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순종

Contents

1. 純種
2. 順從
3. 順宗
3.1. 고려 순종 왕훈
3.1.1. 소개
3.1.2. 가족관계
3.2. 당나라의 10대 황제
4. 純宗
4.1. 조선 순조의 본래 묘호
4.2. 대한제국 융희 이척
4.2.1. 소개
4.2.2. 건강 문제
4.2.3. 즉위
4.2.4. 대한제국의 해는 이미 저물고
4.2.5. 대한제국이 망한 후
4.2.6. 독서광
4.2.7. 기타
4.2.8.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純種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종으로 잡종의 반대말이다. 옛날부터 세계 왕실에서는 대체적으로 근친상간을 했는데 그것은 왕실의 순종 혈통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모 아버지가 순종 혈통을 지닌 자손을 만들겠다고 미친짓을 하다가 잡히기도 했다.

2. 順從

고분고분 따름, 순순히 따름.

3. 順宗

3.1. 고려 순종 왕훈

고려의 역대 국왕
11대 문종 왕휘 12대 순종 왕훈 13대 선종 왕운

묘호 순종(順宗)
시호 순종영명정헌선혜대왕
(順宗英明靖憲宣惠大王)
왕(王)
훈(勳)
의공(義恭)
배우자 정의왕후(貞懿王后), 선희왕후(宣禧王后)
아버지 왕휘(王徽)
어머니 인예왕후(仁睿王后)
생몰년도 음력 1046년 12월 9일 ~ 1083년 10월 23일
양력 1046년 12월 28일 ~ 1083년 12월 5일 (37세)
재위기간 음력 1083년 7월 18일 ~ 1083년 10월 23일
양력 1083년 9월 2일 ~ 1083년 12월 5일(3개월 3일)
고려의 제12대 임금.

3.1.1. 소개

문종의 장남. 언제 태자가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나 그가 태어나던 해에 아버지 문종이 왕위에 오른 걸로 봐서 오랜 기간 동안 태자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태자 시절부터 몸이 약했던지라 이래저래 부왕과 신하들의 걱정을 많이 산 듯. 아니나다를까 문종이 죽자 너무 슬퍼한 것이 탈이 되어 안 그래도 원래 병약한 몸이 더 악화되어 4개월만에 결국 부왕의 뒤를 따라간다. 딱 조선의 인종 필이다. 둘 다 12대다

별다른 업적없이 죽어버려 그 동생 국원공 왕운(선종)이 엉겁결에 왕에 오른다. 자식에게 물려준 것도 아니고 자식에 대한 기록도 없는 것으로 봐서 병약한 몸 때문에 후사도 낳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에 남아있는 기록도 엄청 짧다.

  • 8월
    • 갑신일. 문종을 경루에서 장사지냈다.
    • 경자일. 왕이 신봉루로 가서 사면령을 선포했다.

  • 겨울 10월
    • 초하루 계유일. 회경전에서 사흘동안 도량을 열고 승려 3만 명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 갑신일. 왕이 자신의 동생인 왕운을 수태사 겸 정서령으로 올려주고 식실봉 1천호를 덧붙여주라고 지시했다.
      ○ 왕은 젊어서 지병이 있었는데 선왕의 장례를 치르면서 너무 애통해한 나머지 병이 더욱 심해졌다.(王小有疾 居廬哀毁 疾益篤)

  • 을미일. 친동생 국원공 왕운으로 하여금 국사를 임시로 맡아보게 하고서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겼다.||

이게 다다.

3.1.2. 가족관계

비로는 정의왕후 왕씨, 선희왕후 김씨와 장경궁주 이씨가 있다.

정의왕후 왕씨는 순종과 사촌지간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성임에도 왕씨로 기록되어있다. 이유는 불분명하다.

선희왕후 김씨는 경주 출신 김양검의 딸이다. 순종의 사랑을 받았으나 어찌된 일인지 문종이 심하게 그녀를 미워하여 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폐출되었다. 나중에 인종의 명에 의해 복원되고 순종 사당에 모셔졌다.

