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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혁명

Contents

1. 개요
2. 배경
2.1. 기술과 발명
2.1.1. 농업 혁명
2.1.2. 면직물 공업 기계화
2.1.3. 기 기관과 교통수단
2.1.4. 제철 공업의 발전
2.2. 사회적 배경
2.2.1. 넓은 시장
2.2.2. 안정적인 국가
2.2.3. 지주 계급
2.2.3.1. 인클로저 운동
2.3. 자연적 조건
3. 전개
3.1. 노동 계급 탄생
3.1.1. 노동자들의 고통
4. 결과 및 의의

Industrial revolution

1. 개요

근대의 시작. 세계가 전근대랑 영 딴판으로 바뀌게 된 결정적인 계기로, 현대의 많은 성취와 문제들은 전부 이 계기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배경

2.1. 기술과 발명

기술적인 차원에서 산업혁명은 철과 강철이라는 새로운 소재의 활용, 석탄과 증기 기관같은 새로운 동력원의 사용, 방적기나 역직기 같은 새로운 기계의 발명, 공장제라는 새로운 노동 분업 체계의 발전, 증기 기관차나 증기선과 같은 새로운 운송 및 통신수단의 발전 등 다양한 변화를 동반하며 진행되었다.

보통 산업 혁명은 과학의 눈부신 발전을 기반으로 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좀 더 정확히는 산업혁명을 통해 발전해왔던 과학이 기술에 직접 적용되기 시작했다고 봐야한다. 19세기 중후반 전기, 광학, 화학산업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기술진보는 숙련공 발명가들의 시행착오와 오랜 경험의 산물이었고, 산업혁명 초기에 과학 이론이 산업기술에 직접 응용된 사례는 찾아보기 다소 힘들다. 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기계인 증기기관을 만드는 데 필요한 과학, 공학적 지식 또한 상당한 수준이라는 것도 유념해야한다.

2.1.1. 농업 혁명

16세기부터 벨기에플랑드르 지방에서 중세시대의 농경법인 삼포제를 대체하는 4법이 개발된다. 밭을 3분해서 3년마다 한 번씩 밭을 묵히는 삼포제와 달리 밭을 4분해서 보리, 클로버, , 순무 순으로 심는 농법으로, 클로버와 순무가 지력을 회복시키는 작용을 하며 동시에 사료로 사용되어 밭 중 일부를 사용할 수 없는 삼포제에 비해 훨씬 효율적이었다.

이 농법은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 찰스 타운센드 자작[1]이 노퍽 지방에서 강력하게 권장하기 시작하여 영국에 보급되며, 이 농업은 노퍽 농업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렇게 혁명적으로 발전한 농업은 후에 영국의 급속한 도시화로 늘어나는 식량 수요를 감당할 수 있게된다.

사족으로 곡물 생산이 늘어 곡물가가 떨어지자 손해를 볼 수 없었던 지주들이 곡물 수입을 막는 법인 곡물법을 의회에 압력을 넣어 통과시키는데다가, 곡물을 진(술)을 생산하는데 투입하는 바람에 영국에는 알콜 중독자가 급증했다.(...) 그리고 그렇게 식량을 낭비하는 바람에 음식의 질도 떨어졌다 카더라근데 왜 아일랜드에선 수백만을 굶어죽게 만들었냐

2.1.2. 면직물 공업 기계화

영국의 산업을 변화시키는 첫 발걸음은 바로 면직물 공업에서 시작되었다.

일단 제일 먼저 존 케이가 1733년 '나는 북'을 발명하게 된다. 베틀의 북을 스프링을 이용해 자동화해서 한 번에 짤 수 있는 면포의 너비가 2배 가량 늘어나고 속도 또한 훨씬 빨라지게 된다.[2]

