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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

Contents

1. 禪讓
1.1. 개요
1.2. 과정
1.3. 역사
1.3.1. 불분명한 시작
1.3.2. 불안한 부활
1.3.3. 피바다의 시작
1.3.3.1. 남조
1.3.3.2. 북조
1.3.4. 악순환의 연속
1.3.5. 선양의 붕괴
1.3.6. 선양의 회귀 및 소멸
1.4. 총평
1.5. 외전: 푸이의 경우
1.6. 한국의 경우
1.7. 기타
1.8. 미디어의 선양
2. 중국도시 선양(심양·瀋陽)
3. 충청권의 술 회사
4. 宣揚

1. 禪讓


"옛날 , , , 탕[1]은 만고의 죄인입니다. 그들 때문에 뒷세상에 여우처럼 아양 부려 임금의 자리를 빼앗은 자가, 선위를 빙자하여 신하로서 임금을 치고서도 정의를 외쳤습니다. 그러니 네 임금이야말로 도둑의 시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원생몽유록[2] , 복건자


1.1. 개요

중국의 고사에서 임금이 임금에게, 순 임금이 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준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며, 혈통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에게 물려준다는 의미인 양위와는 다른 개념이었으며 일단 선양이 발생하면 실질적으로 이전 왕조는 멸망한 것으로 본 적도 있다. 왜 과거형인가 하면 고사에는 그렇게 썼을 지 몰라도 후대에 가면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태조 이성계가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선양한다"고 하고 있다. 정종이 태조랑 친자 관계지 어디가 남인가? 고사에 따르면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자신의 혈족이 아닌 훨씬 유능한 인물에게 왕위를 물려준다고 되어 있지만…

신하가 선왕에게 왕위를 이어받은 경우, 동아시아 역사에 기록된 선양은 정통성을 계승하였고, 왕위교체의 정당성을 역설하기 위해서 이루어졌다. 이런저런 부연설명 다 짤라먹고 핵심만 보면 왕위찬탈이다.[3]

선양이라는 것은 역성혁명, 즉 왕조를 바꾸는 하나의 방법이다. 선양은 기존의 군주가 평화롭게 새로운 군주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것이다. 다른 하나인 방벌은 기존의 군주를 강제로 끌어 내리고 새로운 군주로 바꾸는 것이다.

동양의 군주제는 신권주의와 강력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이를 하늘에서 부여받은 의무라 하여 천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아무리 황제라도 천명을 잘 받들지 못 하면 더 천명을 잘 받들 수 있는 자가 새로운 황제가 될 수 있다. 당연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냥 그럴듯한 겉포장이고, 실제로는 군주가 백성들을 못살게 굴고 부덕하면 백성들을 더 잘 이끌 군주로 교체할 여지를 남겨 둔 셈이다. 그리고 새로운 군주의 정당성과 덕을 강조하기에는 기존의 군주로부터 왕위를 물려 받는 선양이 가장 그럴듯 해보이기 때문에 많이 애용됬다.

1.2. 과정

사실상 군주나 다름없을 정도로 모든 실권을 장악한 권신과 그 신하들이 원래의 군주에게 꾸준히 압력을 넣어서 왕위를 물려주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왕위를 물려받게 될 사람은 절대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는 암묵의 룰이 있다. 성질 급한 경우 직접 나서기도 하지만 이 경우 약빨이 떨어질 수가 있으니…

또다른 암묵의 룰로는 양위가 결정되었더라도 한 번에 낼름 받아먹으면 안된다는 것. 예의상 3번 정도 튕긴 후"딱히 왕위에 욕심이 있던건 아니지만 준다고 하시니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면서 받아먹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한고제 유방이 세운 전통으로, 항우를 토벌한 후 황제로 등극하라는 부하들의 권유[4]를 세번 거절하고 네번째에 즉위했다는데서 유래한다. 이후 많은 황제들이 이를 따라했으며, 유비, 조비도 마찬가지. 더 웃기는 것은 공화국의 총통이었던 장개석도 이를 따라하여 후에 중화민국 총통자리를 세번 사양하는 척 하다가 받는다. 영락없는 츤데레 어떻게든 황위에 욕심이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면 된다. 이후 온갖 미사여구로 양위받은 상황을 포장하면 끝이다. 참 쉽죠?

원칙적으로는 이왕삼각(二王三恪)이라 하여 보통 선대왕조의 군주는 명예직과 함께 작위를 주어 여생을 보장해주기도 하는데 일부는 선양을 하자마자, 대부분은 적당히 시간이 흐른 후에 족치는 경우도 있다(…). 족칠 때 주로 사용하는 죄목은 옛 신하들과 작당해서 역모를 꾸민다는 역모죄. 컥! 뭔가 이상하게 들리지만 선양을 한 결과 황제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으니 이전 황제라도 엄밀히 말해서는 현 황제의 부하나 신하에 불과하기 때문에 역모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1.3. 역사

1.3.1. 불분명한 시작

중국의 가장 대표적인 선양 사례는 아래와 같다.

  • 순 임금, 순과 의 선양
    대표적 사례로 칭송받는 경우지만, 일부 사서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자발적이 아니라 강제적이었고, 선양 후 옛 임금이 노구를 이끌고 전국순회를 한다던지, 갑자기 정글이나 다름없는 미개척지로 갔다가 죽는 등 뭔가 뒤가 구린 처리를 당해 정말 칭송받는대로 자발적으로 평화롭게 이루어졌다고 말하긴 어렵다.
참고로 고대 중국의 역사서인 죽서기년에서는 "순임금이 요임금을 감금했다."라는 기록이 나와 있다.

