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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 전투

last modified: 2015-06-26 21:15:13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전투의 원인
3. 전투
4. 민간인들의 운명
5. 양측의 피해
6. 전투 이후
7. 관련 자료


1. 개요

(ɔ) from
사이판 전투
작전명
Operation Forager(약탈자 작전)
날짜
1944년 6월 15일 ~ 1944년 7월 9일
장소
마리아나 제도 사이판
구분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미국 일본
지휘관 홀란드 스미스 사이토 요시츠쿠
병력 71,000명 31,000명
피해 규모 3,426명 전사 24,000명 전사
결과
미군의 승리
기타
본토 폭격을 위한 안정적인 B-29의 기착지 확보

Battle of Saipan. 제2차 세계대전 도중의 태평양 전쟁의 전투.

2. 전투의 원인

미드웨이 해전 이래 과달카날, 알류산 열도, 애투, 타라와, 마킨 섬에 이르기까지 졸전을 거듭하며 줄줄이 패전한 일본군은 1943년 9월 인도네시아-뉴기니-필리핀-마리아나 제도를 잇는 이른바 "절대국방권"을 설정한다. 일종의 최후 방어선의 성격으로, 이 선에서 기필코 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내겠다는 것이었다. 근데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지. 1944년에 들어서자 절대국방권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마셜 제도에 들이닥친 미군에게 그대로 발려버린다(…).

한편 계속되는 승리와 폭발한 물량으로 자신감을 완전히 되찾은 미국은 일본 본토와 가깝고 새로이 개발된 초장거리 폭격기 B-29의 기착지로도 매력적인 북마리아나 제도사이판 섬에 대한 공략을 준비한다. 일본군은 부랴부랴 사이판의 방어 준비를 서둘렀고, 자기들 딴엔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어느정도 였냐면 도조 히데키는 미군의 사이판 공격 가능성을 묻는 해군에 "사이판은 난공불락임 걱정마셈 ㅋ"라는 황당한 답변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물론 그때의 미군에게 일본의 무슨 방어시설도 난공불락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실제로는 도조 히데키가 생각하는 수준의 방어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미 개전 초기의 어뢰문제를 해결한 미국의 잠수함이 들끓는 바람에 사이판으로 향하던 일본군의 수송선이 대거 격침되면서 수많은 물자와 장비와 병력이 바닷속으로 사라졌으며, 살아남은 수송선도 사이판에 접근을 못하고 가까운 대만이나 오키나와로 발길을 돌렸기 때문에 정작 사이판에는 애초의 계획과는 거리가 먼 3만여명의 병력만 집결할 수 있었다. 덤으로 사이판을 공격하기 전에 미국 항공모함 함대가 주변의 일본군 비행장을 초토화시켜놓아서 항공력까지 전무한 상황이었다.

또한 중국 전선에서 국민당군이 의외로 선전하여 마리아나 제도로 전용하려던 병력들의 발이 묶여 버린 것도 일본으로선 치명적이었다. 원래 일본 대본영은 1943년 말에 중국 중부 방면군에서 제3사단과 제13사단을 마리아나 제도로 보내기로 결정했으나 동정호 서안의 도시인 상덕에서 벌어진 전투가 계획된 기간 이상으로 장기화 되면서 마무리 되자 아예 대륙타통작전을 새로 수립하면서 해당 사단의 마리아나 제도 파견을 취소했다. 그 바람에 사이판에 각각 2개 사단을 배치시켜 방어하려던 원래의 발상이 1개 사단으로 축소되면서 심각한 전투력 저하가 발생한 것이다.

3. 전투

일본군의 예상보다 훨씬 이른 1944년 6월 미군이 사이판을 공격한다. 6월 15일 미군의 7만 대병력이 상륙작전을 개시하였고, 그에 맞서는 일본군은 절반이 안되는 3만 1천명이었다. 일본군 사령관 사이토는 구시대적인 해안방어전술로 미군을 상대하기로 결정하는 대삽질을 저지렀고 결과는 미 해군의 함포사격에 많은 방어진지의 일본군이 끔살.

