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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조선)

이 항목은 대군시절의 군호인 수양대군으로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조선의 역대 국왕
6대 단종 이홍위 7대 세조 이유 8대 예종 이황

합천 해인사 성보박물관 소장 세조 어진(1458년)[1]
묘호 세조(世祖)
시호 조선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
(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2]
혜장(惠莊)
유(瑈)
수지(粹之)
출생지 한성 본궁
사망지 한성 수강궁 정침
배우자 정희왕후(貞熹王后)
아버지 이도(李祹)
어머니 소헌왕후(昭憲王后)
생몰기간 음력 1417년 9월 24일[3] ~ 1468년 9월 8일
양력 1417년 11월 2일 ~ 1468년 9월 23일 (50세 332일)
재위
기간
음력 1455년 윤6월 11일 ~ 1468년 9월 7일
양력 1455년 6월 25일 ~ 1468년 9월 22일 (13년 93일)
상왕 음력 1468년 9월 7일 ~ 1468년 9월 8일
양력 1468년 9월 22일 ~ 1468년 9월 23일 (1일)

Contents

1. 개요
2. 대군 시절
2.1. 모범생 형예술가 동생 사이에서
2.2. 야심만만한 왕자
3. 잔인하고 냉혹한 왕위 찬탈자
3.1. 문종 독살설?
3.2. 조카쫓아내고 즉위하다
4. 조카를 억누르고 임금으로 즉위한 세조
4.1. 주요 치적
4.2. 철권통치
4.3. 공신 우대 정책
4.4. 호불(好佛) 군주
4.5. 한계와 비판
4.6. 현대의 평가 : 조선 경제 몰락의 시발주자
5. 인간 세조
5.1. 임금의 탈을 쓴 패륜아
5.2. 나는야, 잔혹한 차가운 조선의 군주. 하지만 내 가족에게만은 따뜻하겠지.
5.3. 찬탈의 업보
5.4. 종합해서
5.5. 비슷한 사람들
6. 세조의 능
7. 어진
8. 사극
9. 안습한 일

1. 개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이후 조선의 기본 틀을 확정시킨 인물. 조선 역사상 희대의 패륜아. 평생 세조라고 못 불리고 수양대군으로 불리는 불쌍한 인물

아버지 세종대왕과 형 문종의 유지를 어기고 조카인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하여, 이후에도 혈육과 신하들에 대한 숙청을 했던 잔혹하고 냉혹한 왕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이 때문에 사육신생육신이 나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의 초기 국가체제를 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평가가 여러모로 엇갈리는 군주로 어떤 점에 집중할 것인가에 따라 천하의 개쌍놈에서 군주권의 강화에 노력한 노련한 군주까지 다양한 평가를 차지한다. 이 문서에서도 그런 점이 강하게 드러나있다. 심지어는 아버지와 형이 이룬 조선 전기의 번영에 암운을 드리우는 단초를 제공한 암군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 관련 드라마 하나가 흥행할 때마다 평가가 이래저래 뒤바뀌는 피곤한 인생 인물 중 하나라고 보면 이해하기 편할 것이다. 사실, 정권과 정치색에 따라서도 평가가 갈리는데 쿠데타로 정권을 획득한 사례가 차례나 있었던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관련하여 그래도 알고보면 꽤 좋은 놈...이라는 평가를 현대사에서 오랫동안 받았었다. 때문에 1970~80년대 평가와 1990년대 이후의 평가가 상반되게 다르다.

고우영 화백의 만화에는 '쿠데타 리'로 나온다. 세종: 이런 놈이 정녕 과인의 아들이라니...빌어...빌어먹을! 우라질! 그러나 정작 세종대왕아버지할아버지쿠데타 경험이 있었다. 과연 쿠데타 집안..

2. 대군 시절

세종차남이며, 군호는 1428년을 시작으로 진평대군 → 함평대군 → 진양대군으로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최종적으로 받은 군호는 수양대군. 그래서 흔히 수양대군, 하지만 왕자 시절은 진양대군으로 불린 시절이 1433년 이래 12년간으로 제일 길었다.몰랐지? 수양으로 군호가 바뀐 건 한글 반포 1년 전인 1445년(세종 27년). 그리고 왕위에 오를때까지 10년 동안, 수양대군으로 불리게 된다.

2.1. 모범생 형예술가 동생 사이에서

문인 기질의 성군에게서 나온 무인 기질의 돌연변이 아들. 하지만 을 따지면 세종대왕부터가 돌연변이다. 격세유전 하지만 사실은 문(文)에도 뛰어났다. 다만 아버지넘사벽먼치킨이었을 뿐이지... 또한 세종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무인적인 인물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과 6남 금성대군도 무인 기질의 인물이었으며, 특히 금성대군은 수양대군과 함께 마상 무예를 시연한 기록이 남아 있다. 문종도 무인이라기에는 좀 그렇지만, 조선 제일의 화포 전문가였던지라, 그렇게까지 볼 일은 아니다. 하여간 문무양면에서도 모두 뛰어났던 인물이었다. 문종 페이지에선 문무가 모두 뛰어났다는데 사실이 뭐임? 하나는 머리 하나는 육체파

능력 측면에서도 동생 안평대군도 재주가 뛰어나서 수양대군과 자웅을 겨룰 정도였고, 형 문종의 경우 아버지에 버금가는 완전체로 측우기를 설계한데다, 화포 전문가 이고 세종대왕이 와병 중일 때는, 대리청정을 맡아서 국정을 잘 처리했을 뿐 아니라 세종대왕 사후에도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하였으니. 근데 모 사극에선 세조가 세종대왕의 가장 뛰어난 아들이라고 했다. 원래 사극 작가가 심각한 세조빠다. 세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드라마상에서 역사왜곡도 서슴치 않았다. 실질적으로 세조가 세종대왕의 아들 중 가장 뛰어났다고 보기는 힘들다. 안평대군도 분야가 달랐다 뿐이지 세조에 버금가는 인재였고 뭐니뭐니해도 문무양면으로 먼치킨인 문종이 있었다. 장남으로 나머지 형제들의 기둥이자 방패역할을 하던 문종이 사라지자 권력욕과 무인기질이 가장 강한 세조가 나머지 형제들을 형으로서 다독이기는 커녕 힘으로 찍어누른 케이스.

사실, 수양대군할아버지를 상당히 많이 닮아있다. 무예에 상당한 소질이 있는 것도 그렇고 인격적으로도 그렇고. 다만 모든 면에서 다운그레이드였다는것이 문제다. 심지어 잔혹성과 결단력조차 다운그레이드 되어(...) 빈틈없이 숙청을 해대서 깔끔하게 후환을 제거해버렸던 할아버지와는 달리 공신 숙청에 실패해서, 태종이 대숙청을 벌여가며 확립해 놓은 조선의 정치 시스템을 왜곡시켜 버렸다는 평가를 듣는다.

2.2. 야심만만한 왕자

세종대왕 통치하던 때에는, 왕자들 가운데 문종 다음으로 공이 많은 인물이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했고, 석가모니의 공덕을 <보상절>을 한글로 지어 아버지에게 바치자, 세종대왕은 감동하여 <월인천강지곡>을 적게 되었다. 특히 무예에 무척이나 능하여 무예에 좀 서투른 형에게 우월감을 느꼈는데, 아버지의 전례를 생각해서 자신이 세자가 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듯.

이런 면모를 보여주는 왕자 시절의 대표적 일화를 소개하자면, 겨울날에 사냥을 갈 때에도 가벼운 여름 차림으로 사냥을 다녔다고 하고 일부러 늙고 병든 말을 골라타서 말이 지쳐서 넘어지려 하면 말 위에서 뛰어내려 착지하는 묘기를 부왕 앞에서 일부러 보여줬다고 한다. 자기 딴에는 그것이 간지난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소맷자락이 긴 옷을 입고 다니고, 양팔을 크게 휘둘러 소매를 펄럭거리며 걸어다녔다고 한다. 부왕 세종대왕은 이를 두고, "너 정도의 힘을 지닌 사람은, 마땅히 이런 옷을 입어야 될 거다."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걸 두고 '너는 힘이 세니까, 이런 행동에 불편한 옷을 입어 스스로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문무겸전의 인상이 강하기 때문인지, 세종대왕의 뒤를 이어 문약한 문종 대신에 문무를 겸비한 세조가 즉위했어야 한다는 주장이 자주 나오는데, 사실, 문종은 문약한 사람이 아니다. 문종이 학문을 중시하고 무예는 세조보다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개인적 무력만 보고 말한 것이지, 군사적 측면에서는 뛰어났다. 우선 병법책인 '동국병감'이 쓰여진 건 문종의 지시였으며, 화차에 관한 업적도 문종이 이룩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과학 기술과 화약에 박식하여 장영실의 도움을 받아 천문 기기도 제작해 보는 등 성리학에만 관심이 있던 사람은 아니었다. 문종이 세종대왕 후반기에서부터 병치레가 잦았고, 결국 즉위 3년만에 사망한 것은, 아버지 세종대왕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맡은데다 양친상을 너무 충실하게 지내는등 무리했기 때문으로 원래는 병약한 인물이 아니었다. 문종이 심각한 병을 자주 앓았던 데다, 문종마저 일찍 사망을 할 경우 수렴청정을 할 왕실 웃어른(대왕대비, 대비)이 없는 상태인데 손자는 너무 어리므로 세종은 여러 신하들에게 단종을 부탁했다. 거기에다 문종은 아버지의 생각을 잘 이해했지만, 수양대군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후계자가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세종대왕할아버지부터 아버지, 그리고 장유유서의 순서를 거슬러 왕이 된 자신에 이르기까지 왕위계승의 정통성이 약한 것을 매우 걱정하여, 장자계승을 통해서 왕위정통성을 강화하기를 절실하게 원했다. 그리고 문종도 병치레가 잦았던 것 이외에는 국왕으로서 무척 유능한 인물이었고, 8년간의 대리청정으로 실무경험도 풍부했다. 의외로 간과하는게 대리청정은 단순히 업무대행정도가 아니라 세자를 사실상 다음 왕으로 인정하는 행위에 가깝다. 대표적인 경우가 경종이고 사도세자의 경우는 예외에 가깝다. 그리고 세종대왕의 입장에서는 명분뿐만이 아니라 능력을 보더라도 굳이 세자를 갈아치울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수양대군은, 사극에서와는 다르게 문종이 살아있었던 시절에는 거의 찍소리도 못하고 살았었다. 정말 사극에서처럼 만만해보이는 형이었으면 조카인 단종에게 했듯이 형을 압박하여 옥좌에서 내쫓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로 그런 짓을 했다면 형제들 중에서 가장 능력이 쩌는 무서운 큰형한테 당연히 역관광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클 것이다. 다만, 아주 찍소리를 못낸 것은 아니어서 이미 야심을 드러내는 발언을 몇 차례 말했던 바도 있고, 도첩증이 없어서 체포된 승려를 멋대로 풀어주어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큰형인 문종의 권위에 대놓고 도전하는 미친 짓은 절대로 하지 못했다. 앞에 언급한 사건들 역시 문종이 "형으로서 야심 많은 동생의 신세 한탄 한 번 들어주지 뭐.." 정도로 관대하게 넘어가준 것이 컸다. 이때 문종이 작정하고 끝장 낼려 했으면 수양대군은 얄짤없이 숙청 당했을 것이다.[4] 그리고 문종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 울고불며 "청심환을 바쳐라!"고 난리부르스를 치는 등, 충신 코스프레를 하기도 했다.

