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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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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Βασιλεία των Ῥωμαίω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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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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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기간 B.C. 753년 or 330년[2] ~ 1204년,
1261년 ~ 1453년
영문 국가명 Byzantine Empire
중세 그리스어 국가명 Βασιλεία των Ῥωμαίων
(바실리아 톤 로메온)
라틴어 국가명 Imperium Romanum
위치 동유럽, 남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
언어 중세 그리스어, 라틴어
종교 정교회
주요사건 330년 콘스탄티노플 천도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사망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
626년 이란의 콘스탄티노플 포위
674년 아랍의 콘스탄티노플 포위
717년 아랍의 콘스탄티노플 포위
1054년 동서 교회의 상호 파문
1096년 1차 십자군 전쟁
1204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1261년 콘스탄티노플 수복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멸망
통화 솔리두스, 히피르피론
성립 이전 로마 제국 (...)[3]
멸망 이후 오스만 제국

Contents

1. 개요
2.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개념
3. 로마 제국과의 연속성
4. 관련 도서
5. 역사
6. 끝나지 않은 이야기
7. 제국의 이모저모
7.1. 전성기
7.2. 경제
7.3. 통치자들
7.4. 비잔티움의 대외 관계와 적들
7.5. 군사
7.6. 문화
8. 후대의 평가와 역사적 의의
9. 이름 논란
10. 여담


1. 개요

비잔티움 제국이란 근세 역사가들이 중세로마 제국을 고대의 로마 제국과 구분해서 다루기 위해 임의로 붙인 이름이다. 1557년 독일의 역사가 히에로니무스 볼프(Hieronymus Wolf)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고대 이름에 착안한 "비잔티움 역사집(CORPUS HISTORIAE BYZANTINAE)"라는 사료 모음집을 출판한 것이 최초의 용례이다. 그 뒤로 중세의 로마 제국을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는 풍조가 정착되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 306~337년)가 330년 5월 11일에 비잔티움을 로마 노바로 개명하고 수도로 삼은 뒤,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그리스어를 주로 쓰게 된 로마 제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동로마 제국으로도 불리며, 영어로는 'Byzantine Empire'라고 쓴다. 이 영어 표기를 그대로 들여와 한국에서도 '비잔틴 제국'이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으나, 엄밀히 말하면 'Byzantine'은 명사가 아닌 형용사이므로 잘못된 표기이다. 'Roman Empire'를 '로마 제국'이라고 하지, '로만 제국'이라고 하지 않듯이. 다만 학계에서는 '비잔틴 제국'이란 표현도 여전히 사용된다. 이는 아랍(아라비아의 형용사)처럼 관습적으로 오랫동안 사용된 단어이기 때문.

로마인 이야기 등 읽기 쉬운 대중 교양 서적의 몇몇 구절만 읽고 편중된 시각을 가진 몇몇 원수정 로마 덕후들은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이후 로마 제국과 로마인의 역사는 끝났다는 이상한반비잔티움 사관의 선봉장인 기번도 차마 못하던 소리를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로마 제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잘못된 시각이다.

330년 5월 11일 로마 노바로 천도한 이후 1453년 5월 29일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당한다. 여기서 로마 노바는 Roma Nova, 흔히 말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4] 같은 시기 우연히도 서유럽에서는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의 백년 전쟁이 끝났기에 흔히 이 시기를 서양 역사에서 중세근대의 분기점으로 잡는다. 기원전 8세기의 신화시대에 태어난 국가가 중세의 끝자락까지 유지되었던 것이다.(한국의 역사로 따지면 중국의 역사서에 간신히 고조선이나 부여의 존재가 기록되던 시절부터 계유정난 시기까지의 기간이다.)

2.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개념

전술했다시피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개념은 근대 역사가들이 편하게 쓰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며, 당대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비잔티움 제국 치하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로마인(ρομαίοι - 로메이)으로, 자신들의 나라를 로마 제국이라고 불렀다. 고대 로마 제국 시대의 정부와 국가 체제가 단절 없이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에 당대 비잔티움 사람들의 인식은 그대로 로마 제국이었다. "그리스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비잔티움은 그리스 속주가 아니라 트라키아 속주에 속하는 소도시였고, 의도적으로 재편된 바 없으며, 그리스 문화나 그리스인이 어느날 갑자기 제국에 들어온 게 아니라 이미 공화정 말기 때 군사적으로 정복당해 편입되면서 로마 제국에 하나로 융해된 것이다.

흔히 상당수의 학자들이 이의없이 "비잔티움 제국"이라 부르기 시작하는 7세기 때부터의 양상을 우리가 흔히 아는 로마 제국 전성기와 비교해보면서 이런 식의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는 편의적 그리고 연구를 위한 비교일 뿐이지 정말로 중간에 어떤 큰 계기나 단절이 있어서가 아니다. 이런 식의 생각은 2~7세기에 이루어졌던 점진적인 변화들을 깡그리 무시하게 되므로 주의가 필요하다.[5] 물론 이슬람의 침입과 성상파괴론의 등장등으로 제국이 격심한 혼란에 빠져든 소위 "7세기의 위기" 기간동안 로마 제국이 겪은 변화가 크긴 하였으나, 다른 시기보다 그렇게 컸는 진 의문의 여지가 있다. 6세기 말~7세기 초의 로마 제국과 7세기 말~8세기 초의 로마 제국은 어느 정도 달라지긴 했지만, 도시 국가 시기와 이탈리아의 맹주이던 시기, 포에니 전쟁 승리 이후 지중해의 패권자가 된 시기, 2세기의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와 3~4세기 점차 외부의 위협으로 인한 혼란에 빠져든 시기의 로마이 겪은 그 모든 변화보다 그렇게 낙차가 컸을까? 물론 연속성만 강조하는 건 균형을 잃은 서술이지만, 국가란 시오노 나나미의 망상속에 존재하는 불변의 완전체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고, 현실에 따라 변화하는 실체임을 잊어서는 안 되며, 또한 현재까진 비잔티움이 로마가 아니라는 괴랄하고 창의적(?)인 역사 해석이 여전히 일반의 주류인 건 사실이기에 현재 상황에선 연속성이 강조될 수밖엔 없다.[6] 일본의 서양사학자들 중에는 이 나라를 중세 로마 제국(中世ローマ帝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이 용어는 일본에서만 쓰이고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일본에서는 이 용어가 일반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다고 한다. 역사학자 와타나베 긴이치(渡辺金一)라는 학자가 1980년에 쓴 《중세 로마 제국: 세계사를 다시 본다(中世ローマ帝国―世界史を見直す—)》라는 책이 일본 내 보급력이 좋은 이와나미 신서(岩波新書)에서 출간됐는데, 이 책이 일반인들에게 꽤 읽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7] 다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로마 제국(東ローマ帝国)이나 비잔츠(비잔틴의 독일어명에서 유래) 제국(ビザンツ帝国)이 더 많이 쓰이는 듯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제국의 공식 명칭은 '로마 제국'이었으며 후세에 구분상 편의를 위해 그냥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쓰는 것이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서유럽에서는 여러 나라에서 로마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유럽 국가나 왕실의 국장(國章)에 유독 고대 로마의 상징인 독수리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당연히 자신이 로마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상 기존의 제국을 멸시했기 때문에, 비잔티움 제국의 정통성에 대해 의도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수많은 흠집이 가해졌다. 그래서 중세 서유럽인들은 정통 "로마인들의 황제(Imperator Romanorum)"는 카롤루스 대제와 그의 계승자들이며,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들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그리스 황제(Imperator Graecorum)"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공식적인 외교 관계에서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은 대단한 결례로 여겨졌다.) 반면 4차 십자군 전쟁으로 서유럽인들이 비잔티움을 정복하고 세운 라틴 제국의 경우, 서유럽 출신인 라틴 황제들은 스스로를 "로마니아의 황제(Imperator Romaniae)"라고 불렀다. '로마니아'란 당시 비잔티움 제국 주민들이 자기네 나라를 '로마인들의 땅'이라는 뜻으로 부르던 일종의 속칭인데 십자군 정복자들이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아무튼 오랫동안 가해진 비잔티움 폄훼로 인해 유럽인들은 물론이고 비유럽세계 주민들조차 1123년이나 유지된 비잔티움을 흑역사 취급하고 있었으나 현대에 들어서는 재평가되는 분위기이다.

