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삼국사기

last modified: 2015-04-14 01:15:44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편중된 사서?
3. 여타 문제점
4. 삼국사기의 구성
4.1.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
4.2. 본기
4.3. 연표
4.4. 잡지
4.5. 열전
4.6. 편찬자
4.7. 발문
5. 번역본


1. 개요

三國史記. 고려 인종의 명에 의하여 김부식이 편찬한 역사서로, 삼국시대통일신라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1] 동아시아의 고전적 역사 서술 방식인 기전체 형식을 따르고 있다. 본기 28권(신라 12, 고구려 10, 백제 6), 연표 3권, 지 9권, 열전 10권. 총 50권으로 되어 있다.

신라삼국통일을 이룬 이후부터 고려 초까지의 약 260여년의 역사도 다루었는데, 아무래도 당시 고려인들의 시각으로 봤을 때에는 고려가 후백제를 무찌르고 후삼국시대를 통일한 것을 진정한 의미의 통일로 여겼던 것에서 기인한 것 같다.

전거가 확인되는 인용 문헌은 다음과 같다.

  • 국내 문헌
    • 고기(古記)
    • 《신라고사(新羅古史)》
    • 구삼국사(舊三國史)》[2]
    • 《삼한고기(三韓古記)》
    •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3]
    • 화랑세기(花郞世記)[4]
    • 《고승전(高僧傳)》
    • 《계림잡전(鷄林雜傳)》[5]
    •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6]
  • 중국 문헌
    • 삼국지(三國志)
    • 《후한서(後漢書)》
    • 《위서(魏書)》
    • 《진서(晉書)》
    • 《송서(宋書)》
    • 《남북사(南北史)》
    • 《구당서(舊唐書)》
    • 《신당서(新唐書)》
    • 자치통감(資治通鑑)》
    • 《책부원귀(冊府元龜)》[7]

화랑세기 필사본을 위작으로 판단할 경우 현존하는 국내 사료 중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며,《삼국유사(三國遺事)》와 더불어 삼국시대 연구를 위해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필수 사료다.

《삼국사기》의 주요한 편찬자인 김부식은 이자겸이 금에 사대했을 때 찬동했던 인물인 동시에, 고구려 계승 세력인 서경파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과정에서 제거한 신라 계승주의를 주도한 동경파[8]의 대표자라는 점이 지적받으면서, 이전에는 고려의 입장과 동시에 김부식이 포함된 당시 문벌귀족들의 입장이 강하게 표현되어 고구려 계승 의식이 쇠퇴한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이는 일정 부분 타당한 사실이며, 이 이후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했을 가능성이 높은 《구삼국사》가 유실[9]된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러한 배경 때문에 사대주의적인 역사서가 되었다는 비판까지는 수용하기 어렵다는 평이 역사학계에서 자주 대두되어 온 바 있는데, 자세한 것은 아래 별도의 문단에서 서술한다.

조선왕조실록》과 마찬가지로 《삼국사기》도 인터넷에서 무료로 검색, 열람이 가능하다. 불편한 원문에 가까운 것을 보려면 한국사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할 것을 권한다. 유료로 제공되는 KRPia의 것이 검색 기능도 좋고 이병도의 주석도 달려있어 우월하다. 이곳 네이버에서도 무료 열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2. 편중된 사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본서의 편향성을 문제삼곤 한다. 그 이유는 이 책이 모화 사상과 신라 정통주의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어서 현대 한국인의 민족주의에 거슬리는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를 대함에 있어 사람들이 곧잘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고려 당대의 입장이 아닌 고대사 연구자 혹은 현대 민족주의의 관점으로 《삼국사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다른 사료들이 세월이 지나며 소실되었기에 고대사 연구의 기본이 된 것이지 본래 고대사 연구서로 편찬된 것이 아니다.

