고 함포사격에 나섰다. 당시 뤼첸스 제독은 레더 제독의 훈령대로 비스마르크의 주임무를 상기하면서 반격을 하지않고 후드와 노포크를 떨쳐버리고 했으나, 함장 에른스트 린덴만 대령 이하 비스마르크 승조원들이 이를 곱게 볼리 만무했다. 결국 린데만 함장은 뤼첸스 제독에게 "내 배 꽁무니에 포탄이 날아오는 꼴을 두고볼 수만은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교전을 시작했다.[2] 한편 후드는 전방에 위치한 독일 군함에 함포를 집중시켰는데 그 위치에 있었던 것은 프린츠 오이겐이었다. 원래 비스마르크가 전방에 위치하는 것이 정상적인 배치였으며[3](독일 함대도 본래 이 배치를 따르다가 앞서의 레이더 고장 건으로 위치를 바꾸었다.), 이런 배치에 따라 후드가 전방을 공격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적함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 착각했을리 없다는 반론도 있어서 어떤 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일단 2차대전 당시의 독일의 중순양함은 크기가 2만톤 가까이 될 정도로 크고 전함과 비슷한 2연장 포탑 배치 및 상부구조물을 가지기 때문에 원거리에서 보면 식별이 곤란한 문제점이 있어서 후드가 목표물을 착각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공격을 받은 프린츠 오이겐도 반격에 나서서 후드에 명중탄을 먹였으며, 중순양함의 8인치 포탄이라 별 피해는 없었지만 이로 인해 후드에는 작게나마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는 비스마르크에게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한 결정적인 목표물로 작용하였다.

6분간의 포격전이 끝난 후 홀랜드 제독은 모든 함포문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좌현으로 변침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변침을 마치기도 전에 비스마르크의 일제사격이 후드의 마스트를 직격시켰고, 그 직후에 포탄 한 발이 머피의 법칙처럼 이미 약점으로 지목된 지 오래[4]인 후드의 측면장갑 상부에 있는 얇은 경사장갑을 관통한 후 후드의 탄약고를 관통, 폭발시켰다. 그 결과 후드에는 엄청난 폭발과 함께 화염이 치솟았고 겨우 2분만에 두 동강이 나서 격침되었다. 워낙 빠르게 침몰한 까닭에 홀랜드 제독 이하 1,400여명의 승조원 가운데 딱 3명(사관후보생(Midshipman) 한 명과 수병 두 명)만 살아남았다.

후드가 격침당하자 독일 군함들은 프린스 오브 웨일즈에 함포를 집중시켰는데, 아직까지 함포탑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정상운용이 불가능했던데다, 코앞에서 침몰한 후드를 피하느라 그 잔해에 가려 포격이 불가능했던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특히 새로 도입된 4연장 포탑이 함체에 명중한 포탄의 충격등으로 인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10문의 주포중 제대로 사용이 가능한 것은 2연장 포탑의 2문 뿐이었다. 결국 비스마르크의 주포가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함교를 명중시켰으며 함장 존 리치 대령[5]과 조타사 한 명을 제외한 함교 인원 전원이 전사했다. 이로 인해 프린스 오브 웨일즈도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하고 전선에서 이탈하였다.

하지만 프린스 오브 웨일즈도 비스마르크에게 명중탄을 날렸는데 그게 연료탱크에 손상을 입혔기 때문에 비스마르크도 연료가 새기 시작했다. 이는 비스마르크가 더 이상 통상파괴작전을 하지 못하고 본국으로 귀환해야 하는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 손상으로 인해, 기존의 작전 계획을 변경해 비스마르크는 브레스트 항으로 돌아가고, 프린츠 오이겐만 예정대로 통상파괴전을 수행키로 했다. 호위 구축함들은 오래전에 항속거리 문제로 회항했으므로, 비스마르크는 상처 입은 몸으로 홀로 돌아가야 했다.

미행을 했던 노포크와 서포크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불과 8분만에 후드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관광당했고 홀랜드 제독까지 전사하는 바람에 두 중순양함을 지휘하던 제독(소장)이 현장에서 가장 계급이 높은 지휘관이 되어버렸다. 상황을 파악한 지휘관은 사령부에 "후드 격침"이라는 아주 짤막한 보고를 올리고 현장 정리에 나섬으로써 전투는 마무리되었다.