3. 로마 제국과의 연속성

비잔티움 제국은 문화와 제도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8], 하나의 로마 제국 시절로부터 내려오는 학문과 기술을 잘 보존했다. 15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멸망하자 제국의 인력이 이탈리아 등으로 건너가 르네상스에 영향을 주고, 성 소피아 성당과 같이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당한 지역의 문물은 도리어 이슬람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대부분 독실한 정교회 신도였던 이 시대의 로마인들은 대부분 그리스어를 쓰고 그리스의 문화적 유산을 계승했지만, '그리스인(ελληνές - 엘리네스)'이란 단어는 근세까지도 '고대 이교의 신을 믿는 사람들'이란 뜻의 부정적인 어휘로 쓰였다. 이 지역 사람들이 그리스인이라는 분류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인해 중앙정부가 붕괴된 뒤, 니케아 제국 등의 지방 세력들을 중심으로 제국이 재건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의 일이다. 콤니노스 왕가 시절 이 말을 입에 담았던 사신이 킥밴 쫓겨난 것과 대비된다.

때문에 800년 로마 교황에 의한 카롤루스 대제의 '서'로마 제국 대관식이나 962년 오토 1세신성 로마 제국 수립은 당시 그리스계 로마인(?)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심지어 비잔티움과 대립했던 이슬람 세력이나 튀르크 세력 역시 그들의 적을 룸(Rum), 즉 로마라고 불렀다. 그래서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는 자신이 Kaysar-i Rum, 즉 로마의 황제라고 주장했으며, 이후 여러 황제들이 "로마의 황제"를 타이틀에 포함시켰다. 븐 바투타도 자신이 방문한 콘스탄티노플을 룸의 수도라고 했고 그곳 사람들을 로마인이라고 기록했다. 발칸 반도 지역은 로마인의 땅이란 뜻인 루멜리아로 불렀다. 오스만 제국 말기 그리스가 독립해 나간 뒤에는 독립국가의 그리스인들은 Yunan, 제국 치하에 남은 그리스인들은 Rum이라고 불러 구분하기도 했다.

그래서 비잔티움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제2의 로마'로 여겼다. 훗날 제국이 멸망한 뒤 모스크바 대공국이 어떻게든 콘스탄티노플과의 관계를 찾아내며 '모스크바제3의 로마임'[9]이라고 주장했으나 당시에는 러시아 국내용이었고 다른 나라들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가 콘스탄디노스 11세의 조카딸인 조에와 결혼한 것에서 근거를 두었지만, 오스만 치하의 정교도들에게는 전혀 달가운 말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무슬림들에게 점령되었더라도 여전히 로마였으며 '회복해야 할' 땅이었다.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는 새해를 맞아 캐롤을 부르는 사람들의 노래가사가 나오는데 내용이 인상적이다. "성 바실라스와 성부, 성자, 성령의 도움으로 아홉 아들과 아홉 딸을 낳으시길. 딸들은 저마다 실을 잣고 천을 짜는 살림꾼이 되게 하시고, 아들들은 저마다 훌륭한 병사가 되어 왕들의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게 하소서." 하여튼 스스로 칭제한 러시아였지만 표트르 대제의 개혁과 나폴레옹 전쟁 승전 등을 거치며 동유럽의 패자로 부상하고 나서는 러시아 제국도 나름대로 주변 국가들에게 황제국 대접을 받았다.

4. 관련 도서

전술한대로 유럽에서도 역사적으로는 비잔티움 제국에 대해서 폄하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재평가하고 있는 분위기이며 관련 교양 입문서들도 많이 발간되었다.

국내에 출판된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영국의 줄리어스 노리치의 《비잔티움 연대기》가 있다. 한국어 번역물 중에선 가장 인기가 많지만 작가의 성향에 따른 왜곡과 과장, 축약이 심하다. 예를 들어 봉건제 중 하나인 프로니아( Πρόνοια) 제도를 민병대로 묘사한다든가, 나라를 말아먹은 내전의 주범을 의분으로 인해 봉기한 것으로 미화한다든가. 노리치는 역사학 전공자가 아니며 역사가는 더더욱 아니고, 그것만 조심하면 입문자들이 읽기엔 편하다. 3부 서문(한국판 5권)에서는 스스로 '결코 학술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사전이 없으면 간단한 그리스어 문장조차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한다'고 시인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관심이 생기거든 국내에 출판된 워렌 트레드골드의 《비잔틴 제국의 역사》를 읽어보자. 번역 퀄리티가 조금 많이 낮지만 한국어로 번역된 책 중에서는 가장 최근 연구 결과를 반영한다. 이 책은 동 저자가 《비잔티움 국가와 사회의 역사》를 축약하고 몇 가지 부분을 추가해서 교양 서적으로 만든 판본이고, 원본은 아직 미출간 상태다. 이외에도 주디스 헤린의 《비잔티움 : 어떤 중세 제국의 경이로운 이야기》가 있다. 추가로 게오르크 오스토르고르스키의 《비잔티움 제국사》도 읽어보자. 문체가 약간 딱딱하고 번역투의 느낌이 나지만 이쪽이 정통. 다만 1965년대의 저작이라 비잔티움 제국이 6~7세기의 위기를 극복하고 그 과정에서 얻은 성과를 기반으로 8~10세기의 문화적, 경제적, 군사적 성장을 이룬 부분이 빠져 있는데 이 점 주의가 필요하다.

