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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제

last modified: 2015-11-17 21:28:46 by Contributors

수의 역대 황제
1대 고조 문황제 양견 2대 세조 명황제, 양황제[1] 양광 3대 공황제 양유

(ɔ) Yen Li-pen from
묘호 세조(世祖)
시호 명황제(明皇帝), 양제(煬帝)]
연호 대업(大業, 605년 ~ 618년 3월)
양(楊)
광(廣)
생몰기간 569년 ~ 618년 4월 11일
재위기간 604년 8월 21일 ~ 618년 4월 11일


Contents

1. 개요
1.1. 즉위 전
1.2. 즉위 후
1.3. 양제의 무리수: 고구려 원정
1.3.1. 1차 공격
1.3.2. 2차 공격과 반란의 시작
1.3.3. 3차 공격
1.4. 파멸
2. 평가
3.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隋煬帝
569~618.3.11(재위 604∼618)

의 2대 황제. 본명은 양광(楊廣)으로 수를 건국한 공처가 수문제의 차남이다. 그리고 모용희의 환생, 해릉양왕의 전생 버전 시법에서 煬은 '여자를 좋아하고 예를 멀리함(好内遠禮)', '예를 내치고 중신을 멀리함(去禮遠衆)', '여자를 좋아하고 정사를 위태롭게 함(好内怠政)', '예를 내치고 올바름을 멀리함(去禮遠正)', '하늘을 거스르고 백성을 해침(逆天虐民)'이란 뜻을 가진 악시(惡諡)다. 여기서 하늘을 거슬렀다는 것은 황제가 되기 위해 아버지와 형제를 해치는 패륜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그의 시호처럼 아버지 수문제(양견)가 어렵게 통일시킨 수(隋)나라를 멸망시키는데(煬) 일조한 황제(帝)다.

1.1. 즉위 전

연기와 쇼맨쉽이 매우 능한 인물로, 태자인 양용(楊勇)은 태자비가 죽었는데도 방종과 사치에 놀아나서 가정을 돌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어머니 문헌황후 독고씨(文獻皇后 獨孤氏)[2]의 눈밖에 났다. 이에 비해 차남이었던 진왕(晉王) 양광은 청렴하게 살고, 의관도 누추하게 입었으며 여자를 탐하지 않아 어머니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모후로부터 차기 대권주자로 인정받았다. 양광은 계략을 써 형인 태자 용을 나쁜 아들의 이미지로 각인시킨다.

특히 형 양용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안 양광은 어머니 독고황후가 태자를 찾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궁녀를 태자집에 보내 술 마시게 하는 등의 계획적으로 양용이 사치스럽다는 이미지를 뒤집어 씌었다. 결국 이를 본 어머니가 양용은 태자자리에 있기엔 나라가 위태로울거라 판단, 양광과 결탁하여 태자의 자리에 쫓아내니, 서기 600년 양광이 대신 태자의 자리에 오른다.

태자 자리에서 쫓겨난 용은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광에 의해 막히자 궁궐 정원의 나무 위에 올라가 담 너머에 있는 문제에게 큰 소리로 억울하다고 울부짖었으나, 안습하게도 이 광경을 본 아버지 수문제는 오히려 용 저놈이 광 말대로 이젠 완전히 미쳤구나라고 확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양광은 계략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문제가 중원을 통일할 때 직접 큰 공을 세울 만큼 군사적인 재능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598년 2월, 영양왕고구려 군사들이 의 영토인 요서지방을 공격하자, 양광의 대군이 전멸해서 부황 양견에게 크게 질책받았다. 양견은 두 자식들인 양광과 한왕 양량에게 자결을 하라 했으나, 모후인 독고황후가 말렸다고 한다.

한편, 양제가 태자에 책봉될시, 지진이 일어나고 광풍이 불어 세간에는 양제가 황제에 오르면 분명 수나라는 망하고 말 것이라고 유언비어가 나돈다. 유언비어 아닌 팩트

2년 후, 어머니 독고황후가 죽자 피눈물까지 흘리며 부황과 주변을 감동시켰으나, 처소에 돌아가자마자 어머니의 죽음을 아주 기뻐하면서 술과 고기를 즐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양제의 이중인격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데 이렇게 비밀스럽게 한 일을 과연 누가 목격하고 적었을까... 어?

