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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last modified: 2015-11-14 19:41:52 by Contributors

조선의 역대 국왕
13대 명종 이환 14대 선조 이연 15대 광해군 이혼

이 항목은 멸칭인 하성군으로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묘호 선종(宣宗)→선조(宣祖)
시호 조선 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
(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소경(昭敬)
균(鈞)[1]/연(昖)[2]
출생 한성 인달방 도정궁(都正宮)
사망장소 한성 정릉동 행궁(덕수궁 석어당)[3]
배우자 의인왕후(懿仁王后),인목왕후(仁穆王后)
아버지 이초(李岧)
어머니 하동부대부인 정씨(河東府大夫人 鄭氏)
생몰기간 음력 1552년 11월 11일 ~ 1608년 2월 1일
양력 1552년 11월 26일 ~ 1608년 3월 16일
재위기간 음력 1567년 ~ 1608년 2월 1일
양력

Contents

1. 개요
2. 재위기간
2.1. 즉위
2.2. 권력강화와 기축옥사
2.3. 임진왜란기
2.4. 임진왜란 이후 후계문제
3. 후대의 평가와 기타
3.1. 창작물에서의 묘사
3.1.1. 선조를 연기한 배우들
3.2. 목릉, 목릉성세
3.3. 선조 어필
4. 선조에 대한 설 또는 음모론
4.1. 선조 명군설
4.2. 이순신 음모론
4.3. 방계승통에 대한 열등감?
4.4. 선조=장비환생 설
4.5. 선조=노부나가 설

1. 개요


런닝맨

조선왕조 제14대 왕. 그리고 임란 이전에는 유능한 왕이었으나, 임란 이후 타락크리 조선 역사상에서도 손꼽히는 백성을 버린 막장군주라는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왕.[4]

실록상에 교만하고 패려하다고 기록된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5]3남으로 원래 이름은 이균이었으나 왕이 된 후 만력제의 이름 주익균을 피휘해 이연으로 바꾸었다. 연려실기술에 소경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 대왕(宣祖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은 휘가 연(昖)인데 처음 휘는 균(鈞)이었다는 대목이 있고 선조실록에는 선종소경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의 휘는 이다. 宣宗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諱라는 대목이 있으며 수정실록에도 휘를 연이라 바꾸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공이 아닌 연이다.

하성군으로 봉해졌으며 그는 명종의 조카였는데 그의 외아들 순회세자가 요절한 후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뒤를 이어 조선의 14대 국왕이 되었다. 여기서 직계가 끊기고 대대로 적자에게 내려오던 왕통마저 단절되었으므로 선조는 조선의 첫번째 방계 임금이다. 비록 중종은 형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이 됐지만 어머니가 성종의 계비로 적자였기 때문에 방계가 아니다.[6]

분열된 사림 신하들을 적절히 이용하는 방식으로 정국을 주도하는 등 출발은 나쁘지 않아보였으나 임진왜란이라는 조선사상 초유의 재난을 맞아 수도를 버리고 몽진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덕분에 각종 사극에서 안 좋은 꼴을 많이 보이는 편. 그러나 선조가 당시 국방에 기울였던 전쟁대비 노력이라든가 동아시아 정황을 고려하면 욕을 먹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더라도 지나치게 욕을 먹는 것이 부당하다는 옹호론도 부상하고 있다. 이는 전이나 지금이나 뜨거운 감자 중 하나.

정치적으로는 이 시기 발생한 붕당을 이용해 권력을 강화하려 했고 상호 견제(이간책)를 통한 신권 억제에 성공하여 상당히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 정통성 부족에 치세 중기 밀어닥친 임란이라는 악재까지 생각하면 정치 권력을 장악하는 능력은 역대 왕들 중에서도 수준급. 다만 국가 전체를 놓고 생각하면 선조의 왕권 강화 시도가 나라에 그리 유익한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왕도정치의 측면에서 봐도 애초에 이상적인 왕도정치는 왕권과 신권의 조화지 어느 한쪽이 우위에 올라탄 것이 아니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다. 덤으로 아까운 인재들이 선조의 왕권강화책에 덧없이 휘말려 많이 희생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장악한 권력을 쓴 방향성도 그다지...

가족관리 측면에서 평가가 좋지 못하다. 일찍부터 여색을 탐한다는 비판을 들었으며 특히 후궁들의 횡포가 심각한 상황이었다고. 임진왜란 당시 몽진 도중 인빈의 가마는 백성들에게 돌을 맞기도 했다. 이런 사례는 인목왕후를 왕비로 맞아들일 때에도 나타난다.

자식 교육에도 큰 신경을 쓰지 않았는지 일부 아들들의 경우는 더욱 더 막장이라 장남인 임해군부터 시작해 순화군, 정원군 항목을 보면 어이가 없어진다. 광해군 역시 조선 왕 가운데 친국을 최다 실행하는 등 보기에 따라서는 '잔혹하다'고 볼 만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다.[7][8] 선조의 아들들 가운데 인품으로 좋은 평가를 받은 왕자가 몇 안 된다.

선조계 혈통에서 나타나는 잔혹성은 유전일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덕흥대원군, 손자가 인조인 점(게다가 인조는 정원군의 아들!)[9]을 생각하면 더더욱... 사실 조선시대 왕자들이 그리 행실이 좋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선조를 전후하여 유독 사이코패스적인 잔혹한 행동을 보이는 왕자들이 눈에 뛰게 많이 나타난다.

츤데레였다는 설도 있다. # 그저 충공그깽.

2. 재위기간

2.1. 즉위

일화에 따르면 선조가 아직 하성군이던 시절의 어느 날 명종은 덕흥군의 세 아들인 하원군 이정, 하릉군 이린, 하성군 이균(선조)을 대전으로 불렀다. 명종은 대뜸 머리에 쓰는 익선관을 벗어 이들에게 이걸 한 번씩 써보라고 시켰다. 하원군과 하평군은 별 생각 없이 써보았지만 하성군은 "군왕께서 쓰시는 것을 어찌 신하된 자가 쓸 수 있겠사옵니까?" 라며 사양했다. 이에 명종이 "그렇다면 너는 임금과 아버지 중 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묻자 하성군은 "임금과 어버이는 비록 같지 않사오나 충과 효는 본래 하나인 것입니다" 라고 대답해서 명종이 크게 칭찬했다. 선조 행장에는 이때 명종이 선조를 칭찬하며 "그래, 이 관을 마땅히 너에게 주겠다" 라 했다고 쓰여있다.

사실 이런 '장난' 이 왕위계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고 실제로도 명종은 끝까지 후계자를 완전히 낙점하지 않고 승하한 것으로 보인다. 명종이 후계자를 정해야 할 순간엔 이미 말을 하지 못했으며, 명종의 왕후인 인순왕후 심씨가 명종의 뜻이라며 어릴 때부터 예쁘게 생각한 하성군을 양아들 삼아 후계 자리를 낙점. 결국 이렇게 14대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야사에 따르면 명종이 갑자기 승하해 후계자를 남기지 못해 계승 문제가 생길 뻔했으나 당시 영의정 이준경의 기지로(이미 시체가 된 명종에게 다가가 평소 명종이 하성군에게 마음이 있음을 알고 "신이 귀가 잘 들리지 않사온데 하성군으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하오리까?" 라고 말했고 다행히도 그게 잘 먹혀 하성군이 왕이 된다[10] 왕위에 오르게 됐다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는 혼수상태에 빠진 명종을 대신하여 명종비 심씨(인순왕후 仁順王后)가 하성군의 계승을 결정했다. 야사가 사실이라 치더라도 결국 명종이 직접 내리지 않았다는 것에선 같다(...) 선조는 마침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을 치르다가 왕이 되었다.

처음부터 선조는 왕이 되기 어려운 위치였다. 선조의 부친인 덕흥군은 중종의 9번째 아들이고 선조 자신은 3남이었다. 익선관 건은 명종이 잘하던 놀이였고 으레 체면치레하는 걸 선조가 왕이 된 이후 확대해석한 걸로 보이며 위의 기록도 애초에 기록 자체가 신빙성이 없는 행장이다. 물론 선조는 명종 승하 2년 전에 명종이 크게 앓았을 때 왕위 계승의 물망에 오른 왕족 중 하나였지만 물망에 올랐던 왕족 중에는 선조보다 항렬이 높은 왕족들도 많아봤자 왕의 아랫항렬에서 양자를 뽑기 때문에 원칙상 제외 되며 명종은 한 항렬 아래의 조카들에서 후계자를 뽑아야만 했다., 명종이 말년에 자리에서 일어난 후 이준경이 만일의 경우 후사를 묻자 명종이 그런 사람 없다고 대답한 것대체 어쩌려고?!이 실록에 실려있다. 덕흥대원군 항목을 참조하면 덕흥군 부부는 일찍 죽은데다가 덕흥군의 외가도 한미한 집안이었기 때문에 문정왕후에게 20년간 시달린 조선 신료들에게 정치적 목적으로 선택된 사람으로 봐도 무방하다. 조선시대에 적서 차별이 있긴 했지만 왕실에선 사대부들과 달리 그렇게 심한 차별이 있진 않았다. 적자가 있으면 당연히 승계할 수 없지만 적자가 없거나 양자로 들이는건 허용되기 때문이다.