단순한 고구려 계승이 아닌 삼한 계승의식으로 통일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이를 확고히 하고 백성들을 하나의 통치 질서 아래 통합한다는 정치적 목적 아래 나온 사서이다. '열전'에 궁예견훤이 포함된 것에 알 수 있듯이 삼국은 후삼국 시대까지 아우르고 있으며 진정한 통일은 신라가 아닌 고려의 통일이다. 다시 말해 《삼국사기》는 신라가 아니라 삼한을 계승한 고려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고려 중심 사서이다. 고려의 정통을 논하며 그 전에 삼한을 1차적으로 통합한 신라를 강조했던 것이지, 고구려를 배제한 신라 계승의식 때문에 신라를 띄워준 건 아니란 것이다.[10]

단, 이 부분에 있어서는 비판의 여지도 있다. 삼국사기는 고려왕조에 의해서 이전 왕조의 정사로 작성 되었기 때문이다.[11] 정사라는 의미를 고려하면, 삼국사기의 의미는 당대에도 엄청나게 크다. 고대사 연구서로 편찬된 것은 아니지만, 고려라는 국가가 삼국시대의 역사는 이거다라고 공인하는 것이 이 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국사기를 제외한 구삼국사 등이 소실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책이 국가에 의해서 공인된 정사이기 때문. 삼국유사도 삼국사기에 비하면 그 책임이 다른데, 이는 정사와 그외의 사서인 야사의 차이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쓰여진 《고려사》는 제후국의 역사를 의미하는 '세가'라는 이름으로 고려 왕조사를 구성하고 있는 것에 반해서, 삼국의 왕조사를 기술하는 부분이 황제의 역사를 의미하는 '본기'로 되어 있는 것이나, 또한 《고기》라는 한반도 계통의 기록과 중국 사서를 함께 자료로 쓰면서 내용에서 차이가 나는 대목에선 《고기》의 기술을 우선하는 태도를 보면 김부식이 사대주의적으로 《삼국사기》를 썼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단순한 의견이다.

고려는 광종 이후 외왕내제를 완전히 정착시켰기에[12] 외교관계에선 제후국을 자처했으나 내부적으로는 황제국과 차이가 없었다. 그런 시대에 성립된 《삼국사기》이니 북방 영토 문제로 명과 한바탕 신경전을 벌이던 시절부터 쓰여진 《고려사》나[13] 모화사상이 깊이 들어간 조선 후기 사서와는 입장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신라의 비중이 높다는 것을 문제로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본기'의 분량으로는 거의 비슷하다곤 해도, '열전'의 대부분은 신라 인물들이 차지하고 있는 등, 신라에 비해 고구려, 백제에 대한 서술이 상대적으로 빈약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편향 운운하기 이전에 신라가 통일전쟁의 승리자로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한 주장이다. 게다가 패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사료가 수백년도 더 지난 김부식 시대까지 남아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삼국통일 이전의 분량만 따지고 보면 고구려가 가장 많다.

국가의 성립이 고구려에 비해 늦은 것으로 생각되는 신라의 시초를 제일 앞에 놓거나 고구려, 백제의 멸망에 대해서 신라에 비해 훨씬 박한 평(특히 백제에 대해서)을 한 것도 편향성의 예로서 제시되는데, 김부식과 편찬자들이 유학자라는걸 생각하고 내용을 보면 그냥 유학자들이 국가의 멸망을 평할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서술 방식[14]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서에는 역사가의 주관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할 뿐더러 현대 역사학자 중에 그런 평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열전'의 불균등함은 좀 심하긴 한데, '열전'에 수록된 인물 69명 중에 고구려, 백제인은 합쳐서 11명에 불과하고 그것도 본서의 '본기'나 다른 문헌에서 전재하지 않은 독자적인 전기를 가진 사람은 단 둘, 온달과 도미뿐이다. 또 '열권' 10권 중에 김유신 열전이 3권을 차지하고 있기까지 하다. 이는 《삼국사기》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김유신 분량이 과도하다는 문제를 제외한다면, 일반적으로 '열전'에 수록되는 영웅담이 야사로서의 성격이 강한 탓에 '본기'에 수록되는 각국의 연대기에 비해 소실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 다르게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또 (아마도 환빠들 중심으로) 고조선 등등 삼국시대 이전 고대국가의 기술이 없다는 걸로도 까이는 모양인데, 이미 김부식은 머릿말에 "이거 삼국사기거든요?[15] 그리고 그 시절 기록은 빼먹고 싶어서 뺀 게 아니라 자료가 없어서 어쩔 수 없었거든요." 라고 반박해놨다.