즉 깐깐하고 아버지를 휘어잡던 어머니에게 잘 보이기위해 자신이 준비된 황제라는 점을 보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양제는 이제 그 어머니가 죽자 큰 짐 덜었다는 심정에서 그런 행동을 보인 것이다.

그 후 양제는 대놓고 제위를 노렸다. 그 당시 부황인 문제는 일생을 공처가로 살아왔지만 막상 황후가 죽자 큰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그런 문제에게 예전에 자신이 멸망시킨 (陳)의 황족인 젊고 싱싱한 선화부인 진씨가 눈에 띄게 되고 문제는 그녀를 가까이 하다가 쎄, 쎆쓰!!! 기력이 쇠해 쓰러지고 만다. 문제는 그녀를 양제 또한 노리고 있었던 것.

양제가 자신의 후궁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문제는 아들에게 모종의 조치를 취하려던 중, 행동이 빠른 양제는 한발 앞서 심복들과 짜고 그날 밤에 장안 인수궁 대보전에서 아버지를 시해했다. 뒤이어, 형인 양용에게 조작된 유언장을 보내어 자결하라 일렀으나 겁을 먹고 자결하지 않자, 자신의 근위장 우문지급을 보내 죽여버렸다. 뒤이어 양광은 그토록 사모하던 선화부인 진씨를 강제로 범하였다.

《수서》에서 부황 시해의 근거로 삼는 사항은 문제가 죽을 때 자리를 지켰다는 점이다. 그런데 같은《수서》임에도 본기와 열전의 내용이 서로 달라서, 곳에 따라서는, 수문제가 죽을때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마찬가지로 선화부인 진씨에 대한 음행에서도 서로 다른 기술이 존재한다. 이제는 이중인격에 패륜아다. 왕위를 계승중입니다. 아버지

1.2. 즉위 후

양제는 즉위하자마자 만리장성을 보수했고, 남북조시대 등의 분열시대로 인해 남북간의 교류가 원활하지 않다고 판단, 대운하를 다시 건설하게 된다. 대운하는 사실 부황 문제 때부터 시작되었으나 국고의 상당한 손실을 염려해 중단했었다. 결국 대운하의 스케일이 커진 것은 바로 양제 때문이다. 게다가 수도인 장안을 버려두고 낙양에 제2의 수도를 건설하여 날마다 백성들을 강제동원하고 진귀한 화초와 나무, 희귀동물들을 수집하는데 날마다 수만금을 뿌리니 영락없는 진시황의 재림이었다. 과연 연호부터 대업(大業)(...).

거기다가 양제는 대운하를 건설할때, 40여개의 행궁을 지었으며, 운하 옆에는 대로를 건설해서 그 옆에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심었다. 황제 폐하의 자연 사랑... 대운하 건설에는 동원된 연인원만 자그마치 1억 5천만명이었고, 심지어는 운하에서 얕은 지대가 발견되자, 양제는 관리 책임자와 인부 5만 명을 강가에 생매장하는 극악무도함을 보였다. 얼마나 백성들을 부려먹었는지 물 속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물 밖으로 나와 몸을 말릴 시간이 없어 살이 썩어 구더기가 들끓었다고 한다.

그리고 길이 2백 척에 높이 45척/4층이나 되는 대형 용주(大龍舟)를 타고, 거기에 황후와 후궁, 대소신료, 승려, 도사 등은 그 뒤를 잇는 화려한 배들에 탔는데 그 길이가 무려 2백여 리에 달했다. 또한, 운하 5백 리 이내에서 사는 백성들은 양제에게 음식을 갖다 바쳐야 했는데, 배가 떠날 때가 되면, 이 음식들을 그냥 구덩이에 묻어버리고 떠났다. 이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가산을 탕진하였다. 배는 백성들이 강 양편 언덕에서 끌고 이동했는데, 그 인부들이 모두해서 8만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dragonship.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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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대용주(大龍舟)의 모습. 경주용의 소형 용주하고는 비교를 불허하는 엄청난 정크선이다.

