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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라

중국의 역사
중국 역사의 시작/



중국의 고대국가. 은(殷)이라고도 부른다.[1]

Contents

1. 국가명에 대하여
2. 왕조사
3. 도시국가
4. 상대의 기술과 문화
5. 인신공양
6. 한국에서의 인식
7. 창작물에서

1. 국가명에 대하여

한자는 商. 국성은 자(子).

은(殷)이라고도 불리기에 합칭하여 은상(殷商)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은(殷)은 반경(盤庚)~제신(帝辛)시기에 도읍했던 상나라 최후의 수도인데, 당대(當代)에는 의(衣) 혹은 대읍(大邑) 상(商)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대 성립부터 은이라 불렀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주나라 사람들이 부른 폄칭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그들 자신들은 자신을 상이라고 하였지 은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갑골문에서도 은이라는 글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주 시대 초기기록에도 상이라고 등장한다. 서구인들도 Shang이라고 하며,[2] 중국인들도 상이라고 부르는 추세이다. 의(衣)와 은(殷)은 고대 중국어에서 소위 음양대전의 관계로서, 같은 지명에 대한 다른 방식의 두 가지 가차자이다.

여담이지만 상업할 때의 자가 이 나라에서 나온 것이다. 상나라 유민들이 나라를 잃고 이곳저곳 장사하며 떠돌아다니던 것에서 기인한 것이다. 은주역성혁명으로 망했지만 상의 유민들을 안정시켜야 했기 때문에 무왕은 주의 아들 무경(武庚)을 다시 은 지역에 분봉해 봉국으로 삼았다. 그게 宋나라. 하지만 무왕이 죽은 후 그의 동생인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은 주공 단의 섭정에 반기를 들고 무경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주나라는 이들을 진압해 나라를 봉지로 받은 미자계의 후손만 제후 신분으로 남고 나머지는 전부 몰락하고 만다.

2. 왕조사

전설상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의 걸왕을 물리친 성탕(成湯, 탕왕)에 의해 건국되었다. 성탕은 갑골문에서도 확인 가능한 왕[3]으로서, 대을(大乙), 성당(成唐)으로 나타난다. 성당 이후 상나라는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로 여러번 천도를 하게 되는데, 현재 발굴되어 확인된 상대의 수도로는 중기의 수도로 추정되는 허난성 옌스(偃師)유적, 그리고 최후의 수도인 은(殷)의 유지인 허난성 안양(安陽)시 샤오툰(小屯)촌의 은허 유적지가 있다. 우리가 아는 갑골문은 주로 이 안양 은허유적지에서 발굴된 것이다. 다른 유적지에서는 갑골문의 출토가 드물다.

기원전 12세기의 무정(武丁)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이 시기에 주변 종족들을 대거 복속시키면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왕조 말기의 왕인 제을(帝乙)과 제신(帝辛) 부자의 과도한 동방정책[4][5]으로 서방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이 틈을 탄 섬서성 지역의 (周)가 서방 부족을 모아 상나라를 공격하여 기원전 1046년, 목야의 대회전에서 대패하여 국가가 멸망하고 만다. 주나라에 의해 마지막 왕이었던 제신에게는 불명예스러운 주(紂)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하나라의 걸왕과 함께 폭군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게 된다. 그리고 상나라 왕족의 한 명이었던 미자 계에게는 공(公)작이 수여되어 제후국인 에 봉해졌다. 공자 또한 이 미자의 후손 중 하나라고 전해진다.

대에 고대의 역사적 사실을 의심하는 의고파가 득세하면서 한 때 실존이 의심되기도 하였으나, 1899년에 갑골문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면서 상나라의 실존은 이후 대부분의 학자들에게 인정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때 갑골문에서 확인된 왕의 재위기간과 이름들이 사마천의 사기의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상나라의 역대 군주는 상/계보의 왕사 참조. 갑골문에서 발견되는 상나라의 왕 시호(또는 이름?, 존호?)는 모두 십간으로 지어져 있다. 이것은 상나라가 제정일치적 성격이 강했던 면모의 일환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놀라운 것은 그 순서가 사기와 똑같다. 오오 사기의 위엄.