인순왕후는 수렴을 단 1년만에 그쳤다. 이를 보아 총명하다고 할만 했다. 즉위 초기에는 낭비를 줄이고 쇠락한 훈구파 대신 사림파를 끌어들여 부족한 정통성을 세우고 또한 명종 치세 때 외척의 전횡이 심했던 내정을 장악하고 조종조의 관례가 된 그간의 폐정을 회복시키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기묘사화조광조가 밀려난 후 무시되었던 의 폐단을 비롯한 각종 사회모순 해결에 주의를 기울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사림 정치 세력들을 상호 견제시켜 정계를 장악했다.

즉위 2년 만인 1569년 송영종의 예를 들어 아버지 덕흥군을 덕흥대원군으로, 어머니 하동군부인은 하동부대부인으로 추존했다. (하동부대부인은 선조의 즉위 한달 전에 사거했다.) 그러나 바로 그 송영종의 예 때문에 아버지를 왕으로 승격시키지 못했다. 선조는 자신의 덕흥대원군의 제사를 받드는 자신의 맏형 하원군과 그 후손들을 정1품으로 세습하려 했지만 신하들이 그런 예가 없다하여 무산되었다. [11] 조선 예법상 덕흥군은 선조에게 종친 숙부에 불과 했기 때문이다. 명종의 후사로 이었으므로 법적이나 종법상 아버지는 명종이었기 때문에 친부모인 덕흥군이나 하동부대부인의 제사상에 절을 할 수도 없었다.[12] 실록에서 즉위 40년차에 다시 추숭 떡밥이 나왔지만 별 논의 없이 무산되기도 한다.

다만 총명하였다고 할지라도 즉위 당시 16세라는 어린 나이로, 그것도 세자로서 제대로 된 수업도 없이 즉위하여 아직 제왕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어려운 면이 강했다. 오랜 기간 왕조가 이어지면서 적지 않은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을 인식하였으나 제대로 이를 고치지는 못했다.[13] 즉위 직후 이이를 통해 즉위를 반대하던 부패한 척신 통원(심의겸과 인순왕후의 작은 아버지)을 파직시키는 등 단호하고 권력은 강했지만, 붕당이 대두되면서 파당 갈등 문제도 새롭게 부각되었다.

2.2. 권력강화와 기축옥사

정치 분야에서는 선조의 치세 때 본격적인 당쟁이 시작되어 격렬한 정치투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처음엔 다소 덜 다듬어진 면이 있던 선조도 왕으로써 감각을 기른 중기 이후 상당한 정치적 수완으로 신하들을 편가르고 이용했다.

이러한 선조의 정치적 수완을 볼 수 있는 사건이라면 정철과 합작하여 몰아간 정여립의 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과 여파로 여러 인사들을 줄줄이 엮어 천여 명 이상이나 죽이고 쫓아내고 하면서도 이 일의 실질적 배후인 선조는 까이기는 커녕 오히려 방관하거나 필요에 따라 편을 바꿔 붙는 등의 제스처로 피해자처럼 행세하는 놀라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사화라는 딱지가 붙진 않았으나 피해자들은 대부분 유림이었고 피해 규모는 4대 사화를 합친 것보다 크다. 사실상 선조가 옥사를 주도한 것이라는 견해도 많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억울하게 무고를 뒤집어 쓴 경우가 많았고 결과적으로 선조에게 '복종' 하는 신하들은 많았으나 '충성' 하는 신하들은 드물었으며 이 점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에 대한 하극상이 일어난 점을 볼 때 선조가 정권 장악에 능했음은 사실이나 그 방식이 결코 건강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선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즉위 후 11년에 걸처 원상제와 비슷한 형태로 신하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과정에서 취약해진 왕권을 강화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술수였고 실제 선조의 입김이 강해지는 결과로 이어졌지만 정치적으로 이러한 방식은 올바른 정치 기술이 아닌 정치 술수 및 공작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 기축옥사로 인해 전라도 지역은 '반역향' 이라는 낙인이 붙는다. 또한 정여립 등 혐의가 덧씌워진 주요 인물들은 사지가 찢겨져 전국 팔도에 조리돌림당해 역적의 말로가 어떤지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는데 이용됐다.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반역향 지정에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은 바로 호남에 근거지를 둔 정철 본인이었다.

때문에 당시 호남 계열 동인은 타 지방 동인에 비해 높은 비율로 쓸려나갔다. 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언급된다.

"정여립의 난 이후에는 호남 사람들을 제거하고 영남과 기호사림끼리 피투성이의 지역싸움을 했는데 작고한 본인들의 뜻에 반하여 전자는 주로 이퇴계를, 후자는 주로 이율곡을 추앙하면서 서로 상대방의 추앙인물을 헐뜯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새빛문화사, 138p).

그렇다고 영남의 피해가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 임란 당시 김성일의 막료로 영남 일대에서 종사했던 이로의 '용사일기(경상도 각 지방의 의병 및 관군과 의병의 연계활동, 의병 상호간의 교섭 등을 기술한 중요한 사료 중 하나)' 에 따르면 진주성 주변 사람들은 기축년 변고(기축옥사)에 의해 최징사(곧 최영경)가 원통하게 죽고 유종지가 무함되며 이에 지방 선비였던 하향 같은 이가 분통이 터져 목 매어 죽었다는 것 때문에 고을 사람들의 원한이 극도에 달하여 있었다고 하며 이를 위로하는 것이 급선무였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진주성은 경상우도지역, 즉 영남이다. 이때 좌우도는 왕, 즉 한성에서 바라본 기준이므로 낙동강 이서지역이다.

정철이 이렇게 영남측 동인까지 잡아가면서도 동인 중에서도 유독 호남쪽 동인들을 집요하게 숙청한 이유는 그의 최대 정적 이발이 호남에 터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란 설이 지지를 얻고 있으나 지금도 논란이 분분하다.

그러다 결국 임진왜란이 터진 이후 탄압은 전보다 잦아들었지만 반역향의 이미지는 쉽게 가시지 않았으며 기축옥사와 임란을 거치면서 인재 풀이 크게 훼손되어 이전처럼 조선 사림계를 주도하는 명망 있는 산림 및 관료 배출이 급락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와 관련해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선조 30년(정유년) 2월 22일자에 정유재란을 맞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선조 본인이 호남 탄압 사실을 직접 시인했으며 전쟁이 났으니 도와달라고 다시 호남에 러브콜을 보내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기도 하다.

이는 이 시기까지 호남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는 근거이며 이 이후 차별이 완화 혹은 없어졌다는 주장 역시 가능하다. 실록과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 한계가 있지만 많은 공문서를 베낀 난중잡록의 특성과 수정실록의 사료로 쓰인 것을 생각하면 사료성은 있으므로 이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탄압이 확실했던 시기는 정여립의 난 이후 10여년 정도로 볼 수 있다. 다만 반란 주동자들로 찍힌 인물들의 복권은 훨씬 더딘 편이었고 특히 정여립 본인은 당파와 관계 없이 끝끝내 역적 괴수로 남았다. 당장 인조반정 이후에 기술되어 서인 중심의 당파적 서술이 많다고 추정되는 수정실록은 물론이고 기축옥사의 피해자인 북인들 위주로 지나치게 편향되었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 선조실록 또한 정여립에 대한 평은 일치한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딱히 인과성이 있다거나 치밀한 공작에 의한 결과라기보다는 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의 희생타 및 정철 등 주도자들의 원한관계에 의해 억울하게 호남계 동인이 타겟으로 걸렸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특이하게도 기존의 반역향들은 대체로 고을 단위로 지정된 것에 비해 기축옥사로는 호남 전체가 반역향으로 몰렸다. 그리고 후대에는 이 전례로 인해 반역향을 지정할 때마다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진다. 참고로 두산 백과사전에 따르면 전라도 지방만은 정여립의 반란 이후에 비로소 차별대우를 받았을 뿐 그 전에는 공평한 대우를 받았다는 설명도 있다. 실제로 옥사 이전까지 호남은 반란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으니 당시 도민들의 낭패감은 실로 굉장했을 것이다.

옥사의 핵심 연루 인물들은 후대에도 괴로움을 겪었다. 가령 기축옥사의 주요 연루 인물이자 호남 사림을 이끌었던 곤재 정개청은 본인이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으나 모진 고문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자산서원은 추종자들에 의해 꾸준히 재건되었으나 효종과 숙종 때 서인에 의해 지속적으로 훼철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우득록에 따르면 "남쪽 선비 중 곤재를 추종했다 하여 옥에 가둔 자가 50여 명, 귀양 보낸 자가 20여 명, 금고된 자가 400여 명이었다" 며 후폭풍이 굉장했음을 밝히는 내용도 있다. 자산서원의 훼철은 영조 때에도 있었다. 이런 정황을 종합하면 기축옥사는 선조 재위기 호남계 동인에 한동안 큰 타격을 주었던 사건이며 특히 핵심 연루자로 몰렸던 이들은 수대가 거듭되고도 서인의 경계대상으로 찍혀 누명이 벗겨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옥사를 주도해 정적들을 제거한 정철 등 22명은 평난공신에 올라 권세를 떨쳤지만 송강연보에 따르면 정철은 오래지 않아 세자 책봉과 관련해 류성룡(유성룡), 이산해 등과 함께 광해군을 건저하려다 제대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당한다. 선조는 정철에게 미운 털을 박기 무섭게 입장을 급선회하여 옥사 당시 희생된 영경에 대해 "음흉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 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정국도 반전되어 선조 후반기에는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집권당에 올라섰으며 이들은 서인의 처분 수위를 다루는 과정에서 남북으로 분당된다.

