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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큐브릭

last modified: 2015-03-27 17:49:20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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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촬영 당시 모습

Stanley Kubrick. 1928~1999
미국의 전설적인 영화감독
항상 완벽하려했고 가장 완벽했던 천재감독

미국인들은 큐브릭보다는 쿠브릭으로 발음한다. 큐브릭이 주로 활동한 영국에선 Q-brick으로 발음한다. 미국에선 그걸 두고 별로 안 좋게 보는지 Nostalgia Critic은 자신의 작품에서 한번 조롱하기도 했다.[1]

Contents

1. 경력
2. 성향
3. 미국내 흥행실적
4. 기타
5. 스탠리 큐브릭의 작품들
6. 기행
7. 취미

1. 경력

1928년 뉴욕 브롱크스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대인이긴 하지만 이미 부모대에서 개종하여 주류사회에 편입한 터라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은 사실상 없었다고.[2] 덕분에 유대인 단체들의 자금 기부 요청에 대하여 거부한 일이라든지[3], 할리우드을 꽉 움켜쥔 유대인들 횡포가 심하다는 의견(정확히는 너무나도 상업적으로 많은 인재를 죽인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을 내비쳤다가 졸지에 반유대주의자이라느니 꽤나 억울하게 까였던 일도 많이 겪었다. 그래서 스필버그가 저런 비난에 반론하면서 큐브릭을 옹호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성격이 욱하는 더러운 면이 큰 큐브릭은 유태인들 모임이나 저런 자리를 아예 피해다니면서 죽을때까지 저런 이들과 화해이니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4]

어린 시절 사진작가와 재즈 드러머를 꿈꾸었는데 고등학교때의 성적은 낮은데다가[5] 제2차 세계대전 종전후 참전군인들의 대거 복귀로 대학입학은 포기했다.

사진잡지 "LOOK"의 사진기자로 17세부터 일을 시작했는데 사진기자로서 몇 년 동안 일하면서 지식에 대한 갈구로 컬럼비아 대학교에 청강생으로 수업을 듣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현대예술영화들을 보면서 영화 감독의 꿈을 꾸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1년, 자신이 취재한 복서 월터 카르티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영화 감독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53년 자신의 첫 장편영화인 《공포와 욕망》을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흥행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2년뒤 두번째 장편영화인 《킬러의 키스》를 만들었다. 이후 1957년 《영광의 길》에서 크 더글러스를 기용했는데 이때의 인연으로 스파르타쿠스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인 《스팔타커스》를 만들게 되자 더글러스는 "스탠리 큐브릭을 감독으로 해달라"라고 영화사에 압력을 넣어 원래 예정된 다른 감독을 제치고 스탠리 큐브릭이 《스팔타커스》를 연출하게 되었다. 다만 큐브릭은 이 영화를 '실패작'이라 부르며 자기 필모그래피에 넣기 꺼려할 정도로 싫어했다. 자신에게 결정권이 전혀 없었다면서. 이후 자신의 영화는 프로듀서까지 직접 하지 않으면 찍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할리우드와 결별하고 영국으로 떠나게 되었으며 이후 그의 영화는 모두 미국 자본과 영국 기술력이 혼합된 형태로 제작된다.

1962년, 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을 영화화 한 《롤리타》를 만들었다. 나보코프 자신이 직접 각색한 시나리오로도 유명한데 소설과는 상당히 내용이 달라졌으며 출연 배우가 죄 영국인들이라 원작의 미국사회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이 아니라 노쇠해가는 영국사회에 대한 조사(祖辭)처럼 느껴진다. 소아성애자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로 인해 교황청에서 까인다.[6]