사실 수양대군의 충신 코스프레는 실제로 저렇게 생각했을 가능성도 높다. 문종이 오래 살아있었더라면, 수양대군은 자신과 형 사이의 관계만 생각했으면 됐다. 말하자면 자기가 계속 나대고 다녀도 형인 문종이 오케이 하고 넘어가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는 뜻, 이는 세종과 양녕대군간의 관계를 살펴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문종이 일찍 사망하면서 상황은 달라질수밖에 없었다. 누가봐도 어린 조카와 야심만만한 삼촌이라는 관계가 설정될 수밖에 없었고, 여기서 수양이 조금만 삐긋해도 바로 중신들의 견제로 갈 수밖에 없는 형국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종이 사망하면서 수양대군은 "내가 살기 위해서는 쿠데타를 해야만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기 쉬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3. 잔인하고 냉혹한 왕위 찬탈자

3.1. 문종 독살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문종의 종기 또한 수양대군이 키웠다는 말이 있다. 전순의라는 문종의 어의가 종기 치료법과는 정반대의 치료법을 쓰고, 활쏘기 등 혈기가 들끓는 활동을 삼가지 않게 하는 등으로 문종의 죽음을 재촉했다. 그래서 어의가 무능했냐고? 전혀 아니다. 그 유명한 <의방유취>의 공저자이며, 그가 지은 <식료찬요>에서는 지금 보아도 매우 선진적인 온실을 설명해 놓았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게 문종 독살설이며,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공신에 올랐다는 것 때문에 그 배후로 지목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오른 것은 좌익원종공신, 1등만 79명에 2, 3등으로 가면 수를 셀 수도 없다. 세조가 치세 전체에 공신으로 봉한 사람은 무려 2000명에 이르고, 진짜 공이 있는 경우보다 자기 라인에 끌어들이려고 한 사람이 더 많다. 때문에 정난공신 1등에 오른 성삼문부터, 단종 복위운동을 한 사람들 역시 공신에 포함되어 있다. 이 쯤 되면, 그를 공신으로 올린 것이 특별하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다만, 이것을 제외하고 당시 정세를 생각해보면 독살 가능성 자체는 그럴싸하기는 하다. 자세한 것은 문종의 해당 항목을 참조.

3.2. 조카쫓아내고 즉위하다

(세종대왕이 재위하던) 왕자 시절부터 야심을 드러냈다. 만약에, 문종이 오래 살았거나 하다못해 수렴청정할 어른이라도 있었다면 정변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고 태종 때의 이화처럼 어디까지나 종친의 수장으로 정치생명을 유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문종의 죽음 후에는 그의 일반적인 정치생명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세조는 한명회홍윤성, 권람 등을 심복으로 삼은 후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그리고 못지 않게 야심찬 동생 안평대군도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물론 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고명대신들도 하나의 세력이다.

이렇게 3각구도를 이뤄서 대치하던 상황에서, 엽기적이게도 안평대군김종서황보인 등의 세력과 연합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수양대군의 입장에서는 1 대 1 대 1의 구도가 이제는 1 대 2의 구도가 되어버렸다. 사실 고명대신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안평대군과 김종서,황보인 세력이 더 강했다. 주류파와 대항할 종친세력이 둘로 분열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당할지도 모른다. 이 과정에서 안평대군측에 가까웠던 소장파 세력들이 수양대군 세력에 암중 협력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실질적 저력으로 보면 세력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그런 상황을 극적을 타개할 필요성이 느껴졌고, 급기야는 1453년 10월 10일에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김종서, 황보인 등을 척살하고(그 후폭풍으로, 이징옥의 발악적인 반란도 겪었다. 이 사건이 징옥의 난이다.) 동생 안평대군을 역적으로 몰아서 죽인 후에 정권을 잡았으며, 2년 뒤인 1455년 윤6월에 단종에게 선위받는 형식을 취해 조선 제7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일각에서는 "세력에서 뒤쳐져서 어쩔 수가 없었다."라고 너무 궁지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거사를 일으킨 것이라고 포장하는데... 애초에 야심을 드러내고 (할아버지 태종이 피바람을 일으키면서까지 금지한) 사병을 기르고 한명회 등을 심복으로 삼아 일을 추진한 것을 생각해보자.

그 이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과 5번째 동생 금성대군이 꾀한 단종 복위 운동이 있었으나, 결국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갔고 마침내 단종도 죽음을 맞게 되어서 그의 권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아무리 능력있는 왕이었다고 하더라도, 피로 얼룩진 군주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선사에서 친족을 가장 많이 죽였던 왕이다. 기본적으로 형제들과 조카에 뭐..... 폭군 연산군과도 비교가 안 된다. 광해군이 동생을 죽이고 대비를 폐했다고 반정이 발생한 것을 생각해보면 비교가 안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원래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과 꽤 친했다는 사실이다.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성삼문은 정난 공신으로 3등공신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수충 정난공신으로 사간원 좌사간 대부에 임명된다. 이 때는 1등 공신 12명, 2등 공신 11명, 3등 공신 20명이다. 이렇게 43명이다. 또 세조가 즉위하는 좌익공신에도 3등 공신에 이름이 올랐다. 떨거지들이 포함된 경우에는 머리수를 튀기기도 하지만, 조선왕조 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가지치기를 한 경우에는 1등 7명, 2등 12명, 3등 25명 해서 44명 밖에 안된다. 어느 정도냐면 정인지가 2등공신이고, 정창손과 이징석 등이 3등공신이다.

성삼문이 단종의 입지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수양대군을 지지했다는 말도 있지만, 같은 사육신 중 한 명인 성원이 공신 책봉문을 쓰라는 어명이 떨어지자 숨어있다가 들키는 바람에 억지로 써야했다는 야사(효온의 소설 육신전에 수록된 내용) 등을 보아 당시 집현전 학사들을 비롯한 '소장파'들을 공범으로 만들기 위한 술책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다.실제로 즉위 후에 또 한 번 공신을 책봉했는데 3등 공신이 2천명 이상이다. 거기다가 팽년도 매우 높이 평가해서 그를 회유하려고 많이 노력했다지만... 그 결과는 모두들 아는대로...

4. 조카를 억누르고 임금으로 즉위한 세조

즉위했을 때 의외로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39세 때 왕으로 즉위했는데, 이는 초대 태조 이성계(58세)와 2대 정종(42세)에 이어 역대 조선의 국왕 중에서 세 번째로 고령이다. 네 번째는 37세에 즉위한 형 문종(3살 터울)으로 이후 태종(34세), 광해군경종(33세)이 뒤따른다.

4.1. 주요 치적

국대전을 편찬하기 시작한 왕이 바로 이 사람이었으며[5]태종처럼 6조 직계제를 실시해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여러가지 제도를 재정비해서 나라의 기틀을 공고히 하였다. 그 과정에서 시국과 정치를 토론하는 경연도 폐지하고, 집현전도 문을 닫아버렸는데, 이는 단종 복위운동의 후폭풍이었다. 그래서 고려시대부터 존재하였던 집현전의 기능은 예조로 넘어갔다가, 다시 성종대에 그 기능을 부활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문관이다. 삼사중 하나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쪽도 언론기관인 동시에 왕권의 견제기관이었다.

