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스탈린그라드 전투

last modified: 2015-04-15 21:25:07 by Contributors

Contents

1. 소개
2. 1942년 동부전선
3. 블라우 작전과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4. 소련의 대응
5. 독일군의 공격
5.1. 시 외곽의 전투
5.2. 여기는 지옥 한복판
5.3. 쥐떼들의 전투
6. 소련군의 반격
6.1. 천왕성 작전
6.2. 독일군의 대응
6.3. 천왕성 작전 개시
6.4. 히틀러식 비극
6.5. 북부의 화성 작전(Operation Mars)
7. 겨울폭풍 작전
8. 독일 제6군 항복
9.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의의
10. 기타
10.1. 폰 파울루스? 파울루스?
11. 관련 작품

1. 소개

stalingard.jpg
[JPG image (258.51 KB)]




"이 세상에 이런 지옥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 스탈린그라드에서 어느 소련 지휘관이 남긴 말.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소련스탈린그라드(지금의 러시아 볼고그라드) 일대에서 벌어진 소련군추축군의 대격전.

제1차 세계대전베르됭 전투가 있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있었다. 독일(각각 독일 제국과 독일 제3제국)의 공세로 시작되어 독일이 거의 목표달성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역습을 받고 패퇴했다는 점과 방어하는 쪽이 더 많은 병력을 잃었지만 결국 승리했다는 점에서 매우 흡사하다.

동년에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이었다고 평가받는 전투 중 하나로서 제2차 세계대전의 무수한 전투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공방. 또한 각종 매체에서 사용되는 최고의 떡밥 중 하나. 그 인지도에 걸맞은 전투답게 스케일 또한 남달라서 민간인 희생자들을 포함해서 무려 2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3년간의 한국전쟁 총 사상자도 200만명 이상이니, 그야말로 소모전 중의 소모전.

독일군의 소련정복, 더 나아가 세계정복을 안드로메다로 날린 전투이기도 하다. 여러 전역을 통틀어서도 제2차대전의 전환점이라고 할만하다.

2. 1942년 동부전선

1941년 가을 모스크바 점령(태풍 작전)에 실패함에 따라 당초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독일군의 목표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고, 12월부터는 오히려 소련군이 반격을 시작했다. 독일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모스크바 일대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은 여전히 모스크바가 점령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여있었고 초기 반격에서 축출하는 데 실패한 르제프 돌출부에 대대적인 공격을 명령했다.

하지만 르제프 전투에서 소련군은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독일군의 전술에 말려 엄청난 사상자를 낳았을 뿐 돌출부를 제거하는 데 실패했다. 연이어 데미얀스크에서 포위된 독일군이 방어에 성공하며 독일 중부집단군은 대타격을 받긴 했지만 소련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전선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3. 블라우 작전과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Operation_Blue.jpg
[JPG image (194.2 KB)]


이런 상황에서 1942년 봄 독일군 장성들은 모스크바 재공격을 건의했지만 아돌프 히틀러코카서스 유전 지대를 점령하여 소련군의 연료를 고갈시킴과 동시에 독일군의 고질적인 연료 문제를 해결하고 에르빈 롬멜 장군의 아프리카 기갑군과 양쪽으로 영국군을 쌈싸먹은 후 합류하는 것으로 42년 하계 공세의 방향을 잡고 청색 작전이라 명명했다. 뭐, 언제나 그랬듯이 구상 자체는 거창했다. BUT!

세계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아프리카에서 우크라이나 남부까지의 거리는 프랑스와 독일을 합친 것보다 길고 중간에 터키가 있으며 역시 터키와 러시아 사이의 험준한 산맥을 돌파해야 하는 지경이고 러시아 중부와 북부를 놔두고 남부로 대폭 들어가는 계획이었다. 여기서 롬멜의 역할이 있었다고 하는데 터키를 무력으로 점령하거나 끌여들여 아군으로 만드는 것이다.[1] 그러면 터키군과 합심해서 코카서스 까지의 진격로 확 열리는건 기본이고 보급로가 대폭 줄어드는 것은 옵션이지만,롬멜의 경우 거의 1년 넘게 영국군과 전략전술VS물량공세로 제자리 싸움을 하고 있는데 수에즈도 점령 못 했는데 거기까지 어떻게 간다고...[2] 물론 롬멜한테 물자가 가면 되겠지만 그게 전부 지중해 바다 속과 러시아로 가고 있었잖아. 안될거야 아마...[3]

남부집단군에 하달된 하계 공세의 개요는 다음과 같았다.

1. 4군은 보로네즈 전선의 소련군을 격파한 후 1기갑군과 돈강으로 진격하여 소련군을 축출한다.

2. 루마니아 1군과 4기갑군, 17군은 로스토프와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여 볼가강과 돈강 사이에 형성된 전선의 간극을 매우며 소련의 주요 석유 수송로를 차단한다.

이후 작전 계획에 따라 형성된 방어선을 지키면서 1기갑군과 17군은 코카서스로 진격, 소련의 석유 자원을 고갈시키고 주요 산업 기반을 탈취한다.

근데 이게 당초의 계획이었으나 여전히 소련군이 호구로 보였던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한 후 전선을 재편성하고 코카서스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단숨에 우주적 스케일로 확대시켰다. 남부 집단군을 A와 B 두개의 집단군으로 나눠 A집단군은 코카서스로, B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로 각각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결국 스탈린그라드 주위에 형성되는 엄청나게 넓은 방어 구역을 루마니아나 이탈리아 같은 한 수 아래의 전력을 보유한 동맹국이 담당해야 한다는 뜻이고[4] 이는 이후 소련군의 천왕성 작전에서 그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냈다.

한편, 1942년 초에 남부집단군 사령관 발터 폰 라이헤나우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라이헤나우는 독일 육군 내에서 열렬한 친나치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히틀러도 정권 장악 초기부터 군부의 협조를 얻는데 라이헤나우의 도움을 많이 받아서 그의 의견을 무조건 거부만 할 수는 없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야전군 지휘관으로서도 재능이 뛰어난 장군이었다. 즉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장군으로서, 결과론이지만 만약 라이헤나우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스탈린그라드 주변에서 제6군이 포위되었을 때 히틀러의 사수명령을 무시하고 탈출시키고도 남았을지도 모른다.[5]

청색 작전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곳에서 스탈린이 직접 감독한 소련군의 춘계공세도 시작되었고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을 중심으로 세묜 티모셴코가 지휘하는 75만명의 병력이 5월 먼저 공세를 시작했다.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이라고 불린 이 전투에서 소련군은 초반에 하르코프를 탈환하는 등 선전했으나 독일군은 당초 청색 작전 투입이 예정되어 있던 병력으로 기동방어를 실시, 소련군을 격퇴했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은 약 27만명의 병력을 날렸고 패주한 병력은 볼가강 서안으로 도주했다.[6]

독일군은 이 여세를 몰아서 6월 말에 하계 공세를 시작했다. 이는 대성공이었다. 스텝 초원을 관통하는 독일군을 소련군은 거의 저지하지 못했고 저지선을 형성하려는 시도는 번번히 실패했다. 제대로 된 저지선을 형성하지도 못한 채 하르코프와 로스토프에서 포위된 소련군은 섬멸당했고 7월 말이 되자 B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 포위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이와중에 섬멸당하거나 포로로 잡힌 소련군만 '수십만'에 달해 소련군은 회복이 불가능해보이는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4. 소련의 대응


하지만 스탈린그라드라는 도시는 이오시프 스탈린 대원수의 이름이 직접 붙은 도시[7]인지라 그 상징성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또한 도시 자체가 상당히 큰 산업 도시인데다[8] 독일군 입장에선 이곳을 점령하지 못하면 코카서스로 진격 중인 A집단군의 안전을 도저히 확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소련군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스탈린그라드를 절대 사수한다는 방침을 세웠고 패퇴하던 부대를 수습하여 62군으로 재편성하고 근처 64군과 합류하여 스탈린그라드 방면군을 편성, 독일군의 공세에 대비하도록 했다.

또한 스탈린그라드는 현재의 명칭인 볼고그라드에서 알 수 있듯이 볼가강에 위치해 있는데, 이 볼가강은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모스크바 북서쪽에서 시작해서 남동쪽으로 흘러 카스피해로 들어가는 강으로서 코카서스 지방의 유전에서 생산되는 석유를 비롯한 소련 남방의 자원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공업지대로 운반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애시당초 독일의 작전계획에서 볼 수 있듯이 최초 계획상은 스탈린그라드를 '무력화'하여 볼가강의 운반통로를 차단, 소련이 전시경제를 지탱하고 전선의 소련군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자가 운반되는 것을 막는 것이 목적이었다. 따라서 소련군으로서는 필사적으로 스탈린그라드를 방어할 수 밖에 없었다.

