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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제

수의 역대 황제
북주에서 선양받음 1대 고조 문황제 양견 2대 세조 명황제, 양황제[1] 양광

(ɔ) Yan Li-pen from
묘호 고조(高祖)
시호 문황제(文皇帝)
연호 개황(開皇, 581년 2월 ~ 600년)
인수(仁壽, 601년 ~ 604년)
양(楊)
견(堅)
생몰기간 541년 7월 21일 ~ 604년 8월 13일
재위기간 581년 3월 4일 ~ 604년 8월 13일


Contents

1. 개요
1.1. 중국역사에 남을 커다란 한 획, 중국을 다시 통일시키다
1.2. 후대 왕조에 길이 영향을 끼친 정치 능력
1.3. 문제의 아킬레스건 관롱집단
1.4. 고구려와 전쟁
1.5. 말년의 후계자 선정
1.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541~604 隋文帝. 이름은 양견(楊堅). 의 1대 황제.
묘호는 고조.

아들 겸 후레자식 때문에 묻힌 정치력 먼치킨이자 중국의 분열시기를 완전히 잠재운 진정한 통일군주.
한족이 아니라고 하며 선비족 또는 선비족과의 혼혈인 무장 집안 출신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들과는 달리 명군 취급을 받으며, 이때만큼은 수나라도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국토도 넓혔고 제도를 정비했으며 과거 제도의 전신인 선거제를 통해 중앙집권적으로 발전했다. 문제 때 연호가 개황(開皇, 581~600)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개황성세(開皇盛世)라고 한다.

수국공 양충(楊忠)[2]과 여씨(呂氏)[3]장남으로 북주 선제 문윤의 장인이자 부친을 이은 수국공으로서 두각을 드러냈다. 북주에서 봉직하며 선제가 580년 사망하고 외손자뻘인 어린 정제 우문윤이 즉위하게되었다. 외손자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정말 많지만 외손자가 아니다. 양견이 선제의 장인인 것은 사실이나 선제는 황후가 여럿이었다. 정제는 선제의 황후 중 하나였던 천대황후 주씨의 아들로서 양견의 딸인 천원대황후 양씨의 소생이 아니다. 황태후 양씨는 양견이 선양을 받고 황제로 등극한 뒤 졸지에 황태후에서 공주로 신분이 변하고 마는데, 이러한 케이스의 또 다른 인물로 왕망의 딸이자 전한 평제의 황후였던 황황실주 왕씨가 있다.

이 때 귀족 내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양견은 실권자로 부상, 수왕에 승상, 섭정으로서 권력을 장악했다. 결국 이듬해 정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를 건국하고 장안에 도읍한다. 그 과정에서 정적인 군벌들과 북주 근왕세력의 저항을 받았고, 이들을 진압하면서 정제를 비롯한 우문씨 황족들 다수를 주륙하였다. 이후 혈연으로 맺어진 귀족들의 저항과 반감을 극복하고자 남벌을 진행했고, 분열된 채 부패해가던 남조 국가들을 정벌해 서진 이후의 새로운 통일왕조를 건설하여 위신을 높였다.

이후 나라를 안정시켜 인구와 부 면에서 당왕조 전성기 이상이라 여겨지는 개황의 치의 전성기를 열었으며, 불교를 장려하여 송 이전까지의 중국의 불교 전성기를 이어나갔다. 개인적으로도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1.1. 중국역사에 남을 커다란 한 획, 중국을 다시 통일시키다

사실 수나라가 워낙 빨리, 그것도 성대하게 멸망했기 때문에 수나라 관련된 모든 인물에 대한 평가가 좋지 못해 수문제 또한 오랫동안 심하게 폄하당하거나 무시당했었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서양학자들이 중국사를 공부하면서 일변하게 되는데, 특히 후한의 황건적의 난 이래로 400년간이나 분열해있던 중국을 재통일시킨 점은 진시황의 중국통일과 버금가는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뭔가 중간에 잠깐 통일왕조도 있었던 것 같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어 서진이 사실상 통일된 중국을 통치한건 삼국통일 직후인 280년부터 사마염이 죽는 290년까지로, 고작 10년이다.