1964년, 냉전에 대한 가장 신랄한 블랙코미디로 일컬어지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로 뉴욕비평가협회상 감독상을 수상하고 아카데미 작품상에 지명되는 등 작가주의 감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1968년, 영화 역사상 가장 환상적인 화면의 걸작으로 꼽히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4년 만에 완성했다. 아날로그 특수효과만으로도 극도로 사실적이고도 환상적인 화면을 보여준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CG 따위는 없다!) 가히 큐브릭의 최고 걸작이라 할 만하다. 인류가 에 착륙하기도 전에 만들어졌으나 우주와 우주선에 대한 묘사는 무서우리만큼 정확하며 또한 후대의 SF영화들과 감독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상상력을 발휘했다는 이유로 교황청에서 칭찬 받는다! 이후 나폴레옹 영화를 제작하려 했지만 1970년 소련의 영화 감독 세르게이 본다르추크의 워털루가 미국에서 처참하게 망하는 것 때문에 자금 지원이 들어오지 않아서 그만두어야 했다.

1971년에는 사회비판과 염세주의가 극에 달한 문제작 《시계태엽 오렌지》를 만들었다. 폭력적인 악인이 정부의 실험으로 폭력성을 제거당한 채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내용은 꽤나 논란을 일으켰다. 한국에선 아직도 정식 개봉도 못했다. 너무 폭력과 선정성이 심해서이다. 일단 DVD블루레이로는 출시되었다(그래도 볼사람은 비디오 테이프에 자막까지 넣어서 오래전에 다 봤다)

이후 1975년 《배리 린든》이라는 시대극을 만들었고 1981년에는 《샤이닝》, 1987년에는 《풀 메탈 재킷》을 제작했다. 《풀 메탈 재킷》은 당시 《플래툰》과 개봉 타이밍이 비슷해서 비교를 많이 받았고, 이 작품부터 큐브릭은 개봉 타이밍이 꾸준히 최악이었다. 큐브릭이 한창 나치 독일유대인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고 있을때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가 개봉했고, 결국 제작을 중단했다. 이때부터 스필버그 감독과 인연이 생겼다.

'A.I.'라는 영화를 기획중이었으나 '이 영화는 나보다는 자네가 하는 게 더 어울릴 거 같아' 라며 스티븐 스필버그에 감독자리를 넘겨주기도 했다. 큐브릭은 처음부터 AI를 가능한 밝은 이야기로 만들고 싶어 했는데 자신이 감독을 하려고 하니 자꾸만 이야기가 비관적으로 흘러가서 그냥 밝은 영화의 대명사 스필버그에게 맡겨버렸다. 게다가 큐브릭은 평소부터 스필버그와 친분이 두텁고 서로가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던 사이였으니.. 스필버그가 손댄 만큼 큐브릭 특유의 염세주의 대신 가족에 대한 테마가 영화를 지배했지만 그래도 큐브릭의 그림자는 어느 정도 남아있다. 사실 결말 직전까진 그냥 큐브릭 영화 특유의 시궁창 모드고, 결말마저도 조금 되새겨 생각해보면 조낸 달콤 씁쓸한 해피엔딩인지도 헷갈리는 작품이다.

한동안 그의 작품이 나오지 않다가 1999년 《아이즈 와이드 셧》를 촬영하고 최종 편집 작업후, 1999년 3월 7일 자택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위에 서술한 《A.I.》는 2001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 의해 완성, 개봉되었다.

2. 성향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완벽주의 성향이 너무 심한지라 영화 한 편의 완성에 들어가는 시간이 엄청난 걸로도 유명했다. 특히 《A.I》를 기획할 때는 '어린 배우를 데려다가 영화찍기 시작하면, 완성될 때는 청소년 배우가 될테니 시작할 때부터 진짜로 로봇을 만들어 찍자.'라고 주장해서 영화가 기획단계에서 계속 머물러 있었다.


샤이닝 촬영당시 카메라로 잭 니컬슨을 찍어준다고 뻥을 치고 딸과 셀프카를 찍는 괴짜같은 면도 있다.