3. 여타 문제점

  • 태조왕을 비롯한 삼국 초기 왕들의 재위 기간이 지나치게 길게 나타나는 문제등이 있어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설'이 비중있게 제기되기도 했다. 고구려, 신라, 백제 할 것 없이 《삼국사기》를 펼쳐보고 왕들의 재위 기간, 출생 연도를 하나하나 따져보면 왕들의 나이가 실로 예술이다. 석탈해와 같이 아예 태어나기 전부터 활동한 사람도 있다. 편찬자들의 실수도 있겠지만 그 전에 김부식이 인용한 사료들부터 문제가 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자료들 가지고 책을 쓰려니 부식이 본인도 멘붕이 매우 컸을듯

  • 이러한 불신론에 의거, 《삼국지》 위지 '동이전'[16]에서 70~80개의 소국이 병립된 것으로 묘사되는 2~3세기에 백제와 신라가 각각 한반도 서남부 지역과 동남부 지역을 석권한 집권 국가임을 드러내는 초기 기록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사학계 내부에 팽배했다. 이러한 기류는 풍납토성 발굴을 계기로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이후 신라의 나정/신궁 유적 발굴로 인해 어느 정도 학설이 수정되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해체 국면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17] 이를테면 최근의 발굴 조사 결과는 영산강 유역에 5세기까지 독자적인 정치 세력이 존립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 시조인 온조왕대 이미 마한을 아울렀다는 《삼국사기》 백제 본기와 배치되는 모습을 보인다. 사실 삼국의 초기 역사에 대한 기술은 건국자에 대한 미화 등을 목적으로 후대의 윤색이 들어갈 여지가 크기 때문에 신뢰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

  • 《삼국사기》의 '연개소문 열전'은 《당서》의 연개소문 관련 대목을 그대로 복사+붙여넣기를 한 덕분에 고조의 이름인 이연(李)을 피휘하느라 천개소문(蓋蘇文)이라고 적은 것을 그대로 가져와 버리는 실수가 있다. 덕분에 연개소문이 천개소문으로 통용되기도 하는 비극이 있었다. 본 열전이 기본적으로 적대국이 난긴 기록인 까닭에 연개소문의 부정적인 모습들을 실상보다 훨씬 과장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은 더 큰 문제가 된다. 거기다가 《삼국사기》와 더불어 양대 사서인 《삼국유사》는 지나치게 불교 중심적이어서 불교 세력을 억압하고 도교를 장려한 연개소문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이래저래 연개소문이나 그와 관련된 인물들의 기록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 있다.
  • 정치적인 이유에서 직필하지 않고 어물쩍 넘긴 부분이 있는데 궁예는 901년 고려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혹은 사실상의 국가 상태에서 왕국을 선포하였)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나 궁예 열전에서는 901년 왕을 칭한 사실만 기록하였다.[18] 이걸 가지고 병크라고 까는 의견도 있는데 다분히 현대적인 시각이다. 왕건의 정통성과 당시 고려인들의 역사관[19]을 생각하면 그런 서술이 당연했다. 위에 적었듯이 삼국사기는 애시당초 고대사 고증하려고 만들어진게 아니다. 편찬 목적이 아예 다른 삼국유사에는 연표에 궁예가 고려라는 국호로 901년 건국한 것이 명확히 기재되어 있다.

4. 삼국사기의 구성

4.1.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

  • 《삼국사기》를 올리는(進) 표문(表)으로, 김부식이 썼다. 자세한 내용은 진삼국사기표 참조.

4.3. 연표

  • 연표
    • 권29 연표 상: 전한 선제 오봉 원년(기원전 57년)~서진 세조 무황제 태시 10년(서기 274년)
    • 권30 연표 중: 서진 세조 무황제 함녕 원년(275년)~양황제 대업 4년(608년)
    • 권31 연표 하: 수 양황제 대업 5년(609년)~후당 말제 청태 3년(936년)

4.4. 잡지

  • 잡지
    • 권32 제사, 음악
    • 권33 색복(옷), 거기(車騎: 수레와 마구), 기용(器用: 그릇), 옥사(屋舍: 가옥)
    • 권34·35·36 지리 1,2,3 신라
    • 권37 지리 고구려, 백제
    • 권38·39·40 직관 상,중,하 : 관직에 대한 기록이다.

