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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수군통제사

last modified: 2015-03-31 18:55:15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직제의 역사
2.1. 휘하수영(수군절도사)
2.2. 리그베다 위키에 등재된 삼도수군통제사 역임자


1. 개요

임진왜란 중에 설치된 종2품 외관직의 조선 무관. 조선 수군의 실질적 최고 지휘관. 임진왜란 이후에는 상설직화 되어 지속적으로 존속한다.

삼도통제사·수군통제사· 삼도수군통제사라고도 한다.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삼남도'의 수군을 지휘 통솔한 삼남지방의 수군 총사령관이다. 오늘날로 따지면 해군작전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을듯 하다. 하지만 수군통제사는 작전 지휘권인 군령권과 인사권을 포함한 일반 지휘권인 군정권을 모두 가지기 때문에 군정권에 한해서는 해군 참모총장에 상응한다 할 수도 있다. 정확히 말해 해군 참모총장이 군령/군정 모두를 총괄하는 구조라 볼 수 있다.

삼도수군통제사가 조선의 모든 수군을 지휘, 통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선의 해상전력 대부분이 서남해안의 3도에 집중되어 있는 만큼 실질적인 조선 수군의 총사령관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고려시대에는 이것과 유사한 직책으로 해도원수라는 것이 있었다. 이는 강화도를 포함한 경기도 수군을 직할로 하여 각 지역 수군의 연합작전을 지휘하는 직위였다.

2. 직제의 역사

1593년(선조 26) 8월 평양한성(서울) 수복 이후 조정에서는 일본군의 해상 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수군에 수군통제사라는 새로운 직제를 만들고, 초대 수군통제사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였던 이순신(李舜臣)을 임명하였다.

이는 전(全)수군을 통솔할 지휘관이 없어 왜적의 침입에 즉각 진압할 체제를 갖추지 못하였고, 조정의 명령에 따라 연합함대를 구성한 후에도 각도 수사(水使)가 도별로 선단(船團)을 지휘, 각 선단 간의 의견이 상충하여 효과적으로 전국(戰局)을 운영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순신에게 수사 이하 각 지휘관들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군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 지휘권을 부여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수군통제사 벼슬 자체는 정3품 수군절도사와 동급이었으며, 단지 3도 수사들의 지휘권만을 가진 별정직이었다.[1] 그러나 임진왜란이 종식된 후, 통제사는 정3품 수군절도사보다 상위직으로, 각 도의 지방행정의 최고직인 관찰사나 육군최고지휘관인 병마절도사와 같은 품계인 종2품으로 격상된다. 또한 대개의 경우 그보다 상위 품계에서 기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2대 수군통제사는 원균이었고, 3대 수군통제사는 다시 이순신이 맡았다.

4대 통제사 이시언(李時言)부터는 거의 경상우수사가 겸직하였다. 그럴만도 한게 경상우수영은 당시 조선의 전 수군부대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으며, 일본에 가장 근접한 최전선에 위치한 부대라는 점에서 때문에 지휘관인 경상우수사의 발언권도 전 수사들 중 가장 강했다.[2]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수군이 좌/우도수영 모두 합쳐 약 50~60여척 밖에 되지 않았던 반면, 경상우수영은 단독으로 75~100여척의 전선을 보유하고 있었을 정도로 차이가 났다.[3]

상설직화 이후에는 법제적으로 임기는 2년이었고, 그 아래 수사수령과는 엄격한 상피제가 적용되었다. 수군통제사가 지휘하는 곳을 통제영, 또는 통영이라 하는데, 처음에는 한산도에 두었다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두룡포(통영시)로 옮겼다.

통제영은 1895년(고종 32) 7월 폐영될 때까지 300년간 존치되었고, 그 동안 208명의 수군통제사가 체임되었다.

2.1. 휘하수영(수군절도사)

  • 충청수영(충청도 수군절도사)
  • 경상좌도수영(경상좌도 수군절도사)
  • 경상우도수영(경상우도 수군절도사)
  • 전라좌도수영(전라좌도 수군절도사)
  • 전라우도수영(전라우도 수군절도사)

2.2. 리그베다 위키에 등재된 삼도수군통제사 역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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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물론 수군통제사에 임명될 때 이순신의 품계는 "정2품 정헌대부"였기 때문에 지휘권을 행사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 [2] 이를 감안하면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순신이 임명된것 자체가 원균이 임진왜란 초기에 한게 아무것도 없다는 증거인 셈이다.
  • [3] 이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원균이 이를 제대로 운용하기만 했다면 임진왜란은 임진년 모월 모일에 왜구가 대규모로 쳐들어 왔으나 경상우수사 원균이 함대를 끌고 나가 물리쳤다 이 한 줄의 기록만을 남기고 사람들에게 아웃 오브 안중 취급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는 평이 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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