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빌헬름 2세

last modified: 2015-08-30 20:02:44 by Contributors

wilhelm_II.jpg
[JPG image (31.85 KB)]

Contents

1. 독일 제국의 황제
1.1. 가족관계
1.2. 재위
1.2.1. 정책노선
1.2.2. 해군력 증강
1.3. 퇴위
1.4. 퇴위 이후
1.5. 에피소드
1.6. 빌헬름 2세의 육성
2. 뷔르템베르크의 국왕


1. 독일 제국의 황제

Wilhelm II. 1859년 1월 27일 ~ 1941년 6월 4일

독일 제국의 3대이자 마지막 황제.(재위 1888년 6월 15일 ~ 1918년 11월 9일)

본명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알베르트 빅토르 폰 호엔촐레른
Friedrich Wilhelm Albert Victor von Hohenzollern

이명카이저(Kaiser)[1]


1.1. 가족관계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이자 빌헬름 1세의 손자. 이 때문에 영국조지 5세와는 외사촌,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 최후의 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의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와 이종사촌 관계다.[2]제1차 세계대전은 사촌들 사이의 전쟁으로 봐도 된다.

빅토리아 여왕은 가장 사랑했던 맏딸 빅토리아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특히나 예뻐하였다. 친척들 사이의 애칭은 빌리.(물론 영국으로는 "윌리".)

보수적인 할머니가 키웠기 때문인지, 자유주의적이었던 부모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졌다. 어머니와 떨어져 자랐기 때문인지 몰라도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후두암으로 재위 99일만에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곧바로 제위를 이어받았다. 이 탓에 한국에서는 프리드리히 3세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다수이며, 빌헬름 1세의 아들인 줄 아는 사람도 많다. 이후 황제가 된지 얼마 안 되어 파업문제에 있어서 강경진압을 주장한 비스마르크와 다르게 파업문제에 대해 순수 중재를 해주었으며 이후, 총선에서 비스마르크파가 패배하자 이를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총리에서 해임하고, 반사회주의자 법을 폐기하며 전권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1.2. 재위

1.2.1. 정책노선

그의 정책은 유럽을 안정시키고, 그 안정 속에서 균형자/중재자로서 독일의 권리를 챙기는 것을 중시한 비스마르크와는 정반대로 해외로 적극적인 진출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약간의 식민지를 얻기도 했지만, 독일의 팽창 정책에 위기를 느낀 영국이 고립을 포기하고, 영국-러시아-프랑스의 삼국협상이 완성되어 독일은 포위당하게 된다.[3][4] 비스마르크의 교묘한 외교 정책으로 독일에게 유리하게 유지되던 유럽의 균형은 이로서 무너지게 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비스마르크 시대에 얻었던 식민지가 빌헬름 2세 시대에 얻은 식민지보다 더 넓었다는 것이다.[5]

반면 개인적인 정치성향과 다르게 내치에선 상당히 진보적인 정책을 펴기도 있었는데[6] 비스마르크가 금지시킨 사회주의 정당도 허용하고 노동시간을 규제하며 사회보장도 확충하고 파업을 중재하는 등 노동자의 권익을 증진시키는 정책을 펴 재임 초기에는 노동황제라는 칭송을 듣기도 했었고, 후의 에피소드를 생각하면 의외지만 당시 독일 보수세력사이에서 싹트던 반유대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진보적인 면모는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졌고(실상 비스마르크처럼 사회주의를 대놓고 탄압하지않았지만 빌헬름 2세는 사회주의자를 상당히 싫어했다.), 결국 재위 후반기에 독일국민들에게 인기를 잃어버려서 독일 내에서조차 대중매체의 의해 웃음거리로 전락하기 일쑤였으며, 이를 만회하기 위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나 지리한 전쟁끝에 패할위기에 처하자 독일 사회민주당등에 의해 퇴위를 하게 된다.

1.2.2. 해군력 증강

거함거포주의에 심취한 것인지, 해군을 열심히 육성하여[7] 영국과 건함경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영해가 좁은 독일이 세계 최강의 영국 해군을 따라잡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고[8] 결국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런데 사실 처음부터 영국과 싸울 맘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존에 비스마르크가 만들어 놓은 동맹관계를 말아먹고는 '그 넘들은 필요없고, 이참에 영국과 새로 동맹맺자'며 정책을 펼쳤는데, 그 과정 중 해군육성을 추진해서 오히려 영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사실 전통적으로 영-독 관계는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

국내에서는 군함 덕후라는 얘기가 들려온다. 물론 해군을 중요하게 본것은 빌헬름 2세 치고는 안목이 좋았다. 로마도 해군으로 카르타고를 찍어눌렀고 당대 영국도 해군으로 세계를 재패했으니까. 문제는 암만 키워봤자 영국을 이겨낼 수는 없다는 것이었지. 사실 독일 해군의 최전성기는 빌헬름 2세 시기로, 그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독일 해군은 이 때의 규모를 회복하지 못했다.

