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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드 골

last modified: 2015-04-12 02:50:49 by Contributors

< 1958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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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그림 (25.15 KB)]
1957 - 니키타 흐루쇼프 샤를 드 골 1959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ɔ) Office of War Information, Overseas Picture Division. [1] The image prefix (LC-USW3) at the Library of Congress image page matches that of pictures from the OWI collection (see prefix list here. from


Charles André Joseph Marie de Gaulle, 1890~1970

목차

1. 인물 소개
2. 성장 과정
3. 야전 군인 시절
4.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자유 프랑스 수반
5. 정계복귀와 제5공화국 출범
6. 평가
7. 일화
8. 주요 발언
9. 여담


1. 인물 소개

프랑스의 군인, 정치가, 문필가

풀네임은 샤를 앙드레 조제프 마리 드 골(Charles André Joseph Marie de Gaulle)이란 긴 이름이다. 중산층 출신이지만 "드"라는 전치사를 보아도 알 수 있듯 그 뿌리는 귀족 가문. 노르망디와 부르고뉴 지역에서 활동한 하급귀족 가문이지만, 가세 자체는 샤를 드 골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전까지 거의 800년 이상 존재감이 없을 정도로 평범했다.

2. 성장 과정

196cm으로 잘 성장했다.

프랑스 북부 공업지대의 중심도시 에서 가톨릭계 고등학교 교사인 앙리 드 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릴은 벨기에와 접경한 도시이며, 이 지역의 중심 기차역 이름이 릴-플랑드르 역. 같은 프랑스라도 이 지역은 네덜란드-벨기에 쪽의 신교 문화가 자리잡은 곳이라 일반적인 프랑스 문화권의 쾌락주의와 다르게 노동의 가치를 중시하는 현실주의적 풍토가 강한 지방이었으며 이러한 유년시절의 환경은 일반적인 프랑스 엘리트들과 다른 드 골의 독특한 깐깐함과 금욕주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드 골은 어린 시절부터 역사책이나 어른들의 구전을 통해 1870년 불 전쟁의 패배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한을 알았으며 이른 나이에 "프랑스의 명예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는 데 이바지하기 위해" 군인이 되기를 꿈꾸었다.

3. 야전 군인 시절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09년 생 시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는데, 이 때부터 이미 그의 자기중심적이고 뻣뻣한 성격과 큰 키 때문에 눈에 띄게 나타나서 동기들에게 '꺽다리 황제 폐하', '아스파라거스'로 불리며 놀림받았다고 한다. 이런 동기들 중에서 가장 친했던 이들로는 투안 베투아르(Antoine Béthouart), 퐁스 쥐앵(Alphonse Juin)이 있었는데 둘다 훗날 자유 프랑스의 군사령관이 된다.

1912년에 사관학교를 졸업한 직후 나중에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이 되는 리 필리프 페탱이 지휘하는 아라스 제33보병연대에 초임 소위로 임관한다. 제1차 세계대전시에는 대위베르됭 전투에 참가, 부상을 입고 32개월동안 독일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이때 5번이나 탈출을 시도하는 근성을 보여주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워낙 큰 키 때문에 변장시 입을 옷을 구할 수 없는 등의 일이 발생하면서 번번이 실패한다. 1차대전 때만 해도 포로에 대한 대우가 신사적이어서 이런 탈출이 실패하더라도 정도에 머물렀다고 한다. 또한 이때 러시아군 장교로 참전했다 포로가 된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친구가 되었다. 투하쳅스키는 훗날 소련군의 총참모장이 된다. 또 다른 인물로는 르투 카트루(Georges Catroux)가 있는데, 당시 중령이었던 카트루는 드골에 군사적 식견과 사상에 상당히 감명을 받았고, 후에 자유 프랑스에 가담하여 드골보다 상급자임에도 그의 명령을 충실히 따라주었다.

종전 직전부터는 원수가 된 페탱의 부관으로 근무하였고 사관학교와 육군대학 교관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하무인, 협조성 결여 등이 당시 근무기록으로 남아있을 정도로 근무고과가 나빠서 10년 이상을 대위에 머물러 퇴역 위기에 몰리기도 했으나 페탱의 천거로 소령에 진급하게 된다.

