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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간섭

last modified: 2014-10-22 01:46:59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관련 항목


1. 개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요동(랴오둥) 반도를 할양받게 됐는데, 러시아 제국니콜라이 2세는 일본의 세력이 더 커지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 제국빌헬름 2세프랑스 제3공화국을 끌어들여 일본에 외교적 압력을 행사한 사건. 여담으로 영국도 끌어들이려 했으나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이니 뭐니해서 한창 대립하던 영국은 당연히 거절하였다.[1]

막 청일전쟁을 끝낸 뒤인데다 강국인 러시아의 압력에 부담을 가진 일본은 어쩔 수 없이 데꿀멍 랴오둥 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반환하고 배상금 액수를 증액하는 선에서 상황을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논의가 분분했는데 요동을 중국에 돌려주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냥 돌려주면 영 모양새가 안서니 그냥 반납하는 형식보단 회담을 벌이는 형식으로 돌려주자는 주장이 우세했다. 하지만 외상 무쓰 무네미쓰가 "얌전히 돌려주지 않았다가 대만이나 다른 전리품까지 잃으면 어떡하려고? 조용히 요동만 내주는 선에서 끝내자."라고 현실적인 결론을 내리면서 요동은 청에 반환된다. 하지만 추가적인 배상금 3천만냥을 더 뜯어냈다.역시 일본, 어떠한 상황에서도 손해는 안본다하지만 일제의 이런 조치에 일본 국민, 일본군의 여론은 러시아에 대한 불안감과 더불어 반감과 분노로 치달았고, 특히 1898년에 러시아가 일본이 반환한 뤼순(여순)-다롄(다련)을 점령하여 군항으로 활용하자 이러한 분노와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런 일본의 여론은 결국 러일전쟁의 계기로 귀착된다.

가끔 민족주의 성향과 왕실빠심이 강한 이들은 이를 곧 명성황후고종의 외교정책의 승리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앞뒤관계도 모르는 헛소리다. 정확히 하자면 삼국간섭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러시아에 주목하게 된 계기였고 그 전에 조선은 러시아 쪽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삼국간섭 이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불러서 자주 접견하며 밀담을 나누었고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대놓고 괄시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인아거일 정책에 매우 경계하게 되었고 친일파의 대명사로 알려진 박영효 역모사건(?)이 터져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하고 일본이 후원하던 훈련대가 해산되자 자기네가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싸워줬다고 철썩같이 믿던 일본 대중도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원한을 품게된다. 그리고 일본은 러시아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을미사변이 일으킨다. 그리고 일본의 막가는 행동에 멘붕+완전히 친일내각의 허수아비가 된 고종이 미국 공사관으로 달아나려다 실패한 생문 사건에 이어 아관파천을 통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하지만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조선에서 손을 떼고 말았고 고종은 독일, 영국, 미국 등을 대신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실효도 없었고, 심지어 삼국간섭과 같은 사례가 다시 일어났다고 해도 위기를 반전할 결정적 계기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태에서 있었던 이 삼국들의 입지다. 제1차 세계대전의 독일 vs 영국-프랑스-러시아 라인을 생각하면 이 라인은 비교적 변방인 아시아의 사건이라도 좀 신기한 사건임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러시아 제국은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영국의 적극적인 견제를 받고 있었고, 프랑스 역시 영국의 식민지 팽창에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2]

결과적으로 삼국간섭은 20세기 초 이후의 독일의 팽창주의가 부상하기 직전, 잘 나가는 영국(과 그에 편승한 일본)이 부담스러웠던 주변국들의 반발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일본이 독일에 상당기간 우호적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아군도 없다는 말은 실로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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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영국은 당연히 러시아의 세력이 훨씬 위협적이기 때문에 동양에서 그나마 제일강대국인 일본의 세력이 커지는데에 긍정적이었다. 게다가 1902년에 체결된 영일동맹또한 러시아의 남하를 제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 [2]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는 만주 지역의 적당한 이권에 만족하고 1907년부터 영국과의 동맹인 삼국협상에 뛰어들었고, 프랑스는 이미 대독문제에서는 영국과 항상 한편이었다. 반면 독일은 기존의 삼국 동맹(이탈리아도 포함되나, 사실상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동맹)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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