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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요찬

last modified: 2015-04-12 01:55:32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전쟁 전
2.1. 4.3 사건의 초토화 작전
2.2. 4.3 사건 이후
3. 전쟁 중
4. 전후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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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 2. 13. ~ 1980. 10. 18.

6.25 전쟁 당시 활약한 국군의 장성. 거침없는 맹장으로 특히 미군들로부터 '타이거 송'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다른 평가로는 '석두(石頭)', 한마디로 돌머리가 있다(...).[1] 대충 어떤 스타일인지 감이 오시리라 믿는다.

2. 전쟁 전

본관은 여산으로 1918년 2월 13일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출생하여 일본군 지원병으로 입대. 8.15 광복 당시 일본 육군 오장(하사)까지 진급하였다. 광복 후에는 최경록 장군의 도움을 받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5월 1일 육군 (현재 계급으로 소위)로 임관하였다.

임관 후 부산에서 제5연대 창설요원으로 활동하다가 그 해 9월 5일, 제5연대의 일부 병력을 중심으로 강릉에 제8연대를 창설하게 되자 그를 따라 강릉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강릉에서 대위로 진급, 1947년 3월 1일부로 제8연대 제3대대장의 지휘를 맡게 된다.

이후 소령 진급 후 제1연대를 거쳐 1948년 6월 11연대 부연대장으로 임명되어 제주도에서 공비 토벌 임무(라고 쓰고 4.3 사건이라 읽는다)를 수행중에 제9연대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육군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2.1. 4.3 사건의 초토화 작전

4.3 사건 당시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초토화 작전이란 해안선에서 거리가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역들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폭도라고 규정한 작전인데 제9연대는 모든 중산간마을을 태워버린건 물론이고 거기 사는 주민들은 '모두 유격대를 도와주고 편의를 제공'한다고 가정하고 주민들을 대량학살한다는 계획을 골랐다. [2]
이 계획으로 중산간마을 주민들에게 소개령(疎開令)을 내렸는데, 토벌대는 미처 내려오지 못한 주민들은 물론 소개령이 아직 안 내려졌거나 아직 내려받지 못한 마을에 사는 주민들까지 모조리 살해했다.[3]
또한 초토화작전 시기 때는 중산간마을 사람이 아니라도 청년들을 재판도 없이 총살하는게 흔했는데 중산간마을에서 해안마을로 도피해온 사람들도 청년이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해서 모두 죽이기도 했다. 역시 원래부터 해안선이나 그 가까이 마을에 살던 주민들도 가족중에서 쳥년이 없으면 마찬가지로 모두 죽였다.[4]

당시 송요찬의 미친 모습은 주변 사람의 증언을 봐도 알 수 있다.

제9연대 선임하사 윤태준의 증언이다.
송요찬 연대장은 초토화 작전을 폈다. 거처 가능한 곳을 없애라, 또는 불태워 버리라고 했는데 이런 건 육지에서도 없었다. 초토화 작전이 상부의 지시인지 또는 연대장 독단인지는 모르겠지만, 송요찬 연대장은 일본군 출신으로서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였다[5]

제9연대 군수참모, 김정무의 증언이다.
난 9월 1일부로 대위 진급을 했는데 9월의 어느 날 연대장이 부르더니 다짜고짜 ‘너 재판장 해라. 이놈을 죽여야 돼!’라고 했습니다." (중간생략) "재판정에 나가보니 얼마나 고문을 당했는지 사람이 반쯤 죽어 있었어요. 피고인은 제주도지사였던 박경훈이었습니다. 도지사 관사에서 쌀 한 말을 공비에게 줬다는 게 범죄사실이었지요. 쌀 한 말에 사람의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릴 적 시골에서 쌀 창고 열쇠는 늘 할머니가 갖고 다니던게 기억 나 '피고가 직접 쌀을 주었느냐?'고 물었지요. 이에 당시 57~58세 가량 된 박경훈 지사는 '아닙니다. 저도 구속돼 조사받는 과정에서 알게 됐습니다. 우리 집사람 친척이 와서 굶어죽게 됐으니 도와달라고 해서 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고 대답하더군요. 아무리 도지사 관사에서 쌀이 나왔다고 하지만 부인의 행위를 책임질 수는 없으므로 무죄라고 판단했습니다." (중간생략) "제안하고 동의를 얻어 3년을 언도했습니다. 아직도 무죄인 사람에게 3년형을 언도한 것이 양심에 가책이 됩니다. 어쨌든 재판결과를 연대장에게 보고했더니 '이 공산당 같은 놈의 새끼!'라며 철모로 나를 갈기는 겁니다. 하도 맞아서 머리가 크게 부었습니다. 같이 재판에 참여했던 최세인 인사참모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헌병대장 송효순은 동기생인데 매일 술을 먹고 괴로워했습니다. 물어봐도 말은 안 하고. 그런데 들리는 이야기로는 헌병들이 사람들을 동굴에 몇 십명씩 데려다놓고 갈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민한 것 같습니다. 그는 굉장히 착한 사람이거든요. 결국 손을 써서 중간에 제주를 떠났습니다. 또 한영주 작전참모는 밤낮으로 연대장에게 맞았습니다.[6]