그외에도 북방에도 유람을 떠나 태행산에 굴을 뚫었고, 근처 백성들을 동원하여 굴을 뚫고 대로를 건설하였다. 백만여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20일 만에 장성을 쌓기도 하였다.

주변상황이 이렇게 막장으로 치닫게 되자 백성들이 자기 손이나 팔을 잘라서 노역을 면하고자 하였던 적도 있었다. 흔히 말하는 복수복족(福手福足)이라는 말이 여기서 파생된 말이다. 이쯤되면 국가 막장 테크.

또한, 양제는 건축가에게 이동식 궁전을 지으라 명했는데, 이 궁전을 관풍행전(觀風行殿)이라 칭했다. 이 궁전은 언제든지 조립과 해체가 가능했으며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대 중국의 트랜스포머 궁전

1.3. 양제의 무리수: 고구려 원정

하지만 양제의 실책 중에서도 최악은 바로 고구려 원정이었다. 양제는 대외적으로도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이즈음 돌궐 원정, 서역 토욕혼(土谷渾)을 정벌하여 각국의 왕이 자신에게 하게 하는 등 대부분의 원정은 성공했다. 사실 여기에만 그쳤으면 양제는 개인의 학정에도 불구하고 대압을 이룬 통일왕조의 군주라는 식으로 포장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장 한무제만 해도... 그런데 오직 동북아시아 북방의 맹주인 고구려만이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입조 및 조공을 거부하고 있었다[3] .

에초에 양광의 아버지였던 문제가 고구려에 서한을 보내 조공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거부했고 오히려 수나라 요서지역을 선제공격했을 뿐만아니라 문제가 수륙군 30만명을 동원해서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대장군 강이식영양왕의 이복동생 고건무에게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는데 이를 숨겼다는 의견도 있다. 수문제 항목 참조. 이 여파로 국력이 상당부분 손실되어 한동안 공격이 중지된 상태였기에 고구려는 기세등등 했었던 터라 이러한 요구를 들어줄리가 없었다.

한편 양광은 돌궐에 방문했을때 우연히 고구려 사신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사신에게 고구려왕이 입조함은 물론 조공도 요구했으며 이를 어길시 고구려를 정벌하겠다고 위협한다.

물론 그 사신으로부터 내용을 들은 고구려의 영양왕은 이러한 요구가 부당하다 생각하여 거절하였고 양광은 수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과 입조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영양왕은 전혀 응하지 않았다.

이에 양광은 아버지 양견이 축적한 모든 부를 탕진해서 고구려를 공격하고자 했다. 아버지 문제가 고구려를 공격한 598년 이후 14년만이다. 그것도 1번이 아닌 3차에 걸친 대원정이었다. 물론 모두 실패한...

1.3.1. 1차 공격

612년 정월 양제는 113만 3800명을 이끌고 대대적인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출발만 해도 40일이 걸렸으며 그 행렬이 자그마치 1천여리(400km)가 되었다. 좌장군 우문술의 군사 45 만명, 우장군 우중문이 이끄는 군사 45 만명의 대규모 출정이었다. 그리고 양제 자신이 이끄는 군사 수만해도 26 만명, 행렬이 200(73km)여리에 달했다. 이 수치는 제1차 세계대전 발생하기 전까지 세계 역사에서 가장 많은 군사 수를 동원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대한민국 인구 기준으로 보면 대략 1000만 명 정도의 외국 전투병력이 대한민국을 침략하는 것과 마찬가지. 지쟈스

그들의 목적은 고구려의 수도 장안성이었으며 이를 위해 먼저 1차적으로 영양왕이 머물고 있는 부수도인 평양성을 함락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해 3월 고구려 국경지역인 요하에 도착하여 강을 건널 부교를 만들고 고구려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부교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중국제라 그런지 강을 건너기엔 짧아 수나라 군사들이 건너지 못해 우왕좌왕하자 고구려군은 이 틈을 이용해서 화살세례를 퍼부었다. 결국 강을 건너기에 앞서 많은 수나라 군사가 죽어야 했다. 양광은 부교건설 책임자인 우문개를 질타했고 군사를 재정비한 다음 부교를 다시 만들어 도하를 시도했고 이번에는 도하에 성공하여 고구려군은 수많은 수나라 군사 앞에 무너져 1만 군사를 잃고 요동성으로 대피한다.