스탠리 큐브릭은 영화 역사상 가장 환상적이고 독창적인 영상을 만들어낸 감독으로 꼽힌다. 또한 끊임없이 새로운 기법들을 시도했는데 《배리 린든》에서는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7세기의 상황을 고려해 촛불만으로 조명을 사용한 기법으로 화제가 되었고 《샤이닝》에서는 스테디캠이란 기법을 도입하기도 했다.[7]

워낙 완벽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 대한 고집이 세다 보니까 배우들과 충돌이 생기는 경우도 잦았다. 크 더글러스는 《영광의 길》에서 큐브릭과 작업을 한 후 그를 굉장히 높이 사게 되어 자신의 영화 《스파르타쿠스》의 감독으로 데려왔는데, 여기서는 전작과는 달리 큐브릭하고 끝없이 부딪히더니, 지금까지 와서도 큐브릭을 용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큐브릭을 "능력있는 *새끼(a talented shit)"라고 대놓고 욕까지 했으니.
비슷하게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주연을 맡았던 맬컴 맥다월도 큐브릭을 맹비난했었는데... 이건 이유가 좀 다르다. 촬영장에서는 서로 굉장히 친해져서 함께 탁구도 치고 친하게 지냈는데, 촬영이 끝나고 나서 갑자기 큐브릭이 쌩까기 시작했다고(...) 그래서 '님아 관심좀여 ㅠㅠ' 이런 의미에서 징징댄 측면이 크다. 맥다월이 많이 아쉬워했다. 이건 말콤이 영화계 생리를 몰라서 착각한 경우다. 대부분의 영화 감독과 배우는 한번 촬영하면 두 번 다시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영화촬영때까지만 친하게 지낸 후에 헤어진다.

잭 니컬슨의 경우 《샤이닝》 촬영할 당시 잘 맞는 편이었다고. 물론 그도 불평이 상당해서 "왜 재촬영 해야하는지 그 이유조차 설명 못하는 놈" 이라고 욕을 해댔지만 큐브릭은 담담하게 "재촬영을 많이 해야 니컬슨이 진짜 연기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샤이닝》의 니컬슨의 연기는 매 신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연기력이 가미된 상태인지라 이후 니컬슨이 열연한 《배트맨》의 조커 보다도 더 완성도 높은 사이코 살인마를 연기한다.[8]

<스탠리 큐브릭 장르의 재발명>의 수록된 인터뷰에 보면 찌라시들이 소문 낸 대표적인 소문이 연기자와의 불화라고 한다. 실제로는 연기를 지시하거나 강압하지 않고 대부분 영감을 주는선에 머무른다. 여러번 테이크를 내면 오히려 배우들이 안심하는 측면이 있다. 한 두번만 하면 이게 잘한건지 못한건지 모르는데 여러번 하면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좋아한다. 실제로 잭 니컬슨은 수백번 테이크 갔다는건 거짓말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항상 다음 차기작인 <나폴레옹>에 자기를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샤이닝의 한 씬에서는 무려 270번의 테이크를 기록한 바 있다. 《아이즈 와이드 셧》를 촬영했던 톰 크루즈니콜 키드먼도 완벽주의적인 큐브릭 때문에 정신적으로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DVD프라임의 샤이닝 스페셜 에디션 리뷰를 보면 큐브릭의 완벽주의와 배우들의 고생에 관련해서 이런 내용도 나온다.

큐브릭의 ‘무한 반복 테이크’ 신공은 (<샤이닝> 촬영 당시) 69세였던 스캣맨 크로더스에게는 특히 가공할 만한 고문(?)이었다. 예컨대, 딕 핼러런과 대니가 부엌에서 ‘샤이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신을 보자. 큐브릭은 영화에서 약 7분가량 계속되는 이 신의 촬영을 무려 148 테이크에 걸쳐 반복했다. 물론, 언제나처럼 큐브릭은 ‘왜 같은 연기를 그렇게 많이 반복해야 하는지’, ‘뭐가 잘못됐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할로란 역을 맡은 크로더스는 (다행히) 별다른 불평 없이 큐브릭의 지시에 순순히 응했지만, 재촬영이 100회를 넘기자 서서히 인내심이 ‘고갈’돼갔다. 큐브릭은 148 테이크 째를 마치고 - 스스로도 ‘너무 가혹하다’라고 느꼈는지 - 촬영을 중단하고 휴식을 취했는데, 휴식 도중 크로더스는 개릿 브라운에게 다가와 이런 말을 던졌다. “와! 큐브릭이 사람 잡네요!”[9]