3. 도시국가

이와 더불어, 하(夏)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엄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를 하나의 역사적 실체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하가 일개 성읍 국가의 명칭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당시 중원에는 하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의 성읍 국가들이 수없이 공존하고 있었고, 하는 그 수많은 성읍 국가들로 구성된 국제 사회에서 중심된 역할을 수행하는 일개 성읍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기』의 사마천 등 후대의 중국인 사가들은 자기 시대의 왕조상을 수천년 전의 하대에 투사하여 하를 마치 방대한 규모의 영토를 가진 국가인양 묘사했던 것이다. 하를 이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하를 이었다는 상(商), 주(周) 등 중원의 '왕조'들도 진, 한 등과 같은 후대의 왕조와는 달리 수많은 성읍 국가군으로 구성된 중원 국제 사회의 대표적 성읍 국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김한규, 천하국가, 57쪽

중국사학계에서는 고고학적으로 하나라의 존재가 입증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중국 외부에서는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 중국사학계에서 하나라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하-상 교체기에 해당되는 듯한 유물의 전환 과정이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탕왕의 존재가 갑골문으로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하왕조의 존재 자체의 근거가 희박한 상태이므로 다른 실체이거나 단순한 은왕조 자체 내에서의 변화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갑골문에서는 탕왕이 하왕조를 물리친 대역사의 흔적은 전혀 드러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갑골문에서 탕왕은 은왕조의 창시자도 아니라는 점에서 무리가 있다. 갑골문에서 탕왕을 칭송하는 내용은 많이 보이지만 그 중에서 하왕조나 그에 해당되는 강한 적을 물리쳤다는 언급은 전혀 없다. 더구나 갑골문에서는 하(夏)라는 글자조차 식별되지 않으며, 갑골문에서의 1년은 춘하추동이 아니라 단순히 춘추로 구별했다. #

다만 상이 실증적으로 확인된 최고(最古)의 왕조이기는 하나, 상이 《사기》 등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중화 대륙의 단일한 중앙 집권적인 왕조는 아니었다고 추정된다. 애초에 기록에서 황하에 홍수가 나니 전국토가 물에 잠겼다고 나왔을 정도고본격 노아의 홍수 유물 출토에 따르면 상의 통치 영역은 그리 크지 않았다. 또 상의 통치 영역 바깥에는 그들이 남긴 문자는 없었지만 분명 다른 문명들이 존재하였다. 이건 주나라 후기인 동주시절에도 수도인 낙양 서쪽의 산에 이민족 부락이 있을 정도였으니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성립하는 셈. 이렇게 각기 다른 문명들이 고대 시기를 거치면서 통합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당시의 중국 대륙은 지금과는 달리 대부분의 땅이 밀림이었으며, 그곳에는 코끼리(…)나 코뿔소(…), 호랑이 같은 맹수, 전설의 의 원형이 되었을 악어 같은 대형 파충류나, , 의 원형이 될 듯한 조류가 살고 있는 험악한 땅이었다. 이런 밀림 사이에 세워진 극소수의 '성읍 국가'가 이후의 중국 문명으로 이어지는 혹은 이어지지 않는 다양한 문자 문화와 금속 문명을 가지고 있었고, 성읍 국가 이외의 지역에는 아예 인간이 살지 않거나 완전히 다른 풍속을 지닌 이민족이 살고 있었다.

따라서 하왕조 역시 은왕조와 함께 존재한 다른 왕조였으며 한때 하왕조가 우세했다가 이후 은왕조가 주도권을 가져갔다고 해석한다면 갑골문의 기록과 모순되지는 않는다. 다만 역시 추측일 뿐이며 분명한 근거는 없고, 은왕조가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탕왕이 걸왕을 정벌하고 하왕조를 멸망시킴으로써 천하를 제패하는 대규모의 정복전은 없었던 듯하다.

4. 상대의 기술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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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청동 항아리
상대를 특징짓는 것은 무엇보다도 도철문[6]이 아로새겨진 청동기이다.

이 시기의 청동기명들은 조형 수준도 뛰어나지만, 도철문의 형태나 크기, 위협적인 형태의 장식 등이 상, 주 이후의 중국 왕조 문화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차라리 남아메리카 고대 문명의 모습을 연상케 할 정도...

이러한 청동기들은 종류까지 자유분방해서 고고학자들이 하나하나 특징을 잡고 명칭을 붙이는 데 애를 먹게 한다. 이러한 청동기들의 주된 용도는 제사용이다. 대로 가면 오히려 청동기 주조기술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으나, 이는 단순한 주조기술의 후퇴라기보다는, 청동기의 용도가 단순한 제사용에서 확장되어, 귀족의 기념물로서 작용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대의 청동기는 문양이 화려하지 않은 대신에 자신이 왕실로부터 받은 은사나 선조의 공덕, 자기자랑에 대한 내용이 구구절절하게 새겨지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사료적 가치성은 오히려 대의 것이 더 높다.