그러자 이번에는 천을 짜기위한 위한 생사가 부족해진다. 그러자 제임스 하그리브스가 1767년, 한 번에 8개의 실을 자아낼 수 있는 제니 방적기[3]를 발명하게 된다. 그리고 리처드 아크라이트는 1769년에 동력으로 수차를 이용하는 수력 방적기를 발명한다[4]. 또 새뮤얼 크롬프턴은 이 둘을 합친 뮬 방적기를 만들어낸다. 사실 이 셋이 산업 혁명 출발기에 면직물 공업의 혁신을 일으킨 이들로 보통 화자되지만, 사실 토머스 하이즈, 폴, 와이아트 등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발명가들도 같은 시대에 비슷한 물건을 발명했다. 특히 토머스 하이즈는 아크라이트가 자신의 발명품을 표절했다고 소송, 승소했다. 게다가 제니 방적기도 그가 만들었다는 설도 있으며 제니라는 이름도 그의 딸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여겨진다. 어쨌든 그 덕에 아크라이트의 특허가 무효가 되어 기계를 마음 껏 공짜로 사용할 수 있게되어 전국 각지에 수 많은 방직 공장이 설립된다. 즉, 영국 산업혁명의 진정한 주역은 토머스 하이즈임을 알 수 있다.

사족으로 이 발명들이 있기 전 방적기는 한 번에 한 가닥의 실 밖에 잣지 못했고 수력이 아닌 인력 혹은 축력으로 가동되었다.

어쨌든 방적 산업이 급격히 성장하자 이번엔 또 직조능력이 방적을 따라가지 못해 실이 남아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1784년, 에드먼트 카트라이트가 동력으로 자동으로 천을 짜는 방직기인 역직기(力織機, power loom)를 발명, 이것을 수력 혹은 증기기관에 연결함으로서 직조능력이 방적능력을 따라잡는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방직산업은 자동화의 길에 완전히 들어서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이때 근대적인 공장이 처음 나오게 되며, 이때의 공장은 증기기관을 차용하며 물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많아지자 강 주변에 지어지게 되었다.

한편, 대량의 목화를 공급하던 미국 남부에서는 큰 골칫덩이로 목화와 실을 분리하는 작업이 남아있었는데, 1793년 엘리 휘트니가 이를 빨리 분리시켜줄 수 있던 계면기[5]를 발명했으며 이 기계는 2마력의 수력으로 5000파운드의 솜을 처리해 1000명분의 일을 하게 만들어줬다. [6]

2.1.3. 기 기관과 교통수단

1765년 스코틀랜드의 기술자 임스 와트[7]구린 뉴커먼의 기관을 개량해 연료가 적게 들면서 강가나 석탄산지와 먼 곳에서도 가동시킬 수 있는 새로운 증기기관을 발명하였고, 1774년 매튜 볼턴이라는 운명의 동반자를 만나게 된다. 사업가였던 그는 기 기관의 파워를 한눈에 알아봤고, 특허를 출원하곤 슬슬 관심이 없어지던 와트에게 개량을 종용(...)하고 볼턴앤와트라는 기업을 설립했다.

그 후 미국 발명가 로버트 풀턴은 이 회사에 증기기관을 주문했고, 이를 이용해 클레몬트란 증기선을 개발했고, 1807년 성공적으로 운행을 완료했다. 클레먼트는 후에 뉴욕 허드슨 강의 승객을 나르게 된다. 이 발전된 수상교통은 영국의 운하 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운송비를 크게 절감시켰다.

1804년 리처드 트레비식은 증기 기관차의 시운전에 성공하며 내기에도 이겨(...) 몇천 파운드를 땄다. 이를 보고 영국의 기술자들은 트레비식의 것을 개량하기 시작했다. 조지 스티븐슨은 1825년 크셔의 석탄광에서부터 스톡턴의 항구를 오가는 43 km짜리 세계 최초의 증기기관차가 달리는 화물철도를 깔았고 이 뉴스는 신속하게 영국 곳곳으로 전달되었다. 이것이 바로 스톡턴-달링턴 철도이다. 사업가들은 리버풀과 맨체스터를 레일로 연결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1830년에는 최초의 여객/화물 겸용 철도인 리버풀 - 맨체스터 간 철도가 개통되며 철도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8]

2.1.4. 제철 공업의 발전

17세기 말, 에이브러햄 다비 1세가 화학의 발전으로 영국에서 풍부했던 역청탄을 코크스로 정련하는 것이 가능해지자 이전까지 용광로에서 사용했던 연료인 숯을 대신해서 코크스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삼림이 소실 수준이었던 영국에서는 코크스는 제철산업의 탈출구가 되었고 숯에 비해 높은 온도로 오랫동안 연소했기에, 주철의 생산량을 급속도로 높일 수 있었다.