도하에 성공한 양광은 요동성을 겹겹이 포위했고 100만 군사면 함락은 시간문제라고 판단했지만 요동성은 천혜의 요새였다. 높이만 해도 30m 게다가 주변의 산과 더불어 길이가 3.5km나 되었다. 수나라 군사는 성벽을 올라가려 시도하였지만 사다리가 요동성벽보다 낮아 올라갈 수 없었고 후퇴한 뒤 다시 재정비하여 공격했으나 고구려군이 돌과 화살세례를 퍼부으며 끈질기게 저항하여 올라가지도 못하고 다시 후퇴한다. 이번엔 성문과 성벽 등을 파괴하려 시도했지만 이것도 실패한다.

그것은 바로 고구려군의 성은 중국의 돌성과는 전혀 다른, 흙으로 만든 토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 시대 토성은 중국, 석성은 한반도와 만주에 분포한다. 황하지대의 황토는 판축법이라고 흙을 틀 안에서 때리고 다져서 벽을 올리는데 웬만한 벽돌보다 튼튼하게 뭉친다. 게다가 이 흙은 벽돌로 구우면 경도도 높고 튼튼해서 중국에서 벽돌건축이 발전하는 원인이 된다. 반면 한반도에서는 질좋은 화강암을 바탕으로 하는 석조기초 공법이 발전한다. 만주에서도 크게 예외는 아니어서 고구려 산성유적은 높고 튼실한 화강암 성벽으로 이루어져서 지금까지도 새하얀 성벽을 뽐내고 있다. 오죽하면 중국의 전탑(벽돌탑), 한국의 석탑, 일본의 목탑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돌을 쌓으면 끝인 중국의 성과는 달리 고구려의 토성은 돌을 쌓은 다음 흙으로 애워 감싸서 더욱 단단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으니 중국의 성을 기준으로 만든 수나라의 무기로는 당연히 부술 수 없었다. 실지로 남아있는 유적을 보건데 판축토성과 벽돌성에 익숙하고 정말 제대로된 청야전술을 겪어보지 못한 수나라군대가 공성전에서 헤메는 와중에 다 된 공격을 말아먹는 상황, 즉 후술되는 명령권 문제가 더 큰 문제였을 것이다. 게다가 수양제가 자신의 명령 없이는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는 군령을 내렸기 때문에 공격할 기회를 노려도 수양제에게 먼저 보고해야 했고, 따라서 군사를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없어 공격해도 고구려군이 이를 먼저 눈치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요동성에서 투항 의사를 내비친 한 고구려인이 지금 요동성은 재정비를 못 했으니 지금 공격하면 함락시킬 수 있다고 했지만 또 다시 황제에게 보고하러 가서 시간적 손실이 났다. 이러한 패턴은 번번이 요동성 사람들에게 재정비할 시간을 주어, 공격해도 이미 요동성은 재정비가 끝난 상황이었다. 배반 의사를 내비친 고구려인은 끝내 요동성 영주에게 드러나 죽었다.

이에 우중문은 요동성 함락이 쉽지 않다고 판단하여 양광에게 가까운 육합성을 먼저 공격하자고 제의했다. 양광이 이를 허락하자, 요동성을 공격하여 그 성이 고구려군의 눈을 돌리게 한 사이 일부 군사를 이끌고 육합성 공격을 했지만 이 육합성도 고구려군의 철벽수비에 밀려 함락시킬 수 없었다..

한편 수나라 수군의 장수 내호아는 수군 10만 명을 평양성 인근에 상륙시킨 후 부수도를 직접 공격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이는 양광의 명령을 거부한 거나 다름없었다. 양광은 출정 전의 각 장수들에게 육군과 수군이 협공으로 평양성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었는데, 내호아는 전공에 집착한 나머지 단독으로 평양성을 공격하려 했던 것이다. 끝내 이러한 집착은 패배로 이어져 고구려 영양왕의 동생 건무에게 수나라 수군의 절반 이상이 궤멸해 내호아는 급히 퇴각해야 했다.