내공이 더 쌓이고 흥미가 생기면 나 콤니나의 《알렉시아스》, 미하일 프실로스의 《연대기》와 같은 당시 작품들을 접해보는 것도 좋다. 다만 뒤의 두 작품은 영어로는 번역이 되어있으나 한국어로는 번역이 되어 있지 않으니 주의할 것.

다만 언급된 책들 대부분이 품절되어 구입하기 힘든 책들이 많다. 따라서 도서관을 애용하도록 하자.

6. 끝나지 않은 이야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었지만 그리스인들은 여전히 그곳에 살았다. 메흐메트 2세는 전쟁으로 피난간 그리스인의 복귀를 장려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20세기 초까지도 그리스인 인구가 도시 전체의 절반에 달하는 명실상부한 국제도시로 자리잡았다.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전해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함락 당시 성 소피아 성당에는 점령군이 물러나길 바라는 여성들과 성직자들이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튀르크 군대가 성당 안에 들어갔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성직자들과 미사를 참례하던 신자들이 모두 벽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전사'했다고는 하지만 정작 시체는 확실히 발견되지 않은 콘스탄디노스 11세처럼 그들도 죽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다시 그리스도인의 도시가 되면 이들이 모두 돌아와서 미사를 마저 끝내리라는 전설이 남아있다.

그리스인들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집착은 생각 이상으로 강해서 이스탄불아나톨리아지방에 거주하던 그리스계 주민들은 대부분의 신생 독립국인 그리스를 인정하지 않았다. 무슬림의 지배를 받더라도 어쨌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1차대전 이후에 그리스인들이 터키를 침공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10]. 1923년 터키와 그리스 사이의 인구교환 이후에도 이스탄불 근교에 위치한 섬들에는 여전히 터키국적을 가진 그리스인들이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면서 살고 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애틋한 감정은 타소스 불메티스 감독의 <터치 오브 스파이스> - 그리스어 타이틀은 'Πολιτίκη κουζίνα'(도시의 요리) - 에도 잘 나타나있다.

7. 제국의 이모저모

7.1. 전성기

제국의 전성기는 두번으로 꼽을 수 있는데, 첫 번째 전성기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다.

(ɔ) Red4tribe from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당시의 제국은 외적으로는 과거 로마 제국에 버금가는 모습을 보이는데, 프랑스영국, 에스파냐의 일부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로마 제국의 과거 영토를 되찾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흑사병 크리가 터진다. 더군다나 제국은 도시화도도 사산조 등 다른 지역보다 높은지라 피해는 더욱 컸다. 게다가 몇 번의 침략으로 이 전성기는 끝난다.

© Nécropotame (French version); Cplakidas (English translation) (cc-by-sa-2.5) from


두 번째 전성기는 바실리오스 1세(재위 867~886년)가 창건한 마케도니아 왕조 시기를 꼽을 수 있다. 약 200년간에 걸쳐 전개된 이 시기에는 바실리오스 1세, 현군 레온 6세(재위 886~912년), 로마노스 1세 레카피노스(재위 920~944년), 콘스탄디노스 7세(재위 913~959년),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재위 963~969년), 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재위 969~976), 바실리오스 2세 불가록토노스(불가리아인들의 학살자)등의 위대한 황제들이 배출되었으며, 영토만으로는 이전 로마 제국에 훨씬 못미치지만 문화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이 시기의 제국은 유럽 뿐만 아니라 지중해 문화권 전체에서 최강의 면모를 보였다. 또한 395년 분리 당시의 동로마 제국과 대한 비교라면 구체적인 데이터가 존재한다.

이 시기의 영토는 395년의 소위 말하는 동서 로마 분리 당시의 동로마 제국의 거의 약 90% 수준에 달하며, 물론 그 이후로 시대가 흘러 인구가 늘고 기술이 발전한 것을 감안해야 겠지만 인구와 세입금은 거의 75%, 군사력은 110% 수준으로까지 도달했다. 이 수치는 워랜 트레드골드가 추정한 수치인데, 여기에 대한 다른 학자들의 비판은 오히려 워랜이 인구와 세입금을 너무 적게 잡았다는 내용이 주여서, 이를 감안하면 대강 거의 동서 로마 분리 당시의 동로마 제국 국력을 먼길 돌아서 회복했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나 이 전성기는 만지케르트 전투와 연이은 11세기의 혼란으로 위기에 처하게 된다. 동쪽으로는 튀르크족이 밀려들어왔으며 북쪽에서는 쿠만족, 페체네그족 등의 침략이 이어졌으며 서쪽에서는 노르만의 공세가 줄을 이었다. 이 상태에서 기존 체제는 와해되고 콤니노스 가문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수습되었으며 전성기는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12세기의 모자이크 미술

영토가 아닌 경제 지표를 기준으로 했을 때는 12세기 무렵 콤니노스 황조 치하의 시기에 역사상 가장 융성하였다. 당대 기록에서 이미 고대를 넘었다고 자부할 정도였다. 이 시기 제국의 군사력은 중앙 야전군을 4만 혹은 5만명 선까지 팽창시켜 주전력으로 삼았다. 경제부문에서는 농상공업이 모두 골고루 발전하여 역대 최고의 영화를 누렸다. 12세기 중반에는 이미 조세액만으로 11세기 초에 맞먹게 되었고 그 세기 후반에 들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루 관세만 금화 2만개에 달했다는 보고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당시의 경제적 발전상이 정부기관과는 구분되는 민간에서 주로 이루어진 점을 감안한다면 앞에서 말한 발전상조차도 이 시기의 번영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할 수 있다. 그만큼 제국은 당대 최고의 경제대국의 지위를 가졌으며 당시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인구는 역대 최고수준이었고 그런 제국의 부와 아름다움은 십자군 기사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그리고 그 선망은 1204년의 참변을 만들었다.)

7.2. 경제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서유럽과는 달리 고대 이래 화폐 경제 제도가 발달하였다. 제국 정부에서 발행한 금화 노미스마는 13세기 후반까지 높은 순도를 유지하여 1282년에 등장하여 빠르게 보급된 베네치아 두캇 금화에 의해 대체되기전까지 높은 신용도를 가지고 있었다. 노미스마화는 후세에 ‘중세의 달러’라고 불릴 정도로 국제적 화폐로 유통되었다.