(ɔ) from

빌헬름 2세와 독일 제국 장군들. 합성사진이라서 방향이 좀 어색하다. 맨 앞에 다리 꼬고 앉은이가 빌헬름 2세, 맨 오른쪽 수염기른 이가 알프레드 폰 티르피츠 대제독, 그리고 오른쪽에서 4번째 앉은이가 파울 폰 힌덴부르크이다.

그의 영국 사랑은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계속되어, 독일을 베네룩스와의 전쟁으로 인도하고도 그 때문에 영국이 프랑스와 힘을 합칠 것이 확실해보이자 독일 군부의 수령 小 몰트케를 불러 갑자기 침공 중단을 선언, 몰트케를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었다.[9] 전쟁이 시작되자 빌헬름은 전쟁을 일으킨 원흉이자 마지막까지 우유부단함의 절정을 보인 인물이 되어버려 군부에게 놀아나는 존재로 전락한다.

1.3. 퇴위

결국 전쟁 막바지 군항 수병들의 킬 군항의 반란으로부터 시작된 독일 11월 혁명으로 인하여 위기를 맞은 가운데, 바이에른비텔스바흐 왕조마저 무너지자 결국 다음 날 퇴위했다. 그 직후 네덜란드로 망명한다.[10] 네덜란드에서는 저술 활동에 힘썼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일 황제의 망명을 허락할 정도로 네덜란드와 독일의 사이는 좋았다. 그러나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중립국 권한을 무시당하고 침공당한것도 모자라 웬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 새끼가 얼마전까지 폴란드를 지옥으로 테라포밍하다가 총독으로 부임하여 네덜란드를 지옥으로 테라포밍하는데 힘썼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네덜란드는 독일 얘기만 나오면 경기를 일으키고 전쟁에 대비해 전후 세대가 있는 집에는 지하실과 예비용 자전거가 비치되어 있는 등 대표적인 서유럽의 반독 국가이다. 여담으로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에서도 많은 네덜란드 주민들이 위안부로 잡혀가는 등 많은 수난을 당해서 영국과 함께 서유럽에서 드물게 일본 제국에 매우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1970년대 쇼와가 네덜란드 순방을 했을 때 괜히 보온병과 벽돌을 투척했던게 아니다.

1.4. 퇴위 이후

본래 승전국들은 1차대전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 빌헬름 2세를 처벌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정부는 이를 거부했고 대신 이후 일체의 정치 활동을 금하겠다는 빌헬름 2세의 약속을 받아냈으며 또한 1차대전의 근본 원인은 빌헬름 2세가 아니라 막나가는 각국 군부 및 전쟁 여론. 그리고 무엇보다 '제국주의'에 있음이 명백했기에 그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했으므로 결국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것으로 처분을 마무리한다. 또한 오스트리아나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가 재산을 거의 다 빼앗기고 해외로 도망쳐야 했던 것과 달리 대부분의 재산을 보전하여 네덜란드에서도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물론 왕조를 잃고 국가를 패망으로 몰아넣은데 대한 도의적인 책임감 및 주변의 눈치까지 없을 수는 없었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에도 생존한 상태였다. 제정복고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나치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1차대전의 책임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하던 히틀러[11]는 그를 고깝게 여겼다. 이를 직감한데다 갈수록 미쳐가는 나치를 본 그도 점차 나치에 대해서 불신하기 시작했고, 열렬한 나치 지지자이자 후에 친위대로 들어가는 넷째 아들 아우구스트 빌헬름을 외인 취급했다.[12]

뒤에서도 보겠지만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영국이 프리메이슨 치하라는 떡밥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고, 이에 유대인 박해와 2차대전에는 긍정적이었다.[13] 히틀러에게도 전쟁 초기에 개인적인 축하 전보를 보내기도 했다고. 물론 이는 자신의 패배에 대한 설욕을 대신 해주는 히틀러에 대한 일종의 '고마움'의 표시일 수도 있다.

