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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last modified: 2015-04-04 11:22:24 by Contributors

아내 이은성과 함께.
본명 정현철(鄭鉉哲)
출생 1972년 2월 21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본관 온양 정씨
소속 서태지컴퍼니
학력 서울북공업고등학교[1] 중퇴
가족 1남 1녀 중 둘째
배우자 이은성 (2013 ~ ),
6촌 형[2]신해철
데뷔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 1집
'난 알아요'
공식홈페이지 페이스북
유튜브 채널 서태지 아카이브
디시인사이드 서태지갤러리

목차

1. 아티스트 개요
2. 성장과정
2.1. 유년기
2.2. 학창시절과 스쿨밴드 '하늘벽'
2.3. 고등학교 자퇴
3. 뮤지션 커리어
3.1. 17세 저니맨
3.2. 서태지와 아이들
3.3. 솔로(서태지 밴드)
4. 개인사
4.1. 비밀결혼, 이혼 그리고 재혼
4.2. 은둔하 슈퍼스타
5. 한국 음악사에 남긴 의의
5.1. 총론
5.2. 공연윤리위원회와 '시대유감'
6. 대한민국 연예인 안티의 시발점
6.1. 1 라운드 : 음악적 변신과 과열된 논란
6.2. 2 라운드 : 서태지 깎아내리기
6.3. 3 라운드 : 떡밥 실종, 빠와 까의 대리전
6.4. 4 라운드 : 이혼, 그리고 재혼(...)
7. 디스코그래피
7.1. 최근의 행적
7.2. 여담


1. 아티스트 개요



서태지와 아이들 디스코그라피
서태지와 아이들 1집서태지와 아이들 2집서태지와 아이들 3집서태지와 아이들 4집

Seo Taiji Band Discography
Seo Tai Ji 태지 7th Issue Atomos Quiet Night

한국 대중음악계의 판도를 순식간에 바꿔버린 혁명의 주인공.

자타가 공인하는 1990년대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의 끝판왕.

그리고 자타공인 문화 대통령.[3]

서태지 밴드, 과거 서태지와 아이들의 리더이자 싱어송라이터. 사운드 엔지니어도 겸하고 있다.

1990년대 초부터 다양한 장르의 음악활동을 통해 한반도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청소년 팬덤을 거느렸으며, 이 힘을 밑거름으로 삼아 군사문화의 잔재가 남아있던 당대 한국 사회에 음악적, 비음악적으로 전방위적인 영향을 끼치며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대중매체에서 이 아티스트를 소개할 때 들어가는 수식어 중 첫머리에 오는 클리셰는 단연 문화대통령.[4] 시대에 파란을 몰고 온 서태지와 아이들이 공식 은퇴를 선언한 1996년 이후 2013년 평창동에 정착하기까지 18년 동안 철저히 보통사람으로 돌아가 스토커 기자들을 피해 해외에 거주해 왔다. 다만 음악 작업을 하다가 괜찮은 곡들이 모이면 몇 년에 한 번씩 몇 개월간 귀국해 음반을 내고 공연을 하는 방식으로 솔로활동을 했다. 팬들 사이에서의 별명은 지존[5], 서형, 대장[6], 삐뽁이 아빠[7].

80년대 메탈키드의 우상이었던 록밴드 시나위의 베이시스트로 아티스트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1992년 3인조 랩 댄스 트리오 서태지와 아이들로 오버그라운드에 데뷔하였다. 당시 이태원 클럽 음악으로 천대받던 댄스 뮤직을 대중에게 알리며 1집 타이틀곡 '난 알아요'로 17주 동안 가요 차트 1위를 수성한 전설적인 뮤지션. 이후 3인조 활동을 통해 힙합, 발라드, 일렉트로니카, 스래시 메탈, 갱스터 뮤직 등 매우 넓은 스펙트럼의 장르를 소화하며 음반을 발표하는 족족 사회에 신드롬을 일으켰다. 1999년 솔로로 전향한 이후에는 얼터너티브, 하드코어 펑크, 이모코어 등 본인의 전공인 록 위주의 밴드 사운드 활동에 매진해왔다. 이후 2008년부터는 고난이도의 작법과 자신의 뿌리인 두 장르(록, 일렉트로니카)를 접목시키는 연구에 대한 성과물을 발표하고 있다.

작곡 및 작사, 편곡의 완성도와 음향 퀄리티, 공연장 사운드와 콘서트 무대 구성 등 음악적인 면에서 전방위적으로 엄청나게 깐깐한 완벽주의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특별히 좋은 콜라보레이션이 떠올라서 외부 인물을 섭외하지 않는 한 모든 작업을 스스로 해결하며 노하우를 쌓는 데에 젊은 시절을 몽땅 바치고도 아직 끝을 모르는 어마어마한 집념의 아티스트.

앞서 짚은 대로 여러 장르의 크로스오버를 통해 퇴적·농축된 독특한 음악적 색채와 올라운드 싱어송라이터라는 점, 또한 '가수 서태지'라는 이미지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서태지는 국내 수위권의 사운드 엔지니어이기도 하다. 그의 엔지니어로서의 완벽주의는 최소한 그 집요함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갓 스무살 나이에 데뷔할 때부터 이미 1집의 엔지니어링과 프로그래밍을 도맡아 했고 이후에는 본인이 작업할 전용 스튜디오를 차려버리고 음악에 관한 모든 작업을 총괄했다.[8] 또한 녹음을 마친 음반 마무리 믹싱을 하느라 6개월동안 종적을 감추는가 하면 이미 발매한 음반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새로 녹음해 버리지를 않나, 또 한 번은 이미 싱글로 발표된 곡들을, 새로 녹음하는 것도 아니고, 믹싱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재검토하느라 미국 스튜디오로 날아가 버리기도 했다. 자연의 소리를 잡겠다고 음향장비를 바리바리 싣고 산골 흉가를 찾아가 녹음 작업을 하는 등등 온갖 기행으로 알려졌듯 음악의 기술적 완성도나 새로움의 추구그리고 악기 및 음악 장비에 대한 덕심에 대해서는 대중에 알려진 한에서 어떤 경우에도 타협이 없다. 아예 2013년에는 서울 평창동 자택에 아래 사진과 같이 어마어마한 개인용(!) 작업실을 꾸며버렸다.


결론적으로 일단 자신의 음악 작업은 A부터 Z까지 모든 과정이 자기 손에서 이루어져야 직성이 풀리는 철벽같은 근성의 음악가.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신비주의를 언급하면 반자동적으로 따라나오는 이름의 주인이 바로 이 사람. 데뷔 초에는 쇼 프로그램에 출연해 말도 안되는 몸개그를 선보이거나 음악방송에 출연해 간단한 토크를 하는 등 여느 가수들과 다를바 없는 활동을 했지만 커리어 초반인 스무 살의 어린 나이부터 사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을 캐며 자택을 24시간 포위하는 수백명 단위의 소녀 팬호시탐탐 먹이를 노리는 기자들, 음악밖에 모르는 방구석 청년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방송국 관계자들의 등쌀에 나가떨어져 점차적으로 신변잡기에 대한 입을 아예 닫아버리고 만다. 이것이 악순환의 단초가 되어 팬과 기자, 방송국 관계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슈퍼스타 서태지의 뒤를 캐거나 어떻게든 연락해 출연을 닥달하고 결과적으로 서태지는 더 꽁꽁 숨어야만 하는 무한루프를 만들어버렸다. 이 문제는 결국 그가 24세의 한창 어린 나이에 눈물의 은퇴를 선언하며 돌연 출국하고 세상에서 아예 증발해버리는 잔혹동화로 끝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내성적인 방구석 아티스트가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인기를 떠안았을 때 개인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고통을 겪을대로 다 겪은 백전노장(?).

2. 성장과정

태지는 인스턴트식품에 길들여진 신세대인것이다
1집 활동 당시 출연한 인간시대. 그의 성장과정과 데뷔 당시 일상, 활동 모습이 담겨있다.

2.1. 유년기

8세꼬마태지자고있음.jpg
[JPG 그림 (85.53 KB)]

유년기의 서태지, 아니 정현철. 어린시절 사진들은 눈이작고 어쩐지 지금과 다른 모습이라 최수종쇼에서 본인이 스스로 성형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가회동에서 어머니 강명숙 씨와 아버지 정상규 씨 사이의 1남 1녀 중 둘째이자 막내이며 누나로 정혜원 씨가 있으며, 청와대 근처의 삼청동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청와대와 아주 가까운 지역이라 민방위 훈련 때는 군인과 탱크까지 쫙 깔리는 살벌한 동네였다고 한다. 어린시절 탱크를 따라다니면서 놀기도 했다고.. 어린 시절부터 RC카나 인형을 좋아했는데 문구점에서 상습적으로 인형을 40개나 훔쳤다가 너무 대놓고 훔치는 서태지의 모습을 어이없이 지켜보던 문구점 주인이 참다 못해 서태지의 어머니께 사실을 알리게 되면서 집에서 된통 혼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서태지의 울트라맨이야 뮤직비디오에 묘사되었다.

2.2. 학창시절과 스쿨밴드 '하늘벽'

재동초등학교 재학 시절 음악보다는 과학을 좋아했고 발명대회나 과학경시대회에서 상도 받을 정도여서 주변에서 발명가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본인 말로 초등학교 때는 공부를 잘했는데 중학교 시절부터 음악에 빠지면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동중학교 재학 시절 처음 음악에 입문하게 되었는데, 음악 그 자체가 흥미로워서라기보다는 길을 걷던 중 악기점에서 일렉트릭 기타를 우연히 보게 되면서 폼을 재고 싶고 그룹사운드라는 이름이 뭔가 멋지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음악에 심취하면서부터 학교 교사들의 체벌과[9] 음악하는 것을 삐딱하게 생각하는 학교내 시선때문에 점점 학교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고 학업과 학교생활에서 점점 멀어져가다 결국 동네 불량아가 되었다.