장경궁주 이씨는 인주 출신 이호의 딸이다. 이호는 이자겸의 아버지기도 하니 이자겸과 순종은 처남 매부지간이 되는셈. 순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 왕비가 되었다. 하지만 곧 순종이 죽는 바람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이후 외궁에 거처하였고 장경궁주에 봉해졌으나 자신의 노비와 간통하다가 발각되어 궁주의 자리에서 쫓겨났으며 복원되지 않았다. 이 때 이자겸도 부정한 왕비의 오라비란 이유로 잠시 축출되기도 했다.

3.2. 당나라의 10대 황제

당의 역대 황제
9대 덕종 소황제 이괄 10대 순종 안황제 이송(李誦) 11대 헌종 장황제 이순

묘호 순종(順宗)
시호 지덕홍도대성대안효황제(至德弘道大聖大安孝皇帝)
연호 영정(永貞, 805년 5월 ~ 805년 12월)
이(李)
송(誦)
생몰기간 761년 2월 21일 ~ 806년 2월 21일
재위기간 805년 2월 28일 ~ 805년 8월 5일


당덕종의 장남.

시호는 지덕홍도대성대안효황제(至德弘道大聖大安孝皇帝). 줄여서 안황제(安皇帝).

순종은 비록 몸이 병약했고 묘호도 '순종'이지만 결코 그 묘호만큼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순종은 당덕종 및 조정대신들이 봉천에서 반군에게 포위당해 왕조가 멸망의 몰렸을때 혼감과 함께 직접 군을 진두지휘해 성벽 위까지 올라왔던 반군을 싸워 물리친 전적이 있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정치 투쟁 속에서 끝끝내 황태자 지위를 유지하고 결국 황제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당 덕종 말년, 동진해오는 토번군을 막아낸 이성, 마수, 혼감의 활약과 토번의 속국이였던 남조를 당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위고의 공으로 남조, 위구르 제국, 아바스 왕조를 끌어들여 토번을 대포위해 억제한다는 이필의 대전략은 성공한다. 이를 통해 외적의 위협이 감소한 당은 내적 문제 해결에 온 힘을 기울일 기회를 얻었다.

순종은 즉위 후 이를 위해 '영정혁신' 이라는 개혁을 시도한다. 왕숙문, 유종원, 위집의 등의 인재를 기용하여 환관으로 대표되는 궁정세력을 억제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금군의 지휘권을 박탈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순종 자신이 중풍에 걸려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아 이들에게 충분한 힘을 실어주지 못했고 왕숙문과 위집의가 서로 파당을 형성해 대립하면서 결국 환관 세력들에게 밀려버리고 만다.

이에 구문진을 필두로 한 환관 세력들은 결코 만만한 황제가 아닌 순종을 몰아내고, 상대적으로 젊고 만만하다고 여긴 황태자 이순을 황제에 올릴 생각을 했고, 여기에 순종이 기용한 신진인사들에게 불만을 가진 조정 대신들, 당에 순응하던 순지절도사들이 동조하면서 결국 순종은 퇴위하고, 황태자 이순이 즉위해 당헌종이 된다.

4. 純宗

4.1. 조선 순조의 본래 묘호

조선의 제23대 임금인 순조의 원래 묘호. 철종 때 추숭되었다.

4.2. 대한제국 융희 이척

조선의 역대 국왕
26대 고종 이형 27대 순종 이척 경술국치, 조선 멸망
(조선총독부)

대한제국 역대 황제
초대 고종 이형 2대 순종 이척 이왕가(李王家)로 격하
영친왕이 승계

묘호 순종(純宗)
시호 문온무녕돈인성경효황제
(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
연호 융희(隆熙)
척(坧)
군방(君邦)
정헌(正軒)
출생지 한성 창덕궁 관물헌
사망지 식민지 조선 경성 창덕궁 대조전
즉위식 1907년 8월 27일
장례식 1926년 6월 10일
배우자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아버지 이형(李㷩)
어머니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생몰기간 1874년 3월 25일 ~ 1926년 4월 25일 (52세)
재위
기간
대한제국 황제 1907년 7월 20일 ~ 1910년 8월 29일 (3년 40일)
식민지 조선 이왕 1910년 8월 29일 ~ 1926년 4월 25일 (15년 244일)

순종문온무녕돈인성경효황제(純宗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 약칭 순종효황제. 융희황제, 융희제라는 호칭도 사용하지만 대한제국 공식 의전 호칭이 아니다.