호남 지역의 학풍은 선조조만 해도 호남 학파라는 표현이 손색 없을만큼 독자적 색채를 띄었으나 기축옥사로 인해 동인계가 대거 몰락하고 살아남은 이들은 북인에 가담했으나 이마저 인조반정으로 확인사살당했으며 잔존한 서인계마저 위에 언급한 정철의 건저 사건으로 선조의 내침을 당한 후 급속도로 쇠락해 결국 제 색깔을 잃고 기호 학파에 흡수된 것으로 평가된다. 이후 서경덕과 기대승 계열의 학맥은 인조 이후 서인이 주도권을 잡고 끝내 남인을 밀어내면서 정계와 거리가 멀어진다. 호남 사림의 특징으로 분류되는 풍류와 허무주의, 실용주의는 이런 역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하 자세한 것은 붕당 참조.

별개의 이야기지만. 민간에서의 조보 인쇄를 금지하기도 했다.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community/325/read?articleId=23145781&bbsId=G005&itemId=143&pageIndex=1 조보란 오늘날의 관보를 말하는 것으로 왕의 하교 등 조정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다. 조보는 초서체로 필사하여 배포되었는데 당시 민간에서 활자 인쇄를 하여 배포하였는 바 이를 금지한 것. 명목상으로는 외국으로 국가 기밀이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양반층의 정보 독점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2.3. 임진왜란기

많은 유림들이 피를 흘린 기축옥사가 3년째 멈추지 않고 진행되는 와중에 임진왜란이 발발(1592)한다.

전쟁 발발 전까지 비변사는 왜군이 수전에 강하다며 육상전에 주력하자는 발의를 냈으며 축성을 비롯한 실제 전쟁 대비도 이에 역점을 두어 이루어졌다. 이는 결국 개전 당시 해상에서 왜군의 차단이 이뤄지지 않은 실제 결과로도 여실히 드러났다. 일단 과거의 왜변 당시에도 해상에서 요격한 예는 없고 상륙 후나 적을 확인한 후에야 요격이 가능했으므로 관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임란 이전 일본이 저정도 규모의 전력을 대외로 투사한 사례가 없기 때문에 이를 미리 아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순신의 반대로 수군전폐론은 없어졌지만 부산진, 다대포의 경상좌수군이 각 성에서 항전한 점, 경상좌수사 박홍이 이천 병력으로 동래산성으로 간 점 등을 보면 경상좌수영에 한해서는 이루어진 듯 하다.

하지만 당초 조정의 예상을 벗어난 대규모 외침에 전면패주 상황이 연출되었다. 왜군의 북진 소식에도 선조는 이를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고 신임하는 신립에게 육군 주력을 넘겨 왜군을 잘 격퇴해주리라 기대하고 수정실록에 따르면 본래 신립이 끌고 갈 수 없는 경군 8천여까지 지휘권을 주어서 전장으로 보냈지만 무참히 참패. 한양을 사수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선조는 즉시 몽진을 결정하고 세자인 광해군에게 권한을 위임하여 분조를 넘겨준다. 그리고 부랴부랴 의주로 몽진길에 오른다.

상황은 안습해도 현실적인 선택이긴 했다. 역사적으로도 국가 원수가 수도를 버리고 장기 피난한 사례는 고려의 강화 천도, 이괄의 난과 호란 당시 인조,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등 제법 찾아볼 수 있는 편이다. 이 상황에서(이런 상황에 대한 책임이 국가에 있긴 해도) 파천을 안 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했다.

하물며 그 비교 대상 중 하나인 고국원왕도 한때 수도도 털리고 적국에게 태자를 바치는 둥 굴욕을 맛봤다. 백제랑 싸우다가 화살을 맞고 병사를 한것도 먼저 백제를 우습게 알고 털려고 했기에 그 꼴을 당한거다. 선조가 왜국을 우습게 알고 이렇게 전면전을 선포하고 그 꼴을 당하면 조선의 역사는 물론이고 한국의 역사도 없어질 위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 조정의 위신이 추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또한 이때 한성에서 발생한 혼란으로 인해 궁궐이 손실되었다. 노비들을 혹독하게 추쇄한 것으로 유명한 장례원에 난민들이 방화를 했고 이것이 경복궁으로 번져 궁궐이 소실되었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그 외에 궁성의 창고가 약탈당했다는 실록 기사가 존재한다.

징비록에 따르면 '남대문 안 창고' 가 약탈, 방화당했다고 한다.


선조 본인도 그 후폭풍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군사력을 가진 군벌이 지방 정치세력과 결합, 반란군을 일으켜 조선을 멸망시키는 것을 우려했고[14] 이것이 현실로 다가온 게 이몽학의 난이었으므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장군들을 죽이거나 상당히 박하게 대접했으며 이순신의 경우에는 잘못이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이순신에게 죄를 물렸다. 삼도수군통제사 인사 문제는 이순신을 견제하기 위해 알면서도 모른 척한 거다. 순진하게 그냥 원균이 예뻐서 그런 게 아니다. 만약 정말 몰라서 그랬다면 선조는 날짜 감각, 시간 개념, 거리 개념도 없는 식물인간이다. 문제는 그 대용으로 뽑은 원균의 부대해체능력을 온전히 파악 못했다는 것. 그렇게 이순신을 몰아내고 대항마로 생각하던 원균을 키운 것이 치명적으로 작용하며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초전박살나고 하삼도 백성들이 몽땅 어육이 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 부분에선 자신도 양심상 찔렸는지 이순신에게 보낸 교서에서 자기도 사람인지라 실수였다고 말할 정도.

그런데 이 사건의 원인인 나가지 않으려 핑계대는 원균에게 안 나가면 사사로이 자신도 절대 용서 못한다고 협박까지 한 선조 자신의 강요 때문이 아니고 이는 하늘이 한 일이라고 둘러댔다. 하늘을 죽입시다 하늘은 조선의 원수 이에 대한 책임회피는 전후 논공행상에 이어져 조선 수군을 녹여버린 일본국가유공자 원균 따위를 억지로 선무일등공신으로 추증시켰으며 이것이 1980년대 원균 옹호론의 시발점이 된다. 원균정론으로 원균옹호론을 처음 부각시켰을 때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선조 옹호였으며 원균을 일등공신으로 추증할 때 "이순신에게 도움을 청한 공이 있다" 라고 했으며 이것은 "도움을 청한 것도 공"=>"나는 명나라에 도움을 청했음"=>"나도 공 있다능!" 이러한 식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는 주장도 있다.

이와중에도 왕자인 임해군순화군은 각지에서 온갖 민폐를 끼치고 다닌다. 결국 함경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그들을 들어다 바쳤을 정도. 이쯤 되면 당시 왕실의 평판이 얼마나 실추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단 광해군만큼은 백성들과 함께 전투에 참가하면서 실추된 왕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같이 싸운 병사들에게 독려도 해주고 같이 밥도 먹었다고 한다.

선조가 한성을 빠져나갈 때 궁궐 대부분이 불타 없어졌지만 광해군의 집터만큼은 잘 보존되어 있었고, 이를 본 선조가 시기하게 되었다.

결국 임란 말기인 1596년엔 다름아닌 종실 출신인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의 난이 터졌으며 굶주림으로 지치고 불만이 많던 백성들이 순식간에 규합해 수천명으로 세를 불리기까지 하였다. 이후 선조의 간담이 서늘해져 불안감을 표출하는 정황 또한 많은 사료에서 언급되고 있다.