유럽은 로마 제국의 분열 이후 통일되지 못하고 조각조각 분열한 반면, 중국은 수문제에 의해 재통합당하면서 현재의 거대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의 때문에 수문제는 서양에서 세계사 중요 인물을 뽑으면 100위 안, 그것도 제왕들 중에서는 10위 안에 꼽힐 정도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2. 후대 왕조에 길이 영향을 끼친 정치 능력

게다가 권문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토지를 지닌 소규모 자작농을 대규모로 늘리고 '삼장제'와 '균전제'를 확립시킨 것은 지대한 업적으로 수문제가 확립한 이런 토지정책은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나라 시기까지 이어진 통일왕조들의 토지정책의 뼈대로 작용했다.

또한 사치를 줄이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세금을 줄여주었고, 어떤 해에는 아예 세금을 징수하지 않았다. 현실 국가에서 이렇게 하려면 최대한 석유나 천연가스가 왕창 나와야 가능한 일이다. 또한 지방에까지 관리를 파견하고 500가를 향으로, 100가를 리로 조직하여 통치체계를 한차원 높게 끌어올렸으며, 어느 정도 제국의 기틀이 잡히자 관료들에게도 따로 경비를 마련해 주어 관료들과 귀족들이 함부로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게다가 관료들의 부패를 끔찍히 싫어했던 탓에 관료들의 뇌물수수를 엄격히 밝히고, 뇌물과 관련이 있는 관료는 모두 참했다. 심지어는 자기가 뇌물을 보내놓고 받은 사람을 죽여버렸을 정도니 다른건 몰라도 뇌물과 사치에 한정해선 굉장히 엄격했다.

황권 강화를 위해 임용 제도를 개혁하여 구품중정제를 폐지하고 연고지 복무를 금지했으며, 과거제의 전신인 선거제를 도입했다. 물론 강력한 귀족세력을 없애지는 못했으나 이후 당대까지 관롱귀족의 견제세력인 과거 출신자들을 기용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으며, 사유화 되어가던 관직의 공공성을 고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통치가 계속되자 귀족 계층의 반발과 분노와는 다르게,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져 있고 지쳐 있던 백성들의 기쁨과 신뢰는 상상을 초월하게 높았다. 양견의 통치하에서 수나라 백성들의 삶은 급격하게 부유해졌으며 등록된 인구 또한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조세를 가볍게 했고 하사물로 수백만 단을 썼음에도 저장량이 줄지 않아서 창고가 모두 차서 넣어둘 곳이 없어서 곁채에 쌓았을 정도로 경제력이 발전했고 인구도 선양을 받은 초기에 민호가 4백만 호를 채우지 못하였으나 말년에는 890만 호를 넘었을 정도로 인구도 급 상승했다. 당장 수나라의 붕괴 과정에서 누락된 수많은 인구들은 후 측천무후-당현종 시절의 전성기 당나라에 가야 겨우 복구가 된다.

인구뿐 아니라 경제력 또한 막강해져서 훗날 당나라는 수문제 시기의 경제력을 '비단과 금을 분토처럼 여긴' 당현종 천보 초엽이 되어야 따라잡는다. 이때 쌓인 국부가 상상을 초월해 그 이전 왕조들은 꿈도 꾸지 못했던 황하-양자강을 연결시키는 대운하 건설을 처음으로 시도했던 것이 수문제 양견이었다. 다만 양견은 대운하 공사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대운하 건설로 백성들이 고통받는다는 말 때문에 곧바로 대운하 건설을 중단한다. 문제는 아들놈이 더한 스케일로 시작했다는 거지만...

이처럼 수문제는 스스로 조악한 옷을 입고, 검소한 식단을 유지하며, 모든 일을 하층민의 삶에 따라 시도하려 한 보기드문 명군이라 할 수 있었고, 이에 '고조가 통일하고 문경치세를 거쳐 한무제 시절에야 이룩한 번영을 양견은 그가 통일하고 그가 이루어냈다.'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의 먼치킨적인 정치능력을 선보였다.

그리고 그가 이룩한 정치 제도들은 후에 당나라 율법의 기초가 되어 중국통일왕조체제의 뼈대로 군림하게 된다.

