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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책

last modified: 2015-04-05 18:04:54 by Contributors

후한의 오(198~200)
신규 책봉 손책 없음[1]

孫策

후한 말의 군벌로 삼국지의 등장인물. 생몰년도 175 ~ 200년. 는 백부(伯符).손견의 장남이며, 손권의 형. 강동 손오의 2대 군주이지만 손견은 죽을 무렵에 원술의 부하로 움직였기 때문에, 사실상 독립 세력을 이끈 손씨로는 초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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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獨戰東南地(독전동남지) : 동남쪽 지역에서 홀로 싸우니
人稱小覇王(인칭소패왕) : 사람들 칭하기를 소패왕이라
運籌如虎踞(운주여호거) : 전략을 세울 때는 범이 숨은 듯
決策似鷹揚(쾌책사응양) : 결정을 내릴 때는 매가 나는 듯
威鎭三江靖(위진삼강정) : 삼강을 평정하여 위세 떨치니
名聞四海香(명문사해향) : 이름이 사해까지 울려 퍼졌네
臨終遺大事(임종유대사) : 죽음에 이르러서 대사 맡길 때
專意屬周郞(전의촉주랑) : 오로지 주유에게 부탁했다네


Contents

1. 강동 평정
2. 독립, 그리고 사망
3. 외모
4. 평가
5. 대중문화 속의 손책


1. 강동 평정

손견은 자신의 일가족을 수춘에 머물게 하였고 따라서 그는 그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주유 등과 친교를 쌓는다. 손견이 죽자 장강의 북쪽 강도로 이사갔으나 서주목 도겸이 손책을 싫어했으므로 그는 일가와 함께 외숙부인 단양 태수 오경에게 간다.

그 뒤 원술[2]이 수춘에서 터잡자 손책은 원술 밑으로 들어가 벼슬살이를 한다. 원술은 유비와의 싸움에 앞서 여강태수 육강[3]에게 군량을 청했으나 그가 이를 거부하자 손책을 보내 공격하게 하였고 그에게 점령지의 태수직을 약속한다. 손책은 육강을 격파하나 원술은 약속과는 달리 유훈을 임명한다.

그 뒤 양주자사였던 유요와 원술이 전쟁을 시작하였고 둘은 호각세를 이룬다. 흥평 원년(194년), 손책은 원술에게 요청해 군대 천 오백여 명을 받은 뒤 추가로 5, 6천을 모집[4]하고 장강을 건너 단양군을 친다. 손책은 군사적인 재능이 있어 횡강진의 번능, 우미와 당리구의 장영의 군대를 격파한다. 이듬해 말릉성(훗날 건업)을 지키던 팽성상 설례와 하비상 착융[5]의 군대를 모두 격파한다. 하지만 착융이 말릉성을 굳게 지키니 손책은 그를 남기고 유요를 공격한다. 유요의 거점인 오군 곡아현까지 진군하니 유요는 달아난다.

그 뒤 주유에게는 단양의 수비를, 주치에게는 오군의 평정을 맡기고 자신은 회계로 진군하여 회계태수 왕랑을 격파한다. 오군태수 허공은 이미 주치에게 격파되어 호족 엄백호에게 몸을 의탁한 뒤였다. 손책이 엄백호의 사절 엄여문답무용으로 직접 창으로 찔려 죽이고 진군하니 엄백호는 겁을 먹고 예장군에 있는 허소에게로 달아난다. 손책은 허소의 명망을 알아 일단 치지 않았다가, 허소가 죽고 뒤이어 작융(착융)에게 간신히 이긴 유요가 병사하자 이들을 흡수했다.

그 뒤 자신은 회계태수가 되고 주치를 오군태수, 오경을 단양태수로 삼았다.

손책은 이후 원술과 대립하였고, 원술이 임명한 단양태수 원윤(袁胤)을, 서곤을 파견해 쫓아냈다. 그 뒤 원술이 칭제하게 되자 손책은 그를 꾸짖는 서한을 보내고[6] 관계를 끊는다. 그러나 수적으로는 불리했으므로 장소의 진언에 따라 조조의 원병(구원군) 포지션을 맡아서 주된 싸움은 조조에게 떠넘긴다.[7]

2. 독립, 그리고 사망

198년 조조 밑에 옹립되어 있던 헌제로부터 손책을 오후로 봉하고 원술을 공격하라는 조서가 내려온다. 손책은 출병하긴 하였으나 이것이 원술을 공격하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는데 그 이유는 그 군대로 황조를 치기 위해 움직였기 때문이다.[8] 때마침 원술이 죽고 그의 장수들이 여강 태수 유훈에게로 항복한다. 유훈은 이들을 맞이하러 가는데 그 틈을 타 손책이 배후를 급습하였고 그 결과 손책은 여강도 점령하였다.