7. 비스마르크와 유보트 부대와의 공조 시도

후드 격침 소식은 독일 해군 본부에 알려졌다. 5월 24일 오전 되니츠 중장은 서부 해역 사령관 알프레트 잘바이흐터 상급대장[6]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유보트를 서부 해역 사령부의 의도대로 배치시킬 것을 요청했고 비스마르크 지원 작전의 총책임자이던 잘바이흐터 제독은 이에 동의, 뤼첸스 제독의 의도를 파악한 후 유보트 세력을 활용하기로 했다. 뤼첸스 제독은 같은 날 오후 가용한 모든 유보트 전력을 그린랜드 남쪽 해역에 집결시켜 줄 것을 잘바이흐터를 통해 되니츠 제독에게 요청했다. 그는 비스마르크를 추격할 영국 군함들을 유인하여 유보트와의 협동 작전으로 무력화하려 했으나, 연료유 유출로 인한 계획변경 탓에 성과를 보지 못했다.

8. 다시 시작된 추격전

한편, 오랫동안 영국 해군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후드가 격침당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영국 해군은 큰 충격에 휩싸여 다들 멘붕했다. 그리고 곧 그 충격은 분노로 변했으며, 명령을 받았건 안받았던 간에 대서양에 있던 거의 모든 영국 군함들이 복수심에 불타서 후드의 복수를 위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윈스턴 처칠 총리까지[7] 직접 나서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비스마르크만큼은 꼭 격침시키시오!"라고 지시했다.

그야말로 단 한척의 배를 잡기 위해 국가전쟁급 전력이 총동원되는, 만화에서나 벌어질법한 일이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행히 서포크와 아이슬란드에서 발진한 정찰기가 연료가 유출된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가 독일로 돌아갈 수도 있었고, 프랑스나 스페인 또는 독일에 우호적인 어딘가의 중립항구로 갈 확률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 판단에 따라 지브롤터에서 순양전함 리나운항공모함 아크 로열, 순양함 셔필드와 구축함 6척, 캐나다 북동부 지역인 노바 스코티아 핼리팩스에서 전함 리벤지가 출격했는데, 여기에다 개장을 위해 미국 보스턴으로 가고 있던 넬슨급 전함 로드니까지 방향을 돌렸으며, 전함 라밀리즈중순양함 런던, 경순양함 에든버러는 아예 호송선단을 내팽개치고 기수를 돌려버리는 등, 많은 군함들이 사령부에서 명령을 받지 않았음에도 원래 수행중이던 임무 따위는 씹어먹고 비스마르크 추격에 나섰다. 레알 버스터 콜 몇몇 소수의 군함만이 비스마르크가 독일로 돌아올 때를 대비하여 북해 주변을 초계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이었다. 더불어 함교를 피격당한 프린스 오브 웨일즈도 정리를 마치는 대로 서포크와 노포크에 합류하여 비스마르크 추격을 재개했다.

한편 토비 제독은 비스마르크가 영국 함대의 추격권에서 벗어나기 전에 무언가를 해야 된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항공모함 빅토리어스에게 함재뇌격기 소드피시를 이용하여 비스마르크를 수색하여 손상을 줄 것을 주문하였다. 그 결과 비스마르크에 어뢰 한 발이 명중시켰으나 해당 어뢰는 가장 두꺼운 현측장갑부분에 명중해서 별로 피해를 입히지 못했기 때문에 그 날 밤 추적중이던 전단이 여전히 고속을 유지하는 비스마르크를 놓치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비스마르크가 무선신호를 발신해준 덕분에 방위각 산출을 통해서 대략적인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다. 이 때 해군본부에서 자신들이 실컷 위치를 계산해놓고도 현장의 군함들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비스마르크의 위치를 계산하도록 시켰다. 그 결과 토비 제독은 비스마르크가 아이슬란드를 경유하여 독일로 돌아간다는 결론을 내렸고 Home Fleet에게 북동쪽으로 변침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문제는 이것이 잘못된 계산이었고 해군본부에서도 Home Fleet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결과 토비 제독은 비스마르크의 두 번째 무선신호가 수신된 후에야 자신들이 잘못 계산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는 이미 비스마르크와는 약 160km 가량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Home Fleet의 삽질로 구축함과 순양함들은 재급유를 위해 아이슬란드로 복귀하고, 전함과 항공모함이 대잠방어망 없이 대서양으로 나가는 것은 유보트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이나 다름없어 그 즉시 480km나 떨어져있는 장소에 있던 구축함 5척의 합류를 지시했다.