나치는 빌헬름 2세에 대해 시종일관 부정적이었음에도 국론 결집 및 왕당파의 지지 확보를[14] 위해 그에게 독일로 귀국할 것을 요청했고 그가 죽은 다음엔 독일에 매장되길 바랬지만, 제정 복고가 될 때까지는 독일에 묻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네덜란드에 묻혔다. 나치는 제3제국의 정통성, 계승성 등을 고려하여 장례식에 나치 군간부 일부를 파견했다. 나치와 거리를 두고자 했던 빌헬름 2세의 유언으로 유언에는 장례식에 나치 십자가를 비롯한 모든 나치 상징들을 하지 말아야 했지만 이미 권력은 히틀러와 나치가 갖고 있었으니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히틀러도 그다지 열심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정작 자기가 하악대던 나폴레옹 무덤은 파헤쳐서 아들과 합장시켜주더라

1.5. 에피소드

전쟁으로 지친 제국 전체가 들끓을 때도 상황 판단을 못했다. 군대는 끝까지 황제를 지지하며, 그 힘으로 시위대를 진압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 아연실색한 황제는 "명령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겠다던 깃발의 맹세는 어떻게 되었는가?"라고 말했다. 이에 대한 답변은 "폐하. 오늘날, 깃발의 맹세는 한낱 단어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용히 해외로 망명하는 것밖에 없었다.

한쪽 팔을 못썼다고 한다. 출생 시 왼쪽 팔이 어머니 자궁에(그녀의 어머닌 빅토리아 여왕의 딸이다.) 걸리는 바람에 왼쪽 팔이 상대적으로 짧았고, 그것에 컴플렉스를 가진 그는 항상 흰 장갑으로 왼쪽 팔이 짧은 걸 감췄다고 한다.

마조히스트(...)였다. 창녀에게 돈을 주고 비단 스타킹으로 자신을 묶고 가죽 채찍으로 때릴 것을 요구했다. 이런 성적 취향은 어린 시절에 장애를 가진 팔을 치료하기 위해 전기 고문 치료를 받았을때 생겨났다고 한다. 또한 나중엔 S로 각성해서 군사대신 헤슬러에게 핑크색의 여성 발레복을 입고 발레를 추게 했다. 정부 고관이 지켜보는 파티장에서. 헤슬러는 결국 심장 발작으로 죽었다(…). 고의적인 타살인가[15] 게다가 양성애 성향도 다분해서 가까운 양성애 친구들과 있을 때 가장 행복해 했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이런 사람이 낳은 자식만 해도 7명이라는 사실. 실제로 독일의 오스카 와일드 사건이라 불리우는 측근 오일렌부르크 후작이 동성애 스캔들에 휘말렸을때 황제도 그 대상으로 떠올랐으나 어른의 사정으로 자세한 내막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빌헬름 2세는 마조히스트이자 새디스트이고 바이섹슈얼이며 과대망상증 환자인 동시에 의외로 재임초기에 노동정책에 있어서 진보적인 정책을 펼치고 반유대주의를 비판하는 등 매우 지성적인, 상당히 이중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세간의 평에 따르면 빌헬름 2세는 상당히 지식이 풍부하고 달변가였다고 전하나, 문제는 바로 그 ...[16]

항상 그가 하는 말은 구설수에 올라 안 그래도 불안한 유럽의 정국을 혼란에 빠트린 장본인으로 실제로 코난 도일셜록 홈즈 시리즈 '제2의 얼룩' 중 영국의 대외 정책을 비난하다가 뒤늦게 후회하는 해외의 '어떤 왕'의 모델이 바로 그라고 전해진다.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선 아예 직접 출현. '813'에서는 '위엄은 있지만 좀팡이' 황제로 '포탄파편'에선 허세쩔고 못된 야심이 넘치는 딱 독재자의 그 모습으로 묘사된다.

겉으로는 강한 척을 했지만 사실은 매우 소심하고 유약한 성격이어서 군인들과 어울려 그들을 호령하고 망신주는 걸 즐겼다고 한다.

쎈 척의 가장 최고봉은 황태자 시절. 서부식 공연으로 유명했던 '버팔로 빌 쇼'의 여성 멤버 중 하나였던 '애니 오클레이'는 입에 물린 시가를 정확히 권총으로 맞출 수 있었던 걸로 이름 높았는데, 빌헬름 2세는 여기에 자진해서 나갔다. 만약 그 때 애니의 실력이 부족해서 죽었다면 적어도 빌헬름 2세가 1차대전 발발에 기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17] 오클레이는 훗날 1차대전 발발 후에 "다시 한 번 시가를 물어주시면 안될까요?"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번에는 기필코 헤드샷 황제는 당근 씹었다.

