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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염

서진의 역대 황제
추존황제 사마의,사마사,사마소 1대 세조 무제 사마염 2대 혜제 사마충

(ɔ) Yan Li-pen from
묘호 세조(世祖)
시호 무황제(武皇帝)
연호 태시 (泰始, 265년 2월 4일 ~ 274년)
함령 (咸寧, 275년 ~ 280년 4월)
태강 (太康, 280년 4월 ~ 289년)
태희 (太熙, 290년 1월 ~ 290년 4월)
사마(司馬)
염(炎)
안세(安世)
생몰기간 236년 ~ 290년 5월 16일
재위기간 265년 2월 4일 ~ 290년 5월 16일


의 대신 사마의의 손자이며 사마소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왕원희.

생몰년도는 236년 ~ 290년. 자는 안세(安世). 서진의 초대 황제로 시호는 세조 무제(武皇帝). 삼국지의 끝을 장식한 인물이다.

Contents

1. 서진의 시조
1.1. 사치스러운 황제
1.2. 진정한 통일군주?
2. 가상 매체에서의 사마염
3. 가족 관계


1. 서진의 시조

아버지 사마소가 사망한 뒤, 사마염은 황제 조환을 폐하고 자신이 제위에 오른 뒤 국호를 (晉)으로 바꾼다. 이것이 서진의 건국으로 왕년에 조비헌제에게 찬탈선양받은 것을 그대로 똑같이 따라했다.[1]

15년 뒤인 280년에는 까지 멸망시키고 결국 삼국을 통일하면서 삼국시대를 마감한다. 이것이 삼국지의 끝. 하지만 그 뒤에 그 자신도 말년에는 부패했고 거기다 아들며느리가 나란히 막장이었다. 끝내 그가 죽은 뒤 서진의 말년은 팔왕의 난으로 동족간 대혈전이 벌어진 다음, 영가의 난으로 이민족들에게 쫓겨나서 중국의 북쪽 지역은 이민족이 차지하고 한족은 남쪽에서 동진을 건국한 오호십육국시대였다.

290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준양릉에 안장되었다.

1.1. 사치스러운 황제

초반에는 사치를 경계하며 훌륭한 정치를 펴려고 했지만 후반에 가면 갈수록 막장이었음은 상기한 그대로였다.

사마염의 타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천하통일을 하기 전이었던 즉위 초반에는 태의령 정거[2]가 바친 치두구[3]를 대주전 앞에서 불태우고 다시는 이런 걸 바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을 정도로 청렴하고 유능한 이미지였다. 그런데 얼마 뒤에는 사치에 빠져서 치두구를 가득 모아놓고 "이까짓 게 뭐라고 그 소란을 피웠단 말인가?"고 말할 만큼 타락했다.

사실, 사마염이 즉위했을 당시에는 현명하고 덕이 있는 여성으로 이름 높았던 사마소의 아내 문명황후 왕원희가 태후로 있었으니, 사마염도 '엄마 눈치'(…)를 보았을 것이다. 태후가 직접 베를 짜고 진수성찬을 멀리하며 몸소 검소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하니, 아무리 황제라도 아들이 되서 치두구 같은 사치품을 가까이 하기에는 눈치보일만도 하다. 하지만 문명황후는 진나라가 건국되고 3년 만에 52세 나이로 죽었으니 사마염은 곧 '엄마 눈치'를 안 보고 황제 답게 마음대로 살 수 있게 되었으리라.

낭비벽, 사치벽이 극도로 심하고 신하들의 사치에도 전혀 관여를 않았는데 사마염을 언급하는 역사책을 1번만 읽어보시라.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이 사람의 사치벽을 한 대목 잡아서 적는다.(...)

특히 당시 인구가 2천만 명 정도인데 1만여 명의 처녀를 잡아와서하렘을 만들었다. 몽땅 후궁으로 만들고 누구를 골라잡아 밤을 즐길지가 애매하니 이 끄는 수레에 타고 '니들 맘대로 가라'라고 한 뒤 멈추는 데를 골라잡아 지낸 것이 유명. 일부 후궁은 자기 방 앞에 양이 좋아하는 소금물을 뿌리거나 잎사귀를 꽂아놔서 자기 방만 찾아가게 만들었다고. 의자왕의 삼천궁녀는 허구지만 사마염의 1만궁녀는 진짜라니 흠좀무! 이것이 대륙의 기상!

