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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이드

last modified: 2015-04-07 19:32:54 by Contributors

Contents

1. 사전적 정의
2. 영국록밴드
2.1. 개요
2.2. 바이오그래피
2.2.1. 밴드의 결성
2.2.2. 버나드 버틀러 시기
2.2.3. 3집 <Coming Up>발매와 밴드의 상업적 성공
2.2.4. 4집 <Head Music> 시기
2.2.5. 5집 <A New Morning>의 발매와 첫 해체
2.3. 밴드의 해체와 재결성
3. 미국의 가수

1. 사전적 정의

새끼 이나 새끼 의 가죽을 보드랍게 보풀린 것. 또는 그것을 모방하여 짠 직물. 한국에서는 스웨이드란 이름보다는 일명 세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2.1. 개요

suede.jpg
[JPG image (17.7 KB)]

Suede (aka. London Suede)

1989년 결성된 영국 출신 얼터너티브 록(브릿팝) 밴드이다.

브렛 앤더슨의 창법은 정말 특이한데, 비음을 써서 코맹맹이가 노래 부르는 듯 하다. 같은 영국의 밴드 플라시보의 기타리스트이자 보컬인 브라이언 몰코의 창법이 브렛 앤더슨과 비슷한 편이다.

브렛 앤더슨(보컬), 버나드 버틀러(기타(중간에 탈퇴)), 리차드 오크스(기타), 닐 코들링(신디사이저) , 멧 오스먼(베이스), 사이먼 길버트(드럼)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중 사이먼 길버트는 게이여서 그의 경험은 브렛이 곡을 쓸때 도움이 되기도 했다.[1] 참고로 리차드 오크스를 제외한 밴드 구성원 전원이 채식주의자골초인 것으로 유명하다.

2.2. 바이오그래피

2.2.1. 밴드의 결성

1989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되었다. 결성 당시 멤버는 브렛 앤더슨(보컬), 저스틴 프리쉬먼(기타), 멧 오스먼(베이스), 마이크 조이스(드럼) [2]

이름은 모리세이의 솔로 데뷔 후 첫 싱글 곡 'Suedehead'에서 따왔다고 한다. 모리세이는 라이브에서 스웨이드의 B-Side 곡인 "My Insatiable One'을 커버하기도 하는 등 스웨이드를 상당히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다.

밴드 결성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프로 뮤지션의 영입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1989년 10월 28일 NME지에 멤버 모집 광고를 싣고 오디션에서 19살의 기타리스트 버나드 버틀러와 펑크 밴드의 드러머였던 사이먼 길버트가 영입된다.

밴드 결성 초기에는 데이빗 보위의 아류 혹은 철지난 글램 록을 한다고 별로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공연장에 병이나 깡통을 던지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차츰차츰 스웨이드만의 매력에 빠진 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밴드는 컬트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엄밀히 말하면 사운드면에서 더 스미스의 영향이 훨씬 컸다.

1991년 연인이자 동거관계에 있었던 브렛 앤더슨과 저스틴 프리쉬먼이 결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자세히 서술하자면 밴드의 매니지먼트를 도맡아하는 등 실질적인 밴드의 리더였던 저스틴 프리쉬먼은 밴드가 점점 프로로 전향해 갈수록 자신이 브렛과 밴드에게 음악적으로 무시 당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3]그러던 즈음 저스틴은 당시 런던의 인디씬에서 가장 촉망받는 밴드로 떠오르고 있던 블러의 멤버들과 친해지게 되었고 브렛 앤더슨 몰래 블러의 리더였던 데이먼 알반과 사귀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블러가 전국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하자 영국의 언론에서 둘의 연애장면을 찍어서 잡지에 실었고 저스틴은 브렛에게 데이먼과의 연애 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히게 된다. 당연히 브렛은 저스틴이 양다리를 걸친 것에 대해 격렬하게 따졌고 이에 저스틴은 브렛을 자신의 집에서 쫓아낸다.[4]