수나라 육군의 상황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요동성을 포위한 지 벌써 6개월이 지났지만 100만 명의 수나라 군사 중 단 1명의 군사도 이 성벽에 오르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수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 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30만의 별동군을 편성해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 별동군은 그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양제는 이 군사들에게 100일치 식량을 한꺼번에 줘버렸고 무거운 짐 때문에 군사들은 갈 때마다 식량을 파묻었다. 결과적으로 굶주려 싸울 힘이 없는 것은 당연했고, 이를 눈치챈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진영에 가서 거짓 항복을 청하며 동시에 수나라 군사들의 동태를 살핀다. 우중문은 을지문덕이나 고구려왕이 올 때에는 반드시 잡으라는 양제의 기밀명령에 따라 을지문덕을 잡으려 했으나, 우문술과 유사룡 등 주변 장수들이 항복한 장수를 잡아들이면 저들은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라며 반대하여 결국 을지문덕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나중에 염탐하기 위한 거짓 항복인 것을 알아챈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추격하여 살수를 건넌 별동군이 평양성을 포위했지만 이미 싸울 힘이 없는 수나라 군사들의 포위는 의미가 없어 결국 퇴각을 결정하고 다시 살수를 건넜다. 이 때 을지문덕이 미리 살수에 쌓아두었던 뗏목을 터뜨렸고 수나라 30만 별동군은 살수 익스프레스. 다만 수공으로 수나라 군대를 괴멸시켰다는 주장은 약간 신빙성이 없다. 살수대첩 항목 참조. 결국 수나라 30만 5000명 중 살아 돌아간 군사는 2,700명이었으며, 이것이 을지문덕살수대첩이다. 이 소식을 듣은 양광은 크게 분노하여 우중문과 우문술을 쇠사슬로 묶어 그해 10월 퇴각시킨다. 결과적으로 양제의 1차 침입은 처참한 패배로 막을 내리게 된다.

1.3.2. 2차 공격과 반란의 시작

그러나 양광은 고구려 원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613년 3월 양제는 35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다시 공격했다. 지난번의 패배를 되새긴 양광은 이번에는 별동군을 모아 공격을 하고자 하였다. 도하를 건넌 수나라 군사는 요동성보다 토성을 높게 쌓아 화살세례를 퍼부었다. 요동성의 고구려 군사는 이러한 수나라의 화살 세례에 쉽사리 대항을 하지 못했고 양광은 효력이 있다고 판단해 계속적으로 화살로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수나라 측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양제의 폭정을 지켜본 수나라의 예부상서 양현감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양광과 함께 이 소식을 들은 양현감의 친구 곡사정은 이번 반란에 자신에게 미칠 일을 두려워하여 고구려에 투항한다.

반란에 당황한 양광은 우왕좌왕하다가 곡사정이 고구려에 투항을 하자 급히 퇴각을 결정한다. 또한 고구려 군사가 눈치 채지 못하게 식량과 무기를 모두 버리고 퇴각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고구려군이 뒤를 추격하여 수나라 군사 수천명이 운명을 달리해야 했다. 결국 양제의 2차 침입도 제대로 된 공격없이 패배의 쓴맛을 맛 본채 막을 내리게 된다.

1.3.3. 3차 공격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한 양제는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많은 신료대신의 반대에 부딪혀야했다. 양현감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반란사건이 터지고 있으며 국가의 부를 모두 탕진해 우선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집이 센 양광은 고구려 공격에 반대하는 자는 모두 죽이겠다는 엄포을 내린다.