2.4. 임진왜란 이후 후계문제

임진왜란 호구중의호구끼 발산발발 후 의주까지 몽진하면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고 그에게 분조를 맡겨 황폐해진 민심을 달래고 만약을 대비하도록 했다. 사실 임해군이 광해군보다 윗 서열이긴 하지만 임해군이 취미삼아 백성들을 살해할 정도로 워낙 광패한 한량이라 사회적 인식이 나빴고 그로 인해 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그런데 세자에게 분조를 맡겨놓고서도 항전 활동중인 그 세자 때문에 자신이 왕 자리에서 밀려날까 불안감을 가진다. 그래서 임진왜란 중에도 잦은 양위소동을 벌였으나 당연히 양위하지는 않았다.[15][16]

잦은 양위소동에서 드러난 변덕 때문에 광해군으로선 아버지와의 사이가 껄끄러워질 수밖에 없었고 더군다나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린 후처 인목왕후에게서 영창대군을 생산하여 후계 구도까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전란 후 그나마 안정을 찾아가던 조정은 또 다시 편을 가르며 혼란 국면에 빠져들었다. 선조는 내심 영창이 적통을 이어주길 바랐을지도 모르지만 너무나도 늘그막에 본 아들인지라 결국 제대로 크기도 전에 선조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음모론 중에는 위험을 느낀 광해군이 그를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이른바 "찹쌀밥 독살설". 간신히 몸을 회복하던 선조가 찹쌀밥을 먹고 그날 바로 승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조가 때때로 영창대군을 세자로 바꿔볼까 방황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얼마 못 가 죽는다는 사실을 직감한 후에는 세자를 바꾸겠다는 생각을 사실상 철회한 상태였다. 실제로 선조는 죽기 며칠 전에 광해군을 정식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교지까지 완성해 영의정 유영경에게 건넸으나 유영경은 이를 자신의 집에 몰래 빼돌린 채 선조가 입장을 번복해주길 빌며 시간을 끌다가 끝내 적발당했다. 이런 음모론 때문에 허준까지도 졸지에 국왕 살해범으로 왜곡되기도 했지만 이런 모함에 낚이지는 말자. 당대에 이미 헛소리 취급받고 있었다. 당장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 반정 세력도 이 주장은 믿지 않았다.


3. 후대의 평가와 기타

대체적인 평으로는 임금이 되지 말거나 아니면 임진왜란 때 죽었으면 좋았을 인물.

원래는 선종으로 추증되었으나 광해군 9년 선조로 변경되었다. 그 사유로 든 것이 종계변무였다. 명나라 대명회전에 이성계의 부친이 이자춘이 아닌 고려말의 권신이자 이성계의 정적인 이인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바로잡은 공로다. 얼핏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전근대 왕조국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왕가의 정통성을 바로잡는 일로 태조 3년부터 200여년 간 추진된 외교 정책이었다. 여기에 광해군이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고자 반대를 무릅쓰고 조를 붙인 것도 있다. 일단 조를 붙일 때 실록 보면 선조의 공을 종계변무와 정응태의 무고를 해결한 공로로 돌리고 있다.

지금까지도 임란 당시 수도를 버리고 피난한 것으로 까이지만, 이는 다시 생각해보면 최선까진 아니라도 차선에는 드는 판단이다. 왕조국가이자 상당히 중앙집권화된 행정부를 운용한 국가에서 왕이 사로잡힌다는 건 말 그대로 국가의 멸망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계속 밀리는 전황에 패닉에 빠져 나라를 버리고 명으로 도망치려 한 것도 모자라, 명에서 그것을 가로막자 세자에게 양위하고 자신만이라도 도망치려 했던 것은 그 당시에도 지금에도 두고두고 가루가 되도록 까인다. 이 사태는 명나라측에서 압록강의 배들을 다 치워버리고(...) 속방의 왕으로써 대접해주지 않겠다고 하자 수그러들었다.이에대해 소설 "임진왜란"에서는 신하들간의 고자질을 즐겨 붕당정치를 당파싸움으로 만들고 왜군이 쳐들어오자 몽진을 먼저 주장 급기야는 조선을 버리고 명나라 북경에서 화려한 생활을 꿈꾸다가 명나라가 거절하자 풀이죽어 밥도 안먹는 왕으로 나왔다. 여담으로 선조가 명으로 도망치려 한 사실을 안 유도대장 이양원은 너무 분한 나머지 곡기를 끓어 8일만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나중에는 평시라면 반역에 버금가는 하야 요구라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선조 25년 6월 18일 기사를 보면 요동으로 피하려는 선조에게 서인인 정철과 남인인 류성룡이 양위를 요구하러 갔다가 서로 눈치만 보다가 나왔을 정도다. 남이순, 송희록 등의 유생들 또한 동궁에게 양위하라 며 상소를 올리며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당장 왕의 피난과 임해군 등 일부 왕자들의 만행이 항전중인 백성들의 사기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도 두말할 필요도 없다.

위험을 주장한 황윤길보다 안전할 것이란 낙관론을 주장한 김성일을 신뢰했다는 에피소드 때문에 전쟁 대비가 미흡하여 피해를 자초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쟁 이전부터 침략징후를 감지해서 축성 및 전력증강 작업을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방위태세 정비에 대한 부정적인 분위기가 사회 전체적으로 팽배해 있다는 걸 생각하면 국방에 신경을 쓰려는 의지는 있었으나 이런저런 난관에 부딪쳤다고 할 수 있다(징비록 등에 나타난다).

실제로 경상감사 김수의 경우 도가 지나쳐 전쟁준비가 심하다고 원성이 잦다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 비해 성과가 꽝이었다.

비변사가, 왜적은 수전에 강하지만 육지에 오르면 불리하다는 것으로 오로지 육지의 방어에 힘쓰기를 청하니, 이에 호남·영남의 큰 읍성을 증축하고 수리하게 하였다. 그런데 경상 감사 김수(金睟)는 더욱 힘을 다해 봉행하여 축성을 제일 많이 하였다. 영천(永川)·청도(淸道)·삼가(三嘉)·대구(大丘)·성주(星州)·부산(釜山)·동래(東萊)·진주(晋州)·안동(安東)·상주(尙州)·좌우 병영(左右兵營)에 모두 성곽을 증축하고 참호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크게 하여 많은 사람을 수용하는 것에만 신경을 써서 험한 곳에 의거하지 않고 평지를 취하여 쌓았는데 높이가 겨우 2∼3장에 불과했으며, 참호도 겨우 모양만 갖추었을 뿐, 백성들에게 노고만 끼쳐 원망이 일어나게 하였는데, 식자들은 결단코 방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선조수정실록 24년 7월 1일 기사)

덕분에 임란 초기 일본군에 붙은 부역자들, 통칭 '순왜' 도 다수 나타났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사항은 선조가 의주에 피난가 있던 시절 내린 교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중략) 내 즉위한 지 25년이 되었으나 비록 인덕이 백성에 미치지 못하고 은택을 베풀지 못하고, 세상물정에 밝지 못하여 국정에 많은 실수가 있었지만, 본심인 즉 근년에 북방 국경의 많은 변고가 있었음에 비추어 군정이 해이함을 알고 성지를 높이고 호를 깊이 파고 병갑을 굳게 해서 外寇를 막는다고 하여, 중외에 명령하여 감독을 엄히 하였더니, 실지로는 성이 높아지니 국세가 날로 약해지고, 성지의 호가 깊어질수록 백성의 원망도 깊어져서 끝내 와해가 되어 이 지경에 이르고, (중략) (출처 : 정만록. 이호응 역주)
선조수정실록 25년 8월 1일(무자) 기사 (중략) 다만 살피건대 근래 변방에 흔단이 많고 군정(軍政)이 피폐하고 해이해졌으므로 중외에 신칙하여 엄중하게 방비를 더하도록 하였는데, 성을 높이 쌓을수록 국가의 형세는 날마다 낮아지고 못을 깊게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정말 헤아리지 못하였다.(중략)

전쟁준비에 골몰했던 시기가 왜관에서 왜인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이후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래에도 거론되는 전시를 대비한 인재 채용이나 김수가 전쟁준비 심하게 한다고 욕 들어먹은 시점은 보다시피 임란 1년 전이다. 못해도 1년은 준비했단 이야기. 이곳 리그베다 위키의 임진왜란 항목을 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실제로 의병이 가장 많았던 곳인 경상도는 동시에 순왜가 가장 많았던 곳이라는 일면 또한 지닌다.

예외적으로 전통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아온 함경도의 경우 지방관들이 도망치자 백성들이 지방관을 붙잡아 왜군에게 갖다줬고 왕자들이 행패 부리자 왕자들을 붙잡아 왜군에게 넘겨주는, 다른 지역과는 차이나는 모습을 보인다. 그때문인지 함경도 의병장인 문부는 함경북도 평사였고 그 병력도 정규군이었다.

이후 정유재란 때 왜군이 진격해오자 보여준 태도는 그다지. 피신하려 하다가 신하들이 피신하지 말자 하니 니들은 지 가족들 다 도망치게 해놓고 왜 왕실은 피신하면 안돼냐고 했다. 진짜 이런 왕을 끝까지 받들어 모신 신하들이 용하다.

정치적 수완 등은 상당했던 점을 볼 때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이 아니었다면 임란 중반 이후 나타나는 병적인 의심과 질투심도 없었거나 적었을지 모르니 지금과 평가가 달라졌을 수는 있다. 그러나 어쨌든 선조는 국가적 위기였던 임진왜란 당시 나라와 백성들을 짊어진 최고 책임자였던 이상 자신이 취한 행동에 대한 비판을 면하기는 어렵다. 과도한 정쟁 유발도 그렇고 오죽하면 과거 선조 항목에다가 선탈린이란 말까지 쓰였을까. (사실 선탈린도 스탈린에 대한 모욕이다. 스탈린은 초반에 현실도피에 술독에 빠져 어버버하긴 했어도 모스크바 공방전 때 그대로 모스크바에 남아 지휘라도 했지, 선조는 나라도 버리고 텨텨 하려했던 걸 생각하면...)

