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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

last modified: 2015-11-08 06:28:07 by Contributors

1936년 로버트 카파가 촬영한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Spanish Loyalist at the Instant of Death)>[1]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스페인에서 벌어진 전쟁.


스페인 내전
날짜
1936년 7월 17일 - 1939년 4월 1일
장소
스페인 전지역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스페인 공화국
전국 노동 연맹
국제여단[2]
소련
멕시코
스페인 국민군
팔랑헤
왕당파
이탈리아
나치 독일
포르투갈
지휘관 마누엘 아사냐
훌리안 베스테이로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
인달레시오 프리에토
비센테 로호 유치
호세 미아하
후안 모데스토
후안 에르난데스 사라비아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메흐메트 셰후
호세 상후르호†
곤살로 케이포 데 야노
에밀리오 몰라†
프란시스코 프랑코
후안 야궤
마누엘 고데드 요피스†
미겔 카바네야스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병력 보병 450,000명
전투기 350대
대포 200문
보병 600,000명
전투기 600대
대포 290문
피해 규모 불명 불명
결과
스페인 국민군의 승리
기타
프랑코 독재 시작
승리한 국민군은 패배한 공화국에 대대적인 숙청 자행













Contents

1. 전쟁 이전
2. 내전 발발
3. 내전 진행
4. 공화국의 상황
5. 반란군의 상황
6. 외부세력의 개입
6.1. 공화국 정부 지원 개입
6.2. 국가주의파 정부측 지원
7. 신병기와 군사전술의 실험장화
8. 비극의 발생
9. 내전의 종결
10. 결과
11. 관련항목













1. 전쟁 이전

당시 스페인은 왕정의 무능과 정치적 부패 등으로 정세가 혼란해져 있었다. 스페인 제1공화정부터 이시점까지 무려 40여차례의 쿠데타와 60여차례의 정치적 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군부는 심심하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다 1929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사회가 혼란하다는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알폰소 13세는 이 쿠데타로 집권한 리베라 장군을 승인했다.

리베라 정권은 기득권층의 권력을 옹호했지만 이내 닥쳐온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가 어려워진데다 리베라의 갖가지 실책으로 결국 공화주의자들은 물론 기득권층까지 리베라에게 등을 돌렸다. 리베라는 다시 군부에 지지를 호소했으나 실패하자 결국 총리직에서 사임한다. 알폰소 13세는 분노한 국민들을 달래기 위해 총선실시를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1931년 총선에서 공화파는 대승을 거두었고 알폰소 13세는 퇴위하여 프랑스로 망명하고 스페인은 공화국이 된다. 이에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공화주의적 좌파정권이 출범했으나 기존의 기득권층인 지주들과 교회, 군이 중심이 된 보수파는 이들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 중 교회의 경우에는 보수파의 중심이 되었긴 했지만 당시 스페인 영토의 무려 3분의 1이 교회 소유였다는 낭설과는 다르게 교회는 1837년의 자유주의 개혁으로 인해 교구 소유의 토지를 대거 매각했고, 이때 교회가 매각한 대부분의 토지는 귀족과 상층 부르조아의 소유가 되었다. 1936년 시점에서 교회라는 조직 자체는 몰라도 개별 성직자는 절대 부유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토지는 일반 지주의 것이었다. 그래서 스페인 각 지역의 성직자들은 내전 발발시 양측 진영에 따로 나뉘어 소속되거나 중립을 지키는 등 교회 자체의 의향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했다. 어쨋든 1932년까지 0.97%의 지주가 농지의 42%를 소유했고, 1932년에 공화파에 의한 일부 농지개혁이 행해졌으나 단 9만 헥타르가 분배되었을 뿐이며 이나마도 비경작지를 분배한 것이라 실제적인 효과는 거의 없었을 뿐더러 보수 세력과 중도 세력의 급격한 반발만 초래했다. 전통적으로 스페인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 했던 스페인 군부 또한 공화국 정권의 군부 개혁 노력에 반발에 극우화의 길을 걸었으며, 1932년에는 산훌호 장군을 필두로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으나 사전 발각 되어 실패했다.

더군다나 가톨릭 교회와의 갈등까지 겹치면서 공화파는 위기를 맞았고 결정적으로 노선의 차이로 인해 1933년 총선에서 공화파, 급진파,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연대가 해체 되자 우파들은 좌익을 밀어내고 정권이 교체되었다. 우파정권은 토지개혁을 중단하고 아사냐 정권의 각종 개혁정책들을 후퇴시켰지만, 군대를 동원해 무리하게 노조운동을 탄압하면서 지지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아스투리아스 혁명). 설상가상으로 정치 스캔들이 겹치면서 지지가 바닥으로 치닫게 되자 1936년 바야다레스 정권은 코르테스(스페인의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하기로 결정한다.

1933년 총선패배를 타산지석으로 삼은 좌파는 1933년 총선에서 우파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동단결하기로 결정했다.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공화주의적 좌파와 라르고 카바예로가 이끄는 과격한 마르크스주의 좌파,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이 연대하여 인민전선을 결성했다. 우파도 연합세력을 결성하고 치열한 선거전이 펼쳐진 끝에 선거 결과 불과 15만표차로 인민전선이 초박빙 승리를 거두었다.

다시 좌파정권이 등장하자 우파들은 공공연히 스페인에서 러시아처럼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외치면서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좌파 역시 총선 패배시 공공연하게 인민전쟁을 통한 정권 탈환(…)을 주장할 정도였다. 만에 하나 우파가 집권했다해도 스페인 내전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높았기 때문에 이 점을 잘 아는 좌파정권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쿠데타를 일으킬 위험이 있는 우파성향의 장군들이 멀리 추방되었는데 프란시스코 프랑코카나리아 제도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프랑코 파 군인들이 이미 영국편을 통해 비행기를 구해 놓고, 독일을 통해 병사들을 운송할 수송기와 함선들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쿠데타 발발 직후 프랑코와 당시 스페인 군에서 그나마 제대로 된 정예병들이었던 아프리카 군단 47,000명은 신속하게 스페인 본토로 건너 올 수 있었다.

이미 좌파정권에는 프랑코 등이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음에도 대통령이던 마누엘 아사냐나 총리이던 카사레스 키로가나 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스페인 내전의 향방을 가르는 요소가 되었다.