1.3.2. 불안한 부활

일단 우 임금 이후에는 이 제도를 사용하지 않았다가 황제는 되고 싶은데 방법을 찾던 왕망이 고대 문헌에 적혀 있던 선양이란 과정을 되살린다. 다만 왕망은 고대 방식에 따라 유자영을 죽이진 않았다. 그리고 이것에 따라 서진까지는 선양한 황제를 죽이진 않았기 때문에 이 때까지만 해도 비교적 평화로웠다.

  • 연나라 왕 쾌가 재상 자지(...)에게 선양
    항목 참조. 일시적으로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내란이 일어났고 제나라가 이 틈을 타서 공격하는 바람에 망했다. 쾌는 유폐되어 있었으나, 자지와 함께 제나라에 의해 살해되었다.

  • 전한유자영왕망에게 선양
    평제독살하고 유자영을 황태자로 세운 왕망은 황제, 황제를 거쳐서 실권을 장악한다. 형식상 왕망은 고조영(靈)으로부터 선양을 받았다. 유자영은 제위에 오르지 못하고 황태자의 자리에 그쳤다. 그나마 왕망은 유자영을 죽이진 않았으나, 훗날 방계 황족으로 정통성이 유자영에 비해 낮았던 경시제 유현이 이에 한계를 느끼고 유자영을 살해해 버렸다.

  • 후한헌제의 문제(조비)에게 선양
    헌제가 조비에게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실제로 헌제는 조비보다 오래 살고 천수를 누려 제갈량이 사망한 해 사망했다. 후대도 오호십육국시대까지 이어졌다. 항목 참조.

  • 의 원제 조환서진의 무제 사마염에게 선양
    원제도 나름대로 대접받으면서 제 명에 세상을 떠났다. 물론 나름대로 조모와 같은 피비린내가 나는 사태가 벌어지긴 했었고, 이것만 해도 말이 많아서 사마소가 바로 즉위를 못했다. 여하간 이것부터가 나쁜 선례였던건 사실이고 삼국지연의에선 이를 얽어서 헌제에 대한 조조의 핍박이 여기서 벌을 받는다고 대놓고 권선징악의 교훈담으로 써먹었다. 그래도 조환은 헌제처럼 천수를 누리고 갔다.

  • 팔왕의 난때 혜제 사마충이 조왕 사마륜에게 선양
    사마륜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제왕들에게 제거당해서 무효화되었으머 사마충은 멍청하기가 백치와 같았기 때문에 선양 직후에 죽일 필요가 매우 적어서 살아남은 경우다. 그리고 엄밀하게 따지자면 사마륜은 황족이므로 양위에 해당한다.

  • 동진의 안제 사마덕종에게 선양
    사마덕종은 모자란 백치 황제로 유명한 사마충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그래도 사마충은 인지 능력이라도 있었지만 이 사람은 추위와 더위를 구별못했고 말도 제대로 못했으며 자신이 황제 자리를 잃는 줄도 몰랐다. 나이가 어렸으면 이해하는데 이 때가 10대 후반이었다. 아무래도 지적장애 1급 이상이 의심되는 인물이었으며 이런 이유로 인해 아버지인 환온 시절부터 제위를 노리던 환현도 옛 황제를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환현은 잠시 동진을 찬탈하고 초를 세웠으나, 불과 수개월 만에 유유에게 진압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유유가 더했다는 것이다.

1.3.3. 피바다의 시작

하지만 위의 경우와 달리 남북조시대대부분의 황제는 선양한 후에 일족과 함께 죽음을 당했는데 이것은 남북조시대(육조시대) 남조나라의 창건자인 무제 유유가 시작했다. 유유는 환현의 난을 진압한 다음 동진의 안제 사마덕종을 죽이고 그의 동생 공제 사마덕문을 죽었으며 사마씨를 거의 대부분 몰살했다.

결국 이후로 남조와 북조 모두 살벌한 레이스가 진행된다.

1.3.3.1. 남조

  • 동진의 공제 사마덕문유유에게 선양
    유유는 환현을 제압하고 사마덕종을 복위시켰으나, 북벌이 잘 진행되다가 실패하면서 위상이 흔들리자 사마덕종을 제거해 버린다. 바보황제로 유명한 진혜제 사마충도 저리가라 할 정도의 지적장애를 지녔던 사마덕종을 죽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적장애가 너무 심하여 사마충 같이 최소한의 인지능력이라도 있었으면 선양이라는 쇼를 거쳐 받을 수 있었지만 대소변도 못 가리는 자가 선양을 한다고 하면 대놓고 찬탈을 자랑하는 꼴이 되어버리니 유유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면이 컸다. 사마덕종을 죽인 후 동서양을 막론하고 형이 후사 없이 죽으면 그 밑의 아우가 이어받는 것은 기본 룰이기에 그의 아우 사마덕문을 세우고 얼마되지 않아 그에게 선양받았다. 하지만 정신지체인인 사마덕종과 달리 사마덕문은 정상인일 뿐더러, 나름 덕망도 얻고 있었다. 게다가 유송 왕조의 기반이 그리 튼튼하지 못한지라 만일 사마덕문이 유유를 공격한다면 유유가 역관광을 탈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유유는 사마덕문을 죽이고 사마씨를 멸족시키고 만다.