그래도 해안에 죽치고 있던 일본군은 원래 작전인 해안방어전술을 사용하기 위해 미리 해상에 표적깃발을 부표로 달아놓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므로 함포사격에서 살아남은 일본군 생존자들은 다가오는 미군에게 맹렬히 저항했고, 상륙이 완료되고 교두보가 확보될 때까지 미군은 1,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야 했다. 상륙 첫날 밤엔 역시 어김없는 일본군의 야습이 있었지만 미군의 화력에 말 그대로 소멸해버린다.

한편 사이판을 구원하고 미 기동함대를 격멸하기 위해 달려온 일본 연합함대필리핀 해 해전에서 역관광당하고, 사이판은 일본 본영에게 버려진 채 완전히 고립되어 버린다. 일본군은 섬 안의 전차들을 긁어모아 미군을 상대하려 했지만 안 그래도 전차들의 성능도 안습이었고, 미국 보병들은 바주카를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전차들이 늪지대에 빠지는 바람에(…) 별 활약 없이 괴멸된다.[1]

한편 이때까지도 일본군은 연합함대가 자신들을 구하러 오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연합함대를 관광시키러 떠난 미 기동부대를 연합함대를 피하려 도주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기뻐하고 있었는데… 사흘 후 바다를 메꾼 함대는 미군이었다.

승기를 잡은 미군은 대공세를 감행했고 일본군은 속수무책으로 도처에서 소탕 당했다. 게다가 6월 24일에는 일본 대본영에서 사이판 포기 결정을 내려버렸다. 제공권과 제해권은 미군에게 완전히 넘어왔고, 7월 3일 사이판 최대의 도시였던 가라판은 미군의 손에 떨어졌다.

그나마 살아남은 일본군은 산지와 동굴에 숨어서 끝까지 항전해보려고 했으나, 이미 앞서 언급한 구시대적 해안방어전술때문에 식량과 장비와 탄약을 해안선에 분산배치한 실수를 범했으므로 이들 물자들이 개전 초기에 미군의 손안에 떨어지자 장기적인 저항은 말할 것도 없고 당장 먹고 살 수단도 없는 절박한 처지에 놓였다. 그리고 사이판섬은 과달카날이나 부겐빌같은 큰 섬이 아니므로 미군의 입장에서는 비행장 주변에 교두보를 만들고 방어하는 전략보다는 차라리 섬 전체를 토벌하는 것이 방어면에서나 비용면에서나 우월하기 때문에 섬을 완전점령하기로 결정하였다.

7월 5일, 함대를 잃고 사이판에 숨어있던 나구모 주이치 중장자살했다. 그 뒤를 이어 사이판 방어 책임자였던 사이토도 자살했고, 이날 새벽 모든 잔존 일본군이 반자이 어택을 감행하고 전멸함으로써 사실상 일본군의 저항은 끝장났다. 일부 병사들은 더 이상 투항할 곳이 없자 그대로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고, 이 절벽은 현재 '자살 절벽'이란 명칭이 붙었다(아래 설명될 반자이 절벽과는 가까이 있는 곳이지만 다른 장소다).

그렇지만 미군 내부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으니, 바로 사이판 상륙부대 사령관인 해병대의 홀랜드 스미스 중장이 육군 제27사단의 랠프 스미스 소장을 해임한 사건이다. 27사단의 진격이 해병대의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데다, 기껏 한 진격조차 일본군의 저항이 심하다는 핑계를 내세워서 공격 개시선으로 물러나는 일이 수시로 벌어지는 것에 분통이 터진 스미스 사령관이 스미스 사단장을 해임한 것이다.