결국 614년 3월 다시 고구려 공격에 나선다. 그러나 수나라 군사들은 계속된 전쟁의 패배로 인해 싸울 의지가 젼혀 없었으며 고구려 공격을 개시하기도 전에 탈영병이 발생했고 우왕좌왕하는 수나라 군사들 앞에서도 양광은 무리하게 고구려 공격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고구려 측에서 사신을 보냈다. 항복을 할 것이니 군사들을 철수시키라는 것이다. 또한 양제의 2차칩입때 투항했던 곡사정을 묶어 같이 보내 항복할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나라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눈치채고 있었다. 따라서 수나라 군사상황에도 별반 다를게 없다고 판단을 했고 양제의 자존심을 추켜세워 수나라 군사들을 철수시키려 했던 것이다. 양광은 대소신료의 주장에 못이기는 척하고 군사를 철수시킨다.

1.4. 파멸

양제는 수나라의 수도를 세 곳으로 나누었다. 원래 수도는 장안이었는데 서도(西都)라고 칭하고 동도(東都)인 낙양을 다시 건설했으며 장강 이남의 양주에 강도(江都)를 건설했다. 전국의 거센 반란에도 불구하고 만약 양제가 남아있는 군대를 끌어모으고 반란군의 공격에 맞서 제대로 된 방어전략을 펼쳤다면 상황을 반전시킬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양제는 별다른 대응없이 거의 포기하는 심정으로 장강 이남의 강도로 황족들과 피난을 가 거기서 짱박혀 주색잡기로 소일했다. 강도에는 자신과 손자 연왕(燕王) 양담(楊倓), 장안은 손자들인 대왕(代王) 양유(楊侑), 낙양은 월왕(越王) 양통(楊侗)에게 맡겼다. 이 조치는 수도 세 곳에 자신과 손자 셋으로 하여금 각각 웅거함으로써 전화가 거세져 수나라가 통일 제국은 유지하지 못하더라도 최소 한 곳은 남아 있기를 바랬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양유와 양통 둘 다 어린애라 잘 지킬 리가 없었고 장안에는 양제의 이종사촌형인 이연과 훗날 당태종이 되는 이연의 아들 이세민 부자가 입성하고 낙양에는 관료였던 세충이 입성해 버렸다. 이연 부자와 왕세충은 각각 양유와 양통을 옹립했지만 둘 다 허수아비였고 실권은 그들이 쥐게 되었다.

심각한 점은 이렇게 기존 수도인 장안은 그냥 방치상태가 되었고 양제가 피난간 곳에 정부요인들이 같이 가지도 않았으므로 사실상 중앙정부는 활동을 정지했고 덕분에 반란은 120여건이나 일어날 수 있었다. 그래도 양제는 정신을 못차리다가 평소 양제의 처우에 불만을 품은 근위대장 우문화급, 우문지급 형제(고구려 침공의 지휘관 우문술의 아들들)에 의해 폭동이 일어나고 처럼 질질 끌려다니며 목이 졸려 죽었다. 우문화급의 난을 양제가 가장 아끼던 장소 양담은 사전에 탐지해 양제에 상주하려 했으나, 궁궐을 담당하는 자에 가로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죽기 직전 그래도 황제라고 나름의 위엄을 선보였는데 반란군이 들어닥치자 "짐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라고 묻자 반란군 장수들이 말하길 "당신은 허구한 날 전쟁이나 일으키고 주색잡기에 소일했으며 모든 천하의 백성이 당신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자 양제는 갑자기 "그렇다. 짐은 정말 백성들에게 잘못했다. 그러나 짐과 함께 부귀를 누린 너희들은 죄가 없다. 그러니 주동자가 누구냐?"라는 양제의 질문에 반란군은 "세상 사람들은 당신 같은 우매한 폭군을 뼈에 사무치게 증오하고 있는데, 어찌 주동자가 한 사람뿐이겠소!"라는 간지폭풍 명언을 날리며 양제를 누각에 끌어내린후 우문화급의 사자가 달려와 "이런 우매한 군주는 내게 데려올 필요도 없으니 즉시 그를 해치워라."고 명을 내려 죽이려고 칼을 빼든다. 그러자 양제는 이제 더 이상 살 도리가 없음을 깨닫고 "움직이지 마라. 짐이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자진하겠다!"라고 말했으나 반란군은 "독약이 칼보다 편하지."라고 하면서 그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양제는 "어쨌든 짐이 천자였으니 짐의 시신만은 건드리지 말아다오."라고 울면서 말했다. 결국 내실로 끌고 들어가 목졸라 죽였다. 양제의 시신은 오공대 인근에 묻혔다가 양제의 이종사촌 당고조 이연(양광과 이연의 어머니는 친자매 사이)에 의해 뇌당으로 이장되었다. 나중에 당태종 이세민은 양제의 황후였던 양민황후 소씨가 사망하자 그녀의 유해를 강도로 보내 수양제와 합장하도록 명한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양제묘 동쪽의 또 다른 묘의 묘주는 소황후일 것으로 추측한다.