평론가이자 전기 작가인 존 백스터(그는 <샤이닝> SE DVD에서 개릿 브라운과 함께 음성해설을 맡았다)는 큐브릭이 배우들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이렇게 같이 설명했다. “최초에 배우가 최선을 다해 연기를 하면 큐브릭은 ‘좋았어요. 한 번 더 갑시다’라고 말하고는 같은 연기를 몇 차례나 반복시킨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배우들은 ‘오버’하는 연기를 하게 되고, 12~14 테이크 정도에 이르면 점점 지치기 시작하여 힘을 아끼려고 한다. 큐브릭은 그래도 연기를 계속 반복하라고 지시한다. 마침내 배우가 더 이상 다른 연기를 보여줄 수가 없을 지경이 돼도 큐브릭은 재촬영을 계속 반복한다. 그리고 수 십 테이크 째에 이르면 ‘맛이 간’ 배우들은 평소 하지 않던 기괴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괴성도 질러가며 말이다. <샤이닝>에 삽입된 잭 니컬슨의 광기어린 연기 신은 모두 ‘그 단계’의 테이크라고 보면 된다.”

게다가 비디오같은 매체도 표지까지 자신이 보고 마음에 들때까지 내지 못하게 했다. 그것은 해외 출시판도 예외는 아닌지라, 한국어일본어를 몰랐지만 완벽주의답게 해당언어 유학생을 고용하여 철저하게 점검했다고 한다. 그밖에도 한국판 비디오와 일본판 비디오에 걸쳐 저 멀리 터키판 비디오까지 정식으로 출하하기전에 표지를 받아서 자기 마음에 들 때까지 다시 내라고 요구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한국어판 비디오로 낸 우일비디오 측만 해도 4번이나 마음에 안 든다고 계속 표지를 새로 만들어서 큐브릭에게 확인해야 했다. 터키같은 경우는 12번씩이나 거부하여 그 비디오 업체는 뭔 판권비보다 비디오 표지를 또 만들고 검토받고 하는 돈이 더 많이 들겠다면서 이후론 다시는 큐브릭 영화를 계약하지 않았다는 후문까지 있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기행과 비밀, 완벽주의 때문에 악명(?)이 과장된 측면은 꽤 있다. 위에서도 잠깐 나온 이야기지만 스티븐 스필버그와 같은 업계의 유명한 감독들과의 친분도 꾸준히 유지했고, 아서 C. 클라크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때 함께 작업한 이후[10] 큐브릭이 죽기 전까지 쭉 친분을 유지했다고 한다. 큐브릭이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었다면 늘 함께 일하는 촬영 감독과 조력자들[11]이 있었을 리 없고, 《시계태엽 오렌지》 이래로 늘 워너브라더스가 그의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또한 공들여 만든 세트나 소품 등을 일단 촬영이 끝나면 전부 부숴버리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나중에 싸구려 영화에 재활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덕분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촬영에 사용된 디스커버리호를 비롯한 각종 우주선들은 원형이 남아있지 않아 오늘날에도 그 흔한 플라모델 하나도 만들 수가 없는 상황이다(...).