9. 비스마르크의 발목을 잡아라

5월 26일 10시 30분, 북아일랜드에서 날아온 카탈리나 비행정이 전함 발견 사실을 통보하였다. 보고된 위치를 분석한 결과 KGV 중심의 Home Fleet을 기준으로 남쪽으로 약 216km, 전함 로드니를 기준으로 남서쪽으로 약 200km, 지브롤터에서 출항하여 북진하고 있는 H 부대를 기준으로 북북서로 176km 떨어진 지점이었다. 문제는 이대로 상황이 전개되다가는 비스마르크가 영국 해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독일 전투기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프랑스 영해로 들어간다는 점이었다.

현재 비스마르크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것은 Home Fleet의 명령을 받고 이동중인 구축함 5척과 H 부대에 소속된 소드피시 뇌격기였다. 이에 따라 H 부대를 지휘하던 제임스 섬머빌 제독은 아크 로열에게 소드피시를 발진시켜 비스마르크의 발목을 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순양함 셔필드는 앞서 나가서 비스마르크의 위치를 파악하라고 주문하였다. 문제는 아크 로열에서 셔필드에게 내려진 명령이 자신들에게 내려진 명령이 아니라고 무시하였고, 아크 로열에서 발진한 뇌격기들은 이 사실을 모른채 셔필드에 뇌격을 가하였다. 다행히 신뢰성이 극악으로 떨어지는 주옥같은 자기기폭뇌관 항공어뢰[8]와 셔필드의 교묘한 회피기동으로 피격은 모면하였다.

저녁 7시경, 아까와는 달리 신뢰성이 높은 접촉식 뇌관의 항공어뢰를 장착한 소드피시들이 발진하였다. 이번에는 셔필드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엉뚱한 배를 공격하지 않았으며, 셔필드의 인도에 따라 전방 약 19km 가량에 위치한 비스마르크를 조지기 위해 날아갔다. 하지만 당시 상공에 불고있던 엄청난 바람으로 속도가 느렸던 소드피시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밀려나버려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다시 순양함 셔필드 상공에 집결한 소드피시 뇌격기들은 비스마르크를 찾아서 떠났으며, 이번에는 제대로 날아가서 비스마르크에 뇌격을 가하였다. 한편 상황을 지켜보던 셔필드는 너무 가까이 접근하여 함포에 얻어맞을 우려가 있자 즉시 반전하였는데, 어렴풋이 비스마르크가 북북서 방향으로 변침하는 것을 확인하고 즉시 보고하였다.

당시 토비 제독은 소드피시 뇌격기 편대장으로부터 공격실패 보고를 받은 직후여서 셔필드가 뭔가를 착각했다고 판단을 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남서쪽으로 그대로 가면 안전지대에 갈 수 있는데 굳이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게 될 북쪽으로 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크 로열에서 어뢰 한 발이 명중됐다고 보고를 번복하였으며, 복귀하던 정찰기에서도 비스마르크가 함미에 어뢰를 맞고 멈춰섰다는 보고가 올라와 셔필드가 제대로 봤음이 증명되었다.

드디어 비스마르크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에 만족한 토비 경은 날이 밝거든 전함들을 앞세워 비스마르크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당시 공격위치에 있던 구축함 5척에게 비스마르크를 계속 감시할 것을 주문하였다.

10. 독일 해군의 유보트 배치

독일 해군 서부 해역 사령부에서는 비스마르크가 대서양 항구 중 한 곳으로 대피하는 데 대비해 유보트로 초계선을 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는 정확하지 않은 정보에 근거한 것이었고, 연료가 부족한 구축함과 순양함들이 급유를 위해 이탈하면서 대잠방어가 취약했던 영국 해군은 대형 군함들이 잠수함에 농락당하는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더욱이, 잘바이흐터 제독과 되니츠 제독의 지시로 초계선을 전개한 유보트 다섯 척은 만일의 경우 비스마르크를 지원하기에 적절하지 못한 상태였다. 로베르트 가이제 대위가 지휘하는 U-98은 어뢰가 한 발도 없었고 아이텔-프리드리히 켄트라트 대위의 U-74는 영국 해군 구축함의 폭뢰 세례를 받아 제 속력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제 시간에 비스마르크의 전투 해역에 도착하여 모든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던 유보트는 U-556이었으나, 이 배 역시도 어뢰 발사관이 텅 빈 상태였다. U-556의 함장 헤르베르트 볼파르트 대위는 비스마르크의 교전을 지켜보면서 어뢰를 보유한 유보트를 현장으로 유도하기 위해 애썼으나, 오직 기동불능 상태에 가까웠던 U-74만이 간신히 접근했을 뿐이었다.