2. 내전 발발

노동자! 농민! 안티 파시스트! 스페인의 애국자들이여! 파시스트의 군사 반란에 직면하여, 모두 스스로 일어서 공화국과 인민의 자유 그리고 민중이 이루어낸 민주적 위업을 수호해야 합니다! 정부와 인민전선의 성명을 통해 인민 여러분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습니다. 모로코와 카나리아 제도에서는 노동자들이 아직 공화국에 충성하는 세력과 연합하여 파시스트 반군에 대항하는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파시즘은 지나가지 못한다;그들은 통과하지 못한다!'라는 기치 아래 스페인 모든 지역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공화국의 적에 대항하기 위한 투쟁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그리고 공화국의 민주주의자, 군인들 그리고 아직 공화국에 대한 충성이 남아있는 모든 세력들이 힘을 합쳐, 군이 오랜 시간 자랑스레 지켜온 고결한 전통을 더럽혀 버린 파시스트 적들에게 최초의 패배를 안겨 주었습니다. 전국토가 스페인을 공포의 심연과 죽음으로 처박아 버리려는 잔혹한 야만인들에게 분노하여 치를 떨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통과하지 못할 것입니다. 스페인은 지금 전쟁에 휩싸여 있습니다. 마드리드에서는 민중이 거리로 나와 정부를 지지하고 정부의 결정에 대한 격려를 보내며 파시스트의 반란과 반군을 쳐부수기 위한 투지에 불타고 있습니다. 청년들이여, 전투를 준비합시다! 여성들이여, 인민의 용맹한 여성들이여! 1934년 아스투리아스 여성들의 영웅심을 다시 불러내어 파시스트의 위협에 그늘진 당신의 아이의 삶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남성들과 함께 힘을 합쳐 투쟁합시다! 국민의 아들인 병사들이여! 진정한 공화국에 머물러 노동자들 인민전선의 군인들 그대의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그대의 동지의 옆에 서서 함께 투쟁합시다! 2월 16일의 스페인을 위해, 공화국을 도와 승리하기 위해 투쟁합시다! 모든 정파의 노동자들이여! 정부가 우리에게 쥐여준 무기는 10월의 피비린내 나는 교수 집행자가 승리하여 도래하게 될 수치와 공포로부터 스페인과 민중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누구도 주저해선 안됩니다! 모두 싸울 준비를 합시다. 모든 노동자들, 모든 안티파시스트 여러분은 이제부터 서로를 전우로 보아야 합니다. 카탈로니아, 바스크, 갈리시아의 인민들이여! 모든 스페인인들이여! 우리의 민주 공화국을 수호하고, 우리가 2월 16일에 이룩한 승리를 확고히 합시다.[3] 공산당은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특히 노동자들, 농부들, 지식인 여러분이 공화국과 민중의 자유의 적들을 타도하여 최후의 승리를 이루어 낼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싸워주길 원합니다. 인민전선이여 영원하라! 안티 파시스트 연합이여 영원하라! 민중의 공화국이여 영원하라! 파시스트들은 지나가지 못한다! 그들은 통과하지 못한다!(NO PASARAN!)[4]
- 돌로레스 이바루리, 1936년 7월 19일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1936년 7월 18일, 반란군은 몰라 장군의 지시에 따라 모로코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이들 반란파를 통칭해서 랑헤당 또는 국가주의(Nationalist) 세력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자유민주주의가 연합한 공화정부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단일 정파는 아니었고 당파, 파시스트, 롤리스타 등 여러 세력이 연합해 있었다. 물론 국민군내 대표적인 정당은 팔랑헤당이었다.

반란 자체는 수도인 마드리드 장악에 완전히 실패하는 등 멍청이같이 진행되었으나, 이걸 막을 공화군도 오비에도라는 도시에서는 반란군에 참여한 것을 속인 반란군 지휘관에 의해 도시 밖으로 물러난 후 도시를 빼앗기는 등 마찬가지로 멍청이같이 행동했다. 이는 양측 모두 실전경험이 눈꼽만큼도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리하여 양측의 뻘짓으로 반란 자체는 실패에 가깝게 진행되었지만, 적어도 본토의 35% 정도가 반란군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 당시의 지도를 보면 혼란의 극치라고 할 정도로 반란군 지배지역과 공화군 지배지역이 섞여있는 형국이었다.

여기서 이후에 벌어질 결과를 생각해볼 때 공화국의 패배는 이미 쿠데타 시작 과정에서 상당부분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사라고사, 세비야, 바다호스 등 내전 초기 국가군의 핵심 전략적 거점이었던 상당수 도시들에는 쿠데타 세력과 결사항전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 계열 전투 노조원들이 수 만명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공화국 수상이었던 카사레스 키로가가 쿠데타 음모를 쿠데타 발발 이후 4일째 까지 부인하고 또한 이에 대비하여 노조들에게 무기를 분배하라는 조언들을 모조리 씹고 있다가 결국 쿠데타군에게 대도시 여럿과 무기만 있었으면 바르셀로나, 마드리드에서 한 것 처럼 소수였던 쿠데타군을 밟아 버릴 수 있었던 좌익 전투 노조원 수만명의 목숨만 내주었다. 특히 전쟁 발발 전까지만 하더라도 '붉은 세비야'라 불릴 만큼 좌파의 영향력이 강했으며, 전국적으로도 제 3의 도시였던 세비야를 제대로 싸우지도 못 하고 케이포 데 야노에게 상실한 것이 뼈아픈 실책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세비야 뿐만 아니라 안달루시아 지방 전체가 가난한 소작농들이 인구의 대부분인 좌경화가 강한 지방이었고, 해군을 여전히 공화파가 잡고 있으며 이 당시 항공 기술은 대규모의 병력 수송에 부적합했으니 이 세비야의 쿠데타만 잘 막았으면 스페인 내전의 남부 전선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안달루시아에서 깨적 깨적 진군하는 국가군을 막느라 똑같이 낭비했던 전력을 파시스트 세력의 중심이었던 중부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 갔으면 국가군은 뭔짓을 해도 1939년 여름 이전에 전쟁을 끝내지 못했을 것이며, 이 때까지 내전이 이어졌으면 우리가 잘 아는 나머지 유럽사의 흐름 때문에 더이상 내전이 아니게 되었을 것이고, 스페인이 프랑코 통치 아래 40년간 고생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군대의 질과 외부의 지원, 장비, 내적 통합 면에서 반란군인 국가군에 비해 현저한 열세에 있었던 공화국 정부는 이렇게 초반의 결정적인 타이밍을 놓치자 전쟁 내내 끌려 다닐 수 밖에 없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개전 초반 아무런 정신이나 통제력이 없었던 것은 공화파 정부나, 쿠데타 세력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조직력 면에서 후자가 딱 종이장 한장 차이로 나았다는 점에서 여러가지 흥미로운 주제이다.

3. 내전 진행

결국 독일이탈리아의 수송기를 지원받은 프랑코 휘하의 정예병력이 본토에 상륙하면서 급속진격하여 반란군이 지배하던 영토가 하나로 이어졌다. 이렇게 된 이유는 스페인에서 그나마 실전경험이 있고 정예화되었다고 볼 수 있는 집단이 바로 에밀리오 몰라, 프랑코 등이 배속 되었던 식민지 아프리카군이기 때문이다. 당시 스페인 군에서 유일하게 지속적인 실전 경험이 있던 집단이다 보니 국가군의 초기 진공과 최종적인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야전에서 이들은 실질적으로는 총만 쥔 민간인이나 다름 없었던 좌파 민병대를 상대로 맹활약 했다.

덕분에 공화군은 혼란에 빠져서 한때 수도인 마드리드의 일부지역까지 점령되었지만, 소련에서 들여온 전차 등의 무기와 해외에서 몰려온 제 여단의 분투로 간신히 프랑코의 진격을 막았다. 여기에 더해서 좌파 민병대원들은 야전에서는 약했으나 민병대원들이 평생 먹고 살아온 자기들 뒷마당인 마드리드, 산탄데르, 빌바오 같은 시가전에서는 국가군에게 실컷 물을 먹어 국가군이 결정적인 승기를 쥘 때 까지는 도시는 공화파, 시외각은 국가군이 지배하는 구도가 유지되었다.

이후에는 양측 모두 기습작전으로는 더 이상의 성과를 거두기가 어렵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반란군인 국가군의 경우 점차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프랑코가 상당히 굼뜨게 움직이는 단점은 있었지만 대체로 공세를 성공시켰는데 반해서, 공화군은 선전의 목적으로 책상머리에서 만들어진 공세작전을 여러번 추진한 덕분에 알아서 병력과 장비를 까먹게 된다.