사마염의 사치와 관련된 일화가 몇 있는데 신하를 지방관에 임명할 때 한 사람은 사치벽이 심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제대로인 놈이 없어 이에 사마염은 '사치가 심하면 좋지만 술병은 평생 못 고친다.'라며 사치벽이 심한 신하를 임명했다.(...)

한번은 노신이었던 사도 위관이 술자리에서 옥좌를 어루만지며 '이 자리가 너무 과분합니다'[4]라고 했을 때도 술에 취해서 헛소리를 한다고 했지만 그의 뜻을 알아챘다. 그래서 문제를 만들어 사마충에게 문제를 던져 주었는데 그걸 가남풍이 가로채서 학자를 매수하여 답변을 쓰게 했다. 가남풍은 그 답변을 받아내어 너무 잘 쓰면 사마염이 오해할까봐 잘쓴 것도 아니고 못쓴 것도 아니고 중간 수준으로 사마충에게 받아쓰게 했다. 사마염은 이것만 믿고 사마충을 인정하고 말았다.

심지어 이런 일화도 있는데, 태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나오면서 '나는 어떤 군주인가?'라고 묻자 사예교위로 있던 유의가 '폐하는 후한환제영제와 같사옵니다.'라고 폭풍디스를 했다. 이에 사마염이 '아니, 환제와 영제는 매관매직으로 부를 축적한 황제들이 아니오? 짐이 그들과 동급이란 말인가?!'라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이에 유의는 '환제와 영제는 매관매직을 해서 국고라도 충당했지 폐하께서는 매관매직을 하여 폐하의 살림만 채우시니 환제와 영제보다도 못하옵니다!'라고 디스를 멈추지 않았다(...) 이에 사마염은 대노해 모가지를 날려버리는 대신 '환제와 영제는 이런 말을 듣지 못했는데 짐에게는 직언하는 신하가 있으니 내가 그들보다 낫다.'라고 웃어 넘겼다고 한다.

대인배 인증이라고도 할 만한 일화지만 저런 소리를 듣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국고를 탕진했으니 그다지 아름다운 일화는 아니다.(...) 더구나 서진 시대보다 후한 말기 시대가 더 개념있는 신하들이 많았다. 고의 난당시에 숙청당한 청류파 인사들만 봐도... 그래도 사마염이 더 낫다고 평가할 수 있는 이유는 환제나 영제는 이런 직언을 훨씬 더 많이 들었는데 그 직언을 나오는 족족 씹어버리면 다행이지 목을 날리거나 유배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국사 통틀어 창업군주이자 대륙 통일을 이룩한 황제 본인이 대놓고 암군급이라는 욕을 들어먹은 인간은 사마염이 유일하다. 대표적인 예로 망국인 촉한의 신하였던 번건에게 "어디 제갈량 같은 사람 없나? 징징"하자 "등애도 못감당하는 병신이 제갈량은 무슨."이라고 폭풍디스를 겪었으니까. 이제 유선 재평가론이 나올 때가 되었다.

다만 사마염이 관대했던 것이 아니라, 사마염이 이렇게 디스를 당해도 날려버릴 만한 권력이 없었던 것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사마염의 황권은 그리 탄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우선 사마씨 정권 자체가 명분이 부족했고, 구품관인법의 영향으로 이 시기에는 '호족'들의 세력이 매우 강성해졌다. 사마씨부터가 명문 중의 명문이자, 조위 시절 호족들의 우두머리였다. 정권 찬탈도 이런 호족들의 지지에 힘입은 바가 매우 크다.[5] 단순히 지방에서 세도를 부리는 호족의 범주를 넘어서 중앙정계와 결합한 '귀족'이 나타났다. 사마염 자신의 정통성도 조금 흠결이 있었으니, 아버지 사마소사마사의 동생으로서 진왕의 작위를 이었는데 사마염 자신은 양자로 들어가 사마사의 가계를 이은 동생 사마유와 경쟁을 벌여야 했다.