이때 아직 저스틴은 스웨이드에 남아있었는데 브렛을 쫓아낸 직후 저스틴은 아무렇지 않게 브렛에게 "블러가 뮤직비디오 찍는거 구경갔는데 멤버들이 정말 멋지더라" 라고 말 한 다음날 리허설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밴드에서 해고되었다고 한다. 이후 저스틴은 드러머를 제외하고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그룹 라스티카를 결성하여 펑크소닉 유스를 위시한 미국의 노이즈 록에 영향을 받은 음악을 하기 시작한다. 참고로 엘라스티카의 데뷔 앨범은 데이먼 일반이 키보디스트로 참여한 앨범이기도 하다. 저스틴과 브렛은 나중에 서로 화해했지만 아직까지도 브렛과 데이먼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고 한다.

한편 저스틴과의 이별 직후 어머니마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브렛 앤더슨은 슬픔을 잊기 위해 이 때 부터 이웃집에 살고 있던 전직 마피아의 영향으로 헤로인을 시작했다고 한다.[5]

1집과 2집의 가사는 그녀가 말한 스타를 위해 나는 죽을거에요 라는 가사 등 저스틴과의 결별의 충격에 대한 내용이나 자신의 마약 중독으로 인한 자괴감이 표현된 가사가 많다. 참고로 <Pantomime Horse>와 <Moving>은 같은날에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


Just A Girl (Early Demo)

Be My God (Early Demo)


2.2.2. 버나드 버틀러 시기

저스틴의 집에서 나온 후 값싼 다락방에 틀여박혀 코카인헤로인에 빠져있는 밴드와 브렛을 일으켜세우고 싶었던 버나드는 브렛을 격려했고 브렛은 이에 대해 고마워하며 버나드와 절친한 친구가 된다. 그 후 둘은 절차부심하여 곡 작업에 돌입하여 1992년 5월, 첫 싱글 The Drowners로 데뷔한다.

데뷔 직후 연달아 발매된 싱글들이 차트 상위권에 들고 1993년 3월 발매된 1집 <Suede>가 영국에서 가장 빨리 판매된 데뷔 앨범의 기록을 갱신하고 [6] 93년 머큐리 시상식에서 대상까지 받으면서 브릿팝씬의 문을 열어젖힌 첫 밴드로 평가받게 된다. 이 후 싱글 전용으로 Stay Together를 94년 발렌타인 데이에 맞춰 발매하고 북미투어를 시작한다.


Animal Nitrare (Suede)


So Young (Suede)


Stay Together (Stay Together - Single) [7]


그러나 이 때부터 밴드는 다시 삐걱거리기 시작하는데 원래 북미투어의 오프닝 밴드로 참여했던 아일랜드 출신의 밴드 랜베리스 [8] 가 오히려 스웨이드 보다 인기를 얻으면서 공연 순서가 뒤바뀌는 굴욕을 겪어야 했고 [9] 밴드의 장비가 도둑맞는가 하면 3번의 가수에게 태클이 걸리는 바람에 강제로 미국 한정 London Suede로 밴드의 이름을 개명당해야 했다.[10] 설상가상으로 버나드 버틀러의 아버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일이 일어나 급히 영국으로 돌아오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이 사건 이후로 밴드의 나머지 인원(특히 브렛 앤더슨)과 버나드 버틀러의 사이는 완전히 갈라지게 된다. 브랫은 저스틴과의 결별 이후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여긴 밴드의 투어가 그나마 잘 되고 있지 않던 차에 버나드 때문에 갑자기 영국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하루 빨리 미국에 다시 돌아가서 투어를 돌지 않으면 미국 진출은 완전히 망한다고 생각했고 성공을 위해 이를 악물고 밴드에만 정신을 쏟았기에 아버지에게 효도를 못했다고 여기고 있었던 버나드는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자 충격에 빠져 있었는데 그런 자신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남아있는 투어일정을 강행하고자 하는 밴드에 대해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것. 이 후 어찌어찌 해서 투어가 끝나고 밴드는 2집 Dog Man Star의 녹음을 시작한다.