고종일본에게 먹히기 직전의 대한제국 상태를 세계 각국에 호소했을 당시, "카이저 폰 코레아(Kaiser von Korea)", 즉 "한국의 황제"라고 반응해 준 거의 유일한 양반이지만, 그래봤자 결론은 병신황제이다. 빌헬름 2세가 고종의 서한에 반응을 보인 이유는 당시 영-일 동맹을 포함해서 영국이 전 세계와 맺고 있던 군사동맹관계가 궁극적으로는 독일을 포위하여 고사시키려는 거대한 음모로 보았기 때문이다.[18] 빌헬름 2세는 해당 시기의 영국 국왕인 에드워드 7세를 상대로 공식석상에서 사탄이라고 부를 정도였다.패드립[19] 빌헬름 2세가 자신을 독실한 기독교도라고 생각하고 자신에 반대하는 자를 기독교의 적이라고 공공연히 언급했던 것을 생각하면(;;;), 빌헬름 2세가 당시 영국의 독일 따돌리기 정책과 그에 편승하는 영국의 동맹국 및 우호국들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종에게 실질적 도움은 안됐다.

오히려 조선 멸망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도 있는데, 빌헬름 2세 시기에 독일은 청의 칭다오를 공격하여 점령하였고[20], 이것은 러시아의 강경파를 자극했으며, 이 때문에 러시아는 청의 뤼순다롄을 점령하여 세계적으로 따가 되었으며, 그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러시아는 일본과의 협상에서 저자세로 나갈 수 밖에 없었고, 이런 국제정세 속에서 러일전쟁이 발발하였으며,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이기면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무슨 나비효과인가. 이런 상황에서 말로만 떠드는 것은 한참 부족하다.

그의 수염이 아주아주 유명한 '카이제르(또는 카이젤)수염'이다.

참고로 엄청난 인종차별주의자여서, 앞으로 황색 인종이 서구의 백인(白人) 사회를 위협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황화론(黃禍論)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고 그것을 뒷받침한다고 만든 말이 더욱 더 괴이하게 변한 것이 바로 혈액형 심리학. 그러나 결국 독일이 선택한 파트너는 일본 어? 그럼 독일이 망했으니 제대로 예견한건가?

(ɔ) Oscar Tellgmann from

말년의 그의 모습.

© Unknown (cc-by-sa-3.0-de) from


심슨 가족에서는 빌리 더 키드 일당이 부활해서 마을을 점령하는 에피소드에 등장. 스프링필드에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하는 말은 위피, 위피!... 심슨 가족 아니랄까봐 찰진 고인드립(...)

1.6. 빌헬름 2세의 육성

1914년 8월 6일 전쟁의 당위성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지지를 호소하는 내용이다.#

요것은 해석(출처).

An das deutsche Volk

독일민족에게 고함 절대 괴테의 그것이 아니다! [21]

Seit der Reichsgründung ist es durch 43 Jahre Mein und Meine Vorfahren heißes Bemühen gewesen, der Welt den Frieden zu erhalten und im Frieden unsere kraftvolle Entwickelung zu fördern. Aber die Gegner neiden uns den Erfolg unserer Arbeit.

제국 건국 이후 43년동안 세계의 평화와 평화적인 우리들의 힘찬 도약을 이룩하기 위해 나와 나의 조상들의 뜨거운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적들은 우리들의 업적달성을 방해하고 있다.

Alle offenkundige und heimliche Feindschaft von Ost und West, von jenseits der See haben wir bisher ertragen im Bewußtsein unserer Verantwortung und Kraft. Nun aber will man uns demütigen. Man verlangt, daß wir mit verschränkten Armen zusehen, wie unsere Feinde sich zu tückischem Überfall rüsten, man will nicht dulden, daß wir in entschlossener Treue zu unserem Bundesgenossen stehen, der um sein Ansehen als Großmacht kämpft und mit dessen Erniedrigung auch unsere Macht und Ehre verloren ist.