이렇듯 페탱은 드골이 햇병아리 소위 시절부터 그의 뒤를 봐주던 은인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드골의 성격과 태도, 서로간에 군사적 관점의 차이 등으로 인해 둘의 관계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특히 드골이 자신의 주장을 알리기 급한 나머지 페탱을 위해 작업해주던 원고를 수정하여 1938년의 자신의 이름으로 저서를 발간한 일로 둘의 관계는 단절되어 버린다. 여기에 훗날의 일이지만 페탱이 친나치적인 시정부를 수립하자 완전히 둘의 관계를 적으로 돌아서 버리지만, 페탱이 전범재판에 불려나왔을 때 드골은 페탱에게 "한때 저의 상관이자 모범이었던 각하. 그런 각하는 어디로 사라지셨습니까?"라며 한탄하기도 했다. 그리고 구명운동을 벌여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으로 선처를 구했다. 여하튼 드골의 이러한 모습은 페탱을 존대하던 드골의 상관들로부터도 건방지다는 인상을 주었고 대령 진급을 2번 이나 누락시키는 등에 방법으로 더욱 견제를 가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 드골이 기대를 품에 안고 최초로 맡은 기갑부대인 메츠의 507부대를 당시 메츠 군관구 사령관인 앙리 지로가 드골이 훈련 수행 중 전술주도권을 침해했다며, 507부대가 좋은 성적을 발휘했음에도 완전히 부대를 해체시킨 일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1차 대전에서 기관총, 대구경 포와 장갑차의 위력을 실감한 드 골은 전차를 주력으로 하는 완전한 "갑사단"의 창설과 그를 이용한 기동전의 확립을 역설했으나 앞서 밝혔듯 타고난 뻣뻣하고 고집스런 성격탓에 당시 프랑스군 지휘부에서는 '전쟁광', '망상증 환자' 취급 받으며 번번이 무시되었다.
다만 드골의 기동전 개념은 전차가 주력이라는 부분까지만 이르렀을 뿐, 정작 더욱 중요한 항공 전력과의 연대를 생각치 못한 반쪽짜리라 도입되었더라도 독일의 전격전에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프랑스군에서 이 정도 수준이라도 기갑부대를 전면에 내새운 기동전 개념을 이해하고 있던 인물도 없다. 당시 프랑스군 지휘부는 마지노 선으로 대표되는 참호전을 맹신하고 있었다. 드 골은 이를 '패자의 전략'이라고 비판했으나, 그의 이야기는 비시에 정부가 세워질 때 쯤에야 받아들여지고 만다.

4.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자유 프랑스 수반


1940년 5월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자 약식으로 준장으로 진급한 드 골은 편성시작 단계라 급조라는 말을 붙이기도 어려운 제4기갑사단을 이끌고 분투했는데 당시 프랑스 군 제대들 중 가장 제대로 된 활약을 했다. 종심 깊숙한 진격을 하느라 측방이 위험해진 하인츠 구데리안의 제19기갑군단의 후방으로 기동해 제4기갑사단은 구데리안의 사령부에서 단 2Km 떨어진 위치까지 파고드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19군단 군수참모 그라프 폰 킬만스에크 대위의 발빠른 대처로 드골의 공세는 좌절되고 말았다. 훗날 NATO군 총사령관이 된 킬만스에크는 대통령이 된 드골에게 드골의 공세를 "시간적, 공간적으로 완벽한 역습."이라 극찬했다. 그리고 자기가 막았지. 완벽한 자화자찬(..) 편성 시작 단계인 사단으로 그만큼 뚫렸다는 소리인데? 1940년 6월 나치 독일에게 프랑스가 항복을 선언하자 드 골은 몇몇 동지들과 함께 곧바로 영국으로 망명, 이후 에밀 뮈즐리에 제독 등이 합류하여 망명 정부인 자유 프랑스를 조직했다.

그러나 1940년 프랑스군의 주력은 페탱이 이끄는 비시 프랑스에게 장악되어 있었고 식민지 제국 역시 비시 프랑스를 지지하는 세력이 거의 전부였기 때문에 드 골의 자유 프랑스는 사실상 무늬만의 정부일 뿐 거의 영향력이 없었으며, 오로지 윈스턴 처칠이 이끄는 영국 정부만이 자유 프랑스의 효용가치를 인식하고 드 골을 지원했다. 게다가 1941년 처칠의 지원으로 드 골이 주도한 카르 상륙작전의 실패와 전황의 악화로 인해 드 골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졌으며 여기에 그의 오만하고 비협조적인 성격은 같은 연합국 지도자들인 처칠과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도 분노를 사서 전쟁 내내 드 골은 처칠과 루스벨트와 심각하게 갈등했다.[1]게다가 처칠과는 심각하게 싸우면서도 나름 상대를 인정하는 관계였지만, 루스벨트의 경우 끝까지 드 골을 프랑스 지도자로 인정하길 꺼려하다가 1945년이 되어서야 마지 못해 드 골을 워싱턴에 초청하면서 공식적으로 드 골을 인정했다. 루스벨트는 그가 전후에 독재자가 될 가능성을 우려했다고 하나 당시 주변인들이 보기에도 루스벨트의 드 골 혐오는 지나치게 감정적이었다고 한다.