개막장이었던 임해군과 순화군을 너무나 관대하게 감싸주어서 이 왕자들이 백성들에게 숱한 민폐를 끼치고 다녀도 제어하지 못했다.

워낙 삽질을 많이한 임금이여서 같이 삽질을 한 손자인 능양군과 함께 인터넷상에서는 하성군으로 격하되면서 까인다.

반대로 의심병이 많았지만 의외로 인재들을 잘 등용하고 좋은 인재는 가까이 두어 총애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조선시대 이름난 문신들이 선조시절에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심지어 송강 정철도 글재주 하나만으로 선조의 사랑을 받았고 이항복, 이덕형, 권율, 류성룡 등 당시 임란 때 활약한 문신들 모두 선조가 아끼던 인재들이었다.

이순신의 임란 전 파격적일 정도의 승진도 선조가 밀어붙여 나온 결과. 물론 임란 전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능한 장수들을 중요 거점에 배치시키는 작업의 일환이었지만 재능있는 사람에게 적합한 직책을 주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는 하나의 반증이 될 수 있다. 단지 비슷한 시기에 원균을 더 중요한 곳으로 배치했다는 게 이런 장점을 다 덮는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기본적인 능력은 가진 군주지만 지나치고 삐둟어진 권력욕과 보신주의가 중요한 순간마다 잘못된 판단을 촉구해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불러들인 인물. 잘못된 판단 하나하나가 정도가 심할 뿐만 아니라[17] 왕조의 존폐를 위협하는 행동들인 데다가 그 횟수도 많아 이후 한국인들이 지배층을 믿지 않는 지배층 불신을 만드는 원조가 되었다 해도 큰 과언은 아닐 정도다.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모습, 전쟁을 예측해 어느정도의 대비를 하고 폐단을 잡으려고 노력하려 했다지만 신하들간의 갈등을 부추켜 당파싸움으로 만들어 두고두고 조선의 골칫거리가 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았고 임진왜란 기간과 전후에는 툭하면 양위소동을 벌여 광해군의 권위를 깎고 자신을 올리는 병크를 저지르는 등 정상적인 임금으로서는 하면 안되는 행동 등 역사학자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또한 왜란 중(정확히는 이몽학의 난 이후)에는 의심병이 도져 하라는 임기응변이나 신속한 판단력에 의한 민심수습은 하지 않고 양위소동을 벌여 가뜩이나 혼란한 정국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고 본인은 국가를 버리고 도망치려고 하지를 않나, 심지어는 멀쩡이 잘 싸우고 있는 장수들을 의심해 옥에 가두는 등의 상병크를 터뜨렸다. 이 병크에 희생된 사람들은 최초의 조선군 승리를 만든 신립의 동생 신각, 의병장 김덕령, 충무공 이순신 등이 포함되었고 곽재우 장군도 하마터면 역적으로 몰려 죽을 뻔하였다. 이몽학의 난 이후는 의병장들의 애국심을 곡해하여 반역자로 몰아 죽여 정유재란에는 의병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는 부작용을 만들고 수군 함대가 소멸하는 등 전황을 알아서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선조는 기본 역량이 괜찮은 것은 맞지만 그만큼 한계 역시 뚜렷한 군주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3.1. 창작물에서의 묘사

이우혁의 소설 왜란종결자에선 임진왜란기 당시 선조의 부정적인 행동들을 놓고 선조의 몸에 마수가 처박혔다는 판타지적 해석을 소재삼아 이야기를 진행하였다. 사실 원균도 같은 케이스로 설정되었다.

40년 8개월이라는 긴 재위기간을 자랑(?)하는 데다가 재위기간 중 동서분당, 기축옥사, 임진왜란 등 엄청나게 굵직굵직한 사건과 관련이 있는 군주라서 사극에도 대단히 자주 등장하는 왕이다.

사극에서 등장할 때는 대체로 전란과 당쟁 속에서 허둥대는 무능한 군주로 묘사되는 경향이 강한 편이나 광해군이나 이순신과 관련한 사극에 등장하면 이들을 의심하는 모습이 많이 드러나며 상대적으로 악역을 많이 맡는다. 단, 허준에서는 사람 좋은 임금님으로 묘사되어서 뭇 사극 매니아나 역덕후들이 충공깽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18][19][20]

칼의 노래에서는 무능하고 잔혹하게 표현되는 "칼로 벨 수 없는" 권력의 정점에서 정치로 전쟁을 수행하며 유능한 지휘관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악인으로 표현된다.

미국인 온리 콤판의 충무공 이순신 만화에서는 무능찌질한 임금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심하게 짜리몽땅하고 비만한 왕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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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렇게... 왕서방이 연상된다. 왜구와 이미지가 바뀐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게다가 전쟁때문에 저정도로 살찌진 않았을것같다


간혹 호랭총각에 나오는 왕의 모델이 선조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호랭총각의 배경이 임진왜란 직전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 하지만 통신사 설정이라든가 박문수가 작중에 등장하는 등 호랭총각은 작가의 말 그대로 "조선시대 비슷한 시대" 정도로 보는게 맞다. 즉 나대용이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그 시대의 왕인 선조로 보긴 어렵다. 무엇보다, 웹툰 속 왕은 선조라고 보기에는 심하게 개념적이다

오성X한음에는 당연히 등장. 나름 명군처럼 보였으나 역시... 두 얼굴의 왕이었다. #

3.1.1. 선조를 연기한 배우들

3.2. 목릉, 목릉성세


선조의 능은 경기도 구리동구릉 경내에 있는 목릉(穆陵). 상술했다시피 원래는 의인왕후 박씨의 능역이었다가 선조도 이곳으로 이장된 것이다. 의인왕후의 능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의인왕후의 장지를 찾던 도중 지관이 현대의 경기도 용인에 있는 명당을 꼽았다. 하지만 그 곳에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대부들이 특히 존경하던 인물인 정몽주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선조도 차마 이곳에 의인왕후의 무덤을 쓰지 못하고 동구릉 경내에 모셨다는 야사이다.

인목대비 김씨도 죽어 여기 묻힘으로써 동역이강 형태로 묻혀 있다. 이 능은 1986년부터 비공개 능역이었지만 2006년 비공개가 해제되어 관람 가능하게 되었다. 다른 동구릉의 능들은 능침 앞까지 올라가볼 수 없고 왕릉 언덕 밑의 정자각 쪽에서 구경해야 하지만 선조의 목릉은 동구릉의 능들 중에서 유일하게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있는 능이다. 뿐만 아니라 의인왕후와 인목왕후의 능도 능침 앞까지 올라가 볼 수 있으니 참고할 것. 목릉 능역 안으로 들어가면 능이 세 개가 있는데 선조의 능은 능역 홍살문 기준으로 맨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선조 능 뒤편에 의인왕후의 능이 있고 맨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그런데 목릉의 석물들은 조선 왕릉 중 최악의 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현 목릉이 조성된 인조 때 병자호란으로 경제가 피폐해진 데다가 우수한 석공들을 구할 수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실제로 다른 왕릉들과 비교해보면 목릉의 석물들은 크기만 컸지 다른 능들의 석물보다 균형이나 조형미 같은 게 훨씬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또한 목릉의 석물에서는 총탄 자국도 볼 수 있는데 이는 한국전쟁 때의 흔적이라고. 살아서도 전란을 겪었는데 죽어서도 전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참고로 선조의 능인 목릉을 따서 '목릉성세(지치)' 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사실 이는 성세나 지치라는 표현이 있듯 좋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용어로, 후세에 이런 말을 들었으면 그래도 임란 이전까진 나름대로 정치를 잘했다는 게 아닌가 보는 시각도 있지만 목릉성세의 정확한 의미는 한문학의 융성을 뜻하는 용어에 가깝다. 선조 이후 사림파가 대대적으로 흥기했다는 사실에 바탕해서 나온 표현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당대의 정치와 백성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것은 아니다.

3.3. 선조 어필



위는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오언절구 중 첫 수로 '담장 가의 매화 한 가지가/추위를 능멸하고 홀로 피었네/멀리서도 눈송이가 아님을 알겠으니/은은한 향기가 풍기기 때문이지'(墻角一枝梅 凌寒獨自開 遙知非是雪 爲有暗香來) 라고 쓴 것이다. 아래는 동생 정안옹주의 병을 걱정하며 편지를 보낸 딸 정숙옹주에게 보낸 답장으로 한글 편지다. 만력 31년 계묘 복월 사시라 적혀 있는 것을 번역하면 복월(復月)은 음력 11월을 뜻하고 사시(巳時)는 대략 오전 9시 반~11시경이므로 1603년 음력 11월 19일 오전에 쓴 편지. 전문 현대어 해석은 여기를 참고하자.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선조는 글씨와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고 평가된다. 특히 글씨는 명나라 장군들이 얻고 싶어할 정도로 뛰어났으며 당대의 명필인 한석봉의 글씨에 대해서도 "석봉은 액자(현판등에 쓰는 큰 글씨)는 좋지만 초서와 해서는 좀..." 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로 자신의 글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모양. 실제로도 조선 역대 국왕 중 명필의 하나로 꼽히며 후대 왕들의 서체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인조와 효종이 선조 서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금까지도 그의 친필은 곳곳에 많이 남아있다.