하지만 기존과 같은 고로高爐에서 생산되는 주철[9]은 탄소함량이 높아 유연성이 떨어져 쉽게 부서져, 강철 혹은 연철[10]의 생산을 위해서는 기존처럼 주철을 다시 망치로 두드리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헨리 코트가 철과 연료가 분리된 용광로를 사용, 철을 완전히 녹임으로써 불순물을 분리하고 녹은 철을 산소에 노출시켜 탄소를 제거하는 기술인 교련법을 개발, 또 녹은 철을 판 형태로 가공하는 압연 기술을 개발해 연철 생산량이 급격하게 증가한다. 1788~1896년 사이에 영국의 철 생산량이 2배 증가했고, 이후 8년 동안 다시 2배 증가한다.

코크스와 새로운 제철기술은 영국의 철 생산량을 급격하게 증가시켜 이후 산업 혁명의 전개에 필요한 막대한 철을 공급할 수 있었다.

1779년 영국 세번 강에 세계 최초의 철교가 건설되었다.

2.2. 사회적 배경

2.2.1. 넓은 시장

당시 영국이 밀고 있던 산업은 모직 산업이었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특성을 갖춘 직물 산업은 노동 집약적이었고, 무역에도 적합해 넓은 잠재 시장[11]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일이 시작되려니까 인도에서 수출하는 저렴한 캘리코(Calico) 면직물이 영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영국의 모직물 산업에 위협이 되었다. 이에 영국은 이 인도산 면직물 수입을 금지시켜 다시 기회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영국 내에서 모직물에 비해 값이 싸고 쓰기 편한 면직물에 대한 수요는 높아져 갔으며,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밀수 등을 통해 들어온 캘리코의 인기는 높았다. 즉, 일단 면직물 시장이라는 시장이 생기니, 수요를 억제할 수는 없었던 것. 이에 영국에서는 자체적으로 면직물 산업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우선 1757년 플라시 전투의 승리를 통해 동인도회사가 인도 벵골 지방을 장악함으로써 원면을 마구 거둬들였고, 가격이 저렴해진 인도산 원면을 수입하여 랭커셔 지방을 중심으로 면직산업이 발전했다. 증기기관을 비롯한 기계 발달도 이 사건을 기반으로 한다.

또, 영국은 당시 이미 산업화의 포텐이 터질 만한 큰 경제규모를 가지고 있었고, 곧 산업화라는 새로운 기조에 대해 흥미로워하던 사업가들이 안정적인 투자를 이어가면서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으며, 게다가 그 성장의 수요도 담당할 수 있을 만큼 경제가 커지게 되었다.

2.2.2. 안정적인 국가

이미 전에 찰스 1세, 올리버 크롬웰 등의 혼란을 겪고 예 혁명으로 마침표를 찍은 뒤, 영국의 정치는 매우 안정되었다. 게다가 그들의 해군력은 당시 유럽에서 나폴레옹도 이기지 못할 정도였고 솔직히 해군력밖에 필요가 없었다. 이에 반해, 유럽은 당장 프랑스 혁명이란 다른 의미의 혁명의 한복판에 있었다. 지주계급 역시 약하지 않았고. 거기다 마지막엔 나폴레옹까지 물리치게 되면서 유럽의 주도권을 기어코야 쟁취하게 되었다.

2.2.3. 지주 계급

영국은 이전부터 중상주의가 발전하여 농촌의 자영농과 중소 지주들인 요먼리[12]가 발생하여 유럽 특유의 봉건적인 토지제도가 약해져 있었다.

그리고 청교도들은 관료, 정치인, 학자 등 사회적으로 공인된 지위를 얻을 수 없어 지주 혹은 상업에 종사하여 중산층 계급으로 발전해 있었는데, 그렇게 형성된 대지주들인 젠트리gentry들은 나름의 경제력을 통해 어느 정도의 교육 수준과 참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봉건적 토지제도와 다르게 땅을 사적으로 소유하여 자본주의적인 재산권을 행사함으로서 초기, 농업 자본주의의 발전을 주도했다.