1942년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프랑스군의 영웅이자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의 민간, 군사분야 총사령관인 앙리 지로를 드 골과 동석시키면서 드 골 대신 지로를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로 옹립하려고 시도한다. 지로는 젊은 드골보다 당대에 더 유명하긴 했지만, 전부터 드골과 적대관계인데다가 그를 밀어준 미국도 드골을 견제하려던 의도가 깔려 있었기에 지로의 지도자로서의 위치는 논란이 많았다. 거기다 지로는 천성적으로 군인이지 정치력이 부족했던 탓에 결국 드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1943년 이후 북아프리카의 식민 제국들이 차례로 드 골의 자유 프랑스 지지를 선언하면서 드 골의 입지는 확고해졌으며 드 골은 1943년 6월에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서 프랑스 국가자유위원회(CFLN)를 출범시켜 자유 프랑스를 연합국의 일원으로 공식적으로 편입시켰다.


군복 입은 키큰 사람이 샤를 드 골. 한창 때의 키가 196cm였다고 한다. 드 골 왼쪽에 대화하는 인물은 조르주 비도[2], 오른쪽 장군은 리프 르클레르[3]이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자 드 골은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유 프랑스군이 파리 해방의 주력이 되길 원했으며 결국 드 골의 자유 프랑스 육군 2개 사단이 파리 내의 레지스탕스와 시민들의 도움을 얻어 파리를 해방시켰다. 당시 전후 프랑스 정치의 주도권을 놓고 미군, 비드골계 우익 레지스탕스, 공산당, 자유 프랑스군이 치열한 리해방 경쟁을 벌였다. 결국 드골과 자유 프랑스군이 수십만 파리시민의 열렬한 환호속에 개선 행진을 하면서 해방자 드골의 신화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당시 파리 해방에 대한 표현 중 하나가 이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제 드골은 프랑스 전체를 손에 쥐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프랑스의 통치자로 다른 연합국에게 인정받고 평생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된다. 이 과정을 그린 영화가 1966년 르네 클레망이 감독한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다.
이렇게 써놓으면 다된 밥에 숟갈 올리려고 달려든 병림픽처럼 보이지만 원래 미국은 원래 자유 프랑스를 제대로 된 강대국으로 보지 않아서 얄타 회담을 비롯한 전후 세계질서 재편을 위한 중요 회담에서 결국 프랑스를 제외시켰었지만 이 사건 덕분에 마지막에는 프랑스 정국을 장악한 드 골을 인정하고 프랑스를 연합국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니 프랑스 전체를 위해서도 자유 프랑스가 파리를 선점한 것은 득이 된 셈이다. 한국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 역시 이렇게 성공했었더라면 하고 바라는 건... 무리일까

1945년 11월 헌법제정의회에 의해 내각 수반으로 임명된 드 골은 대(對)독일 저항운동의 주역이었던 프랑스 공산당(PCF)을 내각에서 제외시키고[4] 우파만의 정부를 세웠으나,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는 좌파와 중도파[5]를 권력에서 배제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으며 1946년 6월 총선에서 드골의 정당인 대중공화운동이 원내 제1당에 등극하긴 했지만 개헌저지선조차 넘기지 못한 상태였고 결국 다시 치러진 1946년 11월 총선에서 공산당이 제 1당으로 올라서면서 그해 말 정계에서 은퇴를 선언한다.

5. 정계복귀와 제5공화국 출범

(ɔ) from

존 F. 케네디와의 정삼회담에서.(1961) 70을 넘은 나이에도 저 정도 덩치였다. 케네디의 키는 183cm.

1950년대 중반까지 전쟁 회고록 집필 등으로 소일하며 칩거하던 드 골은 1956년 수에즈 전쟁에서의 패퇴. 1958년 알제리 전쟁과 이로 인한 군부 쿠데타위협으로 사회당 정권이 붕괴될 위기에 몰리자 "프랑스의 알제리"를 주장하며 우파와 중도파의 압도적 지지속에 제4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제5공화정을 수립,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영국이 전후 대부분의 식민지를 독립시킨 것과는 달리 프랑스는 좌우파 가릴것 없이 식민지 유지에 강한 집착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남아에선 막대한 군사비를 쓰고도 1954년 베트남 디엔비엔푸 전투로 개털리면서 강제로 쫒겨났다. 아프리카 전체의 1/4인 광대한 프랑스 식민지 전역에서 독립요구가 분출했고 특히 알제리는 무장세력의 독립전쟁으로 엉망진창이었다. 결국 현실과 타협해서 알제리 독립을 시사하는 중도파 내각에 반발해서 극우세력과 군부는 공공연히 쿠데타 위협을 가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알제리 주둔군이 파리 공항에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기갑부대를 동원 의회를 점령한다는 식의 구체적인 쿠데타 시나리오가 공공연히 거론될 정도였다. 2차대전의 피해와 베트남,알제리 독립전쟁에 따른 막대한 군사비로 경제는 엉망진창이었고, 외환보유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드골은 군복을 입고 공중파 TV연설 한번으로 정권을 무너뜨리고 의회해산과 헌법개정 그리고 임시정부 수반자리를 쟁취했다.

