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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

last modified: 2015-03-19 15:31:55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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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이름 새마을운동 기록물
[영어] / [프랑스어]
국가 대한민국
등재유형 기록유산
등재연도 2013년
제작시기 1970~1979년

Contents

1. 개요
2. 배경 및 전개
3. 상징물
4. 결과와 계승
4.1. 전파
5. 비판
6. 여담
7. 기타


1. 개요


(새마을노래. 참고로 박정희 대통령 작사/작곡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박정희는 교사 시절 음악과목을 맡았다.[3])

1970년 4월에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새마을가꾸기운동을 거론, 동년도 5 ~ 6월에 구체적인 방안이 마련되어 전개된 농촌 계몽 운동. 근면, 자조, 협동을 기본정신으로 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농촌 환경의 개선 및 의식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흔히 6~70년대 수도권의 발전을 상징하는 단어가 한강의 기적이라면, 지방, 특히 농촌지역의 발전을 상징하는 단어는 이 새마을운동인 셈. 실제로 전국 지자체의 하급 행정기관(서울의 경우 주민센터 등)에서는 아직도 여전히 새마을기 깃발을 태극기 및 해당 지자체기와 나란히 게양함으로써 그 상징성을 이어가고 있다.

2. 배경 및 전개

1969년 11월에 농어촌근대화촉진법이 발표되고, 이어서 1971년부터 시행되기 시작한다. 1973년부터는 대통령실과 내무부에 관련 기구가 설치되었고, 새마을운동 연수원이 신설되어 새마을운동 지도자의 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75년에는 도시와 공장으로도 확대되었다.


새마을운동 계획자는 前 건국대학교 부총장이자 농업전문가, 유대인 전문가로 유명한 류태영 박사다. 고학으로 대학교까지 졸업한 류박사는 앞으로 국가를 위해 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중 우연치 않게 덴마크 왕실의 후진국 특례 유학생 제도가 있음을 확인하여 영문으로 자신의 농촌 계몽 의지를 피력, 그 뜻이 수용되어 약 10여년 간 유럽 각 국과 이스라엘 등을 다니며 농촌 계몽과 현대화 등을 연구하고, 이스라엘에서 농업교수를 역임한 후 귀국하여 새마을운동을 이끌었다고 한다.

한편 새옹지마가 될 일이었는지, 쌍용양회가 생산하는 시멘트 재고가 쌓여서 회사가 휘청거리게 되자 정부가 이 시멘트를 모조리 사들인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마침 세워졌던 새마을 계획과 결합되면서, 전국에 한 마을당 600포씩 뿌리는 식으로 재고를 처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물론 시멘트 재고를 이만큼 사들여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건설 사업을 했을 것이고, 경부고속도로 등 실제 그럴 수 있었던 건설 사업도 많았지만). 당시 거의 전국의 초가집을 헐고 시멘트집을 짓는데 만약 이걸 다 새로 생산했으면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만들 노동력이나 자금 면에서 손실이 컸을 것이 뻔하다.

새마을운동은 다음과 같은 단계로 진행되었다.
  • 기반조성단계(1971~73): 새마을운동 의식을 확산, 기반구축
  • 자조발전단계(1974~76): 경제난 해결에 주력
  • 자립완성단계(1977~80): 국력 신장, 농어촌의 복지 향상 사업
  • 민주복지완성단계(1981~): 5공화국 이후 민간주도의 새마을운동으로 바꾸었으나, 이후 1988년 5공화국 청문회에서 사업을 민간에 넘기는 과정에서 많은 부패가 발생하여 문제가 되었다. 이 단계에서 새마을운동 사업은 상당히 위축되었다.