4. 공화국의 상황

앞서 언급했듯이 공화국은 의기는 높았으나 단결이 잘 되지 않았다.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역은 타 지역과 달리 거의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는 등 남쪽의 공화정부와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해서 투쟁했고, 사실상 국가군을 상대로 공동교전하는 입장에 가까웠다. 게다가 국가군이 지배하는 영토로 인해 남쪽의 공화정부와 분리된 상태라 처음부터 고립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의 지원도 매우 어려워서 결국 남부의 지원없이 방어전을 치르다가 박살난다.

그나마 바스크 방면은 스스로 알아서 잘 싸우기라도 했지 남쪽의 공화정부쪽 영토는 진짜로 심각한 분열이 발생했다. 가장 큰 사건으로는 프랑코와 싸우는 중, 아나키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의 혁명노선에 대한 견해 충돌로 자신들끼리 내전을 벌인 사건이다. 바르셀로나에서 벌어진 이 내전에서 결국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하는데, 이 사건은 공화군내 결속력이 얼마나 약했는지 알 수 있는 사례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ㅡ영화 <랜드 앤 프리덤> 등을 참고하면 좋다.

여기에 더해서 국가군 몰라 장군의 '제5열' 드립이 터졌다. 이 사건은 몰라가 마드리드 공세를 앞두고 기자들한테 "우리에게는 공세에 참가할 4개 부대 외에도 전투가 시작되면 마드리드 안에서 봉기할 '제5열'이 있다!!"라고 친 허세드립이다. 물론 몰라의 마드리드 공세 자체는 탈탈 털렸고 제5열같은 것은 없었지만, 이후 '제5열'은 공화군 내에서 일종의 도시전설이 되어버렸다.[5] 그래서 전쟁이 진행될수록 공화국 내 분파들끼리 '우리들 가운데 제 5열이 있는 것 같아'란 의심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그리고 제5열에 대한 두려움이 공화국 내의 소수파들을 찍어누르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공화군의 결속력은 더욱 막장의 바닥까지 떨어져간다. 위에서 서술한 바르셀로나 내전 같은 경우에도 양측이 서로 내세운 명분 중 하나가 '저놈들이 제5열이다!!'였으니 이래서야...

또한 군부의 지도력이 부재했으며, 결정적으로 반란군보다 전쟁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군대를 지휘한 덕분에 가지고 있던 병력과 물자와 장비를 앞서 언급한 온갖 뻘짓을 하면서 말아먹기를 수차례 하였다. 결국 프랑코 한 사람 밑에서 굳게 단결된 반란군에게 패배를 거듭하게 된다.

더 안좋은 것은 이런 무능한 지휘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공화국 정부의 높으신 분들은 대외적인 이미지를 개선하고 더불어 공화국에 대한 세계 여론의 동정을 사서 내전을 유리하게 이끌겠다는 계산이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국가군의 병력과 전력을 분산 시켜 마드리드에 대한 압박을 줄인다는 전략적 당위성을 해결할 필요도 있었다. 따라서 이유 자체만 본다면 그럴 듯 했다.

그러나 당시 국제 관계의 역학 자체가 아무리 공화국이 동정을 많이 사도 소위 말하는 '외교적 승리'라는게 불가능 하다는게 뻔하게 보이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무시했으며, 대외적인 이미지를 위해 삽질성 과시용에 가까운 전면 공세를 한번도 아니고, 두번도 아니고, 1937년 중반부 부터 브루네테, 테루엘, 에브로에서 세번이나 독일과 이탈리아제 무기로 중무장을 한 국가군이 쉽게 야전에서 공화군을 격파 할 수 있도록 소중한 병력과 물자를 갔다 바쳤다.

여기에는 전략적인 실수도 있지만 전술적으로도 경험 없고 미숙했던 공화국 지휘관들의 삽질도 컸다. 따라서 차라리 스페인 특유의 험한 산지를 이용해서 장기 농성전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나았지만 끝까지 이런 점을 버리지 못하고 전면공세를 고집한다. 실제로 공화국이 방어전을 선택할 경우 저질 수준의 지휘관과 저급 병력, 부족한 군수지원에도 불구하고 전면 공세보다는 당연히 더 오래 버틸 수 있었고, 실제로 1938년 중순 아라곤의 험난한 산지에 XYZ 라인이라는 방어선을 설치 해 국가군의 공세를 돈좌 시킨 적도 있었는 만큼 실효성도 입증된 지 오래였다.

게다가 공화국의 수뇌부가 이렇게 바보 같은 공세를 남발하기 시작한 시점 자체가 바르셀로나 5월 사태 이후로 원래 공화국을 구성하고 있었던 정파간 다양함이 사라지고 대중적 기반은 적었던 주제에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고 설친 공산당과 이와 손을 잡은 후안 네그린 총리가 스페인을 미니 소련화하며 일당 독재를 밀어 붙히려고 난리 치던 때였는 것도 주목할 만 하다. 원래 모스크바에 기반한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는 공산당은 스페인에서 겨우 1921년에야 창설 됬고, 그 세력도 다른 비소련계 좌파에 비해 세력이 현저히 적었다. 이 당시 대중적 기반과 동원력을 기준으로 두면 좌파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던건 아나키스트 CNT였고, 그 뒤로 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과 그 휘하 UGT가 있었으며, 공산당은 저어어 멀리 동떨어진 3위 수준의 세력 밖에 없었고, 그나마 이것도 본인들 입장에서는 불구대천의 원쑤인 트로츠키주의 계열 POUM을 위시로한 비소련계 공산주의 정당들과 위태위태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구도를 한번에 뒤집은게 바로 나머지 '자유'진영의 방기와 소련의 지원이다. 따라서 이전과 달리 권력에 대한 견제가 전혀 없이 네그린과 공산당 쪽 지도부만 모여서 그들 안에서만 작전을 짜고 전쟁을 해먹으려고 하니 이런 삽질을 태연히 저지른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내 건 공화국이 막상 비민주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니 제대로 망조가 났다는 점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소련군의 태도도 문제가 되었다. 앤터니 비버의 저서에 따르면 후술할 추축국의 태도와는 달리 소련군은 물론 공화군이 이기면 좋겠지만 애초에 개입할 당시만 해도 당장 서방 세계를 자극하기는 싫기도 하고, 그렇다고 스페인 공화 정부 편을 안 들어주면 세계적으로 좌파들에 대한 지도력에 문제가 생기니 도와는 주되 최소한만 도와주자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그리고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지원과 달리 그 지원도 결국에는 스페인 공화정부가 가진 금괴를 대가로 한 것이었다. 또, 환율도 소련에 유리하게 정하여 환차익을 상당히 챙기기도 했고.[6] 거기에 더해 1937년부터는 중일전쟁도 터졌기 때문에 주요 관심사가 그 쪽으로 가버렸고 지원 자체도 스페인이 애걸복걸해서 겨우겨우 유지하는 정도에 그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군의 문제 중에는 장비와 물자의 부족문제도 컸다. 일례로 총알문제가 발생했는데, 무기를 구하기 힘들어 여기저기서 구한 각자 다른 소총을 쓰다보니 자신의 총에 맞는 총알을 찾는것도 힘들었지만 이를 보지 않고 그냥 장전했다가 소총 고장 크리를 먹은 적도 많다고 한다(…).