이걸로 글씨를 깨끗하게 쓰는 사람이 성품도 바르다는 부모님들의 주장에 대해 반박할 여지가 생겼다.

4. 선조에 대한 설 또는 음모론

4.1. 선조 명군설


'사실은 선조는 굉장히 똑똑하고 음험하며 권력과 정치에 민감한 국왕인데 임진왜란 덕에 바보짓만 부각되었다' 라는 주장이 있다. 당시 은근히 인재가 많았다며 이 설을 미는 견해도 있다. 관련 글

실제로 명종조부터 채워진 우수한 인재들 덕에 선조 시기는 세종조와 정조조에 비견될 만큼 우수한 인재풀을 가지고 있었다. 류성룡, 이이, 이황,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이산해, 이순신, 권율, 정인홍, 정문부 등이 모두 선조시대의 인물이다. 허준의 경우 능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다른 어의들은 명나라 유학 출신들도 많고 능력도 허준보다 딱히 뒤진다고 하기는 힘든 만큼 선조가 눈여겨 보지 않았다면 역사에 남기는 쉽지 않았다. 일개 서민 출신의 의사가 가진 잠재력을 알아보고 가까이서 중용하고 최신 의서들을 수집해 동의보감을 쓰도록 지원해준 것은 선조의 눈이 밝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동의보감은 허준 혼자 쓴 게 아니다. 선조의 지원 아래 추진된 공동작업이었고 당대의 여러 명의들이 왕실서고와 민간에 떠돌던 수많은 의서들을 참고하여 제대로 된 것을 추려내고 자신의 의학관과 경험을 첨가하여 작업한 것이다. 허준의 단독저작인 냥 취급받는 건 전란으로 어의들이 모두 흩어지고 혼란한 가운데 마무리 작업을 한 덕이다. 물론 허준이 저술에 가장 핵심적인 기여를 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선조는 정작 자신의 사후 수습에 대해선 전혀 신경쓰지 않아 어의였던 허준은 선조 사후 책임소재에 휘말려 뒤따라 저승 길에 오를 뻔했다(...)

임진왜란 전의 이순신을 선조가 어떻게 취급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근거들로 여러 견해가 오가고 있다. 우선 '북쪽 변방에서 오랑캐가 중요한 농토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갔으니 해당 책임자인 경흥부사 이경록과 조산만호 이순신을 징계할 것을 요청한다' 는 것을 골자로 하는 탄원서가 두 사람의 상관이었던 이일에 의해 올라온 데 대해 다음과 같이 전교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 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선조실록 20년 10월 16일자)

이는 이전에 여진족 침입 당시 전장에서 도주한 죄목에 대해 현장에서 참수하라는 왕명이 내려졌고 그 사례의 예에 해당하지 않으니 사형은 안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둘은 삭직 및 백의종군 처분에 처해졌다. 극형만은 피했으나 중징계를 하긴 했다는 점에서는 조금 애매한 사례.

이후 1589년에 하삼도 병사 및 수사 선발에 대해 비변사에서 올라온 목록에서도 확인된다.

"아뢴 대로 하라. 서득운을 전라 병사로, 이혼을 우수사로, 신할을 경상 좌수사로, 조경을 제주 목사로 삼고자 한다. 이옥과 이경은 본처(本處)를 고수해야 하고 이빈은 범한 죄가 가볍지 않으니 경솔히 수용(收用)할 수 없다. 또 이경록(李慶祿)·이순신(李舜臣)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議啓)하라."(선조실록 22년 7월28일자)

전라좌수사 임명엔 당시 진급이 지나치게 빠르다는 이유로 사간원에서 체자를 청하자 감싸주기도 했다. 하지만 징비록에 임란 직전 무관들에 대해 추천을 받을 때 류성룡에게 선조가 이순신에 대해서 질문했고 류성룡은 '선조는 이순신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다' 라고 표현한 것 등 충분히 이견이 나올 만한 증좌가 걸린다.

당대의 인선 사항과 관련해서는 화담학파의 , , 퇴계학파의 류성룡, 김성일 등은 물론 서인인 정철 등이 명종 때에 출사한 점을 들어 명종대에 이미 사림계가 정국을 장악했고 선조는 그것을 이어받았을 뿐이라는 시각도 팽배하다. 일단 모두 윤원형 몰락 이전부터 관직을 거쳤다는 것이 증거. 적어도 확실한 것은 선조가 역량을 발휘해서 급작스럽게 사림이 득세하고 인재들이 쏟아진 것은 아니라는 점. 척신정치도 선조 즉위 2년 전에는 이미 끝나 있었다.

물론 선조의 인사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모습 역시 적지 않다.

  • 사회경장을 주장한 이이의 발의를 무시하고 신뢰하지 않아 그의 행보를 고생스럽게 했고 사망 직전에야 어느정도 신뢰한 듯 싶다. 자신을 이이, 성혼의 당이라 말한 것도 이때의 일이지만 이미 버스 떠난 후에 손 흔들기.
  • 이순신이 거론되기 전에 전라좌수사로 지목됐던 사람이 원균이었다. 근데, 원균이 대간의 탄핵을 받고 임명되지 못하면서 대신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사람이 이순신이었던 것. 그리고 임진왜란 3개월 전 원균은 일본과의 최전선인 더 중요한경상우수영의 수사로 부임되어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 수군의 1/4[24]를 스스로 파괴하는 대삽질을 기록하게 만든다. 이로인해 행정능력이 형편없어서 파직된 이를 규정을 어기고 승진시켜서 부임시켰다는 말을 들어먹기도 했다.
  • 한양에서 몽진할 때는 류성룡을 한성에 남겨두고 수비를 책임지라고 했다가 다른 신하들이 류성룡은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라고 같이 가야 한다고 건의해 같이 피난갔다.
  • 한강 방어선과 임진강 방어선을 맡은 김명원이 엉터리 지휘로 방어선 말아먹고 도망쳐오자 승패는 병가의 상사라고 말하며 냅두기도 했다. 윤두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 종친 출신인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심하게 견제받았는데 삼도수군통제사 후임 인선 때 원균보다 못한 놈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이는 종친에게 행한 견제의 일종으로도 볼 수 있지만 그래도 원균보다 악평인 건 좀 심해보인다. 근데 이때 이런 말을 한 건 선조 뿐만이 아니라 다른 조정대신들도 다 마찬가지라. 군사력 가진 종친에 대한 조정 전체의 견제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총애한 이들로 꼽히는 것은 즉위 초기에는 윤두수, 후기에는 유영경인데 이들은 다 이씨 성을 받을 수 없어 종친이면서도 왕이 될 수 없는 인물들이다. 당장 윤두수와 유영경의 손자들의 부인이 선조의 옹주들이다. 선조가 그리도 총애한 원균은 윤두수의 동서. 반면 그런 관계가 없는 신하들은 견제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계속 강조하지만결과적으로 가장 치명적 인선으로 평가되는 것은 원균인데 임란 중반 이후부터 선조는 원균을 이순신에 대한 대항마로써 평가하며 지속적으로 밀어줬고 수군 다 말아먹고 잠적하자 대신들이 원균을 잡아들이라 했는데도 홀로 옹호하는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이순신을 재임용할 때 품계를 낮게 주어 견제하기도 했다. 파직 전 이순신의 품계가 정2품 정헌대부였는데 돌려준 건 정3품 절충장군이었다. 당시 수군에 공을 세워 정3품 당상관인 장수들이 당하관보다 많았기에 명령이 잘 먹히지 않았다. 실제로 경상우수사 배설은 탈영해버리고 신임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대놓고 개겼다. 나중에 명나라에서 압력 넣어 나중에 품계를 돌려주지만 충청수사로 동급인 정2품 정헌대부인 오응태를 부임시켜 마찬가지로 고생시키기도 했다. 원체 의심 많은 그 성미에다 전쟁을 통해 군사력과 명성을 쌓은 장수들이 왕권에 위협이 될 여지가 있음을 경계하는 것은 이해 범주에 들 수 있으나 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분명 지나친 일.

이외에도 명나라에서 군비로 은을 보내오자 그걸 조정 신하들에게만 다 나누어주는가 하면[25] 명군 수송병으로 함경도 기병들이 쓰이고 있으니 선조 집 노비내수사 노비들을 수송업무에 종사시키고 함경도 기병들은 전선에 투입하자는 건의를 아주 쿨하게 씹어버린다. 나중에 명나라 경리 양호와 충돌을 빚은 정응태가 응태 무고사건을 일으켜 조선에 대해 모함을 하자 세자가 알아서 처리해 난 온천에 휴양 갈 테니 하는 무책임해 보이는 모습도 나타난다. 이 일은 당시 영의정이던 류성룡이 이게 작은 일도 아니고 이거 말고도 일이 많은데 그렇게 하면 안돼지요 하고 총대 메고 간언해서 결국 맡아 처리했다.