이것이 어떻게 산업혁명에 영향을 줬는지 좀 의아할 사람도 있을텐데, 다른 유럽의 봉건적 토지제도는 땅을 사적으로 사고 팔 수 없었으며, 토지에 예속된 농민들이 어느 정도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 그에 따라 소유자의 재산권도 제약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지주가 농민들을 맘대로 쫓아낼 수도 없고, 챙겨줘야할 의무가 있었다는 것. 그 봉건제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가 나타난 나라가 바로 프랑스.[13]
2.2.3.1. 인클로저 운동
굽시니스트 만화. ( 정치적 편향 주의! )

16세기 부터 농업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그 이전까지 미개척지였거나 공유지였던 땅을 울타리를 둘러 사유지임을 표시하는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이 시작된다.

직물 산업이 급성장하자 섬유의 수요가 폭증, 목화 혹은 양털의 가격이 폭증한다. 목화를 키우기 적절하지 않은 기후인 영국에서는 지주들이 양을 목축하는 길을 선택, 양을 키우는 목장은 그 이전의 농업에 비해 훨씬 적은 인력을 필요로 하였고, 그에 따라 농민들은 농촌에서 쫓겨나 도시의 저임금 노동자로 전환된다. 이 사건은 큰 사회문제를 일으켜 토마스 모어는 저서 유토피아에서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라고 표현할 지경이었다.

사족으로 이 인클로저 운동은 농업 자본주의가 발달해있었던, 즉 지주가 땅을 맘대로 쓸 수 있었던 영국 특유의 사건이다.
다른 국가들은 농민들을 도시 노동자로 전환시키기 위해 다른 방법을 동원한다.미국의 경우 링컨의 노예 해방, 독일 등지의 유럽국가의 경우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시작한 의무 교육, 소련의 경우 이오시프 스탈린집단농장화, 한국의 경우 박정희의 저곡가 정책이 그것들에 해당한다.

2.3. 자연적 조건

영국에는 풍부한 노천탄광이 많았다. 상대적으로 적은 노력으로 쉽게 석탄 채굴이 가능한 환경은 산업혁명에 있어 강력한 추진체가 되었다. 게다가 섬나라라는 이점 때문에 어디에서나 바다에 접근하기가 쉬웠다는 점도 크다.

좀 더 이것저것 더 붙인다면,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정확히는 옛날에는 석탄은 목재보다 연료로써의 가치가 떨어졌다. 불완전연소 때문에 가스도 많이 생기고, 먼지가 묻고, 제련에 사용할 경우 황이 섞여 들어가 질이 떨어지는 철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한참 동안 석탄은 나무를 살 수 없는 빈민층에서나 쓰던 것이었는데, 이전부터 산업이 발달하고, 배를 만들어내야 했던 영국이 국내의 목재 자원이 고갈되는 바람에 별 수 없이 석탄을 이용하게 된 것.

그런데 석탄은 채굴이 매우 어렵고, 영국은 지리적 특성상 갱도에 물이 고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물을 퍼내기 위해 증기기관이 발명된 것이다. 요컨데 석탄의 채굴이 어렵기 때문에 증기기관이 발명된 것.[14]

하지만 고질적인 석탄의 문제점인 저질성은 화학의 발전으로 코크스를 만듦으로써 해결되어, 목탄의 부족으로 인해 위기를 맞고 있던 제철 등 타 산업에게 돌파구를 만들어주게 된다.

3. 전개

산업이 급성장해 면화 생산량이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영국은 1830년에 이르기까지 아메리카 대륙에 대규모 면화 플랜테이션을 조성하였다. 이곳의 노동자는 아프리카 노예였다.

거기에 때마침 아메리카에서 기존대비 50배의 효율을 지닌 조면기가 발명되어 퍼진터라 아메리카의 면화 플랜테이션에서는 대량의 면화를 값싸게구할 수 있게되었다.

이로서 아프리카의 노예 -> 영국이 수입 -> 아메리카 면화 플랜트에 노예 공급 -> 아메리카 면화 플랜트들이 노예들이 생산한 값싼 면화를 영국으로 공급 -> 생산된 면직물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수출하는 삼각무역이 완성되었다. [15]

특히, 인도에 대한 수출이 엄청나게 활발해 20년만에 수출 규모는 10배 증가했다. 이로 인해 인도의 면직물 산업은 붕괴되기에 이른다.

면직 산업에 이어 철강 산업이 활기를 띄면서 워털루 전투 이후, 영국 주도의 철도 건설이 시작되어 영국의 호황은 절정에 이른다.