11. 비스마르크의 최후

비스마르크가 함미에 맞은 어뢰는 원래 약한 항공어뢰라서 일반적인 경우에는 그렇게까지 큰 피해를 주지 않지만, 하필이면 교체하기 직전 상태라 항구에 새 키가 대기할 정도로 낡은 키가 어뢰를 회피할 목적으로 크게 꺾인 상황에서 명중했기 때문에 키가 꺾인 채 고정돼버렸다. 게다가 꺾인 키를 현장에서 다시 수리하거나 폭파시킬 장비와 기술도 없었다. 뤼첸스 제독이 함내 탄약고에서 폭약을 빼와 키를 폭파시켜 방향을 바꿀 수 있을지 고민했으나, 불가능하다는 결론만 나왔다. 덕분에 조금만 더 항진하면 독일 공군 항공기의 제공권 내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키가 꺾이는 바람에 스크류를 돌리기만 하면 북동쪽의 영국 방향으로 움직이는 막장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이 이후로 사실상 비스마르크는 앉은뱅이가 되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비스마르크에 뭔가 이상이 생긴것을 알아차린 영국 해군이 구축함들을 보내서 밤새도록 비스마르크를 괴롭혔다. 이 구축함들은 비스마르크에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 했지만, 구축함들이 쏠지도 모를 어뢰에 피격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계속 대응 상태를 유지해야 했던 비스마르크의 승조원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자포자기한 뤼첸스 제독과 승조원들은 최후를 준비했다. 본국으로 "우리는 끝까지 싸우겠다. 총통 각하 만세!"라는 전문을 보내고, 승조원들이 유가족들에게 전할 편지 등을 탑재된 공군[9] Ar-196 수상기편으로 보내려 했으나, 캐터펄트가 고장나 무산되었다.(...)[10]

5월 27일 서서히 날이 밝기 시작하자 전함 KGV와 로드니, 순양함 노포크와 도르세셔가 비스마르크에 접근하였으며, 오전 8시 47분 로드니를 시작으로 비스마르크에 일제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비스마르크도 곧 응사에 나서서 2차대전에서 굉장히 보기드문 전함 간의 포격전이 시작되었다.

KGV와 로드니는 16인치와 14인치 대구경 함포를 통해 비스마르크를 공격하였으며, 중간중간 전함이 전함에 어뢰를 쏘는 좀처럼 보기 드문 상황이 벌어지곤 하였다. 어쨌든 비스마르크는 함교에 명중탄을 맞아 뤼첸스 제독과 참모진이 전사하고 함장이 부상당하는 와중에도[11] 필사적으로 응전하고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앉은뱅이라 고정표적 신세가 된 상태에서 피해를 입은 함포들이 하나둘씩 침묵하고 군함의 마스트는 물론이고 군함의 거의 모든 부분이 파손되어 사실상 무력화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비스마르크는 격침되지 않았으며, 10시 15분이 되자 KGV와 로드니가 연료부족으로 철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토비 제독은 영국이 자랑하는 전함의 포격에도 비스마르크를 격침시킬 수 없다는 점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다른 군함들에게 어뢰로 비스마르크를 공격하라고 지시하였다. 당시 도르세셔만이 어뢰를 가지고 있었던 까닭에 가까이 접근하여 어뢰를 발사하였으며, 비스마르크는 좌현으로 전복되어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영국은 도르세셔가 발사한 어뢰가 결정적인 타격이 되어 격침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독일군은 다른 주장을 하고 있었는데 KGV와 로드니가 연료부족으로 인해 비스마르크에서 멀어질 때 비스마르크에 살아남은 최선임자였던, 중앙 기관실장 게르하르트 유나크 기관대위[12] 의 지시에 따라 배의 포기가 결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배수 밸브를 열고 폭약을 설치해 자침시켰다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가 침몰하면서, 퇴함 지시에 따라 수백 명의 생존자들이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영국 해군은 비스마르크의 침몰이 확인되자 생존자들의 구조를 시작, 유나크 대위를 포함하여 100여명을 구조했다. 그러나, 후방의 구축함으로부터 유보트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경보를 받은 토비 제독이 급히 함대를 철수시킴으로써, 구조 작업은 중단되고 수백 명의 승조원들이 방치됐다. 이들 중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잠수함들이 구조한 몇몇을 제외한 생존자들이 북대서양에서 저체온증 등으로 죽었다. 함장 린덴만 대령은 생존하지 못했는데, 생존자 가운데 유나크 대위에 이은 차선임자였던 4등 포술장교 부르카르트 폰 뮐렌하임-레흐베르크 대위 등 몇몇이 함장이 배가 뒤집히기 직전에 부상당한 몸으로 밖에 나와 승조원들에게 손을 흔들었다고 증언했다.