하늘벽로고.jpg
[JPG 그림 (69.34 KB)]

(사진 설명 : 학창시절 서태지가 컴퓨터로 그린 밴드 '하늘벽' 로고.)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를 꼬드겨 5인조 스쿨 밴드 '하늘벽'을 결성하면서 최초의 밴드 사운드에 입문하게 된다. 그러나 결성 당시 제대로 된 악기를 가진 멤버는 악기를 산 본인 뿐이라 나머지 멤버는 통기타, 피아노, 집에 있던 의자와 선풍기 날로 급조한 드럼(...)을 악기로 사용했다고 한다. 멤버들의 연주경력도 그 나이 꼬마들 답게 리더이자 리드 기타를 맡은 안준범 씨가 친형에게 기타를 배운 것과 건반을 맡은 멤버가 피아노 학원을 다녔던 것이 전부였던, 소꿉장난에 가깝게 시작한 밴드였다.

다만 서태지가 베이시스트로 진로를 정하게 된 계기가 이 밴드였다는 점에서 이 치기어린 밴드가 언급될 의의를 갖는다. 어린 서태지는 당시 통기타로 음을 짚어내는 것을 무척 좋아했는데 '음을 짚어내는 것이 베이스 연주자'라는 친구의 말에 베이스 연주자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작사, 작곡, 편곡, 베이스, 보컬을 서태지가 모두 전담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 하다.


(사진 설명 : 하늘벽 멤버들과 찍은 사진.)

많은 시간이 흘러 서태지 15주년 기념관에 처음 공개된 '하늘벽' 사진에 따르면 활동 중 어느 시기엔가는 악기를 모두 구해서 그럴싸한 밴드 구성을 갖춘 듯. 하늘벽 데모 테이프에 들국화의 음악이 실려있던 것으로 봐서 들국화 카피 밴드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태지는 데뷔 당시 국내 밴드로 들국화를 좋아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으며 어린 시절 전인권이 우상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학창시절 당시 인기 있던 머틀리 크루, 신데렐라, 본 조비 같은 메탈 밴드를 좋아했다고 한다.

2.3. 고등학교 자퇴

서울북공고 진학 후 스쿨밴드 하늘벽은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이 때부터 서태지는 음악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음악을 전문적으로 해보고 싶다고 결심하게 된다. 중학교 시절보다 늘어난 학업량 때문에 도저히 학교를 다니면서 음악을 할수 없다고 생각한 서태지는 학교를 자퇴하기로 한다. 장장 2개월 동안의 설득 끝에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내면서 본격적으로 뮤지션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로써 서태지의 최종 학력은 고등학교 중퇴. 사족으로 꽤 그럴싸한 명문으로 출처 없이 회자된 '서태지의 자퇴서'는 본인의 입으로 자신이 쓴 글이 아니라고 밝혔다.

3. 뮤지션 커리어

3.1. 17세 저니맨

17세에 학교를 자퇴하고 활화산이라는 밴드에 잠깐 머물렀지만 멤버의 군 입대로 별 활약 없이 해체되어 버렸다. 이후 기타리스트 이중산의 소개로 락의 대부 신중현이 운영하던 클럽 '우드스탁'에서 연주할 기회를 잡게 되었으며, 우연히 이 모습을 본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의 눈에 띄어 픽업되면서 마침내 시나위 4집의 베이시스트로 참여하게 된다.


(사진 설명 : 1989년 당시 시나위. 왼쪽부터 베이시스트 서태지, 리더 신대철, 보컬 김종서, 드러머 오경환.)

한 아이가 매일 우드스탁으로 와선 몇 시간씩 제가 기타 치는 모습을 보곤 했죠. 처음엔 의식하지 않았죠. 내심 눈에 띌 만큼 머리가 긴 소년이 뚫어져라 공연에 몰두하는 걸 보고 헤비메틀 지망생이거나 팬이려니 했어요. 그렇게 한 달 정도 계속되고 말수가 적은 저로서도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때 말을 걸어보자는 심산으로 기타를 칠 줄 아느냐고 물었죠.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타를 잡았어요. 거침없이 연주하는 모습은 요즘말로 '장난'이 아니었죠. 그 자리에서 바로 '시나위'에서 활동을 해보자고 제의했고 그는 무척 기뻐했어요. - 당시를 회상하며, 신대철

당시 서태지 본인의 말대로 함께 대화를 나누는것만 영광인 신적인 존재였던 신대철에게 돈과 함께 픽업제의를 받고는 돈을 마다 하고 함께 활동하게 해달라고 말할정도로 기뻐 했고, 시나위의 멤버가 된후 우드스톡에서 매일 하루 반나절을 함께 연주 연습만하며 살면서 바로 4집앨범 작업에 착수해 베이스와 드럼편곡을 담당했다.[10]

그러나 활동기간 동안 신대철, 김종서, 서태지 세 명의 음악적 견해 차이[11]로 서서히 멤버간의 팀워크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팀 해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어느 제작자에게 공연 사기를 당했는데, 88체육관에서 예정된 공연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던 시나위 멤버들이 막상 공연장에 도착하니 공연 2시간 전까지 허름하게 무대짜는 망치소리가 들리고 말도 안되는 무대가 서있었다고 한다. 크게 화가 난 신대철은 공연 주최 측과 거하게 싸운뒤 술을 마시고 뛰쳐나가고, 미처 다 만들어지지도 않은 공연장에서 줄이 안 보일 정도로 기다리는 팬들을 돌려보낼 수 없었던 김종서와 서태지는 결국 단 둘이 엉성한 공연장에서 안습의 공연을 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시나위는 해체되고 서태지는 실직하게 된다. 이후 김종서와 함께 '캔 기획'[12]에 찾아갔으나 김종서만 영입되고 본인은 불발되었다고 한다.[13]

그 후로도 계속 밴드를 알아보거나 직접 멤버를 모집해 밴드 결성을 시도하기도 했고, 한국에 비해 음악시장이 활성화되어있는 일본에서 활동하기 위해 일본어를 공부하기도 했다.[14]

그러던 중 시나위 시절부터 쭈욱 들어오던 랩 음악에 심취해 새롭게 뭔가 획기적인 그룹을 한번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며 기행을 벌이기 시작한다. 전 매니저 최진열이 서태지 부모님에게 직접 들은 바로는 한때 마치 와불면벽 하는 스님처럼 어머니가 차려서 방에 넣어주는 밥만 먹으면서 6개월간 방 밖에 나오지 않고 랩연습과 컴퓨터 음악 작곡 공부에만 몰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무궁화 밴드'라는 팀의 일원으로 무대에서 용돈을 벌었고, '마이하우스'라는 클럽에서 일하다가 양현석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양현석과 팀을 꾸리기로 하고 제 3의 멤버를 물색하며 이리저리 멤버를 갈아치워보다가 마지막으로 이주노를 선택하며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했다.

사족으로 서태지라는 이름은 자신이 좋아하는 한자인 '태' 자와 '지' 자로 이름을 짓고 그중에 가장 어울리는 성씨인 '서' 씨를 합해 '서태지'로 지었다고 한다. 2009년 서태지 본인이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해 이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는 여러가지 설이 있었는데, 전 매니저 최진열의 증언으로는 서태후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고 공연장이라는 뜻의 영어 'STAGE'를 줄여 만들었다는 설도 있었다. 그 중에서 일본의 록 밴드 엑스 재팬의 베이시스트였던 'Taiji(타이지)'에서 따왔다는 설이 주류였는데 시간이 흘러 본인이 별 생각 없이 그냥 그게 멋져서 지었다고 밝힘으로써 모두의 김이 샜다.(...) 방송 내용은 이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3.2. 서태지와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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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그림 (323.72 KB)]


(사진 설명 : 메탈밴드 장발 베이시스트에서 미소년계 댄스 아이돌로 변신한 모습.[15])

결성 후 방송, 라디오 등 각종 매체 활동을 하다가 MBC 쇼 프로그램 <특종 TV연예>에 출연하며 전국의 청소년층에게 폭발적인 충격을 안겼다. 작곡·작사가들이 신인 가수들을 평가하는 짧은 코너에 출연해 난 알아요를 불렀는데[16][17] 그 당시 심사위원들의 평가는 이러했다.(박한 평가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참신하지만 리듬은 좋으나 멜로디 라인이 약하다.(8점) - 밴드 '다섯손가락' 멤버 겸 작곡가 하광훈[18]

음악은 새로운데 가사의 내용이 진부하다.(7점) - 작사가 양인자[19]

노래는 섬세한데 과격한 댄스동작에 묻힌거 같다.(8점) - 방송인 이상벽[20]

새장르를 열었다는 점에 관심을 표하지만 평가는 시청자에게 돌리겠다.(8점) - 가수 전영록[21]

결국 평균 7.8점으로 신인무대 첫 회 출연자이자 최저점 득점자라는 불명예를 기록했다. 이게 왜 불명예가 되는가 하면 이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출연한 신인가수중에 평균 8점 이하의 가수는 한 팀도 없었기 때문이다.[22][23] 하지만 당시 평가는 위에 언급된 심사위원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랩 음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던 시절이었기에 당시 매니저를 맡고 있던 최진열의 증언으로는 방송국에 홍보용으로 CD를 줘도 들어보고는 "그런 판데기는 이태원 클럽에나 걸어라"라며 집어던지기도 했고, 주변 선배 매니저들도 망할 것이 뻔하다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비록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평론가의 혹평을 받았지만, 그 당시 10, 20대 사이에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던 <특종 TV연예> 출연을 계기로 당시 세계 음악 트렌드와 한참 격리된 트롯트, 발라드 위주의 대중가요에 염증을 느끼던 당시 청소년, 대학생 층에게 이 곡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난 알아요를 필두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광풍이 시작되었다.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로서 활동한 2집, 3집, 4집에 대해서는 디스코그래피를 참고.

