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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last modified: 2015-03-30 17:31:28 by Contributors

유네스코 세계유산
unesco-worldheritage.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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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석굴암과 불국사 영어 Seokguram Grotto and Bulguksa Temple
프랑스어 Grotte de Seokguram et temple Bulguksa
국가 대한민국 위치 경상북도 경주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95년
등재기준 (i)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iv) 인류 역사에서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Contents

1. 수난의 역사
2. 예술적 측면
3. 논란
4. 석굴암에 대한 각종 루머들
5. 기타


石窟庵

1. 수난의 역사

신라 경덕왕때 재상인 김대성이 창건해서 혜공왕 10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그때는 석불사로 불렸다.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지만 지금은 38구만 남아있다. 조선 시대 숙종 29년에 보수하고, 영조 34년에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후 토함산의 토사에 파묻혔고, 이후 한동안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당시 경주 사람들도 어느새 사라진 석굴암이 있었는지도 거의 잘 몰랐다고 한다. 그냥 토함산에 가면 커다란 불상이 있다 정도만 소문으로 돌았다. 이제 석굴암은 일제강점기에 가서야 한 집배원에 의해 발견된다. 그리고 그 때부터 석굴암의 모든 수난이 시작되었다.


일제가 훼손하기 전의 석굴암 모습

이런 엄청난 불상무리가 발견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 과정에서 주실 상부에 위치한 10개의 부조 불상 가운데 2구가 사라졌고, 주실 안과 밖에 있던 작은 석탑 또한 파손되거나 도난당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뒤에 일제가 보수하면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병크가 터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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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해 해체된 석굴암. 기록도 없이 해체했다니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다.

본래 석굴암 수리는 그렇게 대형 공사는 아니었다. 사실 천장 위에 구멍이 뚫어져 내부로 비가 샌다는 문제만 해결하면 끝나는 건데(물론 일제는 붕괴직전이라고 주장했다), 일제는 자신들이 가진 기술의 우수성을 보이기 위해 제대로 된 사진이나 기록도 없이 석굴암을 완전 해체하는 바보짓을 하게 되고, 막무가내로 재조립하기에 이른다. 현대의 문화재 해체 공사든, 당시 문화재 해체 공사든 공사장에서 돌 하나 들어내고 모래 조금 쓸어내도 일일이 도면에 해당 기록을 작성하고하고 사진을 찍어 기록하는 것을 생각해 봤을 때 정말 어이없는 병크. 게다가 일본 기술진들이 더 문제인 건 석굴암과 같은 대형 고대 문화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한 인간들었다는 것.

그리하여 1913년 감개돌을 고정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으로 1914년에는 돔형 지붕을 해체하여 8월말 완전 해체한 후, 1915년 5월 석굴을 재조립하면서 석굴밖에 외벽을 쌓은 후에 외벽과 석굴 사이를 콘크리트로 채워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내부벽과 불상 표면에 나타난 엄청난 양의 결로와 이끼로 나타났다. 본래 해체 보수는 위에서 말했듯이 돌 하나 치우든 모래를 조금 걷어내든 간에 사진찍거나 도면에 기록을 해야 한다. 근데 일제는 그런게 거의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으니 말 그대로 병신인증 한셈.

물론 당시에는 그 당시 그런 콘크리트 시공법이 최선의 길이였다고 하지만, 그것은 당시 그들의 생각이였을 뿐. 오죽하면 일본 학자들도 이런 시공은 당장 때려쳐야 한다고 까고 나왔을 정도였다. 게다가 당시 석굴암은 콘크리트를 써서까지 보수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위에 지붕에 물이 계속 새도록 뚫려있는 구멍만 어떻게 처리해주면 끝나는 문제였는데 오히려 일을 키우는 통에 현재 대한민국의 문화재 관리에 짐만 더 지게했다. 일제는 보수 당시 석굴암을 아예 해체해서 일본 본토로 가져갈 계획까지 세웠지만, 경술국치 이후 굳이 옮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 놔뒀다고 한다. 당시 보수 공사비용은 당시 돈으로 22,726원. 지금 가치로 대략 38억 원 정도 된다.