6조 직계제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으나 공신들에게 엄청난 특권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세조 사후 이 공신들이 훈구척신이 되어 왕권을 견제하였기 때문에 좋게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게다가 그 공신이란 것들이 엄청난 부정부패와 온갖 범죄를 저질렀는데도 감싸고 도니... 이것은 어떻게 보자면 정조의 경우와 유사하다. 강력한 신권을 억눌러서 왕권을 강화해놨는데, 후대의 왕들이 이것을 유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안되니까 오히려 친위세력들이 권신이 되어버린 경우인데, 다만 정조는 저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자세한 것은 암군 항목을 참조하자.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깊었다. 왕세자 신분이 아닌 상황에서 왕이 된 경우,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왕이 된 후 백성들의 삶에 보다 주의를 기울인 경우가 많다. 세종대왕 때의 나름 악법인 "수령 고소 금지법"이 폐지가 된 것도 이 때였다. 다만 조선 초기 수령 고소 금지법을 시행한데에는 지방 토호들을 견제하고 중앙집권을 시행하려는 의도가 존재하였다. 심지어는 조선 초기에는 지방관들이 토호들에게 살해당한 경우도 존재했던 모양. 처녀귀신이 자신의 한을 풀어달라고 으흑흑...하고 울자 새로 부임한 사또가 으악하고 죽었다는 신원설화는 이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허나 이때가 되면 호족들의 세력도 많이 약해졌으므로 유향소를 폐지하고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등, 직접적인 방법을 쓰려한 것으로 보인다. 행차 때 마다 백성들을 직접 만나서 의견을 들은 것도 이 때였다. 스스로 롤모델로 삼은 당태종처럼. 그러나 이 시기부터 세조가 임명한 공신들의 횡포가 매우 심각했던 것을 생각해보면(가령 홍윤성이라든가...) 별로 도움은 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의도는 좋았고 마음가짐은 훌륭했지만...

군사적으로도 업적을 남겨서, 문종의 5위 진법 사상을 계승하여 중앙군의 편제를 바꾸었으며 지방에 전국 55개의 진을 설치하여 진관체제를 마련했다. 물론 이는 세종대왕 때부터 정비된 군사제도의 결과인 면도 있다. 어쨌든 군사를 정비하여 1460년에 신숙주를 북방으로 파견하여 여진족의 본거지를 크게 들쑤시고 돌아왔고, 이시애의 난 직후에는 남이, 강순 등으로 하여금 세종대왕 때부터 조선 변경에서 골치를 썩인 이만주를 참살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 과정이 골때리는데, 세조는 이만주는 지금쯤 숨었을 건데, 괜히 서둘렀다가 명나라 놈들에게 "니들이 실수해서 놓쳤으니 어쩔거임?"이라는 개소리를 들을 바에야 그냥 아예 처음부터 늦게 갈 것을 명했는데, 느릿느릿 이만주의 소굴로 들어가자, 이만주는 자기 병사들은 죄다 원정을 보내놓고 참모 이하 일족들과 '날 잡아 잡수!' 하고 있지 않은가? 이로써 조선의 군대는 태종 시절부터 조선 국경에서 분탕질을 했었던 이만주를 잡아죽이는 통쾌한 공을 매우 손쉽게 거두게 되었다.

군주로서의 책임감과 자의식이 대단히 강해서, 재위 기간 중 매우 정열적으로 일을 했으며 몸가짐을 검소히 했다. 왕이 왕궁에서 무명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 다녔으니 말 다했다. 또한 그는 을 아주 좋아했는데, 자신은 술은 좋아하나 여색을 가까이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신하들이 "전하, 이제는 후궁 좀 들이시는게 어떻겠사옵니까?" 하고 청하자 "난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점잖게 거절했다. 실제로 세조의 후궁은 반정 전에 맞이한 근빈 박씨뿐이다. 사육신 박팽년의 누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기록에 따르면 본관이 다르다고 한다. 결론은 박팽년의 누이가 아니다. 그리고 근빈 박씨는 오래 산 덕분에 춤에 능하다는 이유로 팔순의 나이에 연산군 앞에서 춤을 춰야만 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세조는 연산군의 증조부이니, 근빈 박씨는 증손자뻘인 연산군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춤을 췄던 것이다.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기생관도 독특하여, 기생들을 아예 사람취급도 하지 않았으며 기생들이 술자리에 나올 때는 아예 얼굴에 분칠을 해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잠실(蠶室)이란 지명은 이 분이 만들어 냈는데, 왕족에게 누에치기를 널리 하게 했다. 그때 누에를 키우는 곳이 지금의 잠실이 되었다고 한다.

4.2. 철권통치

하지만 왕권만은 확실하게 철권통치였다. 앞의 불교만 해도 그렇고, 황제들만 할 수 있는 구단을 세워(사실 태조시절에도 원단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서 눈가리고 아웅식으로 제사를 지내왔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행위도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명나라놈들 몰래하던 제사를 대놓고 했다. 도성 한복판에 큰 부지를 만들어서 각사를 지었을 때도 신하들의 반대 의견은 커녕 좋은 기운이 감돌았다는 칭찬만 나왔다.(...)

공신들도 예외가 없어서 훈구파의 수장 중 하나인 정인지도 세조에게 숱한 분노를 산 적이 있는데, 연회에서 풍수지리에 대해 논하다가 정인지가 평양과 개성이 어째서 한양만 못한 도읍인지를 풍수지리학적으로 설명하다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풍수에 대해 더 깊이 들어갔다간 전하께서 잘 모르시니 못 알아들으실겁니다."이라고 말했다가 "원로대신이라고 대접해 줬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혼내주고 싶지만 술취해서 그런거니 한 번 봐준다."라고 크게 혼이 난 적이 있다. 게다가 세조는 세종, 소헌왕후, 문종의 장례에 깊이 관여하여 장지를 잡는데 일조하는 등 풍수지리에 매우 능통한 사람이었다. 가뜩이나 프라이드가 높은 수양에게 겁대가리도 없이 "너 이거 모르지? ㅋ"라고 했으니 눈이 돌아가 버린 것.

정인지 외에도 병조판서를 지낸 이계전 역시 술자리의 피해자다. 이 사람의 조카가 사육신의 한 명인 이개. 그래서 사극 왕과 비에서 이개가 죽기 직전 절명시를 읊으면서 이계전을 쳐다보자 이계전이 시선을 피하는 장면이 나온다. 할아버지는 고려 말의 대유학자인 이색이다. 술자리에서 이계전이 세조에게 술이 과한 듯 하니 그만 안으로 들어가시라고 권하자 "내가 내 몸을 맘대로 한다는데, 네가 감히 날 가르치냐?"고 버럭하더니 무신 홍달손을 시켜 병조판서 머리채를 잡아채 뜰 아래로 끌어내고 곤장을 쳤다. 이래놓고 "이게 다 형이 애정이 있어서 너를 조낸 팬거다."라는 식으로 다독였다. 실록의 원 표현은 이렇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어찌 나와 같겠느냐?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좌익 공신의 높은 등급에 올려 놓으려고 하는데, 너는 그렇게 하지 않겠느냐?"라며 다독이자, 이계전은 그저 통곡할 따름이었다고 한다. 야사에 나올 법할 스케일로 신하를 욕보인 이 이야기는 분명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세조실록> 세조 1년(1455) 8월 16일 기사 참고.

그의 철권통치의 또 다른 희생자로는, 강맹경과 권람이 있는데 갓 영의정에 임명된 강맹경과 우의정에 임명된 권람이 잔치를 벌이는 세조에게 "술을 마시고 놀자니 마음이 편치 않다."라고 간했다가 세조가 분노하면서 "야, 우리가 술먹고 논지가 하루 이틀도 아닌데, 지금껏 내가 못마땅했다고 그런거냐?" 식으로 말했다. 경악한 두 대신은 허겁지겁 하면서 해명을 했으나, 세조는 이들을 갈아치워서 좌의정 신숙주를 영의정에 앉히고, 이인손을 우의정에 앉히니 강맹경과 권람이 정승에 임명된지 고작 5일 만이었다. 역대 영의정 중 최단임 기록이었다.

그런데도 세조는 강맹경과 권람을 파직했음에도 녹봉만은 정승으로 일하던 때처럼 지급할 것을 명했고, 이에 강맹경과 권람이 궐밖에서 엎드려 사례했는데 이에 마음에 약해진 세조가 그들을 불러 "경들이 옳은 말을 했는데, 내가 너무 심했다."라면서 그들의 자리를 원상복구 시켜주니 영의정 신숙주는 4일 만에 좌의정으로 돌아가 신기록을 갱신하고, 이인손도 우의정 자리를 내놔야 했다.

심지어, 야사 용재총화에는 예문관 문신들을 한여름에 뜰 가운데 앉혀 놓고, 하루 종일 뙤약볕을 쬐게 하며 근무를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세조는 "능히 춥고 더운 것을 견뎌 본 후에야 큰 일을 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말하자면 일종의 극기훈련 같은 것을 신하들에게 시킨 셈이다. 사실 신하들만 시킨 건 아니고, 이 때 세조 자신은 창문을 닫고 솜옷을 입은 채 화로를 방 가운데 켜놓은 채로 정무를 봤다고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때는 한여름이었다. 이것이 가혹행위의 전통? 이 외에도 신하들을 구타하거나 욕보이는 일화는 꽤 많다. 신하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사실, 어쩌면 이 사례들은 모두 신하들이 함부로 왕에게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휘어잡기 위한 행동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당시 기준으로도 저런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영의정을 포함한 삼정승은 국가의 최고위직으로 신중을 기해야하는 자리인데 그냥 자기 마음에 안든다고 덜컥 날려버리고 며칠만에 다시 원상복귀시키는 등의 행위는 다시 말해서 세조가 국가통치체제를 스스로 무시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신하들을 막 대한다고 왕권이 강해지는게 아니다. 저 경우에는 왕권 강화가 아니라 그저 협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한무제당태종을 유난히 좋아했으며, 한 고조 유방송태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방의 경우는 공신을 멋대로 토사구팽시킨 인물이라 배울 게 없는 인물이라고 말했고, 송태조 조광윤은 뭔가 우유부단하고 화끈한 맛이 떨어지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 그래서 조광윤이 도끼자루로 신하의 옥수수를 털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 양반 재위기간 동안 자기가 화끈하게 결단한 것은 그게 유일하구만."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반면 세조의 아버지는 한무제를 좋게 보지 않았다. 언젠가 권람이 세조를 유방에 비유하여 칭송하는 시를 올리자 "뭐? 유방? 공신을 파리잡듯이 죽여버린 배울 게 없는 양반을 감히 나랑 비교해?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과인은 공신들이 반역을 저지르지만 않으면 절대로 해치지 않을 것이야!"라고 크게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발언이 그냥 재미로 넘길 것은 아니다. 세조는 이 말대로 토사구팽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이게 결과적으로 세조 최대의 폐단으로 남은 것을 감안하면...