당시 스웨이드의 곡은 버나드 버틀러(작곡) 브렛 앤더슨(작사)의 콤비 체제로 씌어지고 있었는데 둘의 관계가 완전히 멀어져 버렸으니 작업은 당연히 잘 되지 않았다. 나중에 발매된 디럭스 에디션에 나온 둘의 인터뷰를 보면 앨범 전곡의 작곡과정은 드러머 사이먼 길버트가 여러가지 비트를 녹음해서 버나드의 집에 보내면 [11] 버나드는 그것을 토대로 여러 곡을 작곡해서 브렛의 집에 보내고[12] 브렛이 그 중 마음에 드는 곡을 선곡하여 가사를 붙여 다시 버나드에게 보내는 과정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 때 브렛과 버나드의 사이가 극도로 안좋았기 때문에 서로 매니저를[13] 통해서 의사소통을 할 정도였으며 밴드는 스튜디오에서 제대로 된 리허설을 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또한 버나드 버틀러는 밴드의 프로듀서인 에드 불러를 1집 녹음시부터 자신의 곡을 망치고 있다면서 별로 탐탁지 않아 했는데(이와 반대로 브렛은 밴드의 음악을 더 듣기 좋게 만들고자 애쓰는 에드 불러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 둘 사이의 마찰은 Dog Man Star 작업 중 더욱 더 심화되어 버나드는 레코드사에 섹스 피스톨즈의 음반을 프로듀스한 크리스 토마스를 새 프로듀서로 기용하거나 자신이 직접 프로듀싱을 하겠다고 건의했으나 크리스 토마스는 비용상의 문제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4] 버나드 버틀러의 셀프 프로듀싱은 브렛에 의해 거절당했다, 결국 버나드가 브렛에게 에드를 계속 기용할 거면 자신은 밴드에서 빠지겠다고 통보 하게되는 사태까지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브렛과 레코드사는 에드를 계속 기용하기로 결정하였고 결국 녹음 막바지에 버나드는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오게 된다. 이 후 매니저의 설득에 의해 버나드는 혼자 다른 스튜디오를 임대하여 나머지 녹음을 마치고 밴드를 탈퇴한다.

버나드가 탈퇴한 직후인 1994년 10월 발매된 Dog Man Star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자신이 1집<Suede>를 통해서 열어젖힌 브릿팝 열풍에 가려서 활동 당시애는 상업적으로 실패했지만 훗날 재평가되어 지금까지도 <Coming Up>과 함께 스웨이드를 대표하는 앨범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The Wild Ones (Dog Man Star)[15]


The Asphalt World (Dog Man Star) [16]


2.2.3. 3집 <Coming Up>발매와 밴드의 상업적 성공

그 후, 연습실에 들락나락거리던 사이먼의 사촌 키보디스트 닐 코들링을 정규 멤버로 영입하고, 밴드(특히 버나드)에게 팬레터를 보내던 리차드 오크스라는 17세 소년을 기타 포지션으로 영입한뒤, 1996년 9월 2일, 버나드 버틀러 시기의 음울하며 클래시컬한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진 화려한 기타팝 사운드로 이루어진 3집 앨범 Coming Up을 발매한다.[17] 3집 이후 스웨이드의 팬층이 갈리게 되는데 버나드 버틀러가 있던 시기까지의 음악을 좋아하던 기존 팬들이 등을 돌리고 새로운 사운드와 비주얼적인 면을 좋아하는 팬들이 새로 나오게 된 것. (특히 브렛 앤더슨과 닐 코들링의 팬들이 많았다.) 앨범은 발매 직후 150만장이 넘게 팔리고 앨범의 수록곡들 중 절반의 곡이 싱글커트 되는 등 전 세계적으로 크게 성공한다. 참고로 Coming Up은 브렛의 비음이 제일 강한 음반이기도 하다. 이 음반의 Beautiful Ones라는 곡은 최홍만이 입장할때 쓰기도 한 곡이며 그들의 노래 중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이다.[18]