당시 새마을운동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초가집을 없애고 슬레이트 지붕으로 고치기 및 서양식 현대화 주택 건설[4]
  • 농기계 등 첨단 장비 보급
  • 기존 흙길을 시멘트 내지 아스팔트 길로 포장
  • 도시 및 도로 미화 사업
  • 새마을지도자들을 양성, 각종 교육 시행[5]
  • 기타 정신적 교육

특히 배급받는 시멘트를 당시 안 쓰고 썩힌 마을은 다음 지원대상에서 빼는 식으로 경쟁시킨 것이나, 자발적인 경쟁을 각 마을에 유도한 것은 지금 봐도 뛰어난 기술. 이 시멘트를 받아서 그냥 안 써먹은 마을도 있었지만, 받은 시멘트를 활용하는 마을에 한해서 철근 등 자재를 보내면서 국민적인 반응이 커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호응을 얻기 시작한 새마을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결과적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낳았다.

3.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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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의 상징물은 새마을기 또는 새마을 깃발로 초록색 바탕에 노란색 동그라미 그리고 그 안에 초록색 새싹이 자라나는 모습을 담은 모습에 하얀색 글씨로 새마을이라는 궁서체가 써진 깃발로 1970년 새마을운동 초창기 때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초록색은 농업, 농민, 자연, 산촌마을 등을 상징하고 노란 동그라미는 햇볕과 밝은 미래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초록색 새싹은 새마을의 대표 상징물로 농업의 발전과 농민의 미래를 상징한다.

1970년 새마을운동 전파와 홍보를 위해서 관공서와 기업체의 국기 게양대마다 태극기와 함께 의무적으로 게양되었던 깃발이었기 때문에 관공서와 기업체 국기 게양대에 새마을기가 게양되어 있었고 일부 농촌마을과 산촌마을 등에도 새마을 깃발이 게양되기도 하였고 깃발 외에도 마을 입구 표지판이나 비석 등에도 새마을 마크가 새겨지기도 하였다. 농촌 외에도 도시에도 새마을기가 게양된 곳이 있다.

4. 결과와 계승

새마을운동으로 이루어낸 전국적으로 생활 환경 및 국민 위생 개선, 농로 등의 인프라 구축 등은 대단한 결과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한국 농촌에서 초가집은 이 때 사라졌다[6]는 것으로 설명해도 될 정도. 현재에도 농촌에서 '새마을운동'이라는 문구가 갖는 힘은 대단하다. 농촌을 상징하는 물건들 중의 하나가 새마을 모자[7]일 정도이니.

이 운동의 영향으로, 결국 새마을운동을 주관하는 새마을협의회가 정부자금으로 운영되는 국영기관으로 되었으며, 정부에서 분리된 1999년까지 정부기관으로 운영되었다.

1988년도의 제5공화국 비리규명 청문회에서 밝혀진 문제점[8]에 따라 한동안 새마을운동은 위축되었으나, 현재는 뉴 새마을운동새새마을운동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사업이 전개되는 중이다. 문화·시민의식의 선진화, 서로 돕는 복지공동체 만들기, 지역 활력 찾기, 친환경 조성, 국제·통일 협력사업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뉴 새마을운동을 이끌고 있는 새마을운동 중앙회는 현재 입장으로는 국내 유수한 시민단체 들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다만, 현재 새마을운동을 지지하는 계층의 성격상 한국자유총연맹과 같이 정치색을 띠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새마을 문고를 제외한 각종 새마을 단체는 현재 전두환 정권 이후 만들어진 왜곡된 지원법에 의해 연 수백억씩 국고지원을 받는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이미 거대한 공룡단체로 진화하여 표를 무기로 불공정한 특혜를 누리고 있다고. 이는 다른 전두환`노태우 시절 만들어진 관변단체들도 비슷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정치적으로 편향되거나 물의를 일으키는 등의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지금도 다양한 형태로 새마을협의회가 운영되고 있으며, 예전에 비해 많이 역량이 줄어든 감은 있었지만 그래도 새마을 독서실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4.1. 전파

새마을운동은 세계에서 상당히 높게 평가 받고 있는 국산 정책중의 하나이다. 대한민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에 영향을 준 것 뿐만 아니라, 농어촌 지역의 빈곤 극복과 복지 향상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세계 개발도상국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는다.