  • 송나라(유송)의 순제 유준제나라 고제 소도성에게 선양
    유유가 사마씨를 멸족한 것은 살벌한 레이스의 시작이 됨과 동시에 후대 황조의 창건자들에게 좋은 정당성을 주었다. 실권자 소도성은 송나라의 내란을 틈타 후폐제 유욱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했다. 그는 유욱의 아우 유준을 옹립했다가 얼마되지 않아 야심을 드러냈다. 소도성은 부하 왕경칙을 시켜 숨어 있던 유준을 찾게 했고 결국 유준에게 선양받았다. 사실 유송왕조의 황족들은 자기네끼리 '남자 친척은 죽이고, 여성 친척은 겁탈한다'(...)를 한지라 살아남은 사람들이 별로 없었는데, 얼마되지 않아 소도성이 유준을 포함한 유씨를 도륙내면서 화룡점정을 찍었다(...). 이 때 살아남은 사람은 전폐제 유자업북위에 투항한 문제 유의륭의 8남 유창뿐이었다.

  • 제나라 화제 소보융양나라 무제 소연에게 선양[5]
    명제 소란의 황족 도살과 동혼후 소보권의 폭정이 지속되고 소보권이 자신의 형 소의를 죽이고 자신마저 죽이려 하자 소연은 소보권의 아우 소보융을 옹립하고 난을 일으켜 소보권을 죽였다. 실권을 장악한 소연은 소보융에게서 선양받았고 얼마 후 소보융을 비롯한 남제의 종친을 멸족되었다. 이 때 살아남았던 사람은 명제 소란의 장남이자 장애인이었던 소보의과 소란의 6남으로 북위로 투항한 소보인[6], 소보권의 아들로 보이는 소종뿐이었다.[7]

  • 양나라 경제 소방지진나라 무제 진패선에게 선양
    후경의 난을 제압한 진패선과 왕승변에 의해 옹립된 원제 소역이 서위의 공격을 받아 피살되자 진패선은 소역의 9남 소방지를 세웠다. 이 때 북제에 투항하려던 왕승변을 죽이고 북제의 침입을 막아 낸 진패선은 실권을 잡고 소방지에게 선양을 받았는데 물론 소방지는 죽였다. 다만 소방지 외에 다른 소씨 황족들은 죽이지 않고 살려줬다.

공통적으로 이전 황제였던 유준, 소보융, 소방지가 모두 제거되었다. 다만 양나라의 소연은 제나라의 황족 방계에 해당되므로 소씨 전체를 죽이지는 않았고 진패선은 소방지를 죽였으나, 강릉에 위치한 서위의 괴뢰정권인 후량이 있었고 무엇보다 소방지 외에 양나라 소씨를 죽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진나라 마지막 황제 후주 진숙보막장이었으나 수나라 양견에게 죽지 않고 진씨 일족 모두 서북 지방에서 땅을 받고 천수를 누렸다. 물론 이 경우는 선양이 아니라 육조의 첫타자인 손호와 같은 경우로 정벌로 멸망한 경우다.

1.3.3.2. 북조

북조의 경우는 북위가 일단 동위와 서위로 갈라서면서 막장이 시작된다. 북조의 북위는 강대했지만 나중에 선무제 원각의 황후였던 태후가 나라를 말아먹는데, 호태후는 매우 음란한 여자로 자신의 친아들 효명제 원후가 자신의 뜻을 거스르자 독살하고 그의 딸을 아들로 속여 황제로 세웠다. 당시 이주영(성이 이주씨) 장군이 호 태후와 '가짜 황제' 원소, 대신들 2천여명을 하에 처넣거나 처형하는 음의 변을 일으키고 권력을 잡은 다음 효장제 원자유를 세운다. 이주영은 원자유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는데 원자유는 이주씨가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거짓으로 소문냈고 이것을 믿은 이주영은 입궐했다가 원자유에게 암살당한다.

그러나 2달 후, 이주영의 조카 이주조는 군대를 이끌고 원자유를 생포하고 유폐했다가 죽여버린다. 이 때 이주영의 부장이었던 이름이 좀 거시기한 고환이 이주조를 토벌하고 대승상 대장군에 올라 권력을 잡는다. 당시 황제였던 효무제 원수는 고환에게 모욕을 당하자 말을 타고 홀로 수도 낙양에서 장안으로 도망가버린다. 고환은 추격했지만 잡지 못하자 그의 친척이었던 원선견을 황제로 세우니 이게 동위 정권이고 한편 장안으로 달아난 원수는 관서 도독 우문태에게 의지하니 우문태가 권력을 잡는데 이게 서위 정권이다. 참고로 원수는 <북사>에서는 효무제라고 되어 있으나, <위서.에서는 도망친 황제라고 조롱하는 의미에서 출제(出帝)라고 되어 있다.

