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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수

last modified: 2015-01-30 00:27:46 by Contributors


조-서 양분 시대의 주인공

한국의 프로바둑기사.

독학으로 바둑을 배워 프로 정상급까지 올라간 천재기사. 엘리트 코스를 밟아 정상에 오른 조훈현과는 대조적이다.

어릴 때 독학과 내기바둑으로 바둑을 배우면서 입단하는 데 성공한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바둑책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현현기경"도 제대로 읽지 않고 입단한 것이라, 나중에 입단하고 한참 후에 "아, 이런 좋은 책이 있었구나!" 하면서 탄식했다는 일화가 있다. 다만 이때도 재능 자체는 천재적이라, 정석을 모르던 서봉수에게 아주 어려운 정석을 시험삼아 풀어보라고 줘보자 오랜 시간을 장고하며 끙끙대면서도 하나하나 정확하게 돌을 놓아가기도 했다고...[1]

당시 바둑계에서는, 지금도 그렇지만 내기바둑은 철저히 금기시된다.[2][3] 특히 초보자의 경우 더욱 그렇다.[4] 사사로이 뭔가를 걸면서 승부를 한다는게 초보자들의 심성에도 좋지 않고(특히 바둑계에 입문하는 초보 프로들은 보통 10대 초중반이다), 내기바둑은 손쉬운 승리를 위한 날빌꼼수를 자주 쓰게 되므로 바둑의 깊이가 약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내기바둑에 잘못 길들게 되면 그 내기 스케일도 장난아니게 커진다.[5] 당시 서봉수는 집안이 가난해서 내기 바둑을 일종의 생계수단으로 삼다시피 한 것인데, 그 경험조차 실력으로 승화시켰다. 무슨 경험을 하든 그것을 독으로 마시느냐 약으로 마시느냐는 본인의 기량에 달려있음을 보여주는 일례라 할만하다.

여하간에 프로에 입단한 직후 조남철에게서 명인위를 빼앗아 왔는데, 이 때 단수가 二단. 요즘이라면 初단이나 九단이나 실력 차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승단대회의 권위가 강력했던 당시에는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마저도 대회 결승에 오를 때는 初단이었고, 결승 5번기 도중 승단대회를 통과해서 二단 승단. 입단에서 첫 우승까지 1년 8개월 걸렸는데,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기록이 박영훈 (당시)二단의 2년.[6] 이후 명인위를 5연패하면서 서명인으로 불리게 된다.[7] 서봉수의 명인위 쟁취에 이어서 조훈현이 국수위에 오르면서 한국 바둑의 개척자 조남철 九단과 김인 九단, 윤기현 九단 등 일본유학파 1세대는 완전 몰락하고 조국수vs서명인의 장기집권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후 조훈현 독주시대에 2인자로서 번번이 도전하고, 전적에서 2:1 정도로 밀림에도 불구하고 '라이벌'로 불렸다.[8] 그 이유는 서봉수 이외의 기사는 조훈현에 그에 접근한 성적조차 도저히 낼 수 없었고, 서봉수와 그 아래 기사들의 차이도 워낙 컸기 때문. 서봉수 바로 아래에 있던 '도전 5강 - 서능욱, , 수장, 장수영, 성호'은 10여년간 끊임없이 도전했으나 일단 서봉수에게 막히고, 정말 어쩌다 서봉수를 넘어서도 조훈현에게는 무참히 박살났다. 심지어 도전 5강은 1985년 조훈현과의 이벤트 치수고치기 10번기에서 정선과 두 점을 왔다갔다하는 굴욕을 당하기까지 했다.[9]'동등한 대결로는 조훈현에게 이길 수 없다'는 것이 판명된 굴욕적인 수치인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엔 서봉수 외에는 조훈현과 싸움이 되는 기사가 아예 없었다. 덕분에 대부분의 타이틀 매치는 조훈현vs서봉수의 구도가 되었고, 이 조국수vs서명인 시대는 결국 1990년대 초 이창호, 유창혁이 등장할 때까지 10년 이상 이어진다.