당시 제주도 양민들의 죽음은 송요찬의 탓이 크다. 그러나 이 때 깨달은게 있는건지 4.19 혁명 때는 아주 다른 모습을 보여줘 서울시민들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한다. 이렇게 하는 짓이 다른 것에 해석이 여러가지다. 사람이 4.3 사건 이후 바꼈다는 주장도 있고, 송요찬이 원래 무식한데 4.3 같은 경험이 없어서 미쳐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혹은 배경이 특수했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4.19 혁명 시기는 좀 특수한 배경이 있는데, 군인들이 한국전쟁에서 고생하고 희생한 반면 경찰에 비해 대접이 좀 박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군인들 또한 시민들만큼 국가에 불만이 누적되어 있었고, 시민들이 일제히 봉기하자 군인들은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경찰과는 다른 행동을 하게 된 것. 제주도민들은 공산당으로 보였지만 서울시민들은 공산당으로 안 보이는 눈을 가졌을지도 모른다사실 당시 제주도민 사람들은 본토 사람과 말이 완전 달랐다. 제주도민을 서울 시민과 다르게 인식했을 가능성도 있다. 사실상 4.3 사건제노사이드적인 성격도 지닌다.

2.2. 4.3 사건 이후

제11연대의 제주도 평정작전 임무를 인수받아 수행하던 중 이듬해(1949년) 2월 제9연대 수도여단(여단장 이준식 대령)에 배속되어 서울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강릉에 주둔하고 있는 제6사단 제10연대장으로 전보되었다.

그는 제10연대장 재직시 '양양 돌입사건'[7]을 주도했고, 이 때문에 7월 24일 해임되었으나 군사재판은 면했다. 이후 육군보병학교 학생감과 제5사단 제15연대장을 거쳐 1949년 4월 최영희 대령 후임으로 헌병사령관에 임명되었다.

3. 전쟁 중

좌천되었던 송요찬을 살린 것은 전쟁이었다. 헌병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은 전쟁 발발 당시 적의 공세에 밀려 대한민국 국군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자 헌병들을 진두지휘, 낙오병을 수습하여 국군을 재편성하는데 기여하였다.

이후 1950년 8월 10일 대구방위사령관에 임명되어 임시수도인 대구를 지키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 해 9월 1일 인엽 대령[8]의 후임으로 수도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여기서 송요찬은 안강과 경주 부근에서 전투를 수행하여 1군단이 반격작전을 감행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 전공으로 9월 20일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수도사단은 이후 북진작전에서 회양, 신고산, 원산 점령에 이어 함흥, 흥남을 거쳐 (연해주-만주) 국경 인근까지 진출하는 등 맹활약하는데, 이러한 수도사단의 활약은 송요찬의 지휘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러나 소만 국경을 목전에 두고 송요찬의 수도사단중공군의 남하로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 50년 12월 18일 흥남에서 묵호항으로 상륙한 수도사단은 1951년 1월 27일 다시 강릉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주로 동해안을 중심으로 한 동부전선에서 활약하다가 중공군 5월 공세시 백선엽 소장의 명을 받고 적의 좌측 돌파구에 해당하는 대관령을 점령, 적의 강릉 진출 기도를 봉쇄하는 등의 활약[9]을 보였다.