원수는 고환에게서 도망칠 때 사촌 누이들도 데리고 왔는데 음란해서 그들과 마구 사통했다. 이것을 우문태가 자주 지적했지만 무시하자 우문태는 그의 사촌 누이들을 죽여버린다. 이에 자신의 입장도 생각안하고 화를 내고 빈 활 시위를 우문태를 향해 당기고 책상을 손으로 강하게 치는 등 불만을 표현했다. 결국 그는 우문태에게 독살당하고 우문태는 그의 친족 원보거를 황제로 세우는데 원보거는 16년간 그럭저럭 황제로 체면치례하면서 살다가 죽었지만 그의 아들들인 효민제 원흠, 공제 원각은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 그 후 동위의 원선견은 고환의 아들 고양에게, 서위의 원보거의 아들 원각은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에게 선양하면서 동위는 북제, 서위는 북주가 들어서게 된다.

  • 동위의 효정제 선견북제의 문선제 고양에게 선양
    원선견은 고환의 뒤를 이은 고징의 부하에게 '폐하, 대장군이 말 타고 빨리 가시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라는 소릴 들을 정도로 도 마음대로 타지 못하는 지경이었다.[8] 그나마 고환은 효무제 원수가 도망친 선례가 있어 겉으로는 나름 공손히 원선견을 모셨고 그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고환이 죽고 장남 고징이 뒤를 잇자 갖은 핍박을 받았는데 하루는 함께 술을 먹다가 원선견일 ''이라고 하자 술에 취한 고징은 '개 같은 놈의 짐'이라면서 조롱하고 부하를 시켜 구타했다. 무력했던 원선견은 오히려 고징에게 사과하고 금과 비단까지 하사했는데 하루는 열이 받쳤는지 고징을 죽이려고 했다가 발각되었다. 고징은 분노했고 이를 따졌으나, 오히려 원선견은 극딜했다. 고징은 잘못했다고 빌었으나, 얼마 후 원선견을 감금했는데 고징은 마침 음식 나르던 노비 난경에게 암살당했다. 이 때 원선견은 황권을 탈환할 기회를 얻었으나, 고징의 둘째 아우 고양이 태연스럽게 워낙 뒷마무리를 재빠르고 깔끔히 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원선견은 모든 걸 포기하고 고양에게 선양으로 목숨을 구걸했지만 선양한지 얼마 안되어 피살당하고 죽은 후 고양이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장수에 던져버리는 부관참시를 당했다. 이 때 동위 원씨 700여명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피살되었으며 이들의 시체도 장수에 버려졌는데 장수에서 잡은 물고기에서 사람의 손가락이 나와 수도 업성 사람들은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 서위의 공제 북주의 효민제 문각(宇文覺)에게 선양
    이 경우는 좀 재미있는 경우인데 우문각은 우문태의 차남으로 그는 사실 직접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문태가 죽자 우문각이 뒤를 이었지만 실권은 우문태의 조카 진공 문호가 쥐고 있었다. 우문호는 공제를 시켜 종제에게 양위하라고 시키고 나중에 원곽를 죽이고 서위의 원씨를 모두 멸했다. 우문각은 얼떨곁에 황제가 됐지만 우문호의 횡포 때문에 그를 죽이려다가 다음해 역관광당해 죽고 만다(...). 그의 형 명제 우문육도 우문호를 죽이려다가 역시 3년만에 독살당하지만 그들의 아우 무제 우문옹은 마침내 12년을 기다려 우문호를 주살하고 일족을 멸해버린다.

결국 북위의 원선견과 원곽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서위와 동위 모두 원씨 일가가 몰살당하는데 특히 동위의 경우에는 원씨 일족 700명이 일거에 몰살당한다.

1.3.4. 악순환의 연속


이 때쯤 가면 선양 = 죽음이란 공식이 완성되었다.

  • 북주의 정제 문천수나라 문제 양견에게 선양한 경우
    양견은 우문천의 할아버지였지만 외손자의 목숨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우문천의 친외할아버지는 양견이 아니었다. 우문천의 아버지 선제 우문윤은 황후가 5명이나 있었는데 그 중 양견의 딸은 양황후였고 우문천의 어머니는 주황후였다. 따라서 친외손자는 아니고 상징적인 외손자일 뿐으로 여튼 우문천 역시 선양받은 지 얼마 안되어 우문씨들과 함께 깨끗하게 멸족당하는 걸로 끝난다.

  • 나라 공제 양유당나라 고조 이연에게 선양
    양유는 양제(원래 시호는 명제) 양광의 손자이다. 양광의 아들 원덕태자 양소의 아들로 이연이 난을 일으켜 수도 장안에 입성한 후 강남에 고립되어 있던 양광은 태상황으로 올려지고 장안에 남아 있던 양유가 황제로 옹립되었다가 실권을 장악한 이연에게 선양한 후 죽음을 당한다. 같은 시기 양유의 형제 황태주 양통낙양에서 세충에 의해 실권이 장악되어 있다가 폐위당하고 살해당했다. 양씨 황가는 양광이 우문화급에게 시해당할 때 친근하던 양견의 아들 3남 양준의 장남 양호(楊浩)를 제외하면 모두 피살되었으며 이연 역시 양씨를 대부분 도륙냈다. 이 양호는 우문화급에 의해 옹립되었다가 피살되었다. 그러나 양견의 5남 양량의 외아들 양호(楊顥), 돌궐의 가한과 정략결혼한 딸 의성공주, 양제의 딸 양씨는 살아남는다. 그 중 양씨는 이연의 사남 이원길의 부인이 되어 아들딸 잘 낳고 살다가 태종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자신의 형 이건성과 아우 이원길을 죽일 때 남편과 다섯 아들들을 모두 잃어 과부가 되었다. 훗날 이세민의 첩이 되어 그의 14남 이명(李明)을 낳았는데 이세민은 장손황후를 잃고 양씨를 황후로 삼으려고 했으나, 제수였던 여자인지라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대신 이명을 이원길의 양자로 삼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 당나라 애제 후량의 태조 주전충에게 선양
    절도사 주전충은 환관의 난을 틈타 수도 장안에 들어가 환관 수백 명을 모두 죽였는데 궁궐할 청소할 최소 인력으로 어린 환관 30여 명을 제외하고 모두 죽였다. 실권을 잡은 뒤 얼마 되지 않아 장안에서 낙양으로 수도를 강제로 옮겼고 소종 이엽을 사람을 시켜 죽였는데 온갖 연기를 다 하다가 그의 9남 이축을 세우고 얼마 되지 않아 선양받고 그 역시 죽였다. 사실 자세히 주전충이 역사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안다면 다들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1.3.5. 선양의 붕괴