사마씨 왕조는 사실상 이러한 유력 귀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귀족 사회에서 유리되어 가던 위나라 조씨 왕조를 밀어냈다고 볼 수 있다. 즉, 사마씨 왕조의 집권은 호족에서 발전한 귀족의 세력이 후한 말 난세 기풍의 잔재물인 조씨 왕조를 밀어내는 과정이었다. 반대로 조씨 왕조의 경우 그 전신인 조조가 후한 말 대혼란의 시대로 바뀐 군웅할거의 시대 때 부터 스스로 거병하여 세력을 불리고 황제를 모시고 왔으며 자신이 스스로 인재를 발탁해서 등용하고 선발했고 그 신하와 장수들 또한 모두 조조는 물론 조씨가문에 충성하여 모셨으니[6] 조조는 물론 조조 사후에도 조비가 한나라로부터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평화롭게 선양을 받아 조예때까지 황제를 중심으로 한 위나라가 흔들림 없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 정통이 없는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에 걸친 사마씨 왕조는 귀족들의 호감과 지지를 사려 할 수밖에 없었고, 사마염도 선대 이래로 이어진 귀족들의 호감을 사는 정책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은근슬쩍 무시당하고 욕을 먹어도 폭압적으로 굴기는 어려웠다. 부(富)에서도 사마염이 지원을 해준 황숙 왕개석숭에게 밀렸을 정도였다. 세설신어에 실린 왕제가 사람젖을 먹인 돼지를 요리로 내오자 불쾌하게 여기면서도 특별히 말을 못했다는 일화, 사마염이 왕개에게 하사한 산호수를 석숭이 깨부쉈다는 일화 등은 사마염이 사실상 새롭게 형성된 귀족 세력에게 휘둘릴 만큼 황권이 약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 밖에도 오나라 국경을 지키던 대사마 석포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의심해, 전군에 동원령을 내려서 석포를 잡아들이려 했다. 그러기 전 마지막으로 석포를 소환했는데, 이때 석포가 뜻밖에(?) 순순히 오자 석포의 관직을 사도로 올려버렸다는 미담도 있다.[7]

사실 가장 큰 업적인 천하통일조차도 사마염 본인에게는 그다지 의욕이 없었던 모양새였다. 물론 손호의 후궁과 애첩들을 모두 끌어다가 자신의 후궁에 넣기는 했지만.

통일 뒤에는 부패하고 무능해져서 암군으로 바뀐 사례다. 사마염은 그래도 능력이 있어서 황제 노릇은 제대로 하고 살았으며, 그 생전에는 서진이 막장 부패를 달렸어도 큰 문제는 없이 나라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사마충백치라고 지칭할 만큼 훨씬 무능하고 능력도 없어서 나라를 말아먹는다.[8] 근데 그런 아들을 왕으로 삼은 사마염이 더 잘못했다. 잠깐 서로 싸운 아들들은?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묘하게도 손권과 비슷하다. 초기의 모습은 정상인데 말년은 흑역사에 후계 인사를 잘못했다는 점까지도....

1.2. 진정한 통일군주?

드립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삼국지의 세 축이던 군주들의 특성을 하나씩 이어받았으니 삼국지의 끝을 장식할 통일군주로는 나름대로 합당한 사람이라 볼 수도 있다. 세 영걸의 단점과 오점만 이어받은 데다 더욱 막장을 달려 문제지만.(...)

망했어요.(.....)