1.3. 문제의 아킬레스건 관롱집단

허나 이처럼 모든 것에 하층민을 중심으로 정책을 수행하는 것은 자신들이 무시당한다 여긴 권문세족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수많은 반란이라는 형태로 되돌아왔다. 게다가 이 반란이란 것이 소규모라고 보긴 절대 어려운 것이, 수문제와 인척관계로 연결된 관롱집단의 집단적 반발+반란, 특히 대규모 지주가 경제 정책의 중심이었던 양자강 이남의 남조에서의 반발이 심각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대규모 운집만 안 했지, 반란세력의 천지였다. 간단히 생각하자면 한번 정복전쟁으로 통일을 달성한 이후, 대규모 지주들을 조지는 2차 통일전쟁을 시작했다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결국 수나라를 무너트린 것도 대규모지주 출신인 관롱집단의 이연이 건립한 이었다. 애초에 수나라의 왕족 양씨와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의 이씨 가문이 모조리 한 고을에 모여살던 세력이었다.

수문제 시절에야 워낙 수문제의 뛰어난 정치력 때문에 금새 진압당했지만, 수문제 또한 위기를 느끼고 귀족들의 관심을 돌리기위해 대규모 정복전쟁을 시작했다. 당장 고구려와 수 사이의 전쟁은 이 때부터 시작된다. 물론 시작은 고구려의 선빵이었지만, 수의 입장에서도 매치할만한 상대가 필요했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싸우러 나갔다. 하지만 이런 악순환은 아들 수양제가 폭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간다. 귀족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대규모궁전을 증축하고 대운하를 건설하고 대규모 정벌사업을 벌이는 활동이 그것이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골때리는 짓이지만 그 당시에 권문세족들은 모두 환영하고 찬성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이후 수나라가 멸망하면서 수양제가 대표격으로 욕을 먹는 것이지, 이런 대규모사업을 제왕 혼자 할 수 있을 정도로 수나라의 황권은 강력하지 못했다. 주요 세도가들의 지지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양견이 관롱집단이라는 장안 주변 귀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성장한 제왕이라는 점에서 발생하는 역학 관계로, 그들 덕에 제왕이 된 탓에 그들의 세력과 의견을 무시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양견의 정치 철학과 다르게 대규모 농장을 바탕으로 한 귀족정치를 열망했다. 따라서 말년에 점차 노골적이 되는 관롱집단과의 결별에서 양견은 숙청과 비리 척결이라는 초강수를 쓰게 되고, 이에 따른 반발과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정치에 대한 관심을 잃게 된다.

이렇게 수문제가 많은 관롱집단, 특히 6진 중에서도 무천진을 중심으로 하는 무천진 군벌은 당나라까지 영향을 미치다가 결국 당나라 고종대에야 겨우 소멸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측천무후. 다만 측천무후가 날려버린 것은 아니고, 측천무후를 핑계로 당고종이 손을 봤다는 것이 최근의 평가이다. 숙종장희빈을 핑계로 환국정치를 해서 왕권 강화한 것과 비슷한 형태였다고 보면 된다. 자세한 것은 측천무후 항목 참고.

  • 이런 점에서 수나라의 빠른 몰락은 예견된 순서일수도있다. 원래 중국사에서 이런 귀족 계층이 붕괴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남조의 귀족 계층은 양나라 말기의 후경의 난으로 총붕괴되기 전까지는 왕조 교체와 관계없이 강력한 세력을 유지했다.
    그리고 관롱집단은 필요 이상으로 엄청난 비판을 받는 원인 중 하나를 만든다. 당장 지식 계층 중 상당수가 관롱집단에 속하거나 그의 부하였기 때문이다. 원래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은 이상 속의 이야기일 뿐, 주요 귀족들만 장악할 수 있다면 나라는 삐걱거리지만 의외로 오래 가는 게 현실이다. 중국통일왕조에 비해 현저하게 하층민에 대한 장악능력이 떨어지던 로마 제국은 중국통일왕조보다 월등히 높은 귀족 포섭 능력으로 훨씬 오랜 기간을 버텼다. 다만 여기서의 '민심'이 가리키는 것은 그야말로 세금을 내며 노동으로 국부를 생산하는 평민층, 그러니까 로마로 치자면 시민들을 가리키는 것이지 로마제국의 '하층민'이라 불리는 납세의 의무도 없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사실 로마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인구 비율로 보아도 중국의 평민층에게는 비교 대상조차 될 수 없다.