오대십국시대에 접어들면서 그나마 껍데기였던 선양 제도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말 그대로 약육강식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후량은 에게 정벌된 후에 주씨 일족이 모두 주살되고 후당은 후진에게 멸망하는데 그 전에 내분으로 이씨 일족이 대부분 몰살된다. 후진은 후당을 멸하기 위해 뒤에 나라를 세우는 거란의 힘을 빌렸는데 그게 공짜가 아니라 운 16주를 넘긴 것이었다. 후진을 세운 고조 석경당의 뒤를 이은 그의 조카 출제 석중귀가 제멋대로 설치자 화가 난 거란족이 후진을 쳐서 석중귀와 석씨 일족을 모두 잡아가고 만다. 석중귀와 석씨 일족은 저 만주 변방으로 끌려가 죽을 때까지 노동을 하게 되는데 석중귀는 어린 딸을 요나라 황족에게 강탈당하고 결국 단칸방에서 최후를 맞이하낟. 후당의 뒤를 이어 후한이 세워졌지만 은제 유승우가 후주의 태조 곽위를 제거하려다가 역관광당하고 살해당한 후에 후주가 세워진다.

1.3.6. 선양의 회귀 및 소멸

이 시기에 오면 선양 따위는 사람들의 뇌리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선양을 받은 사람이 인간답게 일을 처리해서 그나마 유종의 미를 남겼다.

  • 후주의 공제 종훈송나라조광윤에게 선양
    태조 는 후한의 은제 유승우가 자식들을 모두 잡아죽이는 바람에 자손을 두지 못했다. 대신 아내 시씨의 조카였던 을 양자로 삼았는데 시영은 잠시 곽영이 되었다가 곽위가 사망하자 다시 시영으로 돌아갔다. 세종 시영이 죽고 그의 아들 시종훈이 뒤를 이은 지 얼마 안되어 진교의 변으로 시종훈은 조광윤에게 선양한다. 하지만 조광윤은 시종훈을 포함한 시씨 일족을 죽이지 않고 오히려 우대했다. 아예 조광윤은 죽을 때 석각유훈이라며 돌에 유훈을 새기고 새 황제가 즉위를 하였을 때 반드시 이를 보고 지키도록 하였다. 다만 이 석각유훈의 존재는 송 황실 최고의 극비였던 까닭에 아무리 총애받는 신하라고 해도 그 존재를 몰랐다. 결국 이 석각유훈은 금이 수도 변경(개봉)을 점령한 후에야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석각유훈에 새겨진 것은 '제위를 선양한 시씨 가문의 보호'와 '꼴보기 싫은 신하가 있더라도 유혈숙청을 자제하라(언로를 막지 말라,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는 이유로 신하를 죽이지 말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시씨 일족은 북송나라에게 멸망하고 남송이 건국되어 나중에 원나라에게 멸망 할 때까지 약 300년을 송나라의 보호를 받았다. 그래서 대대로 시씨 일족은 예우와 보호를 받았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인지 남송의 마지막 일전이었던 애산 전투에서 남송과 명을 같이 하게 된다.

1.4. 총평

선양은 원래 그 시초부터 불분명한 점이 있으나, 중세적 의미에서 힘이 있는 사람이 예절을 갖추어가며 전임자에게 합법적으로 권력을 이어받는다는 느낌을 살릴 수 있었으므로 부활하게 된다.

하지만, 애초에 부활한 이유부터 형식만 차리려고 했기 때문에 후대로 넘어갈수록 눈가리고 아웅 이하의 절차로 격하되어 위선적인 제도로 낙인찍히게 된다. 결국 사람들의 뇌리속에서 중세적인 생각이 사라지자, 더 이상 제도 자체가 있을 의미가 없어서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다.

