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사라예보 사건

last modified: 2015-04-07 02:31:08 by Contributors

sarajevo.jpg
[JPG image (45.51 KB)]


(ɔ) from

주범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사진. 얼굴을 보면 상처투성이인데 붙잡힌 직후 너무 많이 맞아서다. 이후 감옥에서도 사람 취급도 제대로 못 받으면서 수없이 폭행을 당했다. 참고로 19살에 찍은 사진이다! 엄청난 노안이다.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경과
3.1. 우연의 연속
4. 결과
5. 여담

1. 개요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황태자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 조피가 '젊은 보스니아(Mlada Bosna)'라는 세르비아 민족주의 조직에 속한 18세의 대학생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동료 5명이 같이 참여)에게 보스니아의 주도 사라예보에서 암살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전세계를 패싸움으로 얼룩지게 만든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2. 배경

오스만 제국이 1878년 독일과의 베를린 조약으로 후퇴하며 세르비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방이 떨어져 나갔고, 세르비아가 독립한 반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합병되었다. 세르비아는 때마침 민족주의 열기가 꽃피기 시작했고, 그 열기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계 주민에게 전달해주었다.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는 세르비아계의 가난한 우편부의 아들로 보스니아의 시골인 오블랴이(Obljaj)에서 태어났다. 13살 때 사라예보로 온 프린치프는 남슬라브 민족주의 운동[1]인 '젊은 보스니아'의 운동에 참여하고 시위에 참여해, 다니던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학업을 지속하려고 하던 그는 또 "통합 아니면 죽음!"을 이야기했던 '검은 손'에 가입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군사연습을 보기 위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하기로 했는데, 문제는 하필이면 그 날을 1914년 6월 28일로 잡은 것이다. 이 날은 사라예보인들에게 치욕과 영광의 날로 1389년 암셀펠트 전투에서 패배하여 세르비아 왕국이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날이자, 제2차 발칸 전쟁에서 세르비아 군대가 터키인들에게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어 과거의 패배를 갚아준 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비도브난'(성 비투스의 날) 이라고 부를 정도로 세르비아 사람들의 가슴깊이 기억하고 있는 날을 고른 것이다(...).[2]

또한, 이날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아내인 조피와 굳이 동행한 것은 프란츠 본인의 강력한 의지에서 비롯하였다. 왕족 출신이 아니었던 조피는 엄격한 귀천상혼 제도로 인해 오스트리아 황실 내에서 큰 차별을 받았다. 공식석상에서는 황태자와 마주할 수도 없었을 정도였다. 프란츠는 이런 아내의 정치적 위신을 높여주기 위해서 조피와 함께 행사에 참석을 하기로 한 것이다.

당연히 '젊은 보스니아'는 감정이 폭발한다. 결국, 이 때를 노려 그를 암살하기로 결정했다. 검은 손 역시 그들의 공작을 도와주기로 결심을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날은 또 황태자의 14주년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리고 진정한 함정은 민족 불균형 문제 해결을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민족/언어권에 따라 행정 구역을 분할한 연방국가로 만들려 한, 즉 독일계 기득권과 황실의 기득권도 내놓는 대인배스런 발상을 한 장본인이 바로 이 사건으로 암살당한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었다는 것이다(...). 아래 항목을 보면 알법하지만, 무한한 자비심(...)을 보이는 등 페르디난트 대공은 굉장히 대인배스런 인물이었다.

3. 경과

운명의 날 1914년 6월 28일.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9시 20분 사라예보 역에 도착했다. 삼엄하지 않은 경계태세와 함께 황태자가 다른 6대의 호위차량과 함께 오픈카(라기 보다는 마차)를 타고 사라예보에 도착했을 때, 이미 참여한 단원들은 그 자리에 도착해 있던 상태였다. 모든 단원들은 청산가리, 권총수류탄을 챙기고 각자 자신의 위치에 배치되었다.

황태자 부부가 아펠 강둑[3]에 도착했을 때 첫번째 단원은 갑자기 겁이 나서 암살을 시도하지 못했다. 두번째 단원인 네델코 차브리노비치(Nedeljko Čabrinović)가 이 기어코 수류탄을 던졌지만 황태자는 폭탄을 도로 던져(?!) 무사할 수 있었다.[4] 이 때 수행원 2명과 구경꾼 10명이 다쳤다. 이 후 시청에서의 영접이 끝나고 그와 동승했던 포티오레크 장군은 빨리 군사지역으로 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갑자기 페르디난트 대공이 무한한 자비심을 보여서 수행원이 입원한 병원에 위문을 가봐야겠다고 주장했다.

결국 포티오레크 장군은 지름길을 골라 갔으나, 정작 운전기사에게는 지름길로 가야 한다는 말을 알리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예정된 길로 갔고, 포티오레크 장군은 길을 잘못 들었다고 운전기사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길이 V자 모양으로 되어있는 밀랴츠카(Miljacka) 강의 라틴다리에서는 반드시 서행을 해야했고, 후진을 하던 차에 멈추게 되었다. 그때, 프린치프는 암살에 아무런 참여도 못하고 하필 모리츠 실러(Moritz Schiller) 카페주변을 서성거렸는데, 갑자기 눈 앞에서 황태자 부부가 타고 있던 마차가 지나갔다.