게다가 식량이나 다른 물자에 대해서도 공화군의 보급 문제는 아주 심각했다. 일단 제해권을 국민군이 잡아 공화국 항구를 해상봉쇄한 상태여서 귀중한 소련산 군수 물자들이 항구에 들어 오지도 못하고 이탈리아 잠수함과 군함들 사이에 껴서 지중해를 빙글 빙글 돌기만 하는 일도 잦았다.

사실 내전 발발 초기에는 해군의 거의 전부가 공화정부를 지지했다. 해군에서도 육군처럼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수병들이 장교를 사살하고 반란을 진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선에 장교가 하나도 없이 사병만 있다면 전투를 하긴커녕 항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인데다가, 지휘체계가 전무하므로 이 시점에서 스페인 해군은 그냥 무늬만 해군이 되었다. 결국 독일과 이탈리아의 적극 지원을 받은 반란군이 공화국 해군을 제압했고, 도리어 공화정부를 봉쇄하게 되었다. 하지만 해군력의 부족으로 완전 봉쇄까지는 하지 못해서 소련이 보낸 무기를 실은 배들이 간간이 지중해를 통해 들어올 수 있었다. 여담으로 이 해상 수송작전을 지휘한 이가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제독. 러시아 항공모함에 붙은 그 이름 맞다.

5. 반란군의 상황

공화파의 혼란한 상황만 본다면 상대적으로 일치단결된 반란군을 운좋게 지휘한 행운아 프랑코란 이미지가 떠오를 수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당장 반란군이라고 내부 단결이 그리 잘 되었던 것만은 아니다. 되려 반란군을 형성하는 왕당파, 카를리스타, 자본가, 팔랑헤는 모두가 이념적으로 상반되는 위치에 있어서 공화파보다 일찍 내분이 터질 뻔했으나 프랑코의 권모술수에 의해 다 찍어 눌린 것이다.

구체적으로 팔랑헤만 해도 무솔리니식 좌파적 노동운동으로 시작해서 자본가 진영이나 구시대로의 희귀를 원하는 카를리스타와 반목하고 있었고, 스페인 왕정 당시 보르본 방계를 지지하는 카를리스타와 직계 보르본 왕가를 지지하는 정통 왕당파 또한 공존이 불가능한 입장. 국가군의 지도부 또한 케이포 데 야노, 후안 야구에,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같은 사람들은 여전히 공화국을 원하던 반면, 카랄리스타와 알폰소 13세파 왕당파들은 왕정 복귀를 원하는 등, 내부적 반목의 씨앗은 충분했다.

그리고 각 계파를 이끄는 수장들도 만만치 않았다. 힐 로블레스, 케이포 데 야노 등의 인물들은 능력이나 카리스마 면에서 애초에 프랑코의 상대가 안 되었고, 각종 왕당파의 수장인 왕족들이야 외국에 망명해 있었지만, 우익 군부의 수장이었던 호세 산훌호, 스페인의 자생적 파시스트 팔랑헤의 지도자였던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범보수파의 정치적 수뇌였던 칼보 소텔로 등은 짬이나 연륜이나 카리스마나 능력이나 프랑코에 의해 하등 밀릴게 없는 인간들이었다.

이런 와중에 프랑코가 국가군의 내부적 반목 요인을 모두 제거하고 일인 독재 체제를 굳힐 수 있었던 건 개인적 정치적 수완도 있었지만 운빨이 굉장히 컸다.

  • 팔랑헤의 경우에는 개전과 동시에 감옥에 있었던 지도자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가 공화국군에 의해 사형당해서 머리가 없는 신세로 전락한다.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는 변호사 출신의 팔랑헤 창시자로 알폰소 13세 때 군사 독재를 했던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장남이다. 쿠데타 소식이 터지자 마자 공화국 정부에게 체포 당해 알리칸테의 감옥에 수감 되었고, 프랑코가 포로 교환이나 석방을 위한 자금 마련, 심지어 팔랑헤의 국제적 석방 여론 조성 마저 차단하여 결국 1936년 11월 처형당했는데, 후계자를 정해놓지도 않았으므로 이 시점에서 팔랑헤는 독자적인 행보를 걸을 수 없는 신세가 된다.

  • 기존의 자본가 정당인 CEDA의 당수이자 자본가 세력 자체를 대표했던 힐 로블레스는 정치 투쟁에 관심이 없어 일찍이 해외로 도피한 상태라서 역시 머리가 없는 신세였다. 힐 로블레스는 자신이 집권했던 1933~1936년 사이 선거로 당선 된 우파 정권 때는 때 맞추어 부흥한 국제 파시즘의 기세를 타 본인도 우익 독재 비스무리하게 밀어 붙히려고 했으나, 애초에 뒷심이나 전투적인 결단력 같은 건 부족했던 사람이라 큰 일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자기 지지층이 처음에는 팔랑헤, 그 다음에는 프랑코에게 에게 홀랑 넘어 간 이후 망명지에서 보내다가 되려 같이 망명 중인 공화파 인사들과 함께 반 프랑코 모의를 꾸미는 등 별 짓을 다 하다 프랑코 사후 스페인으로 돌아와 정계 복귀를 노렸지만 끝내 실패하고 늙어 죽었다.

  • 퇴위한 왕, 알폰소 13세나 카를로스파 왕위 사칭자였던 하비에르[7]나 해외에 망명한 상태에서 군부에 의해 귀국이 차단되었고, 범 보수 왕당파의 정치적 당수이며 우익 내에서 굉장한 카리스마를 발휘 했던 호세 칼보 소텔로 의원은 내전 발발 직전 좌익 테러로 인해 암살 당했다. 따라서 왕당파도 머리가 없어진 셈이다.

  • 군부 내에서는 원래 국가군의 지도자였던 호세 산훌호[8]는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 프랑코의 경쟁자들인 료피스 고데드는 바르셀로나 쿠데타가 실패하자 공화파 민병대에게 체포된 후 총살, 에밀리오 몰라 또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였다. 몰라의 경우에는 엄청난 뻘짓으로 장군인 주제에 전쟁수행능력이 꽝이라고 낙인 찍힌지 오래라 자기 군복을 너무 실어서 비행기 무게 조정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라이프 2차 대전에 실려있다... 케이포 데 야노는 세비야와 안달루시아 일대를 장악하고 전쟁 끝날 때까지 동네 왕초 노릇하며 프랑코의 눈에 자주 거슬렸지만, 엘 카우디요[9]의 권좌를 위협할 그릇은 못 되었고 결국 전쟁 후 실권을 몽땅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도 잘 먹고 잘 살았지만.

이렇게 정적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반란군 내부 균열 또한 대패질이 되자 프랑코는 팔랑헤식 파시즘도 아니고, 왕당파나 카를리스타식의 봉건적 신정 정치도 아닌 자신만의 독재를 폈다. 뒤집어 보면 팔랑헤나 카를리스타나 프랑코에게 실컷 이용만 당한 채 배신당한 셈이다. 그나마 왕당파는 처음에는 뒤통수를 맞았으나 나중에 어느 정도 보상을 받았는데, 결국 프랑코의 후계자는 왕당파측이 지지하던 알폰소 13세의 후손인 후안 카를로스 1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왕당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카를리스타는 배신당한거 맞다.

공화파와 국가군의 내부적 단결에 있어서 핵심적인 차이는, 공화파는 소련을 등에 엎은 공산당이 점점 세력을 불려 나갔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민주적 절차에 따라 사회주의자, 공화주의자, 아나키스트, 카탈로니아 민족주의자 등 다른 정파들과 타협을 하든, 뒷통수를 치든 하는 식으로 민주적인 방법으로 정치적 갈등을 해소해야 했던 반면, 프랑코의 경우 애초에 민주주의의 탈을 쓰지 않았으니 복잡하게 생각 할 거 없이 정적들이 모두 죽었으면 그 세력들을 자기가 알아서 흡수하고 일부 팔랑헤 급진파 같이 말 안 듣는 애들은 콱 찍어 누르면 만사 오케이였다는 점이다.

