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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

last modified: 2015-03-30 16:32:28 by Contributors

Contents

1. 徐熙
1.1. 성장과 거란전쟁 초기
1.2. 역사에 남은 외교 담판
1.3. 담판의 의의
1.4. 거란 측의 기록
1.5. 강직한 재상
1.6. 평가와 뒷이야기
2.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주인공

1. 徐熙


생몰년도 942~998

고려의 문신. 외교관. 어릴 때 이름은 염윤(廉允)[1], 시호는 장위(章威).
천 서씨 사람들이 제일 자랑스러워하는 선조.

한국 역사상 최고의 외교관 중 하나. 세치혀류 최고 본좌

1.1. 성장과 거란전쟁 초기

포스 넘치는 철혈 군주 광종 앞에서도 바른 말을 잘했던 강직한 재상 서필의 아들이다.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전전하고 982년에 나라에 가서 단절된 국교[2]를 회복하고 돌아왔다. 이 때 송태조는 서희의 품격을 보고 감탄하여 '검교 병부상서'라는 정3품 벼슬을 주었다고 한다(동아시아 전근대 국가에서 남의 나라 사람에게 벼슬을 내리는 경우가 다 그렇듯 명예직이지만 그만큼 예우했다는 뜻).

993년에 요나라(거란)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중군사 자격으로 북방에 참전했다(1차 여요전쟁). 이 때 소손녕은 봉산에서 고려군을 격파하고 자기 군사가 80만 대군이라고 선전하면서 빨리 항복하라고 고려 조정을 윽박질렀는데, 이에 조정은 항복하자는 의견과 서경(평양) 이북의 땅을 요에 떼어주고 화친하자는 의견으로 갈렸다.
문제는 이 80만 대군이 뻥이라는 것. 이 당시 소손녕의 군대는 많아봤자 6만을 넘기 힘들 것이다. 최소 13배 이상은 뻥튀기한 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당시 거란의 원정은 도통 이상이 지휘하는 원정과 도통이 지휘하지 않는 원정으로 크게 구분이 가능한데 도통이 지휘하는 원정군은 15만 명 이상인 경우가 많았고 도통이 지휘하지 않는 원정은 최대 6만 명 정도였다. 소손녕의 당시 직책은 동경 유수로 도통이 아니었다. 그 경우 최대 6만이므로 많아봤자 6만이라는 것이지 6만보다 적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문제는 최전방 봉산성에서 윤서안의 선봉대가 이 병력에게 거하게 털렸다는 것이다. 물론 고려의 동원능력은 6만보다는 많았지만 병력을 집결시키고 동원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데 윤서안이 그 시간을 버는 임무를 실패한 것이다. 게다가 전투 이후 고려가 파견한 사신 이몽전에게 소손녕이 다짜고짜 무조건 항복이나 하라고 큰소리를 쳐댄 통에 고려 정부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그러다가 서경 이북을 할양하는 안(할지론)으로 논의가 굳어져 서경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거나 버리고 있었다. 국가에 외교적 역량이나 제대로 된 브레인이 없으면 얼마나 제대로 삽질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때 소손녕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한 서희는 할지론을 강력히 반대하여 이를 막았고 곡식을 내다버리는 짓을 멈추게 했다. 사실 사태를 조금만 더 냉정하게 파악했다면 소손녕의 군대가 80만일 수 없다는 것 쯤은 쉽사리 눈치챌 수 있었다. 80만이나 되는 병력은 당장 병참부터 쉽게 무너지기 십상이라 오랫동안 군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속전속결로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수양제가 113만명을 동원한 고구려 원정에서도 같은 경향성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손녕이 고려로 넘어와서 벌인 전투는 몇 되지 않는다. 이 점을 감안하면 80만 치고는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의심을 해야 옳았다.

이후 안융진 전투에서 중랑장 유방과 대도수가 거란군을 막아내자 조정은 강화론으로 돌아섰다. 또한 안융진 전투 이후 더 이상의 공세적 군사행동이 어렵게 된 소손녕이 줄기차게 회담을 요구하자 서희는 단신으로 거란 진영에 가서 소손녕과 담판을 벌이게 된다.

이 때 성종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누가 거란 진영으로 가서 언변으로 적병을 물리치고 만대의 공을 세우겠는가?"라고 물었는데 아무도 응답하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 하지만 서희가 홀로 일어나서 "신이 비록 불민하나 감히 왕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자원했고 성종은 강가까지 가서 서희의 손을 잡고 전송하였다고 한다.

1.2. 역사에 남은 외교 담판

회담은 처음부터 서희와 소손녕의 기싸움으로 시작되었다.

