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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last modified: 2015-03-17 14:34:44 by Contributors

  • 어원이 되는 파르티잔은 파르티잔 항목 참조.

Contents

1. 어원
2. 현재
3. 역사
3.1. 스페인 내전과 그 이후의 게릴라
3.2. 소련의 파르티잔
3.3. 프랑스레지스탕스
3.4. 이탈리아의 파르티지아노
3.5.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스키
3.6. 한국에서의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
3.7. 조선인민유격대 몰락원인
3.7.1. 환경
3.7.2. 민심 확보실패
3.7.3. 보급
3.7.4. 전염병
3.7.5. 대한민국 국군의 토벌의지
3.7.6. 미국의 토벌 지원
3.7.7. 남로당의 몰락
4. 빨치산을 소재로 하거나 내용의 일부로 다룬 영화, 책, 드라마들


партизан
빨치山
Mt. Ppalchi
Ppalchisan
비정규군(非正規軍) 유격전 요원 파르티잔의 한국식 별칭. 절대 산(山) 이름이 아니다. 공산당을 뜻하는 간색이 쉽게 연상되기에 공산 게릴라를 쉽게 떠올린다. 갱이들이 에서 활동해서 빨치산이라고 샹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하지만 어원은 빨갱이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빨치산은 파르티잔→팔치산[1]→빨치산이 된 것이므로 어떻게 보면 교화되어 사실상 우리말화된 외래어. 따라서 된소리 발음/표기가 허용되는 몇 안되는 단어 중 하나다. 비슷한 예로 , 등이 있다.
빨갱이든 아니든 유격전을 수행하면 빨치산이라 부르는게 정석. 한국군도 상황이 떨어지면 언제든지 빨치산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남한에서 빨치산 활동한 사람들은 대체로 공비잖아… 22세기가 돼도 구별 못할거야 아마…. 태백산맥에서 '염상진'은 "빨치산은 욕이 아니다. 빨갱이이다."라고 했다.


일제와 더불어 벌교읍의 양대 원쑤


1. 어원

'파르티잔(partisan)'은 프랑스어의 '파르티(parti)'에서 비롯된 말이며, 당원·동지·당파 등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적어도 12세기경부터 partisan 이라는 단어가 프랑스에서 쓰이기 시작했으며 17세기경에는 이 단어는 지역 군벌을 의미하는 단어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스페인 전역에서 게릴라에게 호되게 당한 프랑스군은 이들을 군벌이라고 호칭하게 되었고, 그것을 옆에서 잘 지켜보던 영국군은 게릴라 = 파르티잔이라고 생각하게 됨에 따라 스페인어에서 유래한 게릴라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게 정착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순수한 유격대원의 의미와 더불어서 정예, 혹은 특수부대의 의미도 어느정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19세기 이전 미국에서는 파르티잔의 의미가 약간 뒤틀리게 되었는데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민병대남북전쟁 당시의 남부군[2]의 영향으로 인해 19세기까지 미국에서 파르티잔의 의미는 레인저나 코만도와 같은 특수부대와 비슷한 느낌이 더 강했다.

그러던 와중 20세기에 접어들어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반프랑코 게릴라들의 활약과 국제여단덕에 파르티잔과 게릴라는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고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의미도 거의 현재와 비슷하게 고정되었다.

2. 현재

현재는 빨갱이 유격대원·편의대원(便衣隊員)[3]을 가리키며 그에 따라 앞서말한 게릴라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제네바 조약[4]에서는 몇몇 상황에서 무기를 공공연하게(=숨기지 않고) 갖고 있으면 전투원으로 취급되며, 잡혔을 때 전쟁포로로서 존중됨을 규정하고 있다. 몇몇 상황은 다음과 같다.
가. 각 교전기간중 및
나. 공격 개시전의 작전 전개에 가담하는 동안 적에게 노출되는 기간 중. 본 항의 요구에 부합하는 행위는 제37조1항에서 의미하는 "배신적 행위"로 간주되지 아니한다.

현실적으로 잘 지켜질지는 의문이지만... 게다가 우리나라는 이 조항을 "유보"하고 제네바 협약에 가입했기 때문에 적용 자체가 안된다(...)