1942년 8월, 스탈린은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에 티모셴코 대신 드레이 예료멘코 상장을 임명했다. 티모셴코가 무능한 건 아니었지만 독소전쟁 이래 패배가 따라다니던 그에게 스탈린그라드의 방어를 맡긴다는 것은 왠지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예료멘코는 독소전쟁 이후 부상을 두 번이나 당했으나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기에 스탈린은 그를 전선사령관으로 내려보낸 것이다. 그리고 예레멘코의 정치장교는 그 유명한 흐루쇼프.

battle_stalingrad103.jpg
[JPG image (244.92 KB)]

시가전의 주역인 62군, 64군을 예하부대로 둔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고위 지휘관들. 독일 6군을 포위한 직후인 1942년 12월 1일 촬영. 맨 왼쪽이 흐루쇼프 중장 (정치장교), 키르첸코 소장(정치장교), 추야노프 소장(정치장교), 맨 오른쪽이 전선군 사령관 예료멘코 대장.


전선군의 예하부대로서 스탈린그라드 시내에는 62군과 64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62군의 사령관 안톤 로파틴 중장은 예료멘코와의 면담에서 매우 소극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언동을 보였고[9] 이런 패배주의자로서는 도저히 스탈린그라드를 수비할 수 없다고 판단한 예료멘코는 64군 사령관 바실리 추이코프를 62군으로 옮기고 21군 사령관이었던 미하일 슈밀로프 중장[10]을 64군으로 전임시켰다.

미국의 무기대여법은 1943년에야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으므로 그 동안까지 소련은 스스로 싸워야 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의 군수공업은 1942년 후반기가 되어야 본격적으로 무기를 뽑아내기 시작한다. 소련은 자원이 풍부했지만 정유기술이 낮아서 좋은 항공유를 생산할 수 없었으므로 미국은 공군용 가솔린도 지원해줘야 했다.


5. 독일군의 공격

5.1. 시 외곽의 전투


이 독일 육군 중위의 총기가 소련군의 PPSh-41임을 주목. PPSh-41은 많은 장탄수와 강력한 위력으로 독일군에게 노획품으로 인기가 많았으며, 고질적인 생산량 부족에 골머리를 앓던 독일군 당국은 이를MP717로 명명하고 수리 키트를 제공해 제식 채용하기도 했다. 반대로 소련군은 자기네 기관단총을 좋아하는 정도만큼이나 MP40에 대해 호평하고, 노획도 많이 했다. 결론은 남의 떡이 커보인다

독일군은 공격에 앞서 공군에 스탈린그라드를 폭격하여 완전히 폐허로 만들 것을 요청했고 스탈린그라드는 독일 공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았다. 2,000여기의 슈투카 및 융커스 폭격기로 대규모의 폭격이 이루어진 후 독일군은 쾌조의 진격을 계속해 선도부대인 16기갑사단이 볼가강 북서쪽에 성공적으로 진출했고 마침내 완전히 불바다가 된 스탈린그라드에 16기갑사단을 선두로 진입을 시작했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여군으로만 이루어진 소련군 방공포연대였으나, 이들은 육상목표에 대한 훈련은 거의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전멸할 때까지 싸웠으며, 이들을 섬멸한 독일 16사단 병사들이 앳된 소련 여군들의 시체를 발견하자 불길한 예감이 뇌리에 스치기 시작했다.[11]

그리고 이때부터 마냥 호구로 보였던 소련군은 독일 공군이 파괴한 건물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서 격렬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16기갑사단은 오히려 역습을 받고 후퇴해야 했다. 강력한 저항에 진입실패한 독일군은 서쪽에서도 진입을 시도했으나 이 역시도 소련군의 저항에 막혀 성공하지 못했다. 남쪽에서 4기갑군이 진격을 시도했지만 이 역시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뚫다보면 결국 길은 열리는 법. 싸움이 격렬해지면서 지리에 익숙해진 독일 4기갑군은 결국 스탈린그라드 남쪽에서 소련 64군의 좌익을 붕괴시키는 데 성공했고 이때를 틈타 독일6군이 진격을 개시, 스탈린그라드 북쪽을 방어하던 소련 62군의 방어선을 삽시간에 무너트리고 스탈린그라드 외곽 방어선을 완전히 붕괴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제 스탈린그라드 점령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 같이 보였으나... 이제부터가 독일군의 안습하고 처절한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5.2. 여기는 지옥 한복판

"...(전략) 동물들은 이 지옥으로부터 도망치고 가장 단단한 돌마저도 얼마 버티지 못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인내한다."
- 독일군 장교의 일지

stalingrad_1942.jpg
[JPG image (40.12 KB)]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상징하는 바르말레이 분수(Barmaley fountain)를 찍은 사진. 브이 포 벤데타시계태엽 오렌지에서도 나오는 유명한 동상으로, 1950년대에 철거되어 사라졌다가 2013년 8월에 다시 만들어졌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소련군의 유명한 저격수인 바실리 자이체프를 그린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 초반부에 바실리가 총알 다섯발로 독일군 다섯명을 저격하는 장면에서 바실리가 숨어 저격한 분수도 바로 이 곳이다. 오브 듀티:월드 앳 워 에서 에너미 앳 더 게이트의 오마주격으로 나온 스나이핑 장면도 여기다. 게임 코만도스 3의 러시아 첫 임무에도 이 분수가 등장한다.

스탈린그라드에 배치된 소련군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가공할 전력이 집결됐다는 걸 알 수 있다. 방어의 중핵인 62군과 64군을 외에도 21군, 28군, 38군, 57군, 63군, 1전차군, 4전차군 등 총 병력 50만 이상의 엄청난 전력이 집결된 상태였는데 이들은 외곽 방어선이 붕괴되자 시내에 집결하여 필사의 방어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시가전의 주역 소련 62군의 지도부. 크릴로프 참모장, 추이코프 사령관, 구로프 군정치장교

게다가 북·서·남쪽은 독일군에 완전히 포위된 상태고 볼가강을 건너 도망가려는 병사는 즉결 처분하라는 스탈린의 명령이 하달된 상태였다.[12] 이런 상황에서 병사들이 할 게 뭐가 있겠는가? 수많은 탈주병이 사살당했고 소련군 병사들에게 남아있는 선택은 그저 항복하거나 필사적으로 싸우는 길 외에는 없었다. 그리고 반대로 독일군은 탈주해도 별다른 심한 처벌이 없었다. 그 결과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에 투입된 소련군 신병들은 평균 생존 시간 24시간이란 신화적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이는 그 동안의 전술적 장점을 시가전에서 발휘할 수 없는 독일군도 마찬가지여서 수많은 부대가 투입된 후 며칠안에 깡그리 전멸하기 일쑤였다.

asiansoviet.jpg
[JPG image (79.92 KB)]

오른쪽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가한 송강호아시아계 소련 병사. 소련은 병력이 모자르자 중앙아시아-시베리아에서도 무차별 징집을 했고, 그리하여 아시아계 병사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북한군 제2대 총참모장을 지낸 남일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가했다고 알려져 있다.


스탈린그라드 진격이 알려지고 동방 징집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소련군 사상자는 어마어마해 소년병이 스탈린그라드에 배치된 상황이었다.[13] 이 시기 소련에게 인종 구분은 사치였다.

5.3. 쥐떼들의 전투

stalingard1.jpg
[JPG image (162.05 KB)]


"한 번은 독일군과 20m 앞까지 대치한 적도 있었습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죠. 여기에는 제가 있고 저기에는 독일군이 있고... 먼저 수류탄을 던지는 쪽이 이기는 거였죠.
- 히스토리 채널, '2차 대전의 잊혀진 증거-스탈린그라드 전투' 편

독일군은 시내 점령이 비교적 간단하게 끝날 것이라 예상했으나 막상 시가전에 들어가자 상황이 그야말로 현시창이라는 걸 오래 걸리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완벽한 제병 합동으로 훌륭한 단위 전투력을 자랑하던 독일군도 폐허가 된 시내 곳곳에서 다발적으로 벌어지는 보병 위주의 시가전에선 딱히 소련군보다 나을 게 없었고 이리 진격하면 저기서 튀어나오고 다시 저쪽으로 가면 또 다른 곳에서 튀어나와 집요하게 공격하는 소련군을 일일히 제압하다 보니 삽시간에 사상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딱히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스탈린그라드는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목표였다. 결국 독일 6군 사령관 파울루스는 오랜 시간과 병력의 소모를 감수하더라도 하나하나 다 때려잡아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기관단총, 권총, 수류탄, 총검, 야삽, 대검, 소총, 저격수, 화염방사기 등 보병 간의 전투에서 쓰일 수 있는 모든 것이 동원된 지독한 소모전으로 흘러갔다. 물론 독일군의 피해도 결코 가벼운 수준은 아니었지만 소련군의 피해는 시내 방어전의 중핵이었던 62군이 삽시간에 병력이 줄어들고 다시 보충되는 패턴이 무한 반복되어 정원보다 사상자가 더 많은 기이한 상황에 처할 정도였다.

rodimtsev.jpg
[JPG image (76.92 KB)]


사진은 스탈린그라드의 마마이 언덕 전투에서 활약한 소련군 제13근위사단 장병들로 가운데 철모를 안 쓴 사람이 터프가이로 유명한 로딤체프 사단장(당시 소장). 이 사단은 시베리아에서 달려왔으며 그래서 아시아계로 보이는 병사도 보인다.

