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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중국)

last modified: 2015-03-02 15:22:51 by Contributors


三國時代
220~280

Contents

1. 개요
2. 역사학의 비중
3. 문화
4. 사회
5. 경제
6. 군사
7. 관련 항목

1. 개요

중국의 통일 왕조이던 (漢)이 망하고, (晉)이 일시적으로 중국을 재통일하기까지 60년 동안의 분열시대. 다만 이보다 앞서 184년 황건적의 난십상시의 난으로 격발된 한나라 말기의 군벌 난립 시대까지 포함하기도 한다. 이 시대가 이렇게 혼란해진 것은 왕망 이래 가속화된 유교의 형식화로 인한 실질적 윤리의 붕괴와 소빙기 도래에 따른 기후적 요건의 악화가 꼽힌다.

삼국시대의 3국은 다음의 세 왕조를 가리킨다.

중화 오천년의 신비 역사 중에서도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때문에 가장 잘 알려진 시대. 이 때문에 조조·유비·손권에 대응되는 위·촉·오 삼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위나라의 첫 황제는 조조가 아닌 그의 아들 조비고, 유비가 세운 나라의 정식 국호는 촉이 아니라 한이다. 유비가 한나라의 후계자를 표방했기 때문. 당장 조선시대의 적벽가만 해도 첫머리가 "한나라 말엽 위한오 삼국시절"로 시작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이 삼국을 통일한 국가는 조비의 위나라도, 유비의 한나라도, 손권의 오나라도 아닌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진나라. 죽 쒀서 개 준 꼴 다만 진나라의 경우 위나라에서 브레인만 바뀐 것이고 나머진 거의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위나라의 역량으로 삼국을 통일한 셈이 된다.[1]


인구 44,900,000명 59,200개
인구 13,640,000명 19,200개
인구 5,520,000명 8,800개

후한 말의 난세를 거치면서 사람도 많이 죽고, 유랑민도 대폭 증가하면서 엄청난 인구 감소가 이루어졌다. 삼국지연의만 보면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이 떼로 죽어나간 막장 시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도 거의 5천만에 육박하던 후한 시절의 인구가 고작 수십 년 만에 777만으로 쪼그라들었으니. 흠좀무[2] 실제로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을만한 인구 손실은 없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으로 서기 2세기의 중국 인구는 본토만 5~6천만명을 육박했고 3세기 삼국시대에도 4~5천만명으로 추정된다. 고대에는 폭정, 기아, 전염병, 전쟁이 거의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계속 증가하려는 인구가 그나마 계속 죽어줘서(...) 수백년간 인구가 큰 증가없이 정체가 지속된 것이다. 다른 시대에도 널린 것을 삼국시대에만 갑자기 일어났다고 보기 힘든 게 다른 시대에도(전한 말, 5호16국시대 등등) 사람들이 죽어나갔다는 이야기는 상투적으로 등장하며 그만큼 시대가 혼란스러웠다는 것을 강조한 기록일 뿐이다. 국가 자체는 그나마 온전한 듯이 보여도 폭정이나 심지어 자연 조건에 따라서도 인구 변동은 있어왔다. 뭐 진정한 중국사의 헬게이트인 송원교체기에 비하면 그저 그렇지만. 1200년 중국 인구 1억 1500만명에서 1300~1400년 7500만명~8500만명으로 급락하고 1550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따라잡는다. 이 시대에는 인구가 감소할 조건은 모두 갖추어(...) 중국의 경쟁력을 약화시킨 시기이기도 하다. [3]

가끔 실제 역사정사 삼국지와 엄연히 소설삼국지연의를 구분 못 하는 사람들은 양판소에 맞먹는 판타지가 펼쳐지던 시대로 착각하기도 한다. 역사학계에선 관심 없는 분야다 보니 꽤 배웠다는 사람들도 연의와 정사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2. 역사학의 비중

사실 대중적인 인기에 비해서 역사학적으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시기이다. 일단 이 분열 시기가 그리 길지 않고, 이 시기가 후대에 남긴 영향도 구품중정제 등 몇가지를 언급하고 넘어가고 끝낼 정도로 매우 제한적이다. 오호십육국 시대가 재평가를 받기 시작한 이후에는 화이잡거(華夷雜居)의 시작점으로서 다뤄지거나 후한말부터 축적되어 서진대에 터진 각종 사회모순들을 설명하면서 언급되는 정도이다. 인터넷에서 하듯이 이 시대와 인물 하나하나에 주목해서 다루진 않는다.

도교의 역사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주목을 받는 시대이기도 하다. 태평도오두미도가 나타나면서, 기존의 도가철학이 도교라는 종교 집단으로 변화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세계사에선 이 부분에서 위나라의 구품 중정제와 서진이 통일했다는 결과만 딱 한두 줄 정도 쓰여있고, 바로 오호십육국과 남북조시대로 넘어가기 때문에 고딩 삼덕들이 많은 좌절을 한다.