4.2. 이순신 음모론

세간에 굉장히 유명하게 회자되는 것으로 이순신이 선조의 처분을 예견하고 피살을 가장한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이 근거로서 이순신이 조총에 맞아 전사했는데 이순신의 전투 방식은 일방적으로 치고 들어가서 근거리의 백병전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장거리에서 화력의 우위를 살려 포격으로 싸우는 것이었고 조총이든 화살이든 스스로가 위협이 될 만한 위치에 함선을 몰고 갔다는 것도 이상하고 주위 병사와 장수들은 멀쩡한 상태에서 이순신 자신만 총에 맞아 죽었다는 점도 이상하다.

더 이상한 것은 선조의 반응인데 이순신의 전사 소식은 명나라 군대를 통해 알려지자 전해들은 선조는 무덤덤하게 뒷일은 내일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게라며 답해 소식을 전하는 신하가 도리어 놀랐다는 반응이 적혀있으며 훗날 명나라 장수가 선조를 마주하여 이순신 장군의 명복을 기리는 언사를 하자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기도 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반론도 존재한다. 과거의 포격전은 지금처럼 항상 거리를 두고 사격할 수 없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때 포격의 포격 유효사거리는 그렇게 긴 편이 아니라서 포격만으로 대규모 선단을 섬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판옥선은 일본의 침저선들보다 속도가 느리므로 종국엔 근접전 양상으로 흘러갔다.

이순신 함대가 무적을 자랑했지만 당연히 전사자들은 전투마다 나왔다. 난중일기 비롯해 당시 문헌이 수군이 근접전 벌인 기록이 숱하게 나오고 유럽인의 (일본측에서 쓴) 기록을 보면 심지어 조선의 군함은 일본의 군함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갈고리 밧줄로 붙잡아놓고 대포를 쏘았다고 하는 내용까지 나오는 것을 보아 임진왜란 당시의 해전에서 포격 거리는 유효사거리보다 훨씬 짧았을 가능성이 높다.

왜군은 조선수군에 유리한 원거리 교전을 피하기 위해서 항상 조선 함대에 일단 돌격하여 근접전을 벌이려 했고 숫자가 많다보니 조총 사정권까지 접근하는 일도 비일비재했으며 더구나 이순신은 언제나 함대의 선봉에서 진두지휘를 하는 스타일이라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이미 사천해전에서 조총에 부상을 입은 적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이순신 사망 의혹에 대한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럼에도 이순신 파직건에 대해서는 누가 봐도 무리인 게 빤히 보이는데도 악을 써서 잡아온 후 고문을 한 것에 대해선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정탁이 총대 메고 나서지 않았다면 누가 봐도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뻔하다. 선조는 실제로도 의병장 이산겸이 죄없음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이산겸을 때려죽이고 김덕령도 고문해 죽인 경력이 있다.

물론 이산겸은 북인의 수장 이산해의 사촌이므로 북인에 대한 견제조치로서 죽였으며 김덕령의 경우 류성룡을 비롯한 다른 대신들도 '혐의가 너무 짙어서 살리지 못한다' 는 말을 할 정도였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소지가 있다. 자세한 것은 선조실록 29년 8월 4일자 기사, 수정실록 29년 8월 1일자 기사를 참조할 것.

4.3. 방계승통에 대한 열등감?

선조 하면 자주 나오는 얘기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방계 출신으로 즉위한 것이라 정통성 문제 때문에 컴플렉스를 느꼈단 건데 선조의 정통성은 떨어진다고 보기 어렵다. 명종에게 정통성있는 아들이 있었다면 또 모르겠는데 명종의 후계자인 순회세자는 예전에 죽었고 중종의 서손인 선조는 당시의 왕위 계승 후보들중에선 가장 정통성이 있는 편이었다. 선조가 아니라 선조의 형이나 사촌들을 내세우면 정통성이 더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간혹 방계 트라우마로 선조 때의 조선의 정계에 영향과 선조의 인생에 크게 영향을 끼쳤고 자녀복 많은 조선왕조 군주 랭킹 3위(14남 11녀로 총 25명)지만 인목왕후와의 사이에서 영창대군이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정실 소생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인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때 우여곡절이 있었고 그 이후로도 우여곡절(문제가 된 건 광해군의 군주로서의 자질 부족과는 관련성이 적었다)이 많았기 때문에 광해군과 영창대군은 선조의 이런 면 때문에 피해를 봤다는 시각도 있지만 애초에 광해군을 세자 책봉하기 망설인건 인빈 김씨 소생의 의안군과 신성군을 세우고 싶어했기 때문이고 서손출신이라지만 적법하게 명종의 양자로 대비가 직접 선택했기 때문에 명분상 이를 시비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조선시대 예법을 지금 기준으로 해석하는것이 대단히 무리인게 그 시절에는 혈연 관계보다 종법계통이 우선 이었기 때문에 법적인 아버지는 엄연히 명종이었다. 양자로 입적 된 이상 생부는 친척에 해당하며 덕흥군은 신하의 지위에 머물렀기 때문에 따라서 선조가 덕흥대원군 제사에 절 할수도 없었다. 앞서 적었듯이 혈연관계로도 선조는 왕과 그다지 머나먼 관계도 아니다. 종법으로야 사도세자의 직계지만 혈연으로 따지만 인평대군 후손이었던 고종만 할까. 솔직히 선조에게 방계 트라우마라는 것이 있었는지 그 실체가 의심된다.

덕흥대원군에서 서술했듯이 생부 덕흥군의 추숭은 한적도 없고 다만 즉위초에 덕흥군 봉사손(자신의 큰형)을 1품 세습으로 하려다 신하들 반대로 무산되고 즉위 39년차에 잠깐 얘기만 나왔지 자기의 생부를 적극적으로 추숭하려 하지도 않았다. 정통성 문제가 있었으면 적극적으로 했겠지만.

왕실은 사대부와 다른게 서자라도 승통이 가능했고 적자가 없으면 서자가 적자로 입적하는게 가능했기 때문에 딱히 서자 서손출신이라서 열등감을 느꼈다고 보기 어렵다. 어디 조선 후기의 서자 출신 왕들은 콤플렉스에 시달렸던가. 서자 출신으로 승계하거나 세자가 된 왕, 왕세자가 조선 후기만 따져도 영조, 경종(?)[26], 효장세자, 사도세자, 문효세자, 순조, 효명세자 등이 있다.

그러나 방계승통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혹자는 다 늙은 상태에서 어린 왕비를 맞이한 게 주책(?)이란 평도 하지만, 선조가 단순히 여자를 탐했다면 후궁을 들이면 될 일이다. 그럼에도 굳이 새 왕비를 맞이한 것은 방계승통의 컴플렉스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 왕비에겐 후궁과 달리 까다로운 예법을 지킬 것이 요구되며, 왕비의 소생과 후궁의 소생은 아무리 왕실이 사대부보다 적서 차별 성향이 적다 하더라도 상당히 신경쓰이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왕비의 소생을 대군(大君)과 공주(公主), 후궁의 소생을 군(君)과 옹주(翁主)로 명칭을 구분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주장도 반론거리가 있다 애초에 이글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시대상 왕비가 죽으면 새로 왕비를 간택하는것이 당연했고 애초에 광해군의 정통성이 영창대군 보다 우월하였다. 1 2

4.4. 선조=장비환생 설

임진록 등의 군담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관우의 혼령이 명나라 만력제에게 나타나 만력제는 유비의 환생으로 명나라의 천자가 되었고, 선조는 장비의 환생으로 조선의 왕을 하고 있는데, 왜적에게 곤궁을 겪고 있으니 형제의 도리로서 도와야 한다고 알려서 만력제가 명군을 보내줬다는 이야기다.

현실성은 없지만, 만력제가 정작 황제의 업무는 태업하는 주제에 기묘할 정도로 조선에 큰 관심을 쏟은 것은 사실이다. 명군을 보내준 것 이외에도 기근이 들자 산동에서 대량의 곡식을 보내준 적도 있다.

선조와 장비는 공통점이 있기는 한데, 1) 사대부를 존중하고, 2) 부하에게 가혹했다(…)는 점이다.

4.5. 선조=노부나가 설

Dcinside역사 갤러리에서 농담삼아 제시된 가설. "혼노지에서 살아남은 오다 노부나가가 조선에 건너와 선조가 되었다" 라는 일고의 진실성도 없는 가설이다. 일본의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요시츠네=칭기즈 칸 설" 의 패러디이다.