물론 송나라 다음의 국가들은 선양이라는 형식을 취할 상황이 아니였다. 송나라 다음의 원나라는 이민족이였고, 명나라는 원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지 못했고, 청나라는 혼란 와중에 중원을 집어삼켰기 때문에 선양 의식을 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수나라와 당나라의 경우처럼 적당한 전 왕조의 방계 혈족 하나를 억지로 황위에 올린다음, 조금 시간이 지나서 선양을 받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데 이걸 하지 않는 이유는 지배층이 중국화 되지 않은 이민족 왕조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전 국가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일부 지역에서 구황족이 자립한 경우라도 선양은 차질없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송나라의 황족의 경우 애산전투에서 전멸당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당장 원나라는 송공제와 주변의 송나라 황족들을 포로로 잡아서 북경에 압송하였으며, 송공제는 천수를 다했고 후손도 남겼다. 원나라의 경우 선양을 하지 않은 이유는 그전에 남송을 멸망시키기 전에 이미 황제를 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나라의 경우는 운남을 지키던 원나라 황족을 포로로 잡는 등 이런 목적에 쓸 사람은 매우 많았지만 선양 의식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명의 경우에는 원을 제대로된 천자라 인정 하지 않고 배척의 대상으로만 보았다 이는 비유하자면, 조선말기 일제시대가 길어져 일왕이 조선..(중화)의 발전된 문물과 풍요 때문에 한반도로 경을 천도했는대. 그 일제를 조선에서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 타도해 왕이될지라도 일왕의 자리를 선양을 받겠는가? 또한 청은 에초에 중국화 되지 못한 이민족의 왕조라 선양을 눈여겨 보지 않았다

대체적으로 한 왕조가 선양받은 후에 그 전 황제를 살육하자 그 자손이 똑같은 일을 당하는 것으로 보아 인과응보업보라는 것을 떠올린다 할 수 있을 정도다.

1.5. 외전: 푸이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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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선양 마오쩌둥선통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의 경우는 후대가 공화정이었기 때문에 약간 경우가 특수하지만, 권력의 이동이라는 점에서 평화로운 선양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신해혁명후 황정이 폐지되면서, 공화국에 평화롭게 정권을 인계한 선통제는 퇴위했지만, 1) 대청황제 존호 유지, 2) 매년 400만냥[9] 의 세비를 중화민국 정부가 부담, 3) 자금성, 이화원 거주 허용, 4) 공사중이었던 광서제 왕릉 공사 지속 5) 청나라 왕실 의식 허용 등의 특전이 있었다. 무혈로 순순히 물러난 보답으로 공화정부가 예우를 해준 셈이다.

사실 이렇게 순순히 물러난 것은 푸이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였던 순친왕의 결단 때문이었다. 광서제의 동생인 순친왕은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고, 황실이 더이상 존속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순순히 물러나는게 황족이 사는 길이라고 판단, 황실폐지에 동의했다. 이후에도 이런저런 복벽음모나 만주국같은 곳에도 전혀 가담하지 않았고,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고 중국의 단합을 외쳤다. 그 결과 그는 중화민국 시기는 물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후에도 청나라 황족의 최고위 어른으로서 존경을 받으며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이정도면 거의 후한 헌제의 선양만큼 평화로운 조건이다. 일종의 "왕 있는 공화정"이라고 봐도 될 정도.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네 마네 할때도 어린 황제는 자금성에서 중화민국과 다른 "청나라의 황제"로서 평화롭게 살았다. [10]

후에 장훈 (장쉰)의 복벽(왕정복고) 소동이 진압되었지만, 공모자라고 할 수 있는 선통제에 대한 예우는 계속되었다. 물론 이렇게 복벽소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민국을 흔들었기 때문에, 푸이는 자금성에서 추방되지만, 그래도 예우는 계속되어 매년 50만 원의 세비와 개인재산은 보호되었다. 그러나 푸이는 이에 불만을 느끼고 나중에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을 거쳐 황제로 집권한다. 거기서도 괴뢰 신세였던것은 매한가지였지만, 일단은 황제였다.

국공내전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후에 푸이는 전범으로 기소되어 10년간 푸순 수용소에서 복역을 했으나, 예상과는 달리 처형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러시아 제국로마노프 왕조 최후의 황제인 니콜라이 2세의 경우 적백내전의 급박한 상황에서 쫒기듯이 사살당했다는 것이었다. 설립 당시부터 러시아 공산당에게 버려진 자식 취급이나 당하고 사이도 그리 좋지 않았던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너흰 황제를 죽였지만, 우린 황제까지 감화시켜 공산당으로 만들었삼이라는 자부심을 세울 필요가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중공정권이 수립된 후, 수많은 지배계급 인사들이 인민재판후 처형되었지만[11], 정작 우두머리급인 만주국 황제 푸이나, 총리 장징휘는 목숨만은 건졌다.

그래서 푸이자아비판 후 1959년 출소했고 저우언라이 총리의 배려로 처음에 베이징 식물원 정원사로 발령났다. 이건 처벌이라기 보다는 노동계급으로 환생했다는 일종의 통과의례로 봐야할 것으로 보며, 이 경력 때문에 자신이 황제로 살아가던 자금성에 정원사로 되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성립되었다. 후에 전국정치협상회의 문사연구위원회의 전문위원이 된다. 한국으로 치면 국회 도서관 연구원 정도. 1964년에는 저우언라이의 힘으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만주족 대표)에 선출된다. 한국으로 치면 전국구 국회의원쯤(...)