손책은 군을 물리지 않고 계획대로 황조를 공격해 또다시 승리한다. 황조와 유훈을 격파하고 돌아오던 중 예장태수 화흠을 종속시키고 손분을 예장태수로 삼는다. 예장군의 한 지방에서 단양 사람 동지(僮芝)가 스스로를 여릉태수라 칭하였는데, 손분과 손보가 평정했다. 손보가 여릉태수가 되었다.

손책이 세를 넓히고 배후를 위협할 조짐을 보이자 조조는 조인의 딸을 시집 보내는 둥 오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손책이 오히려 대장군 자리의 직책을 요구하자 관계가 완전히 어긋나 버린다.[9] 그리고 이에 나오는 역적드립, 원소와 군사동맹을 맺는 이야기도 적혀있다.

200년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서 대치하자 손책은 허도를 급습할 계획을 꾸민다. 그는 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는데 손책전에 주석의 강표전에 따르면 우선 광릉태수 진등과의 접전이 먼저 이루어졌다고 한다.

정사에서는 광릉태수 진등을 공격하려다가 의병계에 무너지고 부상까지 겹치다 피로누적으로 사망한다. [10]

이것은 조조에게 상당한 위협이었는데 곽가는 손책이 암살당할 것이라 자신하였다. 손책은 진등과 대치하면서 단도에 머물며 군량 수송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때 허공의 식객들의 기습을 받고 죽는다. 손책이 강동의 호족인 허공이 조조(정사에서는 헌제)에게 보낸 밀서를 입수하고 분노하여 허공의 일족을 모두 주살했다가, 도망친 허공의 식객들에게 기습을 받고 암살된 것이다.
  • 곽가가 이를 예측했다는 이유만으로 곽가가 암살에 관여했다는 음모론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지만 적당히 가려듣자. 주석을 단 배송지도 곽가의 예측이 맞은 것에 운이 강하게 작용했음을 지적하고 있으며, 증거가 될 기록 따위 한 줄도 없다. 게다가 곽가의 계책 전반을 살펴볼 때 곽가가 그러한 일을 실제로 실행할 만한 구체안을 낼 수 있으리라 보긴 힘들다. 손책을 직접적으로 본 적 없는 모사가 저런 예측을 할 정도로 손책의 잔혹함이 잘 알려졌다 정도로 참고하자.

실제 죽은 것은 강표전에서 빰에 화살을 맞았다는 것, 그리고 치료할 수 있다는데 거울을 보고 화를 낸 뒤 치료를 거부한 점, 또한 화살에 맞고도 한동안 살아있다 죽은 점을 본다면 아마도 독이 잔뜩 묻은 화살을 얼굴에 맞은 것은 아닌가 추측된다. 거울을 보고 치료를 거부한 것은 아마도 이 독의 작용으로 얼굴이 완전히 끔찍하게 변해 살고자 하는 의지가 안 생겼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주태는 그런 의미에선 참…. 정사 배송지 주 수신기에 우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나 야사라 보아야 옳을 것이다.

연의에서는 두 가지 내용을 섞어서 허공의 식객에게 습격을 받아 창과 독화살에 찔렸으며, 강표전과 달리 화타의 제자[11]에게 치료를 받았으나, 독이 풀릴 때까지 100일간 화내지 말라는 처방을 받는다. 그러던 중 우길이 민심을 얻는 것을 보고 분노해 처형하고 분노로 인한 독기와 우길의 환영에 시달려 죽는다. 빡쳐서 죽는 것은 동일하다?

죽을 상황이 되자 아우 손권에게 뒷일을 모두 맡겨 후계자로 정하고, 장소, 주유 등에게도 유명을 남기고 갔다.

3. 외모

삼국지전체에 등장한 모든 남자 장수들 중 친구인 주유와 더불어 수위권을 다투는 수준의 미남이였다. 이는 모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탓이다. 결론적으로 손책은 외모는 모계를 물려받고 인격과 능력은 부계를 물려받았다.