그리고 우파와 중도파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알제리 독립을 승인, 긴 전쟁의 끝을 맺는다. 당시에 알제리에서의 대표적 연설 문구로 "나는 여러분들을 이해했습니다."가 있다.[6] 이외에도 집권후 현실을 직시하고 전면적인 식민지 독립을 승인, 1960년에 모든 아프리카 식민지가 독립하고 대신 프랑스연합이라는 국제기구를 결성했다. 이로 인해 격노한 군부와 정면으로 대치, 쿠데타와 살해 음모를 헤쳐나가며 정권을 강고히 한다.

레더릭 포사이드의 소설과 영화로 유명한《자칼의 날(The Day of the Jackal)》이 바로 알제리 독립 직후 군내 극우파 결사인 OAS(비밀군사조직. Organisation de l'armée secrète)와 드골 정권간의 암투를 다룬 것이다.

1963년 영국의 유럽 경제 공동체(EEC)가맹에 거부권을 발동했으며, 독자적인 핵무장, 사실상 미국의 지휘 아래에 있는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에서의 탈퇴 등 '위대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민족주의의 부흥을 위한 주체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1963년에는 독일의 콘라트 아데나워총리와 회담하여 프랑스와 독일의 오랜 갈등관계를 종식하고 경제와 외교분야에서 협력하는 '독일·프랑스 화해협력조약'을 맺었고 이는 뒷날 유럽연합(EU)로 발전되는 유럽 경제 공동체(EEC)의 창설로 연결되었다. 1965년에는 7년 임기의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61년 본에서 열린 독일의 아데나워 총리와의 정상회담. EU의 시발점은 이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1967년에는 당시 분리독립 문제로 내부갈등이 심각하던 캐나다 퀘벡을 방문하여 공식 연설 중에 외교적 관례를 무시하고 "자유 퀘백 만세"를 외치면서 (분리독립에 반대하는) 캐나다인들을 격분시키기도 했다. 덕분에 영국 및 캐나다 정부는 스팀을 좀 받았다. 아이러니한 건 세계대전 도중 대다수의 퀘벡인은 드골이 아니라 비시 정부를 지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장기 집권은 독재로 비쳤다.[7], 드골 시절에도 무려 7년 중임제[8]의 제5공화정의 대통령 권력집중은 유럽 현대 정치사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었고 후일 한국의 10월 유신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7년이라는 대통령 임기는 대한민국 제5공화국의 임기 기준이 되었다. 원래는 제4공화국처럼 6년을 하려고 했다고. 뢰벤슈타인은 이러한 드골의 통치를 38년간 계엄령을 유지한 장제스 치하의 대만, 이승만/박정희 정권과 함께 대통령이 의회와 법원을 압도하는 신 대통령제로 분류하였다. 드골은 현재의 프랑스 대통령의 권한과 달리 지자체의 권한을 제한하는 여러차례의 국민투표를 통해서 사실상 독재적 권한을 행사했다. 드 골의 정치방식은 강력한 경찰력과 정보기관에 의존하는 비민주적 독재는 아니지만 개인적인 인기에 의존하여 정국이 난관에 부딪칠때마다 국민 투표를 통해 강력한 권력을 확인받는다는 점에서 정치학적으로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에 해당한다.

당시 레튼 우즈 체제의 해체를 시도하던 미국에 반대하면서 금본위제의 강화를 주장한 드 골의 대외 금융정책은 미국과 주변국의 강력한 견제를 받았다. 결국 1971년 당시 미국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이 달러의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면서 1944년 이후 지속된 브레튼 우즈 체제가 붕괴되었다. 이것은 전후 케인스주의의 종말과 통화주의 체제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결국 1968년 프랑스의 경제성장률이 집권 이후 최저인 4.4%로 하락하면서 경기가 악화되었고, 드 골 체제의 경직된 권위주의에 반발하는 전후세대와 이에 합세한 노동자들이 주도한 68운동(이른바 '5월 위기')으로 위기를 맞은 드골은 그 직후 총선에서 예상을 깨고 드골파가 압승을 거두면서[9] 위기를 넘기는가 싶었지만, 1969년 4월 '지방행정과 상원의회 개편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47%대 53%로 부결되자 4월 28일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이후 고향에서 칩거하다가 회고록 1권을 출판한 직후인 1970년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6. 평가

많은 프랑스인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그를 '나치의 압제에서 프랑스를 해방시킨 영웅'이자 전후 프랑스의 재건을 주도한 인물로 높이 평가하나 한편으로는 전후 청산과 대 독일 투쟁과정에서 보여준 이미지 조작과 권력 지향성을 비판하는 의견도 있으며, 제 5공화국의 권위주의적 성격 때문에 그를 독재자로 간주하는 여론도 존재한다.[10] 어쨌든 20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는 듯. 현재 프랑스 해군은 최신예 항공모함에 그의 이름을 붙여서 샤를 드 골급으로 명명하고 파리 샤를 드 골 국제공항은 현재 프랑스 최대 규모의 공항이자 유럽의 대표 관문으로 활약하고 있다.