12. 뒷 이야기

  • 이 추격전에 참전한 함선들의 명단은 대략 이렇다.
    • 영국 해군 전함 킹 조지 5세, 로드니, 라밀리즈, 프린스 오브 웨일스미친놈들아 아무리 빡쳐도 그렇지
    • 영국 해군 순양전함 리나운, 리펄스, 후드(격침)
    • 영국 해군 항공모함 빅토리어스, 아크로열
    • 영국 해군 중순양함 서포크, 노포크, 도셋셔
    • 영국 해군 경순양함 갈라테이아, 오로라, 넵튠, 헤르미오네, 아레투사, 버밍엄, 셰필드
    • 영국 해군 구축함 아카테스, 앤털로프, 주피터, 엘렉트라, 이카로스, 펀자브, 마쇼나, 코사크, 시크, 줄루, 마오리, 타타르, 셔우드, 헤스페로스
    • 영국 해군 잠수함 H44, 씨라이온, 씨울프
    • 캐나다 해군 구축함 아시니보인, 사기네이, 컬럼비아
    • 폴란드 해군 구축함 피오룬

  • 비스마르크의 최후가 자침인가 격침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자신들의 유리한 자료를 들이대면서 싸우고 있는 관계로 여전히 불명이다. 제임스 카메론이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실시한 선체 조사 결과 비스마르크의 선체 하단은 멀쩡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이 발표 직후 영국 BBC가 같은 조사를 실시, 영국 순양함이 실시한 뇌격지점에 큰 파공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서 확실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고, 일단 비스마르크급 전함의 수선하 방어구조로 볼 때 양자 모두 가능성은 있다는 게 문제다. 심지어 독일측의 자침 발표에서 가장 중요한 근거 중 하나인 게르하르트 유나크 대위의 회고조차도 영국측의 심문 결과와 전후의 회고 내용이 다르다. 영국 심문 결과는 자침 명령보다 배가 이미 침몰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문서 파기와 최종 퇴함만을 명령했다는 것이며, 영미권 전쟁사 개괄서는 대다수가 이 견해를 따르고 있다. 사실 비스마르크의 방어구조는 견고하긴 하나 고전적인 구조여서 실질적인 방어력이 높지 않고 배 자체가 과도한 침수에 대응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수상함용 어뢰를 맞았을 경우 자침이 필요할 정도로 버티기 어렵다는 것이 전함의 기술적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 대다수의 견해이다.

  • 비스마르크는 기본적으로 1차대전식 방어체계의 발전형으로, 현측장갑이 강력하고 갑판장갑이 상당히 약했다. 특히 갑판장갑의 경우 사실상 대낙각 포탄 및 폭탄에 방어력을 가질 수 없는 얇은 장갑갑판 2-3개로 방호하고 있어서 사실상 스펙만큼의 방어력도 없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정체를 잘 모르던 영국 해군은 비스마르크의 화력이 일찌감치 무력화되자 포탄 관통력과 명중률을 높일 심산[13]으로 지나치게 근접해서 난타하는 바람에 비스마르크의 방어력이 100% 발휘되는 어이없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래서 수백발이 맞아도 가라앉지 않았던 것이다. 당장 로드니의 경우 전함끼리의 교전이라면 그냥 명중률 문제가 아니라 함정간 충돌까지 각오해야 하는 거리인 2km까지 접근해서 발포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포격의 또다른 부작용은, 관통을 해 봤자 침수를 유발할 수 있는 타격은 도저히 입힐 수 없으므로, 관통해봤자 그저 바람구멍만 뚫고 만다는 것이다.