결국, 이 기회를 노려서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준비해뒀던 FN M1910 자동권총을 꺼내서 마차 앞에 뛰어들며 황태자 부부를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첫번째 총알은 황태자를, 두번째 총알은 그의 부인인 조피를 즉사시켰다. 사실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조피가 아닌 동승했던 보스니아 총독인 오스카르 포티오레크(Oskar Potiorek, 1853 ~ 1933) 장군을 암살할 생각이었기에 조피의 죽음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명했다. 겨우 목숨을 구한 장군은 황태자 내외 암살을 막지 못한 죄책감에 계속 괴로워했고, 이 후 술에 의존하다가 1차대전 패배 이후 보스니아 총독 및 군직에서 완전히 물러나 고향으로 낙향하여 남은 삶을 마무리한다.

3.1. 우연의 연속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이 사건에 있어서는 흔히 만약을 가정하곤 한다. 예를 들어, 만약 황태자가 문병가지 않았다면? 운전기사가 샛길로 가지 않았다면? 후진하지 않았다면? 프린치프가 카페 안에 없었다면? 무식하게도 이 4가지의 우연이 겹쳐져서 만들어진 사건 특성상, 만약 이 4가지의 우연이 겹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궁금해지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이때에는 이미 방탄조끼가 등장해있었고 페르디난트 대공은 높으신 분들 답게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두 발의 총탄은 방탄복을 절묘하게 피해서 급소에 박힌 것이다!

역사가 존 키건은 제1차 세계대전불필요한 전쟁으로 규정을 했을 정도였다. 물론 존 키건처럼 극단적으로 말하는 이는 적지만, 신두병 전 주 유고슬라비아 대사의 "사라예보 사건이 세계대전까지 유발할 이유는 없었다."라고도 했다. 하지만, 제 1차 세계대전은 과도하게 팽창되어 있던 유럽자체가 원인으로 이는 조만간 언제든지 터질 문제였으며, 사라예보 사건은 단지 계기였을 뿐이라는 해석을 펼치는 사람도 상당하다.

4. 결과

프린치프는 수행원에게 붙잡혀서 그야말로 완전히 초죽음이 되도록 구타를 당한 뒤, 군영창으로 보내졌고 이후 감옥으로 이송됐으며 조사 과정에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는 젊은 보스니아와 검은 손의 관계를 깨닫고 세르비아 정부에 압력을 넣기 시작했고, 세르비아 정부는 검은 손을 숙청, 암살사건 관련자들에게 사형 및 기타 중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정부가 요구한 직접적인 내정 간섭 및 조사 허용은 거부하는 바람에, 그 결과가 분노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로 침공해온 전쟁이었다.

한편, 프린치프는 수백만명이 죽어간 끔찍한 비극이 벌어지는 동안 아이러니하게도 교도소에서 안전하게 지냈다. 물론, 오스트리아 정부도 암살범을 사형시키고 싶었지만 당시 오스트리아 법으로는 만 20세가 넘어야 사형을 선고, 집행할 수 있었는데 프린치프는 만 20세에 27일이 모자라 미성년자인 관계로 사형을 선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대신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감형 사유를 적용. 징역 20년이 확정되었다. 물론, 감옥에서 호강한 것은 아니고 무수한 폭력 속에서 제대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 채로 지냈다. 그의 사진을 보면 얼굴에 상처투성이인데 붙잡힌 직후 교도소에 갇혀있던 죄수들에게도 복날 개 패듯이 얻어터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도소 안에서조차 심지어 같은 세르비아 출신 재소자들에게도 그는 영웅으로 대접받지 못했는데 그가 죽인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나쁜 사람도 아니었던데다가 나중에 세르비아의 자치라든지 되려 관대한 정책을 생각해오던 게 드러났기에, 세르비아인들은 "저 바보 녀석이 쓸데없는 행동을 해서 전쟁이 터지고 세르비아인들 다 죽어나가게 했다."라면서 분노했기 때문이다. 그를 영웅으로 기리던 건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 뿐이었으나, 그들 조차도 1차대전으로 무수하게 죽어나가는 세르비아인들을 보고는 경악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민족주의자 자신들도 싸그리 죽어나갈 줄은 몰랐을 것이다.