UN은 새마을운동을 본딴 '새천년마을계획(Millennium Villages)'을 아프리카 빈곤퇴치 프로그램 중 하나로 선택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아프리카의 유엔 산하기관에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배울 것을 권고했다. 콩고, 가나, 케냐, 남아프리카공화국등이 새마을운동을 수입해간 주요 국가이며, 다양한 국가에서 새마을운동을 배우기 위해 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에서 노력하고 있다.기사

또한 중국의 일부 지역에도 전파되었다. 중국어로는 한국신촌운동(韩国新村运动)이라 번역하는데 특히 중국의 덩샤오핑은 중국어로 번역된 새마을운동 관련 서적을 당간부들에게 나눠주며 박정희를 배우라 지시했을 정도. 위에 소개됐던 류태영 박사도 새마을운동 전파를 위해 중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기도 했다. 후진타오 주석도 새마을운동을 공부했으며, 이를 모방한 '신농촌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초청 연수나 기타 인재개발원 연수 사업도 포괄해서 새마을운동 전파사업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대개 이런 초청 연수는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 농업기술원, 농촌 정보화마을등과 포스코,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등의 산업현장으로 견학을 하게 된다. 일부 연수를 온 인사들의 경우 대규모 산업을 견학하면서 규모에 압도 당해 오히려 절망하는 부작용도 있는 듯하긴 하다. 자신감 상실까진 우리가 어떻게 못 도와준다.

그러나 페루에선 당시 대통령이던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이를 수용하였다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한다.

2013년 9월 1일, 정부가 미얀마를 비롯한 각 세계에 새마을운동을 전파하기 위한 노력을 확대한다고 밝혔다. 기사

5. 비판

새마을운동은 분명 후진국의 산업화로서는 뛰어난 성과를 거둔 모범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전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며 '박정희만이 이룰 수 있었던 성과' 라고 보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자재의 배급과 함께 자치적인 개발 경쟁을 유도하여 건설 붐을 일으킨 사례는 계획 경제 체제를 가장 먼저 시행한 소련에서 이미 있었던 사례이고 그 효과도 톡톡히 거뒀다. 한반도 내에서도 195~60년대 북한의 천리마 운동과 청산리 운동[9], 대안 사업 체계 등이 일반민의 의식 개혁 및 자발적 참여 유도 운동이라는 차원에서 선례로 존재하고 있었다[10].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한 근대화 정책과도 비슷하다는 지적이 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권위적 근대화라는 차원에서 일맥상통한다는 것.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근대화 정책은 이미 제국의 형태를 갖추었던 일본의 막대한 자금력이 투입되어 말 그대로 위로부터 시행된 것이고, 일반민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새마을운동의 경우는 총독부와 같은 일방향적인 구도보다는 일반민의 호응을 얻어 시행되는, 앞서 말한 소련, 북한 등의 인민 동원 체제와 유사하다. 사실 조선총독부의 근대화 정책보다는, 만주국의 농촌진흥운동과 닮아있다. 일본의 총리를 지내기도 했던 기시 노부스케가 만주국 관료로써 경제개발정책을 이끌었고, 그가 입안한 계획이 바로 만주국의 농촌진흥운동이었다. 박정희가 만주국 군인 출신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혐의를 지울 수 없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박정희가 꼴랑 1년 복무한 점을 생각하면 기시 노부스케와 뚜렷한 연관성을 찾기는 사실상 어렵다.