제네바 조약이 없던 시절인 나폴레옹 전쟁 중의 스페인 전역 때에도 프랑스군은 게릴라들은 불문곡직하고 쏴 죽였으며, 동조자들도 종종 처형하곤 했다.[5]

빨치산은 정규군과는 별도로 적의 배후에서 그들의 통신·교통 수단을 파괴하거나 무기와 물자를 탈취 또는 파괴하고 인원을 살상한다. 빨치산은 일반 주민의 협조나 지원이 없이는 수행할 수 없고, 그 지방의 지리나 지형에 밝아야 하는 것이 절대적인 조건이 되므로 아무 곳에서나 실행할 수 있는 전투는 아니다. 한국에서는 주로 한국전쟁 전에 각지에 준동하였던 공산 게릴라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서는 빨치산 대신 공비라는 호칭도 많이 사용한다.

3. 역사

빨치산의 역사는 게릴라전의 역사와 맥을 같이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에 따라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반란, 미국 독립 전쟁 당시의 민병대, 러시아 적백내전에서 대다수의 적군과, 백군에 가담한 민중봉기 세력들 등을 빨치산의 범주에 넣기도 한다. 20세기 이후 굵직한 빨치산을 몇몇 다루자면 다음과 같다.

3.1. 스페인 내전과 그 이후의 게릴라

게릴라/파르티잔의 확산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세력으로, 스페인 내전당시와 이후 반 프랑코 세력을 총칭한다. 또한 이 시기에는 국제적으로 상당수의 의용병들이 들어와서 국제여단을 형성하기도 했는데, 공화파 의용군의 경우 대부분 제대로된 군복과 명령체계가 없었다. 그 외에도 스페인 내전이 끝난 뒤 망명했던 스페인인 일부가 귀국하여 게릴라전을 벌였고, 이들또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이러니한 점은 막상 '게릴라'란 단어 자체가 태어난 곳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스페인 내전이 당장 벌어지고 있을 때 공화파 진영 전체로 보면은 CNT나 UGT등 공화국 정부와는 사실상 따로 노는 전투 노조들이 프랑코 군에게 포위 된, 막말로 가망 없는 조직원들에게 최후 항전의 의미로 내린 단발성 지령을 빼고는 조직적인 게릴라전을 펼친 적이 없다. 이 당시는 게릴라전에 대한 심도 깊은 군사학적, 전술적 연구가 이루어 진 것도 아니고, 여전히 1차대전식 '정정당당한' 목숨은 내다 버리는 마인드가 군사적 인프라로는 영 후진국인 공화파, 파시스트진영 양쪽에 팽배했기 때문에 공화파는 충분히 장기적인 게릴라전을 수행할 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그 이득을 못 봤으며, 후대 살아 남은 공화파 인사들은 아나키스트 CNT나 공산당 지도 아래 공화국 정부 인사나 군사 내적인 측면에서는 이 점을 최대의 실책으로 평가했다. 오히려 전쟁이 말기에 들어가고, 공화국의 패망이 시간 문제인 기정사실화 되면서 프랑코가 점령한지 얼마 안된 지역이었던 아스뚜리아스-레온의 북부 산맥, 카스티야 라만차의 중부 고원, 안달루시아 대농장과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2차대전이 터지자 프랑스레지스탕스와 발을 함깨 한 유격전이 성행했다. 이들의 운명 또한 프랑코 정권이 열렬한 양다리 외교로 연합국에 의해 그 생존을 허락 받자 (...)
결국 하나 둘 씩 고립되어 잡혀 죽던가 아니면 프랑스를 비롯한 해외로 결국 망명하는 식으로 말라 죽었으나, 이들의 경험에 기반한 군사 활동/정치 활동 양면의 유격전 군사적 교훈은 라틴 아메리카와 유럽 전반으로 국제 여단과 망명객들을 통해 퍼지게 된다.