더불어 후술하듯 독일과 이탈리아가 쏟았던 정성 역시 소련에 비하면 상당히 컸다. 새로운 사실을 여기에 쓰자면 독일이나 이탈리아는 오직 '프랑코 개인'에게만 지원하겠다고 함으로써 프랑크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6. 외부세력의 개입

이처럼 애초에 공화국와 반란군은 군사적으로 어느 한 편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고 하기 힘들었다. 공화국은 숫적 우위와 혁명에 대한 열기라는 점에서 우세를 점했지만, 당시 스페인 군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돌아 가는 전투 부대였던 아프리카 군단이 프랑코 휘하에 있어 군사적으로는 박빙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1936년 가을, 국가군의 진격이 마드리드 방어전에서 막혀 버리자 지금 상황에서 공화군이 역습을 가하면 바로 털려 버린다고 후안 야구에는 심각한 걱정을 표했다.

그러나 반란군이 같은 파시즘 세력인 제3제국(나치 정권 시절의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이웃국가인 포르투갈의 노골적 지원을 받고 있는 데 반해 공화파는 이런 지원을 받지 못했다. 당장 공화국이 합법적으로 선거를 통해 당선된 민주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민주국가에서의 제대로 된 지원은커녕 방해만 가득 받은 셈이다. 결국 스페인 내전의 운명은 결국 스페인이 아니라 강대국들의 외교전 사이에서 결정 되었다.

6.1. 공화국 정부 지원 개입

스페인 정부가 영국, 프랑스, 소련, 미국 등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소련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중립정책을 이유로 지원을 거부했다. 지원은커녕 돈 주고 사겠다는 무기조차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며 팔지 않았다. 레옹 블룸 총재 아래 같은 연립 좌파 정권을 이루고 있었던 프랑스는 초기에만 해도 공화국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려고 했으나 보수당 내각의 영국의 적극적인 반대와 '스페인 내전이 프랑스 내전으로 이어진다'라는 불안으로 결국 지원을 끊고 중립 태세를 유지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레옹 블룸 내각은 적어도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이 국가군을 지원 하는 것만 막으려고 영-불-독-이-미국으로 이루어진 스페인 사태 비 간섭 위원회라는 국제 기구를 만들었지만, 독일과 이탈리아는 그딴거 무시하고 계속 지원을 해 주고, 영국과 미국이 이를 암묵적으로 승인하여 결국 국제적 비 간섭 정책은 국가군에게 힘만 대주었다. 영국은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집권 보수당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쇼들보다 소련산 공산주의를 더 경계했으므로 공화국을 돕기는커녕 프랑코를 카나리아 제도에서 스페인 본토로 후송한 비행기를 제공해 주는 등 되려 은근히 국민군을 도왔다. 미국 또한 이때만 해도 고립주의적 태도를 버리지 못했고, 크런 신부휴이 롱을 필두로 한 내부의 파시즘 성향이 강한 정치적 세력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여론 자체는 공화 정부에게 호의적이었지만 결론적으로 중립을 유지했으며 결국 1937년에 교전 중인 어떤 국가에게도 무기를 판매하지 못한다는 중립법을 통과 시켰다. 이 와중에도 텍사스의 석유 재벌들과 헨리 포드 등의 기업가들은 프랑코에게 거리낌 없이 헌금을 보낸 반면, 자발적으로 스페인에 건너가 국제 여단에 투신한 미국인들은 전후 매카시즘 시절에 반미국적행위 위원회에 한번씩 붙들려 갔다.

공화파를 국가 차원에서 지원한 나라는 소련멕시코였다. 소련이 보낸 대량의 소련산 군장비 및 전투요원, 고문관이 스페인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는 공짜가 아니어서, 이들을 보내주는 대신 스탈린은 스페인 정부로부터 막대한 양의 금괴(약 3억 5,000만 달러)를 그 대가로 받았다. 그리고 전세가 기울어지고 공화파가 가진 금괴가 떨어지자 스탈린은 지원을 끊었다. 게다가 위에 서술한 지원을 대가로 한 공화국 내부의 정치적 농간질 또한 심각하게 부려서 도와준 만큼 해악도 심각하게 끼쳤다. 국가적 차원에서 진짜 '순수한'의미로, 이데올로기적 동지들을 돕자는 의도로 원조를 보낸 나라는 최근의 시코 혁명을 겪고 대통령 라사로 까르데나스를 필두로 한 전직 혁명가들이 집권했던 멕시코 밖에 없었으나, 이 또한 중립주의를 강경하게 밀어 붙힌 미국의 압력과 방해 공작에 부딪쳤다. 게다가 멕시코 자체가 대서양 너머에 있고 국력이 약하다보니 열강에 비하면 현저히 부족한 지원 능력 때문에 판을 엎을 만큼의 힘은 못 되었다. 그러나 인적인 측면에서는 적어도 멕시코가 열렬하게 도와 주워 공화파 출신 피난민들을 대거 받아 주고, 이들이 사회적으로 정착 할 길 마저 정부 차원에서 지원해 주었으며, 망명 세대로 대표 되는 스페인 문화와 예술이 나머지 서방으로 퍼지는데 큰 공헌을 했는 건 다 좋은데 막상 전쟁에 도움이 안되면 뭐해... 결국 1939년, 득의양양해진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대전을 터뜨리기 직전 루즈벨트와 처칠은 스페인 공화국을 돕지 않은 걸 후회한다고 말했으나, 때는 이미...[10]

하지만 나머지 유럽과 미국이 스페인을 그냥 버린 것은 아니었다. 정부 차원의 참가는 없었지만 개인 차원의 용병은 다수였고, 이들은 국제여단을 결성하여 파시스트 반란군과 맞서 싸웠다. 국제여단군의 구성은 대부분 자국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등의 좌파나 유대인, 미국의 경우 흑인 등의 반파시스트 운동가들이었나, 단순히 스릴을 찾는 모험주의적인 동기로 참여한 사람들 또한 있었다. 특히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폴란드, 헝가리 등 자국이 이미 파시스트들이나 우익 독재정에 넘어 간 사람들은 스페인을 자국에서 싸우던 파시즘과의 전쟁의 연속으로 보았고, 스페인 마저 넘어가면 진짜 돌아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굉장히 치열했던 사기를 보였다.

이런 식으로 공화파 정부쪽에 가담한 국가별 지원병 수는 아래와 같다.(약간 오차는 있을 듯)

그리고 위의 숫자는 공화국 정부에 의해 정식적으로 집계 된 공화국 정규군 휘하에서 싸운 국제 여단원들만 친 것이고, 공화파 측에서 싸우되 공화국 정부 휘하가 아니라 독립적으로 지휘 체계를 형성하여 싸운 POUM, CNT 등의 무장 노조 소속으로 싸운 아나키스트, 트로츠키주의자, 비 소련 계열 사회주의 의용군 또한 대략 5,000명 전후 쯤 된다고 보고있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영국 독립 노동당 소속 의용군으로 POUM 소속으로 싸웠던 조지 오웰과 아나키스트 CNT 산하 국제 의용병 부대였던 세바스티엥 퓌레 부대에 속했던 몬 베이유.