이후 문화대혁명홍위병에 의해 다소 고초를 당하기는 하지만, 그건 푸이뿐만 아니라 공산당 개국공신에게도 다 해당되는 일이었으므로. 게다가 직접 맞은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폭행당하는 장면을 본 것 뿐이었다. 어쨌든 푸이의 경우를 선양으로 친다면 매우 평화로운 선양이었다. 역시 저우언라이는 조광윤에 맞먹는 대인배

1.6. 한국의 경우

한국고려공양왕이 조선의 태조 이성계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을 꼽을 수 있다.[12] 조선이 개국된 뒤에는 선양한 공양왕과 그 일가 대다수의 왕씨 일족이 함께 나중에 살해당한다.[13]

조선 정종태종 이방원에게 선양을 했다. 다만, 이 경우는 사실 두 사람이 친형제간이고 즉위시부터 실권은 이방원에게 있는 형태였으며, 2년이 지난 후 곧바로 선양한 경우라서 다른 경우와는 달리 순조롭고 평화롭게 이루어졌다. 사실 정종과 태종은 사이는 선양한 뒤에도 매우 좋아서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에는 '격구(擊毬)하고 술자리를 마련하여 극진히 즐거워하였으니, 태상왕이 부른 것이다'라는 기록이나 '태상왕(정종)이 일어나 춤을 추니, 임금도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태상왕께 헌수하고 춤을 추고 연구로 화답하며 매우 즐기다'는 기록도 남아있으니 정말로 사이가 좋았던듯 하다.

참고로 선양은 비록 협박에 의할지라도 왕이 스스로 물려주는 것을 말하는데, 1907년 고종 퇴위시에도 고종은 끝까지 퇴위를 반대했으니 선양이 아니다. 애초에 양위식에조차 고종도 순종도 모두 참석하지 않았다. 또, 경술국치 일제시대 이씨 왕족일가가 일제 덴노 왕가로 편입된 것은 타국의 황가에 들어간 것이므로 선양이라고 볼 수 없는데다가 이완용데라우치 마사타케의 협정에 의한 것이었지 순종은 끝까지 경술국치에 반대했으니 당연히 선양이 아니다.

1.7. 기타

그 외에도 베트남/역사에서도 선양이 벌어졌기에, 결과적으로 최후의 선양은 베트남에서 있었다.

1.8. 미디어의 선양

2. 중국도시 선양(심양·瀋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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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성도. 한국식 한자독법으로 읽으면 '심양'이다. 이 지명은 시 주변을 흐르는 혼하(渾河)의 옛 이름 심수(瀋水)의 북쪽에 있다는 뜻인 '심수지양(瀋水之陽)'에서 유래한 것이다. 풍수에서 강의 북쪽 산의 남쪽(水之北, 山之南)을 양(陽)이라 하는데, 이는 한강의 이북에 있다는 뜻인 한양과 유사한 작명 방식이다. 인구는 약 776만 명.

그리고 애초에 양(陽)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다 비슷한 지형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중국의 고도인 낙양(洛陽)이 있겠다. 뤄양 또한 낙수의 북쪽에 있어서 낙양이라고 불리는 것. 이런 지역이 양이 될 수 밖에 없는 건 지역 구조를 보면 알겠지만 북쪽에 산이 있고 남쪽에 강이 흘러 햇빛에 대한 차폐물이 없어서 볕이 잘들고 물가라서 농사짓기 좋기 때문이다. 이런 동네들에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또 대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또 이런 지형은 풍수지리에서 길하게 여기는 배산임수의 지형과도 일치하는데 북쪽에 산이 있는 지형이 유리한 이유는 중국을 괴롭히던 이민족들은 대부분 북쪽에서 쳐들어 오는 관계로 북쪽에 산이 있으면 자연스러운 방어선이 형성되기 때문. 즉 외적 방어하기 좋고 물가에 햇빛 잘 들어서 생산력이 높은 지역이 길지인 것이다. 길지, 명당 얘기할 때 배산임수를 따지는 게 다 이런 이유. 문물이 발달하고 도시화가 진행돼서 배산임수는 고사하고 평지만 있으면 집짓기에 바쁜 요새엔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그래도 역시 따지는 사람들이 많은 듯. 한남동에 괜히 회장님 저택이 밀집되어 있는 게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산의 북쪽 물의 남쪽을 음이라고 하는데 이 경우는 남쪽에 있는 산이 해가 떠 있는 동안 그림자를 만들어서 동네에 항상 그늘이 지기 때문이다.

원대에는 칸의 사위가 되는 고려의 왕에게 이곳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심양왕(이후 한 글자로 고쳐서 심왕) 작위를 함께 주기도 하였고, 명대까지 심양으로 불리다가 만주족이 세운 후금이 점령하고 수도로 삼았다. 이 때 '묵던'(Mukden)[15]이란 만주어로 도시 이름을 고쳤다. 묵던은 중국식으로는 성경(盛京)으로 불렸다. 이때 세운 궁전이 선양고궁인데, 영어명이 '묵던 팰리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병자호란 때 삼학사와 소현세자가 끌려간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이후 1644년 청군이 북경에 입성한 후 수도로서의 위치를 상실한 성경은 1657년 다시 봉천부(奉天府, 중국어로 펑톈)로 개명하며 사실상 만주족의 고향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처음에는 만주 일대를 신성시하는 청국 조정의 방침에 따라 한족의 출입이 엄금되었으나, 이후 러시아와 일본 등 열강들이 만주를 침략하기 시작하면서 땅을 뺏기게 된 청나라가 급하게 출입금지를 해제하여 사람들을 만주에 살도록 하자마자 한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의 사람들이 봉천으로 흘러들게 되었으며, 20세기 초에는 장작림-장학량으로 이어지는 봉천군벌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도시의 이름인 심양(선양)-봉천(펑톈)의 지명은 알자스-로렌처럼 정치적 떡밥과 맞물려 개명이 반복되었다. 1929년장작림이 일본군의 음모로 폭살당하면서 뒤를 이은 장학량은 도시명을 펑톈에서 선양으로 복구시켰으나, 1931년 일제만주사변으로 선양을 점령한 후 다시 펑톈으로 만들었다. 지명 자체가 만주족과 일본인들에 의해 강제로 개명된 것이기 때문에 과거에는 한족 출신 선양시민들은 펑톈이란 지명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요즘이야 별로 거부감 같은 건 보이지 않지만.