특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업종마다 길드를 통한 국가에 의한 보호와 통제가 두루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국영 공장에서 독점적으로 제조된 견직물이나 귀금속 공예품, 다른 나라와의 무역 등이 제국에 많은 부를 가져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세계의 부의 3분의 2가 모이는 곳’이라고 불릴 만큼 크게 번영하였다. 그러나 국가에 의한 경제 통제는 11세기 초까지로 한정되며 8~9세기 이래로 경제 전반은 점점 민간의 역량이 강화됨에 따라 자유무역 쪽으로 변화되었다. 특히 12세기에 접어들어 투델라의 벤자민(Benjamin of Tudela)이 연대기에서 기술하듯 콘스탄티노플에서만 하루 금 2만개를 거둔다는 진술이 나올 정도로 무역경제의 규모가 역대 최대 규모로 성장했다. 그러나, 12세기 말 제국은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으며 그 가운데 베네치아 상인들에 대한 비잔티움 지식인들의 적개심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1204년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제국 경제의 몰락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주요 산업 가운데 하나인 농업은 고대부터 중세까지는 서유럽에 비해 고도의(라기보다는 서유럽의 기술이 로마 시대보다 쇠퇴한 것이지만) 농업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의 농업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9~13세기 사이에 서유럽이나 중동에서 농업도구의 기술과 생산성이 개량되면서, 제국의 농업 기술이 상대적인 우위를 잃었다. 기술의 발전은 이중괭이와 가벼운 쟁기에서 멈추었지만 그것은 Angeliki 교수의 주장을 따르면 굳이 깊게 땅을 팔 이유가 없는 동지중해의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며 Oikonomides 교수 역시 같은 점을 지적하면서 자연환경에 농민들이 적응한 결과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오히려 비잔티움의 노동생산성은 14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했는데 이는 단순한 기술적 발전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토지소유형태와 경작 방식에 있어서 조선 후기와 비슷한 양식의 집약경작방식의 도입 등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거대하게 관개를 진행한 아랍과 달리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농민들과 지역 유지들이 자체적으로 터널을 파 관개수로를 설치하고 물레방아를 설치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 동안에 서유럽의 생산성은 배로 늘어났고 아랍-이슬람 세계도 관개공사를 하여 수확을 두 배로 늘리고 동양의 작물을 도입하였다. 따라서 비잔틴 농업 기술은 초기에는 앞서 있었으나 점차 규모의 측면에서 압도적인 서유럽에 뒤쳐지는 모습을 보였다.

7.3. 통치자들

총 88명(라틴 제국 출신의 황제 제외)의 황제들이 제위에 올랐으며,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할 때까지 오랜기간 권력다툼이 극심했다. 일반적으로 신체적으로 정상이 아닌 자는 황제의 자격이 없었지만 유스티니아노스 2세(재위 1차 685~695, 2차 705~711)는 코를 잘린 후에도 자신을 쫓아낸 자들에게 복수하고 제위에 등극하였다. 제위에서 밀려난 패배자들은 대개 을 뽑히거나, 를 잘리고 도원연금되었다. 눈을 뽑는 이유는 코를 잘라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란 건 비밀. 실제로,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코를 잘린 뒤 다시 황제가 되었을 때 금으로 만든 가짜 코를 붙이고 다녔다(.....) 후기에 들어서는 이러한 관행은 많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냥 죽여버렸지 신체 절단형을 끔찍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비잔티움인들 입장에서는 죽이는 것보다 세련되고 문명적인(...) 정적 제거법이었다. 단 콘스탄티노스 6세는 폐위될 때 눈이 뽑히고 죽었는데, 죽은 시기가 차이가 있어서 어머니 이리니 아씨나이가 특별히 죽을 수 있는 방법으로 눈을 뽑았다는 주장도 있다. 눈 뽑아서 죽일 거라면 그냥 평범하게 죽이지

7.4. 비잔티움의 대외 관계와 적들

서유럽과의 관계는 그다지 양호하지 않았다. '로마 제국의 정통'을 표망하던 비잔티움인들에게 서로마 황제 대관식(서기 800년)을 가진 카롤루스 대제(재위 800~814년)는 아니꼬운 상대였다. 거기다가 서쪽과는 종교적 교리도 달랐다. 처음엔 성상파괴주의로 인해 기독교 중심지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나, 결국 비잔틴 내부에서도 후에 성상을 인정하였다. 이후 동유럽권에서의 이콘은 주요 상징이 된다. 동서 교회 간의 불균형은 서기 800년 카롤루스 대제가 서로마의 황제가 되면서 균형을 이루게 된다. 정교와 가톨릭은 계속 대립하였는데 후에는 필리오쿠에 논쟁을 통해 서방과 동방 교회는 완전히 단절되었고, 이 대립은 서기 1054년에 절정에 달했다. 이 사건으로 로마 교황이 파견한 사절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파문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로마 사절단을 맞파문했다. 이후 십자군 전쟁(특히 2차와 4차)을 거치면서 제국과 서유럽인들은 서로를 더더욱 불신하게 되었다.

제국의 적들을 살펴보면 서쪽에서는 유럽인들과 싸워야 했는데, 제국인들은 남부 이탈리아를 점유하고 있었다. 프랑크인들은 계속 이지역을 노렸지만 프랑크인들은 결국 이 지역을 점령할 수 없었다. 후에 노르만인들은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제국을 몰아내고 시칠리아 왕국을 창건한다. 노르만인들은 좀더 시간이 지난뒤에, 제국의 도시 두라초를 공격하기도 했다. 노르만인들 또한 제국의 주요한 적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제국의 용병으로 노르만인이 고용되기도 했다.

그외에도 제국의 주변에는 많은 적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가장 무서운 적은 아랍 무슬림들이었다. 이들은 순식간에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비잔티움 제국에서 시리아와 이집트, 북아프리카 지역을 점령했다. 잠시 숨을 돌린 아랍인들은 곧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공격해왔다. 콘스탄티누스 4세 때에는 그리스의 불로 해전에서 아랍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레온 3세 때 다시 한번 아랍인들을 격파했다. 두 차례의 아랍인들과의 공성전에서 비잔티움인들은 아랍인들을 저지할 수 있었고, 서쪽에서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의 승리로 유럽과 기독교 문명은 이슬람 문명이라는 라이벌로부터 생존할 수 있었다.

이슬람으로 부터 온 적들중 가장 강력한 적은 튀르크인이었는데 8~9세기에는 튀르크계의 불가리아에게 크게 압도당할 뻔했다. 11세기 이후에는 셀주크 투르크와 소아시아에서 계속 전투를 벌였고 이들을 막기 위해 십자군 기사들을 불러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4차 십자군에 의해 본진인 콘스탄티노플이 털린 후에는 예전과 같은 힘을 상실한 제국이 계속 밀려나는 신세가 되어버려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들에 의해서 멸망당하게 되니 근 700여년간의 투쟁사라고 할수 있다. 이는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중세 비잔티움 제국의 문화적 계승자인 현 그리스와 튀르크의 계승자인 터키의 대립으로도 계속되고 있다.