안그래도 격렬했던 20세기 초중반의 복판에 자원해서 뛰어 들어간 사람들이니 국제 여단은 종전 이후로도 전 세계 좌익 운동 사이에서 일종의 역사적 성역으로 찬양 받았는데, 뒷 배경이 이렇게 파란만장 하니 그 운명 또한 기구했고, 이런 저런 의미 있는 일화 또한 많았다. 예를 들어 미국 출신 의용군으로 구성 된 아브라함 링컨 대대의 지휘관은 하라마 전투에서 전사한 뉴욕 출신의 흑인이었던 올리버 로였는데, 이 사람은 정식 미군의 역사는 아니지만 미군 사상 최초로 유색 인종이 백인 부대를 지휘한 경우로 역사에 남는다.

훗날 공산 불가리아의 독재자가 되는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빨치산과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지도자였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 2차대전 이후 동독의 국가 지도자 다수 등 냉전 초기 동구권의 지도자들이 본격 국제 좌파의 간판들로 명성을 쌓은 무대 또한 국제 여단이었다. 특히 독일 출신의 의용군으로 구성 된 에른스트 탈만 대대는 훗날 나치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일종의 건국 이데올로기를 형성할 필요가 있었던 동독 당국에 의해 '공산주의 독일의 역사적 원류'로 격상 되어 대접 받았다. 폴란드에서도 국제 여단에 참여했던 이들의 상당수가 제2차 세계대전 독일의 폴란드 점령기에 대독 투쟁에 나섰고[12], 이들은 후에 들어선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 의해 영웅시되었다.

리스 독립전쟁처럼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어니스트 헤밍웨이, 조지 오웰, 먼 베순 등) 게르니카, 카탈로니아 찬가 등 스페인 내전을 다룬 여러 작품들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이런 "문화인"들의 참전이 전부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참가자들 중에는 낭만적인 환상과 작품의 소재를 찾으려는 욕망을 가지고 왔을 뿐 실제 전투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작가 앙드레 말로는 한 무리의 폭격기를 동반하고 스페인에 갔는데, 공화파 지휘관에 의하면 말로가 데리고 온 사람들은 "작가, 화가, 사진사, 여자, 어린이 등으로 다양했는데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앙드레 말로는 이런 작자들을 데려와서 각종 비용을 청구하고 사기나 쳐서 한 재산을 모았다고 하니... 이런 전쟁터에서 아무 쓸모없는 사람의 사례는 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도 등장한다.[13] 여담으로 프랑스의 철학자인 시몬 베유는 취사병으로 지원했는데 기름에 화상을 입어 포르투갈로 떠났다고...

그래도 군사적 인프라가 막장이었으며 그나마 아프리카 식민지 군단 같이 믿음직한 제대로 된 전투 부대 자체가 없었던 공화국 입장에서 국제 여단의 개입은 하늘이 내린 선물과 같았다. 실제로 마드리드 또한 1936년 후반기에 들어 마드리드 꼼플루텐세 국립 대학교 [14] 캠퍼스에서 건물 하나, 방 하나 두고 치열하게 싸울 만큼 함락 위기에 몰려 있었는데 이 때 국가군의 총공세를 막아 내고 결국 마드리드 포위를 풀어 낸게 방금 도착한 따끈 따끈한 국제여단 병사들이었다. 국제 여단원들 중에서는 1차 대전이나 전간기의 자잘한 분쟁에 참가하며 군사적 경험을 쌓은 사람들도 많았고, 전시 경험이 없더라도 사기와 투지 하나는 엄청나게 치열했기 때문에 마드리드 공방전 당시만 하더라도 제 11 국제 여단은 무려 하루만에 30%의 전력을 상실하면서도 결국 국립 대학교를 비롯한 마드리드 시내를 사수할 수 있었다.

6.2. 국가주의파 정부측 지원

그러나 국가주의파 정부측에 쏟아진 지원은 공화국 정부측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우선 독일과 이탈리아가 국가적 차원에서 집중적으로 지원한 것이 매우 컸다.

그리고 국가주의파 정부에 쏟아진 지원은 병력 숫자도 많을 뿐더러 그 질도 높았다. 위에 공화국 정부측 국제여단에 대한 찬사가 높지만 전력적인 면에서 본다면 잘 쳐봐야 자원했고 사기가 높은데다가 약간의 전투경험도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소총과 경화기로 무장한 알보병인 반면에 독일과 이탈리아는 정규군에서도 정예화한 병력만 파견했으므로 실제적인 전투력 측면에서는 크게 앞선다.

여기에 더해서 장비면에서는 공화국 정부군이 소련에서 자기 돈 들여서 사온 장비 외에는 개인화기나 경화기 위주인 데 비해 국가주의파 군대에게는 야포, 전투기, 폭격기등 중화기를 다수 지원했다. 따라서 점점 시간이 갈수록 국가주의파 정부측의 화력이 더 강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7. 신병기와 군사전술의 실험장화

이와 같은 쌍방의 개입으로 인해 이 전쟁은 각국에게 신병기와 군사전술의 실험장이 되어버렸다. 국가군을 지원한 독일과 이탈리아는 물론이거니와 공화국 정부를 지원한 소련도 전간기 동안에 만든 무기를 실험하기 딱 좋은 장소가 스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의 막을 연 전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 결과 독일은 이 전쟁에서 슈투카 급강하폭격기, 전차88mm 대공포병기를 대량으로 투입하여 각 병기의 장단점을 파악하고(1호 전차의 부실함 등) 여기서 얻은 실전경험을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는데 참고하여 이후 2차대전에서 보여준 기동전의 기초를 닦게 된다.

그러나 소련은 자국의 병기가 그럭저럭 활약하자 자만하여 이 전쟁의 교훈을 군대 개량에 제대로 써먹지 않았다. 그래도 전차전은 그럭저럭 교훈을 얻었는데, 이 시절 전차들은 전차 자체의 성능도 그저 그렇고, 통신 기술이나 운용 교리도 미숙해 집단 운용은 개판이고 소규모로 보병대에게 붙어 지원해주는게 훨씬 효율적이였다. 전차 자체도 무장이 대전차전이 아닌 대보병전이나 지원에 좋았고. 이때 소련군은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의 교리에 따라 전차들을 집중편제하고 있었는데, 이걸 보고 '이게 아니구나' 싶어 전차사단을 해체하고 보병사단에 부속부대로 붙여준다. 그러다 독일군이 전차를 대규모로 집중 운용하며 연합군을 발라버리자[17] '아, 그때 그렇게 한게 맞구나.' 하며 다시 전차들을 집중시켰지만 제대로 되기도 전에 독일의 침공이 개시된다. 물론 초반부 발린다. 설상가상으로 이후 벌어진 이오시프 스탈린대숙청으로 여기 참가했던 인력을 모조리 날려먹어 그 경험을 잘 활용하지도 못했다. 이 전쟁의 결과에 자만했던 점은 이탈리아도 비슷하다.

8. 비극의 발생

그러다보니 차후의 전쟁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먼저 체험할 수 있는 상황도 나오게 된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사례가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으로 유명해진 게르니카이다. 게르니카는 바스크 지방의 도시로, 독일군 파견대인 도르 군단공습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폐허가 되었다. 이 폭격을 게르니카 폭격이라고 하는데, 폭격의 책임자는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이었다.