2. 가상 매체에서의 사마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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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9, 10 삼국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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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당연히 삼국지에서 최후반에 등장한 관계로 삼국지 관련 게임에서는 그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 코에이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사마염이 나오더라도 사마염 등장시기 이전에 통일이나 멸망이고, 그가 나올 때 쯤이면 모든 세력의 S급 장수들은 이미 대부분 사망한 상황. 삼국지 시리즈는 시리즈에 따라 최대 263년(촉한 멸망 년도)까지의 시나리오만 있어 265년에야 건국하는 진나라의 특성 상 사마염이 초기부터 군주로 나오는 시나리오가 없다.[9] 여담이지만 이 때만 노려서 휴양만 주구장창 눌러대면 스펙 좋은 젊은 신장수 하나로 하는 천하통일도 쉽다.(...) 다만 인내심의 문제인데 이 방법은 삼국지 5 이후부터만 가능하다. 그 이전 시리즈들은 도시에 장수가 1명도 없으면 자동적으로 공백지가 되므로... 과거작에서는 두예처럼 능력치가 막장 능력치인 반면,[10] 삼국지 9부터는 평범한 장수가 되고, 삼국지 12에서는 정사의 반영으로 능력치가 많이 떨어졌다.

다른 매체라고 대우가 좋은 건 아니다. 최후의 승자임에도 듣보잡 취급받는 안습한 인물. 사마사가 내부의 기반을 다져놓고 외부의 반발 세력을 제거하며, 사마소가 남은 내부 반발 세력을 제거하여 이를 확실히 했기 때문에 조환을 폐위하고 통일한 것 이외에는 거저 먹은 것과 같아서다. 아버지가 이룬 것을 거저 먹은 경우로는 역시 조비가 있다.

대우가 나쁜 것을 넘어서 일부에서는 욕도 먹는다. 위촉오 모두 자국의 번영을 위해 수십년이나 노력하고 박터지게 전쟁했는데, 사마염 자신은 거의 한 것도 없는 주제에 마지막에 슬쩍 나타나서 '니들 다 헛고생했음' 하듯이 자기가 나라를 먹어치워 삼국지의 영웅들의 노력을 다 죽 쒀서 개 준 꼴로 만들어버린 셈이니, 삼국지 팬 입장에서는 달갑게 안 보일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 진나라도 팔왕의 난, 영가의 난으로 얼마 가지 않아 멸망한 탓에...

삼국지 3에서는 무지정매순으로 86/71/54/63에 육지/수지 90/71이라는 준수한 능력치로 등장하지만하후돈인가? 무력만 쬐끔 더 보태면 영락없네. 어째선지 얼굴이 클론무장 얼굴로 나오는데다 사마소의 자식무장으로 등록을 안했다. 265년에 낙양에서 수색해서 찾아야 등용하는데 이마저도 버그 때문에 도스판에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못 꺼내니 안습. 심영과 겹쳐 짤려서인데 에디트로 심영을 맨 나중으로 밀면 심영이 짤리고 사마염이 등장한다.하지만 265년 이후까지 언제 가냐? 마지막 시나리오로 시작해도 30년. 공교로운 점은 하후돈과 각 능력치가 비슷하다. 지력은 사마염이 다소 높지만 그만큼 무력은 하후돈이 높다.

육전지휘 수전지휘 무력 지력 정치력 매력 총합
사마염 90 71 86 71 54 63 435
하후돈 90 76 95 60 54 75 450
차이 0 -5 -9 +11 0 -12 -15

하지만 사마염의 무력을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마염의 숨겨진 능력치가 야망14 운11 냉정8 용맹1이기 때문이다. 용맹이 1밖에 안되기 때문에 사마염으로 일기토를 뜰 경우 속된 말로 개나소나한테 다 쳐발린다. 뭐, 여자인 초선이나 가후, 순욱같은 문관들은 이긴다. 초선은 여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용맹수치가 0이다. 이러한 용맹치 때문에 사마염은 웃기게도 무력 63인 유심과 일기토를 떠도 쳐발린다. 유심은 용맹이 13이다.

그리고 이 능력치에 큰 비판이 있었다. 잘 알다시피 사마염은 친정이나 무예가 뛰어나다고 한 기록도 없다. 이는 손권처럼 후반기 무장들이 별 인지도가 없어서다. 이러한 능력치는 6까지 있다가 7부터 정사처럼 되었다. 정확히는 삼국지 12가 정사에 가깝다.