3.2. 소련의 파르티잔

소련은 그 태동부터 빨치산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는데, 적백내전시에는 볼셰비키로 전향한 장교들이나 지역민들에 거의 의존했으며, 보급 또한 힘들었기에 제복은 물론, 제대로 된 명령체계도 없다시피해서 대부분의 경우 지휘관과 사병만 있는 정도였다. 한편, 이후 독소전쟁에서 소련군은 파르티잔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거대하게 운용하여, 여단이나 연대급 규모의 대부대까지 있어서 그들에게 무기, 탄약, 그리고 훈련을 위한 인원을 공수하였는데, 이는 독소전 중후반에 스탈린에 질렸다가 나치에 더 질린 이들이 다시 전향하며 빨치산화 하였고 덕분에 소련은 빨치산을 지원하기 위한 부대(훈련요원이나 보급요원)를 크게 활용할 수 밖에 없게되었기 때문.

독소전쟁에서 나치의 인종청소 같은 탄압에 치를 떨은 민간인들은 파르티잔을 조직해 저항을 하였고, 이들 파르티잔은 독일군의 철도를 테러하는 등 보급선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가뜩이나 물자부족에 시달리던 독일군으로선 이런 파르티잔의 테러를 가만 놔둘수도 없었고, 이에 파르티잔 포로나 민간인에 대해 학살을 하는 등 잔인한 보복을 감행했지만 이는 오히려 파르티잔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왔다. 전쟁이 소련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면서 이들 파르티잔들을 정규군으로 포함시키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베를린 전투에서 제국의사당에 깃발을 걸은 밀리톤 칸타리야고와 미하일 예고로프도 파르티잔 출신이었다.

3.3. 프랑스레지스탕스

레지스탕스라는 좋은 이름이 붙기는 하나, 이들이 수행한 것은 게릴라전(유격전)이고, 계급과 제복이 있는 정규군도 아니었던지라 이들도 빨치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꽤 미묘하긴 하다. 자세한 것은 항목참조.

3.4. 이탈리아의 파르티지아노

제2차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과,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한 뒤 이탈리아를 점령했던 나치 독일군과 나치에 의해 옹립된 무솔리니 괴뢰정권에 대항해 싸웠던 이탈리아의 무장 집단 파르티잔 또한 큰 활약을 보였다. 이탈리아가 독일이나 일본과 달리 그다지 전범 국가로 취급되지 않는 이유는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과 같이 그다지 추축국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 이외에도, 이렇듯 독일이나 일본과 달리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의 침략 전쟁에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찬성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연합군과 함께 연합하여 싸운 파르티잔들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설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 시리즈의 주인공 돈 까밀로 신부와 빼뽀네 읍장은 파르티지아노에서 함께 싸운 전우였다.

3.5.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스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 역시 빨치산으로 유명하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빨치산은 체크니트의 세르비아계와 티토의 공산주의계 두가지가 있었는데 이 중 티토가 영국측으로 자신을 선전한 것도 꽤 많기도 했고, 체크니트는 나중에 독일과 협력하여 빨치산 토벌을 하기도 하여 민심이 기우는 바람에 전후 민중과 승전국의 암묵적인 지지로 대통령이 된다. 그리고 그 덕에 축구팀 이름에 파르티잔까지 붙는다.(르티잔 베오그라드)

3.6. 한국에서의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

빨갱이


정식명칭은 조선인민유격대

처음엔 남로당계열이 야산대라는 이름으로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으나 여순사건과 그에 호응한 각 반란사건의 잔당들이 지리산으로 도피했을 때 일제강점기 때 무장투쟁 경력이 있던 이현상이 이들을 규합하여 무장세력화한다. 이 이외에도 전국 각지의 지명수배된 사회주의자들이 산발적인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었으나 대부분은 도피성에 가까왔다.

김일성은 월북자를 비롯한 다양한 인원들로 편성된 부대를 만들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북한의 점령이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남한 각지에 이 부대를 대규모로 남파시켰고, 이는 거의 정규군의 일개 부대와 비슷한 규모였다.[6] 그러나 인천 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허리가 잘리자 퇴로를 잃어버린 북한군 잔당과 북한의 남한 각 행정부처, 그리고 협력세력들은 퇴로를 잃은 채 무장세력으로 정착된다. 그러나 북한이나 서로간의 연계가 거의 되지 않고 각자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각 세력은 행정구역 도 단위로 활동하였는데 경남도당, 경북도당, 전남도당, 전북도당 등 상당수의 세력이 태백산맥에서 뻗어나온 각 산들에 터를 잡고 활동하였기 때문에 태백산맥, 그 중에서도 지리산은 빨치산의 대명사격이 되었다.