3. 미국내 흥행실적

스탠리 큐브릭이 감독을 맡았던 영화가 워낙 대중스럽지 않은 것 같아서 큐브릭의 영화는 흥행을 못 했다는 오해가 많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제작비: 약 180만 달러
흥행: 944만 272 달러

제작비: 약 1050만 달러
흥행: 5671만 5371 달러

제작비: 약 220만 달러
흥행: 2658만 9355 달러

제작비: 약 1100만 달러
흥행: 2천만 달러

제작비: 약 2200만 달러
흥행: 4401만 7374 달러

제작비: 약 3000만 달러
흥행: 4635만 7676 달러

제작비: 6500만 달러
흥행: 5563만 7680 달러(유일하게 흥행 실패작)[12]

이걸 봐도 알겠지만 1970년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함께 만들고 싶은 영화 만들면서 돈 번 감독으로 꼽을 수 있다. 저 가운데 흥행 성적(제작비 대비)이 가장 낮은 《배리 린든》도 적어도 본전은 뽑았다. 오히려 큐브릭이 만드는 영화마다 흥행을 한 것 때문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찍은 직후까지의 큐브릭은 공공연하게 흥행운이 더럽게 없었던 오손 웰즈에 비교되면서 예술가인척하는 상업 감독이라는 평론가들의 혹평과 공격에 시달렸고 큐브릭도 평론가들의 공격에 날카롭게 반응하곤 했다.

4. 기타

말년에는 거의 은둔자가 되어 영국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괴팍한 성향이 되어버렸다. DP의 칼럼니스트 김정대는 그의 말년이 미국의 사업가 하워드 휴스가 연상될 정도라고 할 정도였다. 이러한 일례로 마지막 작품이 된 《아이즈 와이드 셧》의 배경이 되는 미국 뉴욕의 번화가는 뉴욕에서 찍어 온 사진을 참고하여 영화 세트장을 재구성한 것으로, 실제로는 영국의 영화 세트장에서 찍었다. 즉, 큐브릭은 《아이즈 와이드 셧》 촬영을 위해 절대로 미국에 가지 않았다. 사실 이러한 성향은 이미 《시계태엽 오렌지》를 찍을 때부터 드러났다.

미묘하게 타이밍이 어긋나서 기획이나 제작이 좌초된 영화가 몇 있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이후에 나폴레옹을 영화화할 예정이었지만, 비슷한 영화인 《워털루》가 대차게 말아먹은 탓에 투자자들이 투자를 포기해서 나폴레옹 제작은 결국 무산되어 버렸다. 또 1990년대에는 대량 학살을 소재로한 《아리안 페이퍼즈》라는 영화를 기획하고 있었지만 비슷한 소재의 영화인 《쉰들러 리스트》가 나와 버리는 바람에 결국 제작을 포기하고 말았다. 사실 여기에는 큐브릭의 아픈 기억이 크게 작용했는데 《풀 메탈 재킷》을 만들었을 적에 비슷한 소재의 영화인 《플래툰》이 나와 버려서 두 영화가 서로 비교당하고 흥행(그래도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과 아카데미 수상을 다 날려 버린 경험이 있기 때문.

원래는 비행기를 직접 조종하고 조종사 면허증까지 있었지만, 비행기를 조종하던 중에 사고를 낸 적이 있었고, 잘 알던 카메라맨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면서 그 카메라맨의 타 버린 카메라를 보게 된 이후로는 비행 공포증이 생겨서 비행기 타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이 때문에 큐브릭은 영국에서 영화를 찍게 됐다. 《배리 린든》이 영국 바로 옆의 아일랜드에서 로케이션을 한 외에는 대부분의 영화는 영국에서 촬영했는데 심지어 《풀 메탈 재킷》은 런던 부근의 폐공장에다가 수입한 야자수를 심어서 베트남같이 보이게 했을 정도(....)지옥의 묵시록 같이 촬영하다 사람 여럿 잡을 일은 없었으려나...? 게다가 영상의 특수효과에 대해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자문을 구하자 런던으로 불러서 런던 교외의 집에서 캐머런과 만난 일도 있었다. 예외적으로 샤이닝을 찍기 위해서 미국에서 영화를 촬영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영국에 정말 미국 호텔같은 호텔을 짓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사실 그의 대표작은 죄다 영국에서 찍었지만 반 할리우드파 감독들의 소굴인 뉴욕파 감독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실제 뉴욕파의 거장인 이탈리아계의 마틴 스코세이지우디 앨런 등 뉴욕파와 교류가 깊었다. 또한 영국 출신인 리들리 스콧이나 테리 길리엄과도 상당히 친했다고.