◎ 그런데 라이프 2차 대전에서 언급하고 EBS 모 프로에서 주장한 '단순히 무기 시험을 위해서 관계없는 마을을 폭격했다'는 이야기와는 달리, 게르니카 지역은 공화군이 후퇴하는 길목에 있던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서 상당수의 공화군이 방어를 위해 포진하고 있었다. 또한 일부러 공포감 조성을 위해 시장이 들어선 날에 민간인들에게 폭격을 가했다는 것도 사실과는 달라서, 실제 목표는 퇴각로에 있는 다리였다. 문제는 아직 서툴렀던 독일공군이 다리를 못 맞추고 주변에만 폭탄을 떨어뜨렸다는 점과, 그 때문에 발생한 흙먼지 때문에 후속 폭격기들이 목표를 제대로 못 잡고 '교량이 있을 예상 위치'에 마구 폭격을 해댔다는 점이다. 즉 의도적으로 민간인 지역을 폭격한 게 아니라 오폭이었다는 것이다. 정황을 보더라도 당시 공화군의 후퇴를 차단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던 만큼, 후퇴로의 다리를 놓아두고 민간인 지역을 공격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안그래도 탄약 모자른데 실험하겠다고 떨구는건...(결국 공화군의 후퇴를 차단하는 것은 실패했다.) 물론 민간인 공격 자체를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민간인들이 사는 도시에 피해가 발생할 것을 무시하고 함부로 폭격을 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이러한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물론 민간인이 사는 곳 옆까지 전장을 확대시켜 빌미를 제공한 공화군도 정당하다거나 잘한 건 아니다.(참고

◎ 그러나 위와 같은 주장은 조금 더 보완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 항목에서 많이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앤터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의 해당사건 서술을 보면
  1. 다리가 목표였는데 오폭한 거다라고 주장한 것은 콘돌군단 전역자들이며 기상상태에 대한 그들의 증언도 틀린데다가 최초의 폭탄은 도시 중심가에 투하되었으며
  2. 다양한 종류의 폭탄(소이탄과 대인탄이 다리 부수는데 필요한가?)이 사용되었고
  3. 국민파의 분리주의자들(카탈루냐, 바스크 등)에 대한 당시의 행태를 생각해 보았을 때 시범케이스로 찍었다고 해도 이상할 리가 없으며
  4. 인구 7천의 소도시에서 나오기엔 많은 사상자 수치라고 했으나 비버의 저술에는 타지에서 온 피난민이 몰려있었던 상황
    으로 언급되어 있다.
    물론 해당 서적에서 인용한 리히트호펜의 당시 기록에는 공화군의 후퇴저지, 교란이 주목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여담으로 폭격으로 인한 피해나 영향 자체는 게르니카 폭격보다는 전쟁 후반기에 있었던 이탈리아 공군의 바르셀로나 폭격 쪽이 더 심했다. 하지만 독일과 달리 이탈리아는 서방세계의 인종차별적 경향 때문에 관심을 못 받은 감이 있다.[18]

그 외에도 내전의 상황상 양측에 의한 전쟁범죄도 많았다.

스페인 내전 당시 백색 테러와 적색 테러의 확실한 차이점은 (일단 숫자는 둘째 치고)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국가군 점령지에서는 케이포 데 야노, 에밀리오 몰라와 같은 수뇌부들이 나서서 매일 라디오에서 "오늘은 빨갱이 1,000명을 죽였다. 내일은 빨갱이년 1,000명을 겁탈할테다!" Detroit Madrid City 라는 식으로 학살을 조장하고,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가 확고해 지거나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학살과 '청소'를 지속하여 폭력을 하나의 체제로 만들었다. 국가군에서도 팔랑헤 좌파[19]는 노동자, 농민들이 좌파들에게 표 좀 던졌다고 학대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 이 외에도, 후안 야구에[20] 장군 같은 거물급 인사 역시 공화파 지역 내의 민간인 폭격에 대해 공개적으로 부정적인 발언을 한 바 있었다. 다만, 팔랑헤 좌파는 이것 때문에 사망 플래그를 찍었고, 후안 야구에는 몇 주 뒤 복귀했지만 한 동안 공개석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옥에 갇혀야 했다.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모로코 지역에서 징집된 병사들까지 국민군 군대의 병력 보충을 위해 투입되었는데, 이들 식민지군 병사들에 의해 자행된 살인, 강간, 약탈 등은 공화파와 관련된 민간인에 대한 테러였다. 내전 내내 국가군과 프랑코가 전쟁과 학살을 정당화 하는 명분이 중세기의 레콘키스타를 본 딴 '국제 유대-볼셰비키-프리메이슨 세력으로 부터 스페인을 정화 하는 것'이었던는데 막상 북아프리카 아랍인 병사들을 대리고 와 스페인 민간인들을 쳐 죽인건 본인들이니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일례로 앤터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에서 서술된 내용에서는 식민지군 병사들을 통솔하던 스페인 장교들이 공화파 지역에서 끌고 온 소녀 두명을 병사들에게 '두 시간 정도 가지고 놀다 죽여라'라고 할 정도였다.

반면 공화파 지역에서 일어난 폭력은 대부분이 혁명적 광분과 피난민등을 통해 들은 국가군의 만행에 대한 보복적 성격으로, 전쟁 초기만 하더라도 중앙 정부의 통제가 닫지 않은 혁명적 민병대 집단에 의해 산발적으로 자행되었다. 특히 1936년, 1937년에 이런 경향이 더 심했다. 내전 이전에도 정치 테러 등 낌새는 있었지만, 이 때는 말 그대로 도시 등 후방은 감옥이 제 기능을 상실하는 등 다소 무법천지였다고 한다.

그리고 공화파 측의 잔혹 행위는 주로 가톨릭 교회를 상대로 자행 되었다. 근본적으로 이 당시 스페인에서 교회는 우익 지주들과 뿌리 깊게 결합한 반동적 세력으로 인식 되어 좌익의 맹렬한 증오의 대상이었고, 내전 이전 부터 과격 혁명 세력에 의한 교회 방화 사건 등은 심심찮게 터지곤 하였다. 쿠데타가 터지자 자연히 가톨릭 교회는 국가군 편으로 서서 국가군 점령지에서 자행 되는 동지들의 학살을 한치의 꺼리낌 없이 축성했고, 특히 카를리스타 세력의 민병대였던 '레케테'[21] [22]는 "한 손에는 수류탄, 한 손에는 묵주"라 불릴 정도로 철저한 가톨릭교도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이에 분개한 CNT, UGT, POUM 등의 혁명 세력은 눈에 보이는 교회란 교회는 속을 발랑 까 뒤집어 태워 먹고, 신부들을 학살하며, 감옥으로 쳐들어가 우익 인사들을 학살하는 것으로 회답 했다. 스페인 내전 종결 까지 7,000명 가량의 가톨릭 사제들이 학살 당한 것으로 추정 된다. 이는 안 그래도 좌익 공화국을 탐탁치 않게 보았던 영국과 미국의 여론이 확실하게 스페인 공화국에게 등을 돌리게 하는 효과를 불러 왔고, 막상 자신들도 바스크족 사제들을 실컷 죽이고 있었던 국가군이[23] 열심히 씹어 먹을 선전 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공화파 최악의 실수는 톨레드 공방전에서 알카사르 (요새) 인질 협박 사건이었다. 내전이 터지자 마드리드 외곽에 있는 도시인 톨레도는 주변은 모두 공화파에 붙은 반면 현지 사령관이었던 모스카르도 대령이 우익이어서 혼자서 국가군 편에 붙었다. 이를 진압하려고 마드리드에서 공화군과 아나키스트 무장 노조원들이 톨레도로 쳐들어 와 산 꼭대기에 있는 요새만 빼고 다 점령했다.[24]. 톨레도 알카사르에 고립되어 치안대와 사관생도들을 이끌고 농성하던 수비대장 모스카도르 대령에게 공화군이 "항복하지 않으면 당신의 아들을 처형하겠다." 라고 협박했는데, 모스카도르 대령은 아들과의 마지막 통화에서 "사랑하는 아들아, 사나이라면 "그리스도 만세!"라고 외치고 당당하게 죽거라."라고 작별인사를 했던 것이다. 사실 아들은 한 달 후 국민군의 폭격에 대한 보복으로 처형되었지만, 이 사건은 톨레도 구원 후 숭고한 미담으로서 국민군을 단결시키는 상징이 되어버렸다. 톨레도 자체가 역사적으로 옛 카스티야 왕국이 무슬림들을 몰아 내고 점령한 후 마드리드가 수도가 될 때 까지 수도로 삼았던 도시인지라 안그래도 우익쪽이 침흘릴 상징성이 넘치는 도시였다. 이 이벤트는 결국 40년이 지나 프랑코 사후에도 어떠한 민주화나 체제 변화도 거부 하는, 언론에서는 '벙커'파 라고 불린 정권 내 극우꼴통들이 이 전투에서 이름을 딴 '알카사르'라는 잡지 중심으로 결집할 만큼 당시 우파의 상징 역할을 톡톡히 했다.[25]