삼국지 4에서는 통무지정매 순으로 92/85/74/55/72 로 아예 A급 무장형 능력치를 들고 나왔다. 역시나 마지막 시나리오로 시작해도 30년은 진행해야 등장하기 때문에 실제 게임상으로는 보기 힘들고 PK 일기토 모드에서나 볼 수 있다.(...)

삼국지 5에서는 시나리오7의 시작으로부터 무려 20년이 지난 254년에서야 등장하며, 능력치는 무력 85/ 지력 71/ 정치 43/ 매력 86이다. 보유진형은 언월/봉시/학익이고, 습득특기는 고무/격려/화시/반계/속공/강행이다.

삼국지 6에서는 통솔이 90이다.응? 그러나 사마염의 과대평가는 여기까지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72/58/81/76의 B급 장수. 기사와 덫을 가지고 있다. 혼란이 없는 게 흠.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73/57/82/78/74에 특기는 겨우 5개. 전반적으로 동생인 사마유와 비슷한 수준이다.

삼국지 11에서는 동생인 사마유와 비교했을 때 전반적으로 능력과 병종적성이 사마유보다 낮다.(능력치는 전작보다 정사에 가까운 69/59/76/78/74가 되었다.) 일러스트만 그럴싸하지 특기조차 없다. 사마유가 사마염과 황제 자리를 경쟁했던 게 조비조식이 서로 다퉜던 거랑 비슷한데 사마유의 운명도 조식과 닮아서 사마염이 등극한 뒤 온갖 견제를 다 받다가 불행하게 죽는다. 능력치 개발로 상향시킬수가 있지만 차라리 사마사, 아버지인 사마소등을 상향시키는게 효율이 인지라 안습이고 사마염의 능력은 건물건설외에는 쓸모없다. 그나마 B급 문관이라서 내정이 도움이 된다.

삼국지 12에서 엄청나게 쓸 만한 전공성강화라는 전법이 생겼다. 다만 전작보다 통솔력,무력이 각각 69,59으로 떨어지고 게다가 동생보다 떨어졌다.[11] 게다가 특기마저도 상재빼고 아예 없다! 능력치가 전투용에서는 애매해서 문제이지만 백도어 용으로 쓸 만하다. 그 대신 일러스트가 간지(?)있어졌다...

한국의 만화가 한결이 지은 곱빼기 삼국지에선 마지막 1쪽 남기고 나와 "천하통일한 건 난데 왜 내 얘기는 얼마 안 나와?"라고 따지자 유비, 조조 등의 인물들이 삼국지니까!라고 압박을 줘서 버로우를 탄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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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 삼국지 엔딩)

고우영 삼국지에선 마지막에 "유가, 조가, 손가들아. 너희들은 모두 헛물만 켰도다!"하면서 비웃는다. 결국 자기도 헛물 켠 셈이지만. 또 박종관의 그림과 사진으로 엮은 삼국지에서는 이미 고인이 된 유비, 조조, 손권이 통일 제국의 황제가 된 사마염을 보고 "죽 쑤어서 개줬구나!"라고 한탄하는 장면도 있다. 얘는 죽 쑤어서 이민족들 줬다

머리카락이 땅까지 닿을 만큼 길고 두 팔이 무릎까지 왔다고 한다. 머리카락 묘사로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계속 장발 일러스트로 등장한다. 그리고 유비 또한 팔 길이에 과장된 묘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유비와 사마염을 일치시키려고 한 사가들의 의도 같다는 의견이 있다. 후연의 창업자 모용수도 이런 묘사가 있는데 아마 당시에는 7척 5촌과 더불어 제왕의 필수요소였나보다.

삼국무쌍 6에서 진나라 스토리를 다루면서 등장했는데 비중없는 클론무장이다. 그나마 진 스토리모드 엔딩에서 뒤통수가 나온다.


드라마 삼국에서는 어린시절 모습 만으로 나오는데 일본 더빙판의 성우는 쿠기미야 리에가 맡았다니 흠좀무. 매미 뒤에는 사마귀가 있고, 사마귀 뒤에는 참새가 있다는 당랑포선(螳螂捕蟬)의 고사를 외우는 것이 사마의의 인생을 대변하는 듯 의미심장하다.