  • 비스마르크가 일찍 샌드백 신세가 된 이유는 주포탑 장갑과 바벳이 타 전함에 비해 상당히 얇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포탑경사장갑을 잘못 적용해서 포탑 측면의 윗부분 절반이 얇은 상부장갑으로 구성되는 바람에 측면에서 날아오는 포탄의 절반이 얇은 상부경사장갑을 뚫고 포탑 내부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치명적인 실수까지 저질렀다. 덕분에 비스마르크에게 포탄을 퍼부은 영국 해군은 비스마르크의 주포탑을 치즈 덩어리처럼 송송 구멍이 뚫린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비스마르크는 16인치 단 1발 피탄으로 전방 1, 2번 포탑이 동시에 무력화되는 등, 주요 무장부위가 쉽게 가동불능이 되는 약점을 노출했다. 그래서 초전에서 영국 전함을 협차하여 명중탄을 줄 수도 있었는데 바로 주포탑이 파괴되면서 샌드백으로 전락해버렸다.
    이 부분들이 이렇게 된 것은 배의 고전적 장갑구조로 인해 함정 배수량에서 장갑이 차지하는 중량이 지나치게 커져 흘수가 너무 깊어지고, 덤으로 높은 함상구조물 때문에 무게중심이 잘못 배분되면 배의 안정적인 항해능력에도 영향을 줄 정도였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장갑을 줄인 것이었다.

  • 2차대전 당시 독일의 수상함대는 육군이나 공군에 비하여 안습한 상황이었는데, 독일이 자랑하던 최대의 군함 비스마르크를 말아먹으면서 더더욱 안습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사실상 이 시기를 기준으로 해서 독일 수상함대의 대서양 출격은 종지부를 찍었으며, 이후에는 대서양에서는 유보트와 구축함, 어뢰정, 소해정 등 소형 함정들을 제외하면 소수의 상선을 개조한 가장순양함이나 비밀수송함의 출격만 이루어졌다. 이는 히틀러가 비스마르크 침몰 이후 대형함들의 보전을 최우선시하도록 지시하여 수상함대가 소극적으로만 활동하게 된 탓이 크다.

  • 비스마르크의 발목을 잡은 것은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소드피시였다. 이를 계기로 바다에서 더이상 커다란 배와 대구경 함포가 절대적인 우위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보여준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영국군은 이런 훌륭한 전훈을 엿바꿔먹었는지 수리가 끝난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순양전함 리펄스를 인도차이나에 항공호위없이 파견 보냈다가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그렇게 영국군을 물먹인 일본군 역시 함대결전사상 때문에 항모도 제대로 안 굴리고 함재기 성능에도 신경을 안 쓰다가 미드웨이 해전 이후 비행기와 조종사를 죄다 말아먹어서 항공기를 대거 동원한 미국에 털렸으니 이놈이나 저놈이나 병신도 아니고…. 그래도 미국은 이 악순환을 밟지 않았다.

  • 비스마르크가 마지막 교전을 할 당시 유보트 5척정도가 근처에 있었고, 그 중 2척은 현장에 있었으므로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싸울 수 있었다면 아크 로열이 함재기를 출격시키기도 전에 수장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독일군에겐 불행하게도 U-556은 어뢰가 바닥난 상태였고 U-74는 영국 해군의 폭뢰 공격을 두들겨 맞고 심하게 손상된 유보트라 어뢰 발사를 할 수 없어 지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때 비스마르크와 접촉을 유지하며 아군을 유도하려 애쓴 볼파르트의 전쟁일지는 되니츠 원수의 전쟁 회고록 <10년 20일>을 통해서도 소개되어 있다.

  • 비스마르크의 마스코트인 검은 고양이 '오스카'(Oskar, Unsinkable Sam)가 유명하다. 이유가... 타는 배마다 격침되는 이능생존체인지라.