4.2.1. 소개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한국 역사상 마지막 군주이기도 하다.[1]

4.2.2. 건강 문제

명성황후가 낳은 아이들 중 유일하게 성년이 넘어서도 생존한 이로, 귀한 아들이지만 대신 건강은 썩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명성황후가 무속에 기대 국가 예산을 낭비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러시아 역관 김홍륙이 고종을 독살하려고 커피에 아편을 넣어 올렸는데 맛이 이상함을 느낀 고종은 바로 뱉어버렸지만 순종은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다량을 복용하여 순종의 이가 모두 상하였다. 그 탓에 이가 빠져 틀니를 끼고 살았으며 커피를 마신 며칠동안은 혈변을 누는등 몸살을 크게 앓았다고한다. 또 그 부작용 때문인지 순종에겐 직계 자손이 없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성불구였다는 기록도 있다. # 내가 고자라니! 하지만 그의 성기능이 정상이었다는 증언도 있어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으로 인한 심인성 발기부전을 의심하기도 한다.

암살미수 당시 커피광이었던 고종은 맛이 이상하다는걸 느끼고 바로 뱉어냈지만, 순종은 얼른 못 뱉어냈다고 한다. 이른바 독다사건인데, 이 이후 순종이 바보가 되었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졌다고 한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순종의 입지는 그야말로 공기가 되었지만 당시 후계자로 삼을 만큼 나이가 차고 능력 있는 자손이 없었기 때문인지 아버지 고종은 후계자를 교체하지는 않았다. 단적으로 대부분 독립운동 단체나 계몽단체의 초기 정부형태는 입헌군주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는데, 고종 사망 이후에는 일제히 공화정으로 돌변한다. 순종을 내세워서는 구심점 역할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4.2.3. 즉위

1907년, 고종이 헤이그 밀사를 보낸 것이 일본에게 발각되었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하여 결국 고종이 양위하여 즉위하게 되었다. 하지만 말이 황제였을 뿐 실권은 일본을 등에 업은 이완용송병준에게 있었고, 이완용과 송병준 이두사람의 주도하에 일본에 국권을 넘겨주는 일이 착착 진행되어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일제의 강압으로 인해 고종이 퇴위하면서 즉위하게 되었지만 이에 대한 반발로 양위식장에는 고종과 순종 모두 불참해 내관 두 사람이 이들의 대역을 맡는 촌극이 벌어졌다.

1907년 7월 24일,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어 입법권, 관리임명권, 경찰권 등이 일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8월 1일에는 군대를 해산해 서울에서 대거 해산군인들과 일본군간의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4.2.4. 대한제국의 해는 이미 저물고

그 해 순종은 즉위하면서 바로 아랫 동생인 의친왕을 놔두고 그보다 20살이나 차이나는 둘째동생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영친왕은 순종의 이복동생이지 아들뻘이 아니므로 황태자가 아니라 황태제로 책봉해야 한다. 실제로 순종실록을 보면 신하들이 황태제로 해야 한다고 진언한다. 하지만 순종은 정종이 태종을 세자로 삼은 일을 전례로 들면서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왕조의 시작과 끝이 비슷하다 이 호칭 문제는 고종의 의중이 개입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이에 대해서는 엄귀비의 견제설, 일본의 견제설 등이 있다. 의친왕의 어머니는 종1품 '귀인'으로 사후 봉해졌지만, 영친왕의 어머니는 아예 품계를 넘어선 '황귀비'였는데다(황후 다음 지위로, 당시엔 내명부에서 가장 높았다.) 살아 있으므로, 서열 문제가 끼어있기도 했다. 곧바로 일본은 영친왕을 일본 황족 이방자 여사와 혼인시킨 뒤 유학을 명목으로 일본으로 끌고가버렸다. 이듬해인 1908년에는 동양척식회사가 설립되어 일본의 경제권 침탈이 가속화되었다.


실로 나라가 멸망 직전으로 가고 있는 가운데 각처에서 의병활동이 일어나고 실력양성운동도 일어났지만 일본의 국권침탈을 막지는 못했고 순종은 이완용과 송병준 일본의 압력으로 무력하게 국권을 하나둘씩 일본에게 넘겨주다가 결국 1910년 8월 29일, 순종이 덴노에게 합병을 청원하는 방식으로 조선왕조는 문을 닫게 된다.