소손녕 : 나는 대국의 장수다. 그러니 너는 나한테 절을 해야 마땅하다.
서희 : 까고 앉았네. 넌 요나라 황제도 아니잖아. 너나 나나 일개 신하인데 누가 누구한테 절하라는 거냐?
소손녕 : 이 새끼가? 말하는 거 봐라?
서희 : 셧업. 난 숙소 가서 잘란다. 내가 아쉽냐, 너희들이 아쉽지.
소손녕 : 자, 잘못했다!
서희 : 필요 없어!

이거 봐 본좌 맞잖아[3]
당시 거란의 주적은 고려가 아닌 연운16주를 사이에 두고 격전을 벌이던 이었고, 고려 침공은 송과의 본격적인 전쟁에 앞서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시행된 사전작업이었다. 어? 실로 역사는 반복된다... 다만 조선에는 서희가 없었고, 한 차례 더 지난 뒤 그 끝은...


회담 내용은 고려가 어느 나라를 계승했으며, 왜 고려가 가까운 요나라가 아니라 송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느냐는 이야기가 주된 화두가 되었다.

소손녕 :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난 거 아니냐? 그러니까 고구려의 옛 영토는 우리 땅이라고. 어디서 약을 팔아?
서희 : 제 얘기를 10분만 들어보시면 우리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을 이해하실 겁니다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고려라고 이름을 지었고, 수도가 평양인 것[4]도 고구려를 이으려는 의지거든요? 따지고 보면 너네 동경[5]도 우리 땅인데 누가 누구한테 침략한다는 거냐?
소손녕 : 그건 그쯤 해두고. 그나저나 우리 요나라랑 이웃집이면서 송나라하고만 노는 건 무슨 심보야!
서희 : 그 사이에 여진족이 있는데 무슨 개소리야. 여진을 몰아내고 그 땅을 우리한테 주면 그 때 니네랑 우리랑 막힘없이 소통할 수 있는데. 내 말 틀렸냐?

초5 사회책은 다행히 순화되서 나온다[6]
이 회담으로 요군은 물러갔고 고려는 지금의 평안도 일대인 강동 6주[7]를 얻게 되었다. 위의 대화는 꽤나 간략하지만 서희가 거란 진영에 머무른 시간은 7일이었다.

사실 소손녕의 목적은 고려의 항복 내지는 협조였다. 당시 요는 송과 전쟁중이었으므로 배후의 고려가 송을 돕는답시고 치고 들어오면 골치가 아팠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고려를 확실하게 눌러두거나 최소한 송과의 관계를 끊어두고 우호적으로 만들어야 했다. 서희가 읽은 것은 이 부분이고 이 부분에서만큼은 고려가 갑질을 해도 괜찮으리라는 점을 파악한 것이다. 실제로 요가 이 정도로 입장을 양보한 것도 꽤나 이례적이다. 일부 도서에서 서희의 명분론의 승리네 뭐네 말도 안되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고구려를 누가 승계했네 어쩌네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뒤의 '왜 우리랑 통교하지 않고 송이랑만 노느냐'와 '사이에 여진족이 끼어서 그랬다' 하는 것이다. 이후로 진짜 고려는 잠시동안 송과 단교하고 거란의 연호를 쓰면서 거란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1.3. 담판의 의의

국내 위인전이나 교양 역사서에선 소손녕을 어리석게 묘사하고 서희를 칭송하는데 주력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 몇 마디에 자기 나라 영토를 떼어주고 좋아서 간다는 건 말이 안된다.당연하지 정말 그랬다면 성종부터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소손녕은 당시 거란의 의도를 충실히 대변했을 뿐이다. 서희는 그런 거란의 전략을 잘 파악하고 맞대응한 것이다. 거란은 주적인 송을 치기 전 고려와 협상을 맺어 배후를 안정시키려고 했던 것일 뿐 고려에서 국력을 소모할 생각이 없었다. 80만으로 병력을 과장한 것도 그런 계획의 일환이었고 소규모 전투만 반복하다 안융진 전투 이후론 지속적으로 협상을 요구했다.

물론 당시 우왕좌왕하며 영토할양 및 화친론을 내세운 신하들이 많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서희의 정세파악과 협상능력을 낮게 볼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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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강동 6주는 애시당초 거란의 영토도 아니었다. 그곳은 미개발 상태로 뚜렷한 정치적 구심점이 없이 서 여진 세력이 살고 있었다. 서희는 거란과 고려가 힘을 합쳐 여진족을 몰아내고 통상로를 만들면 자연히 송과 관계를 끊고 거란에 사대할 것이라 말했는데, 거란 영토를 할양받은 것이 아니고 고려가 압록강 이남의 서 여진 세력을 밀어내고 강동 6주를 차지하는 것을 묵인하고 이를 거란 황제가 하사하는 식으로 형식만 갖추겠다는 뜻이다. 앞뒤로 적을 만들 순 없었던 당시 거란 입장에선 이 정도면 충분했다.중간에 끼인 여진만 죽어난다

그리고 송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전연의 맹을 맺게되자 당연히 고려와의 관계도 재설정할 필요성을 느꼈고[8] 고려가 송과 관계를 끊고 거란과 사대하겠다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2차례에 걸쳐 침공을 행했다.