2. 평가

끝내 는 3대만에 망해 당에 패권을 물려주었고, 양제는 중국인들도 폭군으로 묘사한다. 양제가 망국의 황제여서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 행적을 보면 전혀 동정의 여지가 없다. 양제의 양(煬)은 시법에 따르면 '방탕하고 악랄하며 여색을 좋아하고 예를 무시했으며 하늘의 뜻에 거역하고 백성을 착취했다'는 뜻이다. 뒷날 당의 사람들이 비웃는 뜻으로 올린 시호가 그대로 굳었다. 그리고 나중에 양(煬)이란 시호는 양제가 환생한 금나라 해릉양왕이 또다시 받았다.이쪽은 중국 역사상에서 가장 유명한 인처모에 황제 사실 이전에 후주 진숙보가 장성양공이라는 무시무시한 시호를 받은 적 있다. 그러나 양제의 공식 묘호시호는 세조 명황제(世祖 明皇帝)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진숙보를 공격할 때 총사령관이 바로 본인이었다. 잡힌 사람이나, 잡은 사람이나 똑같은 시호를 받았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그나마 양제가 진행한 대규모 건설행위 가운데 유일하게, 대운하는 이후 당대에도 이어지면서 중국 전역의 영토연결에 큰 도움을 줬다. 사실 대운하 건설은 언젠가는 반드시 할 일이었지만 양제가 너무 무리하게 다그치다보니 그랬다.

그러나 여기서 당을 세운 이연이 속했던 호족세력인 관롱집단(關隴集團)이 웃기다. 이 집단은 북위의 초기 수도였던 평성의 방위를 위해, 그 이북에 세운 군사기지인 6진의 하나인 무천진 일대에서 세력을 만들어 귀족화한 호족 가문을 가리키는 용어다. 그들 중 양견이 북주 황실의 외척을 하면서 수를 개국하였고, 당을 건국하는 이씨 가문 또한 수 황실과 인척관계를 맺었다. 양제의 폭주는 이 관롱집단과 수 황실 간의 뿌리깊은 갈등에서 왔다.

제국의 창시자 수문제는 소규모 자작농을 대규모로 육성하여 황실이 그들을 직접 통치해 국가의 기본정책을 삼으려 했으나, 주요 권세가들은 소수의 귀족들이 대규모 농장을 소유하며 황실은 이 귀족들을 통해 국가를 간접적으로 통치할 것을 국가에 요구하면서 반발한다. 이에 따라 외척관계로 밀접한 사이였던 황실과 관롱집단이 중심인 주요 귀족들 사이에 긴장감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이런 긴장감은 상호간의 갈등으로 발전해 문제는 귀족층의 대규모 숙청이라는 극약처방을 단행했다. 당연히 귀족들이 눈뜨고 앉아서 당할 리는 없었고, 대규모 반란을 도모하나 문제가 진압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귀족들의 황실에 건 반발감과 적대감이 쉽사리 풀릴 리는 없었고, 이런 귀족집단의 분위기에 위기의식을 느낀 수 황실은 귀족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러 문제 말기부터 대규모 궁정축조와 대외정벌사업을 시작한 혼란스러운 국면에서 양제는 2대 황제로 등극했다.