이와중에 소련군의 가용 가능한 모든 병력이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채 스탈린그라드 전선에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볼가강과 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 무더기로 죽어나갔다. 이런 장면은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 초반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14]

위 사진 속의 로딤체프 장군도 스탈린그라드에 도착한 지 딱 두 시간만에 참모 두 명은 독일군 총에 맞아 전사하고 자기도 죽을 뻔하고 독일군에 몰리고 몰려서 볼가강을 등지고 한 변이 수백미터 정도 밖에 안 되는 삼각형 진지 안에 자신의 사단과 함께 완전히 포위된 적도 있다. 교전 중에 불이 붙은 휘발유가 사령관 지휘소까지 흘러들어온 적도 있다니 전투의 치열함이 더 말해 무엇할까.

독일군에게 포위당한 볼가강 교두보를 유지하기 위해 소련군은 군대에 처음 들어온 신병부터 1차대전적백내전을 겪어본 노병까지 정비병, 행정병, 수송병, 취사병 같은 지원병과까지 가능한 인력이라면 닥치는 대로 끌어모아 볼가강을 건너게 했으며 정예병력도 많이 투입했다. 특히 시베리아에서 달려온 사단들과 흑해 함대의 해군 보병들은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Red_October_factory.jpg
[JPG image (21.46 KB)]


마마이 언덕[15]과 붉은 10월 제철소, 기차역[16] 등을 비롯한 공장 지대에선 그야말로 처절한 사투가 연일 계속됐고 수 개 사단 이상의 병력이 이곳에서 녹아버릴 정도로 양군의 전투는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로딤체프 장군의 13근위소총사단을 비롯한 소련군의 저항은 매우 완강하기 짝이 없었고 독일군의 피해는 이제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격전 끝에 독일군은 비록 엄청난 피해를 입긴 했지만 10월에는 스탈린그라드 시내의 90% 이상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소련 62군은 10월 말엔 양단되어 볼가강 서쪽에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그러나 소련군은 볼가강을 통해 끈질기게 보급과 보충병들이 계속하여 볼가강 교두보를 사수했고 11월, 독일군은 교두보를 끝장내기 위해 총공세를 시작했다. 이 순간이 소련군 최악의 위기였지만 처절한 사투 끝에 62군은 결국 교두보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종래의 수많은 접전처럼 엄청난 수의 양군 병사들이 녹아내렸다.

한편 처절한 사투가 계속되는 동안 소련군 최고 사령부(stavka)는 길고 긴 전투를 끝장내고 남부 러시아에 진출한 독일 2개 집단군을 섬멸하기 위한 대반격 작전을 입안했고 결과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판세를 완전히 뒤집게 되는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6. 소련군의 반격

6.1. 천왕성 작전

Operation_URANUS.jpg
[JPG image (126.37 KB)]


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 처절한 전투가 계속되던 1942년 가을의 어느날,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크레믈린에서 열린 스타프카 회의에서 이런 축차적인 병력 투입으로는 방어가 한계일 뿐 독일군을 격퇴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스탈린은 두 눈을 반짝이며 "그럼 무슨 다른 좋은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되물었고, 두 장군들은 며칠안에 다른 방안을 찾아오겠다고 스탈린에게 대답했다.

며칠후 소련군의 총참모부에서 여러 참모들이 세부 논의 끝에 확정한 작전안은 그동안의 소극적인 수비를 떠나 따라서 대규모의 공세를 통해 B집단군에게 타격을 가하고 남부 러시아 전선의 전세를 뒤집는다는 계획이었다.[17]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는 독일 6군의 좌익과 우익이 장비도 변변찮고 싸울 의지도 별로 없는 루마니아군에 의해 방어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총군부사령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와 작전을 의논했다.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스탈린의 승인을 얻어 독일 6군을 스탈린그라드 시내에 붙잡아두고 양 측면으로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돈 전선군과 니콜라이 바투틴의 남서 전선군의 협격을 통하여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을 포위하는 골자의 천왕성 작전을 입안했다.

이에 따라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던 볼가강 교두보에는 최소한의 방어만 가능한 수준의 병력 보충을 했고 스탈린그라드 북서쪽과 서남쪽에 대규모의 병력을 집결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에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모든 명령은 구두로 전달되었으며, 무선이나 문서를 사용한 명령은 금지되었다.

그리고 11월 10일, 소련군은 5개 야전군 규모의 대병력의 집결을 완료했다. 이렇게 집결한 병력은 90만에 가까운 대병력이었다.

6.2. 독일군의 대응

하지만 이런 대규모의 병력이 집결되는 것을 눈치 못 챌 정도로 독일군이 얼간이 집단은 아니었다. 스탈린그라드 북쪽의 수비는 루마니아군과 헝가리군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 부분의 방어선은 취약하기 짝이 없었고[18] 소련군은 이런 약점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북쪽 방어선을 담당한 루마니아군은 이런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꾸준한 정찰 활동으로 스탈린그라드 북서쪽에 대규모의 소련군 부대가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기에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전력으로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루마니아 3군은 즉각적인 병력 지원을 요구했으나 히틀러는 '시를 점령하는 게 중요하지 외곽 방어 따위가 무슨 필요임?'으로 일관했다. 사실 이 문제는 독일 육군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가 측면에 대한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가 이루어질 경우 B집단군이 위기에 빠질 수 있다며 예전부터 우려를 표했던 것이었지만 히틀러는 과연 스탈린의 라이벌답게(...) 할더를 해임하는 것으로 깔끔하게 대답했다. 사실 히틀러가 정확히 소련군의 위협을 파악했어도 독일군은 6군의 공세를 취소하고 A,B집단군 모두 후퇴시키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미 독일군은 병력부족을 겪고 있었고, 6군의 좌우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병력을 끌어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B집단군 북방 200km에 이르는 전선은 매우 취약한 상태로 적에게 노출됐고 방어를 담당한 루마니아군은 B집단군 사령부에 계속적으로 병력 증원과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사령부는 48기갑군단을 파견했지만 이 정도 전력으로 소련군의 대병력을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 방어 구역을 독일군의 대부대가 담당해야 했으나 히틀러의 지나친 자신감으로 인해 작전 규모가 지나치게 확대됐고 결론적으로 코카서스와 스탈린그라드 전선을 동시에 유지한다는 것은 당시 독일군의 역량으로는 무리였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6.3. 천왕성 작전 개시

"우리는 환호했습니다. 이제 이겼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전황이 바뀐 겁니다. 지금까지는 독일군이 이기고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이길 차례라고요."
- 러시아 참전용사들의 회고.

1942년 11월 19일, 소련 남서 방면군이 포병의 격렬한 지원사격을 업고 출진했다. 총 24개 사단, 11개 여단으로 구성된 소련군의 대병력 앞에 스탈린그라드 북서쪽 방어선을 담당하고 있던 루마니아 3군은 삽시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예상을 웃도는 소련군의 대공세에 놀란 독일군은 48기갑군단에게 루마니아 3군을 지원하라고 명령했지만 동계 장비 부족과 고장으로 인해 기동 가능한 전차들은 얼마 되지 않았고[19] 결국 루마니아 3군은 완전히 분쇄되고 말았다.

11월 20일에는 돈 방면군이 스탈린그라드 남동쪽에서 발진, 6군의 우익을 담당하던 독일 4기갑군과 루마니아 4군을 몰아붙이며 진격을 개시했다. 삽시간에 루마니아 4군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독일 4기갑군은 양단되었다. 그리고 11월 22일, 스탈린그라드 서쪽에서 소련군 남서 방면군의 선도부대와 돈 방면군의 선도부대가 스탈린그라드 서쪽 카라치에서 조우했다.[20] 작전 개시 3일 만에 천왕성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소련군에게는 행운도 따랐다. 소련군 전차대대가 독일군이 지키고 있던 교량에 접근했는데도, 독일군의 노획 T-34 부대가 항상 이 다리를 지나쳤기 때문에, 보초는 소련군의 T-34가 다리를 건널때까지도 구경만 하고 있었다. 나중에 T-34가 다리를 건넌 다음에야 독일군 보초는 이 부대가 아군이 아닌 소련군 부대인줄 알아챘으나 중과부적. 소련군은 가장 힘든 전투가 되리라고 예상했던 다리를 무혈로 확보했다.

소련군은 사실 약 10만명 정도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것으로 생각했으나 실상은 소수를 제외한 6군 대부분과 양단된 4기갑군의 상당수 병력, 약간의 루마니아군 등 총 33만에 이르는 대병력이 포위망 안에 완전히 갇혀버렸다. 이는 사실상 B집단군 전체 병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결국 B집단군 전체가 소련군의 포위망에 갇혀버린 셈이다.