한편 북한은 남로당 출신의 이승엽을 주축으로 이들을 지원하고 규합하여 후방 교란세력을 만들기 위해 계속 100~1000 단위의 무장공비집단을 만들어 남파하나 대부분 주전선에서 걸려 괴멸되었고 과거 빨치산 경력이 있던 이현상의 독립 제4지대만이 가까스로 살아남아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독립 제4지대는 이승엽의 명으로 조선인민군 유격대 남부군으로 개칭하며 이현상을 필두로 하여 각지에서 활동하는 빨치산 세력을 규합하려 하였으나 이미 회복된 대한민국의 치안하에서 제대로 활동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현상의 4지대는 지리산을 근거지로 한국전쟁이 종전된 1953년 9월까지 저항했고, 이현상이 사살된 뒤에야 와해되었다.

대부분의 생포된 유격대원들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일정심사를 거쳐 민간인 학살 등에만 연루되지 않았다면 대개 재판을 받고 얼마 안 가서 방면되었으나 고립된 빨치산들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물론 한국군 등 진압군측에선 무의미한 피해를 줄여 보기 위해 이런 사실들을 빨치산들에게 선전해서 투항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립되었던 유격대원들은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당시 증언에 의하면 10대에 불과한 빨치산들이 포로로 잡히고도 곧 인민공화국이 너희 괴뢰들을 쓸어버릴 것이라고 발악하는 경우도 많았고 국군에 의해 점거된 빨치산 근거지에서 빨치산들이 '허약한 국방군 따위'가 감히 자기네 근거지에 도달했으리라곤 상상도 못하고 인민군이 여기까지 왔다고 환영하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신념 하나는 철두철미했던 것. 닛뽄군처럼

생포된 유격대원을 이렇게 취급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의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고, 적의 비정규군이 아니라 '납치되거나 오도되어 가담한 선량한 양민' 또는 일반 범죄자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유격대의 경우 정규군과는 달리 교전권을 인정하기에는 굉장히 미묘한 형태이다. 게다가 후방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추가적인 유격대원의 증가를 막아야 했는데, 만약 빨치산들을 교전권 당사자로 인정하면 오히려 빨치산이 더욱 증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물론 진압군측에서 화가 나서, 또는 상당히 크게 다친 자를 그 자리에서 바로 사살해버리는 것이야 막지는 못했겠지만, 일단 산 아래로만 내려오면 목숨은 보장받았다. 김영옥 대령의 회고록에서도 잡은 포로 중 크게 다친 한 사람을 계속 끌고 다닐 수 없어서 죽여버린 적이 있다고 하며, 그 자신도 조금 후회하기도 했다고 한다. 만약 이들을 한국 정부가 교전권이 있는 존재로 인정해버렸다면 오히려 북한과의 포로 교환시 북한으로 송환 당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은 자신을 지지해준 조선인민유격대를 정규군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더러 데려갈 생각을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정전협정으로 전쟁이 끝난뒤에도 빨치산 세력에게 산에 내려가 지하활동을 계속하라는 무전만 전해주었을 뿐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이 무전을 전해줄 당시 대한민국의 국군이 한창 토벌작전을 펼치던 중이라 산으로 내려가라는건 하루빨리 죽으라는 소리와 다름이 없었다.

오히려 대한민국측이 정전협정때 제발 유격대원들을 데려가라고 먼저 제의했는데도 북한측에서는 일절 대답하지 않았다. 북한의 입장으로써는 유격대원들은 그저 일회용품으로밖에 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대한민국 토벌대에 의해 지리산 본부를 제외한 나머지 유격대 지지구는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지리산 본부도 안정된 곳은 아니었다. 해방구들이 모두 사라지면서 고립 상태가 되어 상황이 최악이긴 마찬가지였다.

북이 이렇게 빨치산을 내팽개친 것은 김일성과 만주 빨치산계가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로당계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걸로 보인다. 빨치산 간부들의 상당수가 남로당계와 인연이 있던 인사들이었기 때문이다.