앞서 말한 대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도 친밀한 사이였고 두 사람이 함께 《A.I》의 기획과 각본에 대해 의논했지만, 큐브릭은 비행 공포증이 있었고, 스필버그는 할리우드에서 바빴던 탓에 결국 두 사람은 국제전화로 영화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스필버그는 어마어마한 국제전화료를 물어야만 했다고 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집 《파라다이스》에 실려 있는 작품들 중 '영화의 거장'이라는 작품에서 이 사람을 풍자하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패러디 인물인 '데이비드 큐브릭'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비밀로 하는 신비주의 컨셉. 일단 작품상에서는 스탠리 큐브릭의 자손으로 나온다.

스탠리 큐브릭에 관한 양질의 정보를 다루고 있는 것중 《스탠리 큐브릭 - 영화 속의 인생》(Stanley Kubrick: A Life In Pictures) 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큐브릭 감독의 영화를 제작해오던 얀 할란이 2001년에 감독한 다큐멘터리인데, 2시간 20분짜리 다큐로 큐브릭 팬이라면 정말 재미지게 볼 수 있다. 내레이터는 톰 크루즈가 맡았다. 다큐를 보면 모두 큐브릭을 존경하고,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고 그런다. 다시는 그의 작품을 볼 수 없고, 다시는 그와 함께 작업할 수 없다는 것도 안타깝게 여기고,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이 즐거웠다고도 하고. 물론 힘들긴 정말 오질나게 힘들었다고도 하지만.(…)

샤이닝부터는 4:3 화면비를 고집했는데, 이미 1.85:1, 2.35:1이 극장가를 주름잡은지 한참 지난 이 시기에 4:3으로의 회귀는 확실히 특이하다. 샤이닝 이전에 4:3으로 촬영한 마지막 작품은 흑백영화 영광의 길이었고, 이후로 쭉 시네마 스코프 화면비를 써왔다. 이후 출시된 dvd들은 위 아래를 잘라내 억지 1.85:1로 출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호기심이 무척이나 많아 평상시나 영화 촬영 때 주변 지인들에게 별의별 질문들을 답변자가 답을 할 때까지 물어봤다고 한다.

아폴로 계획 음모론자들이 단골 떡밥으로 삼기도 한다. 음모론자들이 흔히 주장하는 내용이 '아폴로 달 착륙 화면은 사실 큐브릭이 CIA와 계약하여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촬영 중간중간에 섞어서 몰래 찍은 가짜 화면이다.'라는 것. 음모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큐브릭이 만년에 영국을 떠나려 하지 않았던 것도 CIA에게 암살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라고 한다. 이를 반박하는 측에서는 "스탠리 큐브릭이 착륙 화면을 찍은 것은 맞다. 다만 그의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달에 직접 가서 촬영한 것이다"며 돌려 까기도 한다.

《샤이닝》을 찍을 때 즈음의 모습이 전성기의 피터 잭슨과 매우 흡사하다. 잭슨이 반지의 제왕 찍을 때의 모습과 샤이닝을 찍을 때의 큐브릭을 비교해보면 움찔 놀랄 정도.

5. 스탠리 큐브릭의 작품들

* 따로 원작이 있는 것은 ★표시를 첨부하되 원작의 제목이 다르면 제목을 따로 표기한다. - 혹여나 원작이 있는데 별기가 없으면 추가바람

딱 봐도 느껴지겠지만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작품과 작품 사이의 간격이 굉장히 긴 편이고, 그나마도 자꾸만 그 간격이 길어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6. 기행