6.4. 히틀러식 비극

독일 6군이 스탈린그라드에 완전히 포위되자 6군 사령관 파울루스는 OKH(독일 육군 총사령부, 늑대굴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에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하고 소련군의 전력이 더 보강되기 전에 아직 빈약한 서쪽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겠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파울루스는 6군이 포위당하긴 했지만 현재 전력이면 방어선을 충분히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고, B집단군 사령관 바이흐스도 이에 동의하여 6군이 서쪽 포위망으로 진격한다면 B집단군의 잔여 병력을 동쪽으로 진격시켜 6군을 포위망에서 탈출시키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OKH는 이러한 현지 지휘관들의 판단을 존중하여 히틀러에게 6군의 후퇴를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허나 당시 히틀러는 후퇴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고 '게르만 민족이 슬라브족 따위에게 패배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실로 중2병스러운 정신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데미얀스크 포켓에서 공중 보급으로 방어에 성공한 기억을 떠올리며 공군 참모총장 한스 예쇼네크에게 성공적인 공중 보급 가능성에 대해 질문했다. 예쇼네크는 매우 단기간이라면 하루에 300톤 정도는 가능하다고 대답했고 히틀러는 이에 고무되어 6군은 현재 위치를 사수하란 명령을 내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1개 군단 규모였던 데미얀스크와 1개 야전군(그것도 일반적인 규모보다 훨씬 거대해진) 규모인 스탈린그라드의 보급 문제를 동일 선상에서 생각한 것 자체가 머저리급이지만 거기에 당대의 허세왕 헤르만 괴링도 공중 보급만으로도 6군에게 충분한 물자를 보급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실책을 범했고 파울루스와 바이흐스의 의견은 상큼하게 씹혀버리고 말았다. 직접 보급 작전을 담당하게 될 4항공군 사령관 리히트호펜도 현지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작전이라며 강력히 반대했지만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남의 말 안 듣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양반들인지라 이 의견도 당연히 씹혀버렸다.

2ep3t6t.jpg
[JPG image (32.81 KB)]

스탈린그라드에 나타난 Ju290. 수송작전에 동원되는 항공기는 주로 He 111였으나, 상황이 다급하자 독일은 유일한 4발 수송기인 Ju290까지 보급작전에 투입한다.

그러나 6군이 매일 필요로 하는 물자는 500톤에 달하는 데 반해 수송기, 활주로 등 모든 조건이 열악했던 독일 공군이 수송할 수 있는 물자는 최대 300톤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최상의 조건이 갖춰졌을 때'나 300톤의 수송이 가능했다. 물론 날씨가 항공기가 뜨기 좋게 항상 개어있는 것도 아니고 가동률 문제, 소련 공군이나 지상 대공포 등이 가만히 있을 이유도 당연히 없다(...). 악천후에 장거리 수송, 거기에 사용 가능한 비행장이 간이비행장 단 2곳 뿐이라는 이런 조건에서 이 물자 공수를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21세기 현대의 기술력으로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평균 수송량은 필요량의 10%도 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6군은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나마도 소련군이 이걸 알아채고는 전차부대를 보내서 방어수단이라고는 대전차포 몇 문이 전부인 독일 공군 비행장을 방법해버려서 가뜩이나 부족한 보급이 더욱 줄어들었다. 이로써 비행장 방어를 위해서 제6장갑사단이 구출부대에서 빠지고 말았고 당연히 악전고투를 치르면서 전진하던 구출부대의 작전은 망했어요.

한편 전체적인 작전 진행의 어려움에 비하면 사소하지만(?) 6군의 병사들을 추위와 배고픔으로 더 이끄는 요소가 있었으니, 이런 대규모 보급 작전에서 꼭 생기기 마련인 행정/기술적 착오이다. 헤르만 괴링이 다스리던 공군은 특권을 이용하여 육군의 보급장교가 수송물자를 체크하는 것을 거부했고, 결국 엄청난 병크를 저지르게 된다. 대규모 물자들을 긴급히 수송하다 보니 6군에게 꼭 필요한 식량, 연료, 방한 물자들이 제대로 수송되지 않은 경우가 존재했던 것. 춥고 굶주린 병사들이 공수된 상자를 열었더니 신품 철모나 치약(...)이 나오는 경우, 심지어는 그상황에서 전혀 필요없는 콘돔이 비행기 하나 가득 실려오기도 했다.[21] 혹은 공중에서 낙하산으로 물자를 떨궜더니 병사들이 받지도 못하고 상자가 그대로 부숴져 버리거나 소련군이 노획해 버리는 경우까지 있었다.

여담으로 이러한 공중보급의 한계는 연합군도 똑같이 겪었는데 마켓가든작전 당시 고립된 영국군을 지원하게 위해 공중보급이 시행되었고 사상자까지 발생하면서까지 이를 획득하는데 성공했지만 정작 보급상자에서 나온것은 베레모였다.

파울루스는 포위망에 걸리고 한 달이 지나자 병사들에 대한 크리스마스 선물로 부대가 보유한 말의 도살을 허가했다.[22]그러나 이것도 잠시고 그나마 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기갑부대들은 고기는 커녕 주변의 다른 부대에서 말뼈다귀나 얻어와서 스프나 먹는 신세였다. 게다가 이것도 며칠 못 갔고 독일군은 계속 쫄쫄 굶게 되었다. 결국은 굶주리다 못해 시체를 파먹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6.5. 북부의 화성 작전(Operation Mars)

저명한 미국의 독소전 사가인 데이비드 글랜츠는 소련 붕괴 후 비밀 해제된 자료를 토대로 <Zhukov's Greatest Defeat(주코프 최대의 참패)> 라는 저서를 펴냈다. 이 저서는 당시 남부의 천왕성 작전에 가려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화성작전을 다루고 있다. 이 전투는 남부집단군이 담당하고 있던 스탈린그라드에서 멀리 떨어진 모스크바의 서쪽, 르제프 전역(독일 중부집단군 관할)에서 벌어졌다. 소련군은 천왕성 작전과 동시에 이 작전을 실시했으나 주코프가 지휘한 이 작전은 철저한 실패로 끝났고, 소련측은 주코프의 명예를 위해서 이 전투의 존재조차도 감추었다는게 글랜츠의 주장이다. 해당 저서가 명성을 얻으면서 한국의 밀덕후들 사이에선 "주코프는 바실렙스키 없으면 시체"니, "주코프의 병크"라는 말이 오고 갔다.

소련군은 원래 10월 12일에 화성작전을 시작하려 했으나 날씨 때문에 수 차례 연기되었다. 9군 사령관 발터 모델 역시 꾸준한 정찰과 감청 사실을 기반으로 소련군의 공세를 일찌감치 예측할 수 있었고, 이를 보고받은 중부집단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 또한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인해 독일군 전력이 남부집단군에 집중된 상황에서도 중부집단군이 그나마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을 최대한 9군에 집중해 주었다.

당시 화성작전에 참전한 소련군 생존자와 르제프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주코프는 스탈린그라드의 6군을 포위하는 것만큼이나 장대한 포위망을 성공시켜 1942년 한 해 동안 수도 없이 소련군을 갈아버렸던 르제프 고기분쇄기(Rzhev 'Meatgrinder') 전역의 9군을 섬멸하려 했다. 그러나 모델은 이미 참호를 2줄로 파놓아 대비하고 있었고 특히 서전을 장식한 소련군의 대규모 포격이 오히려 공격자인 소련군의 진격에 심각한 장애물이 될 만큼 지형을 파헤쳐 놓았을 뿐 아니라 가뜩이나 망가뜨려 놓은 지형에 전차 부대 투입마저 보병, 기병과 뒤엉키면서, 9군은 소련군에 물량과 인원 면에서 압도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도 예비대의 정확한 투입으로 소련군의 제파적 공세를 모조리 막아내면서 역으로 소련군을 포위 섬멸하였다. 최근 미국에서 발매된 <Fighting Patton: George S. Patton Jr. Through the Eyes of His Enemies>에서는 이를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빛나는 방어전 승리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르제프 전투의 생존자들과 그 후손, 참전 군인들이 직접 출연한 러시아 다큐멘터리에 의하면, 1942년 1월부터 직접 르제프 전투를 지휘했던 주코프는 화성작전 뿐 아니라 르제프 전투에 대한 언급 자체가 매우 적었고, 주코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반 코네프 역시, 회고록을 1943년 이후부터 시작하면서 1942년부터 이듬해 초에 걸쳐 자신이 직접 부대를 지휘했던 르제프 전투 자체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23] 무엇보다 독일군은 르제프의 9군에 대해서만 무려 4차례의 소련군 대공세가 있었기에 이번에도 그 일환의 동계 공세라고 생각하였고 '화성작전'이라는 명칭조차 1990년대 소련이 붕괴되고 관련 문서가 공개될 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독일군 9군 예하 6보병사단장이었던 호르스트 그로스만 장군이 집필한 <RSHEW, ECKPFEILER DER OSTFRONT>는 1942년 11월부터 3주간 진행되었던 소련군 동계 대공세를 충실하게 다루고 있다.

글랜츠의 저서로 비로소 세상에 작전명이 알려진 화성작전은 러시아 군사학자들의 거센 반발을 받으며 그 중요성에 관해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고, 위의 러시아 다큐멘터리조차 러시아 정부와 군 관계자들에게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 앤소니 비버는 자신의 저서인 스탈린그라드 전투 개정판에서 이러한 러시아 군사학자들의 주장과 주코프의 일기를 인용하여 중부집단군이 남부의 A,B집단군을 지원할 수 없었다는 이유로 화성작전이 대실패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서문과 본문을 합쳐도 2쪽 정도에 불과한 내용이고, 글랜츠의 저서는 방대한 각주를 포함에 당시 소련군 문서까지 부록으로 포함한 수백 페이지 규모이다. 사실 모스크바 전투 직후인 1942년부터 쿠르스크 전투 이전까지 중부집단군에 대한 연구 자체가 매우 부족했고, 글랜츠는 이 분야에서 매우 독보적인 존재이다.