이 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선조와 노부나가의 나이가 비슷하다.[27]
  • 부하에게 포악하게 구는 성격이 비슷하다. 선조는 이순신 등 여러 신하들을 심하게 닦달하였다.
  • 실록에 보면 선조가 연발조총을 개발하려 한 기사가 있다. 마찬가지로 노부나가도 연발총을 개발하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 실록에 보면 선조가 삼단철포와 같은 아이디어를 냈다는 기사가 있다. 마찬가지로 노부나가는 삼단철포 전술을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도요토미가 조선을 침공한 진짜 이유는 오다가 조선에 멀쩡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아서라카더라

어디까지나 일본의 요시츠네 생존설을 패러디하기 위한 가설이므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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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처음 이름
  • [2] 개명후
  • [3] 이 이름은 선조 사후에 붙여진 이름이다.
  • [4]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행적을 보면 나름 나라를 잘 이끌기 위해 노력했고 실제로 정국은 시끄러웠으나 나라는 그럭저럭 돌아갔다.(정국이 시끄러웠던 것도 선조가 각 당파간의 갈등을 조장하되 그 힘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노력한 결과였다. 사실 이게 당쟁의 의의이기도 하고.) 인재풀도 이원익, 류성룡, 이순신, 이항복, 이이, 이황, 이항복, 이덕형, 이산해, 권율, 정인홍등 엄청난데 이와 비견될 만한 인재풀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했던건 세종대왕 정도다. 한 무명장수를 사간원의 반대에도 임진왜란 1년전에 왜적의 침입을 대비하라며 하루만에 10계급 특진을 시킨 것도 바로 선조. 이처럼 사람을 보는 눈이나 왕권을 강화하는 능력은 매우 탁월했던 왕이었다. 아 물론 예외적인 사례도 있긴 하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타락크리 맛탱이가 가기 시작했고 이몽학의 난이후 왕권에 대한 집착이 잘못된 방향으로 표출되었고 그 결과.... 특히나 밑에 후술한 임진왜란때 저지른 삽질들을 보면(...)나라 하나 안말아 잡수신게 용할 지경이다. 그리고 연이어 광해군, 인조 크리 왜! 조선백성들은 햄보칼수가업서!.
  • [5] 세종집현전 학사였으며,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인지의 증손녀이다.
  • [6] 쿠데타 없이 죽은 왕의 아들이 아닌 왕족이 뒤를 이었다는 점에서는 중종보다는 성종이 비슷하다. 하지만 성종도 할아버지 세조단종을 폐위시켰다지만 차남이라고는 해도 엄연히 세종대왕적자이고 아버지 의경세자(덕종)는 세조의 적장자이다. 따라서 성종은 예종의 양자로 즉위했지만, 제안대군이 생존했기 때문에 다시 의경세자를 추존하고 인수대비를 예종비보다 높이는 약간의 억지를 쓴건 정치적 목적이었지 예법과는 거리가 있었다.
  • [7] 물론 먼저 나온 저 셋과 비교하면 광해군은 천사다.(...) 그리고 친국 문제도 결국 정쟁에 휘말린 결과고, 골육상쟁의 비극은 태종, 세조에 비한다면......
  • [8] 친국은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남 피보는 일이 정신적으로도 사람을 힘들게 만들기에 조정의 신하들도 가급적 참관 자체를 피하려고 했다
  • [9] 즉 선조는 대원군의 아들인 동시에 대원군의 아버지가 된다.
  • [10] 이때 덕흥군의 셋째 아들, 즉 "덕흥군 제삼자"라고 했는데, 이를 고치기 불가능하도록 한림 윤탁연이 제삼자(第子)라고 받아적으니 이준경이 매우 칭찬했다고 한다. 이런 방식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결제 수단에 쓰인다. 석 삼(三. 3)을 쓰면 다섯 오(五, 5)나 심지어 만(萬, 10000), 억(億: 초기에는 10만의 표현이었으나 현재는 1,000,000,000!)으로 바꿔버리기 쉬우니까. 이것은 한 일(一, 1->壹)과 두 이(二, 2->貳)에도 적용된다.
  • [11] 그러나 결국 후대에 덕흥대원군 봉사손들은 일제합병 전까지 정3품 대우를 받으며 세습한다.
  • [12] 대원군은 왕의 생부라서 인정상 예우하는 것이지 그 지위가 신하에 불과 하기 때문에 임금이 신하에게 절 할 수 없기 때문
  • [13] 이러한 것은 실록에 실린 이이의 경연내용과 상소 내용의 기본 기조가 국가재정 운용상태는 엉망이고 조세 제도도 고쳐야 하며 군비도 형편없어 나라 꼴이 영 아니니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즉위년부터 이이 사망 직전까지 변함없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 [14] 일단 조선부터가 대홍건적, 대왜구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나라다.
  • [15] 오히려 잦은 양위 소동은 세자의 정치적인 위상을 떨어뜨리고자 하는 쇼로 보는 입장이 많다. 다만, 너무 잦은 양위 소동으로 실록을 편집하던 사관조차 빡쳤는지 선조 실록 42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9월 7일(무오) 5번째기사를 보면 사관은 논한다...에서 디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직접적인 디스는 아니지만.
  • [16] 실록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 사신은 논한다. 상이 2백 년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을 당저(當宁)에 이르러서 남김없이 다 멸망시켜 놓고 겸퇴(謙退)하면서 다시는 백성의 윗자리에 군림하지 않고자 하여 하루아침에 병을 이유로 총명하고 인효(仁孝)한 후사(後嗣)에게 대위(大位)를 물려주려고 하니, 그 심정은 진실로 서글프나 그 뜻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진실로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겠는가. 대신(大臣)으로서는 눈물을 흘리며 봉행하더라도 잘못됨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백관을 인솔하고 끈질기게 설득하고 극력 간쟁하여 반드시 승락을 받고서야 그만두려 하는가. 왜적이 물러가기 전에 그 일을 시행하려 하면 우선 왜적이 물러가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간쟁하고, 왜적이 물러간 다음에 그 일을 시행하려 하면 우선 환도(還都)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간쟁하고, 환도한 다음에 그 일을 하려 하면 중국의 조사(詔使)가 공관(公館)에 있으므로 할 수가 없다고 하고, 조사가 돌아간 다음에 그 일을 하려 하면 세자[儲宮]가 어려서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세월을 끌며 말을 바꿔 임금과 신하 사이에 마치 어린아이가 서로 희롱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사리(事理)인가. 당시에 세자의 나이가 이미 약관(弱冠)이었고 학문도 고명(高明)하였으며 덕망도 이미 성숙하였으니 대위(大位)를 이어받는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난을 평정하고 화를 종식시켰을 것인데, 계속 어린 세자[沖嗣]라고 하였다. 옛부터 약관의 어린 세자가 언제 있었던가. 끊임없이 간쟁하여 상의 훌륭했던 생각을 중지시켰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 해석:그냥 양위했어야 했다
  • [17] 개성을 몽진했을때는 개성 세금을 감면하고 개성을 사수하겠다고 해놓고는 몰래 도망가고이승만?? 평양에서도 비슷한 말을 해놓고 또 도망을 가서 미처 피하지 못한 왕실의 종묘신주가 백성들에게 훼손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 [18] 아플 때 약을 주는 의원에게는 잘 해줘야 하는 것 아닐까? 실제로 기록상에 선조는 허준에게 중인이란 신분임에도 정1품 보국숭록대부란 작위를 내리려다 실패하는등의 허준을 총애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나는 차가운 조선 임금 하지만 나의 의원에게는 따뜻하지. 이 후 허준이 사망했을 때 광해군은 비로소 정1품 작위를 추증하였다.
  • [19] 물론 허준이 정1품 작위를 받을 만큼 충분한 공적을 세운 것은 명약관화지만, 이순신이 당시 정2품 정헌대부에 불과했던 것을 볼 때 신하를 대함에 있어 편차가 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 [20] 허준에서 선조 역을 맡은 박찬환 씨는 후에 불멸의 이순신에서 순천부사 겸 이순신의 심복인 권준 역을 맡았는데, 수시로 상관에게 왕은 절대 믿을 게 못된다는 투로 얘기한다...
  • [21] 당초 조민기가 선조 역이었으나 제작진과의 마찰로 하차 최철호로 변경되었다. 배우가 교체되면서 캐릭터의 성격도 꽤 달라졌는데 조민기의 선조는 의심이 많고 음험한 군주의 인상이라면 최철호의 선조는 말 그대로 찌질이.
  • [22] 재미있게도(?) SBS 일지매에서는 인조를 연기했다. 전란으로 욕 먹는 조선의 두 임금을 모두 연기한 셈.
  • [23] 여기서도 권력욕에 불타는 암군으로 묘사. 정보석의 전작인 자이언트의 조필연 역과 비슷한 느낌이다.
  • [24] 경상우수영이 조선 최대의 수영이라는 걸 감안하면 더할 수도 있다...
  • [25] 그런데 광해군의 경우 명나라 황제가 조선 병사들에게 돈을 보내자 자기가 전부 뺴돌려서 착복했다.
  • [26] 나중에 장희빈이 중전이 되긴 하지만 태어나던 시점은 서자라서 송시열이 태클 걸기도 했다. 그런데 이는 송시열이 '왕위의 계승과 대종의 계승은 동일'하다는 기존의 주장을 무시하고 '왕위의 계승과 대종의 계승은 별개'로 보는 특수한 주장을 자신의 지론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예송논쟁에서도 나타난다. 송시열 개인이 '왕가의 특수성'을 무시하는 주장을 지론으로 삼았던 것인데, 이런 식으로는 왕위와 종통의 계승 절차가 엉망진창이 되버리므로 아무리 대유학자 송시열의 주장이라 해도 공식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 [27] 물론 근거 없는 낭설. 일단 선조는 1552년생, 오다 노부나가는 1534년생이다. 노부나가는 선조의 전임 군주인 명종과 동갑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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