3.1. 노동 계급 탄생

중세 봉건적 농업 시스템이 붕괴하면서, 농지들이 대자본가들에 의해 통합되어 가기 시작했다. 여타 국가들은 상속시에 토지를 자손의 수에 맞게 분배해 주곤 했는데, 이 과정이 반복되면 나중에는 나눌 땅조차 남지 않고 몰락하게 되는 패턴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장자 상속제를 이어오고 있었으므로 대규모 농지를 가진 농장주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는 점이 다른 국가와는 달랐다. 농업의 산업화 과정에서 자급자족적 생활을 하던 많은 농민들이 농지를 잃거나 그만두고 도시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때마침 활성화하던 면직 산업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농민 대부분은 공장에 취직하였다. 각자 따로 농사를 짓던 이들이 노동자라는 통합된 시스템으로 모이게 되어, 노동자 계급(프롤레타리아)이 탄생했다.

3.1.1. 노동자들의 고통

아담 스미스의 낙관론과는 달리, 이 초기 자본주의는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문제시 되었던 것은 가혹한 노동 환경이다. 위에서 서술되었듯 기계가 노동력을 대체하고 쫓겨난 농민들이 급격하게 도시로 모이면서 노동자의 임금은 급락하였다.

노동자들의 참정권이 없어 관련법 제정이 미비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였기에 많은 노동자들이 대량의 노역에 시달렸다. 특히 어린이들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는데, 4살부터(한국식으로 쳐도 5~6살을 넘지 않는다.) 면직 산업에 동원되면서 학대를 받아가며 일하다 죽곤 했다. 이를 규제하는 강제성을 지닌 법률은 1833년에 제정되어,[16][17] 가혹한 아동 노동은 거진 3~40년에 걸쳐 지속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시간이 꽤 지난 후에도 개발 도상국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미성년자 노동자들이 하루 10시간 이상씩 탄광이나 공장 기계를 돌리면서 하루에 1시간도 쉬지 못 하고, 건강을 해쳐가면서 일을 하다가 다치거나 쓰러지면 본인 과실로 취급되어 그나마도 돈도 못 받는 노예노동이 유럽 최강국 중 하나인 영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심지어는 탄광에서 주 6일 동안 매일 19시간을 일해야 하는 소년들마저 있었다.

참고로 이런 가혹한 생산 환경에도 불구하고 1760~1830년대 1인당 GDP는 이후에 비해 성장률이 상당히 느렸기에[18] 경제성장이 이후에 비해 상당히 미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경제학에 따르면 임금은 대체로 노동의 한계생산만큼[19] 증가하기 마련인데, 이 노동의 한계생산은 노동에 들어가는 자본이 많을수록 올라간다. 1760~1830년대 영국의 자본투자는 나폴레옹 전쟁이나 주식투자 규제 등으로 상당히 미진한 상태였고 따라서 근로자들의 임금이 별로 높지는 않았다고 한다. 즉 임금이 적기 때문에 저런 중노동을 통해서만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었다는 이야기.

4. 결과 및 의의

위 항목을 잘 읽어봤다면, 산업혁명은 어떤 기계나 기술의 발명으로 뿅하고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수 백년 간 차곡차곡 쌓여온 기술과 사회적 조건이 모여 어떤 임계점을 기점으로 경제/사회적으로 급속도의 변화가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일단 맬서스 트랩이 끝장났다.[20] 산업 혁명 이전 인류는 그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비해 식량 등의 생산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므로 물자의 생산량이 늘어나고 삶의 질이 개선되면 인구가 곧바로 늘어나면서 다시 삶의 질이 저하되는 모습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후 인류는 인구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물자의 생산력도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전체적인 삶의 질을 높일 기회를 얻었다. 적어도 기회는.