  • 다만 이것은 '오로지 민심'만을 노린 정책에 대한 반박이지 정치론적으로 올바른 것은 아니다. 멸망의 징조 중 하나로 기득권층의 부 독점과 평민층의 빈곤이 늘상 꼽히는 것만 보아도 민심은 천심이라는 것은 허위가 아니다. 민심장악은 권력 유지의 충족조건이 아닌 필수조건이다. 쉽게 말해 이게 있다고 반드시 안 털리는건 아니지만 이게 없으면 반드시 개털린다. 위에 예로 들어진 로마조차도 결정적인 내부의 멸망요인이 세금을 내며 국부를 생산하는 계급의 몰락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평민 계급을 장악하고 안정시키는 것은 국가 운영에 필수이다. 윗 글의 로마제국도 시민, 프롤레타리아 계급 등을 위한 정책은 분명히 충분하게 있었다. 다만 귀족장악을 위한 정책에 비해 효과가 덜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한 계급을 완전 말살하려 들지 않고 균형을 잡아서 국가 운영을 숫자로서의 효율이 아닌 각 계층의 사람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다. ㅅㅂ 말은 쉽지. 이게 되면 그거야 말로 지상락원 마르크스 공산주의도 허풍인데 높은 계급과 낮은 계급이 공존하며 잘사는 세상이라니.. 천국 수준이다

1.4. 고구려와 전쟁

어쨌든 중국 준비하는 한편 고구려에 사신과 함께 친필을 보냈는데 그 내용에는 고구려를 수나라의 신하국으로써 조공을 하라는 것과 고구려를 수나라의 제후국으로 인정함은 물론 만약 조공을 거역할 시에 자신이 군사를 동원하여 황족 중 1명을 고구려 왕으로 앉히겠다는 내용이 있었다.

또한 만약 고구려가 조공을 거부할 시 친필 내용대로 수륙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선제공격을 한건 영양왕의 고구려군이였다.

신채호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은 서곽잡록, 대동운해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하고있다.

이 친필을 받은 당시 고구려 왕인 영양왕은 이 무례한 내용에 대해 신하들과 의논하고 있었는데 당시 고구려 대장군이었던 강이식은 칼을 뽑으며 말하되 이 오만불손한 글은 글이 아닌 칼로 회답해야 한다며 적을 치자고 주장했다.
이에 영양왕은 기뻐하며 강이식에게 군사를 주어 임유관으로 향하게 했다.


영양왕강이식의 고구려군과 말갈군사 1만명을 동원하여 요서 지역, 그러니까 임유관을 선제공격했다고 한다.

예상 밖의 고구려의 선제공격으로 뒷통수를 맞은 문제는 당혹감과 분노를 감추기 못 했고 하여금 수륙군 30만명으로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풍랑과 역병으로 큰 손해를 입고 물러났다. 재야학계에서는 강이식이 고구려군을 이끌고 원정군과 교전하여 격퇴하였다고 주장하며, 풍랑과 역병은 전투에서 대패한 중국 측의 곡필이 아닌가 의심하지만 살수 대첩을 위시하여 수, 당이 겪은 다른 대규모 패배는 기록이 되어 있는데 굳이 이 전투에서만 기록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곡필의 의심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의심을 넘어 고구려가 직접적으로 수군과 교전하여 대파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직접적인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실패하긴 했으나 고구려도 이 공격으로 상당히 긴장했음은 확실하다. 수문제에게 사과 사신을 보내고 표문에 요동 분토(糞土)에 있는 신(臣) 고원(고원은 영양왕의 이름)이라 칭했을 정도니...

1.5. 말년의 후계자 선정

양용과 양광을 비롯한 다섯아들 모두가 정실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겉으로만 봐선 큰 문제가 없었고, 황후인 문헌황후 독고씨(文獻皇后 獨孤氏)도 당대에 보기드문 여걸로써 결혼 시 '자신 이외의 여인에게서 자식을 보지않는다.'라는 약속을 받아낼 정도였으며, 통치 시에도 수문제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다만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의욕과 능력은 별개의 문제였던 것. 하지만 수문제는 이런 아내의 의견을 존중해주었다고 한다. 아마 자신과 동등한 입장에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아내가 있다는 점이 지지세력과도 싸워야했던 고독한 제왕의 마음에 크나큰 위안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또한 독고씨는 자신의 출신성분이 관롱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양견의 정치에 지지를 표했다. 양견 입장에서는 얼마나 힘이 났을까...