삼국지대전 카드에서는 사토 후미야가 그린 김전일로 등장한다. 김전일의 명대사인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와 연계되어서 더욱 뿜게 만드는 장면.

3. 가족 관계

아내 자녀 봉작 이름 탄생 사망
무원황후(武元皇后) 양염(楊艷)[13] 장남 비릉도왕(毗陵悼王) 사마궤(司馬軌)[14] ? ?
차남 혜제(惠帝) 사마충(司馬衷) 259 306
3남 진헌왕(秦獻王) 사마간(司馬柬) 262 291
7녀 평양공주(平陽公主) ? ? ?
8녀 신풍공주(新豊公主) ? ? ?
9녀 양평공주(陽平公主) ? ? ?
무도황후(武悼皇后) 양지(楊芷)[15] 16남 발해상왕(渤海殤王) 사마회(司馬恢) 283 284
효회태후(孝懷太后)
왕원희(王媛姬)[16]
17남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熾) 284 313
귀인(貴人) 좌비(左棻)[17] 자식 없음.
귀빈(貴嬪) 호방(胡芳)[18] 11녀 무안공주(武安公主) ? ? ?
부인(夫人) 제갈완(諸葛婉)[19] 자식 없음.
미인(美人) 심씨(審氏) 4남 성양회왕(城陽懐王) 사마경(司馬景) ? 270
8남 초은왕(楚隠王) 사마위(司馬瑋) 271 291
16남 장사려왕(長沙厲王) 사마예(司馬乂) 277 304
재인(才人) 서씨(徐氏) 5남 성양상왕(城陽殤王) 마헌(司馬憲) 270 271
재인(才人) 궤씨(匱氏) 6남 동해충왕(東海沖王) 사마지(司馬祗) 271 273
재인(才人) 조씨(趙氏) 7남 시평애왕(始平哀王) 사마유(司馬裕) 271 277
미인(美人) 조씨(趙氏) 18남 대애왕(代哀王) 사마연(司馬演) ? ?
부인(夫人) 이씨(李氏) 9남 회남충장왕
(淮南忠莊王)
사마윤(司馬允) 272 300
15남 오효왕(呉孝王) 사마안(司馬晏) 281 311
보림(保林) 엄씨(嚴氏) 10남 신도회왕(新都懐王) 사마해(司馬該) 272 283
미인(美人) 진씨(陳氏) 11남 청하강왕(清河康王) 사마하(司馬遐) 273 300
제희(諸姫) 13남 여음애왕(汝陰哀王) 사마모(司馬謨) 276 278
재인(才人) 정씨(程氏) 14남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279 306
생모 미상 장녀 상산공주(常山公主)[20] ? ? ?
생모 미상 차녀 장광공주(長廣公主)[21] ? ? ?
생모 미상 3녀 형양공주(滎陽公主)[22] ? ? ?
생모 미상 4녀 형양장공주
(滎陽長公主)[23]
? ? ?
생모 미상 5녀 번창공주(繁昌公主)[24] ? ? ?
생모 미상 6녀 양성공주(襄城公主)[25] ? ? ?
생모 미상 10녀 만안공주(萬安公主) ? ? ?
생모 미상 12녀 영천공주(潁川公主)[26] ? ? ?
생모 미상 ? 영수공주 사마수려 ? ?