한국 최초로 1000승을 달성한 프로기사이기도 하다. 조훈현은 대부분 대회의 타이틀 홀더였기 때문에 당시 도전기 대회 방식이 많은 특성상 도전기를 제외하면 공식전을 치를 일이 많지 않았고, 덕분에(?) 조훈현에게 지면 다음 대회 본선으로 떨어지고 대부분 결승까지 올라갔던 서봉수는 조훈현에 비해 훨씬 많은 대국 수와 더 많은 승수를 쌓았고 조훈현보다 먼저 1000승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

혹자는 1996-97년 제 5회 진로배 국가대항전[10]을 서봉수의 진정한 절정으로 꼽기도 한다. 이창호의 독재로 조훈현마저 밀려나는 와중에 서봉수는 완전히 뒷전으로 몰렸고, 모두가 "서봉수는 끝났다."라고 말했으며 실제로 제4회 진로배에서는 국가대표로 뽑히지도 못하는 굴욕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의 진로배 국가대항전, 한국의 4장(두번째 주자)으로 나선[11][12][13] 서봉수는 중국과 일본의 기사들을 9연승으로 쓸어버리며 한중일 삼국을 충격에 몰아넣었다.[14]서봉수의 9연승을 앞둔 당시 연합뉴스 기사[15] 무려 15명이 출전한 올스타전에서 열린 대국은 고작 11국, 중국의 5장 위빈이 거둔 2승[16]을 제외하면 나머지 대국은 모두 서봉수의 것이었다. 국가대항전 9연승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은 전무후무한 대기록.[17] 서 명인의 9연승에 대한 더욱 자세한 내용은 이곳을 참고

바둑 스타일은 처절하고 독하다. 최철한과 조금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최철한은 독하지만 처절한 것과는 좀 거리가 있는 반면 서봉수의 바둑은 승부근성이 뛰어나고 처절한 맛이 있다. 특히 그 처절함의 백미를 맛볼 수 있는 대국은 오오다케 히데오와의 제 2회 응씨배 결승 5국. 절망적인 상황에서 초강수를 연거푸 이어가며 바둑을 혼전으로 만들었고 오오다케의 실수를 놓치지 않고 그의 대마를 역으로 잡아내며 대역전승을 거두었다.

조훈현과는 사이가 영 좋지 않다. 조훈현이 처음 귀국했을 때는 사이가 분명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어느 새 사이가 많이 나빠져서 복기도 제대로 하지 않고 공식석상에서도 별로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이창호의 등장 이후 어느 정도 화해했나 싶었더니만 다시 관계는 악화일로. 바둑계 관계자들도 정확한 원인은 모른다고 한다. 서봉수는 자신이 특별히 싫어한 건 아니고, 조훈현이 자신을 멀리하다보니 자신도 자연스레 조훈현을 멀리하게 됐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2000년대 이후로는 조훈현 九단에 비하면 비교하기가 미안할 정도로 커리어가 추락했다. 주요한 원인은 2003년의 이혼으로 인한 심리적 충격으로 보이며 이혼 후 성적이 급속도로 추락하는 모습을 보이나, 이미 이혼 전부터 성적은 하강해 이세돌, 이창호 등의 일선 기사들과 비교하기엔 좀 무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일견 유창혁 九단과도 비슷한 케이스로 보인다. 최근에는 큰 대회 본선에서는 보기 힘들고, 시니어 기전에서 우승권을 다투는 정도다. 한국바둑리그에서 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바둑 관계자들은 엘리트 코스를 밟은 유학파 조훈현과 대조시켜 '순국산 바둑', 나아가 '된장 바둑'이라고 불렀는데 서봉수는 "내 바둑은 된장처럼 밋밋한 바둑은 아니고 고추장 바둑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된장 바둑은 이창호가 된장 바둑이지..."라며 촌평. 다만 몇 번이나 몰락했다가도 몇 번이고 다시 부활해서 일선의 기사들과 겨루고, 지금도 일선 기사들에 비해 모자람이 없는 조훈현 九단에 비해 서봉수 九단이 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철저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은 조훈현 九단에 비해 기본기 없이 독학으로 배운 바둑의 한계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 아니냐고 분석하기도 한다.

2004년 재혼을 했는데 상대가 베트남인이라 바둑계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18] 한국 바둑계의 명예를 훼손시킨다는 비난이 일부 있었던 것인데, 인종차별적 편견이 들어간 병크였기 때문에 오히려 역으로 비판받고 묻혔다. 당사자는 자신의 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밝힌 바 있으며, 이후에는 부인의 고향인 베트남을 종종 방문해서 바둑 보급 활동도 하고 있다. 부인의 친정에 생계수단으로 쓸 작은 배 한 척을 마련해 주는 것이 목표라고, 그리고 실제로 사준 듯하다.베트남 간 서봉수-2007.02.15

독설가로 유명한데, 남에게 어떤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그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어서 그런 것. 가장 유명한 얘기로는 "바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을 때 다른 기사들은 "인생"이니 뭐니 하고 대답했는데 서봉수는 "판때기에 돌 놓는 게임"이라고 대답하여 질문자를 벙찌게 만든 바가 있다.