큐브릭에게는 집착하는 대상이 유난히 많았다. 그중 하나가 활판술이다. 그는 서체에 관한 책을 엄청나게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모드 영화 포스터에 푸투라체를 사용할 것을 고집했고, 스태프들과 밤새도록 다양한 서체의 장점에 대해 논쟁을 벌이곤 했다. 큐브릭이 좋아하고 집착하는 또 하나는 문구였다. 종이, 패드 ,상자등 문구에 관한 모든것에 집착햇다. 그는 직원들에게 반드시 6인치:4인치 비율의 종이에만 메모를 하도록 명령했다. "스탠리는 6인치:4인치 크기가 메모하기엔 최적격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직원의 말이었다. 한번은 그가 좋아하는 특정상표의 잉크가 절판이 된다고 하자 시중에 남아아있응 잉크 백여 통을 모두 사들였다. 그는 또한 상자에 열광했다. 상자뚜껑이 열기 불편한 것에 짜증난 큐브릭은 상자 회사에 연락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자 4백 개를 주문, 제작한 적도 있었다. 큐브릭은 딱따구리 만화를 매우 좋아해서 그의 모든 영화에 만화를 삽입하고 싶어했지만 딱따구리 만화가 월터란츠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큐브릭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겁이 많았는데, 특히 세균을 무서워해서 감기든 사람은 그의 촬영장에 접근 금지였다. 운전기사에게는 시속50킬로미터 이상으로 달리지 못하게 했다. 큐브릭은 아팠을 때 치료받을 의사를 선택하는 데에도 무척이나 까다로웠다. 모르는 의사에게 진찰을 받으려고 하지 않아서 영국에 있을 때 브룽크스의 주치의 치과의사를 영국까지 부른 적도 있었다.하지만 치과의사가 영국 면허증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 대사관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13]

그는 동물 애호가였다. 《풀 메탈 재킷》 촬영때 촬영장에서 사고로 토끼 가족이 죽은 사고가 일어났었는데 이것에 몹시 화가 난 큐브릭은 그날 일정을 모두 취소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2001:스페이스 오딧세이》 제작 동안 NASA의 화성탐사에 점점 피해망상증을 보였다. 탐사 결과 화성에 생명체가 있는것으로 밝혀져 그의 영화보다 앞서 주목받게 될 것을 두려워 해서 런던 로이드 보험사에게 예상되는 손실에 대비한 보험을 들게 해줄 것을 요청했다. 보험사의 대답은 NO였다.

큐브릭은 자신의 시나리오를 모두 테이프 리코더에 저장했다고 한다.

큐브릭은 인터뷰 한 번 하지 않고 10년을 조용히 보낸 적도 있다. 간혹 기자나 영화 학도들이 큐브릭에게 질문 한 번 해보려고 그의 집 현관에 모습을 나타내곤 했다. "지금 집에 없어요" 라고 큐브릭이 스스로 말하며 방문객의 면전에서 문을 닫아 버렸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통했다. 다만 이것 때문에 1990년대 초에 알란 콘웨이(Alan Conway)라는 웬 사기꾼이 이 사람을 사칭하고 다닌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7. 취미