당연히 비판점을 볼 때도, 이러한 일반민 동원 체제의 전제주의적 문제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새마을노래와 함께 아침 일찍 기상하기 등 '일사불란'을 요구하는 동원적 수단, 희망적 전망에 대한 적극적 참여 등을 이용하면서 실질적으로 반강제의 체제 협조를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새마을 청년회 등에 반강제로 가입을 시킨 후에 다리나 제방 공사 시에 '자기 마을의 일'이므로 적극적인 참여를 당연시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 이 사업으로 농촌은 더욱 집단화되었다. 때문에 비판하는 측에서는 대개 국민교육헌장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국민 국가 만들기'라는 점을 짚는 편이다.

또한 겉으로 보기 좋은 성과는 만들어냈으나, 새마을운동으로 막고자 했던 농촌 사회의 붕괴는 억제하는 수준에도 머무르지 못했다. 오히려 1970년대 중공업화의 진행으로 싼 노동력에 대한 요구가 지속되어 농민들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지고 이에 따라 농촌 이탈 현상이 심각해졌다. 더군다나 국가가 농업을 진흥한다는 것도 경쟁력을 갖추는 방향이 아니라 그저 전근대적인 박리다매를 강화하는 방향이라 농민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전태일 분신 사건 등과 함께 활발해진 1970년대 농촌 쟁의는 결국 새마을운동이 농촌의 구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교육자 겸 동화 작가 관식이 쓴 '밤나무골 아이들'이라는 창작 동화(꿈동산 마이프렌드라는 창작동화 시리즈에 실렸다)에서는 새마을운동 당시의 농촌을 묘사하면서, 새마을운동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은근히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 그것도 1980년대에 써진 작품이다. 그 때부터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은 비판적으로 봤다는 이야기. 그리고 지붕 교체 사업 당시 지붕을 슬레이트로 했다가 슬레이트가 썩자 석면이 검출되면서 현재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의 기술이나 경제 상황으로 보았을 때, 그리 질 좋은 것을 들여오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11]

그리고, 그러한 시멘트를 한다면, 전쟁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방공호를 같이 지었다면 더 효율적이었음에도 예비군까지 동원을 추진한 정권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그런 것은 지지부진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 다른 부정적인 측면은 전통문화의 급격한 상실을 들 수 있다. 물론 산업화와 그에 따른 급격한 사회변화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분명 있지만 당시 보존 해야 할 전통까지 밀어부치기 식으로 파괴한 경우가 많다. 특히 무속 문화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는데 각 마을 마다 존재하던 서낭당, 마을 굿 같은 것은 조직적으로 파괴되었다. 심지어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 된 '제주칠머리당 영등굿'의 경우 조차도 미신타파의 명목으로 굿을 금지하면서 하마터면 전승이 끊길 뻔 했다. [12]

사실 운동 자체가 개신교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은 편이다. 위의 류태영 박사부터가 개신교도이고 가나안농군학교의 영향 역시 많이 받은 편이니 당연히 미신에 적대적일수 밖에 없다.

6. 여담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새마을운동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류태영 박사가 새마을 운동의 성패는 고위 공직자의 정책 이해와 솔선수범에 달려 있다고 말하자, 삼일 후 대통령 특명으로 비서실장, 경호실장을 포함한 청와대 내의 간부 전원을 지하 대강당에 소집해서 류태영 박사의 교육을 듣게 했다내밑으로 다 모여. 말하자면 최초의 새마을 연수자들.
몇 년 후 광주에서 장관, 지역단체장 등 고위공직자 1천여명을 상대로 청와대 때와 같은 내용의 교육을 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일부러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해서 1천여명의 청중이 강연이 끝날 때까지 한명도감히 자리를 뜨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13]


7. 기타

허경영은 자신이 이 운동을 계획했다는 헛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류태영 박사라는 인물이 분명히 따로 있으니 그 자체로 논파.하기사 박근혜가 자기랑 결혼할 뻔했다고 박박 우기는 놈이 뭔 할말이 있으리오...