물론 프랑스에서야 위인이지만, 식민지에서는 다르다. 그 중에서도 식민 지배를 당한 알제리에선 히틀러와 맞먹을 정도로 미움을 받는다.. 뭐 처칠이나 아타튀르크도 그렇듯이. 알제리 여행을 하던 고려대학교 김화영 교수가 현지인에게 프랑스 유명인 말하자 드 골 이름을 듣더니 그 새낀 알제리에선 히틀러요! 라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2차대전 당시 알제리는 프랑스 땅으로 다른 아프리카와 다르다고 처칠에게 거듭 강조했던 인물이니 알제리 전쟁 당시 수백여만 알제리 사망에 대하여 알제리에선 히틀러급으로 증오를 받기도 했다. 그나마 백기를 들고 알제리 독립을 수락한 탓에 조금은 덜 까이긴 하지만. 알제리 전쟁 항목을 봐도 그들이 증오할 만하다. 또 알제리 독립 이후인 1966년에 알제리 땅에서 핵실험을, 그것도 알제리인을 시험도구로 삼은 게 드러나 알제리인들의 증오는 심화되었다.

한국에선 주로 밀덕후 계열의 네티즌들이 '불까' 성향이 강해서 국가로서의 프랑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고, 대표적인 정치인이었던 드골에 대해서도 단점이 강하게 부각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정책때문에 프랑스는 나토와 공산권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면서도 양쪽으로부터 여러가지 이권은 있는 대로 다 챙기고 제3세계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대표적인 것이 무기 수출이다. 미국과 소련 양쪽 모두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던 비동맹국가들에게 적당한 가격에 괜찮은 성능의 현대식 무기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는 프랑스뿐이었다. 미라지엑조세등... 그의 대외 정책은 현재 프랑스 대외정책의 기본이 되고 있으며, 훗날 드골과 상극인 좌파 사회당의 미테랑 정부도 드골의 대외정책 기조는 이어나갔다.

드골이 정치적인 야심가였고 독선적인 기질의 소유자이긴 했으나 그가 최선을 다해 나치에 항전했던 애국자임은 분명하다. 물론 전후의 부역자 처리나 레지스탕스의 신화화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2차대전 당시 드골과 자유프랑스가 국내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지도했다는 건 명백한 허구이다. 레지스탕스의 대부분은 공산당과 사회당의 좌익계였고, 이들은 종전때까지 드골을 무시했다. 심지어 우익계 레지스탕스들도 파리해방 이전까진 자유 프랑스의 지도를 거부했다. 하지만 이런 문제가 있었다 해도 어차피 국가정체성의 회복이 최우선 과제인 점을 지목한다.

그가 1958년 집권하면서 탄생한 제5공화국 역시 기존 민주정에 비해 상당히 독재적인 성격이 강한 것은 분명하지만 1세계로부터 이익을 취하면서 동시에 비동맹 노선을 확립한 그의 외교는 프랑스의 국익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전후 베트남과 알제리 등에서 무리한 식민주의 정책으로 몸살을 앓던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탈식민주의 노선으로 전환한 것도 드 골 정권부터이다.

국내 정치에서도 드 골 본인은 독재에 가까운 권력자였지만 아래와 같은 업적을 남겼다.

  • 전국민 투표권 확대 : 1944년 여성, 1958년 식민지 국민과 이슬람 교도들, 1962년 19세 이상의 전 국민으로 확대.

  •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 인정 : 1962년으로 유럽에서는 상당히 늦은 편이다. 영국은 1922년, 독일은 1955년, 네덜란드는 1948년에 각각 병역거부자의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

  • 내각과 대통령의 권력 분점이 가능한 혼합정부제를 채택 : 기존판은 이원집정부제라고 서술하였으나 집정이란 단어 자체가 민주주의적이지 않기에 혼합정부제로 용어를 수정하였다.