아버지인 세종은 고려시대의 분할적 재정 운용의 폐해를 문제시하였다. 쉽게 말해 왕실에서 쓸 돈은 왕실에서 걷고 개경부에서 필요한 돈은 개경부에서 걷는 방식.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중앙에도 세원을 파악하는 호부와 회계 출납같은거 해주는 삼사가 따로 있고 또 세금 걷는건 일선에서 또 따로... 때문에 세종은 왕실재정을 따로 안챙기고 전부 중앙재정으로 편입시켜서 현대와 같은 이른바 '국용전제'를 완성시켰다.

반면 세조는 왕이면서 신하들에게 돈 좀 달라고 굽실대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아무래도 위엄이 안 서니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조 산하에 내수사를 설치하여 다시 왕실재정을 분리시켰다. 결국 쉽게 말해서 딴주머니를 찼다는 소리다. 아무튼 내수사는 고종때까지 혁파됐다가 부활했다가 계속 반복되지만 중요한 것은, 세조 이후 왕실이 호조에 손 안벌리고 따로 돈을 쓰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관둔전이라는걸 설치해서 고려시대와 똑같이 관청이 따로 자기들 경비를 세금으로 걷기 시작해서 결론적으로 아버지인 세종대왕이 그토록 개고생을 해서 고쳐놨던 조선의 재정제도는 간단히 박살나버렸다(...). 이후 조선이 망할때까지, 이러한 분할재정의 문제는 두고두고 조선의 발목을 잡게 된다.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개혁, 1896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도 재정 일원화는 중요하게 논의된 개혁안이었으니 뒤집어보면 분할 재정이 조선시대 내내 큰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4.3. 공신 우대 정책

신하들을 죽이는 것만은 피하자는 생각이었던듯하다. 계유정난 때 살생부까지 작성해서 죽여댔으니, 더 이상 죽였다간 능력있는 정치할 인재들이 없어서였을 수도 있지만. 당시 급제한 김종직이 잡학을 배우라는 세조의 의견에 반발했지만 살아남았고, 한명회와 신숙주도 이시애의 난 때 목숨을 건졌다. 세조앞에서 세조를 '너' 나 '상왕'으로 부르는 말실수를 자주 했던 정인지도 살아 남았다. 이런 모드였던데다 한명회, 신숙주을 필두로 하는 많은 공신들에게 토지를 마구 퍼주는 바람에 예종, 성종 때 신권이 무척 강해지게 되는데, 이는 핵심 공신들을 몰아내고 공신세력들의 힘을 억눌러서 강한 왕권을 확립한 태종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 공신세력들을 1차로 싹쓸이해버린 인물은 바로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이었다.

유일한 예외가 양정인데, 왜 죽었는지는 항목 참조.

워낙 술을 좋아하고 공신들과 잦은 술자리를 가졌던 터라, 아침에는 숙취 때문에 일찍 일어나기를 힘들어했다고 한다. 본래 늦어도 6시 정도에는 시작되어야 할 왕의 일과가 세조 때에는 11시가 다 되어서야 시작했다고 한다. 돌려 말했지만 결국에는 숙취. 당시에는 여명 808도 모닝케어도 컨디션도 없었으니...

4.4. 호불(好佛) 군주

왕자 시절부터 불교를 숭상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문종 때는 "불교의 도를 알지도 못하고 배척하는 망령된 자이니 나는 절대로 그딴 놈 취하지 않겠다!"라고 단언할 정도였다. 댁이 벌써 왕인줄 아슈? 그래서 이 일화는 그의 호불 성향 뿐만 아니라 야심을 드러내는 일화로도 소개된다. 사헌부에서 도첩이 없는 중을 잡아가자 멋대로 풀어주는가 하면, 공자보다 석가모니가 훨씬 낫다고 했으며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스스로 "나는 호불(好佛)의 군주다!"라고 선언했을 정도. 각사를 세우는 등. 불교와 관련된 업적도 여럿 존재한다. 아예 정부에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대량 간행하는 관청을 만들었으며, 세조가 친필로 써서 부처에게 봉안한 문서도 존재한다. 태조 이성계와 말년의 세종 이후로 불교에 우호적이었던 마지막 조선의 왕이다. 참고로, 이 때 간행된 불경들은 언문으로 간행을 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조선시대의 한글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상원사 등 세조와 관련된 설화를 가지고 있는 절들이 좀 있다. 다만, 이 모든 행동은 공식적으로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아니라 세조 개인의 행동으로 처리되었다.

이런 호불정책을 많은 인명을 살상한 세조의 속죄의식과 연관지어 해석하기도 하는데, 불교에 대해서는 왕자 시절부터 호감을 나타냈었고 왕자 시절에 어머니 소헌왕후가 병상에 있을 때 궁궐에 법당을 지어 심신을 달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외톨이 조카에겐... 그런거 없었다. 적어도 실록 속에 나타나는 '거침없는 행동주의자이자 야심가' 유형의 인물됨됨이를 생각하면 그가 과연 죄의식으로 고통받았을지는 의문이다. 그냥 개인적인 취향이 불교였고 속죄의식과 연결짓는 것은 세조를 비호하기 위한 주장일 가능성이 꽤 크다.

그의 불사에 관해 세종, 문종 때와 비교하면 매우 재밌는 차이가 있다. 세종, 문종 때는 작은 절 하나 세우는 것이나 작은 불사 하나 하는 것에도 온 조정이 거의 개지랄을 해댔으나, 세조 때에는 신하들이 굽실거리면서 이번에 새로 짓는 절에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합니다!라고 아첨을 떨었다. 역시 왕권은 세고 봐야 된다? 다시 말하자면, 신료들의 간언에 귀를 기울였던 아버지, 형과는 달리 세조 본인은 신료들의 말을 그다지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세종이나 문종의 왕권 또한 상당히 강한 편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러한 태도 차이는 세종, 문종이 '신하들이 간언하면 들어주는' 왕이었던 반면 세조 치세에는 왕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쉽게 주장하기가 어려운 풍토가 조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유교정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대간들의 힘을 바닥까지 추락시킨 왕도 세조였다. 세조 집권 이전에는 신하들이 직접 왕에게 의견을 제의하고 정사를 논하는 주장을 하는 이유와 그 근거를 왕이 함부로 묻지 않았다는 암묵의 룰이 있었을 정도였다. 또 세종이나 문종이나 훈민정음 창제와 같이 불사보다 더 큰 일을 벌일때도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신료들을 설득하면서까지 한 마디로 신하들과 공개적으로 키배떠서 논리정연한 논박으로 관광보냈다는 밀어붙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게다가 조선의 국시가 유교였던 것을 고려하면 이렇게까지 막나가는 호불정책은 국왕 스스로가 조선의 기초를 무시했다는 말이다.

4.5. 한계와 비판

재위 내 보인 몇몇 업적을 보면 명군으로 보일 법도 하지만 그렇게 평가받기엔 결정적인 과오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사실 세조의 명성이 깎이는 이유는, 물론 찬탈도 찬탈이지만 무엇보다도 장기적인 전략이나 장기적 정치 계획을 세우는 최고 통치자의 안목이 할아버지나 아버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조 집권기에 조선사회의 내부모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쌓여간다. 특히 세종이 힘써서 만들어놨던 정치문화와 제도, 정책 여러가지를 일거에 밀어버렸다. 세종대왕 항목에 나온 것처럼 세종의 정책 결정 형태를 롯X리아와 맥X날드 중 어느 것을 먹을 것으로 비교한 식으로 세조의 정책 결정 형태를 말하자면 "아오, 쓸데없는 거 가지고 지지고 볶고 앉았네. 저런 쓸데없는 논쟁은 지들이 그냥 자랑한답시고 싱거운 거 가지고 오래 끄는 거야."라며 논쟁 자체를 제멋대로 봉합이나 해 버리는 식이었다.

세종과 문종이 한 제도나 정책을 결정하는데 방법이나 과정, 미래의 파장을 생각하고 어떤 것을 감수하고 희생해야 하는지까지 죄다 토론하고 연구해나가는 유형이었다면, 세조는 항상 문제를 단순화하고 현상 자체를 때려잡아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유형. 사육신 문제도 있었겠지만 집현전을 없앴던 이유는, 아버지의 지지부진해 보이는 장기적 정책 연구를 답답하게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래서 피 본게 바로 치세 말년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 하지만 세조의 가장 큰 결점은 자신의 단점을 단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종대왕가 자신을 후계자 감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과거 12.12 군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제5공화국 시절에는 묘하게도 그를 국가의 백년대계를 염려한 나머지, 악역을 자처한 구국의 혁명가로서 해석하는 시각이 득세하기도 했다. 목적은 당근 정권찬탈의 정당화. 이 영향으로 오늘날에도 강력한 군주에 호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세조를 높이 평가를 하기도 하는데 물론 세조의 업적 역시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성은 가히 막장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었고 위에서 서술했듯이, 그가 세운 '공'이라는 것도 장기적인 사고의 부재 때문에 그 '과'를 덮을 수 없다. 특히나 정당성을 지금보다 몇십배로 따졌던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세운 조선왕조에서 그의 왕위찬탈과 형제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살육행위는 현대 관점으론 물론이고 당시 관점으로도 공으로 덮기에는 너무나도 심각한 문제였다.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집권한 할아버지 태종과의 정치적인 안목과 역량의 차이도 넘사벽급으로 밀린다. 태종은 외척은 처남이고 사돈이고 죄다 끔찍하게 죽여버리거나, 공신인 이숙번은 후계자에게 방해되지 않게 귀양을 보내지만 세조는 공신인 한명회를 외척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둘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그래도 태종과 세조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태종의 후계자가 다름아닌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칭송받는 대왕이라는 걸 생각해보자.