4. 평가

강동의 깡패손책은 전투에서 패배한 일이 없었고 짧은 시간안에 강동을 제패하였다. 그래서 소패왕[12]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태사자와의 처절한 일기토는 정사에도 기록으로 남아서 그가 싸움꾼으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13] 게다가 연의에선 우미를 옆구리에 끼우고 끌고 오다가 질식으로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연의가 전부 사실은 아니지만, 손책이 어느 정도 남다른 괴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런 식으로 각색된 것이 아닐까 한다.사실은 암내에 질식 한편, 연의에서 번능은 손책의 고함소리에 놀라 말에서 떨어져 뇌진탕으로 죽었다. 현실성 따위 장식입니다

동오 패권주의를 펼치며 강동을 정벌하고 기틀을 다지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잔인함 때문에 강동의 호족들을 완전히 복속시키지 못한 채 일찍 죽어버렸고, 이 점은 후대에 길이길이 이어져서 손가의 발목을 잡게 된다.

요즘 코에이나 일본식 창작물이 대세가 되다 보니 장군으로써의 능력만 부각되는데 이는 여러면에서 위험한 생각이다. 그가 강동을 정벌하면서 상대한 적들은 큰 도적떼 수준으로 추정되는 엄백호, 전투경험 없는 문관(왕랑)이나 낙하산 인사(작융, 설례), 관료 + 군벌이지만 원술에게 두들겨 맞고 힘이 빠졌거나(유요, 육강, 주흔, 장영, 번능, 우미), 토착 호족(허공)으로, 속된 말로 양민학살에 가까운 상대들이다.
군사적 실적을 부각시키는 것도 좋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손책의 능력을 깎아내릴 수 있다. 더구나 피해가 지나치게 커서 이상하다고는 하지만 진등에게 대패한 기록도 있다.[14]

사실 정사의 내용을 손책의 적군 시점에서 잘 읽어보면 손책은 평화로운 강동 지방[15]꿀물의 명령으로 닥치고 유린하는 동네깡패다. 엄여를 대뜸 죽이는거야 그렇다 쳐도(?), 명문장가 고대를 쳐죽이는 스토리 등에서 열등감과 시기심 많고 잔인한 손책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16] 이러고도 원한으로 죽지 않는게 이상할 지경. 그리고 이 빌어먹을 성격이 손권, 손노반, 손준, 손침, 손호까지 이어진다

물론 그럼에도 인정해야할 것은 손책의 리더십 덕목이다. 손책이 정말 돋보이는 부분은 군사적 능력이 아니라 패권가, 전략가적 자질과 리더로서의 대국적인 안목이다. 그는 강동 통합의 기치를 내걸고 강동의 한 군소 호족에 불과한 손씨의 깃발 아래 내노라하는 호족과 무장들을 뭉치게 했고. 진작부터 서주와 허창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아 손오의 한계를 파악하고 빠른 중앙집권화를 위해 외정을 통한 친위세력 육성과 호족들의 세력약화를 기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잔혹했던게 흠이었지만. 궁예?

그가 제안한 허창기습책은 협천자(挾天子)의 이점과 한왕실의 가진 권위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데[17] 성공 여부는 차치하고 한왕실의 권위를 헤아리고 이용한 사람도 당대에 몇 안되며 이중 창업에 성공한 사람이 조조유비 정도니 과연 삼국의 하나를 이룰 수 있을 만하다.

아버지를 잃고 절박한 상황에서 원술같은 소인배에게 고개를 숙여가며 후일을 도모한 불굴의 의지, 태사자와의 일화나 부유한 호족 출신인 주유를 평생 손가에 헌신한 충신으로 만든데서 엿보이는 용인술[18]등 분명이 패업을 이룰 자질이 있는 인물이었다.

종합하면 손책은 용인술과 리더쉽, 대국적 안목 등의 덕목을 갖춘 인물로 호족들을 억누르고 조금씩 중앙집권화를 이룩하기 위한 장기적인 플랜을 갖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가히 대업을 이룰 인물이지만, 그 시도가 너무 급하고 잔혹해서 자신에게 화로 돌아왔다. 손책이 호족들을 다 누르지 못하고 황천길을 가게 되면서, 이후 손오는 큰 싸움마다 단결되지 못하고 약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오죽하면 삼국지 팬들 사이에서는 주유와 함께 이른 나이에 사망하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아쉬워하기도 하는 오나라 인물이기도 하다.오래살면 그 성격때문에 손권 대신 손책이 아궁의 변을 일찍 일으켰을거라는 의견도 있다.