주요 약력
1970년 프로 입단
1971년 명인전 우승(당시 18세로 최연소 기록)
1986년 九단 승단
1987년 국수전 우승
1993년 제2회 응씨배 우승
1994년 통산 1000승 달성
1997년 진로배 국가 대항전에서 9연승으로 한국팀 우승에 결정적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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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쉽게 설명하자면 수학의 정석 단원 앞의 설명만 본 사람이 수학올림피아드급 증명 문제를 어찌어찌 풀어낸 정도가 되겠다.
  • [2] 실제로 라이벌인 조훈현 九단도 어렸을 적 내기바둑을 두었다가 세고에 九단에게 파문당할 뻔 했다. 한번 둬보라고 꼬드겼던 후지사와 슈코 九단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 간신히 철회됐다고.
  • [3] 한국의 경우, 개척자인 조남철 九단이 초기부터 내기바둑을 강력히 배척했기 때문에 내기바둑이 프로와 철저히 분리될 수 있었다.
  • [4] 물론 차민수 四단의 바둑 스승이었던 한태훈의 경우 적정 수준의 내기바둑을 권장했다고는 하나 그건 매우 드문 경우로서, 그가 내기 바둑을 권장한 이유는 이긴 자가 강하다는 걸 가르쳐 주려고. 하지만 그 역시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을지언정 입단을 목전에 둔 사람에게는 좋지 않다고 경고한 바 있다.
  • [5] <del>원조 막장제조 게임답게</del> 과거에는 큰 규모의 내기 바둑(이를테면 쌀가마니빵, 방앗간빵과 같은)도 있었다고 한다.
  • [6] 당시 조남철 九단은 '서봉수가 三단만 되었어도..'라고 탄식했다나.
  • [7] 뒷날 국수전도 우승하여 2연패를 했지만, 지금도 서봉수를 '서국수'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다시피하다.
  • [8] 20여년간 대략 타이틀 결승전만 150여차례.
  • [9] 설명하자면, 일반적으로 두는 대국에서는 유불리를 없애기 위해 홀짝을 통해 흑돌과 백돌을 쥘 사람을 가리고 두며, 대국이 끝난 후 집을 셀 때 백에게 5집반 또는 6집반의 덤을 준다. 그런데 실력차이가 나면 그렇게 대등하게 두면 쳐발릴 게 뻔하기 때문에 상수에게 약간의 불리함을 주는데, 돌을 가리지 않고 상대에게 흑돌을 주는 것을 '정선'이라고 한다(이 경우 덤을 주지 않는데, 그만큼 흑이 유리해지는 것). 그걸로도 하수의 불리함이 커버되지 않으면 '접는다'라고 해서 미리 바둑돌을 몇 개(미리 두는 돌의 개수에 따라 두 점 ~ 아홉 점 접바둑으로 부른다) 더 놓아둔 후 두게끔 해 준다. 저 '정선과 두 점을 왔다갔다'라는 것은 그 정도의 어드밴티지를 줘야만 조훈현과 비슷한 승부가 될 수 있었다는 정도의 의미.
  • [10] 현재의 연승전 방식의 국가 대항전인 농심 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의 전신 격인 대회라 할 수 있다.
  • [11] 보통 연승전 형식의 국가대항전에서는 강한 기사일수록 뒤에 배치하는 방식의 엔트리를 쓴다.
  • [12] 물론 당시 서봉수 뒤에 남은 3명이 이창호, 조훈현, 유창혁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서봉수와 더불어 4천왕이라 불리긴 했었으나, 당시 4천왕 중 가장 실력이 떨어진다 평가받는 쪽은 서봉수였다.
  • [13] 물론, 이세돌이 선봉출전한 적은 있으나, 이는 개인의 강력한 희망이 반영된 출전이었고.. 그 외에는 부장(마지막에서 두번째)이나 대장으로 출격하였다.
  • [14] 쉽게 비유해서,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에서 15전 9선승제의 위너스리그 경기를 하는데 단 한 명의 선수가 9킬로 경기를 끝내버렸다고 생각해 보자!
  • [15] '실성한 사람처럼 앞뒤 안가리고'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
  • [16] 한국의 김영환 四단, 일본의 아와지 九단
  • [17] 심지어 이 9연승은 흑으로 5승, 백으로 4승을 한 것이다. 그리고 역전 반집승이 무려 세 번이나 있었다. 심지어 마지막 대국마저도 초반 완착을 두어 어렵게 흘러가나 싶었던 대국을 상대가 둔 완착을 빌미로 역전승한 것(...)
  • [18] 국제결혼 알선 관련 일을 하던 그의 팬이 소개시켜 주었다고 한다. 둘의 나이차는 2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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