  • 획일적 양당제의 위험성을 방지할 수 있는 선 투표제 도입 : 대선 1차 투표에서 1, 2위를 차지한 후보가 2차 투표로 최종 당선자를 결정한다. 군소 정당의 후보도 경우에 따라서는 2위권 안에 들면서 최종 결선투표에 진출할 수 있기 때문에 비슷한 성향의 제 1야당으로부터의 사퇴 압력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다만 2002년 대선에서는 이러한 시스템이 거꾸로 좌파 후보의 난립을 가져와서 극우파인 장 마리 르펜이 좌파 후보들을 누르고 결선투표에 진출하는 병맛스런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 낙후되어 있던 사회보장제도의 정비

전체적으로 전시 재상의 성격이 강했던 윈스턴 처칠과 달리 드골은 전쟁 당시보다는 전후의 혼란기에 능력을 발휘했다는 면에서 정치인으로서는 더 뛰어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수세에 몰릴때 마다 재신임투표[11]을 통해서 실질적인 독재를 펼쳤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자신이 주장하는 법안과 자신의 재신임을 결합시키면서 정책에 대한 비판을 피해간다는 것은 곧 민주주의의 대원칙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신임투표에 대한 반성으로 법학계에서는 대부분의 국민투표에서 대통령의 재신임을 결부시키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12]

7. 일화

드 골은 키가 매우 커서 196cm나 되었으며 덕분에 루저의 난 당시 연합군 승리에 결정적 공헌을 한 지도자라는 농담이 나돈 적이 있다. 2차대전 갤러리 "핼구"의 작품
여기에 더해서 윈스턴 처칠에게 가려서 알려지지 않았을 뿐 하루 두 갑을 태우는 애연가였다고 한다. 다만 1950년에 금연을 선언했는데 금단 증상 때문에 주변사람들에게 엄청나게 신경질을 내고 다녔다고...

지독할 정도로 시간관념에 철저해서 '프랑스인 치고는' 식사시간이 30분을 넘기지 않았다고 한다. 가족들에게조차도 원칙과 권위를 내세우는 인물로 집에서도 침실 밖에서는 계절에 관계없이 정장을 입었으며 식사시간에는 정치 등의 공적인 이야기를 금지시켰다고 한다. 부인에게는 평생 존댓말을 사용했다고도...술은 잘 못했지만 식욕은 왕성해서 대식가였다고 하는데, 그래서 노년에 당뇨병으로 식단조절을 할때 왕성한 식욕을 조절못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결국 자유의 투사와 독재자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는 이 사람의 일생을 관통할 수 있는 말은 독단성일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성향이 주위에 많은 반감을 샀지만 프랑스의 독자적 정부수립과 독자적인 대외노선을 관철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음은 분명하고, 가끔은 이러한 독단성이 하나의 인간적인 매력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처칠은 그의 영국에 대한 불신과 독단성에 대해 넌더리를 내며 그를 혐오했지만 동시에 그 독단성에서 나오는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과 대담함에 경의를 가지고 있었고, 그를 지지했다.[13] 드 골 역시 처칠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 "이제 영국은 대국이 아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운증후군 환자인 딸과 함께 찍은 사진.

대체로 가족들도 상대하기 힘든 완고한 인물이었지만, 가족들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편지를 굉장히 자주 보내곤 했으며 편지 속의 문장은 평소의 드 골의 이미지와 다르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라고...다운 증후군 환자로 태어난 둘째 딸을 평생 아끼고 사랑했으며 딸이 스스로를 비정상으로 여기지 않도록 주변 분위기를 만들어주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아끼던 후배 장교가 병으로 일찍 죽었을 때 슬퍼하면서 6개월간 상복을 입고 다닌 것도 유명한 일화.


2차대전 중 아들(左)과 함께.

아들 리프 드골 제독(1921 ~ )은 해군 장교로 입대해 2차대전 중엔 아버지를 따라 자유 프랑스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해군 대장 계급으로 예편했다. 현재(2015년)도 90을 넘긴 나이로 생존해 있다.

사임 후 시골에서 부인과 함께 지내다가 갑자기 바닥에 쓰러지면서 엄청난 고통을 호소했는데 이 때가 드골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불평을 한 때였다고…. 마지막으로 한 말도 (을 가리키며)'여기가 아프다'였다고 한다. 그 말을 한 후 의식을 잃고 몇 분 후에 숨졌다.

드골이 사망하자 영국의 극작가 노엘 카워드 경은 '드골이 하느님과 무슨 대화를 나눌 것 같냐'는 질문을 받았고, 그는 "그야 하느님의 프랑스어 실력에 달렸겠지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14]

인디아나 존스에서 1차 대전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인디와 만나는 걸로 설정된다. 역시 몇번 탈출하다 잡히고 마지막 순간에 국경지대에서 인디와 헤어져서 생포되는 것으로 처리했다. 극에서는 이렇게 끝나지만 원래 시놉시스에 따르면 인디는 흘러 흘러 베를린으로 가서 1차 대전의 주역을 만난다는 설정이었다.

히치콕 감독의 동일명 영화의 원작인 레온 유리스의 토파즈에서는 약간 치매끼가 있고 극도의 미국비판론자로서 결국 소련의 첩보조직에 자신도 모르게 휘둘리는 프랑스 대통령으로 묘사된다. 물론 이름은 다르지만 작중 묘사되는 북아프리카의 행각이나 알제리 사건 등에 대한 묘사, 결정적으로 '2차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출신', '반미 민족주의자 정치인'이란 표현을 보면 드골 이 맞다(...).