통합군 체제로 전쟁을 수행했다는 태평양 방면의 미군이지만 최상급자인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나 태평양 육군 사령관에게 사전 귀띔조차 하지 않고 해임하는 바람에 엄청난 분규가 벌어졌고, 지금도 가끔씩 저 해임조치가 옳으냐 그르냐를 놓고 논쟁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 우익들은 이 사건을 들먹이며 "우리 황군은 매우 잘 싸웠음!"하며 자랑한다고. 저런 자중지란한 부대한테 일방적으로 쳐밀린 게 어딜 누구더러?

4. 민간인들의 운명

사이판에 거주 중이던 민간인들은 끔찍한 운명을 맞았다.

6월 16일 새벽에 일본군은 여자와 아이들이 포함된 민간인들을 방패막이로 삼아서 야습을 감행했다. 민간인들이 항복하러 오는 줄 알았던 미 해병대 4사단 25연대는 그 뒤에 일본군이 숨어서 따라오는 것을 보고 포격으로 응수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군은 격퇴당했다.

이후에도 민간인들의 운명은 끔찍했다. 평소 일본군으로부터 미군은 악마라는 세뇌를 받아왔던 그들은 미군에게 투항하지 않고 잇따라 자살해 버린 것이다. 미군은 이들에게 계속 투항을 권고하는 한편 좋은 대우를 약속했지만 주민들은 이미 그 말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하였기 때문에... 전투가 사실상 끝난 9일 사이판의 북쪽 절벽에선 5천여명의 민간인이 미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모두 바닷속으로 투신자살했다. 당시 미군이 촬영한 기록영상들도 남아있다.

현재 이 장소에는 만세 절벽(Banzai Cliff)라는 명칭이 붙어있으며 당시 자살한 이들을 기리는 위령탑이 남아있다. 그런데 일본인 위령탑, 조선인 위령탑, 오키나와인 위령탑이 각각 따로 있다. 이렇게 위령탑이 많은 이유는 당시 사이판은 일본이 사탕수수 농장을 잔뜩 가꿔 놓은 상태여서 인부로 조선인, 오키나와인들도 많이 와 있었고, 역시 일본인 민간인과 함께 죽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자살한 건 아니고, 망설이던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 한 예로 미군이 자살하려고 망설이던 민간인을 발견했는데, 그 직후 곁에 있던 일본군 병사가 자살을 독촉하기 위해 민간인들을 사살한 일이 있었다. 이 만행에 분노한 미군은 문제의 일본군 병사를 즉결처분해버렸다고 한다.

한편 이때 뛰어내렸다가 기적적으로 나무가지에 걸려 살아남은 일본 여성도 한 명 있어서 화제가 되었다.

이 때까지 일본군이 민간인까지 현지에서 강제징집해서 싸우거나, 일본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군과 같이 싸운 전례는 있었어도 일본군이 자국 민간인들에게 자살을 강요하거나 살해하는 사태가 대량으로 발생한 것은 사이판 전투가 최초이며, 바로 인근 섬인 티니안 섬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많은 의문점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런 참상을 불러온 원인이 밝혀졌다. 일본 제국덴노히로히토가 1944년 6월 30일에 칙명을 내려서 사이판의 민간인에게 자살을 권유한 것이다. 그 이유는 사이판에 거주하는 일본 민간인이 잡혀서 미국의 선전방송에라도 나가게 되면 일본의 사기가 떨어지고 미국의 사기가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자살한 민간인에게는 전사자로 간주해서 명예와 예우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다는 부언도 붙긴 했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는 어떻게 하더라도 한 나라의 군주가 자국 국민에게 자살을 권유한 막장사태를 덮을 수 없다. 사실 말이 권유지, 일본처럼 경직된 사회체제를 가진 국가의 민간인이 감히 군주의 권유를 거절할 수가 있을까?