그러나 고도로 발전한 청동기 기술에 비해 상대의 건축기술은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었다. 기와가 발명되지 않아 자주 지붕을 갈아줘야 하는 것은 둘째치고, 한 번 지은 건물의 공학적인 내구도가 낮아 자주 새로 지어야 했다. 건물이 붕괴되는 일도 자주 있어서, 건물을 짓기 전 희생물을 땅에 묻어 건물이 튼튼하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덕분에 상대의 건축물 유적에서는 기둥 아래에서 사람의 해골이 대량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흠좀무

참고로 이때 건축물이 어땠냐 하면.....



다른 링크.

요건 건물터
참고로 이 건물들의 정체는 당시의 궁전.
© Naus (cc-by-sa-3.0) from

중국 은허 박물관에서 복원한 이 시대의 궁전. 지붕은 짚으로 되어 있다.

이 시대에 상족이 숭배하였던 신은 (帝)였다. 제는 조상신으로서 그들은 왕이 죽으면 제가 된다고 믿었다. 왕은 제와 교통할 수 있는 유일한 제사장으로서 제에 대한 숭배 의식을 주도하였다. 제는 혈통적인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같은 제를 숭배하는 씨족끼리 연합하여 한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5. 인신공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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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쌓으면서 인간제물을 바치려는 상나라 사람들의 모습. 갑주를 입은 자는 귀족 무사, 뒤쪽의 도끼를 든 자는 제물로 바칠 사람의 목을 치는 부월수다. 머리를 풀고 윗옷을 벗긴 남자는 제물로 잡혀온 이(夷)족. 동쪽에서는 이족이고 서부에서는 양치는 유목민들인 강(羌)족이 주된 희생양.

상나라는 훗날 멕시코의 아즈텍 왕국과 마찬가지로 인신공양을 즐겨하였다. 인신공양에 대한 내용과 방법은 갑골문에 자주 나오며,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유골 역시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단순히 설이 아니라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사실로 볼 수 있다.

인신공양은 주로 노예나 강족과 같은 다른민족의 포로를 잡아다가 죽이는 방법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형식으로 했다고 한다. 물론 적당한 제물이 없으면 자국민이라도 봐주는 건 없었다. 이렇게 제사로 쓸 인간을 죽이는 방법이 12가지가 되었다는데, 목베기뿐만 아니라 허리 자르기, 때려 죽이기, 사지를 찢어죽이기, 삶아죽이기, 물에 빠뜨려 죽이기, 태워죽이기, (땡볕에 묶어놓고)말려 죽이기, 등 온간 잔악한 방법이 다 동원되었다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에도 은주왕 제신이 포락지형같은 혹형을 만들었다고는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점은 사기의 기록이 약간 잘못된 것으로 딱히 제신의 대에 들어서 포악한 방법을 쓰기 시작한게 아니고 원래부터 상나라가 잔악무도한 짓을 많이 했다. 오히려 갑골문의 기록을 보면 제신은 어느 정도 인신공양을 줄이려 한 듯 하다.(…) 포락 등의 기록은 상나라의 잔학한 풍속이 전설로 남아 제신의 전설로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포락 같은 전설은 실제 고고학과 갑골문으로 나타난 상대의 잔악한 짓 일람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인신공양이 되는 노예는 눈을 멀게 하고 무릎꿀린 뒤 밧줄로 묶었으며[7], 백성을 뜻하는 민(民)은 원래 노예를 뜻하던 문자였는데 상형문자로 눈(目)을 상처내어 멀게하는 모양을 뜻한다고 한다. 거기다 순장도 공공연히 벌어졌는데, 그냥 묻는 게 아니라 죽어서도 생각을 못하고 명령에 순종하고 부림을 받도록 머리를 잘라버리고 묻었다. 결국은 상나라의 멸망도 아즈텍 왕국의 멸망과 마찬가지로 이런 잔혹한 인신공양에 분노한 주변 민족들이 모두 주나라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나라 시대에도 상대와 비교해서 비교적 줄어들기는 했지만 인신공양이나 순장 등의 악습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춘추전국시대에도 유가의 집중적인 비난[8]을 받는 가운데 이따금 보이다가[9] 통일 진나라에 접어들면서 일반적으로 사라진다. 허나 정작 진시황 자신의 무덤에는 대규모의 순장을 했고, 오랫동안 사라졌나 싶었던 순장은 원나라 때 부활하면서 명나라, 청나라 초기까지 이어진다. 수많은 중국 황제들이 죽을 때마다 순장으로 인해 많은 후궁, 신하들(주로 정적 처리 수단)을 같이 무덤으로 끌고 들어갔는데, 이거 때문에 명나라에 후궁으로 보낸 조선 여인들이 순사당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황제 뒷담을 까기도...