당대의 영웅으로 평가되었으며 상기했다시피 항우의 현신처럼 여겨지기도 했는데, 유독 조조의 군사인 곽가만은 그의 인물됨을 폄하하며 말하길, '제 성질을 못 이겨 자멸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죽을 때는 아우 손권에게 뒷일을 맡겼으며 "안의 일은 장소에게, 밖의 일은 주유에게 물어보라"는 진심어린 유언을 남겼다.

동갑이었던 주유와는 매우 절친한 사이. 미녀 자매인 대교소교를 얻었을 때도 대교를 아내로 삼으면서, 소교는 주유의 아내로 삼게 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부분이 매우 간략하게 되어 있지만, 청춘남녀의 사랑이 느껴지는 일화라서 그런지 여러 경극으로 로맨틱하게 각색돼서 널리 퍼졌다. 참고로 경극에서는 어쩐지 엄백호가 대교와 소교를 노리는 악역을 맡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정사의 기록을 보면 어쩐지 약탈혼에 가깝게 결혼했다.

후에 손권이 황제를 칭하면서 손책을 장사환왕으로 추존했다. 황제가 아니라 왕으로 추존한 이유는 차남장남을 제쳤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정통성 문제 때문이었다. 훗날 진수는 "네가 네 형 아니었으면 그 위치에 있었겠냐"라면서 대접이 박하다고 대차게 갔다. 실제로 비슷한 경우였던 사마염도 자신의 백부 사마사를 황제로 추존한 것을 보면 차남의 아들과 차남 자신이라는 차이가 있기는 해도 과연 정통성 문제가 얼마나 클까는 비판적으로 생각해 볼 일이다.
  • 다만 사마염의 경우는 백부 사마사가 아들이 없고 딸만 다섯 있었기 때문에 직위를 아버지인 사마소가 물려받은 경우라 애시당초 정통성 문제가 별로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19] 솔직히 사마염의 성격도 다른 의미에서는 손제리 못지 않았다.

손책의 아들 손소(孫紹)는 손권이 황제가 된 뒤 처음에 아버지처럼 오후(吳侯)에 봉해졌다가 이후 상우후(上虞侯)로 바뀌었다.[20] 아무리 정통성 때문이라도 조카를 왕작도 아니고 겨우 후작에 봉한 것은 푸대접이라고 손권이 까이게 되었다. 손소의 아들 손봉(孫奉)은 상우후를 세습했으나, 손호 때 제위에 오를 거라는 뜬소문 때문에 주살당하고 만다. 손책의 딸은 육손의 아내가 되는데 이것은 손책이 육강을 죽인 이래로 호족 육씨와 원수 관계가 된 것을 봉합하려는 정략결혼의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육손의 최후로 미루어 본다면 이 정략결혼은 100% 임시땜빵일 뿐이였다. 원한 → 화해 → 숙청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원수관계가 임시땜빵이 아닌 실제 봉합했다면 육손이 숙청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나라를 까는 사람들은 대교를 과부로 만들었다고 한탄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손책이 심하게 일찍 죽는 바람에 동오의 손씨가문은 다른 군벌들과는 달리 군벌로서 제대로 완성시키지 못한 채 손권이 그 상태로 그대로 끌고가야만 했다. 이랬기 때문에 오나라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군주가 토호들을 완벽하게 제압하지 못해서 툭하면 토호들끼리 밥그릇싸움을 하게 되고 막상 전투를 하게 되면 토호가 삐질까봐 걱정하게 되었다. 이것은 엄청 큰 것으로 위나라나 촉나라가 하지 않아도 되는 근심거리 하나가 오나라에 추가된 것으로 이 근심거리 때문에 일을 제대로 망친 게 하나 있다. 그것이 합비 공방전이다. 유표 역시 토호들을 하나로 규합시킬 능력이 아예 없는 위인이였으나 유표의 경우는 채모가 유표의 세력을 하나로 규합시키는 데에 성공했으므로 이러한 문제점이 없었다. 하지만 오나라를 하나로 규합시킬 손책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오나라는 시종일관 규합이 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 끌고나가야만 했고 이는 이궁의 변과 아주 연관성이 없다고 보기 힘들다.