장남인 양용을 폐태자하고 아들인 수양제를 태자로 삼은 것도 문헌황후의 입김이었다고 한다. 솔직하고 자유분방한 양용은 첩실을 둔 것을 숨기지 않았지만 간교한 양광은 첩실을 숨겨 일처일부제 지지자였던 문헌황후가 총애해 태자로 삼게 되었다고. 허나 이 점은 수문제와 문헌황후가 힘들여 이룩한 평생의 공로를 말아먹을만한 실책이었다.

말년엔 다시 양용을 태자로 만들고, 양광을 폐위시키려하나, 양광의 부하에 의해 암살당한다. 또는 양광의 쿠데타에 놀라 충격을 받아 죽었다고도 한다. 여기에는 일화가 있는데, 양광이 남조의 황녀로 수문제의 후궁이 되었던 진씨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겁탈하려고 했다(겁탈했다는 말도 있다.). 이에 진씨가 울면서 수문제에게 하소연하자, 수문제는 그제서야 양광의 진모를 알고 "황후가 나를 망쳤구나!"(이때 이미 문헌황후는 사망) 하고 한탄하며 양용을 복위시키려 했지만 양광이 선수를 쳐서(독살 또는 시해로) 사망. 이후 진씨는 양광의 후궁이 된다.

그는 태릉에 안장되었는데 워낙 검소해서 부장품이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역대 도굴꾼들과 중화민국군벌들과 비적들이 도굴하려고 번번히 시도했으나, 현지 주민들이 별 거 없으니 그만두라고 말했다.어떻게 알지? 그래도 꿋꿋하게 할 일을 했지만 정말 별거 없어서 그만뒀다고 한다.

1.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한국의 사극 연개소문에 뜬금없이 등장한 바가 있다. 그랬던 이유가 연개소문이 젊은 시절에 중원에서 놀았다는 설정때문에 수황실이 등장하면서 나왔다. 배우 김성겸이 연기했다. 이 배우는 태조 왕건에서 아자개역을 맡았던 배우다.(...) 덕분에 수문제는 아자개 mk-2로 전락했다. 저러니 중국인들에게 욕을 무지하게 먹었나

홍콩 TVB의 무협드라마 대운하 초반에서 잠깐 등장한다. 배역은 홍콩의 원로 배우 포방, 1987 3월에 방송을 시작한 이 드라마는 수문제 말기부터 당고조 이연이 왕이 되기까지를 주요 배경으로 하는 무협드라마이자 전사극. 유명한 홍콩배우 양조위가 민담속의 인물인 염객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게 바로 위의 드라마 연개소문과 같은 배경을 깔고 있는 것이다. 규염객의 정체로 연개소문이 꼽히는 야사가 존재하고, 이것에 신채호의 갓쉰둥전을 더한 것이 저 드라마 연개소문의 설정상 배경이기 때문. 이 드라마에서의 수문제는 전형적인 암군, 혼군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양광의 모함과 계략에 넘어가 사사건건 양용을 갈군다. 수해로 인한 피해로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위해 구휼을 하였다는 이유로 양용을 죽이려고 까지 했다. 말년에 양광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되고 이를 두려워한 아들에게 끔살 당하는 장면으로 나오는데 자못 정통사극을 보는것 같기도 하다. 아서스가 생각나기도 한다.

서정원씨의 삼국 115 왕조실록에서는 양제가 문제를 죽이면서 "아버지가 문제이시니 그 아들인 저는 문제아지요."패드립을 치기도 한다. 맙소사(...). 무슨 약 하셨길래 이런 드립을 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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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당나라 때 올린 시호
  • [2] 태조(太祖) 무원황제(武元皇帝)로 추존되었다.
  • [3] 이름은 여고도(呂苦桃)로 원명황후(元明皇后)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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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0 18:4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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