강동 6주를 얻음으로서 압록강까지 영역을 확대할 수 있었고 이 지역은 북방방어의 중심지로서 고려-거란 전쟁 때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리고 윤관의 9성 정벌 이후 보주를 얻게 되면서 압록강 이남이 완전히 고려의 영토에 편입된다. 이 회담 이후 이 지역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이 지역을 요새화한 인물도 바로 서희였다.

1.4. 거란 측의 기록

통화 10년(A.D.992)에 요동태수 소항덕蕭恒德[9]으로 하여금 고려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통화 11년(A.D.993)에 왕치王治(고려 성종)가 박랑유朴浪柔를 파견하여 표를 올려 죄를 스스로 인정하므로 조칙을 내려 여직女直(=여진)국 압록강 동쪽 수백리 땅을 주었다.


기록이 소략한 편인데 거란이 강동6주를 하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1.5. 강직한 재상

서희는 유명한 외교담판으로만 대중적으로 알려져서 '최고의 외교관' 정도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아버지 서필처럼 바른 말 잘하는 올곧고 강직한 인물이었다.

한 번은 성종과 함께 해주에 갔는데 성종이 서희가 묵는 장막에 들어오려고 하자 서희는 "신의 장막은 존귀하신 왕께서 들어오실 만한 장소가 아닙니다"라고 거절했고 또 성종이 술을 가져오라고 명하자 서희는 "신이 가진 술은 임금께 드릴 만한 술이 못 됩니다"라며 끝내 성종에게 술을 가져가지 않았다. 결국 성종이 직접 어주를 가져다가 천막 밖에서 서희와 술을 마셔야 했다. 흠좀무.

그리고 공빈령 벼슬에 있던 정우현이라는 사람이 정치에 관한 일곱 가지 문제에 대해 논평한 글을 성종에게 올렸는데 이 글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성종은 재상들을 모아 "이거 좀 건방시러워서 손 좀 보고 싶은데 어때?"라고 물었고 재상들 역시 왕의 의견에 찬성했는데 서희는 홀로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는 간관의 간언이 직분상 제한이 없었는데 어찌 처벌하겠습니까? 저는 졸렬한 자질을 가지고 부당하게도 재상의 지위에 앉아서 직책을 다하지 못했으므로 관직이 낮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 교화에 대한 잘못을 논하게 하였으니 모두가 저의 잘못입니다. 정우현의 견해는 실로 적절하니 마땅히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고려사열전> 서희

성종은 이 말을 옳게 여기고 정우현을 오히려 감찰 어사로 등용했고 정신을 차리게 해 준 서희에게도 후한 상을 내렸다. 서희의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와 책임의식을 보여주는 일화. 국제 정세 파악능력과 전략적 안목의 소유자였던 데 더해 이런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와 책임의식까지 갖춘 강직한 관료였기에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강화 사신으로 담판하러 갔고 거란군 진지에서도 담대한 행동과 함께 협상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1.6. 평가와 뒷이야기

어쨌든 회담 이후 이 지역을 요새화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느라 너무 무리한 탓인지 성종 15년부터 자리에 눕게 되었고 개국사라는 절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성종은 직접 문병을 가고 서희의 쾌유를 위해 지극정성을 다했지만 997년에 되려 성종이 먼저 승하했고, 서희는 성종이 죽은 이듬해인 998년에 57세로 사망. 아들인 서눌도 재상 자리에 올라서 이 집안은 살아서는 3대가 재상을 지낸 빵빵한 집안이 되었고 죽어서는 3대가 모두 왕과 함께 종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렸다.

보통 거란의 1차 침입을 물리친 인물로 등장하지만, 사실상 대(對)거란 전쟁을 통틀어 최고의 1등공신이라 할 만한 인물이 바로 서희다. 이후의 거란 전쟁 동안 양규강감찬 같은 명장들의 활약이 컸지만 서희가 이 지역을 요새화하지 않았더라면 이들도 제대로 활약할 수 없었을 것이고, 거란 전쟁 동안 개경이 몇 번이고 함락되었을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도 훌륭한 외교관의 대명사로 손꼽힐 만큼 협상과 언변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장기적인 전략과 대국을 보는 시각이 탁월한 인물이었단 이야기. 사실 이는 외교관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세상은 한갓 에 구준과 부필[10]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고려에 서희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만약 당시 서희의 계책이 아니었다면 절령 이북의 땅을 어찌 보존할 수 있었겠는가? - <여사제강>[11] 권3 성종기 계사 성종 12년

조선시대 선비들이 심심해서 그때까지의 역사 인물 모두를 인재풀로 하는 드림팀 내각 설정놀이를 할 때, 항상 외교를 담당하는 조판서 자리에는 서희를 넣었다고 한다.[12] 서울 서초구 서초2동 외교안보연구원에도 그의 흉상이 있다. 대한민국 외교관의 롤 모델인 셈.