글랜츠의 연구에 찬성하는 주장의 근거는 귄터 폰 클루게는 11월 말에 돈 집단군 사령부를 찾아가서 만슈타인과 직접 만나 겨울폭풍 작전을 위한 기갑사단을 지원했고, 원래부터 블라우 작전을 위시한 남부 독일군의 스탈린그라드 진격에 지원이 집중되면서 9군은 서류 상의 편제에 절반 밖에 안 되는 전차와 야포를 보유하고 있었을 뿐이다. 9군은 르제프 여름, 가을 대공세[24]에서 또다시 소련군에 패배를 안기며 압도적인 손실을 입혔지만, 두 차례의 대공세를 견뎌내고도 보병 사단들에 병력 보충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만큼 상황이 열악했다. 겨울폭풍 작전에서 가장 높은 전과를 세운 6기갑사단은 원래 9군의 최정예 사단으로 제1차 르제프 전투와 춘계 작전에서 대활약을 했다. 사단의 전공이 인정되어 신형 전차의 우선 보급과 운용 훈련을 위해, 1942년 여름부터 프랑스 지역에 주둔해 있던 중 6군 구출 작전에 투입된 것.[25]

즉, 이미 중부집단군은 남부집단군에 충분히 지원을 해준 상황이었고 그 부족한 여력으로 주코프의 화성작전을 막아내며 소련군에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강요했다. 사상자 33만 5천명은 공세에 투입된 병력의 40%에 달했고, 전차와 중장비의 피해는 천왕성 작전 초기에 투입된 숫자와 맞먹을 지경.[26] 오히려 주코프가 화성작전에서 소멸된 대규모 병력과 장비를 처음부터 천왕성 작전으로 돌렸으면 남부의 독일 집단군의 탈출을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1943년에도 르제프는 여전히, 모스크바에서 가장 위협적인 지점이었다.

소련군의 공세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큰 피해를 입었지만, 스탈린그라드에서 6군이 완전 녹아내리자 르제프의 9군은 손실에 대한 보충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결국 독일군은 소련군의 대공세가 이곳에 다시 반복될 것을 우려하여, 3월에 독일군은 르제프 돌출부를 포기하고 물러난다(들소 작전). 여기서도 주코프와 코네프는 들소 작전이 실행되는 그 순간까지 눈치채지 못하면서, 뒤늦게 퇴각하는 독일군을 추격하다가 역으로 피해를 입기도 했다. 르제프 전투 다큐멘터리에선 이에 대해서 '그동안 르제프에서의 모든 공격이 패퇴되었기에 소련군이 겁을 먹고 함부로 접근하지 못한 탓'이라고 분석했다.

1년이 넘는 공방전 끝에 르제프를 되찾은 이후, 독일군이 목전에 왔던 상황에서도 결코 모스크바를 떠나지 않았던 스탈린은 이 작은 도시를 찾아와 텅 빈 민가에서 홀로 하룻밤 묵었다고 한다.

앤소니 비버가 본인의 저서에서 이에 대해선 더욱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도 매우 안타까워 한 것은, 화성 작전에 대한 논란이 심화되면서 러시아 군의 군사 문서 연구가 외국인 학자들에게 더욱 폐쇄적으로 돌아섰다는 점이다. 매년 신간을 출시하는 Osprey 시리즈는 최신 연구 결과를 반영하여 기존에 발매했던 책들과 다른 내용으로 독소전쟁에서의 중부집단군 전역을 다루고 있다.


독일어 위키에 나와 있는 화성작전 개요도. 붉은색이 소련군, 파란색이 독일군. 소련군 북쪽은 칼리닌 전선군, 서쪽은 서부전선군. 소련군은 르제프의 독일군을 거의 포위시킬 정도로 공세를 폈으나, 소련군의 공세는 독일군의 수비에 좌절되었다.

7. 겨울폭풍 작전

독일 중부집단군의 선전과는 정반대로 독일 남부집단군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몽상스러웠던 보급 작전은 당연히 실패했고 6군 사령관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보급이 필요하다며 여러 차례 보급을 요청했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B집단군과 협의하여 스탈린그라드 남서쪽을 돌파하여 탈출할 수 있는 작전의 재량권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게다가 하지만 상황은 더욱 심각해져 6군이 겨울 동안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할 가능성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고 이대로 스탈린그라드의 6군과 남서 방면군의 맹공에 밀려나고 있던 B집단군의 잔여 병력마저 섬멸한다면 이미 코카서스에 진출한 A집단군도 고립될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 Heinrich Hoffmann (cc-by-sa-3.0-de) from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난 직후인 3월 만슈타인의 사령부를 방문한 히틀러, 방한복을 입은 만슈타인의 모습이 낯설다. 사진 오른편으로부터 제4항공군 사령관 리히트호펜 공군 원수, 총통 전용기 기장 한스 바우어 SS 중장, 만슈타인, 히틀러.

이에 히틀러는 명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를 돈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스탈린그라드 남서쪽을 돌파하여 6군과 연결할 것을 명령했다. 허나 이 돈 집단군이라는 것이 새로 투입된 몇몇 부대와 포위망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4기갑군의 일부 병력을 제외하면 사실상 패잔병 집단과 다를 게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편제는 거대했지만 실제 사용 가능한 병력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애초에 소련군의 포위망을 분쇄한다는 임무는 돈 집단군이 감당하기엔 불가능한 임무였다. 새로 편성한 호트 기갑집단과 홀리트 파견군, 루마니아 4군이 놀라운 투혼을 발휘한 끝에 호트 기갑집단의 선도부대인 6기갑사단이 스탈린그라드 50km까지 진출했으나 더 이상의 진격은 무리였다. 만슈타인은 파울루스에게 남서쪽으로 탈출하여 돈 집단군과 합류할 것을 명령했다. 허나 참모장교 출신의 파울루스[27]는 히틀러의 현지 사수 명령에 불복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고 몇몇 장교들이 명령을 무시하고 남서쪽 포위망을 뚫어 탈출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며 설득을 시도했지만 파울루스는 이를 거부했다. 사실 만슈타인 회고록을 주요 사료로 쓰는 일부 전사가나 만슈타인빠들이 파울루스에게 이 구출실패를 떠넘기면서 파울루스를 희대의 무능아로 묘사하곤 하나, 이 시점에서 6군의 능력으로는 탈출이 불가능했다고 봐야한다. 일단 6군은 소련군에게 이삼중으로 포위되어 있었고, 그뿐만 아니라, 여름부터 싸워왔던 62군과 64군은 시내에서 건재했기 때문에 건물 하나하나마다 소련군 병력과 대치하고 있던 6군이 갑자기 철퇴한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게다가 제대로 된 동복도 걸치지 못하고 실탄마저 부족했던 6군 장병들이 도보로 수십km를 걸어서 소련군의 포위망을 돌파한다는 것도 무리였다. 즉, 만슈타인은 구출작전 실패의 책임을 파울루스에 떠넘긴 것이다. 물론 겨울폭풍작전 자체가 히틀러의 망상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일차적인 책임은 이런 불가능한 작전을 명령한 히틀러에게 있다.

만슈타인은 구출작전이 실패하자 6군의 고난은 더이상 무의미하다고 판단, 히틀러에게 6군의 항복을 허가해 줄 것을 탄원하지만 히틀러는 당연히 거부한다.

한편 소련의 주코프와 최고사령부는 스탈린그라드의 포위망을 굳힐 작전인 '토성 작전' 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돈 집단군이 겨울폭풍 작전으로 밀고 들어오자 돈 집단군에 대한 반격 계획인 '소(小) 토성 작전'으로 작전을 변경해 돈 집단군을 밀어붙였다.

결국 소련군 51군을 상대로 분전하던 루마니아 4군의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소련군 2친위군과 5전차군의 공격에 돈 집단군마저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만슈타인은 돈 집단군 예하 부대에 작전을 중지하고 후퇴할 것을 명령했다. 이제 6군이 탈출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겨울폭풍 작전은 6군을 구출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나마 다행히 코카서스에 진출한 A집단군이 탈출할 시간을 벌어줬기 때문에 러시아 남부전선 전체가 붕괴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stalingrad-ende020.jpg
[JPG image (35.22 KB)]

독일군은 상황이 절망적이 되자 유능하다고 판단된 장교들을 비행기로 탈출시키기 시작했다.[28] 독일군 수중의 마지막 비행장인 굼락(Gumrak)에서는 안전한 곳으로 탈출하려는 광란의 쟁탈전이 벌어졌고, 장교들은 비행기에 올라타려고 뇌물을 주고 매수하려고 들기도 했다.[29] 물론 이것도 비행장이 수중에 있을 때 이야기였고, 비행장이 점령당하자 탈출할 길은 완전히 사라진다.