3.3. 솔로(서태지 밴드)

은퇴 기자회견을 마친 서태지와 아이들은 미리 마련된 헬기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해 출국 절차를 밟았다. 경유지인 괌에서 세 멤버는 뿔뿔이 흩어졌으며, 이후 서태지는 미국으로 갔다는 이야기만 나돌 뿐 문자 그대로 세상에서 증발해버렸다. 그렇게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은 지 2년이 흐른 1998년 7월7일 갑작스레 5집을 발표 하였다. 당시 세계적 추세인 얼터너티브 록을 기반으로 한 원 맨 밴드 앨범.

그후 얼굴도 비추지 않고 노래 외의 목소리도 일절 들려주지 않는 등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다가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귀국하게 된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서태지 밴드 참조.

4. 개인사

4.1. 비밀결혼, 이혼 그리고 재혼


서피셜의 시작.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1997년, 일간지 <스포츠서울>은 은퇴한 서태지가 미국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면서 1996년 12월 24일 재미동포 여대생 김모양[24]과 결혼했다는 특종기사를 냈으나 서태지 측이 적극 부인하고 명예훼손 소송 등 강경 대응 방침을 밝히면서 세간의 흔한 오보로 흐지부지되었다. 실제로 추후 미국 법원 기록 등을 통해 알려진 사실을 바탕으로 밝혀낸 디스패치 기사에서도 사실이 아닌 걸로 밝혀졌다. 기사 작성 당시 둘은 사귀던 사이였을 뿐 결혼한 상태는 아니었다.

2000년 6집으로 다시 얼굴을 드러낸 기자회견 당시에도 결혼 계획에 대한 질문에 본인이 여자 친구가 없다고 말해 미혼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때에는 이미 2년 반 정도의 짧은 결혼 생활끝에 별거에 들어간, 사실상 이혼을 앞둔 상태였다.따라서 여자친구가 없다는 말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훗날 상당수의 팬들이 이 당시의 발언에 대해서 서태지가 자신들을 기만했다고 여기고 등을 돌리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또한 "앞으로 결혼할 계획이 없다, 서류에 도장 찍는 관계가 싫으며 만약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냥 동거할 것이다"라고 밝혀 여운을 남겼다. 이때부터 뭔 일이 있었단 걸 눈치 챘어야 했다.


훗날 2008년에 방영된 서태지 컴백 특집 프로그램 '북공고 1학년 1반 25번 서태지'에서는 "(여자 친구가) 있어도 밝힐 수 없다"고 에둘러 표현했다.

2011년 4월 21일 다발적으로 터져나온 보도에 의해 서태지가 최근 인기배우 정우성과 열애중인 이지아이혼을 했으며, 이미 그녀가 제청한 재산분할 소송이 진행 중인 것이 밝혀져 연예가 전반에 핵폭탄급 파동을 일으켰다. 결혼을 한다는 기사가 나와도 대박인데 이혼이라니!!!!! 서태지의 이야기라는 특성상 정보가 극도로 제한된 만큼 수를 세거나 일일이 언급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양의 루머가 트럭 단위로 대한민국 인터넷을 휩쓸고 다녔다.당시 '감금설'에 대한 반박 이후 서태지는 본인이 설립한 소속사를 통해 이혼 사건에 관련된 일반 대중에의 아래와 같은 해명 자료를 발표했다. 해명 자료가 실린 기사는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전략)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서태지 씨는 1993년 미국에서 지인의 소개로 상대방과 첫 만남을 가지게 된 후 한국과 미국에서 서로 편지와 전화 등으로 연락을 하며 서로에게 점점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96년 서태지 씨의 은퇴 이후 미국생활을 시작하면서 둘은 자연스럽게 연인으로서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7. 10. 12. 미국에서 둘만의 혼인신고를 마치고 부부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성격과 미래상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약 2년 7개월 만인 2000. 06 경 양측은 별거를 시작했으며 결국 헤어지는 수순을 밟고 다시 각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물론 별거 초반에 서로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 바 있으나 이를 극복하지 못했고 서로 완전히 헤어지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후략)

이 소송은 이지아가 소송취하를 신청하고 서태지가 반려했다가 결국 합의서를 제출함으로서 마무리 되었다. 소송에 대한 개략적인 과정은 이 글에 정리되어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읽고 참고해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2년이 약간 지난 2013년 5월 15일 배우 이은성과 결혼한다는 발표가 언론을 탔는데,# 다음 해인 2014년 8월 11일 이지아가 SBS 힐링캠프에 전격 출연하며 지난 결혼생활에 대해 서태지를 언급하며 디스를 날렸다. 이봐, 아무리 미워도 저쪽은 신혼인데... 그런데 이혼합의서에 따르면 지나간 결혼 생활에 대한 상호 공개적 비방 등이 있을 경우 일일이 위자료를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서태지가 소송 취하를 반려할 정도로 강경하게 나가려 했음을 되짚어보면 이지아의 발언 수위가 상당히 위험한 상황. 이후 서태지가 대중의 온갖 비난으로 점철된 십자포화를 감내하고 KBS 해피투게더에 출연해 이지아에게도, 일반 대중에게도, 팬에게도 모두 미안하다고 공개적으로 사과하면서 사실상 장장 14년에 걸친 이슈 종결.

4.2. 은둔하 슈퍼스타

요약하면 8집까지의 서태지는 연예인의 연예인. 활동기에는 이런저런 소식이 나오지만 비활동기가 되면 공적인 일과 개인사를 구분하는 웬만한 해외 아티스트도 비교대상이 되기 어려울 만큼 철저하게 세상에서 증발해왔다. 얼굴 보기 어렵기로 이야기가 나오면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히던 인물.

아이들 시절부터 은퇴 직전까지는 국내에 살아있어서 그나마 조금씩 정보가 있었으나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이후로 8집까지는 지구에 살고 있기는 한 건지, 진짜 살아 있기는 한 건지도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본인이 운영하는 공식 홈페이지 '서태지닷컴'에 가뭄에 콩 나듯 한 번씩 본인의 여행 사진이나 RC카 등의 사물을 찍은 사진을 업로드하며 근황을 전하는 것이 팬덤에 전하는 유일한 생존 신고나 다름 없었다. 심지어 과거 서태지컴퍼니 소속이었던 밴드 도 서태지와의 관계를 "친하기는 한데 얼굴보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힘들 정도의 관계"(...)라고 표현했다. 그래도 양현석과 이주노의 말을 들어보면 아이들 시절 당시 레코딩 작업에 들어갈 때도 지금이랑 별 다를 바 없이 잠수하면 대책이 없었다고 하니 서태지의 타고난 성격인듯. 실제 양현석이 앨범 녹음을 마치고 서태지만 마무리 작업을 위해 미국에 남아있고, 자기는 한국에 왔는데 몇 달이 지나고 서태지 사망설이 나오자 실제 죽은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그 때에도 특히 연락이 안되어서(...). 그래도 다행히 재혼과 9집 활동을 기점으로 국내에 완전히 정착한 것으로 보이며,부디 설레발이 되지 않길. 그간 본인조차 의도하지 않아왔고 수시로 부정했던 '신비주의'의 오명을 이제나마 벗어던질 수 있을지가 주목된다. 원래 자식이 생기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사실 아티스트나 예술가들 중에서는 외부환경으로 인해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부러 자기만의 작업공간을 만들어 활동하는 사람들도 꽤 된다. 특히 서태지와 같은 원맨 밴드 레코딩을 지향하는 뮤지션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즉, 다시 말해서 팬들의 오버 및 안티들의 루머로 서태지 혼자서만 신비주의니 뭐니 하는 이미지가 생긴 것 뿐이지, 서태지의 성격은 이런 아티스트들의 여러 스타일 중 하나로 봐도 그냥 무방하다.

몇몇 지인들이 예능에서 서태지와의 친분 관계를 알리기도 하지만 다소 과장된 발언인 측면이 짙어 그렇게 신빙성은 없는 듯.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에도 다른 멤버들과 거의 개인적으로 어울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고 하며, 친구 한 명을 만나기 위해 매니저에게 부탁한 것을 제외하고는 활동 내내 아무도 사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 가장 친한 관계로 알려진 사람이 이종육촌지간인 故 신해철[25]과 시나위 시절 친분을 맺은 가수 김종서인데 이 둘은 2006년 겨울쯤에 같이 스키여행을 다녀온 것이 알려질 정도로 친한 사이라고 한다. 2014년 9월 15일 디스패치가 김종서, 박신혜와 빵집에 있는 서태지의 사진을 공개함으로 김종서와는 꾸준히 교류 중인 듯 하다.(박신혜는 아내 절친이라고 한다.) 9집 공개 전 해피투게더에 출연해 서로가 발언한 멘트를 보면 자주 만나 음악얘기 외적인 시시콜콜한 수다를 떠는 등 아주 친밀한 교류가 있는 듯. 2014년 9월에 라디오 스타에 故 신해철이 출연, 서태지와 비슷한 시기에 음반을 내놓으며 누가 흥하냐 내기를 걸었다는 발언 중 서태지를 '몇 달에 한 번씩은 꾸준히 본다'고 언급해 친척관계는 원만한 듯.