밀림 사이에 있는 도시 국가+주변의 이민족들+대규모 인신 공양. 아무래도 다른 대륙에서 상나라의 모습과 가장 가까운 문명은 멕시코의 아즈텍이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기록에는 상나라의 식인행위도 자주 사료[10]에 나오는데, 이 또한 아즈텍과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이하동서설에 기초한 '용봉문화원류'라는 중국 책에서는 아즈텍을 중국과 같은 계통에서 갈라진 나라라고 주장했다.(…) 물론 시간, 공간적으로 이러한 주장은 근거가 전혀 없다. '정글'에 둘러쌓인 자연환경과, 기술적으로 지배 능력의 한계와 부양 인구의 한계가 있는 고대 도시국가의 한계가 나타나 비슷한 문화 현상이 나타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6. 한국에서의 인식

경상북도 청송에는 주왕산이 있지만 은나라 주왕과는 관련이 없다. 산과 관련된 설화는 해당항목을 참조. 하지만 산에 '달기폭포'란 이름이 붙은 폭포가 있다(…).

7. 창작물에서

아무래도 상나라를 다룬 창작물 중에서 가장 유명한건 고전소설 봉신연의일 것이다. 오덕계에서도 봉신연의(만화) 덕분에 은나라가 친숙한 소재이며, 코에이의 게임 배틀 봉신 시리즈도 봉신연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요괴소년 호야에서는 상나라가 망한 이유가 백면서생 때문이라고 한다.

이우혁퇴마록에서는 봉족국가인 은나라가 용족(한족)에게 망하면서 봉족의 유민들이 일부 아메리카 대륙으로 피난했고(나머지는 한민족이 되었다고), 그들이 쓴 "은나라는 안녕한가?"라는 인삿말인 "은지안"을 콜럼부스가 인디언으로 잘못 알아듣고 인도로 착각했다는 설정을 소개했다. 다만 항목의 서두에도 있지만, 은나라 사람들은 스스로를 상나라로 불렀기에 역사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런데 위에 나온 아즈텍과의 유사점을 보면 또 묘하게 말이 되는거 같은 착각이 든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제 1편에도 등장. 은나라가 아니라 Shang(상)으로 등장한다. 주 특기는 한 마디로 정리하면 "빠르게 일꾼 뽑아 성벽 두르자.|실제로 일꾼이 20%싸고 빠르게 나오며, 성벽의 체력이 다른 문명의 두 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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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러나 '은'은 주나라가 은나라를 격하시키기위해 수도의 이름을 나라이름으로 쓴 것으로 '은'이라 칭하는 것은 권장할 일이 아니다. 일본이 자기 네 왕을 천황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나라에서 일왕이라고 쓰는 것과 같은 급의 무례한 일이다.
  • [2] 참고로 은은 한어병음 표기에 따라 Yin.
  • [3] 다만 갑골문에서는 은나라의 창시자는 아니다.
  • [4] 오거가 걱정하며 말하였다. "하나라 걸왕은 유잉에서 회맹한 후 유민에게 배반당했고, 은나라 주왕은 여산에서 회맹한 후 동이에게 배반당했으며, 주나라 유왕은 태실에서 회맹한 후 융적에게 배반당했습니다. 어떤 일이든 마지막이 중요하니 신중하시기 바랍니다.|伍舉曰:「桀為有仍之會,有緡叛之。紂為黎山之會,東夷叛之。幽王為太室之盟,戎、翟叛之。君其慎終!」 ─ 사기
  • [5] 이러한 사실은 갑골문에서도 확인된다.
  • [6] 도철은 재물과 음식을 몹시 탐낸다는 상상의 동물.
  • [7] 이를 묘사한 인형도 발굴되고 있다
  • [8] 공자와 유가의 제자들이 각지에서 인신공양의 풍습을 철폐했다는 기록은 상당히 많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많은 지방에서 여전히 인신공양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 [9] 대표적으로 송양지인으로 유명한 송나라 양공. 그러고 보니 상나라의 후예인 송나라의 임금이다 춘추오패에 버금가는 것으로 칭송받는 진나라 목공도 죽으면서 신하들을 같이 끌고 들어갔다.(...)
  • [10] 은주왕 제신주문왕의 장자 백읍고를 죽이고 요리해서 그것을 주문왕에게 먹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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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0-07 19:3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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