프란치프는 죽기 전에 교도관들에게 이 전쟁으로 세르비아인도 많이 죽었다는 말을 비웃음과 같이 "결국 네놈도 네 동족을 마구 죽이게 한 셈이지."라는 비아냥을 들었으나, 정작 본인은 크게 괴로워하지 않았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혼자서 움직일 수 없다. 내가 아니었다고 해도 결국 전쟁은 일어났을 것이며, 나는 단지 그 방아쇠를 당겼을 뿐이다." 라고 말을 했다.하지만 이 말에 교도관들은 비웃으며 "그래서 동족을 죽이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 죄책감은 전혀 없느냐?"라는 말에는 멈칫하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아무튼 민족주의자였던 이가 오히려 동족을 죽어나가게 하는 전쟁의 원흉이 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마음고생을 한 것은 사실인 듯 하다. 원래 폐결핵이 있었던 그는 수감된지 4년인 1918년 무렵에 결핵이 악화되었으나, 정상적인 치료를 받지 못하고 고작 24살 생일을 석달 앞두고 죽는다.[5] 현대에도 그는, 유럽에서 신념형 범죄자로 분류되어 있다.

나머지 동료들도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증언에 따라 하나 둘 체포되면서 재판에 넘겨졌는데, 이들 역시 암살 계획에만 가담했고 피살자가 없다는 이유로 모두 징역만 선고받았다. 애시당초 암살을 저지른 프린치프가 사형이 아닌 판국에 이들을 처형하는 것 자체가 무리긴 했지만. 어쨌거나 네디엘코 카브리노비치도 가브릴로처럼 1916년 교도소 안에서 21살 나이로 병사했으며, 다른 3명도 중형을 선고받고 장기간 교도소에서 지내다가 하나 둘 출소했다. 그 가운데 1명인 바소 추브릴로비치는 1930년까지 16년동안 복역 후 출소한 뒤 60년이나 살았으며, 유고슬라비아에서 농업장관과 삼림장관까지 지냈다. 그리고 1990년 6월에 93살에 사망하였다. 본격 나라보다 더 오래살뻔한 인물[6]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의 건국부터 유고슬라비아 내전(1991년 6월부터 시작)으로 해체되기 직전의 모습까지 다 지켜보았다. 그래도 그는 장수하면서도 편히 죽은 셈이다. 몇년만 더 살았더라면 유고슬라비아가 동강나는 꼴을 다 봐야했을테니까.

5. 여담

© xinem from GR, USA (cc-by-2.0) from


유고슬라비아 연방 시절에 사건 장소에 있던 명판의 모습이다. 사진은 1987년에 촬영되었다. 명판의 내용은 「1914년 6월 28일 이 곳에서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사격으로 폭군에 대한 인민의 항쟁과 수세기에 걸친 우리 인민의 자유를 향한 열망을 드러내었다.」이다. 프린치프가 황태자를 저격할 때의 발자국 모습까지 본을 떠 놓았다.

© (cc-by-3.0) from


위의 명판과 발자국은 보스니아 내전때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파괴되고, 지금은 새 명판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키릴문자 대신 라틴문자로 바뀌었으며, 명판의 서술도 중립적으로 바뀌었다.

이케다 리요코의 만화 올훼스의 창에서도 짧게 지나가듯이 등장하는 사건이다.

20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 10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세르비아에서는 주범 프린치프를 영웅으로 기리는 쪽도 있지만, 보스니아쪽에선 단순한 테러범으로 비하하는 인식도 있는 듯 하다.기사 기념식의 일환으로 이 날 암살 대상이었던 황태자의 나라 오스트리아에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프란츠 벨저-뫼스트가 초빙되어 암살 장소 근처에 있는 사라예보 국립 도서관 로비에 마련된 특설 무대에서 공연을 가졌고, 이 실황은 2015년 5월에 소니 클래시컬에서 DVD로 발매될 예정이다. 관련 사이트

----
  • [1] 당시 유럽엔 범슬라브 주의나 범게르만 주의 같은 민족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당시 범슬라브 주의 역시 2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발칸 반도의 슬라브 국가의 연방국가를 기획하는 운동, 하나는 러시아 중심의 슬라브 통일민족을 만드는 운동.
  • [2] 노린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오스트리-헝가리 이중제국을 대오스티리아 합중국으로 개편해 민족/언어권에 따라 행정권 분할을 하기 위해 헝가리쪽 인사들과 씨름중이었으니까. (당연히 이 계획은 세르비아계 주민에겐 큰 호재였다. 하지만 오히려 극단주의자들을 자극한 점에서 아이러니.) 결국 결과가 정말 안습하기 그지없었지만.
  • [3] Appel quay, 아펠 키로 발음된다.
  • [4] 여기에 또 다른 설이 있는데, 단순히 폭탄을 알아채고 가속하여 빗나갈 수 있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 [5] 물론, 사람 취급을 안한 탓에 교도소에서 일부러 치료를 해주지 않았고 식사도 개판으로 해줘서 천천히 죽게 놔둔 거였다.
  • [6] 취소선은 그어졌지만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나서 러시아 혁명과 적백내전을 겪고, 소련 체제를 거쳐 러시아 연방까지 산 사람들이 있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서 페트로그라드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가 레닌그라드에서 살았고 거기서 죽나 했더니 말년에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더라 라는 말도 있다.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4-07 02:31:08
Processing time 0.1316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