제국의 또다른 적들로는, 발칸 반도 지역에 남하해온 슬라브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비잔티움인들의 적이었으나, 키릴로스 형제의 포교와 제국의 압도적인 문화 덕분에 비잔티움의 문명에 동화되었다(물론 문화적으로는 동화되었지만, 후에 세르비아는 비잔티움 제국을 노리기도 했다).

초기에 슬라브족들은 발칸 반도지역에서 약탈을 일삼았으나, 얼마 안가 제국의 영토에 정착했다. 슬라브족들 외에도, 북쪽에서는 계속해서 스텝지대의 유목민들이 남하해왔는데, 초기에는 아바르족, 어느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불가르족, 나중에는 페체네그족들이 남하해왔다. 아바르족은 이라클리오스가 페르시아 원정을 가있을 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지만, 실패하고 세력은 붕괴되었다. 불가르족은 오랜기간 제국을 괴롭혔다. 한때는 불가리아 국왕에게 제위를 선물해서 그들의 비위를 달랜 적도 있었다(제 1차 불가리아 제국). 바실리오스 2세(재위 976~1025년)때는 불가르 세력을 완전히 복속시키기도 했지만(1018년), 이내 제국이 약화되면서 불가리아는 다시 역사에 나타난다(제 2차 불가리아 제국). 페체네그족은 비잔티움이 가장 약화되었을 때 발칸 반도로 남하해왔으며, 알렉시오스는 이이제이의 전략으로 다른 유목민족을 끌어들여 페체네그족을 궤멸시켜버렸다. 그 후에도 이들은 존속하긴 했다. 다만 제국의 병사와 정주민으로서. 그들로 이루어진 부대들은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을 보호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형식상 속국이었지만 4차 십자군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관계가 좋지많은 않았다. 그래도 공성전 때 병사를 보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의리는 있었는 듯 싶다. 물론 이 때 군사를 보낸 것이 정말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도시를 약탈(...) 하기 위해서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래도 교황과 헝가리 등에게 '서둘러 힘을 모으지 않으면 우리는 동방의 그리스도 국가의 수도(콘스탄티노플)을 영원히 잃게 될 것이오' 라고 경고한 것도 베네치아고, 비잔틴의 구원 사절단을 맨 처음 받아 교황과 여타 유럽 강대국들에게 빠르게 전달한 것도 베네치아였다. 물론 상업적인 이득을 위해서겠지만.

7.5. 군사

비잔티움 제국 자체가 긴 로마 제국을 편의적으로 구분하기 위해 만든 용어인 만큼, 비잔티움 군대가 곧 로마군이다. 하지만 역시 편의적인 이해를 위해 굳이 말하자면, 비잔티움 군대는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군제 개혁을 통해 새로이 변모한 로마군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군대는 스콜라이 팔라티니와 팔라티니 코미타텐세스를 비롯한 근위대[11], 야전군인 코미타텐세스, 국경방위대인 리미타네이와 용병이라고도 볼 수 있고 제국 내 자치령의 소집병으로도 볼 수 있는 포이데라티, 그리고 주로 기병으로 구성된 귀족들의 사병 부대 부셀라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로마 후기 군대가 막장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지만, 경제력이 그럭저럭 유지되던 동로마 방면 군대는 여전히 상당히 건실했으며 외국 용병인 포데라티도 로마 국내의 군사력으로 충분히 억제 가능한 수준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당시 비잔티움 제국군은 최대 300,000~350,000명에 이르렀다. 코미타텐세스와 리미타네이로 혼성 편제된 각 야전군은 15,000~25,000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티시아 디그니타툼 불신론이 널리 퍼져 있으나, 적어도 동로마 방면에 주둔하고 있던 야전군들의 편제는 거진 그대로 이라클리오스 시대까지 유지되었다. 벨리사리우스의 원정대에 용병이 편제되는 등 용병의 활용도가 높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용병 활용은 로마의 아욱실리아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벨리사리우스의 원정은 주적이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상대하는 상황에서 용병 비중이 높았던 것으로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벨리사리우스의 원정대에서 주력이 된 보병 10,000명에 기병 3,000기는 기존의 야전군인 코미타텐세스와 용병대 포이데라티가 혼성 편제된 군대였다.[12]

하지만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 끝에 부유한 이집트와 시리아를 상실하자 다수의 상비병과 용병으로 군대를 유지하기는 어려워진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이를 해결하고자 둔전 제도의 일종인 테마 제도를 도입한다. 사실 이 때 테마 제도는 비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해결책이었지만 이슬람의 흥기 이후 이집트와 시리아, 카르타고를 상실하고 거대한 이슬람 세계의 공세에 노출되자 다수의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상설화된다.

테마 제도는 둔전병들에게 토지와 면세 효과를 부여하고(사실 뒤로 가면서 유명무실해지긴 한다) 대신 그 지역에 정착하여 외부의 군대가 습격해올 때 이를 방어하는 역할을 한다. 이슬람 세계에 대해 명백한 군사력 열세에 처했던 8세기의 비잔티움 제국의 방어 전술은 테마의 둔전병이 고지대나 요새에서 적을 방어하는 한편 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게릴라 전술을 펼치고, 이 사이 인근 테마의 지원군이나 중앙군이 집결하여 적을 격퇴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에 지역 기반적인 군사 제도 덕분에, 일시적으로 그 지역이 적의 약탈에 유린되어도 주민들이 그곳을 떠나지 않고 금세 군사력을 복구할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다만 지역분산적인 군사제도는 언제든지 이들이 중앙의 황권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테마 제도가 시행되는 초기와 성상 파괴로 인한 대립이 있었을 때는 이러한 일이 잦았지만, 이후 제국은 테마를 소형화해서 여러 갈래로 갈라놓으면서 이들이 연대하여 중앙에 반발하는 일을 어렵게 해 놓았다.

중앙군인 타그마(το τάγμα)[13]는 상설화, 혹은 거의 상설화된 군대로 점차 확대되어가다 후대에 총 4개의 기병 연대로 확립되었다. 이들의 수는 24,000명으로[14] 테마의 군대보다 훨씬 중무장했고 기병 비율이 높은 부대 구성으로 야전군의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테마 제도는 기본적으로 둔전병이 그 지역을 지킨다는 상당히 수세적이고 지역 기반적인 전략이었기 때문에 제국이 이슬람 세계에 공세로 돌아서는 10세기에는 테마 제도의 구성원은 상당히 줄어들고, 대신 타그마나 용병의 비중이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호족 가문의 세력 확대로 둔전병이 토지를 잃는 상황이 이어지며 붕괴를 가속했다. 이 영향으로 제국의 수세적 역량은 약화되어가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군사력의 중핵이었던 아나톨리아 지방과 바실리우스 2세 치하에 확장되었던 '새로운 테마'의 영역을 상실하면서 결정타를 맞고 붕괴한다.