Beautiful Ones (Coming Up)


Trash (Coming Up)


Saturday Night (Coming Up)

3집 Coming Up 발매 후 스웨이드는 1년간 월드 투어를 돌게 된다. 밴드는 인도, 태국, 필리핀, 중국 등 동양의 여러나라를 방문했으며 근데 한국은 안 왔다 영국 밴드 사상 최초로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물론 서양인의 입장에서) 처음 접한 동양의 신비로운 정서는 이 후 밴드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19] 월드 투어 중 발매한 B-Side모음집인 Sci-fi-lullabies 또한 좋은 평가를 들었다.('브렛 앤더슨은 마약을 하는게 분명하다. 이 앨범을 비사이드로 냈으니…'라는 말도 들었다고.) 더블 시디로 이루어진 이 앨범은 디스크1에는 버나드 시절의 곡을 디스크2에는 버나드 탈퇴 후 작곡된 곡들을 실어 밴드의 음악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앨범이다. 그 중 버나드 시절의 B- Side가 수록되어 있는 디스크1은 정규앨범급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2.2.4. 4집 <Head Music> 시기

1999년 발매된 4집 Head Music은 사운드의 중심이 기타팝에서 일렉트로니카로 다시 바뀌었는데 이는 앨범 프로듀서의 교체와[20] 전작의 주요 작곡자였던 리차드 오크스 보다 브렛 앤더슨과 닐 코들링의 비중이 두드러졌기 때문으로 보인다.[21] 공식적으로 리차드가 앨범에서 작곡한 곡은 3곡 뿐이고 그마저도 Down이란 곡은 원래 브렛이 작곡했으나 리차드 오크스가 3곡이상 작곡에 참여해야 한다는 계약조건 때문에 오크스의 이름이 들어간 곡이다. 당시 자신의 역할이 현저하게 적어진 오크스는 리허설 때 자신이 참여하지 않은 곡은 연주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이 때문에 밴드에서 잘릴 뻔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5집에 참여하게 된 알렉스 리가 거론되었다고 한다.[22] 또한 이 앨범은 스웨이드의 곡 중 유일하게 브렛이 작사에 참여하지 않은 곡(닐 코들링이 작사,작곡한 Elephant Man)이 들어있다. 브렛은 훗날 인터뷰에서 3집과 4집의 시기를 "버나드 없이도 밴드가 건제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마약에 빠진채로 몸부림치던 시기"라고 회고했다.[23]


Everything Will Flow (Head Music)


She's in Fashion (Head Music)

2.2.5. 5집 <A New Morning>의 발매와 첫 해체

이 후 밴드는 닐 코들링이 결국 만성피로증후군으로 탈퇴하고 브렛은 재활치료센터에 들어가게 되면서 긴 공백기를 가지다가 2002년, 새로운 키보디스트로 알렉스 리를, 프로듀서로 더 스미스, 블러, 랜베리스등의 히트 앨범을 프로듀스한 스티븐 스트릿을 영입하여[24] 새 앨범 A New Morning을 발매한다. A New Morning은 제목 처럼 기존보다 긍정적인 곡조의 곡들이 앨범을 가득 채웠으며 브렛 앤더슨 특유의 비음이 완전히 없어지고[25] 작곡측인 측면에서 힌 멤버가 주가 되어 작곡을 하지 않고 여러 멤버들의 곡을 배분하여 앨범에 싣는 등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한 앨범이었지만 이는 스웨이드의 아이덴티티가 사라진 평범한 팝 앨범이 돼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26] 앨범은 뭔가 맥이 빠진 듯한 분위기의 앨범으로 완성되었다. 결과적으로 비평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완전히 실패한다.