그 외 기타 트리비아로, 바둑사에 남는 인물 중 하나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바둑서적인 '망우청락집' 에 그와 여범이 둔 기보가 남아있다. 현존하는 기보 중 가장 오래 된 기록이다. 다만 이에 대해선 진위성이 의심된다는 의견도 있다.#

5. 대중문화 속의 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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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후 손권이 황제가 된 뒤에 손책의 아들 손소를 아버지처럼 오후에 책봉했다가 상우후로 변경했다.
  • [2] 삼국지연의에서 원술손견을 대등한 위치에서 서술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손견에게 유표를 치도록 부탁해 유표에게 죽게 한 원술이 손책의 원수 같이 보일 수도 있지만, 삼국지를 보면 손견은 원술의 수하 같고, 후한서에서는 아예 손견을 원술의 부하로 묘사하고 있다. 그 때문에 손책에게 원술은 마치 이전에게 조조 같은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손견대부터 그렇고.
  • [3] 육손의 숙부.
  • [4] 연의에서는 원술에게 전국옥새(손견이 죽기 전에 남겼다고 한다.)를 담보로 하여 군사를 받았고, 추가로 받은 군사는 황개 등 옛 가신들이 합류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 [5] 조조의 공격으로 치소인 팽성국과 하비국을 떠났다.
  • [6] 연의에서는 이 역시 앞서 설명한 옥새 건을 들먹이면서 "옥새는 왜 안 돌려주고 역적짓을 하냐"라며 원술을 꾸짖는 내용으로 바꿨다.
  • [7] 역적 편에 설 수 없다는 간단한 논리도 있었지만, 원술보다 조조가 나중에 성공할 확률이 높았으므로 잘 보이기 위해 그랬을 확률이 높다.
  • [8] 원술을 치기 위해 일으킨 군대이나 마침 원술이 망하자 황조를 친 것일 수도 있다.
  • [9] 연의 한정(?)인지도 모르지만 조조는 손책이 급속도로 동오를 평정하자 그를 두고 "사자새끼와 같구나. 그와는 젖을 주지 않고 싸움을 피해야겠다."라고 말한 바 있다.
  • [10] 금적금왕을 적절히 이용하여 손책이 무너지면 도미노처럼 줄줄이 무너지는 것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손견이 그러했듯 손책도 아버지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 받아서 매우 호전적이고 직접 나서야 성이 풀리는 성격이었기에, 손책의 단명을 예지한 증거라고 볼 수 있다.
  • [11] 화타는 다른 사람을 치료하느라 출장방랑중이었다.
  • [12] 패왕(覇王) 항우에 걸맞는 용맹을 지녔다는 뜻이다.
  • [13] 연의에서는 이 부분을 더욱 부풀려서 1차로 말 추격전, 2차로 칼&창싸움, 3차로 주먹다짐(!)까지 세세하게 설명했다. 물론 양측의 군사들이 몰려나오는 바람에 무승부가 됐지만, 4차로 공성전 당시 싸움중에 뺏었던 태사자의 칼과 손책의 투구를 내걸어 욕배틀을 하기도 한다. 결국은 단합력이 강했던 손책이 승리했다.
  • [14] 그래서 현재 '오오 소패왕!'하는 것처럼 대단한 능력자는 아니었다는 의견도 있다. 하필이면 손책의 아버지 손견이 끗발 날리던 군벌이라서 더 그런 경향이 있는 듯.
  • [15] 이 당시 중원은 조정의 붕괴로 지방 통제력이 박살나면서 군벌들이 충돌하면서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에 비해서 강동은 커다란 충돌없이, 고만고만한 지방 호족들과 지방관들이 협조하여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손책이 오기 전까지는 당시 중국 전토에서는 평화로운 편에 드는 지역이었다고 봐도 무방한 셈.
  • [16] 도리어 고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미움을 피하려다가 모함에 넘어가 죽었다!
  • [17] 그런데 정작 자신이 중앙에서 보낸 문관들을 죽였다는 점은 참 특이한 점.
  • [18] 참고로 삼고초려 일화나 '후계자의 자질이 모자라면 님이 대신 주공 해 주시오' 운운하는 일화는 손책도 가지고 있다. 동생은 없는데 형은 있네
  • [19] 물론 사마사의 양자로 사마유가 있었지만 그는 원래 사마소의 차남이자 사마염의 동생이다.
  • [20] 오후라고 하면 황조의 이름 '오'와 겹치기 때문에 바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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