이렇게 중기 제국 군사 제도가 붕괴하고 콤니노스 황조 치하에서는 군사력의 봉건화가 진행된다. 농민 위주로 편성되었던 테마 제도와는 달리 중소 귀족에게 토지를 하사하고 군사적 의무를 할당하는 프로니아 제도가 나타났다. 프로니아 제도는 원칙적으로는 토지의 상속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는 서구의 봉건제와는 어느정도 차이를 보였으나 실제로는 대부분 세습되었다. 황제들은 프로니아의 반란이나 이탈을 막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콤니노스 가문이 지배하던 시기와 앙겔로스 가문까지는 봉건화가 절정으로 치달은 시기로 평가된다. 이는 서유럽이 봉건제에서 중앙집권화 된 근세로 발전해가고 있던 것과 비교하면 완전히 반대의 행보를 걸은 셈이다. 4차 십자군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이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한 이후에는 당시 니카이아 제국의 역량으로 제국 전 영역을 커버할 군사력을 확보하기가 어려워지자 용병의 중요성이 더욱 늘어났다. 그 이후에는 과도한 군사력 지출과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군사 제도가 붕괴되기 시작했고 결국 멸망을 맞게 된다.

주요한 병종으로는 유명한 리바노로포스카타프락토이가 있다. 헷갈리게도 페르시아에서는 마갑이 있으면 카타프락토스고 반만 있으면 클리바노포로스지만 여기서는 반대다. 근데 니키포로스 2세의 pracepta milataria를 봐도 마갑 입힌 기병을 그냥 카타프락티라고 표기한다. 그러니까 원어민(...)들도 그다지 구별하면서 쓴게 아니다. 등자는 언제부터 운용했는 진 정확하지 않으나, 적어도 11세기 쯤엔 운용했으며 물론 카우치드 랜스도 운용했다. 다만 당당하게 보병대를 정면에서 돌격해서 깔아뭉개는 걸 즐겼던 한 세기 후의 십자군[15]과는 달리, 여전히 전통적인 양익 배치 편제대로 운영되었다.

제국은 이런 클리바노로포스와 카타프락티 기병대 외에도, 바랑인들로 구성된 용병부대와 스쿠타토스(복수형은 스쿠타티, 방패를 든 아저씨들(...))라 불린 중보병 부대, 궁병, 경기병도 운용하였다. 바랑인 부대는 처음에는 러시아에서 온 바랑인들로, 나중에는 잉글랜드에서 온 잉글랜드인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디라키움(알바니아 두러스)에 침공해온 노르만인들을 상대로 무모한 전투를 벌이다 전멸하고 말았다.

후에 이 부대는 다시 재건되고,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해왔을 때(1202년), 제대로 저항을 하던 거의 유일한 부대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 이후의 제국은 병력의 주제공지였던 소아시아를 거의 상실하게 되어 용병에 의존하게 되는 상태가 된다.

제국의 중보병은 과거 로마 제국처럼 더이상 주력부대가 아니었지만, 이들은 방어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했다. 아니, 오히려 공격에 더 필요했다. 10세기 초반까지 제국의 방어전술은 테마를 위주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기병 부대로 불릴 정도로 기병 비중이 높았고, 보병은 대개 궁수나 경보병으로 보조 역할만 맡았다.

하지만 10세기 중반들어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 이후 보병 부대의 강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보병-기병의 비율도 2:1까지 늘어났고, 팔랑크스와 유사한 형태의 장창병과 궁수, 투창병, 특별한 정예 창병인 메나블라티(menavlatoi). 이들의 역할은 중투창병이라는 설부터 중기병 부대를 저지하기 위해 창대가 아주 두꺼운 창으로 무장한 특수 창병이라는 설이 있는 부대를 위주로 충격부대 역할과 기병 작전의 베이스 역할을 하는 보병 전술이 완성되었다.

벨리사리우스가 13 살에 입대했다는 걸로 봐서는 입대 연령이 17세였던 로마 제국 시절보다 좀 더 낮아진듯 하다.

7.6. 문화

고대 로마시절과 비교해 굉장히 기독교적으로 변했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사이의 교류는 비잔티움 제국으로 일부 학자가 일컫기 시작하는 시기는 아주 이전부터 시작되었으며, 제국이 갈수록 기독교화되어가다 보니 문화적 면에서 기독교가 우세해지는 건 필연적이었고 이는 미술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이시기 예술에 대해서는 비잔틴 미술 참고. 하지만 여전히 고전 문학은 지식인에게 필수였고, 라틴어 법학 또한 상당히 중시되었다.


8. 후대의 평가와 역사적 의의

18세기 영국인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자신의 명저 "로마제국의 쇠망"에서 로마제국의 후계인 제국을 악의적으로 왜곡/곡해하고 매우 평가절하했으며, 이는 작품 내에서도 노골적으로 암시되듯이 반기독교적 성향인 기번에게 있어 "기독교로 개종한 로마"는 그저 로마의 이름만 빌린 짝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계몽시대에 전반적인 제국 평가에 영향을 주어 비잔티움이란 그저 "궁정의 음모와 환관이 판치던 저질국가"라는 인식이 강했다. 모 근대 저자는 "저열제국(The Lower Empire)"라고도 서술했다. 차라리 기번은 양반이다.

이는 시오노 나나미에게도 계승되어서 그녀가 서술한 로마인 이야기 마지막권에서는 제국의 전성기는 로마가 막장일 때보다 조금 나을 정도의 안습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서구 역사학계가 계몽사관-근대사관의 그늘을 벗어나게 되고, 비서유럽 문명사를 보다 객관적으로 보게 되면서 비잔티움 제국의 평가도 180도 달라졌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번이나 시오노 나나미의 비잔티움관은 이미 유효기간이 out of date 된 것이다. [16] 현재 역사학계 주류는 제국은 로마 옛 전통과 새로 도입한 기독교를 잘 조화시킨 로마제국의 진정한 후계국으로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암흑기에 빠져있던 서유럽보다 훨씬 발달한 사회라고 기술하고 있다.