8. 주요 발언

  • 제 정신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국민들과 패배하고 흩어져 달아나는 군대를 목격하고, 더욱이 우리를 경멸하고 있는 적의 무례한 태도에 대해 전해듣고, 나는 끝없는 분노가 복받쳐 오른다. 아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 전쟁은 처음부터 대단히 잘못 시작된 전쟁이다. 그러므로 전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희망이 있는 것은 바로 그때문이다. 나는 싸움이 필요한 곳을 보면 어디든 달려가 싸울것이다. 싸움이 필요한곳에서, 싸움이 필요한 만큼, 적이 패배할때까지, 국가의 임무가 깨끗이 청산될때까지 나는 싸울것이다. 그래서 나는 바로 그날,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15]

  • 내 생각에, 위대하지 않은 프랑스는 프랑스가 아니다.("à mon sens, la France ne peut être la France sans grandeur.") - 1954년 전쟁 비망록 1권에서.

  • 나 드골 장군이오! - 1940년 6월 18일, BBC방송을 통해 프랑스에 전파한 호소문의 문구. 드골이 누군지 모르던 프랑스인들에게 자유 프랑스의 존재와 결사항전에 대한 주장을 통해 자신을 처음으로 부각시킨 연설.

  • 내가 곧 프랑스다 - 1940년 11월, 영국의 외무 장관 앤서니 이든에게. 일견 보기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병맛같은 발언이지만, 그 당시 영미에서 비시 프랑스를 회유해보려는 시도에 대해 비난하고 프랑스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음을 강경하게 주장하는 발언이다. 이러한 상징성때문에 현재 프랑스 정치인들의 선거유세용 단골 표어중 하나라고(...)

  • 파리는 상처입었습니다. 파리는 파괴되었습니다. 파리는 고문받았습니다. 하지만 파리는 해방되었습니다. - 1944년 파리 해방 직후 연설에서.

  • 나는 독일을 매우 사랑한다. 그래서 독일이 여럿이었으면 좋겠다. - 2차 세계대전 말. 전후 독일 문제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 또다른 번역으로는 나는 독일이 너무 좋다. 그래서 두 개면 더 좋겠다.[16]

  • 나는 여러분들을 이해했습니다. - 1958년, 알제리에서의 연설. 알제리의 독립을 사실상 인정한것이나 다름없는 내용.

  • 그 친구, 사격실력이 형편없구만. - 여섯 번째 암살 시도 당시 여러 번의 총격을 가하고도 하나도 맞추지 못한 암살범을 두고 한 농담.

  • 위대한 프랑스 만세! 오늘 아침 이후로 프랑스는 더욱 강력하고 자랑스런 국가가 되었다 - 1960년 핵실험 직후 성공 소식을 발표하며 던진 첫마디.

  • 자유 퀘벡 만세!!! - 1962년 캐나다, 퀘벡에서 연설도중에 한 말. 당시 퀘벡 분리독립 문제가 한창이던 상황이라 그의 발언은 대단한 물의를 일으켰다.

  • 내버려 둬. 그도 프랑스야. - 68운동 당시 장 폴 사르트르 체포를 건의한 측근에게.[17]

  • 나는 프랑스 대통령으로서의 직권 행사를 중지한다. 이 결정은 오늘 정오부터 효력을 갖는다. - 1969년 4월 28일 퇴임 성명서 전문. 정말로 이게 성명서 내용의 전부였다.

  • 아파! - 유언이다.[18]