조선왕조실록 순종 3년 8월 22일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짐(朕)이 동양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 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 피차 통합하여 한 집으로 만드는 것은 상호 만세(萬世)의 행복을 도모하는 까닭임을 생각하였다. 이에 한국 통치를 들어서 이를 짐이 극히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기로 결정하고 이어서 필요한 조장(條章)을 규정하여 장래 우리 황실의 영구 안녕과 생민의 복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에게 전권위원(全權委員)을 임명하고 대일본제국 통감(統監)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와 회동하여 상의해서 협정하게 하는 것이니 제신(諸臣) 또한 짐의 결단을 체득하여 봉행하라.”

순종이 이 일을 나름대로 막으려고 했던 순정효황후 윤씨만큼이나 심각하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는데, 원래 한일합방조약 각서에는 일본 덴노와 순종이 서명과 어새의 날인이 필요한 '조칙'을 내리기로 했는데 정작 어새만 찍힌 '칙유'가 내려졌다는 점을 들어 순종이 서명을 거부해 어쩔 수 없이 도장만 찍은 칙유를 내리게 한 것이 아니냐는 연구가 있기는 하다. 정확하게는 조약서에 국새를 찍었는데 조서에는 찍지 않았으므로 효력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 와서 효력이 없었다고 하는건 의미가 없지만 일제가 절차와 형식을 무시하고 합병했는지 알 수는 있다.

4.2.5. 대한제국이 망한 후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간 뒤 왕공족으로서 이왕(李王) 직위를 받게 된다. 궁호는 쇼토쿠노미야(昌德宮). 우리가 아는 그 창덕궁을 가리키는 거 맞다. 그는 주로 창덕궁에 머물며 당구를 즐겨 쳤다고 한다. 결국 1926년에 사망했는데 순종의 국장을 기회로 제2의 3.1 운동을 시도한 6.10 만세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죽는 마지막 순간에야 한일합방이 강제였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고종이야 지은 죄가 엄청나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고종도 한계는 명백했다. 사실 고종대에는 조선이 망한다는 것은 거의 확정적에 가까웠다. 고종이 뭔 일을 했건 청일전쟁-러일전쟁이 발발하고 결과가 같으면 그 전개를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고종은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마지막 발버둥을 친 것에 가깝다. 다만 현대적 관점에서 최선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결과론적으로 까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순종은 더 암울하다. 이쪽은 말 그대로 시대를 잘못 타고나서 뭘 하고 자시고 할게 없었다. 그래도 나라를 넘겼으니 고종과 함께 마지막 암군들이라는 평가가 존재한다.

야사에 궁녀가 순종에게 여러 이야기를 읽어주다 망국의 이야기가 실린 대목을 읽자 그 궁녀의 뺨을 치며 자신을 능멸하지 말라며 분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야사의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당시의 순종이 망국의 운명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이며, 암군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고종과 달리 등극 때부터 아무런 실권도 없이 망해가는 나라를 지켜봐야만 했던 그에 대한 동정적인 의견도 적지 않다. 물론 최후의 임금으로써 뭔가를 하려했던 흔적도 없었고 친일파와 일본 세력에 휘말렸으며, 망국 후에도 특별한 활동을 하지도 않았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순종이 할 수 있는 수준의 저항은 고종이 다 해보기는 했다. 외교적 청원이라거나 해외 단체와의 연결이라거나, 국내 반외세 세력과의 연결이라거나 국외로의 탈출시도라거나, 심지어 결과적이지만 죽음을 통한 저항까지. 순종은 옆에서 그게 실패하는 것을 보고 성장한 것이다. 더구나 모친은 일본에 저항하다가 대놓고 암살당했다. 애초에 즉위 당시 이미 아무런 권력도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몸이 저렇게 병약해서야 뭔들 할 수 있었겠냐만은......