8. 독일 제6군 항복

stalingard_ger_POW.jpg
[JPG image (137.9 KB)]


"소련군 전령은 우리의 거부 의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묘한 눈빛으로 악수를 청하더군요. 마치 가망없는 환자를 뒤로 하고 돌아서는 의사 같은 눈빛 말입니다."

모든 탈출 가능성을 상실한 독일 6군은 기아와 추위에 전투 의지를 빠르게 상실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포로가 되면 처참하게 죽을 뿐이라는 두려움에 독일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포위망은 점점 좁혀들었고 실탄마저 떨어지기 시작했다.

해가 바뀌어 1943년 1월, 소련군은 6군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독일군과 대치한 전선에서는 소련군 병사들이 장교의 인솔로 백기를 들고 빵을 바구니에 한가득 들고 찾아와서 항복을 권했다. 독일군은 매우 굶주리고 있었으나 항복을 거부하고 갖고 온 것과 함께 돌려보냈다. 참으로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었으나 자신들도 소련군 포로에 한 짓이 있었기 때문에 포로 신세가 되면 비슷한 신세가 될까봐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공식항복 이전에 개별적으로 항복한 병사는 매우 적었다.

RD5Ue.jpg
[JPG image (97.88 KB)]

동계 위장복을 입고 철통같은 포위망을 구성한 소련군 병사들. 헐벗고 굶주린 6군의 병사들은 먹을 것은 커녕 실탄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소련군은 로코솝스키 대장과 고보로프 대장의 공동명의로 독일군에 공식 항복권유 문서를 전달하고 심리전 차원에서 이를 수만장 인쇄하여 전선에도 뿌렸다. 이 항복권유서는 모든 포로에 대한 안전보장과 환자에 대한 의료지원, 정규 식량 지급 등 소련군 입장에선 굉장히 파격적인 조건을 약속했다.[30]
그러나 파울루스는 이를 거부했고 1월 12일 소련군은 고립된 독일군에 대해 대공세를 개시했다. 6군은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모든 희망은 사라졌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질병과 추위,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1월 30일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육군 원수로 진급시켰다. 역대 독일 육군 원수 중 적에게 포로가 된 원수는 없었기에 파울루스를 육군 원수로 진급시킨 것은 자결하여 명예를 지키라는 메세지인 셈이었다. 즉 히틀러식 비극의 주연배우가 되라는 것인데...파울루스가 이런 속셈을 못 알아볼 사람도 아니라서 결국 히틀러의 기대를 홈런치고 다음날 소련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파울루스는 여름부터 자신들의 숙적이었던 스탈린 전선군과 그 휘하의 추이코프군에 항복하는 것은 자존심 상했는지, 12월부터 들어와 포진해 있던 로코솝스키 상장의 돈 전선군에 항복했다.

파울루스 원수의 명령으로 제6군의 연락장교는 항복의사를 전선에 맞닿은 돈전선군 최전선 부대에 알렸고, 처음에는 소련군 소위가 항복문서를 접수하러 왔으나, 독일군은 격이 너무 낮다며 이를 거부했다. 이후 소련군에서는 영관급 정치장교를 다시 보냈고, 독일군은 그를 폐허가 된 백화점 지하에 마련된 6군 사령부까지 안내하여 파울루스의 항복의사를 확인했다.

북쪽에 고립된 일부 병력들이 저항을 계속했지만 2월 2일, 스탈린그라드에서 저항하던 독일군은 대부분 소련군에 항복했다. 30만에 이르던 대병력의 생존자는 기력을 잃고 죽어가는 91,000명 뿐이었다.[31] 항복을 거부한 소수의 병력들이 시내에서 저항을 계속했지만 이들도 곧 제압당했다.[32]


포로가 된 독일군 지휘부. 가운데가 파울루스 원수. 사병들과는 달리 포로가 된 독일군 장성급 포로 20여명은 소련에서 괜찮은 대접을 받았다. 억울하면 장군이 되자

그리고 독일 본토에서 이 소식을 접한 히틀러는 "제6군의 성스러운 저항[33]이 단 하나의 겁쟁이 때문에 치욕의 역사로 남게 되었다. 이후로 그 누구도 원수로 승진하지 못 한다"라며 노발대발했다.[34]

그래도 독일군은 일본군처럼 참패를 감추지는 않았다. 제6군이 항복한 직후, 괴벨스는 라디오에 나와 "제6군 장병들의 영웅적인 항전은 적의 공세에 의해 압도되었다. "는 짤막한 논평을 발표하고 전국민 복상을 선포했다. 그리하여 3일간 극장과 식당은 문을 닫았다.

한편 수십만 독일군 전사자 대부분 전장에서 발생한 사망자가 그렇듯이 한 곳에 모아 놓은 다음 화장한 뒤 잔해를 집단 매장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흐루쇼프는 "한번 가봤지만 다시는 가보고 싶지 않았다"고 그 처참한 광경을 자신의 회고록에 남겼다.

9.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의의

stalingrad_germans_helmets.jpg
[JPG image (145.17 KB)]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야전군 규모의 독일군이 포위-섬멸당한 최초의 전투로 일방적인 독일의 공세로 진행되던 독소전의 흐름을 완전히 바꿨다고 평가받는다. 이 시점에서 소련군의 전쟁 수행 능력은 독일군을 넘어서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이 전투 이후 자신감을 회복한 소련군은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게 된다. 더구나 여기서 항복한 독일 6군은 독일군 정예중의 정예로 독일 동부전선에서 큰 활약을 하였던 부대였기때문에 그후 독일은 소련과의 전쟁에서 그 공백의 크기를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소련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안타까운 점도 있었는데, 6군이 소련의 군대를 스탈린그라드에 묶어두고 있을 동안 캅카스에 진출했던 클라이스트의 A집단군은 간발의 차이로 포위망을 탈출해버렸다. 만약 6군이 일찍 항복했다든지 아니면 일찍 탈출해버렸으면 A집단군은 소련군의 포위망에 걸려 6군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비난하지 말고 오히려 더 칭송해야 될 판국. 애초에 안 쳐들어갔다면 칭송도 비난도 할 일이 없었겠지만

한편 B집단군이 거의 전멸해버린 독일군은 남부 러시아 전선 자체가 완전히 무너질 위기에 처하게 됐지만, 르제프 전역에서의 소련군의 공세(화성작전)와 뒤이은 하르코프에서의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러시아 남부전선은 생명 연장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이 상황은 1943년 쿠르스크 전투가 벌어질 때까지 이어진다.

또한 소련군 저격 전설의 시작도 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였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 소련군 전설의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와 무장SS 저격학교장 하인츠 토르발트(혹은 에르빈 쾨니히)의 초인적인 저격수 대결을 묘사했다. 일부 밀덕후들이 이 대결이 소련의 선전기관들이 만들어낸 스토리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스토리는 바실리 자이체프의 회고록이 출전이다. 자이체프는 동료 저격수들을 역저격하던 독일군의 특급저격수를 며칠간의 잠복대결 끝에 사살했는데, 당시에는 이 저격수의 신원을 잘 몰랐다가, 이후 독일군이 항복한 후, 포로로 잡힌 독일 저격수들이 심문과정중에 소련군 저격수를 잡기 위해 독일에서 특급저격수를 불러왔고, 그가 SS저격병 학교 교장 또는 교관이었던 "하인츠 토르발트"또는 "에르빈 쾨니히"라고 진술하면서 나온 이야기다. 자이체프는 자기가 사살한 그 특급 독일저격수가 에르빈 쾨니히라고 상정하고 회고록을 썼고, 이것을 기초로 영미권 작가인 윌리엄 크레이그가 논픽션 " the enemy at the gates"를 집필하여 서구권에서 유명해진다. 그러므로 소련 선전기관이 지어낸 스토리가 아니라, 포로신문과정에서 착오 또는 오류[35] 때문에 나왔을 가능성이 많다.[36]

이후 적에게 포위당하는 등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운운하는 일본 대본영스러운 사례가 몇 차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이상한 작계가 나오게 될 만큼 사실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전투는 매우 인상적인 것임에는 틀림없는데 소련군 병사가 죽기 전 휘갈겼다는 글은 비록 출처는 불분명하지만 시사하는 점이 많다. 글은 다음과 같다.
나는 비록 여기서 죽을지라도 조국이여, 절대 항복하지 마라.[37]

10. 기타

추축군의 피해 : 사상 76만 명 및 포로 9만 명[38]
소련군의 피해 : 사상자 110만 명 추정[39]

전후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거대한 동상 어머니 조국상을 세웠는데, 자유의 여신상과 자주 비교되기도 한다. 전쟁 기간 중 노획한 독일군 철모를 녹여 만든 고철들도 재료로 투입되었다. 전체 높이는 자유의 여신상보다 낮지만 인물상의 크기는 이쪽이 더 크다. 지금은 볼고그라드(구 스탈린그라드)의 랜드마크로 자리잡고 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점으로 소련 당국의 프로파간다는 더욱 험악해지게 된다. 종전의 소련 프로파간다는 나치, 파시스트를 비롯한 이념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지만 스탈린그라드를 시작으로 아예 특정 민족과 국가를 겨냥하여 "독일놈을 죽여라"라는 식의 프로파간다들이 등장한다.

*
영화 스탈린그라드중 한 장면이다. 다소 혐오감이 드는 장면이 등장하니 유념하기 바란다.