한국사에서도 한번 나오는데 부여와 고구려의 기록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외의 기록은 전해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고대사 연구에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수능엔 잠깐 언급되는 수준에서 못벗어났다. 가끔 한문제씩 보기로 등장하기는 하니 한번 쭉 훑어만 보는 정도로 넘어가면 된다.

3. 문화

이 무렵의 중국은 좌식(座式) 생활을 했다. 즉, 돗자리만 깔아놓고 그 위에 무릎꿇고 앉아서 지냈다.

삼국시대에는 비록 주류는 아니긴 했지만 양한(전한,후한) 시대에 이미 흔했던 유제품 관련 식문화가 아직 건재해있었다. 유제품 관련 식문화는 이후 유목 민족의 발호가 계속된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고 개간으로 인한 목초지의 상대적 감소 등의 이유로 북송 무렵 중국 내에서 자취를 감춘다.

4. 사회

전란으로 지역 사회가 붕괴하여 기존 한(漢)나라의 지방 향촌이 완전히 몰락했다. 이로 인하여 삼국의 왕조 모두 후한내내 세력을 쌓아오던 지방 호족의 역할이 커졌으며, 각 왕조의 사회는 호족을 어떻게 포섭하여 국가 구조를 형성하느냐 하는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나라에서는 호족들 가운데 문벌이 높은 몇몇 가문이 중앙 관직을 장악하여 호족을 뛰어넘는 귀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위진남북조를 거치면서 귀족 사회가 형성된다. 이것이 중국사의 문벌귀족의 시작이다.

나라에서는 호족들이 강한 독립성을 가지면서, '호족연합체' 적인 왕권이 만들어진다. 오나라 계통 호족은 오나라의 붕괴 이후에도 서진에 등용되면서 귀족적인 지위를 유지한다.

나라에서는 영토가 작았던 덕분에 상대적으로 중앙 정부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호족 사회라는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짧게 보면 남북조시대, 길게 보면 당나라, 오대십국시대까지 이어지는 문벌귀족 지배의 시작이다.

5. 경제

오나라의 주도로 강남 지방이 농경지 개척이 시작되고[4] 한족이 이주된다. 오나라에게 토벌되어 산월, 무릉만으로 불리던 남방 민족은 몰락하게 된다. 또한 황하 이남, 장강 이북 유역 한족 거주지 틈새에서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던 소수민족 거주지의 존재가 삼국시대를 마지막으로 종언을 고하였다.

강북 지방 쇠퇴의 조짐이 처음으로 보인 시대였다. 전란으로 인한 민호의 도주와 관개시설 및 농경지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 상실 등의 이유로 버려진 농경지가 대량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황하 중상류 지역의 황폐화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발생하였고 삼국시대의 뒤를 이은 남북조 시대로 인해 이 흐름이 더욱 가속화된다.

후한의 멸망으로 농업이 붕괴 상태에 놓였으며 화폐경제가 몰락했다. 위, 오, 촉 모두 동전을 재발행 하려고 노력했으나, 현대시대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모두 다 실패했다고 평가된다. 그나마 나았다는 촉한의 경우도 촉의 화폐가 본국외 강남 일부 지역, 농서 일부 지역에서 통용되는 정도의 한계점을 가진다.

6. 군사

향촌 사회의 붕괴와 함께 후한모병제도 붕괴한다. 군사 제도는 둔전과 결합된 세병제로 변화한다.

전란의 시대니까 당연한 소리지만, 군벌의 난립 등의 이유로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졌다. 이는 훗날 서진의 중국 통일 이후 팔왕의 난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한족 세력이 북방 민족에게 오르도스 고원의 통제권을 최종적으로 상실해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삼국 통일 이후 서진이 그 대가를 영가의 난으로 치른다(...) 물론 영가의 난이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일어난 건 결코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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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구품관인법 등 제도적으로나, 청담사상 등 문화적으로나, 더구나 위나라 말기의 국가 막장 테크 현상까지도 그대로 물려받았다. 다만 황실을 약화시켜서 사마의 일족의 전횡을 용납하게 만들었던 황족 배제 정책만큼은 물려받지 않고 오히려 거꾸로 노선을 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점이 팔왕의 난이라는 개판의 도화선이 되었으니 거참.
  • [2] 단, 실제로 저렇게 죽었다기보다는 호적 유실 등의 원인이 크다.
  • [3] 금나라 5천만, 송나라 6천만의 중국 인구가, 몽골의 침입을 거치고 원나라가 들어선 뒤에는 강북, 만주, 몽골, 티벳까지 다 합쳐도 7~8천만이 되어버린다.(...)
  • [4] 강남 지방의 농경화가 성과를 내기 시작한 건 빨라도 위진남북조 시대부터였고, 당송 무렵에야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훗날 송원교체기와 명청교체기로 강남 지방에 헬게이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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