한 때 서태지의 상업주의 루머와 더불어 음악 스타일이 바뀌는 부분에 대해서도 안티들이 다른 아티스트와 서태지의 관계가 악화 되었다는 루머를 퍼뜨리곤 하는데, 대부분이 믿을 거 없는 헛소리 들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서태지와 크래시의 안흥찬이 중간에 서태지의 행보로 인해 서로간의 사이가 나빠졌다느니 하는 루머가 생기기도 했는데, 정작 본인들은 "좋은 뮤지션으로써 좋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서태지)"라거나 "쿨한 관계(안흥찬)"라고 하며 서태지의 컴백공연에 안흥찬이 다시 게스트뮤지션으로 나오는 등 루머를 일축시키기도 했다. 후에는 이 루머바톤을 Nell이 그대로 받았는데, 서로간의 아티스트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이런 루머들를 섣불리 믿지는 말자. 멀쩡히 서로 잘 지내는 당사자들 가지고 이상한 루머 만들지 말고.

5. 한국 음악사에 남긴 의의

5.1. 총론

본인은 그저 랩 뮤직이 하고 싶어서 했을 뿐이지만(...)[26] 어쨌든 랩·댄스 앨범을 들고 나와 대중가요 수요층 지분 구조에 대지각변동을 가져왔다.

3~40대 이상 연령대의 팬을 지지층으로 하던 트로트 가수 주현미가 3년 연속 가수왕 먹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나방처럼 오버그라운드에 뛰어든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가요판은 10대가 강력히 지지하는 댄스, 랩, 힙합 음악이 점령하게 된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다양한 연령대의 음악들이 순위 프로에 나왔으나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할 무렵인 96년도에 이르러서는 온갖 기획사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을 모티브로 삼은 청소년 가수들을 양산해내면서 X세대[27]를 기수로 삼은 젊은 세대가 가요계의 주 소비층이 되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기획사에서 훈련한 그룹형 아이돌(젝스키스, god, H.O.T. 등)을 통칭 1세대 아이돌이라고 묶어 부르기도 한다.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에도 댄스그룹은 많이 있었으나, 서태지급의 팬덤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성장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국내 댄스 뮤직의 태동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부터 보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러한 흐름은 단지 대중음악에 그치지 않고 당시 대중문화의 거의 전 부문에 걸쳐서 10대~20대가 주요 세력으로 떠오르면서 전반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왔다.

물론 그 모든게 서태지의 존재로 인한 것은 아니고 따져보면 여러가지 상황이 맞물리면서 일어난 시대적인 흐름이라고 해야겠지만 서태지는 분명 그 흐름을 가져온 커다란 계기 중 하나였으며 그 흐름의 중심에서 그 시대의 대표적인 존재, 더 나아가서는 시대의 상징으로 여겨질만한 거대한 임팩트와 영향력을 남겼다.

또한 기획사-소속가수 간의 노예계약 문제를 행동으로 격파해낸 첫 스타이기도 하다.사실 서태지가 단지 그 시대에 가장 인기있었던 가수의 차원을 넘어서 시대의 변혁을 가져왔다고 일컬어지며 대중음악사에 잇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그 음악이나 인기 이상으로 파격적인 행보에 있었다.

1집 활동의 거대한 수입 대다수가 기획사에 넘어가는 것을 보고 빡친서태지는 이러한 불공평 계약을 깨뜨린 후 본인이 직접 소속사를 설립하고 매니저를 기용해 활동하게 되었는데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엄청난 리스크를 짊어진 일이었지만 서태지에게는 1집 활동에서 얻은 엄청난 인기와 음악적인 작업은 물론 안무와 컨셉까지도 그룹 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물론 그걸 감안하더라도 큰 모험이었지만 보기좋게 대히트를 기록하며 전무후무한 성공사례가 되었다. 물론 판매량으로 보면 동시대의 김건모,신승훈만 해도 서태지와 비등하거나 오히려 더 많았지만 조금 속되게 말하자면, 똑같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해도 자기가 기획사 사장까지 다 해먹는 서태지 쪽이 훨씬 많이 벌 수 밖에 없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데뷔 한지 1년된 젊은 가수가 거대한 자본의 벽이나 업계의 관행을 자신의 음악과 인기만으로 모두 타파하고 거대한 성공을 거머쥔 셈이고 당시 서태지 이전의 아티스트들이나 비슷한 시기의 가수들이 여전히 소속사로부터 불공평한 대우를 받던 상황이었기에 서태지의 이러한 행보는 이후 가수들이 자신의 정당한 몫에 대한 권리에 대해 목소리를 내게 하는 등, 소위 '딴따라'로 낙인찍혀있었던 연예인의 입지를 상승시키는 촉발제로 작용하였다.# 문화 평론가 강헌은 당시 서태지의 이러한 행보가 당시 유착관계였던 음반제작사, 방송사, 언론 모두에 밉보이게 되는 계기였다고 회고했다. 90년대 초로부터 2011년 이혼소송 때까지 진행형이었던 언론매체의 '서태지 죽이기'에 대해 강헌과 진중권은 한 팟캐스트 방송#에서 꽤 긴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록은 이어지는 링크를 참조하자.# 내용이 길기 때문에 간단히 요약하자면...

우리[28]가 어린 놈 하나 키워줬더니 기어오르고, 우리 밥통을 깨려고 들어? 죽어봐라.

또한, 서태지의 문화적 파급력은 10대 청소년이 향유하는 문화에서도 음악성과 예술성을 추구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실제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 이후 대중가요의 중심이 된 아이돌 그룹 H.O.T.는 그 대중적 인기와는 별개로 끊임없이 음악적 역량과 개별 멤버의 예술성을 보여줄 것을 요구받았고, 나름의 작곡 활동 등으로 어필하였지만, 계속해서 서태지와 아이들과 비교를 당하며 해체 이후 꽤 긴 시간동안 개별 멤버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후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강타가 당시의 스트레스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5.2. 공연윤리위원회와 '시대유감'

서태지 2000~2001 Live Concert 태지의 화 - 시대유감

공연윤리위원회(일명 공윤)의 사전심의제도에 마지막 펀치를 날리고 KO를 시킨 결정적 인물이기도 하다. 사전심의제도란 새로운 노래가 나왔을 때 문제가 될만한 부분이 있는지 공윤에 사전검사를 받는 제도인데 여기서 시대유감의 가사 중 일부가 지적을 당하자 이에 반발한 서태지가 수록곡 '시대유감'에서 가사를 아예 통째로 들어낸 상태로 앨범을 발매함으로써 사전심의제도에 항의를 한 것.

이 사건으로 인해 본래 알던 사람들끼리 조용히 논의하던 사전심의제도의 부당함과 폐지안의 통과에 대한 당위성이 서태지 팬덤의 힘을 등에 업고 사회 전반에 알려지게 되었다. 물밑에서 조용히 진행되던 사전심의제도 폐지 이야기는 수면 위로 급격히 끌어올려졌고 해당 법률은 공론화를 통해 힘을 얻어 초안대로 깔끔히 폐지되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정태춘 등 선배 가수들이 긴 시간 지속적으로 제기해 온 화제가 서태지의 적극적인 움직임을 통해 사회 전반에 급격히 각인됨으로써 부당한 법률의 숨통을 끊는 결정적인 피니시 블로우가 된 셈이다. 원기옥!

물론 시대유감이 해당 사건에 공헌한 부분은 폐지에 관한 법률상 세부적, 실질적인 부분이라기보다는 사전심의의 부당함에 대한 이미지를 대중에게 침투시키고 국회에 해당 법안 통과에 대한 지대한 압박을 주는 대형 선전의 성공에 그친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법률이란게 여당이 통과시키기로 의중을 모았다고 해서 쾌속으로 처리가 될지, 또는 당내 반대표로 인해 여러번의 칼질을 당하며 절름발이 폐지안으로 전락할지, 혹은 의지 부족으로 몇 년을 표류하게 될지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쟁터에서 아군의 희생을 딛고 최후의 깃발을 꽂은 병사가 조명을 받는 것에 누가 함부로 어떤 비난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모두 각자의 역할을 한 것 뿐이다.

6. 대한민국 연예인 안티의 시발점

6.1. 1 라운드 : 음악적 변신과 과열된 논란

1집, 2집까지는 청소년 팬들이 가볍게 좋아할만한 사랑, 우정, 이별, 젊음에 대한 가사를 담으며 이렇다 할 사회적 잡음이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1994년 공개된 3집에 교육 제도를 비판하는 <교실 이데아>, 통일을 노래하는 <발해를 꿈꾸며>를 수록하며 성숙한 이미지로의 변신, 이전보다 자신이 담아두었던 이야기 등을 꺼내려는 등의 노력이 표면화되는데, 여기서부터 무언가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당시의 언론은 성숙하고 난해한 가사와 무거운 헤비메탈을 들고 나온 서태지를 온갖 논조로 사골처럼 달달 달여내서 서태지라는 인물상에 대한 거품을 엉망진창으로 부풀렸다. 수록곡 <교실이데아>를 거꾸로 틀면 '피가 모자라'라는 악마의 절규가 들린다는 괴담이 언론지를 통해서 마치 사실처럼 유포되었고, 서태지가 그 보도를 접하고 "오, 그렇게 들려? 신기하네."라고 무신경한 웃음을 짓던 때 이미 세상에서 그는 사탄 숭배자이면서 게이[29] 또는 심지어 남장여자라는 등등 검증할수도 없고, 검증되지도 못할 해괴한 루머에 기반한 괴물로 왜곡되어 있었다. 아마 나름 메이저급 일간지를 임신설[30]로 장식한 남자연예인은 서태지가 한국 어쩌면 세계 역사상 유일할 것이다.