4.5. 열전

  • 열전
    • 권41·42·43 김유신 상, 중, 하: 김유신 뿐만 아니라 김유신 후손들의 행적도 수록되어 있다.
    • 권44 을지문덕, 거칠부, 거도, 이사부, 김인문(부록 김양도), 김양(부록 김흔), 흑치상지, 장보고·정연, 사다함
    • 권45 을파소, 김후직, 녹진, 밀우·유유, 명림답부, 석우로, 박제상, 귀산, 온달
    • 권46 강수, 최치원, 설총, 최승우, 최언위, 김대문: 이 권의 말미에는 박인범·원걸·거인·김운경·김수훈 등도 문장으로 유명했으나 자료가 없어서 열전을 만들지 못했다고 덧붙여져 있다. 사실 이 권에 실린 인물들은 모두 문장과 유학으로 유명한 인물들이다.
    • 권47 해론, 소나, 취도, 눌최, 설계두, 김영윤, 관창, 김흠운, 열기(부록 구근), 비령자, 죽죽, 필부, 계백 : 여기 수록된 인물들은 열기와 구근을 제외하고 전장에서 전사한 무장들이다.
    • 권48 향덕, 성각, 실혜, 물계자, 백결선생, 검군, 김생(부록 요극일), 솔거, 효녀 지은, 설씨녀, 도미
    • 권49 창조리, 개소문 : 둘 다 고구려 재상이지만 전 왕을 시해하고 다른 왕을 옹립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개소문 열전에는 그의 의 행적도 실려 있다.
    • 권50 궁예, 견훤

4.6. 편찬자

  • 편수(編修)
  • 참고(叅考)
    • 김영온(金永溫)
    • 최우보(崔祐甫)
    • 이황중(李黃中)
    • 박동계(朴東桂)
    • 서안정(徐安貞)
    • 허홍재(許洪材)
    • 이온문(李溫文)
    • 최산보(崔山甫)

  • 그외
    • 김충효(金忠孝)
    • 정습명(鄭襲明)
    • 김거두(金居斗)
    • 최득경(崔得冏)
    • 민개(閔開)

4.7. 발문

사기와는 다르게, 우리나라는 제후를 봉하지 않았으므로, 제후들의 역사를 다루는 세가가 없다.

5. 번역본

삼국유사와 더불어 한국고대사 연구의 필수 자료답게 여러 학자들의 손을 거쳐 번역된 바 있으며, 번역본의 출판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위의 링크에도 있듯이 이미 네이트 한국학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등 여러 사이트에서 무료로 열람이 가능하므로 이를 참고해도 좋다. 누구든지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 최강의 장점.

서적으로 출판된 것 중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1997년에 간행한 5권의 <역주 삼국사기>가 가장 좋은 평을 받고 있는데, 노중국 등을 비롯한 한국 고대사학계의 권위자들이 참여하여 상당한 퀄리티를 자랑한다. 2012년에는 개정판을 내놓았는데 이 역시 좋은 평을 받았다. 단점은 5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다가 한권의 가격이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1,2만원에 육박하는지라 전부 소장하려면 돈이 꽤 많이 깨진다는 것이다(...).