어찌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는지 태평양 전쟁의 원흉이자 악명으로는 어디 가서도 안 꿀리는 도조 히데키 조차도 '폐하께서 이러실리가 없다'라며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선명하게 찍혀있는 옥새를 보고는 더욱 큰 충격에 빠졌다고.. 충격받은 도조가 칙명을 중간에서 가로채서 멋대로 보류하는 상황까지 발생했으나, 결국 다른 루트를 통해 7월 1일에는 사이판 전투의 지휘관들에게 히로히토의 칙명이 방송으로 전달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의 잔혹성 + 덴노의 칙명이 안좋은 방향으로 시너지를 이루는 바람에 대참사가 난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늘 그랬듯이 히로히토가 직접 낸 아이디어가 아니고 군의 수뇌부에서 나온 의견을 히로히토가 받아들이고 옥새까지 찍어서 보낸 것이라고 보고있긴 하지만, 아이디어를 누가 냈던간에 국가원수가 백성들에게 자살을 권유한다는 의견을 받아들인 것 자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아무튼 이 사건을 포함하여 사이판 전투의 여파는 엄청났고, 이 전투가 끝난 후에는 무려 전쟁의 진두지휘를 맡고있던 도조 히데키와 통수권자인 히로히토가 한꺼번에 전쟁에서 손을 떼버리는 사건이 벌어진다. 도조는 당연히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진두지휘를 그만둘뿐만 아니라 총리직에서도 물러났고, 히로히토는 통수권자임에도 불구하고 이후로는 군사 회의 조차 참여하지 않았다. [2] 그러나 도조는 표면상으로만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였고, 실제로는 후임 총리인 고이소 구니아키를 내세우고는 배후에서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5. 양측의 피해

사이판 전투에서 미군은 7만명의 병력 중 전사 3천여명, 부상 만여 명의 피해를 입었고, 일본군은 3만 1천명의 병력 중 포로로 잡힌 천여 명을 제외한 전원이 몰살당했다. 따라서 미군과 일본군의 전사자 교환비가 무려 10:1이다. 이 정도로도 답이 안 나오는데, 전쟁 후반부 필리핀 탈환전에서는 전사자 교환비가 40:1에 육박했다. 뭐 소련은 7:1의 교환비로도 이기기는 했다.단 일본은 소련만한 자원도 기술도 인재도 미국만한 든든한 물주도 없었다

여기에 민간인 사망자도 2만명이 넘었다. 대부분의 민간인 사망자는 자살자, 또는 강요에 의해 죽은 자들이다.

6. 전투 이후

사이판 점령 후 미군은 섬에 활주로를 건설하고 목표했던 B-29의 일본 본토 폭격을 개시했다. 미군 사령부는 사이판 점령으로 태평양에서의 승리는 시간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후 유럽 전선에 편하게 집중하여 독일군을 맘껏 유린한다.



한편, 제 18 보병 연대 소속 대위오오바 사카에는 생존한 병사들과 민간인을 모아 타포차우산(Mountain Tapochau)에서 1944년 7월 부터 1945년 12월 1일까지 저항을 벌여 '사이판의 여우'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반역자로 낙인이 찍혔고, 미군에서도 비겁하다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후에 그의 일화는 해병대 출신의 작가 돈 존스(Done Jones, 1924 ~)가 1982년에 출간한 실록소설인 <Oba, The Last Samurai: Saipan 1944-45>로 소개되었으며, 이 소설은 2011년에는 히라유마 히데유키 감독이 찍은 태평양의 기적, 폭스라고 불리운 남자라는 영화로 영화화되었다.

7.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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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단 상륙후 반격 당시 일본군의 전차 일부는 미군 지휘부 근처까지 갈 정도로 위협하기도 했지만 전차들이 갑자기 정차해서 위치확인을 하는 바람에 바주카에 제압당하고 만다. 이거 무슨 낫질 작전도 아니고
  • [2] 히로히토가 전쟁에서 손을 뗀 것에 대해서는 패색이 짙어지자 군의 수뇌부에서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덜기 위하여 손 뗄 것을 권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혹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자살을 권유할정도로 정신적으로 몰려있던 상태인만큼 스트레스도 극심하고 전쟁에 대해서도 슬슬 회의감이 느껴져서 손을 떼버렸다는 설도 있는데... 결국 정확한건 아무도 모른다. 둘다일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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