Positivity (A New Morning)

2003년 역대 스웨이드의 싱글들을 모은 앨범 <Singles>를 발매하고 6집을 준비하나 브렛은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앨범 녹음을 취소하고 밴드의 해체를 선언한다. 막판에 런던 현대미술연구소(ICA)에서 5일밤동안 한 공연이 꽤 인구에 회자되었다. 첫날밤은 1집 컨셉으로 1집곡 전부, 둘쨋날은 2집 컨셉으로 2집곡 전부, 셋째날은 3집. 이런식으로 전 앨범을 불렀으니 괜찮은 마무리였달까.

2.3. 밴드의 해체와 재결성

스웨이드 해체 후 브렛 앤더슨은 탈퇴한 전멤버 버나드 버틀러와 The Tears라는 그룹을 결성하였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앨범 한 장만을 내고 해체하였다. 이 때 처음으로 연세대 대강당에서 내한공연을 가졌는데 브렛은 관객들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솔로 활동 시기 다시 한번 내한하여 공연을 가졌고 2011년 스웨이드를 재결성 했을 때는 지산 락 페스티벌에 헤드라이너로 참여하기도 하였다.[27] 버나드 버틀러는 2002, 2003년 동안 리버틴즈의 싱글에 프로듀서로 제작에 참여했으나 그 당시 피트 도허티가 영 상태가 안 좋던(..) 때라 버나드와 팀워크가 맞지 않아 도로 그만둔다. 이 때를 두고 버나드 버틀러는 후에 말하길, 자기와 브렛 앤더슨과의 불화는 리버틴즈 내의 불화와 그 막장의 역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하였다.[28] The Tears는 2006년 브렛의 솔로 활동과 버나드의 프로듀서로의 완전한 전업을 이유로 해체된다. [29]

The Tears의 해체 후 브렛 앤더슨은 4장의 솔로 앨범을 발매한다. 초기 2장의 솔로앨범은 상업적인 면에서나 비평적인 면에서나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30] Leo Abrahams와 함께 작업한 3집과 4집은 메인 스타덤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평균 리뷰점수로 7점을 받는 등 나름 성공했다. 브랫의 솔로 활동시 스웨이드의 멤버였던 맷 오스먼과 닐 코들링이 각각 베이스와 키보드 세션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한편 버나드 버틀러는 2008년 이후 프로듀서로의 완전 전업을 선언한지라 The Tears 등의 활동도 전부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 Duffy의 대박 데뷰앨범 Rockferry역시 그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작품이다.

리차드 오크스는 Sean McGhee와 Artmagic이라는 프로젝트를 결성해서 EP 한장을 발매했다.

사이먼 길버트는 태국에서 소수성애자로만 구성된 그룹 Futon을 결성해서 활동했다.

닐 코들링과 멧 오스먼은 주로 세션으로 활동했으며 브렛 앤더슨의 솔로시절 라이브 투어를 같이 돌기도 하였다.

결국 2010년, 버나드 버틀러를 제외한 3집 시절의 멤버들로 스웨이드를 재결성해 투어를 시작했다. 새로운 베스트 앨범과 이전에 발매한 앨범의 디럭스 에디션 등도 새로 나왔다.

2012년 신보작업을 하고 있다고 처음으로 발표한다. 러시아에서 열린 공연에서 처음으로 신곡들을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 앨범에 실릴 곡으로 정해진 곡은 Sabotage 한 곡이며 브렛은 신작 앨범에 대해 "3집 Coming Up 앨범까지 프로듀스를 맡은 에드 불러가 프로듀서로 참여 하며 앨범의 분위기는 예술가가 마약을 하고 만든 느낌의 앨범이며 2집과 3집의 중간적인 사운드" 라고 밝혔다. 또한 지금까지 만든 앨범 중 가장 함들게 작업한 앨범이라고 한다. (브렛은 10년만에 컴백하여 앨범을 내는 밴드의 앨범이 아닌 데뷔앨범을 내는 신인밴드의 자세로 앨범을 제작했다고 한다.)