여담으로 서희를 '서희 장군' 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방금 이야기했다시피 서희는 외교관의 롤 모델이지 장군은 아니다. 물론 중군사로 잠깐 종군한 적은 있지만, 휘하 부대를 총지휘하는 전권은 단 한 번도 행사한 적 없다. 굳이 서희를 장군으로 불러주고 싶다면, '김부식 장군' 이라고 먼저 부르자[13].

2003년 4월, 이라크의 재건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한 공병부대인 '서희부대'는 그의 이름을 땄다.

드라마 천추태후에서 임혁 씨가 서희 역으로 등장하여 훌륭한 연기를 펼쳤다. 하지만 드라마가 시궁창...


2.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주인공

본명 최서희.
후사가 없어 몰락해가는 양반가문의 독녀로 태어나 온갖 고생을 겪으며 산다. 어머니는 종[14]과 눈 맞고 도망치고, 재산을 노린 평사리 몰락 양반과 집안 노비 덕에 아버지가 끔살, 할머니마저도 1902년의 콜레라 대유행으로 사망하면서 먼 친척 조준구에게 재산을 다 빼았기고 간도로 도망친다.

그리고 간도에서 재산을 모으면서 종인 김길상과 혼인(…)한 후 공 노인을 통해 서울의 몇몇 부자들과 동맹, 같이 조준구를 처참하게 털어서 빈털털이로 만들고 하동 고향땅을 되찾는다. 이후 고향 근처인 진주에 집을 마련하고 자식들(아들 둘과 자신과 어릴 때 친하게 지냈던 종의 딸)을 키우며 산다. 다만 진주로 내려올 때 김길상은 만주 잔류를 선택하고 그 후 독립운동을 한다. 초반에는 친일행각을 펼치지만 후반에는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해방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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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서희의 '자'라고 적은 서적도 있는데, 고려사 서희전의 원문을 보면 '소자(小字)'라고 적혀 있다. 이 단어는 어린 시절의 이름을 뜻하는 한자어다.
  • [2] 10년 전에 송이 건국되자 외교관계를 맺으려고 했는데,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오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죽어서 실패했다.(…)
  • [3] 사실 협상은 현대국가에서도 특히 한국과 북한의 협상에서 잦은 기싸움이 적어도 결과의 절반 이상을 결정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기싸움의 의미는 상당히 크다.
  • [4] 거짓말이 아니다. 아직 북벌정책이 추진중이던 고려 초까지 서경은 개경과 사실상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 [5] 물론 당연히 도쿄가 아니라 거란의 '5경' 중 하나인 동경 요양부를 말한다.
  • [6] 순화되서 나온게 우리하고는 가까이 안지내고 멀리있는 송하고만 지내는데 어찌 이러지 않을수 있겠소?라고 소손녕이 묻자 서희가 말하길,가까이 안지내는건 여진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오. 가로막지 않는다면 어찌 친하게 지내지 않을수 있겠소?라는식, 근데 5학년이 이 문서를 보면 책에 순화되든 말든이다
  • [7] 흥화진(의주),용주(용천), 통주(선천), 철주(철산), 귀주(귀성), 곽주(곽산)이다. 여기의 귀주는 귀주대첩의 그 귀주.
  • [8] 이건 후일의 몽고나 청이 처음에는 형제관계에 만족하다 중원의 한족 왕조와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한 후 군신관계를 요구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 [9] 소손녕의 본명. '손녕'은 소항덕의 자字이다.
  • [10] 북송의 재상들로 거란의 침입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다. 구준은 송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맞자 겁을 먹은 진종을 설득해서 진종을 친정하게 만든 재상이고, 부필 역시 거란과의 외교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 [11] 조선 현종 때 학자인 유계가 지은 고려시대 역사서.
  • [12] 그리고 병조판서 자리에는 항상 이순신이 들어갔다고... 1999년 말기에도 사람들을 상대로 비슷한 설문조사 설정놀이가 있었는데, 외교장관에는 서희, 대통령에는 세종대왕, 해군참모총장에는 이순신이 뽑혔다.
  • [13] 이건 절대 농담이 아니다. 강감찬과 윤관, 김부식의 공통점이, 과거에 급제한 문관 출신이라는 것이기 때문. 또한 고려 조정의 입장에서 강감찬과 윤관은 각각 거란과 여진을 상대로 활약한 공이 있다면, 김부식은 묘청이 이끄는 서경 반군을 토벌한 공이 있다.
  • [14]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의 이부동생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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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30 16:3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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