이후 월비산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1951년 11월 15일 지리산 일대의 공비(빨치산)토벌을 위해 편성된 백야전전투사령부(사령관 백선엽 소장)에 배속되어 작전을 실시했다. 이듬해 1952년에는 새로 재편된 제2군단(역시 사령관 백선엽 소장)에 배속되어 춘천 북방으로 이동, 수도고지 전투 등을 수행했다.

1952년 7월 8일 육군소장으로 진급한 송요찬은 수도사단의 지휘권을 이용문 장군에게 인계하고 전라북도 남원에 주둔하고 있던 남부지구경비사령부의 초대 사령관으로 영전했다.

그러나 1952년 10월 8일 다시 수도사단장으로 전보, 지형능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 무렵 송요찬은 도미유학 대기 중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로 전황이 아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금성의 동남방의 방어를 담당하던 제8사단의 사단장으로 임명된다. 이때 송요찬은 금성천 이북까지 진출, 최후의 대공세였던 1953년 7월 13일 공산측의 공세를 물리치고 휴전선의 확정에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국군이 확보하게 하는데 기여했다.

4. 전후

미 지휘참모 대학, 3군단장, 육군 중장 진급, 제1야전군사령관(1957년)을 거쳐 1959년 2월 백선엽 대장의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임무를 수행하다가 4.19 혁명때는 이승만 대통령이 내린 비상 지시에 따라 군 병력을 서울 시내에 진주시키기는 했지만, 절대 무력 사용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 4.19 혁명 성공에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4.19 직후 김종필 등 젊은 장교들의 정군운동에 따라 1960년 5월 23일 사임하고 14여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정군운동의 주역들은 함께 예편되었다가 이후 5.16 쿠데타를 일으키며 야심을 드러낸다. 5.16 쿠데타 이후 장도영이 체포되자 송요찬은 군부의 각수반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1980년 10월 18일 6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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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나중에 이를 알게된 송요찬은 "내가 석두(石頭)면, 그놈들은 철두(鐵頭)"라고 말했다는 후문
  • [2] 1차출처: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97, April 1, 1949. 2차출처: 4.3 진상조사서 449쪽
  • [3] 출처 4.3 진상조사서 378쪽~391쪽
  • [4] 출처: 4.3 진상조사서 391쪽~400쪽
  • [5] 1차출처: 尹太準, 73세,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동, 당시 제9연대 보급과 선임하사, 중령 예편, 2001. 5. 2. 채록 증언. 2차출처: 4.3 진상조사서 294쪽
  • [6] 1차출처: 金貞武, 77세,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당시 제9연대 군수참모, 준장 예편, 육사2기 동기회장. 2002. 9. 25. 채록의 증언. 2차출처: 4.3 진상조사서 235쪽
  • [7] 1949년 동해안에 배치된 한국군 제6사단 10사단이 북한 제38여단이 계속 도발하자 1949년 7월4일 단독 북진해서 당시 북한 땅이었던 38선 이북의 양양(정확히는 양양 남부 일부)으로 돌입하고 남대천 이남의 80고지와 더 북쪽의 기사문리(현 양양군 현북면)라는 곳까지 점령한 사건이다. 북한군은 일시 후퇴하는 척하면서도 술수를 부렸다. 바로 로 가린 어선에 위장한 병력들 태워 남하, 그대로 국군의 후방을 기습공격한 것. 이를 잘 물리쳤으면 좋았겠으나, 한국군은 1개 중대 규모의 피해를 입는 대패를 맛보고 철수했다. 북에서는 제2차 고산봉 전투라고 부른다.
  • [8] 백선엽의 동생으로 인천대학교천전문대학 등이 포함된 선인학원 이사장이었다. 망나니+막장으로 유명하다. #
  • [9] 사실 송요찬은 백선엽 장군의 명령을 쌩까고(...) 장시간 부대를 대기시켰다가 자칫 대관령 점령을 말아먹고 국군과 UN군의 전체 작전에 커다란 차질을 가져올 뻔했다. 보다못한 백선엽 장군이 직접 찾아가자 그제야 부대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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