다만 태종과 세조의 공신에 대한 태도 차이에는 그들의 정통성 문제가 큰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지적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태종이 쳐낸 이성계와 정도전 세력도 고려조를 무너뜨린 정통성 없는 정권이었기에 그 자신의 정통성에 대한 트러블이 별로 없었던 것. 이는 이후 역성혁명에 반대했던 사대부들이 태종 정권에 대거 가담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이성계가 세웠던 세자 방석은 막내아들인지라 쟁쟁한 형들에 비해서 정통성이 매우 미약했기 때문에 태종이 방석을 죽일 때 대다수의 대신들이 이에 대해 침묵했었다. 그에 반해 세조는 정통성이 만렙인 단종과 그 대신들을 몰아냈기에 징옥의 난, 사육신 사건 등을 겪었으며 그 중에서도 중간파들이 일으킨 사육신 사건은 자칫 정권이 다시 전복될 수 있는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는 세조가 공신들을 견제하지 않고, 그들의 충성심에 기댈 수 밖에 없는 구도를 만든 것.

대신 말년에 가선, 자신의 왕권이 안정되었다고 판단, 이시애의 난을 기점으로 신공신 세력을 형성하며, 구공신들을 견제하고자 했다. 문제는 얼마 안 가서 사망했기에 그 구상은 결과적으로 실패... 이후 신공신은 쉽게 소멸이 되고 구공신을 필두로 훈구라는 기득권 세력이 형성되는 근간이 된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들이 부패해져, 사림파와 대립하게 된다. 게다가 그나마 구공신을 견제한다고 한 게 새로운 공신세력을 만든 것이었다. 이것은 결국 그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통성 부족을 자력으로 메꿀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후대 왕들에게까지 큰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특히 사실상 그의 직접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성종은 제대로 시달렸다. 연산군의 폭정이 성종대 왕권약화에 기인한다는 주장도 있는 만큼, 세조의 책임을 간과할 수 없다.

4.6. 현대의 평가 : 조선 경제 몰락의 시발주자

현대 세조는 한국 강단사학계 및 국가 공무원 선발과정상 국사 교육과정, 그러니까 준 공식적으로, 반정 및 정권 강화 과정 중의 공신 양산, 그리고 공신전 남발과 거기에 따른 관료전 부족 현상으로 관리들의 토색질을 야기하여 전주전객제에서 지주전호제로의 이전을 초래한 끝에 조선 경제체제의 몰락의 단초를 끊고 가속화시킨 왕이라고 평가받는다.

당장 이 현상은 성종 때부터 나타난다. 전주전객제상의 과전법에 근거한 전대 왕의 사전억압정책은 왕권 강화를 추진한 태종 시기부터 신권 보장을 추진한 세종 때까지도 지속되어 국가수조지를 확장하고 관료전, 즉 사전의 총 결수를 감소시켰다, 그러나 세조 때부터 과전법이 폐지되고 직전법이 시작되면서부터 사정은 달라진다. 세조 시기 폭발적으로 늘어난 공신전 + 공신들의 민전 수탈은 전,현직,장래 기용할 관리들에게 할당할 관료전 및 국가수조지를 고갈시키는 형태로 나타났다. 따라서 정치,경제적으로 약화된 왕실의 힘과 국가 재정을 다시 강화시키고 관리들을 조정에 예속시킬 방안으로 결국 세조는 1466년, 즉위 12년 후 직전법을 시행하는데 이는 전직 관리의 수조지(퇴직 연금) 및 유교 정치이념에 입각한 수신,휼양전(사망 연금)을 일소하고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지를 할당하기 시작한 것이었다.[6] 이는 당연히 현직 관리들의 농민에 대한 무차별적 수탈을 야기했고 결국 4년만인 성종1년 관리 할당 수조지인 직전으로부터 수조권을 회수해 국가가 전담하는 관수관급제가 시행되었으나 기존의 전주전객제, 농민(전객)이 공전(국유지),민전(농민소유지) 경작의 중심에 있고 관리(전주)가 수조지를 할당받는다는 시스템은 붕괴되어 지주전호제, 관리(지주)가 땅을 소유한 지주가 되고 농민(전호) 소작농으로 입장이 역전되는 경제 체제로의 이전이 시작되었다. 이 현상은 (토지)소유권 개념의 부각으로 자본주의 발달을 촉진시킨 한편 백성의 대부분에 해당하던 농민의 지배 계급에 대한 예속으로 인하여 농본주의 농업국가인 조선 경체제제의 누대에 걸친 몰락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직전법은 90년 뒤인 명종 11년에 효력을 상실했으며 그 뒤 선조 시기에 이르러 왜란을 겪고 완전히 폐지되었다.

5. 인간 세조

5.1. 임금의 탈을 쓴 패륜아

세조의 패륜행위도 어지간한 폭군들의 뺨을 연속으로 후려치고도 남는다. 이 점에서도 같은 과정으로 집권한 할아버지와 많이 비교된다.

우선, 형제관계에서도 친형인 문종의 부인이자 자신에게는 형수님이었던 현덕왕후의 일가가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하자 현덕왕후를 폐서인하고 무덤을 현릉(문종의 왕릉)에서 파헤쳐버렸는데, 문제는 당시 현덕왕후는 남편이자 세조의 형인 문종과 합장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형수에게도 불경을 범한 것인데다, 애꿏은 형이자 선왕에게까지도 패륜짓과 무례를 범한 셈이다.욕 먹을 짓 하나 늘었다 게다가 계유정난, 당시 형의 무덤의 비석을 감독하던 민신과 다섯 아들들 역시 형 무덤인 현릉에서 참살해 버렸다.

거기에 현덕왕후의 무덤 장소를 무덤터로는 최악인 범람이 잦고 습한 지역에 이장을 해버렸다. 이 때문에 현덕왕후의 관을 강에 버렸다. 강에 버린 이유가 세조가 단종을 죽인 뒤에 현덕왕후의 혼령이 세조의 꿈에 나타나 저주를 걸었고 이 때문에 덕종이 일찍 죽었다는 야사까지 나왔다. 하지만, 실제로 덕종(의경세자,추존왕)은 단종보다 일찍 죽었기에 사실과 맞지 않는다.

태종의 경우 신덕왕후의 묘를 이장하기는 했으나, 신덕왕후는 태종과 아무 관련이 없었다. 이성계의 첫째부인 한씨는 이방원이 성인이 될때까지 살아 있었다. 또 당시 이성계는 살아있었고, 아버지 때문에 신덕왕후를 폐서인 시키지는 않고 후궁으로만 격하시켰다. 거기에 태종 입장에서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유가 신덕왕후의 배겟머리 송사로 인한 잘못된 세자책봉 문제였다. 방석은 태조의 아들중 막내였고 아무런 공도 없었으므로 당위성이 부족한 세자책봉인 것은 명백했다 그러므로 이방원측 입장에서는 명분수립을 위해 그녀를 격하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형인 정종과의 사이도 매우 좋았고 아버지인 태조에게도 신덕왕후와 그 자녀 일가에게 한 것 외에는 큰 패륜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태종이 이복동생인 방번, 방석은 죽였지만 동복형인 방간은 살려준 것과 달리, 세조는 동복동생(안평대군, 금성대군)까지 죽여버렸다. 더욱이 태종의 경우, 확실히 반란을 일으켜 시가전까지 일으킨 동복형을 살려주었으나, 세조은 반란 혐의만으로 동복동생 둘을 죽여버렸다. 이복동생들도 단종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죽이고 식솔을 노비로 부렸으며, 세종의 후궁으로 자기에게는 서모에 해당하는 혜빈 양씨까지 죽였다. 잘 아는 대로 친조카인 단종까지 죽였다. 심지어는 친동생 안평대군의 양어머니이자 자신의 친숙모였던 성녕대군 부인을 양자를 두둔한다는 이유만으로 폐서인시켜버렸다. 성녕대군은 세종대왕의 친동생으로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막내아들이다. 다른 형제들과도 나이차가 많이나는 막둥이라서 그런지 태종과 원경왕후도 끔찍히 귀여워해서 결혼 후에도 궁궐에서 끼고 살았을 정도다. 병약해서 14살에 죽고 말았는데 죽을 즈음에 당시 충녕대군이던 세종대왕이 동생을 살리려고 어의들과 함께 의서를 연구하고 곁에서 밤낮으로 간호를 할 정도로 세종대왕도 몹시 아꼈던 동생이다. 그래서 자기 아들 안평대군을 자식없이 죽은 동생 양자로 보낼 정도였는데 이런 짓을 한 것이다. 세조의 왕위찬탈을 적극 지지했던 또다른 패륜아 양녕대군은 자기 막내동생이 죽을 때 활쏘기를 하고 술마시고 놀았다. 오죽하면 참고참던 태종조차 "사람의 마음이 없다."고 분노할 정도. 패륜아끼리는 통한다.

한마디로 친족을 죽이는 것에 전혀 거리낌없이 태종조차 하길 꺼려한 일을 예사로 해댄 희대의 패륜아다. 조선의 역사상 자기의 서모, 이복형제에 더해서 동복형제까지 이렇게 마음대로 다 죽여버리고 작은어머니를 폐서인시키는 왕은 세조이외에는 없었다. 오죽하면 세조가 저승가서 만날 사람 중에 태종이 꼭 있을거라고 말할 정도다. 하지만 태종이 싫어할텐데?

한마디로 불효+불충에 반역, 친족살인 등 안 좋은 짓은 모두 다했다.