이런 상황에서 양제도 희대의 정치력 먼치킨이었던 아버지 문제가 억누르는데 실패한 귀족들의 반발감을 억누를 마땅한 방도란 없었다. 따라서 양제는 귀족들의 관심을 분산시키러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지속적으로 국가적인 사업을 일으켰으나, 이것의 규모가 지나칠 만큼 커졌다. 사실 대운하는 문제가 먼저 계획하고 시작했던 사업이었다. 허나 백성들에게 폐해에 곧바로 중단시켰는데, 양제가 이 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국가 막장 테크 하이웨이를 충실히 탔다.

이런 사업들은 양제의 독단으로 시작할 만한 것들이 아니었으니 문제였다. 즉 당을 세운 이연이 속해있는 관롱집단을 비롯한 거대 세족들이 지지를 표해야만 시작하고 지속할 정책들이 양제의 삽질이었다. 애초에 수황실의 황권은 그 만큼까지 세지 않았고, 만약 황제가 독단으로 저런 일들을 펼 권력이 있었다면 이런 대규모 사업은 안 했을 것이다. 보통 중국황실의 권력은 흔히 무소불위로 그리나 그것은 , , 아무리 빨라도 대에나 가능했다. , 시절에는 황족이 중요 안건을 처리하려면 어느 만큼 주요 귀족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거듭 말하지만 수 황실의 이런 삽질들 자체가 귀족계급과의 갈등에서 나온 봉합책이었다. 수 황실의 권력이 양제가 독단을 펼 만큼의 절대황권이었다면, 문제가 귀족세력을 몰살시켜 끝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따라서 수를 무너트린 책임은 당을 건국한 세력에게도 있었지만, 역사는 승자의 것이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이런 사항은 살그머니 축소, 생략하는 점이 승자의 특권이지?(후대는 이러한 부분까지 밝혀냈지만.)

그러나 이런 수의 몰락을 보며 자신들도 뜨끔했는지, 당 초기에는 귀족들이 삼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당이 자리를 잡는데 큰 공헌을 한다. 그래봐야 당태종 말년부터 슬슬 고개를 쳐들다가 측천무후 시절 제대로 갈렸다.

3. 매체에서의 등장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김갑수 씨가 열연을 펼쳐 연개소문페이크 주인공으로 밀쳤다.[ 하도 양제의 존재감이 크니까 네티즌들이 이 드라마를 아예 양제소문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리고 극중에서 묘사한 양제의 최후로 역시 빼도 박도 못하는 연기생활 사망전대 리스트에 당당히 올라갔다. 사료에 따르면 양제는 음주로 소위 술배가 나온 배불뚝이라서 마른 체형의 김갑수 씨는 미스캐스팅 같았어도 간지폭풍을 선보였다. 실제로도 양제 역을 맡으신 김갑수 씨의 열연 덕분에 연개소문 본다는 시청자도 많았다. 심지어 양제가 죽자 그 뒤로 드라마를 안 보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자기 나라 황제를 우스꽝스럽게 비하했다며 매우 깐다.잠깐만, 폭군이라며? 까도 내 손으로 까겠다는 심리인가? 차라리 자학을 할찌언정 니들한테 놀림감을 당하진 않겠어

그런데 연산군이 아무리 둘도 없는 폭군이어도 우리 나라도 아닌 일본에서 연산군을 아예 기초적인 품위마저 지켜주지 않으며 개그 캐릭터로 전락시키면 나쁜 소리가 나올 것이다. 연개소문 드라마에서 수양제는 심각한 개그 캐릭터였다. 참고로 김갑수 씨는 드라마에서 퇴장하면서 자기가 너무 튀었다고 아쉬워했다.

미나미가 더빙판에 그의 웃음을 흉내낸 장면이 나왔다. 비교해보면 알게 된다.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에서는 문어로 등장한다. 가짜 황제가 장안에 감금시켰는데, 쇼토쿠 태자오노노 이모코가 활약해 구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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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당나라 때 올린 시호
  • [2] 이름은 독고가라(獨孤伽羅)
  • [3] 사실 이것은 양제뿐만 아니라 문제에게도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고구려가 조공을 거부한다면 이것은 다른 속국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고구려와 같은 형태로 나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어떤 수를 쓰더라도 고구려을 제압하는 게 필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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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1-17 21:2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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