9. 여담

샤를리 엡도의 'Charlie'가 샤를 드 골을 뜻하기도 한다. 샤를리 엡도의 전신격인 Hara-Kiri Hebdo라는 주간지가 있었다. 그런데 샤를 드 골이 사망했을 때 고인드립을 쳐서 프랑스 정부의 어그로를 끌었고, 결국 폐간해야 했기 때문. 그래서 Hara-Kiri Hebdo를 출판하던 사람들 거의 전부가 샤를리 엡도란 이름으로 새로 주간지를 출판했다. 그래서 다른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샤를 드 골을 풍자하는 뜻으로도 주간지 이름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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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는 애초에 드골과 그들의 전쟁목표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처칠과 루즈벨트는 전쟁에서 승리를 취하면 그만이었지만 드 골은 프랑스가 군정을 받는 꼴은 절대로 못본다라서...
  • [2] 드골이 후원한 레지스탕스 지도자 장 물랭 사후 레지스탕스를 이끈 인물로 드골이 상당히 싫어한 인물이다. 후에 제4공화국 시기에 총리도 지냈지만 알제리 전쟁 문제로 독립 반대를 고집하다 정계에서 퇴출됐다.
  • [3] 드골과는 사제 관계에 가까웠던 측근으로 자유 프랑스 육군 제2기갑사단장이었고, 제일 먼저 파리를 해방시켰다. 그 공로로 프랑스의 최신예 주력전차에 이 사람의 이름이 붙었다.
  • [4] 2차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국내 레지스탕스의 70%가 프랑스 공산당 지하조직이었다.
  • [5] 애시 당초에 1945년과 1946년의 두차례 총선결과를 보면 급진당(중도파)과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프랑스 사회당의 전신)를 제하면, 드골파는 과반수는 커녕 개헌저지선을 넘기지조차 못했고 나머지 우파를 합해도 의석의 40%를 넘기지 못했다.
  • [6] 근데 착각하면 안되는 것이 이건 알제리 사람들에게 한 게 아니라 4공 정부를 반대하고 들고 일어난 알제리의 프랑스인들에게 한 말로 알제리 독립반대파들을 이해한단 모호하고도 정치적인 수사다. 이날의 연설은 드골이 프랑스령 알제리 만세라고 외치는 걸로 끝났다.
  • [7] 실제로 방송통제정책을 시행해서(다만 르몽드나 뤼마니테같은 좌파신문이나 잡지는 그대로 놔두긴 했다. 특히 르몽드의 설립에 샤를 드골이 큰 역할을 한걸 보면 나름대로의 대인배적인 행보였던 셈.) ORTF를 철저하게 친정부적인 논조의 방송사로 만들었으며 그래서 68혁명과정에서 ORTF 직원들이 편집의 독립성을 요구하며 대대적으로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일이 가능했던건 신문과 다르게 방송은 당연히 정부의 목소리를 전달해야한다는 당시 정부당담자들의 구태의연한 인식(그래서 알제리 전쟁때 TV방송에선 현장상황을 제때 볼수없었다고...)과 함께(RTF->ORTF 참고로 ORTF가 1975년에 해제되면서 TV방송사는 3개로 늘어났다.) 신문에 불신감을 가진 샤를 드골이 방송에 적극적으로 통제를 가해서 가능한 일이었지만(실제로 프랑스 공영방송들은 70년대까지도 국영방송들처럼 논조면에서 보수파 정치인들의 입김을 많이 받았고, 80년대-90년대 초반의 민방도입과 정착에서 TF1이 민영화 되고, L5 채널이 공영방송 채널로 배정되는 등의 풍파를 겪었다.)
  • [8] 현재는 5년으로 임기가 축소되었다.
  • [9] 그것도 그냥 압승이 아닌 개헌선(394/485)을 넘어서는 초압승이었다.(득표율은 58.1%) 이는 좌파가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핶기 때문인데다가 기성세대에서 불안감을 느낀 탓이 컸다.
  • [10] 대표적으로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드골에 대해 '군인이며 애국심이 강하고 국가에 헌신적이긴 하나, 달리보면 정치가로 파벌을 조성한다. 따라서 독재가가 될 속성을 갖췄다고 본다.'라고 평가하며 드골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 [11] 자신이 내걸었던 법안이 부결되면 사임하겠다 조건을 단 투표
  • [12] 우리나라라고 예외가 아니다.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은 1975년 유신헌법의 찬반투표를 재신임투표로 하면서 압도적인 찬성표를 얻어내며 장기집권. 심지어 고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사유 중 하나가 재신임 투표 제안 발언(청구도 아니었다.) 역시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과 비판에 올바르게 대처하지 못하는 태도로 보인 것이 큰 이유였다.
  • [13] 여담이지만 전후에도 처칠에 대한 드골의 마치 나쁜 남자를 연상케 하는 태도는 어디 간게 아니라서 전쟁후 드골이 가장 먼저한 행동은 처칠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지만,드골과의 만남에 대한 "나는 강인하고 무표정하게 서있는 드골을 보았다. 그와 인사를 나누며 나는 불어로 속삭였다. L'homme de destin!(운명의 사람)"라는 처칠의 오버섞인 기록에 대해 드골은 "그런 적 없다"라고 심드렁하게 까버린 적도 있다.
  • [14] 드골의 고집에 대한 비아냥이다. 원래 영어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프랑스어를 쓰는 것을 고집했으므로, 조물주와의 면담에서도 그 고집을 부릴거라는 소리.
  • [15] 바로 그 날이란 파리가 함락당한 날을 의미한다고 한다.
  • [16] 샤를 드 골이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모리아크이 한 말이다. 원문은 J’aime tellement l’Allemagne que je suis heureux qu’il y en ait deux.
  • [17] 골수 좌파계열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사르트르는 평생동안 드골에 대해 살벌한 비판을 가했다. 하지만 드골은 표현의 자유와 (좌파도) 애국심에 행하는 발언이라는 이유로 해를 가하지 못하게 하였다.
  • [18] 정확히는, 목을 가르키며 아프다고 했다.유언이라기 보다는 급작스러운 단말마에 가까운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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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2 02:5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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