당시 언론의 황색언론으로서의 작태는 대중들에게 서태지라는 인물에 대해 금기를 넘는 혁명가나 사탄의 이미지, 또는 과도한 천재상을 부여할 만큼 지나쳤다. 확실히 대중의 호응으로 먹고 사는 스타로서는 이것 이상 없을 정도로 대성했다고 할 수 있지만, 대중음악 예술가 서태지의 담백한 부분은 이런 노이즈를 겪으며 대중에게서 잊혀지게 되었고 이 또한 오늘날 서태지 특유의 염세주의적인 세계관에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언론에 의해 만들어진 과도한 거품과 허상에 이질감과 두려움을 느낀 팬들이 이탈하는 등 처음 안티가 생겼다.

6.2. 2 라운드 : 서태지 깎아내리기

그 다음 안티가 본격적으로 양산되기 시작한 시점은 옐로 저널리즘이 극치를 달리던 2000년대 초반 솔로 2집 시점부터이다. 사생활과 음악 활동을 철저히 분리하기로 한 서태지가 졸졸 따라다니며 꼬치꼬치 캐묻는 기자들에게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자, 곧 무지막지한 수준의 원색적인 비난을 담은 보복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거기다 콘서트, 음악 방송 등등 활동시기에 세션으로 인디밴드의 연주자들을 규합해 공연을 다니자 인디 씬에서도 댄스가수 출신인 서태지가 돈을 벌려고 인디밴드 흉내를 낸다고 대거 반발 성명을 내고 안티 서태지 공연을 하는 등 다양한 악재가 겹치며 안티가 대거 양산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언론이 만든 서태지에 대한 엄청난 거품을 그들 스스로가 남김없이 꺼뜨리고 오히려 쓰레기 아티스트로 매도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가짜 천재 서태지'에 대한 마녀사냥에 가까운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이 때는 인터넷에서 서태지를 까는 것이 일종의 트렌드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대표자로서는 서태지 인형 뱃속에 순대를 넣어뒀다가 배를 갈라 뽑아 먹고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해 주목받았던 인디밴드 노브레인이 있다. 노브레인 이외의 안티 서태지 운동을 하던 인디밴드들은 서태지가 저항을 상품화 해 돈을 벌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사회에 대한 저항을 내세우는 자신들을 분노하게 했다고 한다. 이후 노브레인이 사실상 상업적 펑크로 방향을 틀었고, 닥터코어 911이정현 무대 뒤에서 핸드싱크를 시전했던 것을 생각하면 다소 우스운 면이 있는것도 사실이다. 그나마 노브레인은 멤버의 탈퇴와 교체로 밴드의 방향성이 달라진 경우에 속한다.

이런 시기에 서태지 팬들은 안티들이 말하는 대로 서태지가 사기꾼이자 비참한 음악적 역량을 가지고 있는 국수용인지, 아니면 한국을 벗어난 범주의 평론가에게도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는지 좀 더 객관적이고 냉정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 자비를 들여 어떠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는데 바로 서태지 리뷰팩이라고 하는 소포를 보내 해외웹진에 리뷰를 의뢰하는 프로젝트였다. 이런다고 서태지의 음악성을 객관화하고 서태지 음악의 수준을 부정하는 시각을 설득할 수는 없겠지만, 서태지 리뷰팩이라고 하는 이 소포에는 6집을 포함한 서태지의 모든 앨범과 가사번역본, 뮤직비디오, 연혁 및 소개가 동봉되어 있었다. 이런 움직임은 결국 해외웹진에서 서태지 6집에 대한 리뷰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평가도 꽤나 다채롭게 나왔다. 대체적으로 준수하다는 평이 많았지만 Korn의 음악스타일 아래에 있다는 문제점이 거의 대부분의 리뷰에서 지적되었다. 이 평가가 거슬린 건지 맘에 든 건지 무시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2004년 1월 29일에는 그 KornFear Factory와 함께 초청해서 공연하기도 했다. 당시 공연상황

6.3. 3 라운드 : 떡밥 실종, 빠와 까의 대리전

2000년대 중반 7집 활동 즈음에는 서태지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서태지 팬 외의 음악팬들이 지나친 서태지 팬들의 서태지 신격화 내지는 후한 평가에 반발하여 소위 '빠가 까를 만든다'라는 식으로 안티가 된 경우도 상당수 있다.

서태지 팬덤에 대해서 유난히 극성스럽다, 자부심이 강하다는 지적 또는 인식이 많이 퍼져 있다. 이 인식이 때때로 강조되어 서태지 팬들이 광신도처럼 인식되는 경향도 있지만 이는 특정 표본 등을 중심으로 설정된 과장된 인식이다. 일반적인 차원에서의 서태지 팬덤에 대해서 말하자면 인터넷 등에서의 민간 차원의 갈등 외에도 대형 언론의 자의적이고 편파적인 보도 등, 외부에서의 이런저런 형태의 지속적 공격을 받아온 서태지의 팬층이, 반대로 유독스러운 결속력과 방어심리를 보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른바, 까가 빠를 만드는 것이다. 팬의 입장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나 곡해된 해석에서 기인한 비판이 주어진다면, 매우 의견이 다른 팬의 입장에서는 항의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사전심의제 폐기 운동, SBS '한밤의 TV연예'에 대한 광고철회운동, 황색언론반대연합, 대중음악판바꾸기위원회, 대중음악개혁을위한연대모임 등의 활동에 서태지 팬들이 참여하게된 동력의 원천은 서태지와 관련되어 있는 불합리였다. 이로 인한 사회적 성과는 작지 않다고 서태지 팬덤은 말한다.

6.4. 4 라운드 : 이혼, 그리고 재혼(...)

결혼조차 알려지지 않은 슈퍼스타의 이혼과 재산 분할 소송 피소, 그리고 재혼 소식은 데뷔 연차에 비해 의외로 솔리드하게 일정 규모를 유지하던 팬덤 내부 일부 팬들의 극렬한 분노를 샀다. 분노의 요점인즉 사생활에 대해 팬에게 거짓말을 했으며 재혼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

요점이야 어쨌든 팬사이트 별로 팬덤 규모는 두토막 세토막이 났으며 이번에는 어이없게도 서태지를 가장 좋아하고 잘 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 가장 극렬한 안티로 돌아서게 되었다. 이들은 각종 기사에 팬이었던 이들만이 알 수 있는 내용을 댓글로 달고 있다. 문제는 그 댓글 중에 사실인 내용이 얼마 되지 않고 대부분 악의적인 시선으로 조작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어느 아이돌 팬덤이나 마찬가지지만, 팬이던 사람이 안티가 되면 그것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서태지의 개인사에 대해 이렇다할 평가를 하지 않는 부류의 팬들은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저러고 있나, 몸은 늙고 머릿속은 아직도 학창시절 오빠부대인가' 하며 이탈한 팬들을 극렬히 혐오하며 이를 부득부득 가는 듯. 사실상 이혼 문제는 서태지가 부부 사이를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공개적으로 모두에게 사과했다. 따라서 더 이상의 언급이 역효과를 낳으므로 이 이슈로 만들어진 안티들은 서태지로서는 그냥 남은 평생동안 짊어져야 할 짐인 듯.

7.1. 최근의 행적

  • 2012년 3월 23일에 데뷔 20주년을 맞이하여 서태지의 음악역사를 되짚어보는 서태지 아카이브 홈페이지를 공개했다.#

  • 2012년 12월 27일 청담동 클럽 엘루이에서 20주년 기념 파티를 개최했다. 본인이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각종 게임행사 및 공연, 그리고 깜짝 전화연결을 하기도. 클럽안에 모인 2천여명의 매니아들은 열광했다.#

  • 2013년 5월 15일 배우 이은성과 재혼한다고 발표했다.#

  • 2014년 6월 23일 한 골수 팬이 서태지 자택에 침입을 했다가 체포됐다. 경찰은 이 사건을 불구속 기소 송치했다.

  • 2014년 8월 27일 아빠가 됐다. 관련기사

  • 2014년 8월 28일 9집 앨범 프로모션을 시작했다. 관련기사 해피투게더에도 출연이 확정되어 많은 기대를 모았으나, 다인원 토크쇼인 해피투게더의 콘셉트와는 맞지 않게 서태지와 유재석의 1:1 토크를 한다고 해서 논란이 되었지만 기사 실제 방송에선 초반 15분정도의 1:1 토크이후 특별게스트로 김종서, 그 후엔 기존 패널들과 야간식당 세트장에서 토크를 진행했다. 생각관 다르게 전편에 비해 시청률이 11%에서 7%로 4% 넘게 떨어졌는데, 아시안게임 등으로인한 다른 예능프로들의 결방도 있었고, 해피투게더의 평균 시청률이 5~6%였다는 점에서 오히려 시청률은 오른,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이번 방송에서 서태지는 담담하고 진솔하게 자신의 사생활들과 생각, 그리고 전부인에 대한 언급과 함께 '남자로서 다 잘못했다 생각한다. 다 내려놓고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란다"며 사과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해피투게더3' 서태지 특집, 시청률 하락했지만 잃을 것 없었다 무엇보다 방송 이후 매번 기사마다 수천개의 비난과 조롱이 주렁주렁 달리던 분위기를 반전시켰다는 것이 큰 수확인듯.