우리들의 동과 서 그리고 바다 건너에 있는 모든 잠재적이고 비밀스러운 적대세력들은 현재까지 우리의 의무와 힘의 의식속에 건재하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우리를 시험에들게 하려한다. 적들이 사악한 침략을 위해 스스로를 무장하면서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방관을 고대하고 있다. 강대국으로의 도약을 위해 싸울 그들은 동맹의 이익에대한 우리의 확고한 신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으로 하여금 굴욕과 함께 힘과 명예를 잃도록 할 것이다.

So muß denn das Schwert entscheiden. Mitten im Frieden überfällt uns der Feind. Darum auf! zu den Waffen! Jedes Schwanken, jedes Zögern wäre Verrat am Vaterlande.

그럼으로 칼날은 결단을 내려야한다. 적은 평화시에 우리를 침공할 것이다. 따라서 일어나라! 무장하라! 주저하고 마다하는 모든 이들은 조국의 배신자일 뿐이다.

Um Sein oder Nichtsein unseres Reiches handelt es sich, das unsere Väter neu sich gründeten.

우리 아버지들이 세운 우리의 제국의 존속을 위해.

Um Sein oder Nichtsein deutscher Macht und deutschen Wesens.

독일인들의 힘과 독일인들의 생존을 위해.

Wir werden uns wehren bis zum letzten Hauch von Mann und Roß. Und wir werden diesen Kampf bestehen auch gegen eine Welt von Feinden. Noch nie ward Deutschland überwunden, wenn es einig war.

우리는 사람과 말의 마지막 숨이 끊어질 때까지 우리를 지켜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싸움에서 살아 남을 것이고 적들의 세계를 대항해 이겨낼 것이다. 하나였던 독일은 패배한적이 없었다.