2013년 2월 첫 싱글 <It Starts and End With You>을 발표하며 다시 활동을 재개한 스웨이드는 3월 18일 6집 <Bloodsports>를 발표한다.[31] 6집의 평가는 메타크리틱 82점으로 괜찮은 편이다. 새로운 무엇은 없지만 기존 스웨이드가 선보였던 음악들을 맛깔나게 절충했다는 평이 대체적이다.
하지만 2013년 Live in PARIS 영상들을 보면, 역시 전성기 때의 브렛 앤더슨의 보컬을 기대하는 건 아직 무리다.


It Starts and End With You (Bloodsports)


Hit Me (Bloodsports)

3. 미국의 가수



생년월일, 본명은 불명. 뉴욕 출신이며 카바레, 재즈를 주로 부르는 듯 하다. 피아노, 기타, 트럼펫도 다룰줄 안다고.
사실 무명가수인만큼 이 정도로는 당연히 등록될리가 없고 이 사람이 진짜 유명한건 2번 항목에게 태클을 걸어 미국에서 The London Suede라는 괴이한 이름을 쓰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페이스북에서는 페이지 주소로 suede와 suedeofficial을 2번에게 선점당했는지(...)[32] suedewave를 쓰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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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데뷔 초 자신을 "남자 경험이 없는 양성애자"라고 말하면서 중성적인 이미지로 유명해진 브렛은 2013년 신보 <Bloodsports> 발매 기념 인터뷰에서 "나는 명백한 이성애자이며 과거에는 단지 나와 똑같이 힘들었던 상황임에도 주변의 여성들은 잘 견디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질투심을 느껴서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던 소망이 있었다"는 발언을 했다 .
  • [2] 더 스미스의 드러머. 스웨이드의 정식 드러머는 아니었고 세션수준의 멤버였다고 한다.
  • [3] 특히 버나드 버틀러의 가입 후 이러한 생각이 더 심화되었는데 당시 저스틴 프리쉬먼은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을 나와서 밴드에 가입한 버나드 버틀러를 '소설 <Laughing Boy>에 나오는 시골소년 처럼 시골에서 런던으로 막 상경하여 성공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으로 여겼고 버나드 버틀러는 저스틴 프리쉬먼을 "항상 일은 먼저 시작해놓고 정작 자신은 한발치 떨어져있는 사람'으로 여겼다고 한다. (Love and Poison, Carlton Publishing Group, November 3, 2003)
  • [4] 당시 둘은 저스틴 집안 소유의 집에서 동거 중이었다.
  • [5] 저스틴과 사귀었을 때는 엑스터시를 호기심에 몇 번 같이 복용한 것을 제외하면 마약투여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 [6] 이 기록은 1년 뒤인 1994년 오아시스의 데뷔앨범이 갱신한다.
  • [7] Stay Together는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뽑힐 만큼 명곡이지만 정작 버나드를 제외한 밴드멤버들(특히 브렛)이 가장 싫어하는 곡이라고 한다. 밴드가 곡을 싫어하는 이유는 곡 자체보다는 곡을 녹음할 즈음부터 시작된 브렛과 버나드의 대립과 미국투어의 실패로 엉망으로 치닫고 있던 밴드 내의 문제가 떠오르기 때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참고로 드러머 사이먼 길버트와 베이시스트 멧 오스먼은 이 당시 밴드가 돌아가는 상황에 화가나서 녹음 중 여러번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 반면 버나드는 이 곡을 스웨이드의 곡 중 특히 좋아하는 곡이라고 호평했다.