  • 2014년 9월 27일 기사에 따르면 서태지는 악플러를 고소할 예정이다. 정모 가나요?

  • 빌보드닷컴의 한국 가요 전문 하위 섹션인 'K-타운'에서는 케이팝 전설 서태지가 아이유를 영입한 호화찬란한 신스팝 소격동(K-Pop Legend Seo Taiji Enlists IU for Synth Spectacular 'Sogyeokdong')이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록 음악가인 서태지가 포터 로빈슨[31]과 같은 맥락에서 감성적인 멜로디가 인상적인 이번 신곡으로 일렉트로닉 프로듀서로 자리매김했다.(And while Seo Taiji has become famous for his rock and nu-metal works, the Seoul native has found his place as an electronic producer, creating an emotional production in the same vein of Porter Robinson that's glossed over with strong and memorable melodies.)"고 평가했다.

  • 10월 18일 18시 잠실 주경기장에서 컴백 콘서트 '크리스말로윈'을 개최했다. 오프닝곡인 Moai를 포함해 총 19곡을 공연했으며 집계 결과 25,000명[32]의 관중을 모았다. 서태지의 사생활 쇼크로 인한 기존 팬덤의 이탈과 인기 하락, 그리고 공연장 설비에 워낙 큰 투자를 한 탓에 스탠딩 티켓 가격이 15만원으로 책정되면서 다소 초기 예매율이 저조하기는 했으나 방송출연과 홍보를 통해 관중 동원에서는 그럭저럭 현장판매 분량으로 만회할 수 있었다는 평. 하지만 정원에 비해 너무 큰 공연장을 잡아서 유휴공간이 너무 많았던 데다 25,000명이 분명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예전 리즈시절 때의 엄청난 인기, 위상에 비하면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가되기도.[33] 원래는 보조경기장을 잡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잡을 수가 없어서 주경기장을 잡았다고.

    공연의 셋리스트나 퀄리티는 '예상대로' 훌륭했다는 데에 의견이 모이지만 진행 상의 미숙함이 있었다. 오프닝 공연[34] 후 한참 시간이 붕 뜨다가 갑작스레 19시에 본 공연이 시작된다는 공지로 현장 관중에게 혼란을 주었고, 당초 약속된 150분 공연에 한참 모자라는 100분 남짓의 러닝타임에 그친 점에서 주최 측의 안내나 양해가 부족했다는 쪽에 의견이 모인다.

    이번 앨범과 공연의 컨셉 상 할로윈 관련 코스프레를 하고 찾아온 팬들도 많이 있었으며 드물게도 남녀 관중 성비가 거의 1:1에 가까웠는데, 덕분에 공연 당시 서태지는 "전부 남탕이네...싫은데..."라고 남팬들을 디스하기도 했다. 물론 남팬들 역시 아이유를 연호함으로서 뜨겁게 화답했다.(...)

    더불어 자신의 팬들이 이미 한 가정의 어머니가 된 것을 배려, 콘서트 현장에 어린이방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 10월 20일 손석희가 진행하는 JTBC 뉴스룸출연하였다. 동안계의 양대 제왕이 만났다.

  • 10월 24일 다음카카오뮤직 생방송으로 개인 연습실에서 서태지밴드가 줄리엔, 샘과 함께 서태지와 비정상회담(with 줄리엔, 샘)을 촬영했다.

  • 2014년 10월 24일 서태지 특집으로 꾸며진 슈퍼스타 K6에 출연했다. 기존의 서태지 답지않은 행보에 사람들의 반응은 서태지도 애 보기는 힘든가 보다(...). 그리고 역시 서태지 노래는 서태지가 불러야겠다는 감상이 나왔다.[35] 그리고 좀처럼 방송에서 속깊은 모습을 보인 적이 드물었던 서태지가 패혈증으로 투병중인 신해철을 언급하면서 울먹거리는 모습이 상당히 찡하거나 울컥했다는 반응. 이 때를 기점으로 인터넷 댓글에 조리돌림하는듯한 원색적 비난은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 끝내 결국 신해철이 사망하자, 유희열의 스케치북 리허설 현장에서 뛰쳐나와 바로 병원에 향했다고 한다. 관련기사 이후 신해철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맡았다.

  • 2014년 10월 31일자 유희열의 스케치북출연했다.

  • 서태지의 음악이 창작 뮤지컬로 제작된다.

  • 2014년 11월 12일, 엠카운트다운 사전 녹화를 진행했다. 팬 450명이 참석했는데, 당첨 인원보다 지원 인원이 훨씬 많아서[36] 발표 당일 팬카페에는 멘붕의 글들이 다수 올라왔다. 팬들과 토크를 하던 와중 디시인사이드 서태지 갤러리에서 온 사람이 있냐고 묻는 걸 보면...서태지 갤러리의 존재를 알고 있을뿐만 아니라 눈팅 경험까지 있는 듯하다. 이로써 우리는 서태지가 위키니트일 가능성도 이제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 SNS시작했다.

  • 2014년 11월 13일 서태지 컴퍼니, 서태지 컴퍼니 공식 사운드 클라우드, 서태지 공식 페이스북등을 통해서 9집 타이틀곡 크리스말로윈의 스템 파일을 무료로 공개하면서 리믹스 컨테스트를 발표했다. 참고로 스템파일 중에는 드럼스템은 없으니 참조바란다.

  • 2014년 12월 3일 Mnet MAMA에 스페셜 스테이지로 크리스말로윈과 아이유와 소격동, 바스코 그리고 블락비의 지코와 컴백홈을 콜라보를 했다.

  • 2014년 12월 21일 SBS 가요대전에 출연했다. 레전트 특집으로 서태지를 위해 마련된 특별 무대에서 '숲 속의 파이터', '크리스말로윈'을 불렀고, 마지막엔 '마지막 축제'를 후배 아이돌 가수와 함께 부르며 마무리했다. 그런데, 방송에서 노래를 중간에 끊어서 팬들의 원성을 들었다. 이는 2009년 ETP 페스티벌 방송 때도 있었던 고질적인 문제.

  • 2014년 12월 30일과 31일 양일에 걸쳐서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공연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국투어를 개시했다. 팬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셋 리스트를 작성한 덕분에 평소에 공연에서 듣기 힘들었던 곡들이 많이 나왔으며 그야말로 역대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공연 퀄리티와 더불어 토크 및 팬서비스에서도 온갖 찰진 드립을 선보였다.

    특히 젖은 셔츠 차림으로 속살을 비추면서(...) 자기 몸에 물을 끼얹고 만족해? 변태들아라는 멘트를 날려서 신사숙녀들을 열광시키는 팬 조련을 선보이기도.데뷔 24년만에 나이 마흔넷에 선보이는 섹시컨셉

    게다가 이전 컴백 콘서트가 에정보다 짧은 공연 시간으로 빈축을 샀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10시에 시작한 공연이 새벽 1시 반을 넘어서 끝나는 등 덕분에 막차 꾾겼다 서울 공연이 종료된 후 오랜 시간 서태지를 보아온 팬들 사이에서도 단연 역대급 공연이라는 평가가 줄을 이을 정도로 열광적인 호평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지난 2012년 팬들이 데뷔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자발적인 모금을 통해서 브라질에 서태지 숲을 조성했던 것에 대한 답례로서 서태지숲 바로 근처에 서태지 매니아 숲을 만들 것을 밝혀서 팬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역조공甲[37]

  • 제12회 한국대중음악상에 올해의 음악인, 최우수 댄스&일렉트로닉 노래 등 2개 부문에 수상 후보로 노미네이트되었다! 7집과 8집 때도 노미네이트된 적은 있었지만 수상은 하지 못했는데 과연 이번엔 어떻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7.2. 여담

  • 1980년대 인기 드라마 수사반장 중 한 에피소드에 '서태지'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연기한 사람은 박영규이며, 겁탈을 당한 부인의 원수를 갚는 내용이다. 이곳에서 다시 볼 수 있다.

  • 가수 원미연의 3집 수록곡인 '그대 내 곁으로'는 서태지에게 받은 노래이다. 2014년에 소격동을 부른 아이유와 더불어 서태지가 곡을 준 단 둘뿐인 여자가수. 다만 아이유는 일종의 콜라보레이션이었으니 조금 경우가 다르긴 하다.
    다만 원미연은 생각만큼 그 노래가 히트하지 못해 서태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데 반 농담삼아서 자기가 무리하게 랩까지 소화해서 잘 안된것 같다고 언급했다. 당시에는 방송여건상 랩도 본인이 직접 전부 불러야 했었다고.애초에 랩을 넣은 서태지가 잘못한듯

  • 서태지와 아이들로 활동할때, 그의 매니저가 이동중인 차안에서 당시로서는 일반인은 홍콩영화에서나 보던 수백만원대의 비싼 초창기 핸드폰을 직업상 사서 사용하는 모습을 보게된 서태지가 호기심에 그게 얼마냐고 물었고, 특별히 자신에게 말을 먼저 걸거나, 뭔가 일외적으로 다른일에 호기심을 보이지 않던 서태지의 이례적인 행동에 장난기가 발동한 매니저는 서태지에게 "야, 이거 만원도 넘어...살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말없이 웃던 서태지는 일주일뒤 그 다음번 매니저와 함께 차에 타게 되자 매니저에게 진짜로 만원을 주면서, "그거는 나주고 형은 이걸로 새거하나 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2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상물정에 어둡고 악기 구매할때 물건값 흥정도 못해서 항상 다른사람이 나서서 해야 했다고 한다.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시의 수익을 분배할때도 액수를 묻지도 않은채 항상 "부모님에게 보내 달라"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돈도 거의 가지고 다니지 않아 별명이 서크루지.그러면서 집에 RC는 한가득 있다.