심양과 그 주변도시는 평안도/경상도계 조선족이 모여 사는 곳이기도 하다. 서탑이란 곳은 한국인가게,조선식당(평양관-모란관)등이 한글간판인 상가가 가득 들어서 있다.이곳 조선족은 초등학교부터 고등중학교까지 중국조선말로 언어교육을 실시하고 있다.조선족이 많은 원인으로 많은 탈북민들도 심양에서 은신하며 살고 있다.탈북민이 가게 모델로 활동할만큼 탈북민에 대해 타지구보다 우호하다.

3. 충청권의 술 회사

홈페이지 : #


향토기업색을 벗고 전국구 기업으로 거듭나고자 최근 사명을 The Mackiss Company로 변경했다.

4. 宣揚

명성이나 권위 따위를 널리 떨치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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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상나라의 건국자, 엄밀히 말해 이 사람은 선양을 받은 게 아니라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왕이 됬다
  • [2] 조선 선조때 임제의 소설, 선비가 책을 읽다가 꿈에서 단종과 사육신을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된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 [3] 물론 혈연에 연연하지 않고 최적임자에게 권력을 넘긴다는 좋은 의미로 만들어진 단어지만, 이 문서를 보면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 [4] 한신, 영포, 팽월초한전쟁 당시의 7왕.
  • [5] 그런데 소연제(육조)종친으로 촌수를 따지면 소보융의 4종숙부(11촌)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양위지만 국호가 바뀌어서 다들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 [6] 다만 북위에서 모반을 일으키려 하다가 죽었고 그의 자식들도 다른 죄에 휘말려 모두 죽어 멸족되었다.
  • [7] 소종은 소보권이 죽은 지 7개월 만에 태어났는데 소종의 어머니 오씨가 소보권의 후궁이었다. 하지만 소보권이 죽은 후 소연이 손에 넣었으므로 소연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 [8] 이것은 고환에게 모욕을 당한 북위의 효무제가 말을 타고 장안으로 도망쳤기 때문이다.
  • [9] 1냥은 은으로 계산되며 현재 중국돈 200위안정도..한국돈으로 4만원정도라고 한다. 현재 한국돈으로도 1600억원정도였으니, 대단한 금액인셈. 물론 황실이 거느리고 있는 하인이나 시종같은 인원이 꽤 많았는데다가, 각종 행사에 지출되는 금액도 꽤 되었을테니 퇴임황제가 마음대로 쓸수 있는 돈은 이보단 적었을 것이다.
  • [10] 여담으로 위안스카이는 황제로 추대받자 역시 형식적으로 거절하다가 정말 황제를 못하게 된 케이스다. 안습.
  • [11] 패왕별희에 보면 잠시 이 장면이 묘사된다.
  • [12] 신라경순왕고려왕건에게 한 것을 선양이라고 하는 의견도 있는데 왕건은 이미 그전부터 고려라는 나라의 왕이었고 경순왕이 한 것은 별도의 국가였던 신라를 고려에 들어다바친 것이기 때문에 선양이 아니다. 어쨌든 나-려 교체의 경우는 신라왕실세력이 이후에도 제법 후한 대우를 받아 경주가 경순왕의 영지가 되고 이후 경주 김씨가 문벌가문의 중심을 이룰 정도였다.
  • [13] 그래서 여기서 피하기 위해 족보를 고쳐서 전(田)씨나 전(全)씨가 된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14] 간화자에서 瀋이 沈으로 병합됐는데, 아예 지명이 개정된 걸로 봐서 정체자로 적을 때도 沈陽으로 쓰는 경우가 없진 않다. 선양시 공식 웹사이트의 번체판 대강 만든 것 같다 에서도 일단 沈陽으로 적고 있다.# 하지만 중국 본토 밖에서는 대개 예전 표기인 瀋陽으로 쓴다. 선양의 첫 글자가 沈이 된 것은 어차피 《간화자총표》에 瀋을 폐지하여 沈으로 통합하게 했기 때문이지 별도로 지명 개정 절차를 밟은 건 아니기 때문에 사실 어떻게 보면 沈陽으로 쓰는 건 근거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참고로 《간화자총표》 부록에는 간단한 글자로 지명을 개정한 케이스들을 표로 나열하고 있으나 선양은 이 표에 안 들어 있다. 대신 표 아래에 한자 간화 과정에서 (자동으로) 변경된 지명들도 있다면서 그 사례 중 하나로 선양을 들고 있다(此外,还有以下两种更改地名用字的情况:(1)由于汉字简化,例如辽宁省瀋阳市改为沈阳市;(2)由于异体字整理,例如河南省濬县改为浚县。).
  • [15] 1940년대까지만 해도 영어로 이 도시를 나타낼 때는 Mukden이라는 표기가 일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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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3 18:4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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