10.1. 폰 파울루스? 파울루스?

독일군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를 귀족 출신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제법 많은 2차대전 관련 서적에서(대표적으로 알기 쉬운 세계 제2차대전사) 그를 폰 파울루스라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인데 사실 그는 귀족이 아니다. von 칭호 자체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시민 명사들에게도 간혹 주어지곤 했지만 파울루스 가문은 그런 호칭을 받은 적도 없다. 그저 평범한 시민계급, 정확하게는 교사의 아들이었다. 오히려 시민 계급 출신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히틀러 및 나치당 치하에서 더욱 진급이 유리했다.

영미권에서 나온 많은 책들이 폰 파울루스라고 언급하고 있고 이걸 그대로 번역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인데 이는 원저인 영미권 서적들의 오류로 추측된다. 실제로 독일에서 나온 관련 서적에는 폰 파울루스라고 언급되는 경우가 전혀 없다.

11. 관련 작품

  • 스탈린그라드
    독일에서 만들어진 독일군 입장의 전쟁영화. 흔치 않은 위치만큼이나 영화 자체는 수작이다. 다만 치열한 전투 장면보다는 전선에서의 병사들의 현시창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데 더욱 집중하고 있는 반전영화. 그야말로 지옥 같은 스탈린그라드 전선에서 죽어가는 독일군의 심정과 무의미한 침략전쟁에 희생당하는 일개 병사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 스탈린그라드 2012년 러시아판 영화. 그런데 독일의 영화는 전장의 비극을 다루고 있는데 반해 이 영화는 그냥 러시아판 배달의 기수다. 이외에도 러시아의 스탈린 그라드를 소재로 한 여러 작품들이 있는데 이것들의 공통점은 파이트 구도가 이 영화와 더불어 지나칠정도로 소련군에게만 유리하게 전개된다는 사실. 참고 이를 보면 그저 국뽕 영화라고 할수도 있지만, 이 전투는 한국으로 치면 명량해전이나 다름없는 것이니 러시아인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가는 것도 아니다.감독 재량 더구나 스탈린그라드가 대전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대한민국에서 블루레이판이 출시되었다. 하지만 명량해전은 역사책에 그대로 실려있는 상황이기라도 하지, 그것과 달리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실질적 손실은 독일이 많았지만 잠재적 사상자는 소련이 더 많았던 것에 반대되는 몇가지 왜곡적 현상들이 존재한다. 감독측의 생각이야 어떨지 몰라도 일단은 러시아에서도 평가가 상당히 좋지 않았으며 실재 역사적 배경은 간접적으로 묘사해놓고 정작 싸움에 익숙하지 않아 보이던 소련병사들 조차도 어느순간 모두가 싸움신이 되어있다. 이 외에도 일부러 도탄을 내서 독일군 탄약고를 격파하는 등 존재하지도 않았던 상황을 가지고 전투를 유리하게 묘사한 것은 결국 보는이에 대한 몰입을 저하시켜 버려 딱히 옳다고 볼 수 없는 상황인 듯 하다. 무엇보다 배경의 핵심은 다루지도 않고 대장정의 막이라고 보기엔 결국은 그 배경의 일부에 한한 영화이며 그 일부마저도 영화의 끝이 독일군의 항복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니 관중의 실망이 컸던 작품이다. 한마디로 촛점을 이상적으로만 맞춰 와닿지 않는셈.

  • 탈린그라드 스나이퍼스 2011년에 나온 스탈린그라드 속의 저격수들의 활약을 그린 영화. 비교적 최근에 나온 영화인데도 저급한 화질과 흔한 더빙방식의 음성지원으로 같은 러시아 영화인 즈베즈다와 같은 의도적 성향을 띄고있다. 고증으로나 BGM으로나 그냥저냥 볼만한 것 같지만 납득할 수 없는 친러시아적 연출이 들어간 작품이다. 중간중간 소련군의 불확실한 엄호에도 픽픽 쓰러지는 독일군들과 특히 마지막 파이트 씬에서 러시아 저격수가 독일 저격수에게 끔찍하게 안 맞는다. 반면에 러시아 저격수는 끔찍하게 잘 맞춘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소련군 저격수와 대치하고있는 독일군 저격수 앞에 대놓고 유도하는 인민군의 속임수 공작에 속는 독일 저격수의 묘사가 상당히 안타까워진다.

  • 에너미 앳 더 게이트
    스탈린그라드에서 유명해진 스나이퍼 바실리 자이체프가 주인공인 영화. 주드 로와 에드 헤리스 등의 명배우들이 출연한다. 영화 자체도 수작이고 볼 만한 영화인데 영화 초반의 소련군의 참상에 러시아 참전용사들이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로 처참하진 않았다, 우리는 전차와 포병대의 지원을 받아가며 싸웠어 시벌이라며 분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특히 총이 없어서 2명당 한 정씩만 총을 주는 장면). 일부 전선에서 형벌부대 정도만이 그 정도 장비를 갖고 싸웠으니 확실히 좀 과장된 상황.

  • 죠죠의 기묘한 모험 2부
    후일담에서 루돌 폰 슈트로하임이 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명예롭게 전사했다고 한다. 이런 괴물을 대체 누가 죽인 거야!? 보급불가때문에 소련인민웨이브에 쓸렸겠지 사실 기름이 없어서 기동불가라 털린거다 TV애니메에선 그 전사 직전의 모습이 영상으로 추가되었다.

  • 레드 오케스트라속편
    특히 2편의 부제가 '스탈린그라드의 영웅들'인만큼, 스탈린그라드에서의 격전을 실감나게 표현해낸 게임이다. 총을 조준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탄젠트 조준기를 조절해서 거리에 맞게 영점을 맞춰서 쏴야 하는 등 괴악한 현실성을 자랑하는 게임이다(...).

  • 그 외 2차 세계대전기의 소련군을 다룬 여러 게임들, 예를 들어 콜 오브 듀티 시리즈1편, 2편, 5편 등이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다루었고[40],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2에서는 DLC로 스탈린그라드 캠페인 미션이 추가되었다.

  • 월드 오브 탱크
    9.4 버전부터 스탈린그라드 맵을 추가했다. 볼가강을 옆에 두고 있는 완전히 아작난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엄폐물과 벽이 꽤 많은데다가, 무너진 흙더미로 미니맵을 주시 하지 않는다면, 공격찬스를 놓치는데다가 길까지 잃어버릴 수 있는 꽤 복잡한 구조이다.