  • <컴백홈>을 패러디한 <컴배콤>이란 곡이 있었다. 음치가수 컨셉으로 데뷔한 개그맨 이재수의 작품(?)이었는데, 망했다. 패러디로서도 후진데다가 서태지한테 고소까지 당해 데꿀멍. 서태지가 음악 저작권 협회를 탈퇴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코믹한 컨셉으로 패러디한 것 때문이 아니라, 상업적인 이용을 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병맛이라 패러디는 좋아한다고

  • 서태지는 리메이크곡이 없는 이유에 대해 자신의 음악을 팬들과 자신만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직접 밝혔다. 가끔 YG엔터테인먼트서태지컴퍼니 소속 가수들이 라이브나 방송에서 서태지의 곡을 리메이크하다가, 최초의 레코딩 버전 리메이크로 빅뱅이 서태지와 아이들 4집의 '필승'을 빌렸다. 후에 응답하라 1994 OST에서 리메이크가 성사되어 성시경이 서태지와 아이들 2집의 '너에게'를 불렀다. 발라드곡을 발라드 가수가 부른 격. 성시경은 나레이션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썼다고 전해지는데(...).

  • 스튜디오에서 보드 장갑에 보드복을 입고 노래를 하는 등으로 우리 나라에 생소하던 스노보더의 복장과 문화를 소개하여 스키장에서 마이너였던 보더들이 스키를 누르고 대세로 올라게는 계기가 되게 하였다. 심지어 스노보드 종목인 프리스타일이란 이름의 곡도 있다. 세계적인 스노보드의 유행이 서태지가 등장한 때와 겹친 영향이 더 크지만, 서태지와 아이들도 하나의 기폭제가 되어 주었다. 실제로 서태지와 함께 시나위에 있던 김종서, 이주노[38]는 우리 나라 스노보드와 스케이트보드 쪽에서 거의 1세대이다.

  • 노래 가사에서 알 수 없는 가사[39]가 많이 나온다.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에는 그래도 몬데그린 수준이었지만 솔로 데뷔 이후에는 음악 스타일 자체가 연주의 비중을 보컬과 비등하거나 혹은 그 이상으로 중시하는 성향이 강해지면서 자연스레 가사가 잘 안들리는 경향도 더 강해졌다.가사를 외우거나 가사집을 보지 않고 그냥 노래만 들으면 가사를 알아듣기 힘들 정도.

    그래서 한 때 팬들에겐 그런 구절들이 무슨 말인지, 무슨 뜻인지 해석하는 것도 유행하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좀 많은데, 2집의 죽음의 늪 후렴구 가사 중 '피하지 않겠어' 뒤에 나오는 가사나, 3집의 교실 이데아에서 '그걸로 족해 족해'이후 가사집에 적혀있지 않은 목소리[40], 6집의 탱크에서 0:28에서부터 0:39에서까지 나오는 기타음 같은것이나[41], 심지어는 5집의 Take 3처럼, 가사집을 보지 않으면 가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곡까지 있다.

  • 데뷔 초기부터 위천공(위에 구멍이 나는 병. 원인은 여러가지이다. 과로, 과음 등등)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 회식이나 술자리에선 술은 그냥 혓바닥에 할짝거리는 정도로(...) 그쳐야 했다고. 공개적인 행사에서 샴페인을 마실때도 샴페인 거품을 앞니로 깨물기만 하고 마는 모습도 보여주었다.[42] 너무 힘들 때는 한 끼 식사를 우유로 떼워야 했다고 한다.동안과 술을 등가교환

  • 병역에 관해서는 여러 말들이 많은데, 94년말 연예인 병역 비리 파동에 따른 수사결과로 94년에 검찰에서 발표된 내용에 따르면 '서태지는 성격장애[43]로 면제, 이주노는 피부과이상(문신)과 정신장애로 면제, 양현석은 병명미상으로 의병제대'이며, 무혐의로 결론이 났다. 다만 서태지는 인터뷰 등을 통해 면제 사유를 위천공이라고 밝혔고 여기에 학력 미달이라는 설도 떠돌고 있다.

    그런데 약 4년 후 수사 당시 상황을 회고한 1998년 6월 29일자 국민일보 이경희 기자에 따르면, "가수 서태지가 만성위염으로,탤런트 배용준이 약시로, 영화배우 박상민이 교통사고에 의한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면제대상자로 인정됐다."라고 언급했으며, 1994년 당시 수사는 "사전조사 불충분과 ‘특혜’와는 거리가 먼 대상자를 문제삼는 바람에 유야무야됐다."고 설명했다.(이 기사는 http://www.kinds.or.kr/에 가입하면 볼 수 있다. 어느 기사가 맞는지는 각자 판단하도록 하자.)

  • 주위 인물과 팬들의 성화로 지금은 담배를 안피운다고 하던가 중2때 흡연을 시작했다가 고1때 끊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완전히 끊지는 못한 것 같다. 자신의 컨텐츠에 대해 철저하게 관리하는 성격탓에 흡연장면이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8집 뮤직비디오의 촬영과정을 담은 다큐에서 자신의 테이블에 담배를 올려놓은 모습이 아주 잠깐 나오는 등 약간의 정황이 확인되었고, 이번 남성 전용 특별 공연(일겅)때 전자담배를 피는(!!!) 퍼포먼스를 시전하여 팬들에게 충공깽과 심쿵을 선사하였으나 수 년전에 완전히 끊었으며 전자담배 연기는 단순 수증기라고 밝혔다.

  • 고종 사촌동생 강현구는 개토라는 예명을 가진 싱어송라이터로 활동 중이다. 서태지의 영향인지 강개토 역시 본인 음악의 작사, 작곡, 편곡, 연주, 엔지니어링 등 모든 작업을 혼자서 소화한다. 개토네이션이라는 밴드를 결성해 디지털 싱글을 중심으로 7장의 앨범을 발매하며 활동하는 중이다. 초창기에는 가면을 쓰고 활동했으나 현재는 가면을 벗은 상태. 결혼식 때는 서태지가 그에게 축하화환을 보내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발매 하는 음악 대부분은 음원 순위 10위권에 랭크 되었으며, m.net 및 곰 tv 뮤직비디오 실시간순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삼성, 웅진, 두산, 신한, 우리 등 다수의 기업체 음악작업을 진행했으며, '광고음악의 장르가 신세대들의 소비심리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현재는 여러 음악 콘텐츠 제작자로써의 활동은 물론 대학교 실용음악과 학과장으로 재직중이다.

  • 2002 ETPFEST를 개최할때 이미 고인이 된 히데를 섭외하여 초청하였다.[44] 물론 고인이 된 히데는 영상으로 밖에 볼수가 없었고 히데 생전의 SPREAD BEAVER 멤버들이 공연을 펼쳤다. 이는 히데의 첫 해외 공연으로 남게 되었고 유족들은 해외 진출을 열망하던 히데의 꿈을 이루어준 서태지에게 고인이 생전 애용하던 옐로하트 기타를 선물했다. 일종의 바톤 터치의 의미라고도 하고, 박물관에 있느니 좋은 음악인에게 연주되길 히데도 바랄 것이라는 말과 함께.[45] 히데의 부모님은 리셉션장에서 서태지를 만났을때도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 국산 댄싱 리듬게임 펌프 잇 업 시리즈의 제작사 안다미로에서 서태지의 곡을 수록하려 했다. 난알아요/필승/하여가/우리들만의추억/울트라맨이야 등이 범주에 올라서 서태지컴퍼니측에 연락을 넣었는데 수록은 하되 게임에 수록되는 사운드 부분을 직접 편집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펌프 잇업에 수록된 서태지의 모든 노래는 모두 서태지가 직접 편집을 한 뒤 안다미로에 보낸 것이다. 그와 더불어 자기 노래는 제대로 된 속도에 제대로 된 노래여야 한다며 러쉬 모드도 인정하지 않았다. 대단한 프로정신.[46]

  • 오타쿠다. 그것도 빼도박도 못하게(...) 아이들 시절부터 자기 기타에 닥터 슬럼프 코믹스 1컷을 붙여놓았고, 7집 당시 다큐에서 화장실에 원피스 만화책이 쌓여있었다. 심지어 이나중 탁구부괴짜가족을 좋아한다고. 그외에도 시간나면 이것저것 보긴 하는듯.