그리고 세조가 가장 욕을 먹는 부분은 단종관련 문제이다. 조카를 자기 손으로 죽여놓고, 시체 수습도 안해서 엄흥도라는 인물이 대신 수습해 장례를 치뤄줄 정도였지만 정작 실록에는 "단종이 자살해서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고 적어놓는 조작 주작 짓까지 해놨다. 정작, 단종 사후 시신의 행방은 중종대가 되어서야 밝혀지는데, 후대에 사람들이 봐도 정말 기가 찼는지, 뒤의 기록에는 "단종실록의 기록들은 쥐새끼와 여우새끼들의 아첨을 하는 간사한 붓장난에 속지 말라."고 대놓고 까는 글이 있었을 정도다. 이래놓고 왕위 찬탈 전에는 자기 측근들을 시켜서 자신을 주공단에 비유했었다. 개소리 집어쳐!

게다가 단지 금성대군의 단종복위모의와 관련해서 같은 지역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 관련없는 일반백성까지 포함해 엄청난 수를 학살했다. 이때의 대학살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번영하던 지역인 순흥 지역이 황폐해지고 이웃마을에까지 학살당한 백성의 피로 넘쳐흐를 지경이었다.

심지어, 단종을 왕실족보인 선원록에서 파버렸는데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단종을 문종의 서자 어쩌면 그 아래인 사생아로 격하시켜 버린 것. 단종은 왕위에서 쫒겨난 후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는데 문종의 적자였으니 대군(大君)이 되어야 맞지만 서자가 받던 군(君)이 되었다. 이 후 1681년 숙종에 의해 노산대군으로 높여졌는데 문종의 적자로 인정함과 동시에 왕으로 추존하기 위한 예비단계였다

게다가 세조는 1458년 단종의 태실지를 파괴하는 등 단종에 대한 모든 것을 없애려고 미친듯이 노력했다. 아버지인 세종대왕이 손자인 단종을 끔찍히 아껴서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다 봤으면서도 그런 천인공노한 패륜짓을 자행했다. 심지어는 단종이 살아있을 때 공부를 못하게 방해까지 해놓고는 견디다못한 단종이 할아버지를 그리면서 눈물을 흘린 것을 두고 자기도 "조카 불쌍하다."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식으로 정신나간 소리를 버젓히 세조실록인단종실록에다 끼워놨다. 이건 뭐... 세종대왕이 아낀 사람들은 전부 다 도륙냈다고 봐도 된다.
친족은 아니지만 세조 본인과 매우 가까운 왕실의 인척도 방해가 되면 죽인 것도 있다. 단종의 장인인, 정순왕후 송씨의 아버지 송현수는 단종 복위 운동에 휘말려 사사당했는데, 이 사람은 세조 본인과 매우 절친한 친구다. 애초에 그가 단종의 장인이 된 것도 세조의 영향이 매우 큰건데 송현수 입장에선 옛 속담처럼 모진 놈과 친했다가 날벼락 맞은 격이다.
원천석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 사람은 태종을 가르친 스승이다. 태종이 저지른 왕자의 난 때문에 제자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져서 자신을 만나러 며칠을 기다리는 태종을 피해 도망다닐 정도였는데 후에 상왕으로 은거한 태종의 부름에 마지못해 만나러 왔다. 이 때, 태종이 스승에게 자신의 손자들을 직접 소개를 시켜주었는데 노인이 아직 어린 세조를 보고 "조부닮았는데 부디 형제를 사랑해라."라고 거듭 강조했다 한다. 하지만 그 충고도 허무하게....... 오죽하면 이런 야사가 다 남아있다.

5.2. 나는야, 잔혹한 차가운 조선의 군주. 하지만 내 가족에게만은 따뜻하겠지.

그런 주제에꼴에, 어머니인 소헌왕후에겐 매우 극진히 효를 다하였다. 오죽하면 궁궐에서 피접나온 소헌왕후가 세조의 잠저에서 승하했을 정도.

또한,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를 친어머니 못지 않게 극진히 모셨다. 이유는 동생인 안평대군이 연년생이라서 소헌왕후가 안평대군을 양육하는 사이 상대적으로 보살핌을 받지 못해서 신빈 김씨가 어린 세조를 업어서 키웠다고 한다. 이래서 안평대군과 사이가 안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신빈 김씨의 소생들은 계유정난 무렵 세조와 가까이 지냈으며 특히 신빈의 아들 계양군은 적극적으로 세조를 지지했다. 이 외 세조는 즉위한 이후에도 신빈의 아들들은 극진히 대해 주었다. 신빈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의 유모 역할도 했다.

대단한 애처가이기도 했다. 많은 것이 닮은 할아버지와의 큰 차이점이다(...) 위에 기술했듯 후궁도 하나뿐이었다. 숙의 아래 품계인 소용(昭容)으로 덕중이라는 여인인데 아들도 일찍 죽었고 세조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외로워진 그녀는 나중에 구성군에게 구애를 하다 사단을 낸다. 세조가 '미친 여자 같으니'라고 욕하고 편지 배달한 내시만 때려죽이는 선에서 끝났지만... 그나마 즉위를 한 후 맞아들인 건 아니다. 정실 왕후인 정희왕후 윤씨를 아껴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로 밖에 나갈 때에도 항상 대동했고, 국정에서도 그녀의 의견을 많이 참고했다. 국정 회의에서도 "우리 집사람이 말야..."라면서 왕비의 의견을 소개하는 기록도 있다. 정희왕후도 정치적 식견이 워낙 훌륭해서 자신의 친척들을 등용하려는 세조를 말리기도 했다근데 왜 남편이 쿠데타 벌여서 대신들하고 조카 죽이는 짓과 형님무덤 파헤치는 패륜짓은 안 말렸지? 훗날 정희왕후는 세조 사후 아들 예종과 손자 성종을 위해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2번이나 하면서 국정을 무난하게 꾸려나갔다.

사실 이 태크의 제목부터 세조에게 호의적인 내용이다. 차갑다는건 곧 냉정하다는 말이고 객관적이란 의미인데, 세조가 백성들에게 한짓을 보면 결코 객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지역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살당한 백성들에겐 대체 무슨 죄가 있었을까? 어쩌면 "잔혹한"이 아니라 "차가운"에 취소선을 그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고쳤다

5.3. 찬탈의 업보

한편, 문종과는 다른 방향으로 자식복이 없었는데, 장남 의경세자는 세조가 왕이 되고 3년만에 죽고, 차남 예종은 즉위 13개월 만에 죽었는데 둘다 20세를 못 넘기고 모두 요절했다. 그리고 손자들도 그리 오래 살지 못했는데 의경세자의 아들인 월산대군성종은 모두 30대에 죽었고, 증손자인 연산군도 30살에 비참하게 병사한다. 그나마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장수했으나 금치산자에 가까울 정도로 바보로 살았다.[7] 이후 다른 증손자은 중종은 단종의 장례를 치르어 준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럭저럭 장수했다.이쯤 되면 진짜 저주가 있는것 같기도 하다

당시 백성들은 어린나이에 살해당한 단종에 대한 연민과 세조의 부하들인 훈구파의 악행[8]으로 세조를 천하의 개쌍놈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수많은 소문이 생겨났다. 대표적인 소문으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침을 뱉었는데 그 자리에 욕창이 생겼다, 단종이 죽자 분노한 현덕왕후의 귀신이 의경세자를 죽었다.(위에서 언급한대로 의경세자는 사실 단종 이전에 사망한다.) 의경세자의 죽음에 분노한 세조가 현덕왕후의 관을 파내서 바다에 버렸다는 등 세조에는 달갑지 않은 소문들이 쌓여 갔다[9]

세조에 관한 않좋은 소문은 수십년 뒤 초대형 폭탄을 만들어 내는데. 성종때 사관인 김일손이 위에서 언급한 현덕왕후의 관을 파내서 바닷가에 버렸다, 자신의 아들인 덕종의 후궁 권 귀인을 세조가 찝적댔다, 사육신의 난 직후 세조가 신숙주를 통해 사육신을 회유하려고 하자 역으로 fuck you를 날렸다 면박을 줬다는 소문과 중종때까지는 소문이어야 했던[10] '세조가 단종을 살해한 후 짐승이 뜯어먹게 방치했고 이후 어느사람(고을향리 엄흥도)이 몰래 묻어 주었다.'라는 기록을 성종의 사초에도 그대로 기록해버렸고 성종실록 집필과정에서 이것이 발각되면서 김일손의 스승이였던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연쇄작용을 일으켜 무오사화라는 초대형 폭탄을 만들어 버렸다

다만 불교쪽에서는 숭불정책때문인지 세조에게 긍정적인 야사가 많이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등에 종기가 난 세조가 온천을 찾아가 어떤 동자에게 등을 밀어달라고 한 후 동자에게 "내가 왕이니 등을 밀어줬다는 것을 비밀로 해라."라고 하니 그 동자도 "너도 문수동자가 등을 밀어줬다고 알리지 말거라."라는 말을 해 사라져버렸고 깜짝 놀란 세조가 자신이 본 문수동자의 모습을 그림과 조각으로 남겨 상원사에 맡겼다던지, 불당에 절하는데 고양이가 나타나 자객을 알려줘서 그 보답으로 상원사에 양묘전을 내렸다던지, 속리산 법주사로 갈 때 가마 걸리지 않게 가지를 들어다 준 소나무가 기특하다며 정2품의 품계를 내려줬다던지 하는 속리산 정이품송 소나무 야사도 있는데, 이는 불교를 숭상하던 세조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위의 야사들이 보여주는 세조의 진실된 나쁜 면모를 희석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게다가, 세조의 후원을 받는 불교로서는 이런 인식을 좋든 싫든 널리 퍼트려야만 했을 것이다.