  • [8] Dreams, Ode my Family로 유명한 아일랜드 출신 락밴드.
  • [9] 아이러니 하게도 당시 크랜베리스는 1집이 영국에서 별 반응을 못받자 실망하고 밴드를 해체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스웨이드의 오프닝 공연을 맡으면서 미국에서 인기를 얻게되고 이를 발판삼아 전세계적으로 성공한다. 2집은 아예 미국에서 녹음하기까지 했다.
  • [10] 이 이름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아니, 3번이 허가하지 않는 이상 유지될 수 밖에 없다.
  • [11] 원래 그냥 편하게 드럼 머신을 사용하려 했으나 사이먼의 역할이 너무 줄어드는 것 같아서 일부러 사이먼에게 비트를 녹음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 [12] 당시 브렛은 빅토리아풍의 대저택을 임대한 뒤 방안에 틀여박혀서 헤로인을 하면서 보내고 있었다.
  • [13] 이 시기 스웨이드의 매니저가 바로 The Office를 통해서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코미디언 리키 저베이스였다!
  • [14] 같은 시기 크리스 토마스는 펄프에 고용되어 명작 Different Class 를 만들게 된다. 재밌는 이야기는 펄프의 초기 메이저 프로듀서가 스웨이드의 프로듀서 에드 불러 였다는 것. 크리스 토마스로 프로듀서가 교체된 이유 또한 "에드가 스웨이드만 신경쓰고 우리 밴드는 신경쓰지 않는데 차라리 비싼 프로듀서를 고용하면 프로듀서가 더 밴드의 음악에 신경쓰지 않을까?" 였다는 것 그래서 나온 결과물이 Different Class.
  • [15] 브렛이 가장 좋아하는 스웨이드의 곡이라고 한다. 실재로 이 곡은 Dog Man Star 시절부터 지금까지 거의 빠짐없이 밴드의 라이브 공연에서 연주되고 있다.
  • [16] 원래 버나드는 이 곡을 25분 이상의 대곡으로 작곡하였고 앨범에 적어도 10분은 넘게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프로듀서 에드 불러는 앨범에 이 한 곡만 너무 돋보이게 만들 수는 없다며 길이를 반으로 짜르자고 했다고 한다. 화가 난 버나드는 녹음 날 저녁에 잡혀있던 기타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브렛과 에드 불러에 대해 비난을 했는데 하필이면 잡지의 발행일이 이 곡의 보컬 녹음을 하는 날과 겹쳐서 녹음날 아침 그 기사를 브렛이 보고 말았고 버나드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는 심정으로 이 곡을 녹음하였다고 한다. Dog Man Star 20주년 박스셋이 나오면서 원 버전이 공개되었다.
  • [17] 브렛은 2집의 상업적인 실패로 밴드가 해체될지도 모른다고 불안에 했고 밴드가 다시 성공하기 위해서는 미국 대중에 맞춘 팝적인 사운드로 가득찬 앨범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있었다고 한다
  • [18] 이 곡의 데모 이름은 Dead Leg인데 이 이름의 유래는 베이시스트 멧 오스먼이 새로 합류한 기타리스트 리차드 오크스에게 "너 10위안에 들어갈 히트 싱글을 쓰지 못하면 다리 한 쪽 못쓰게 될줄알아" 라고 장난스럽게 협박한 것이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이 노래는 스웨이드의 노래 중 가장 널리 퍼진 노래가 됐다.
  • [19] 4집 앨범에 동양 풍의 곡조가 많이 삽입 되어있는 이유가 이 때문. 도가사상은 브렛이 마약을 끊는것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드러머 사이먼 길버트는 밴드 해체 후 동성애에 관대한 태국으로 이주하기까지 한다. 그는 태국에서 열린 게이전용 가수 오디션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 [20] 4집의 프로듀서는 뉴 오더의 앨범들을 프로듀싱한 스티븐 오스본이 맡았다.