탈북자들 증언에 의하면 북한에서도 버림받은 존재이며 인정하지 않아서 기껏해야 남조선 내 자발적인 혁명전선, 즉 제2전선으로 불릴뿐이지 우리와는 상관은 없다는 투라서 잘 모른다고 한다. 덕분에 탈북자들이 남부군같은 영화를 보고 이랬었구나? 놀라기도 한다고.(탈북가수 김용의 책 <머리를 빠는 남자>에서도 언급)


3.7. 조선인민유격대 몰락원인

결국 조선인민유격대는 이러한 북한의 무관심속에 점점 무너져 내려갔는데 아래와 같은 대표적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3.7.1. 환경

태백산맥소설 태백산맥 말고은 대체로 험준한 산과 깊은 계곡이 있는 것이 특징이라지만 늦가을부터 초봄까지는 나뭇잎이 떨어져 토벌대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은신처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지리산과 같이 높은 산은 계절이 가을만 되어도 어두워지면 냉기가 나올 정도로 추운 날씨가 된다. 겨울이면 말할 것도 없고 이러한 추운 환경에 보급이 제대로 이루지지 않으니 유격대원들이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특히 대한민국 국군은 10월부터 겨울때까지를 최적의 토벌기로 삼았다.
그 이유는 추운 날씨도 이들의 토벌에 한몫을 하지만 눈이 쌓이게 되면 결국엔 유격대원들의 발자국이 남아 추적하는데 더욱 쉬웠기 때문이다. 빨치산 유격대원은 이러한 이유로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곧 땔감을 구하지도 못해 얼어죽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3.7.2. 민심 확보실패

상술됐듯 파르티잔의 존속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나 군량이 아닌 파르티잔 활동을 벌이는 지역에 사는 주민의 지지와 지원이다. 그래야 지역민으로부터 정보를 얻고 은신처를 제공 받으며 보급(식량이나 신병)도 얻는다. 외부 군사적 지원이 없는 파르티잔에게 민중의 지지가 없다면 전투가 거듭되면서 결국 물적,인적자원이 고갈되어 소멸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데, 조선인민유격대는 지역주민의 민심 확보에 처음부터 끝까지 실패했다. 이 실패는 주요활동무대가 태백산맥인 이상 당연한 일이었는데, 이 지역 주민들에게 계급투쟁을 설파해봤자 먼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 일대 주민 대부분이 빈농에 화전농가가 태반인데다가 그들에게 있어서 삶을 곤궁하게 만드는 적은 지주나 미제국주의자가 아니라 태백산맥의 척박한 자연환경이었다. 따라서 그 일대 주민 대부분은 파르티잔의 이념이나 목적에 공감하기 힘든 처지였다. 기독교 거리포교하듯 민가만 만나면 빨치산 활동의 정당성을 알리고 젊은 남자가 있으면 입대를 권유했지만 효과가 지극히 미미했고 군경의 강력한 압박이 시작되자 지역 주민을 대하는 태도도 강압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식량 약탈까지는 사령관 박헌상의 명령으로 자제했지만, 장정을 억지로 납치하다시피 빨치산에 넣어버리기 시작했고[7] 군경의 추적을 피해 도주할 때 지역주민을 만나면 목격자를 남기지 않으려 살해도 서슴치 않아 말기에는 완전히 민심이 빨치산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다. 빨치산 활동 중기에는 포상금이 걸려 있어도 소닭보듯 빨치산이 보여도 신고도 안하고 무시했던 걸 생각하면 극도로 민심을 잃은 것이다. 이현상을 위시한 수뇌부도 바보가 아니라서 군경의 토벌작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지역적 특성상 민심확보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는 있었다. 그래서 활동방침이 북에서 다시 진공해올 때까지만 세력을 유지하며 버티다가 아군이 오면 호응하자는 취지로 바꿨는데 당연히 그 시점에서 북한은 이미 재진공은 커녕 빨치산 자체를 버리고 있었다. 이래저래 시작부터 끝까지 꿈도 희망도 없었던 것.

3.7.3. 보급

유격대를 창설한 1949년부터 전쟁 초/중반까지는 인민군의 보급과 자신을 지지한 주민들에게 받은 식량으로 넉넉히 버틸 수 있었으나 인천상륙작전으로 한반도 중부지방이 대한민국 국군에게 탈환되면서 보급로가 끊기게 되었다. 그래도 주민들의 도움으로 버틸 수는 있었으나 대한민국 국군의 전남지방 탈환 및 지리산 진입과 더불어 주민들의 보급 거절로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자 그들의 식량과 보급품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 약탈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의 미움을 받았고 그 주민들이 경찰 및 국군에 적극적으로 신고하여 유격대원 상당수를 잃는 원인이 되었다.