4.2.6. 독서광

상당한 독서광으로, 다른 가문의 족보를 달달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덕에 보학에 밝아서 자신과 마주 앉은 사람의 본관과 이름만 듣고도 상대의 항렬을 알아내 몇대손인지 맞추는 것은 물론 그 사람의 직계 조상들까지 줄줄 읊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독한 근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의를 차리기 위해 아버지 고종 앞에서는 안경을 착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의 예법에선 연장자 앞에서 안경을 쓰는 건 대단히 무례한 행동이다. 궁중 양의사 알렌이 싫어했는데, 알렌일기에서는 순종이 지능이 낮았다는 둥, 부정적으로 묘사되어있다.(...) 순종의 지능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전반적으로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명석하다는 평도 내렸지만, 대외적인 이미지가 바보로 굳어진 것이 문제다. 여러모로 삼국지의 유선 정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적 지지도가 없었다. 그나마 국왕의 이미지 정도?.

4.2.7. 기타

  • 고종의 장례식 때는 양복을 입은 문상객이 오면 아예 등을 돌리고 절을 받지 않아 좌중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일본인 고관들까지 한복을 구해 입고 문상을 왔다는 증언이 있다.

  •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궁궐을 최초로 개방한 황제이다. 창경궁과 창경궁에서 보관하고 있던 황실유물들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하였으며, 이는 한국 최초의 박물관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 유물들은 현재 경복궁 내의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문제는 이게 국권이 피탈된 이후에는 완전 놀이터가 되어버렸다는 점이지만(...). 그래도 창경궁이 창경원이 된 이후에도 죽 그 곳에서 거처했다.

  • 능은 경기도 남양주 금곡의 유릉(裕陵). 고종 홍릉과 마찬가지로 황제릉의 형식으로 꾸몄다. 이 능에는 순종, 순종의 첫번째 부인 명효황후 민씨와 두번째 부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모두 합장되어 있다.

  • 사망 전에 남긴 유조(유언)가 있는데, 궁내부 관리인 조정구에게 구술하도록 하여 이후 미국의 한인 신문인 신한민보(新韓民報)에 게재되었다. 주 내용은 한일병합 조약의 조인이 일본 및 친일 관료의 강압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순종 본인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음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이를 한글로 번역, 일반인에 공개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선 한가지 의문점이 있다. 신한민보의 기사와는 달리 궁내부의 조정구는 순종이 죽기 한 달 전인 1926년 6월말에 죽었다는 것. 유언을 꼭 죽기 직전에 남기지는 않으므로 조정구가 죽기 전 순종이 미리 유조를 작성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이를 증명할 증거는 없다.

  • 서울 광화문 네거리 근처에 있는 고종 어극(즉위) 40주년 칭경기념비(속칭 비각)의 현판 글씨는 그가 황태자 시절에 쓴 것이다. 현판을 잘 보면 끝에 예필(睿筆)이라고 쓰여 있는데, 예필이란 황태자가 쓴 글씨를 말한다.

  •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 대한제국 황실을 복원하자는 주장이 있다. 대한제국 황실 복원 문서를 참조.

  • 시카고 컵스가 마지막으로 우승한 해가 순종이 왕으로 있을 때였다.[2]

4.2.8.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대체역사/목록에서는 아버지 고종처럼 30%는 훌륭한 군주로 나머지 70%는 개찌질이 왕고집 무능한 군주로 묘사되고 있다.

  • 1992년에 방영되었던 MBC 월화 드라마 '분노의 왕국'은 순종이 '이호'라는 아들을 비밀리에 남겼다는 가상역사적 설정을 주제로 하고 있다.

  • 역시 MBC 드라마인 마이 프린세스에서도 순종이 '이영'이라는 아들을 낳아 신분을 숨기고 민간에서 자라게 했다는 설정을 갖고 있으며, 궁(드라마)에서 등장하는 가상의 대한제국 황제 성조 또한 황실의 적장자라고 표현된 점으로 보아 순종의 아들이라고 추정된다. 원작 코믹스의 경우 원작자의 설명에 따르면 의친왕쪽 가계에서 이어지는 거라고 되어있다.

----
  • [1] 향후 헌법 개정 등으로 (절대 또는 입헌)군주제가 부활하지 않는 한.
  • [2] 이걸 떡밥 삼아서 얘기할 때 알기 쉽게 '순종 2년'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순종은 왕의 묘호이지 연호가 아니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융희 2년'이 맞다.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4-08 15:48:43
Processing time 0.1916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