또다른 야사에서는 라이벌 김종서와 엮어서 ''(현덕왕후의 저주로 생긴) 욕창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을 찾아갔더니 거기의 아낙네가 사실 아버지를 비난하다 궁을 떠나버린 세조의 딸이었던데다 그 남편이 계유정난 때 살해당한 김종서의 손자였더라'''...등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야사의 끝에 따르면 세조는 그 사실을 알고 너그러워져서 자신이 죽인 김종서에 대한 속죄같은 의미로 그 김종서의 손자를 정식으로 부마로 맞으려고 했지만, 딸 부부는 소식을 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어쨌든, 많은 야사에 등장하는 왕이기도 한데 그 야사의 대부분이 그의 왕위찬탈과 그로써 비롯된 일과 관련된 내용이다. 위의 문수보살 이야기처럼 그에게 호의적인 내용도 있지만 그런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다가 그의 잘못과 그로 인한 인과를 다룬 내용이며, 그 중에는 그의 추악한 인성을 부각시키는 이야기도 있다.

5.4. 종합해서

조카을 저버린 패륜아에 앞서서 조부와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조선 전기의 번영에 암운을 드리우는 단초를 드리운 암군이라는 평도 있는데, 사실 '암군'이라고 보기엔, 어찌됬든간에 조선의 법제를 정비한 것이나 조선의 중앙집권체제를 거의 완성시킨 업적이 있다. 단지 아버지와 형의 능력이 워낙 넘사벽이어서 그렇지. 그러나 그 완성되었다는 중앙집권체제는 이후 끝없는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왕권의 정통성에 치유불가능의 상처가 나버렸으니 유교국가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걸 완성되었다고 표현하는거 자체가 세조를 옹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에 불과하다. 자그마한 공이 있다하도 과오가 너무나 크기에 '명군'으로 불리기에는 무리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하다.

지나친 공신 우대정책으로 인해 조선 멸망의 원흉훈구파라는 권신집단을 창출한 것이나 집현전을 폐지하여, 건전한 관학파를 양성하는 인재 집합소를 스스로 없애버린 것이, 당대에는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긴했다. 다만 집현전이 활성화 된 것은 어디까지나 세종시절 한정이다. 문종대만 되어도 활력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성종대에 사실상 집현전의 부활 개념으로 설치한 홍문관이 결국 언론 삼사중 하나로 머문 것을 봐도 알 수 있지만, 관학파 육성이란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다만 세종대에 육성된 인재들을 세조가 대거 도륙함으로써 인재풀을 일거에 박살낸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결국 손자 성종 대에 훈구세력의 건재와 사림의 정계 진출로 인해서 도리어 왕권을 약화시킨 꼴이 되고 말았다. 특히, 관학의 훈구화가 진행된 것은 공신을 주로 등용했던 세조 때라는 말도 있다. 왕권강화를 찬탈의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오히려 세조 스스로가 결국에는 카리스마가 없는 후대 왕권을 약화시킨 것이다. 또 할아버지 태종은 숱한 대간들의 공격을 받으며 불같이 화를 낸 적도 더러 있었으나 사냥 나갈 때에조차 그들을 동행하며 언론 활동을 권장한데 반해, 세조는 대간들의 언론 활동을 탄압해서 유교정치의 근간을 뒤흔들었다는 점도 세조의 평가를 크게 떨어뜨린다.

이 왕권약화가 도드라지는 것이 성종의 즉위인데, 원래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과 성종의 친형이 있음에도 성종이 즉위한 것은 그가 권신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즉, 왕실에서 명백한 왕위계승자인 제안대군이 있음에도 차기 왕을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권신에게 휘둘린 것이다. 한마디로 권신의 뜻에 따라 다음 왕이 바뀌는 이상한 사태가 생겨버린 것이다.

또한, 군사적인 업적을 남겼음에도 군사 면에서 실책 역시 벌이고 마는데 형 문종이 화차를 개발하는 등의 조선 전기까지의 무기체계 발전을 멈춰버린 왕도 바로 세조다. 총통위의 폐지로 화포 개발이 멈춰진 것은 물론 세조 때 조선군의 인사고과가 철저히 궁시 위주로 재편시켜 창검술의 운용이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조선군의 화력 뿐만 아니라 백병전 능력까지 떨어뜨려 버린 셈이다. 이렇게 조선의 군사력이 임진왜란 때까지 정체 상태에 빠지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점.

특히 군사적인 부분에서 빼놓을 수가 없는 것이 보법이다. 이전에는 봉족제에 따라 군사 1명당 보인(봉족 - 경제적으로 군인을 지원하는 이들)이 3명씩 배정되었다. 그런데 세조 때 보법이 시행되면서 보인 수가 3명에서 2명으로 줄어들게 된다. 이는 군액의 숫자를 크게 늘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보인이 맡는 경제적 부담이 커진다는 단점이 있다. 때문에 보인들은 이전보다 훨씬 과중한 부담을 지게 되었고, 이를 피하려고 유망이 빈번해졌다. 경제적인 지원이 사라지자 군역을 실질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정병 역시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걸 고려시대에 비유해 보면 군인에게 지급되는 군인전이 복무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버린 것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군역의 폐단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보법을 계기로 군인층의 붕괴와 양인의 감소가 점차 강해지기 시작한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시점에서 조선에 제대로 된 군인층이 거의 없는 수준이었던 것은 여기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총평하자면, 나름의 능력이나 업적은 있었지만 단종이나 금성대군같은 개인적인 패륜짓 뿐만 아니라 피끝마을 같은 학살을 자행하는 등 전형적인 폭군이며, 자부심이 너무 강해서 귀에 거슬리는 쓴소리를 싫어했다는 것 역시 단점이다. 전형적 독재자의 모습이지만, 뒤집어 보면 암군의 특성이기도 하다. 이 단점이 찬탈자라는 오명과 함께 군주로서의 그의 평가를 떨어뜨린다.

'오명을 감수한 구국의 결단자'란 식의 평가는 군사정권기 평가의 흔적이긴 한데, 군사정권과 관계없이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을 곧이 곧대로 해석하면 이런 평가가 나올 수 있지만 이 실록들은 편찬 주체나 목적을 염두에 두고 비판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실록이다. 이는 '덮어놓고 그냥 믿지 말아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정황은 없는가?' 등의 의문을 제기하면서 다른 기록과 정황증거들과 함께 해석해야 한다는 의미다. 실록의 기록은 한 기록만 뚝 떼어놓고 봐서는 안 되고 다른 관련 기사들과 함께 비교분석하면서 읽어야한다.

심지어는 사관이 있었을 리가 만무한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심복들과 나눈 대화가 실려 있는 게 바로 단종실록이다. 이를 두고 <조선국왕 이야기>의 저자 임용한 교수는 단종실록에 대해 '단종실록은 세조실록의 예고편이다'라는 적절한 촌평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은 태종의 신하들이 편찬한 태조실록처럼 수양 일파의 사관이 철저히 반영된 총체적 편집물이라는 것을 감안을 하고 조심스럽게 해석을 해야 하며, 계유정난과 세조의 찬탈에 이르는 역사는 역사 해석을 실록에만 지나치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실록을 배제하면 남는 기록이 없으므로 역사 인물 세조의 평가는 근거가 없어진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 다음은 추측과 예상 등이 이를 메워야하는 지난한 과정. 이걸 메우는 과정에서 역사적 지식이 부족하다면 흔히 동원되는 것이 야사나 소설 등의 또 다른 편견들이다.

다만 태조실록은 1차 왕자의 난 부분과 태조 이성계의 무능(?)한 부분만 비판적으로 봐야한다. 최소한 태조실록엔 태종 이방원이 잠저시절 심복들과 나눈 대화같은건 없기 때문이다.

5.5. 비슷한 사람들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나쁜 삼촌'의 대표적인 인물로 유명세가 높지만 그의 선배격으로 신라 헌덕왕이 있다. 이 쪽은 크게 뚜렷한 업적도 없고 자연재해와 기근에 속수무책이었을 뿐더러 그로 인해 백성들이 심하게 고생하는 판에 성대한 잔치를 벌였으므로 세조보다도 더욱 답이 없다(...).

그리고 고려숙종이 있다. 고려의 숙종과 비슷한 점이 특히 많다. 수명도 52세였고, 후계자가 둘 다 예종이다. 또한 이웃 명나라영락제와도 상당한 유사한 면목을 보여주는 인물. 영락제가 환관을 키워 명나라에 망조가 들게 만들었다면 세조는 훈구파를 키워 조선에 망조가 들게 만들었으며 세조에게는 그를 '나으리'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는 성삼문이 있었고 영락제에게는 '연적찬위'라는 말을 남긴 방효유가 있었다는 것도 상당히 비슷하다.

흔히, 라이온 킹스카에 비유되기도 한다. 정말 비슷하다. 능력있는 동생이 세자로 책봉되지 못한 것하며 왕위찬탈의 과정도 비슷했다. 물론 형 문종에 비하면 세조가 세자 책봉이 못된 것은 당연하다. 또한 먼치킨 아버지에 재능이 있는 형제들이 있었던 점, 신하들 함부로 대하는 거나, 우애 따위 안드로메다로 날려보낸 인물이라거나, 나름대로 정치에 재능이 있었다는 점, 자뻑이 꽤 심했다는 점 등에서 여러 가지로 삼국지조비와도 비슷한 점이 의외로 많다. 심지어 묘호까지도 똑같다.