1960년대 잘못 복원된 석굴암. 현재까지 이 내부구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뒤에 윤보선박정희 정권 때 다시 재보수를 했지만 콘크리트를 떼어내도 모자랄 판에 그 위에 다시 돔형으로 콘크리트를 다시 타설하면서 석굴암은 일반인 출입 금지구역이 되어버렸다. 이유는 안 그래도 일제때 콘크리트 타설하고 습기 조절이 안되는데 그 위에 또 타설을 하는 바람에 습기가 더 늘어버렸다. 당시 유네스코에서 온 석조문화재 전문가까지 초빙해서 추진한 공사라고 한다. 그런데 우습게도 문화재 전문가는 결정이 난 해당 공사에 대해 국내 전문가의 의견을 고려해서 이건 안되겠다. 하면 안된다고 당시 박 대통령에게 보수 공사를 취소, 설계를 다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그 조언을 씹고 공사를 강행. 그 결과는 미칠듯한 내부 습기로 금세 나타났다. 게다가 이 습기로 인해 내부에 이끼까지 끼자 이걸 제거한답시고 고압 증기를 이용한 세척 작업을 했다. 그 과정에서 훼손이 더 생긴 것은 당연한 일.

결국 서울대 기계공학과 김효경 교수가 투입되고, 석굴암 내부를 완전히 밀폐하고 그 안에 에어컨을 가동함으로써 석굴암은 본래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완전통제구역이 되어버렸다. 본래 설계도만 봐도 참배객이 들어와서 석굴암 본존불 주위의 10대 제자상과 11면 관음상으로 둘러진 방을 한바퀴 돌면서 참배하는 구조인걸 생각해 본다면 뼈가 아픈 결정. 하지만 일단 습기는 제거해야 했기에 결국 김효경 교수 팀은 석굴암을 완전통제구역화, 그리고 자연방식이 아닌 인공적 습기제거를 위한 에어컨 설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갈수록 태산

게다가 에어컨과 온풍기의 소음으로 미세한 금이 가고 있다고 한다. 망했어요.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의하면 이런 결로 현상을 해결해 주었던 것은 석굴암 밑을 흐르는 냇물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석굴암의 상황을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콘크리트를 완전히 없애고 냇물이 흐르던 처음 그대로 놔두는 것이라고 한다. 석굴암이 1000년 넘게 버틴 나름 검증된 방식이고...

2. 예술적 측면

석굴암 본존불은 한국 불교미술사에 있어서 최정점에 달해 있었고 이때를 기점으로 불교예술은 조형적인 면에서 크게 쇠퇴한다. 이 시기의 통일신라는 성덕왕 때부터 전제왕권이 수립되고 효성왕~경덕왕 초기에 이르는 시기까지 신라의 전제왕권이 극성기를 맞던 때였다. 또한 화엄종과 같은 종파불교가 전제왕권의 이념적 기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이때의 경주는 국제도시로 변모하고 당, 인도, 페르시아 문화가 직접적으로 수입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예술적 특징은 성당(盛唐)의 사실주의 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신라화된 모습을 보여줘서 '이상적 사실주의'에 기반한 예술품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즉,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조형적으로 완벽한 불상을 만들었다.

석굴암 본존불의 경우도 이상적 사실주의에 바탕한 육감적인 관능성을 보여준다. 쇄골 표현이나 허리와 엉덩이는 완전히 일직선이라거나... 불상의 표정은 자비롭다기보다는 왕을 연상케하듯 근엄하고 덩치가 크고 남성적인 느낌이 철철 흐른다. 그 이유는 위에 서술한 전제왕권 강화와 맥락을 같이 한다. 경덕왕의 얼굴이 모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조각기법적 측면에서도 매우 뛰어난 조각중 하나다. 보통 석조 조각은 비교적 무른 대리석(모스경도 2~3)을 이용하는데 비해 석굴암은 암석중에서 가장 단단한 암석중 하나인 화강암(모스경도 6~7정도)을 깎은 조각 난이도로서는 최상위의 조각이라 할 수 있겠다

본존불 앞 석실 통로에 새겨진 11면 관음은 중국 보경사 11면 관음과 상당히 유사하며 미적인 면에 있어서 훨씬 앞서고 있다.이런건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3. 논란

그런데 석굴암 불상에는 논란이 있다. 첫 번째는 조성 연대 문제다. 삼국유사의 기록으로는 751년에 중건되었다고 나오지만 문제는 저자인 일연도 정확한 조성 시기를 몰랐다는 것. 그리고 완공된 것은 774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신라 불교미술은 중대와 하대의 양식이 서로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은 석굴암이 중대 양식이냐 하대 양식이냐를 결정하는 문제.

어쨌든 오랜 시간을 두고 건축하는 과정에서 두 번째 문제인 모든 조각상들의 양식이 불일치하는 문제가 생겼다. 본존불을 1양식으로 규정하고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석가의 10대 제자상을 2양식, 사천왕, 인왕상, 팔부중상은 3양식으로 규정할 때 1양식과 3양식의 조형적 미감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본존불이 최정점이라면 팔부중은 그에 비해서 세밀함이 덜하고 양감이 부족하다.