  • [21] 참고로 4집 녹음시에 브렛은 크랙헤로인에 중독되어 있었고 스튜디오에 그의 마약친구들을 불러 마약을 하며 지내고 닐은 투어 중 얻은 만성피로증후군으로 앓고 있었다. 한마디로 둘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브렛과 닐이 신시사이저로 전자 사운드를 실험하고 있을 때 달리 할일이 없던 다른 멤버들은 술을 마시러 술집으로 가곤 했다고.
  • [22] Strangelove의 키보디스트이자 기타리스트. Coming Up활동시에 브렛과 리차드가 Strangelove의 앨범에 코러스로 참여하여 알게되었다고 한다.
  • [23] 설레발의 제왕인 NME를 대표하여 영국의 언론들은 버나드의 탈퇴를 대서특필하면서 스웨이드가 곧 해체할 것이라는 전망을 담은 기사를 쏟아냈다.
  • [24] 재밌는 사실은 이 밴드들이 스웨이드의 역사에 직간접적으로 개입되어 있는 밴드라는 사실이다. 밴드의 전 기타리스트인 버나드 버틀러는 더 스미스의 기타리스트 조니 마의 열혈 팬이어서 스미스의 이름이 언급 되어있는 스웨이드의 오디션에 응했고 보컬 브렛 앤더슨은 블러의 멤버 중 한명에게 여자친구를 뺐겼으며 크랜베리스는 스웨이드 미국 투어의 실패에 큰 영향을 끼쳤다.
  • [25] 보컬로써 목관리를 제대로 안했다고 한다. 실재로 4집부터 목소리가 나빠진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 [26] 브렛 앤더슨은 이 앨범에 대해 밴드가 최초로 마약에 의지하지 않고 만들어낸 앨범이라는 평을 내렸다.
  • [27] The Tears 내한공연의 분위기는 열광 그 자체였고 공연 후 시작된 브렛과 버나드의 팬미팅에서는 브렛의 팬들 중 한명은 브렛이 그 당시 자주입고 다녔던 스타일과 비슷한 양복 한 벌을 맞춰서 선물하고 버나드의 팬들 중 한명은 버나드의 솔로앨범에 싸인을 받으러 앨범을 갖고 왔다가 주최측에 의해 압수되었다가 (The Tears는 스웨이드의 재결성이 아닌 새로운 밴드임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팬미팅때 기존 스웨이드의 물품을 반입금지 시켰다.) 버나드가 그 앨범이 자신의 솔로앨범임을 알아차려서 무사히 사인을 받는 등 많은 해프닝이 있었다.
  • [28] 애초에 완벽주의자 버나드와 즉흥 연주파 피트 도허티는 상성이 맞지 않았다. 그런데 버나드가 프로듀스한 싱글로 리버틴즈는 NME 베스트 밴드상을 타게 된 만큼 버나드의 공도 없지 않다. 물론 NME는 리버틴즈가 뭘 해도 상을 몰아주는 곳이고, 버나드는 프로듀스만 해줬을 뿐 곡 자체는 엄연히 리버틴즈가 만든 곡이므로 그렇게 큰 연관 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 [29] 이 밖에도 활동이 중지된 이유로 거론되는 것은 투어 중 갑자기 브렛 앤더슨의 아버지가 사망하여 브렛이 더 이상 투어를 돌기 싫어했다는 것이다. 앞서 버나드 버틀러가 스웨이드에서 탈퇴한 이유 중 하나가 아버지의 사망으로 인한 상실감 때문에 투어를 돌기 싫어해서 라는 점을 생각하면 기막힌 우연의 일치가 아닐 수 없다.
  • [30] 1집은 메타크리틱에서 31점이었고 2집은 아예 상업적인 의도를 완전히 배제한 채로 어쿠스틱 기타와 첼로로만 전곡이 연주된 앨범이다.
  • [31] BDSM행위에서 폭력적인 행위를 뜻한다고 한다.
  • [32] 전자는 영국 이름으로, 후자는 미국 이름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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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07 19:3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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