특히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서유럽의 강고한 방파제 노릇을 수행한 것은 비잔티움이 역사에 남긴 큰 의의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슬람 세력에 넘어간 중동의 여러지역들에서 기독교가 모조리 사그라들고 대부분 이슬람화 된 것을 볼때, 비잔티움은 서유럽 기독교 문명의 수호자 노릇을 한 것이다. 또한 문화적 수준도 당시 서유럽보다 월등히 높아서, 비잔티움의 멸망으로 인해 서유럽으로 망명한 고전 학자들에 의해 서유럽의 르네상스가 시작될 수 있었다. 이랬기 때문에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비잔티움은 서유럽에 있어서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의 냉장고" 역할을 했다는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다만 이 냉장고 역할이란 평가도, 비잔티움 문화에 대한 홀대로 볼 수 있는 평가이다. 한마디로, 니넨 뭐 새로운 건 안 만들고 고전 문화만 보존해서 갖고 있다가 서유럽한테 전해준거잖아라는 의식이 기저에 깔려있다.고전 문화와 기독교 문화의 융화 및 그것이 서유럽에 끼친 영향 및 동유럽 문화의 기틀이 된 동로마 제국의 문화를 단순히 '문명의 냉장고'로만 평가하기엔 부족한 면이 너무 크다.

애시당초부터 그녀가 그렇게 좋아하는 베네치아부터가 비잔티움 제국의 중소도시에서 시작하여 독립한 것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베네치아의 초기 건축물은 비잔티움 양식에서 가져온 것이 확연히 보일 정도. 대표적인 건물이 산 마르코 대성당인데, 이쪽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하기아 소피아 다음가는 교회인 성 사도 대성당을 모방해서 건축하고 비잔티움 양식의 황금빛 모자이크로 도배했으며 몇몇 유물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약탈해와 장식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영토 크기로 로마 제국이 갖고 있던 보편 제국으로서의 특징을 어느 정도 잃어버린 것이 사실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슬람 대두 시기 이전도 그렇고 이슬람이 대두한 시기에서도, 제국 영토 내에는 흔히 잘못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리스인, 불가르인, 슬라브인, 아랍인, 이탈리아인 그리고 아르메니아인 등이 늘 있었다.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그리스인만 살았으며 그들이 늘 주축이었다고 생각하는 견해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제국이 특유의 보편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한 시기는 아무리 올려잡아도 콤니노스 왕조 후기부터지만 그 시기에도 그런 경향성은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았으며, 강렬한 그리스 민족 의식과 반서구 의식이 본격적으로 대두한 것은, 워렌 트레드골드 같은 학자가 아예 로마 정부는 1204년에 파괴되었다고까지 언급할 정도로, 앙겔로스 가문이 지배한 시기와 4차 십자군 시기를 거치면서 제국이 거의 해체 지경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제국의 문화나 제도 그리고 인적 구성은 후기 로마 제국에서 그대로 이어지기에, 단순히 어떤 특정하게 생각하는 시대의 이미지(특히 원수정 로마)에만 국한되어 그 시대와 다르다고 독자적인 국가로 생각하는 견해는 실태 파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잔티움인 자신들이나 당시 유럽인들은 물론, 아랍인과 페르시아도 모두 비잔티움을 로마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비잔티움을 멸망시킨 터키까지도 비잔티움 제국을 룸(로마)이라고 부르는 등 주변국가 모두 비잔티움이 곧 로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그리고 이건 법통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반박의 여지가 없다), 로마와-비잔티움을 별개로 생각하는 것은 서유럽 중심의 역사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시오노 나나미가 주장하듯이 고대 로마와 비잔티움이 전혀 관계가 없다는 식으로 기술하는 것은 심각한 역사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9. 이름 논란

비잔티움 제국을 나타내는 말을 고대 그리스어(코이네)로 발음하면 '바씰레이아 똔 로마이온'정도 되지만, 비잔티움 시절의 그리스어는 이미 상당한 복모음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현대 그리스어와 거의 같게 발음된다.[17] 특히 'Β'가 'v'자음으로 바뀌게 된것도 기원 후의 일이다. 여튼 중세 그리스어식 발음은 '바씰리아 똔 로메온'. 이와같은 그리스어의 변화를 현재 한국에서 통용되는 비잔티움 시대 인물들의 호칭에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수정이 필요하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특히 한국외대 그리스-발칸어학과 교수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발음을 살리면 유스티니아누스는 '유스티니아노스', 헤라클리우스는 '이라클리오스'가 된다. 그리고 비잔티움의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 (드라가세스)는 '콘스탄디노스 11세 (드라가시스) 팔레올로고스'가 된다. 물론 그때 사람들도 헤라클리우스 황제 이후에도 서방 국가들을 상대로는 라틴어로도 황제를 기록했으니 어디를 따르는가는 독자 마음. 다만 코이네만 괴이하게 고집했던 한때의 풍토는 반드시 되짚어야 한다. 예전의 서구에도 이런 풍조가 있어서 워랜 트레드골드 교수가 일부러 한 단원을 할애해서 집중적으로 까댔을 정도.

그리스에선 Βυζαντινή Αυτοκρατορία(비잔디니 압토크라토리아; 비잔티움 제국)나 Ανατολική Ρωμαϊκή Αυτοκρατορία(아나톨리키 로마이키 압토크라토리아; 동로마 제국) 같은 표현이 쓰인다. 위 바실리아 톤 로메온이란 말은 그냥 로마 제국 정도의 뜻이라서 현대 그리스 입장에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비잔티움 제국이 그냥 로마 제국이면 그리스인들은 디아도코이 시대가 끝난 이후, 오스만 제국에서 벗어나기 이전에는 자기 나라를 가져본 적이 없는 민족이 된다. 현대 그리스 공식 입장은 대체로 비잔티움 제국의 그리스 계승성을 강조한다. 이는 최근 학계 연구 성과와는 반대되는 주장.