  • 18남 7녀로 총 25인. 그러나 이 많은 자식들은 지들끼리 죽고 죽이면서 사마치와 사마안 둘만 남는다.(...) 그리고 이마저도 영가의 난으로 몰살 크리.(...) 삼천궁녀를 뛰어넘는 1만궁녀의 정력도 헛되고 헛되도다
  • 이들 빼고도 역사에 기록한 첩은 10여 명이 더 있다. 또 못 기록한 수천여 명의 첩들도 있으며 이들은 모두 자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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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러나 조조와 사마의의 찬탈은 결코 같은 급으로 논할 수 없다. 조조는 이미 쇠약하던 후한 정권을 황제를 대신하여 20여년 간 유지시켰다. 또 그는 반대파와 황후를 제거했지만 황제를 폐위하거나 죽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마의는 비록 어린 황제 조방이 즉위하고 권력자 조상이 무능했으나 그래도 쇠약하지 않은 위나라를 기회를 보아 권력을 잡고, 사마사는 황제 조방을 폐위시키며 사마소는 황제 조모를 죽였다. 실제로 그럭저럭 평화스럽게 마감한 조위의 말로에 비하면 서진의 말로는 훨씬 비참하다.
  • [2] 뒷날 사마염의 며느리 가남풍검열삭제를 한 위인으로 유명하다.
  • [3] 의 머리 가죽을 이어 만든 호화스러운 모자 또는 가죽옷.
  • [4] 사마염의 황태자였던 사마충을 말한다. 즉 간접적으로 돌려 말한 것으로 '황제 자리가 사마충에게 너무 과분하다'는 것으로 황태자를 바꿔야 한다는 뜻이었다.
  • [5] 호족을 기반으로 건국을 이뤘다는 점에서 을 세운 왕망과 비슷하나, 왕망은 제위에 오른 뒤 자신을 지지하던 호족 세력을 탄압하는 정책을 펼치다가... 망했어요.
  • [6] 물론 한왕조를 다시 재건시키고자 한 이들도 있었다.
  • [7] 그런데 이 아저씨의 막내아들이 석숭이란 인간... 꿈도 희망도 없어.(...)
  • [8] 다만 사마충은 호부견자이지만. 원래 지적장애이라는 평가가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참고.
  • [9] 만약 이 시나리오가 있었더라면 더 이상 새로운 장수도 안 나오는 상황에서 인재/영토 면에서 오를 앞서는 진나라의 통일은 일도 아닐 것이다. 근데 그러면 삼국지가 아닌 이국지인데?
  • [10] 일단 사마씨 중에서 무력이 80대이다.
  • [11] 대신 정치가 79로 상향이 되었는데. 사마염의 용도는 시장의 건전지로 쓰일뿐(...)
  • [12] 여기서 웃긴 것은 손견은 사마염에게서 오나라의 멸망을 보는데, 손견은 아싸! 오나라는 끝까지 살았구나!하며 기뻐했다.(...)너 누구 편이냐?
  • [13] 양문종의 딸로 사마염이 황제가 되기 전에 죽었다.
  • [14] 2세에 요절해서 차남인 사마충이 사실상 적장남이었다.
  • [15] 양준의 딸로 무원황후의 당질녀이며 사마충의 계모다. 가남풍쿠데타를 일으켜 양준 일족을 처리할 때 무도황후는 그의 어머니 방씨를 살리려고 황태후 체면에 며느리 앞에서 무릎꿇고 싹싹 빌었다. 그러나 가남풍은 방씨를 죽였으므로 이에 절망해 스스로 굶어죽었다. 참고로 그녀는 259년생으로 256년생인 며느리 가남풍보다 3살 연하다.
  • [16] 원래는 사마염의 첩 중에서 재인에 불과했으나, 나중에 아들 사마치가 황제를 하자 효회태후로 추증되었다. 사마소의 아내 왕원희王元姬와는 다른 인물이다.
  • [17] 좌분 또는 좌빈. 좌옹의 딸이자 좌사의 누이.
  • [18] 호분의 딸.
  • [19] 제갈충의 딸.
  • [20] 두 눈이 먼 장님. 남편은 '사람 젖을 먹여서 키운 돼지'를 사마염에게 대접하기로 유명한 왕제(王濟).
  • [21] 남편은 진덕(甄德).
  • [22] 남편은 노심(盧諶).
  • [23] 언니 형양공주와 작위가 같은 걸 보면 동복 자매일 수도 있다. 참고로 '공주'는 황제의 딸에게, '장공주'는 황제의 누이에게, '대장공주'는 황제의 고모에게 붙여지는 칭호. 남편은 화항(華恒).
  • [24] 남편은 위선(衛宣). 하지만 이혼했다.
  • [25] 남편은 동진 초기의 권력자이자 반역자인 왕돈(王敦).
  • [26] 남편은 왕수(王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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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25 15:3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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