조용기목사 위인전에 의하면 자신이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주장한 '새마음 운동'을 박통이 '새마음'이라는 단어가 너무 기독교적(?)이라 하여 새마을운동으로 고쳐 추진한 것이라고 한다. 아 너무 기독교적이라 단어를 못씀#[14]

2013년 6월 18일에 새마을운동 관련 기록물이 난중일기와 더불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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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어] Archives of Saemaul Undong (New Community Movement)
  • [프랑스어] Les archives de Saemaul Undong (mouvement de nouvelles communautés)
  • [3] 그런데 70년대에 한 금지곡 가수는 자신의 앨범에 건전가요를 수록하면서 새마을노래를 수록했고 작사/작곡을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했다가 심의에서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 [4] 이 지붕에 슬레이트판이나 판 옮기는 일이 이청준의 소설 '눈길'에서 어머니가 새마을운동을 고깝게 보는 요소 중 하나다.
  • [5] 새마을연수원에서는 새마을지도자 연수생들에 대한 교육평가를 했는데 등급을 각각 A, B, C로 나누어 A를 받은 수료생은 농림부에서 특별지원을 해주고, C를 받은 수료생을 추천한 군수는 문책하라고 지시했다.
  • [6] 다만 이 때 초가집을 허물고 새로 지은 집이 대부분 인체에 유해한 석면을 지붕으로 올린 것이라서 우리나라 고유의 건축양식을 보기 어려워졌다는 점과 맞물려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 [7] 정태춘 박은옥의 노래 '고향집 가세'에는 가요로서 드물게 농촌고향의 상징으로서 새마을 모자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 [8] 특히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동생 전경환씨가 관련되었다.
  • [9] 초창기엔 기대이상으로 성과를 올려 연 10%대 경제성장은 물론 농작물 초과생산을 계속해서 기록했다. 그 덕분에 대약진 운동당시 일부 조선족들이 북한으로 와서 곡물을 가져왔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방법을 효과가 떨어진 1970년대 이후에도 변함 없이 계속 써먹었다가 환경파괴로 홍수, 가뭄등의 부작용을 겪고 외화도 떨어져 비료와 연료가 부족해져서 농기계를 제대로 돌릴수 없게 된 1990년대에 사실상 망해버렸다. 물론 정책이 망해버렸다고 해서 해서 완전히 폐기된건 아니며, 역설적으로 예산부족문제(...)로 지방에서 널리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비료와 연료가 부족한데 성과가 제대로 날리는 없다.
  • [10] 새마을운동을 비롯하여, 간혹 이러한 운동들이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는 이유로 독재가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독재 정권이라는 이유로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는 설명을 의도적으로 잘라먹는 경우가 있는데, 현대 정치학과 역사학계에서 '대중 독재'에 대한 연구는 이미 제법 많은 호응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라틴아메리카포퓰리즘 정권을 비롯하여, 단순히 일반민의 호응을 얻는다고 해서 민주적인 것은 아니며, 독재와 일반민의 호응이 병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 [11] 단, 농촌 쟁의가 당시 지역 여론의 대세를 이루었는지는 아직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6-70년대 당시는 야도여촌이라 하여 오히려 수도권에서 민주공화당의 득표율이 바닥을 기어 사실상 농촌에서의 득표율에 기대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 [12] 이를 두고 논했는지는 몰라도 도올 김용옥이 대학생 시절에 새마을운동은 문화박멸운동이다는 논지의 글을 학교신문에 발표했다가 뼈아픈 곤욕을 치룬 적이 있다
  • [13] 류태영 박사 회고 칼럼 中
  • [14] 이 말이 애초부터 헛소리인게, 박정희의 공식 종교는 불교다. 무신론자란 말도 있지만 독실한 불교도였던 육영수 여사의 영향을 받아 친불교 성향을 띄었고, 그 여파로 반기독 성향을 자주 드러냈다. 다만, 새마을운동을 계획한 류태영 박사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 류 박사의 의견이 여기에 반영됐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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