참고로 '상고사학회'[22]라는 단체에서 펴낸 삼국사기는 대륙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
  • [1] 그 외 삼국사기에서 가야부여, 발해 등은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 [2] 《삼국사기》와 대비시키기 위해 《구삼국사》라 칭한 것이다. 본래 이름은 그냥 《삼국사》였지도 모른다.
  • [3] 최치원이 쓴 책이며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에 존재하는 책은 위서다.
  • [4] 다만 현대에 발견되어 남당 박창화의 위작설이 유력한 '화랑세기 필사본'은 마지막에 '記'가 아닌 '紀'자를 쓴다. 어차피 별 차이는 없지만.
  • [5] 이상 세 문헌은 김대문이 쓴 것들이다. 편찬자들이 서명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학계에서는 도미 설화 등을 같은 저자의 《한산기(漢山記)》 내용을 일부 인용한 것으로 본다. 더하여, 국내 계통 사료로 고구려의 《신집(新集)》도 인용하지 않았을까 보는 이들도 있다.
  • [6]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쓴 책이라고 하며 법흥왕 본기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
  • [7] 참고로 이 책의 구입 경로는 고려가 얼마나 동아시아에서 힘이 있었나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꼽힌다. 고려 선종항목 참조.
  • [8] 정확히는 동경에서 개경으로 입사한 세력으로 오히려 규정하자면 개경파에 가깝다. 3경 체제라고는 하지만, 고대 국가에서 수도의 위상은 엄청난 것이었기에 지방 유력자들은 끊임없이 중앙으로 진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5소경을 세웠다느니 해도 결국에는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판치는 신라 말의 상황이나 무신정변 이후 서경, 동경을 비롯한 각지에서 삼국을 계승한다는 분립적인 상황은 수도와 지방의 위상 차이와 별개의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러한 분열적인 의식은 대체적으로 몽골 침입기에서 조선으로 들어가는 시기 해소된 것으로 본다.
  • [9] 이규보의 '동명왕편' 서문을 보면 이규보는 동명왕의 설화를 우연히 얻은 《구삼국사》를 통해 알게 되었으며 그때까지 이 책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동명왕의 사적이 더 자세하게 남아있다는데서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숙종 때 편찬된 《대각국사문집》에서 《구삼국사》로 추정되는 《해동삼국사》라는 책을 인용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 초까진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는 새로 성립된 《삼국사기》와 양립할 수 없어 유실로 이어진 것이라 추측된다.
  • [10] 먼저 편찬된 그리고 당연히 고구려 중심 역사인식을 가졌을 구 삼국사는 당연히 삼국사기와는 양립이 불가능했고 자연히 소실되었다. 이규보의 기록을 보면 그래도 일부는 남아 고려 중기까지 전해졌던 모양.
  • [11] 고려왕의 명령이나 그 내용도 그렇고, 김부식이 정사체인 기전체로 이 책을 서술한 것도 그렇다.
  • [12] 그렇다고 광종이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자주적인 정책을 편건 아니다. 오히려 중국문물을 굉장히 열심히 도입했고 독자 연호는 중국 왕조교체기때나 아주 잠깐 사용했다. 물론 이건 비난받을 일이 전혀 아니다. 학자들은 중국의 권위를 십분 활용하고 선진 문물을 들여와 국가 체제를 굳혀나간 정치력을 높이 사고있다.
  • [13] 고려사 편찬과 수정의 역사는 매우 길다. 개국 직후 쓰기 시작해서 문종때 끝을 보았다.
  • [14] 무도하고 방탕한 왕, 내쫒기는 충신같은 전형적인 망국의 클리셰들
  • [15] 그런데 진삼국사표를 봐도, 내용을 삼국사로 한정한 것은 김부식일 가능성이 높다. 국왕은 과거의 역사를 쓰라고 했지, 삼국사만 쓰라고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김부식이 자신의 저작을 삼국사로 한정한 이유 역시, 삼국 이전의 역사는 신빙성 있는 자료를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 [16] 《삼국사기》가 12세기 기록인데 반해 《삼국지》를 편찬한 진수는 3세기의 인물. 거의 천 년이 앞선다. 게다가 삼국지는 위진 시대에 한국과 교류한 중국 국가들의 분명한 당대 기록이다.
  • [17] 일반인들의 이러한 흑백론적 사고방식은 역사 이해에 큰 걸림돌이 된다. 역사는 모 아니면 도가 아니다.
  • [18] 왕씨 고려의 정통성이 훼손되니까.
  • [19]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송나라에서 나온 책이다.) 고려인들은 고려는 주몽이 세우고 내려오다 중간에 왕씨로 바뀌었다는 역사 인식을 갖고 있었다. 또 몽골 침략에서 쿠빌라이 칸마저 만주벌판을 제압하던 그 고구려가 자기한테 친히 항복했다고 기뻐하고 있다.
  • [20]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조회해보면 현재 남아있는 것은 조선시대에 필사한 것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부식이 살아있던 시기에는 혜종의 이름인 무(武)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호(虎)라고 썼을 것이다.
  • [21] 문무왕과 마찬가지로 당대에는 호왕이라고 기록했다.
  • [22] 한국연구재단에 등록된 학회 가운데 학회명에 '상고사'가 들어가는 학회는 '대한상고사학회'와 '한국상고사학회'가 있으며, '상고사학회'는 없다. 따라서 이 '상고사학회'는 앞의 두 학회와 다른 유사 학회일 가능성이 높다.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4-14 01:15:44
Processing time 0.1706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