특히 자신의 할아버지인 태종 이방원과 정말 많이 닮았다. 자신의 반대파의 를 죽이고, 죽이고 왕으로부터 왕위를 양위받아 즉위했으며 무인 기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문에도 능통한 능력자란 점이고 강력한 왕권확립을 추진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격세유전. 굳이 하나 차이점이 있다면 자신을 도와준 신하들에 대한 태도. 태종은 왕권의 강화를 위해 공신들, 심지어 처남들까지도 토사구팽을 했으나, 세조는 그러하지 못하고 공신들을 방치하고 큰 권력을 줘서 훗날 후대에 훈구세력이 형성이 되어 왕권이 약화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또한 태종은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동복형제만큼은 어떻게든 살려주려고 했으나, 세조는 형제부터 본보기로 죽였으며 이미 죽은 의 묘까지 능욕한다(...).사심이 들어갔다. 쿠데타의 정당성에 있어서도 태종은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해야한다는 당시로선 분명 일리있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 비해얼마 안있어 자기가 꿀꺽하지만 세조는 정통성이 완벽한 조카의 왕위를 뚜렷한 명분없이 찬탈했으며, 그 과정에서 함께한 권신들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해줘서 결과적으로 후대에 왕권을 더욱 약화시킨 오명을 피하기 힘들다. 여러모로 태종의 마이너 카피이다. (잔혹함은 2배 능력은 1/2배)

6. 세조의 능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위치한 광릉(光陵)이 그의 무덤인데 죽을 때 빨리 썩어야 하니 석관과 묘실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세조의 광릉은 평소 왕릉 조성 비용의 절반 남짓으로 묘역을 조성할 수 있었는데 이런 이유로 광릉은 조선 왕릉 변천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능이다. 덕분에 왕릉건축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절감할수 있게 되었다. 1483년 그의 아내 정희왕후도 세상을 떠난 후 이곳에 묻혔다. 이곳이 바로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는 곳으로 알려진 광릉수목원이 있는 곳이다.

7.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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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초상화. 어진을 보고 베낀 왕실 족보 속 그림이다. 하관이 정말 비범하다. 금가락지만 끼면 되겠다 관상학에선 하관이 넓은 것을 좋은 관상으로 여긴다. 왕의 어진을 보고 베낀 것이니 실제 어진도 하관이 넓게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저렇게 크게 그려놓으니 비범하긴 매한가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어진이나 초상화가 남아 있으면 그것대로 캐릭터를 그려내곤 했는데 어쩐 일인지 세조에 대해서는 하관도 비범하고 수염도 파워풀한 이런 개성 있는(?) 생김새를 고증하지 않았다. 도리어 조금 왜소하고 광대뼈가 드러나는 얇은 수염의 소유자로 그렸다. 조조 묘사의 변화와 비슷하다? 아무래도 골육을 죽이고 즉위하는 과정을 생김새로 비판한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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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까지 서울시 마포구 신수동 복개당에 모셔져 동제를 받았던 전(傳)세조존영도. 신수동 복개당은 노인정 공사로 철거되었고 전 세조존영도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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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1928년 창덕궁 신선원전에서 김은호가 그때껏 궁에 보존되어 오던 세조의 어진을 이왕직의 주문으로 새로 이모해 그려내는 광경을 담은 것이다. 출처 하지만 사진 자체가 원래 원본과 모사본 자체를 찍으려고 촬영한 게 아니라 모사본을 만드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한 거라서 어진이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1969년 5월 14일경향신문에 의하면 1928년 원종과 세조의 어진을 모사했던 김은호의 홍릉 세종대왕기념관 내에 새로 건립된 김경승 作의 세종대왕 동상의 고증에 대해 지적하면서 '1928년 당시 작업했었던 세조의 어진에 거의 수염이 없었다'는 증언을 덧붙이고 '아들인 세조의 얼굴과 역시 수염이 성근 편인 태조의 얼굴처럼 세종의 얼굴도 그닥 수염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증언을 하였다.


또한 이 신문에는 세조 어진의 초본이라고 하는 사진도 실려 있었는데 광대뼈가 드러나고 수염이 거의 안보이는 모습이었다. 박시백 작가가 신문 내용을 본 건가? 그런데 심각한 것은 이 초본의 행방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8. 사극

계유정난과 관련한 사극이 워낙 많아서,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역사 속 인물 중 한 명. 이 시대를 다룬 사극이 대부분이 그렇듯 누구를 주인공으로 보느냐에 따라 캐릭터가 극과 극을 달린다. 세조를 주인공으로 하면 '고뇌하는 인간적인 군주', '구국을 위해 오명을 감수한 영웅'으로 그려지지만 단종의 비극이나 사육신을 주인공으로 한 사극에서는 그냥 천하의 개쌍놈 수준.

왕과 비에서는 임동진씨가 세조를 맡았다, 여기서는 형인 문종과의 약속을 두고 단종을 몰아내고도 그 처우에 대해 고뇌하는 인간으로 그려졌으며, 말년에는 죄의식으로 고뇌하고 고통받는 군주로 그려진다, 말년에 그가 묻힌 무덤 앞에서 단종의 혼령이 춥다고 꺼내달라고 하는 장면에서 "홍위야! 내가 꺼내주마! 조금만 기다리거라!"하며 울면서 무덤을 파는 장면은 이 드라마의 명장면으로 회자되고 있다.

퓨전 사극이 아닌 의외로 한명회(서인석 분)나 왕과 비(임동진 분)같은 정통 사극들에서 인간적이고 영웅적인 인물로 등장하곤 하는데 사실 이는 미화가 매우 지나친 수준이다. 이런 현상은 군사정권 시절 방송사의 명분없는 쿠데타를 미화하려는 정치적 이해관계와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을 곧이곧대로 해석한 데서 나오는 현상으로 실록의 기록을 그대로 보면 김종서나 안평대군, 혜빈 양씨가 역적이고 오히려 수양대군의 위기 상황이나 그 속에서의 호탕함이나 대인배스러움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해석이 그대로 사극에 녹아들어 수양의 영웅성과 고뇌만을 강조하는 캐릭터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를 다루는 방송매체를 볼때에는 비판적 시각에서 내용을 해석할 줄 아는 신중함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유동근1990년 천무(KBS)에서 세조를 맡았다. 여기서도 이순재공주의 남자에서처럼 김종서 역을 맡았다.

하지만 퓨전사극인 공주의 남자에서는 김영철[11]씨가 세조 역할을 맡았다. 엄청난 아우라를 뿜어내는데 김종서를 생각하며 가만히 "죽여 드리리다."라고 말할때는 소름이 끼칠 정도. 공주의 남자에 나오는 세조 캐릭터가 역대 세조 캐릭터 중 가장 미화가 덜하고 실제 세조와 가장 가까운 인물로 평한다. 권력에 대한 욕구가 넘치며 정적에겐 피도 눈물도 없는 것. 특히나 정적이나 친족에 대해 고뇌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역대 사극들의 세조와 가장 다른 점이다. 심지어 친딸이 김종서 아들을 좋아한다는 것마저도 이용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이다.

인수대비(드라마)에서는 김영호가 연기를 펼쳤으나 앞서 김영철의 연기가 너무 후덜덜했을 뿐더러, 인상이나 성품이 순하게 나와서 이정재의 위엄이 나오지 않았다. 비중이 정희왕후(김미숙 분)나 인수대비(채시라 분)에 밀린 것도 한몫했다.# 결국 스스로 저지른 업보 탓인지 문종, 단종에 대한 악몽에 떨다가 절규하며 퇴장. 왕과 나김병세도 비교적 선이 가늘게 나온 세조로 꼽힌다.

북한에서 남한의 장비를 빌려 합작제작한 사육신에서는 최봉식이란 배우가 수양대군 역을 맡았다.

2013년 9월 개봉영화 관상에서는 이정재가 수양대군 역할을 맡았다. 영화 제목처럼 관상이 주 소재인 영화다보니 수양의 관상도 표현하는데 수양의 상은 이리의 상. 물론 여기서도 보고 있노라면 왕이고 뭐고 간에 천하의 개쌍놈 소리가 절로 나올 지경. 이정재의 연기와 맞물려 호쾌하면서도 간악하고 잔인한 세조의 면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9. 안습한 일

사육신이 남긴 시조들 때문에 국어 관련해서는 늘 세조로 불리지 못하고 수양대군이라 불린다.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 하는 시조 때문에 더더욱 세조라고 못 불린다.물론 그렇게 불리게 된 이유를 생각하면 사실 안습하다곤 할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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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별도로 전주이씨 덕원군파에서 그린 세조 어진이 있지만 상상도라 별 가치가 없다.
  • [2] 생전에 받은 존호(尊號)는 승천체도열문영무(承天體道烈文英武) 이다.
  • [3] 실록에 매년 탄일하례 기록을 보면 9월 24일로 되어 있다.
  • [4]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돌발행동들은 자신의 세력과시나 야심표출 보다는 적당히 사고를 쳐서 자신이 문종의 권위에 도전할 마음이 없다는 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대표적인 케이스인 양녕대군의 사례와 막강한 왕권을 구축하고 있었던 문종을 보면 상당히 설득력있다.
  • [5] 경국대전은 이미 세조 즉위 당시 거의 완성된 상태였으나 호전과 형전을 제외하고 여러번의 수정을 거쳐 성종 즉위후 15년이 지나서야 최종적으로 반포가 될 수 있었다.
  • [6] 공신전은 세습 유지.
  • [7] 다만 진짜 바보인지는 성종때부터 지금까지 수백년 간의 논쟁거리이다.
  • [8] 재산강탈은 기본이고, 홍윤성 같은놈은 툭하면 사람 패죽이는 사이코패스였다
  • [9] 현덕왕후를 격하시키면서 문종의 능에서 파낸후 툭하면 물난리가 나는 곳에 이장해 버린 사실이 낳은 소문이다
  • [10] 세조실록의 공식기록은 '단종은 자결했고 세조가 이를 불쌍히 여겨서 대군의 예로 장례를 치러줬다'이고 당연히 조작이다
  • [11] 공교롭게도 파천무에서 세조 역이었던 유동근씨는 용의 눈물에서 태종 역을 맡았고, 김영철씨는 대왕 세종에서 태종 역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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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1-07 02:5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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