큐브릭은 어릴 때 부터 체스에 열광했다. 그리고 실제로 잘 두었다. 세 번째 영화 《두려움과 욕망》의 제작비는 거의 전적으로 큐브릭이 뉴욕의 워싱턴 스퀘어 공원에서 체스 경기를 통해 얻은 상금으로 충당했다. 큐브릭은 체스뿐 아니라 탁구도 좋아했다. 그래서 자신의 많은 영화에 탁구 장면을 삽입했다. 큐브릭은 영국의 자신의 집 지하에 세계 최고수준의 탁구대를 설치했다. 방문객들은 종종 그와 탁구 경기를 해야 했는데, 큐브릭은 배우들과 하는 것을 좋아 했다.탁구에서 배우들에게 이기면 촬영장에서 그들을 더 쉽게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큐브릭은 앨런 아킨과 임스 칸 주연의 코미디 《프레비와 빈》을 좋아했다. 큐브릭은 이 작품을 터무니 없게도 1974년 최고작으로 손꼽았다. 그가 좋아하던 TV프로그램은 《로잔느 아줌마》, 《심슨 가족》, 《인필드》 였다. 그가 좋아하는 영화중 하나는 스티브 마틴이 흑인 소작인에게 입양된 멍청한 백인 역을 연기한 코미디 《the jerk》였다. 큐브릭은 마틴의 연기가 너무 웃겨서 그를 《아이즈 와이드 셧》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고 내용을 섹시 코미디로 바꾸려고 했다. (큐브릭이 마틴을 만나 정말 진지하게 논의했지만 그런 영화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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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다만 NC가 스탠리 큐브릭 감독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일단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20위에 시계태엽 오렌지아이즈 와이드 셧을 포함시키기도 했고, A.I.에서는 스티븐 스필버그를 큐브릭과 비교하며 깐 데다가, 이 발음을 가지고 농담한 샤이닝 에피소드도 스티븐 킹이 각본을 맡은 TV 드라마 시리즈를 깐 것이었으니...
  • [2] 도리어 부모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오스트-헝가리 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해 두 번째 아내는 오스트리아인 발레리나였고 세 번째 아내는 독일인 배우였다.
  • [3] 그 단체는 이스라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단체였고, 기부한 돈이 이스라엘로 흘러들어가 전쟁원조금 될 것을 안 스탠리 큐브릭은 굉장히 냉소적으로 이미 자신은 미국 정부에 세금 내서 이스라엘의 전쟁을 원조하고 있다면서(...) 거부했다.
  • [4] 하지만 상업성에 관련된 발언은 사실 틀린 말도 아니며, 그만 이런 말을 한 게 아니다. 앨프리드 히치콕은 "여긴 할리우드일 뿐이야." 라는 말을 한 바 있고, 할리우드에 뿌리를 내려 많은 것을 손에 쥔 유대인들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같은 유대인이면서도 이런 할리우드의 노골적인 상업성에 혐오를 느껴 대부분 영화를 저예산 영화계로 활동한 사무엘 풀러(마견 감독/1911~1997)는 되려 유럽 예술 거장(장뤼크 고다르, 빔 벤더스)들에게 거장으로 더 우대받았었다. 풀러도 "할리우드로 가자면 돈이란 소리에 적응해야만 한다. 유감스럽게도 유대인들의 잔소리와 같이." 이런 말을 했음에도 그는 별다른 논쟁도 되지 않았는데 큐브릭은 엄청 욕먹었으니 저런 이들에게 분노할 만했다.
  • [5] 반에서 거의 꼴찌 수준이었다고 한다(...). 본격 인생의 승리자가 된 반 꼴찌
  • [6] 그런데 정작 가톨릭은 페도필리아 성향의 신부들로 인해 서구 사회에서 큰 물의를 빚은 바가 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건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거다.
  • [7] 큐브릭이 스테디캠의 원조격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이 촬영기법은 그전부터 존재하던 것이고 큐브릭이 워낙 효과적으로 이용해서 유명해진 것이다. 사실 개릿 브라운이 고안한 장비로 촬영한 《록키》가 《샤이닝》보다 훨씬 이전에 스테디캠 방식을 활용했다.
  • [8] 배트맨 팬들은 다 알겠지만 1989 배트맨에서의 조커 역시 기존의 조커 이미지를 뒤흔들어 버릴만큼 완성도 높은 연기력을 보여줬다.
  • [9] 여담으로 대니 토런스 역을 맡았던 대니 로이드는 7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없는 재촬영에 투정하지 않고 침착하게 연기에 임해서 주변을 놀라게 했다.
  • [10] 물론 클라크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소설을 출간할 때 큐브릭의 완벽주의 때문에 책을 출간하지를 못해서 환장할 뻔했다는 일화가 있긴 하다(...).
  • [11]배리 린든》에서 불링던 경 역을 맡았던 레온 비탈리는 그가 죽을 때까지 그의 조수로 일한 바 있다.
  • [12] 그래도 월드와이드 흥행 성적 1억 6000만 달러로 본전은 뽑았다.
  • [13] 대사관저는 해당 국가의 땅으로 취급되어 미국의 의료면허가 효력을 발휘하는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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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27 17:4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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