3.7.4. 전염병

1951년 봄부터 조선인민유격대에 '재귀열병'이라는 유행병이 돌면서 전투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재귀열병과의 투쟁은 조국을 위한 투쟁이다.'라는 구호가 나왔을만큼 유격대에게는 큰 시련이었다.


3.7.5. 대한민국 국군의 토벌의지

국군은 유격대 활동을 토벌하기위해 노력해왔지만 6.25전쟁으로 재대로 시행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1953년 휴전 협정 체결과 함께 정전체제가 굳어지면서 공산주의와 공생할 수 없었던 대한민국 정부는 후방을 교란하는 불안요소인 조선인민유격대 섬멸을 지상과제로 삼아 적극적인 토벌 작전을 펼쳤다. 한국전쟁 초기에는 미 해병대를 투입하여 헬기로 입체적인 기동 작전도 벌였고, 한국전쟁 후기에는 한국군 끝판왕인 백선엽을 보내 백(白) 야전사령부를 만들어 토벌하였다.[8] 이러한 상황에서 고립된 좁은 공간에 갇혀있던 유격대의 궤멸은 필연적이었다.


3.7.6. 미국의 토벌 지원

미국은 조선인민유격대 섬멸을 위해 현대식 무기와 장비를 지원했다. 이는 미국의 공산권 봉쇄 정책과 맞물리는 것으로, 미국 제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가 조선인민유격대 토벌에 미군 병력을 투입하고 직접 작전을 지휘했다는 점에서도 그 적극성을 유추할 수 있다.


3.7.7. 남로당의 몰락

1951년 9월 이후 유격대와 조선로동당 간의 원활한 통신은 두절되었다. 중앙당에서 내려오는 지령은 통신수단 미비로 늦어지기 일쑤였고, 인편을 통해 내려오던 중 이미 효력이 다하고 나서 전달되거나 회답을 소지하고 북상하던 연락원이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 이 때문에 업무 연락에 곤란을 겪던 중 1953년 3월부터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로당 계열이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통해 제거되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원인 등으로 유격대원들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마침내 1963년 마지막 빨치산 토벌에 나서 1명 사살 및 나머지 1명 정순덕을 생포하여 공식적으로 빨치산 토벌의 종지부를 찍는다.

이 당시 남부군의 소속원 중 한 명이 쓴 수기가 1980년대 말 크게 히트하였으며 영화화되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남부군'이다.


4. 빨치산을 소재로 하거나 내용의 일부로 다룬 영화, 책, 드라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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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일본어에서는 아직도 파르티잔을 비슷하게 부른다. 예를 들면 로맨싱사가 3에서 나오는 창 이름이나 퍼스트퀸 4 일본어판에서 나오는 パルチザン이라든지.
  • [2] 특히 이들은 Partisan Rangers라고 자칭하고, 파르티잔 전술을 총정리하기까지 했다. 다만 최초의 문서화는 프로이센군의 한 공병 대위가 7년전쟁 중에 했다.
  • [3] '편의'란 사복, 즉 민간인 복장을 가리키는 구식 표현. 그리고 빨치산=빨갱이는 남한 내에서 무장공비가 자주 쳐들어오다 보니 붙게된 인식.
  • [4] 정확히는 제1 의정서
  • [5] 사실 대부분의 빨치산들도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며 싸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 [6] 이전까지는 각 지역에서 모집이라쓰고 징집한 의용병들과 유격대와의 차이에 대해 논쟁이 끊이질 않았는데, 2006년 공개된 영상에 따르면 남한에서 모은 의용대와는 다른, 북한에서 내려온 사복차림의 빨치산들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
  • [7] 당연히 도주하는 사람이 많았고 잡히면 탈영으로 간주해서 총살했다.그나마 다행인 건 몇몇 빨치산은 불쌍해서 그냥 놓아주기도 했다고.
  • [8] 사실 백선엽 자체가 만주에서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하며 비정규전에 대한 노하우가 상당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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