Vorwärts mit Gott, der mit uns sein wird, wie er mit den Vätern war.
신과 함께 전진하라. 신은 우리의 아버지와 함께했던 것처럼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
  • [1] 뜻 자체도 황제지만, '카이저 황제'라고 하면 이 사람을 칭하는 유명사 비슷한 것으로 굳혀져 있다. 유난히 '카이저' 칭호에 대한 집착이 엄청났기 때문. 이른바 카이젤 수염이라는 것도 여기서 유래됐다.
  • [2] 니콜라이 2세는 조지 5세와 이종사촌 사이이지만 빌헬름 2세와는 사촌지간이 아니다.
  • [3] 해군을 육성하며 식민지를 팽창하는 정책 때문에 영국에게 어그로를 제대로 끌었다. 네덜란드계 보어인들의 공화국과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싸운 보어 전쟁에서, 빌헬름 2세는 보어인 공화국들을 지지하는 전문을 발표하는데 이 전문은 영국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것이어서 영국이 발칵 뒤집혔다. 빌헬름 2세의 전문 이후로, 영국은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숙적 프랑스와 연합하는 공동전선을 진지하게 구상하게 된다.
  • [4] 영국의 노선 변경으로 인해 가장 크게 수혜를 본 나라는 미국이다. 독일 포위망을 완성하기 위해 영국의 대서양 해군전력이 유럽으로 재편됨에 따라서, 미국은 마음 놓고 라틴아메리카로 진출하게 되었다.
  • [5] 비스마르크는 중요 지대가 아닌 독일 식민지들이 별 가치가 없음을 인식하고 영국과 독일 앞바다의 헬골란트 섬과 아프리카 잔지바르 섬을 교환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잔지바르와 헬골란트를 교환한 조약을 체결한 때는 비스마르크의 후임자인 레오 폰 카프리비가 총리일 때이다(...) 뭐 비스마르크가 식민지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건 사실이지만...
  • [6] 다만 선거제도는 제외
  • [7] 티르피츠를 기용하고 1898년에 함대법을 성립시켜 해군육성에 대한 예산법적 지원을 확실하게 보장했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는 초반에 프랑스 해군에 의해 독일의 해안선이 봉쇄당하여 장기전을 갔을 경우에는 외려 독일본토에 프랑스군이 상륙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1898년의 시점에서 독일을 가상적국으로 삼은 것이 확실해진 러시아 발트함대와 프랑스 대서양함대를 모두 대응할 수 있는 해군의 육성은 정말로 필요했다.
  • [8] 이건 영국도 마찬가지여서 1913년에 육군장관이던 홀데인을 파견하여 서로 건함경쟁을 중지하자는 제안까지 하였다. 황제와 티르피츠가 이걸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영국이 두 손을 든다!" 착각하고 무시한 것이 문제였다. 아아 병림픽 1914년 영국과 독일의 군함 총배수량의 비는 약 2.2:1이었다.
  • [9] 사실 중단을 명한 바로 이 시점에 독일군은 이미 룩셈부르크에 진입하고 있었다.
  • [10] 기차 안에서 영국제 커피를 마시며 머리를 식혔다... 커피까지 영국꺼냐
  • [11] 조금 의외지만 히틀러는 자신이 군주가 되지 않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정도로 절대군주제를 싫어했다. 물론 정작 히틀러 자신은 군주 간판만 없다 뿐 새로운 절대 군주나 다름없었지만.
  • [12] 독일 황가에 나치의 지지자들이 없는것은 아니어서, 매제인 헤센-카셀 가문이나 그의 둘째 부인 등은 열렬히 지지했다고. 그래서 부인 앞에서는 정치 이야기를 조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 [13] 그런데 이상하게도 파리 점령 이후엔 우울해하면서, 딸 빅토리아 루이즈에게 보낸 편지에는 "평생 처음 독일인인 것이 부끄럽다"라고 쓰기도 했다. 하도 그의 행적과는 반대적인 내용이라, 지금도 논란의 대상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이렇게 시끄럽게 할 필요 없지 않느냐"라는 시각이었을 수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아들 아우구스트에 대해 쓴 글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 [14] 실제로 이들 왕당파 상당수가 막나가는 나치에 질려 나중에 히틀러 암살 및 나치당 전복 음모에 가담한다. 발키리 작전을 활용하여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주도한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 그것이다.
  • [15] 하지만 이건 딱히 그를 망신시키려고 한 건 아닌 게, 당시에는 파티의 여흥으로 귀족이나 고관 혹은 파티의 주최자 등이 우스꽝스런 복장으로 깜짝 등장하여 사람들을 재밌게 해주는 일이 간혹 있었는데 이때는 군사대신 휠센 헤슬러가 그런 역할을 맡은 것이다. 다만 헤슬러가 갑자기 심장발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주위 사람들이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히는 등 큰 소동이 일어났다.
  • [16] 한 영국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독일 국민들은 반영(反英)적이지만, 나는 친영(親英)적이다"고 실언발언한 적이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당연히 독일 사람들 반응은 "황제 저거 뭐임?"(+스팀 칙칙) 아오 저 황제새끼 근데 친영(親英)적이라면서 영국 왕인 외삼촌보고는 사탄이라고 했으니 참 피곤한 스타일
  • [17] 사실 1차대전은 그 특성상 터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기는 했다. 식민지 문제만 걸린 게 아니라 유럽 전체의 주도권을 놓고 벌인 대결인데다 전쟁 낭만주의가 지배적이어서 정부가 신중해도 여론이 전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 [18] 독일이 희안하게 대한제국 시절부터 현 대한민국까지 한국과 정치적으로 은근히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지금도 한국의 정당 소속 기구들이 독일 정당들의 소속기구들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뭣보다 박정희 정권 중에 한국에 자금 융통을 처음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희대의 병맛 황제 빌헬름 2세가 그런걸 신경썼을리가?
  • [19] 에드워드 7세는 다름아닌 그의 외삼촌(엄마인 빅토리아 황후의 바로 아래 남동생)이었는데 외삼촌이고 뭐고 없었나보다...
  • [20] 솔직히 큰 의미는 없었고, 독일을 고립시키는 데만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점령은 1차대전 초기까지 이어졌지만, 이후에 남긴 영향은 칭다오 맥주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 정도.
  • [21] 그 유명한 '독일 민족에 고함'은 독일의 문학가 괴테가 아니라 철학자인 피히테의 글이다.


2. 뷔르템베르크의 국왕


Wilhelm Karl Paul Heinrich Friedrich
1848년 2월 25일 ~ 1921년 10월 2일

독일 서남부 르템베르크 왕국의 제4대 국왕. 카이저 빌헬름 2세와 동시대 사람이고, 재위 기간도 거의 겹친다(1891년 ~ 1918년 재위).

1891년에 자식이 없었던 카를 1세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그는 독일군의 육군원수(陸軍元首)가 되었으나, 1918년 11월에 독일 제국이 붕괴하자 그도 독일 영방의 다른 군주들과 함께 폐위되었다.

그가 사망하자 프로테스탄트인 뷔르템베르크 왕가의 종가는 대가 끊기고, 가톨릭인 알츠하우젠(Altshausen) 계통의 알브레히트가 뷔르템베르크 왕가를 계승하게 된다.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8-30 20:02:44
Processing time 0.2189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