세번째 문제는 본존불의 명호를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 것이다. 명호 문제가 중요한 것은 이 불상의 명호에 따라 주변에 배치된 조각상들의 명호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본존불의 수인(手印)은 별인 중에서도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 바닥을 보이게 하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는데 항마촉지인은 석가불만 취하는 수인이다. 그래서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석가여래로 규정되어 왔지만 이게 석가불이 아니라 아미타불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왜냐하면 신라 불교 조각상의 경우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데도 아미타불인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본존불 역시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음에도 석가불이 아닌 아미타불이다. 또한 창건자인 김대성 관련 설화를 보면 아미타불일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신라에서 이런 항마촉지인을 한 아미타불이 나온 이유는 당시 신라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 삼국 시대에는 미륵이 어느 나라에 강림하느냐에 관심을 쏟느라(...) 미륵신앙이 유행했다. 통일신라 때는 전쟁 때 희생된 전몰자들의 명복을 비는 차원에서 정토 사상에 기반한 아미타 신앙이 유행했고 그 당시 제작된 불상은 우견편단을 하고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학계에서 석가여래라는 주장을 하는 이유는 본존불 주변에 있는 10대 제자상 때문이다. 10대 제자는 석가불에만 따라붙는 상이며 아미타불은 제자상이 없다. 무엇보다 본존불 앞 석실 통로에 새겨진 11면 관음의 유무인데 관음보살은 석가불을 호위하는 보살이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학계에서 석가여래를 주장하는 사람의 비율은 9, 아미타불을 주장하는 사람은 1 정도로 석가여래라는 것이 중론이다.

4. 석굴암에 대한 각종 루머들

대중들에게 대단히 인지도가 높은 문화재이다 보니 각종 루머들이 많이 있다.

본존 이마에 박힌 보석(호박?)을 일본인들이 빼돌렸다거나 그 보석에 햇빛이 닿으면 반사돼서 일본까지 간다는 뭔가 초현실적인 것이 많다. 경주에 수학여행 온 초딩들만 가끔 언급한다 카더라(?)...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이 이런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실 마의태자가 2명이고 1명은 금강산에 나머지 1명은 양평 용문사에 들어가 죽었다. 그것에 그의 시신과 함께 보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며, 일본군이 전쟁 말 일본 본토로 가져가려 한다는 이야기가 주 내용이다.

돔형지붕의 뚜껑이 파손되어 있는데 이것도 일제의 훼손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사실 이건 만들 때 부터 이랬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석불을 조각하고자 하여 큰 돌 하나를 다듬어 감개를 만들다가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쪼개졌다. 대성이 속이 상해 있다가 깜빡 졸았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다시 만들어 놓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한 마디로 창건자가 돌 깨뜨려놓고 천신이 붙여주셨으니 그냥 쓰자고 얼렁뚱땅 넘어간 것(...)

다른 루머로 본존불이 바라보는 방향이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진 대왕암 방향이며 이는 신라의 호국 불교 사상을 뜻한다는 주장이 있다. 방향이 대충 비슷하긴 하나, 정확히는 동지 때 해가 뜨는 방향에 더 가깝다.

5. 기타


불국사의 배치를 기하학으로 해석했던 요네다 미요지의 석굴암 분석. 물론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 기하학을 이용하여 건축물을 배치하였다는 뚜렷한 근거는 없으며, 지나친 서구중심적인 해석이라는 비판과 요네다의 주장 중에는 실측과도 좀 달라서 까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해석도 있다는 참고로만 보자.



대중교통으로 찾아가려면 터미널이나 경주 시내에서 바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없고, 불국사까지 와서 환승해야 한다. 어차피 경주 와서 석굴암만 달랑 보고 경주를 떠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불국사를 보는 김에 석굴암도 같이 보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큰 불편은 없을 것이다. 불국사까지는 터미널이나 경주역, 시내에서 10번이나 11번을 타면 된다. 신경주역에서는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700번 좌석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이 노선이 터미널이나 경주역도 경유한다. 10번과 11번은 같은 노선으로 순환 방향만 다를 뿐이다. 불국사 주차장 맞은편(10, 11번 시내버스 정류장 맞은편)에서 12번 좌석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불국사에서 매시 40분에 출발한다. 석굴암에서 불국사로 돌아오는 버스는 매시 정각 출발.

혹은 불국사 뒤로 난 산길을 이용해서 40분 정도 걸어 올라가는 길이 있다.

2013년 11월 현재 대좌의 균열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 결국 긴급 점검에 들어갔다고 한다. 또한 장기적으로 원형 복원을 검토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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