    - 1941년 5월 27일 비스마르크 격침이후에 수색중이던 영국 구축함 코사크(HMS Cossack)가 비스마르크의 파편속에서 발견
    - 1941년 10월 27일 구축함 코사크가 U-Boat 공격으로 침몰한 후 코사크의 파편속에서 발견
    - 지브롤터로 가서 'Sam'이라는 이름을 받고 영국 항모 아크로열(HMS Ark Royal)에 태워짐
    - 1941년 11월 14일 말타 공방전 도중 U-Boat 공격으로 아크로열 격침, 이번에도 구조
    - 구조될때 영국 구축함 라이트닝(HMS Lightning)과 리전(HMS Legion)에 탔는데 라이트닝은 43년 뇌격기와 어뢰정의 공격으로 격침당하고 리전은 42년에 폭격으로 대파
    결국 이 고양이는 침몰 안하는 벨파스트의 해군 기지로 옮겨저서 1955년까지 살았다.... 영국 해사박물관에 있는 오스카의 그림

*이 추격전을 다룬 조니 호튼(Johnny Horton)의 Sink the Bismarck라는 노래가 있다.독일제국함대궤멸프린스 오브 웨일즈운명을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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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1940년 프랑스 함락 이후, 옛 프랑스 해군의 군항들에 잠수함 기지들이 들어서면서 해군 잠수함사령부도 파리로 이전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독일 본토로 이전할 때 까지 주둔했다.
  • [2] 뤼첸스 제독이 여러모로 독쟁이었기 때문에, 함장 린데만 대령 이하 승조원들과 사이가 원만하지 못한 편이었다. 반면에, 린데만 대령은 승조원들에게 평판이 좋았다.
  • [3] 전통적으로 함대의 기함이 전열의 선두에 위치하며, 기함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함대에서 가장 크고 강한 함정이 맡는다. 물론 구축함 등 호위함은 제외하고 따지며, 항공모함 등 함 자체의 전투력이 약한 배가 기함이면 선두에 세우지 않는다.
  • [4] ...였기에 방어력을 강화하려고 했지만 하필이면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 지못미
  • [5] 그는 말레이 해전에도 동함의 함장으로 참전했다가, 전함이 침몰할 때 함대 지휘관 필립스 제독과 함께 퇴함을 거부하고 죽었다.
  • [6] 1883~1945. 경순양함 아마조네, 전함 슐레지엔의 함장 등을 역임했으며, 1940년 1월 1일 상급대장으로 진급한 고참 장교. 빌헬름 마르샬, 테오도어 크란케 제독 등 수상함 전문가들과 함께 독일 함대 전력을 유지했다. 전후 소련으로 끌려가서 군사 재판을 받았고, 1945년 12월 6일 모스크바에서 총살되었다. 소련 체제가 종식된 1994년, 러시아 법정은 그의 전쟁범죄 책임을 풀고 명예를 신원하였다.
  • [7] 처칠은 해군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 [8] 미국도 같은 문제로 1943년까지 머리를 쥐어뜯었다.(…)
  • [9] 헤르만 괴링의 욕심 때문에, 해군은 자체 항공대를 갖지 못하고 함재기조차 항공기와 조종사 및 승무원, 정비 인력 등 일체를 공군 파견 부대에 의존해야 했다.
  • [10] 이들 공군 파견대 인원들은 최후의 전투의 와중에 정비병인 상병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전사했다.
  • [11] 이후 부장이 지휘권을 인수해 버티다가, 지휘소로 쓰던 PX 구획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앙돼 내 과자 여러 장교들과 함께 전사했다.
  • [12] 비스마르크 함의 기관장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기관장은 발터 레어만 소령으로, 생존하지 못했다. 유나크 대위는 전후 재건된 독일 해군에 기관장교로 재복무해 대령까지 진급했다.
  • [13] 원래 넬슨 시대부터 영국 해군은 근접 포격전을 선호했고, 아울러 당시 영국의 주력 함포 모두가 은근히 관통력이 부족한 포들이었다는 것이 감안되었다. 로드니의 16인치는 고속 경량탄을 쏘는 실패작 16인치(그래도 웬만한 15인치보다는 강력했다)였고, KGV는 아예 소구경인 14인치 함포였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군은 비스마르크의 방어력이 최소 15인치 대응방어능력을 갖고 있으리라 판단했고(실제로는 미묘하게 부족했다.), 이 문제를 극복하려면 아예 원거리에서 포탄 낭비를 각오하고 교전하거나 아니면 최대한 지근거리에서 공격을 가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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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0 17:3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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