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서울토박이

last modified: 2015-03-10 02:39:54 by Contributors

서울특별시에서 대대로 살아온 박이.

Contents

1. 개요
2. 서울토박이가 적은 이유
3. 범위
3.1. 사대문안 지역
3.2. 사대문안 + 성저십리 지역
3.3. 현재의 서울특별시 지역
4. 관련 문서


1. 개요

서울특별시에서 대대로 살아온 토박이로 2005년[1] 조사에 때르면 서울특별시 인구 중 단 4.9%만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통은 3대 이상부터 서울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보통 토박이로 쳐주며, 6대 이상부터 서울에서 살아왔으며 선산이 서울 근교지역(양주, 남양주, 용인 등지)[2]에 있는 경우면 토박이 중에 토박이라 할 수 있다.

현재는 서울토박이와 비 경인(京仁) 지역(전라, 충청, 경상 등) 출신자 간의 통혼이 잦고 토박이 자체가 워낙 적기 때문에 젊은 세대인 경우 본인의 출생지가 서울특별시이고[3] 부모 한쪽이라도 서울토박이인 경우 서울토박이로 취급해주는 경우가 많다.

2. 서울토박이가 적은 이유

모 신문기사(1983년)에 따르면 조선시대 서울(한성부)의 특수한 인구구성 및 역학관계때문에 서울토박이가 적었을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한양은 애초부터 조선이 건국하면서 만들어진 계획도시이기에 그곳에 살던 토박이들은 성저십리양주군으로 쫓겨났으며, 지방 출신의 출세한 양반들이 올라와서 사는 곳으로 변모했기 때문. 어라? 이건 지금의 서울특별시도 마찬가지인데? 유독 양반 계층에서 서울토박이 비중이 적었던 것은 원적지가 지방인 양반이 많았기에 가문이 쇠락하거나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낙향을 했기 때문. 반면에 중인과 상민들은 서울 사대문안에서 하급실무직 및 상업 등에 종사하거나 성저십리에서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서울에 정착할 일이 많았다. 하지만 개항 이후 외국상인, 지방출신 상인에 밀려 서울토박이 상인들은 쇠퇴하고 말았다.

양반들은 종로 북촌마을(계동, 재동)에, 중인들은 누상동, 사직동, 농민들은 신촌, 마포 도화동, 성북구 종암동에, 상인들은 마포나 용산에, 장의사들은 광희동에, 백정들은 혜화동에 모여 살았다고 전해진다.

여담으로 경술국치 이후에도 서울토박이의 수모는 계속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부 외곽의 토막집 지역에 살던 빈민층 토박이들이 만주 등으로 강제이주 당하기도 하였으며, 6.25 전쟁때는 피난을 가거나 인민군 등에게 강제노역과 굶주림으로 수난을 당하기도 했으며, 국군이 서울 수복했을때 상당수 시민들이 '인민군 부역자'로 오인받아 많은 수난을 겪었다.#[4] 경제 성장 이후로는 서울토박이 상당수가 강남, 분당,영등포 등지로 분산 이주하였다.

3. 범위

3.1. 사대문안 지역

좁은 의미에서 서울토박이를 잡을 때 사용되는 범주.

3.2. 사대문안 + 성저십리 지역

조선시대 한성부의 관할권이 미친 지역이자 정부나 서울시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서울토박이의 범주. 지역적 범위에 대해서는 성저십리 참조. 1994년 서울 600주년 행사에 맞춰 정부가 마련한 서울토박이 기준은 성저십리가 포함된 옛 한성부 지역에서[5] 1910년 이전부터 대대로 살아왔고 현재 서울특별시 지역[6]에서 거주 중인 사람이다. 원적지가 사대문안, 성저십리 지역이지만 경기도 지역인 일산, 광명, 과천, 분당 등지로 이주한 서울토박이들 지못미