전 세계에 자본주의의 열풍을 불러 일으킨 이 사건은 귀족과 평민, 지주와 농민이 아닌 산업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으로의 계급 전환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영국을 본떠 농업 -> 산업화 -> 금융 중심의 경제라는 테크 트리를 타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과학의 급속한 발달이 시작되었다. 한편 노동 계급의 대두로 인해 노동 계급의 권리 신장을 위한 투쟁 및 사회주의 운동이 발발하였고, 칼 마르크스를 필두로 해 공산주의가 생겨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본격적인 제국주의 시대의 개막이었다. 19세기 산업혁명이 서양이 비서양를 압도하는 경제력을 가지게 됐다는 것은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동의하는 사안이다. 산업혁명을 거쳐 기계화된 문물을 갖춘 서양의 군대는 비문명화된 주민의 군대에 비해 그야말로 밸런스 붕괴 수준이었다. 유럽열강은 대항해시대부터 다수의 식민지를 갖추고 세력을 키워오고 있었지만 종합적으로 다른 문명권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분열된 유럽에 비해 아랍이나 중국은 통일된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하나의 국가로서는 훨씬 강대했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로 훨씬 강력해진 유럽은 기원전부터 유지되어 오던 유라시아의 균형을 급격히 해체시켜 유럽은 아시아의 오스만 제국, 무굴 제국, 으로 대표되는 이슬람세력, 인도세력, 중국세력을 연달아 제압하여 세계의 중핵으로 떠올라 벨 에포크 시대를 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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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순무 재배를 너무 열심히 권장한 나머지 '순무 타운센드'라는 별명이 생길 지경이었다고 한다.
  • [2] 참고로 이걸 발명한 존 케이는 방직공들이 자기들 일자리를 없애버렸다고 습격,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신세가 돼버리고 만다(....). 하지만 후대에 재평가되어 현재 그의 고향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물이 세워져있다.
  • [3] 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영어 이름은 Spinning Jenny(!)
  • [4] 이 사람도 방적공들에게 일자리 없어졌다고 공장이 습격당했다.(...)
  • [5] cotton gin
  • [6] 그러나 정작 휘트니는 특허를 출원해놓고 소송에 휘말려 이익을 올리지 못하다가, 1798년 소총으로 업종을 전환, 호환식 생산법으로 대량 생산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만악의 근원
  • [7] 원래 수학기구를 만들던 사람.
  • [8] 그래서인지 두 도시는 100년보다 조금 더 지난 20세기 후에선 같이 망했다(...) 축구 빼고 하지만 아직도 영국에서 손꼽히는 대도시.
  • [9] = 선철. 탄소 함량이 2.5~4% 인 철.
  • [10] 탄소 함량이 0.01% 이하인 철. 유연성이 높아 무르고 잘 부서지 않는다.
  • [11] 라틴 아메리카 및 인도 등의 영국 식민지.
  • [12] yeomanry
  • [13] 이전버전에서 프랑스가 아직도 봉건제의 영향때문에 농업의 기술과 자본이 낙후되어있다고 써있었는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쓴것인지 모르겠다. 프랑스는 예나 지금이나 유럽 제1의 농업대국이다.
  • [14] 그런데 이렇게 초기에 만들어진 증기기관은 효율이 많이 떨어졌다. 증기기관의 사용으로 늘어난 석탄 채굴량과 증기기관이 소모하는 석탄의 양이 거의 동일했다고 한다. 흠좀무. 결국 보다 못한 광산 소유주인 제임스 와트가 효율이 좋은 증기기관을 발명해버리고 만 것.
  • [15] 우연인지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 역시 노예무역에서 나온 자본에 지원을 받았다.
  • [16] 그나마도 최저 연령이 9세로 늘어난 정도지만 점점 나아지기는 했다.
  • [17] 영국의 뒤를 이어 유럽 각국에서 아동노동을 규제하는 법률들이 성립되었는데 개중에서 독일의 프로이센은 그 입안과정이 특이했다. 프로이센의 아동노동금지법은 프로이센 육군 참모총장(!)이 국왕에게 건의해서 제정된 것이다. 참모총장 왈 "폐하 제발 아동노동을 금지해주십시오. 애들이 어렸을때부터 하도 부려먹히다 보니 자라질 못해 징집을 해도 애들 몸에 맞는 군복도 없고 총도 못 가눠서 픽픽 쓰러집니다!"(...)
  • [18] 30년 이전에는 1인당 성장률은 고작 0.3%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30년 이후 1차대전까지는 1%씩 성장했고, 2차대전 후에는 2%씩 성장했다.
  • [19] 물론 자본가의 지대추구나 효율임금, 노동시장구조 등에 따른 여러 변수가 있긴 하다.
  • [20] 사실 맬서스 트랩 항목에 서술된대로 맬서스가 처음부터 전제조건을 잘못 잡아두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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