  • 우스갯소리로, 서태지가 컴백하면 음악 평론가들도 같이 컴백한다는 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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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현 서울도시과학기술고등학교
  • [2] 양측 모친끼리 사촌관계.
  • [3] 다만 서태지 본인은 언론이 만들어낸 이런 권위적인 별명을 딱히 즐기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이 호칭에 대한 질문이 나올 때마다 매번 '저는 음악하는 사람이에요, 전 그저 제 음악을 기쁘게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라는 우문현답으로 일축해버린다. 여담으로 조용필도 가왕이란 호칭을 크게 선호하진 않는다.
  • [4] 2014년부터는 동년도 발매된 9집 수록곡 중 회고적 성격을 띠는 <90's Icon>의 영향으로 '90년대 문화대통령'으로 쓰이고 있다.
  • [5] 7집 이후 이 별명은 불리는 빈도가 많이 줄었다.
  • [6] 가장 많이 쓰이는 호칭.
  • [7] 딸의 태명을 삐뽁이로 지었기 때문. 9집부터 아빠 이미지가 되면서 이 별명의 지분이 부쩍 늘어났고, 팬들도 이 기믹을 잘 써먹는다. 콘서트에서 서태지가 "늘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요."라고 말하면 팬들이 "육아에서 해방되세요."라고 대꾸할 정도. 가수도 팬도 나이가 들었다.
  • [8] 다만 이 때문에 하여가에서 이태섭의 기타파트 카피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수 없는 입장이기도 하다.서태지가 알았는지 몰랐는지를 떠나서 프로듀서는 앨범의 모든 것을 총괄할 책임이 있으니까.3집에서 외국계 세션을 대거 기용한 것은 이때의 일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 [9] 이동연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학교 교사들이 학생을 때리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 잘못을 했어도 절대로 교사한테 맞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교사가 자신을 구타하려고 하면 학교를 뛰쳐나가기도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반항아.
  • [10] 당시 나이가 너무 어려서 김종서의 제안으로 실제 나이보다 2살 올려 20살로 속여서 활동했다.
  • [11] 정통 메탈을 고집하던 리더 신대철과 달리 김종서는 대중적이고 듣기 편한 록을 주장했고, 서태지는 새로운 음악을 추구했다. 신대철은 서태지에게 고전 록 밴드들도 들어보길 권유했으나, 서태지는 고전 락밴드를 듣는 것을 고역처럼 여겼고, 새로운 장르에 더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신해철 왈, 락 말고 다른 장르는 전부 쓰레기라고 선배들에게 세뇌를 받던 시절이라고(…).
  • [12] 악동클럽에 나온 강승호라는 사람이 대표인 기획사이다.
  • [13] 시간이 흐른 뒤 강승호 대표는 엠넷 비틀즈코드 2011년 6월 23일 방영분에 출연해서 "그 당시 악기 만지는 걸 좋아하던 서태지가 다른 회사에 갔다가 그 쪽 레코딩용 콘솔을 보곤 나와 계약을 못하겠다고 통보해왔다"며 아쉬워했다.
  • [14] 매니저 최진열의 증언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이 일본 공연을 하면서 지켜 본 바로는 서태지의 일본어 실력은 능숙해서 통역없이 혼자 일본에서 생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 [15] 특종TV연예의 심사 위원 전영록은 '메탈밴드의 서태지가 이렇게 앳되고 이쁜 얼굴인 줄 몰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 [16] 재미있는 사실은 개그맨 지석진도 무명가수 시절 부른 '난 알아요'라는 곡으로 거쳐가기도 했다. 우연의 일치.
  • [17] 흔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 무대를 특종 TV연예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만, 당시 매니저를 맡았던 최진열씨의 증언으로 그 이전에도 많은 매체에 출연했다고 한다.
  • [18] 바비킴, 변진섭, 조관우, 이루에게 곡을 줬던 작곡가. 현재 예당엔터테인먼트 음악본부장으로 임재범의 빈잔을 편곡했다. 그리고 하광훈은 무려 20년이 지난 2011년까지도 악플에 시달리게 되었다.(…)#
  • [19] 한국 록계의 초기 거장 김희갑의 부인이자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 작사, 드라마 작가 출신으로 김수현 작가의 동기.
  • [20] 아침마당의 전 수장. 공교롭게도 11년 경력의 아침마당을 첫시작한게 고작 이 프로그램 나온지 5일 전이었다. 지금은 불교티비에서 프로그램 진행중. 당시 특종 TV연예에서는 연예평론가로 소개되었는데 당시 그에 대한 칼럼을 많이 썼다. 덧붙이자면 세시봉 멤버의 일원이었다. 물론 직접 노래한 것은 아니고 당시 세시봉에서 사회를 봤다고. 연예 및 음악 평론은 그 당시부터 시작했다고..
  • [21] 황해 & 백설희라는 1950~60년대의 전설적인 배우 & 가수 부부의 아들이자 딸인 전보람은 티아라의 멤버. 자신 자체도 발라드록의 대가이다. 2008년 17집 발매.
  • [22] 정확하게는 '8점 셋, 7점 하나'로 평균 7.75지만 끝의 5를 반올림해서 7.8로 발표했다. 그 당시 매니저 최진열이 방송 끝난후 방송국에서 "기껏 출연하라고 해놓고 엿먹인다"라고 흥분할 정도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서태지는 이 프로그램에서 쓰는 음악도 맡았다.
  • [23] 2014년 김구라의 인터뷰에서 서태지는 '원래 당시 프로그램 컨셉이 가수들에게 평론가들이 혹평을 하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은 그런 얘기가 나올 줄 알았다' 라며 당시 평론가들을 감싸주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 [24] 이지아의 본명은 김상은이다.
  • [25] 어머니끼리 사촌.여담으로 둘이 처음으로 안면을 튼게 서태지와 아이들 2집 당시였는데 그때까지도 정작 신해철이 자기와 친척인줄 몰랐다고 한다.
  • [26] 실제로 데뷔 첫해 대상을 받고 소감이라고 했던 말이 그냥 랩 음악하고 싶어서 열심히 썼고요...였다...다른 곡들도 마찬가지로 실상 서태지는 그냥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아서 하고싶은대로 해본건데 미디어나 극성팬들이 새로운 장르의 개척이나 음악적 실험등의 너무 과장되고 거창한 의미를 부여한 감이 있다.다만 본인의 의도와는 별개로 실제로 그 파급력과 영향은 미디어나 극성팬의 설레발이 무색하지 않은 수준이긴 하다.
  • [27]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 당시 10대~20대 초반 청소년.
  • [28] 방송, 언론, 음반업계 등.
  • [29] 홍석천커밍아웃하고 매장당한 것이 몇년도인지 생각해보면 이 시기 게이라는 단어는 인격살해에 가까운 단어였다.
  • [30] 서태지가 여자를 임신시켰다는 게 아니라 서태지가 몸소 임신을 했다는 소문이었다. 2009년 뫼비우스 투어 당시 서태지는 "나는 임신도 가능한 남자"라며 셀프 디스를 시전한 바 있다
  • [31] 2010년 데뷔한 미국의 DJ. 서태지랑 비교하기에는 커리어가 영 부실하므로 비교 대상이 된 것 자체가 굴욕이란 의견이 있지만, 20년 경력이 4년 경력 수준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러한 장르의 음악 중에서 비교한다면 감성적인 멜로디가 특징인 포터 로빈슨과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포터 로빈슨이 이 장르에서 나쁜 평가를 받는 음악인은 아니므로 서태지로서 굴욕일 것은 없다.
  • [32] 2만 8000명이라는 말도 있다.
  • [33] 2008년에 열린 서태지 심포니 공연의 경우 4만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었다.
  • [34] 댄싱9 최종 우승팀 '블루 아이'의 공연이 있었다.
  • [35] 서태지가 대단한 보컬리스트는 아니지만 특유의 음색과 더불어 철저하게 자기 자신에게 최적화된 노래를 만드는데다 보컬을 위해서 연주를 넣는게 아니라 보컬을 연주와 대등하게 사운드의 일부로서 다루는 스타일 때문에 가창력과는 별개로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소화하기가 어렵다.덕분에 너에게 리메이크를 훌륭하게 소화한 성시경이 새삼 재평가되었다 하물며 경연 프로그램의 미션곡으로서는 그야말로 상성이 최악인 셈. 게다가 국내 최강을 자랑하는 서태지밴드와 오디션 프로그램 세션의 연주를 비교해서 듣자면...
  • [36] 2000명 이상
  • [37] 2015년 1월 시점까지는 환경 단체와의 논의 및 현지 답사까지 마친 상태이며 콘서트에서 공개한 영상에는 최초의 한 그루를 심는 모습까지 담았다.해당 지역에는 앞으로 약 5천 그루의 나무가 심어질 예정이다.
  • [38] 이주노의 소속가수 영턱스 클럽의 멤버 송진아는 심지어 이주노의 영향때문에 스노우 보드에 빠져 나중에 가수 때려치고 스노우보드 선수가 되었음.
  • [39] 잘 안들리든지, 아니면 분명히 가사는 가산데 가사집에 적혀있지 않다.
  • [40] 내 사투로 내가 늘어 놓을래 로 추정된다. 아니면 내 사투가 아니라 내 사투리라 추측하기도 한다.
  • [41] 그런데 이는 히든 가사보다 단순한 몬더그린일 가능성이 더 높다.
  • [42] 그러나 전 매니저 최진열의 증언으로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 어려운 자리에서도 체면을 생각해서 술잔을 입에대는 시늉이라도 하라고 했는데도 절대로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것 보면 위가 안좋아서라기 보다 술에 취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듯.
  • [43] 당시에는 머리를 기르고 염색을 하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이 있었어서, 염색한 사람들을 정신장애로 판단하여 군 입대에 불이익을 주기도 했다.
  • [44] 여담이지만 같이 X JAPAN의 멤버였던 파타와 히스도 Dope Headz라는 밴드의 멤버로 참석했다. 후기 영상을 보면 서태지와 대화를 나누는 파타를 볼수 있다.
  • [45] 간혹 과격한 히데 or 엑스재팬의 팬들이 실제 기타가 아니라는 반론을 펴기도 하는데 이는 당시 함께 있던 스탭의 후기가 공개되면서 급짜식됐다. 그리고 그냥 페르난데스 시그네이쳐 모델이라면 돈 있는대로 있는 서태지한테 굳이 선물을 하겠는가? 악기 구입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는 서태지인데 말이다.
  • [46] BGA, 스텝, BPM측정까지 모두 다 한다는 얘기가 있지만 그건 사실무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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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04 11: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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