10. 여담

여담이지만 19세기 오스만 투르크에서 독립한 그리스 왕국은 스스로를 비잔티움의 정통후계자라고 생각했다. 사실 비잔티움은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쓰는 제국이었기 때문에 아주 틀린말도 아니다[18]. 그러나 로마제국의 원조인 이탈리아도 가만히 있는데..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콘스탄티노플을 되찾기 위해 이를 갈았으며 제1차 대전때 동맹국에 가담한 오스만 제국에 맞서 연합군에 가담했다. 동맹국이 패하고 오스만제국이 공중분해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는 자신의 힘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는 것엔 성공했는데, 욕심이 지나쳐서 아나톨리아까지 넘어가다 못해 소아시아까지 점령하려다가, 신생 터키 공화국의 지도자 케말 아타튀르크가 오스만군의 잔해를 급히 긁어 모아 구성한 병력에 격파당하고 말았다. (터키 독립전쟁) 그리하여 그리스의 뜻은 분쇄되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복해야했던 콘스탄티노플까지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스인들은 이를 천추의 한으로 생각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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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기와 문장은 제국 말기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것이다.
  • [2] 동서 분할 기준
  • [3] 로마제국의 직계 후신도 아니고, 로마제국 자체이니 당연한 것. (...)
  • [4] 사실 '로마 노바'가 정식명칭이지만 자국민 사이에서도 콘스탄티노폴리스라든지(Konstantinopolis - Η 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 도시들의 여왕(The Queen of the cities)이라든지, 아니면 그냥 도시(The city - Η πολή i poli)라고 불렀으며 이 용법같은 경우는 현재도 통용된다. 콘스탄티노플 이외의 도시는 모조리 마을(town - η χώρα i hora)이었다. 안나 콤네나의 저서인 《알렉시아스》를 읽어보면 비잔티움 제2의 도시(이자 현대 그리스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키마저 town 취급을 한다. 그 명칭이 어떤고하니 테살리아(θεσσάλια)의 마을(χώρα). 이런 전통은 서로마도 마찬가지였다. 콘클라베가 끝나고 새 교황을 선포할 때 urbii et orbii라고 운을 떼는데, "도시와 모든 곳"이라는 뜻이다. 도시는 당연히 로마.
  • [5] 다만 오늘날의 그리스에서는 스스로 그리스/헬라스라는 옛 명칭을 회복했기 때문에 이 나라를 로마 제국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로마 제국이나 동로마 제국이라고 하면 그 기간 동안 그리스의 역사가 없었던 것처럼 오해를 받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이 나라를 Βυζαντινή Αυτοκρατορία, 즉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고 있다.
  • [6] 사실 그렇게 따져도, 당연히 4세기, 6세기, 8세기의 로마를 비교해보면 8세기의 로마는 6세기의 로마와 공통점이 더 많다. 그리고 6~7세기의 변화 탓에 이 제국을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일컫는 것은 결코 아니다
  • [7] 물론 와타나베가 '중세 로마 제국'이라는 용어를 처음 고안한 사람은 아니다.
  • [8] 그래서 이노우에 고이치(井上浩一) 등 몇몇 일본 역사학자들은 비잔티움 제국을 '기독교화된 그리스인의 로마 제국(キリスト教化されたギリシア人のローマ帝国)'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단, 이것도 앞서 각주와 마찬가지로 연구와 편의를 위한 것이니 주의. 기독교화는 이미 2세기부터 진행되던 변화고, 그리스인이란 정체성도 무려 12세기 이후부터나 고개를 들기 시작하지 그전엔 그런 관념 자체가 없었다. 일반인 대부분은 로마 제국하면 그것을 원수정 로마 제국 시대 이미지로만 생각들을 하니 이런 오해도 생기지만, 그건 그냥 널리 퍼진 이미지에 불과하다.
  • [9] 이에 대한 일화로 이후 러시아 제국러시아 혁명으로 무너지고 적백내전이 진행되면서 모스크바가 볼셰비키에 장악당하고 백군 황제파는 극동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까지 쫓겼는데, 이들에 의해 몇 년 간 블라디보스토크가 제4의 로마로 추대되기도 했다. 제1 로마→제2 콘스탄티노플→제3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러시아인들만의 정통성 계보에 따른 것이다.
  • [10] '볼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볼 수 있다'. 신생 그리스 왕국은 이 정도의 영토로 만족하지 말고 '그리스인' 이 살고 있는 지방 모두를 자국의 영토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대그리스주의'. 또는 당시 그리스인이 붙인 이름을 따라 '위대한 이상' 이라고 한다. 다만 이것은 오스만 제국으로서는 지극히 곤란한 것이었는데, 대그리스주의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물론 고대 그리스 식민지들이 있었던 소아시아 서부까지 그리스 땅이 되어야 하기 때문. 참고로 1차 세계대전과 그리스-터키 전쟁 이후, 터키 땅에 살고 있는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땅으로. 그리스 땅에 살고 있는 터키인들은 터키 땅으로 강제 이주시켜, 오늘날에는 사태가 완전히 해결된 상태다.
  • [11] 다만 팔라티니 코미타텐세스 조직은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사실상 붕괴되었고, 재건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고 보는 게 통설이다.
  • [12] 여기에 자신의 사병 부셀라리 기병대 1,500기를 추가로 데려갔다.
  • [13] 현대 그리스어에서는 '연대'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복수형은 타그마타(τατάγματα)
  • [14] John Haldon이 6,000명이라고 주장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평소 명성을 고려해봐도 놀라울 정도로 별다른 문헌 근거가 없는 게 사실이다. 반면 24,000이란 주장은 동시대에 비잔틴에서 포로 생활도 해본 바 있는 이슬람 학자의 저술이나, 다른 제국 문헌에서 뒷받침된다. 다른 로마 시대를 봐도 인구 비례에서 상비군을 겨우 0.2% 뽑는 게 무리란 주장은 영 설득력이 떨어진다.
  • [15] 비잔티움인은 물론 이런 전술에 가장 혹독히 당한 이슬람측도 이들의 기병 돌격에 대해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 [16] 기번이나 시오노 나나미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반기독교적 성향인데, 뿌리는 좀 다르다. 기번의 반기독교적 성향은 계몽사조에 영향을 받은 것이고, 시오노의 반기독교적 성향은 다신교와 애니미즘을 숭상하는 일본 전통종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한 시오노 나나미가 섭렵한 문헌자료들은 대체로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반의 연구에 머물고 있는데다가 기번의 반기독교적 성향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이렇게 비잔티움에 대해 적대적이다.
  • [17] 사실 코이네가 쓰이던 시절과 비잔티움 제국은 이미 1000년 가까이 갭이 난다! 라틴어만 해도 원수정 당시와 동서로마 분열기의 라틴어가 상당히 많이 달라져있는 모습이 보인다.
  • [18] 이러한 생각을, 역사 용어로는 '위대한 이상(Megali Idea)' 이라고 한다. 요컨대 '지금의 그리스 왕국은 '그리스' 가 아니며, 모든 그리스인들을 다 끌어안은 대제국이 되어야 한다' 라는 것인데, 문제는 '그리스인' 이냐 아니냐의 기준을 '역사적, 인종적으로 그리스와 관련된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 로 잡았다는 것. 이에 따르자면 오늘날 그리스는 물론이고 콘스탄티노플, 페르시아 전쟁 직전에 그리스의 식민지가 있었던 소아시아 서부 해안까지 모조리 정복해야 한다. 바로 아래에서 소아시아까지 점령하려 한 것도, 욕심이라면 욕심이었지만 그 이전에 이러한 민족주의적 사상이 나왔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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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5 20:4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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