3.3. 현재의 서울특별시 지역

1936년, 1949년, 1963년, 1973년 서울시 행정구역 확장으로 서울특별시에 편입된 지역의 토박이들까지도 포괄하는 것으로, 이쪽은 진정한 서울토박이라고 보기에는 좀 애매하다.[7] 다만 서울로 편입된 지역(강남, 영등포, 노원, 도봉 등지)의 토박이들은 고양토박이[8], 양주토박이[9], 광주(廣州)토박이[10], 시흥/과천토박이[11], 김포(양천)토박이[12], 부천(부평)토박이[13]라는 정체성보다는 나름대로 서울토박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편이긴 하다. 예를 들어 봉천동 토박이의 경우 시흥군 토박이라는 의식보다는 서울에 있는 봉천동의 토박이라는 의식이 강하다.[14]

----
  • [1] 무려 2005년의 조사 결과다. 9년이나 지난 2014년 현재의 상황이 어떨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2] 강북 지역에 해당하는 성저십리 지역은 금산이 걸려있어 묘지 조성이 금지되어서 서울 근교 지역에 묘지를 마련할 수 밖에 없었다. 성저십리 접경 지역이었던 구파발이 한때 공동묘지 지역이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여담으로 원래는 서울(한양)이 아니었으나 서울 편입으로 도시화가 된 지역의 묘지들은 이장된 상태.
  • [3] 옛 한성부 영역인 사대문안이나 성저십리 지역일 필요는 없다. 현재의 서울시 행정구역에 속한 곳이라면 충분하다.
  • [4] 참고로, 본래 서울시민들은 남부지방에 비해 보수적 성향이 짙었는데, 6.25 전쟁으로 인민군의 점령치하로 들어간 서울시민들은 어쩔 수 없이 '잔류파'가 되어 인민군 치하 3개월 동안 노역에 시달리고 굶주림으로 고생했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는 9.28 서울 수복 후 서울에 들어와서 부역자 엄단 방침'을 선포했었다. 이 과정에서 서울시민들 사이에 '도강파-잔류파 문제'로 서울은 오랫동안 갈등에 시달렸고,(-여기서 소수의 '도강파'들은 소위 '애국자 행세'하면서 '잔류파'가 대부분이던 사람들을 '부역자'로 몰아붙혔다.-) 세태는 험악해졌다. 때문에 서울 사람들이 이승만과 자유당을 좋아할 리 없었다.'''(이후 1956년 선거때 부통령 선거, 1958년 총선때마다 이승만과 이기붕, 자유당이 유독 서울에서만 선거운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시민들로부터 야유를 심하게 받았었다. 특히 서울시민들은 이기붕을 매우 싫어했었다고...
  • [5] 성저십리 지역의 상당부분은 고양군에서 경성부/서울특별시로 편입되긴 했지만, 일제가 성저십리를 고양군에 넘긴 걸 도로 서울에 되돌아온 것이다.
  • [6] 과거 한성부 영역이 아닌 현재의 서울시 행정구역.
  • [7] 하지만 사대문안이나 성저십리에 살다가 이곳들이 서울에 편입된 이후 이곳들로 이주했다면 서울토박이라고 볼 수 있다.
  • [8] 지금의 은평구 일부
  • [9] 지금의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광진구, 송파구 잠실
  • [10] 지금의 강남구, 송파구(잠실 제외), 강동구, 서초구 내곡동
  • [11] 지금의 구로구 동부, 영등포구(여의도 제외), 금천구, 동작구, 관악구, 서초구(내곡동 제외)
  • [12] 지금의 강서구, 양천구
  • [13] 지금의 구로구 서부
  • [14] 사실 자신이 살아온 고향이 비교적 최근에 인접 지자체에 병합당한 경우(예: 인천 강화군)가 아닌 이상 토박이들은 과거의 행정구역 보다는 현재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광명시 토박이의 경우 시흥군 토박이라기보다는 광명의 토박이라는 식으로 내세운다든지.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3-10 02:39:54
Processing time 0.0987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