  • 역사웹툰
http://worldoftanks.kr/ko/content/history/stalingrad/
알파캣이 그리며 월드 오브 탱크에서 서비스하는 역사웹툰 6화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다루었다. 전투가 전투인만큼 어느때보다 분량과 퀄리티 약(?)에서 더 공을 들인 느낌. 해설자 로제타 듀베르가 소련군 여성 스나이퍼로 분해 등장한다.
스탈린히틀러의 병맛 대결도 초반에 등장.
----
  • [1] 터키에서도 친독성향이 높긴 했다. 실제로 터키 전신인 오스만제국은 1차대전 때 독일군과 한패로 참전하기도 했고 2차대전 이후로도 한국과 함께 서독에 노동자를 보낼 정도로 당시에는 상당히 친한 나라다. 즉 그거 믿고 터키를 추축군에 참전시키는 것.
  • [2] 이미 태풍 작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에리히 폰 만슈타인을 비롯한 수많은 독일군 장성들이 건의했지만 히틀러는 "본인은 친애하는 장군들은 이 작전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것이 유감이오"라면서 작전을 강행했고 이것이 이번에도 이어진 것이다(...).
  • [3] 그나마 롬멜이 엘 알라메인까지 진격할수 있었던 것도 토부룩 점령당시 영국군이 미처 폐기하지못한 대량의 물자를 노획할수 있었던 덕분이고 그후에도 독일본국의 지원은 부족해서 엘 알라메인의 영국군 방어선 돌파는 끝내 실패하고 그자리에 주저 앉았다. 한마디로 지원도 제대로 못해주면서 지원 빵빵해도 힘들 결과물을 히틀러는 당연시하고 있었다는 것.
  • [4] 하지만 사실 이 방어선도 독일이 담당할 생각이었는데 동맹국이 전적 쌓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런 주제에 장비는 그저 안습.
  • [5] 무엇보다도 파울루스는 라이헤나우 휘하에서 참모로서의 역량을 절정까지 발휘하였고 그의 6군 사령관 임명도 남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착임한 라이헤나우의 의중대로 움직일 수 있는 야전군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이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파울루스는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있어도 라이헤나우의 명령은 거부 못하는 사람이었다.
  • [6] 이 전투의 패배로 티모셴코는 스탈린의 눈 밖에 나서 두 번 다시 일선지휘를 맡지 못했다.
  • [7] 그 외에도 스탈린의 이름을 딴 지명은 많았지만, 적백내전기 남부 지역에서 식량 조달 조직 책임 인민위원으로 임명된 스탈린이 식량 공급을 안전히 하기 위해서란 명목으로 처음으로 유의미한 군사권을 행사한 지역이 바로 이곳 이었다. 그는 차리친(제정 시절 명칭) 사령부에서 북카프카스 전선을 지휘하며 모스크바에서 트로츠키가 귀찮은 간섭을 하는 것 이외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스탈린:강철 권력》 14장 '내전 속으로', 로버트 서비스
  • [8] 소련군 주력전차 T-34의 주요 생산기지 중 하나였다.
  • [9] 이건 예료멘코와 후임 추이코프의 말이다. 반대로 주코프는 로파틴이 정비태세를 잘 갖춰놨다고 자기 회고록에 써놨다. 주코프와 추이코프가 사이가 매우 안 좋았기 때문에 추이코프의 공적을 깎아내리기 위해 주코프가 이렇게 써놨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 [10] 이상하게도 슈밀로프는 시가전에서 추이코프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임무를 맡았는데도 서방전사에서는 거의 언급이 안 된다. 1996년 1월호 월간조선에서 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 전적지 탐방기사를 냈는데 러시아인들은 이런 이유에 대해 슈밀로프가 손실을 최소화했기 때문에 격전에서 언급이 잘 안 된다고 대답했다고.
  • [11] 여군들은 모두 비전투병과 보직을 맡고 있기 때문에 전투병으로 활동하는 경우는 없다. 물론 이스라엘같은 나라는 여군이 야전병으로 참전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국가의 특성상 그런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독일군에게 "이제 너님들은 우리 소련군의 모든 병력과 싸워야 할테니까 각오하셈!" 란 최후통첩인 것이었다.
  • [12] 제227호 명령. Ни шагу назад! / Ni Shagu Najad!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마라! 그리고 악명높은 형벌부대의 창설도 설정 되어 있었다.
  • [13] 대개 독일군의 공격으로 가족을 잃은 전쟁 고아들이었으며, 고아원도 파괴되었거나 차라리 군대를 따라다니는 것 만도 못한 경우가 많아 많은 고아들이 소년병이 되었다. 중고생 정도면 전투에 투입되었고 초등학생 수준이라면 잡역을 도왔고, 그마저도 못하는 예닐곱살들은 부대의 마스코트처럼 귀여움 받았다. 물론, 상황에 따라 스스로 몸을 지켜야 했다.
  • [14] 물론 실제 러시아군 참전용사들은 영화에서 묘사된 모습은 과장이 심하다고 말하지만 스탈린그라드에서 싸우고 살아남았다는 것이 하나의 명예가 될 정도로 실제로도 엄청나게 치열한 수준이었다.
  • [15] 몽골인들의 요새가 위치했던 스탈린그라드의 고지대로 일종의 감제고지였다. 당연히 이곳을 차지하는 쪽이 스탈린그라드를 훤하게 내려다 볼 수 있다.
  • [16] 하루에 주인이 12번 바뀐 적도 있다.
  • [17] 대략적인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니콜라이 바투틴 중장이라고 알려져 있다.
  • [18] 주 장비라는 게 프랑스 군에서 노획한 구형 장비에다 수도 적었다. 이것이 히틀러가 동맹군을 개무시하는 원인 중 하나였다.
  • [19] 들이 배선을 갉아먹어서 작동하지 않은 전차도 많았다고 하지만 이는 순전히 전장전설이다. 당시 독일군 48기갑군단 소속 22기갑사단의 전투 전 전차 손실은 거의 전부 소련군의 공세를 대비해 부대를 이동시킬 때 행군 중 고장으로 주저앉은 것이었다. 당시 확실히 쥐에 의한 피해로 기록된 것은 전차 몇 대의 전조등 배선을 갉아먹은 것 뿐이라고 한다.
  • [20] 이 때 소련군 전차는 단 한 번도 발사하지 않고 손쉽게 독일군 방어선을 뚫었다. 독일군이 왜 적극적으로 반격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나, 대부분 군사전문가들은 이곳을 방어하던 부대가 급조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 [21] 수송에 주로 이용된 He-111의 적재량은 약 2톤이었다. 콘돔 2톤이 도대체 그 상황에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 [22] 말 따위가 뭐 대단한가.. 싶지만, 당시 독일군에게 있어서 말은 물자운반 및 인원수송용 으로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그러한 말의 도살을 허가했다는것은.. 더 이상 설명이 必要韓紙?
  • [23] 이에 대해 르제프 출신의 전사학자들은 '침묵이 더욱 많은 것을 웅변해준다.'며 비판했다.
  • [24] 주코프가 스탈린에게 9월 대공세에서 르제프를 되찾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면서 미국 대통령 특사 웬들 윌키가 스탈린의 요청을 받아 해당 전투를 참관했다.
  • [25] 당시 6기갑사단장 에르하르트 라우스의 회고록은 르제프 전투와 겨울폭풍 작전 양쪽 모두에 관한 중요 기록이다. 이후에도 라우스는 남부집단군에 남아 상급대장까지 진급한다.
  • [26] Osprey Command Georgy Zhukov
  • [27] 사실 파울루스는 참모로서는 육군참모본부 작전과장을 역임할 정도로 극히 우수했지만 야전지휘관 경험이 전무했던 게 치명적이었다.
  • [28] 아예 사단 예하 부대는 남겨두고 사단장과 참모장교, 기타 중요 인물 몇몇만 탈출시킨 경우도 있었다. 기병사단에서 개편되었기 때문에, 제복에 기갑 병과를 뜻하는 분홍색이 아닌 기병 병과의 금색 부착물을 단 것으로 유명한 24기갑사단이 대표적. 부대 자체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전멸했으나, 사단장과 참모진 등을 수송기편으로 빼와 후방에서 그들 및 구 24기갑사단 출신 타부대 전출자나 회복 부상병 등을 모아 재창설했다. 물론 대다수는 신병들.
  • [29] 소련군의 공중봉쇄로 이렇게 어렵게 탄 비행기편 마저 사실 안전하지 못했다. 스탈린그라드 전역에서 독일군은 수송기 488대 승무원은 1000명 이상 잃었다.
  • [30] 물론 실제론 많이 달랐다. 당시 독일군과 소련군은 상대방의 포로를 매우 잔혹하게 대하였다. 잊혀진 병사에선 이러한 장면이 매우 생생하게 나오니 한번 읽어볼것을 추천한다.
  • [31] 소련이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니지만 이들 중 단 6,000명 만이 10년 후 독일로 귀환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말 그대로 포로생활 중 사망. 항복 직후 병들어 죽은 자들도 많고, 나머지도 1943년 봄의 티푸스 유행 당시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다만 이 시기에는 소련측도 줄 수 있는 게 없었기는 했다. 독일 포로들의 처우가 개선된 소련군이 승기를 잡아가고 대량의 독일군 포로를 획득하면서 여유가 생긴 1943년 말 이후이다. 독소전 초반 소련군 관리하의 독일군 포로의 사망율은 30%에 달했지만, 이때를 기점으로는 10% 이하로 떨어진다.
  • [32]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부대는 전멸 직전 마지막 통신을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우리는 의무를 다했다."
  • [33] 히틀러나 괴벨스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전멸할 6군을 '아시아의 위협'(나치나 히틀러의 망상에 의하면 유대인과 볼셰비즘을 아시아적 비문명으로 간주했다.)에 맞서 유럽문명을 지키려 테르모필레서 장렬히 산화한 스파르타 300용사로 만들어 정신승리 선전을 할 작정이었다.
  • [34] 그러나 직후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A집단군 사령관은 소련군의 포위망을 탈출한 공적으로 원수로 승진했다. 후퇴작전의 성공으로 원수로 승진했다는 점에서 독일군에 있어서는 불길한 징조였다.
  • [35] 포로들이 내놓는 정보들은 여러가지로 걸러들어야 한다.
  • [36] 전후 바실리 자이체프가 베를린에 방문했을 때 에르빈 쾨니히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여자의 습격을 받았다고 한다. 습격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여자가 진짜 에르빈 쾨니히의 딸인지는 불명. 다만 모스크바 군 박물관에 바실리의 유품들을 전시해 놓았는데, 바실리는 그중에서 '하인츠 토르발트의 스코프'라는 것을 가장 아꼈다고 한다.
  • [37] 이 문구는 개전 초기에 소련과 독일의 국경에서 30일 동안 버텼던 브레스트 요새에 새겨진 글이다. 1944년에 브레스트에 소련군이 들어오면서 알려졌고 곧 소련의 선전으로 인해 유명해졌다.
  • [38] 이탈리아군과 루마니아군, 헝가리군을 포함한다. 이 3국 군대의 희생은 사망/부상/포로를 합쳐 37~38만 명이다.
  • [39] 민간인은 제외. 민간인은 순수한 스탈린그라드 거주 민간인 희생자만 5만 명을 넘는다. 또한 전투개시 이전 인구 30만 중 5만 이상은 의용군으로서 전투에 참가하였고 이들에 대한 통계는 불확실하다.
  • [40] 특히 1편에서는 위에 언급된 '에너미 앳 더 게이트'를 오마주하여 첫 전투에 임할 때 총 대신 모신나강 클립 하나를 받고 맨몸으로 전쟁터에 내몰린다(...). 5편에서도 해당 영화의 분수대 저격 씬을 오마주.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4-15 21:25:07
Processing time 0.4920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