특히 스페인 내전 초기인 1936년에는 주로 공화파의 만행들을 고발하는 기사가 많았다. 당시 공화 진영은 그래도 민주제다 보니 언론 통제가 거의 없었고, 외국 기자들도 훨씬 많이 가 있었다. 거기다가 다들 피난이다 뭐다 정신이 없다보니, 자기가 경험한 만행을 과장하는 경향도 상당했다. 마지막으로 유언비어까지 파다하게 퍼졌으니... 여기에 앞서 언급한 알카사르 (요새) 인질 협박 사건이 화룡점정을 찍어서 공화진영을 일시적이나마 악당으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이런 이미지는 공화진영의 선전전 + 게르니카 폭격을 포함한 국민진영의 무자비한 학살 + 내전 막판에 벌어진 안슐루스 등으로 순식간에 상쇄된다. 이미지 효과가 공화정부에 결과적으로 큰 도움이 못 되어서 그런거지...

그래서 전쟁 마지막 순간까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국제적 동정적 여론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 공화파 수뇌부들은 대통령 마누엘 아사냐, 라르고 까바예로 총리, 돌레스 이바루리, 인달레시오 프레이토, 후안 가르시아 올리버 등의 지도부 인사들이 나서서 잘 통제되지 않는 지지자들에게 "혁명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만행"을 자제 할 것으로 촉구하였고, 실제로 해당 지역이 확실하게 공화국 정부의 통제 아래 놓이면 혁명적 민병대들이 해체 되면서 막무가내 식의 인민 재판은 사그라들었다. 실제로 내전 중 총리가 되며 내전 초기 정권의 2인자였던 후안 네그린만 하더라도 밤만 되면 경호원 없이 사복 차림으로 마드리드와 발렌시아 시내를 돌아다니며 우익 인사들을 끌고 가던 민병대들을 직접 만류하고 다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위에서 나온 제5열 드립으로 인한 공포+대숙청 기의 소련으로부터 직수입한 비밀경찰 + 고문 + 공산당의 정권 탈취 기도로 인한 비공산당계 병사들은 장비나 의료지원을 안 해준다거나 전공을 제대로 대우 안한다던가 하는 식의 다양한 팀킬행위로 인한 만행들은 여전했다.

9. 내전의 종결

공화파가 제대로 된 지원도 못받고, 그나마 받은 지원도 뻘짓으로 날리면서 간혹 자기네들끼리 싸우는 것에 반해서 프랑코는 앞서 언급했듯이 느리기는 했지만 목표지점을 결정하고 공세를 시작하면 성공했기 때문에 공화군이 장악한 지역을 하나씩 박살냈으며, 바르셀로나가 있는 카탈로니아 지역에서의 결정적인 공화군의 뻘짓 공세에 힘입어 마드리드가 포함된 스페인 본토 중앙부를 제외한 전 지역을 수중에 넣었다.

결국 공화군은 정부가 반란군에 밀려서 프랑스로 도망간 후 사실상 정부가 붕괴되었다. 당장 소련을 등에 업은 공산주의자들이 동료들을 숙청하는 꼴을 보다 못해 공화정부내 중도파들과 숙청으로 가장 피해를 본 아나키스트 등이 손을 잡고 프랑스에 있던 공화정부에 맞서 국내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새 쿠데타 세력은 프랑코와 항복 협상을 시도했으나 거의 승리 직전에 있던 프랑코가 협상따위를 제대로 할 리 없었고, 결국 두 세력 다 똑같이 갈려나갔다. 따라서 더 이상 저항을 할 수 없었던 공화파는 1939년 4월 1일 프랑코에게 최종적으로 항복하고 만다.

10. 결과

전쟁 자체가 스페인의 좌익과 자유주의자들의 도전에 대한 우익 보수 세력의 반동으로 시작한 만큼, 쿠데타 직후 부터 국가군은 끔찍하게 많은 피를 뿌렸다. 이 전쟁에서 수많은 스페인 국민들이 좌익에 가담했다는 죄로 목숨을 잃었다. 대강 소개하자면 내전에서의 전사자가 11만(반란군은 9만), 부상자 100만, 공습으로 인한 사망자 1만, 영양실조에 의한 사망 2만 5천, 후방지역의 암살이나 처형 13만 이상.

내전 이후의 처형은 확실한 수가 남아 있지 않으나, 확실한건 1975년에 프랑코가 죽는 날까지 정치적인 이유의 사형 선고는 지속 되었다. 내전 내내 국가군은 자신들이 한 지역을 장악 하면 그 지방의 자유주의자, 노조 가맹원, 정치적 성향이 다른 지식인들, 공화파 진영에 친지를 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싸그리 처형부터 하고 보았으며, 이러한 행위는 교회와 우익 매체에 의해 "스페인 내부의 병적 요소들의 척결과 정화"라는 축복을 받아 자행 되었다. 당장 무솔리니의 처남이자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의 고위 인사였던 치아노 백작은 내전 종결 직후인 1939년에 스페인을 방문해 "세비야에서 80명 가량, 바르셀로나에서 150명 가량, 마드리드에서 200명 이상이 매일 총살 당하고 있다"고 충격을 표했으며, 1940년에 스페인을 방문한 나치 독일의 한 고위 관료 또한 그 잔인함에 충격을 금치 못 했는데, 그 고위 관료가 다름아닌 하인리히 힘러다.[26]

그래서 괜히 처칠 같은 우익 인사들 마저도 나중에나마 뒷북 치며 "공화국을 도와야 했었다." 라고 후회하며, 파시즘의 태생지였던 이탈리아는 2차대전 직후 국제 사회에서 복권되었지만 2차대전 당시 참전 하지도 않았던 스페인은 1950년대 후반까지 국제 사회의 왕따로 남았던 게 괜한 게 아니다. 2차대전 이후 30년 간의 피비린내 나는 과거에서 벋어나 국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평화적 무드를 조성하려고 했던 유럽 국가들에게 있어서 프랑코의 스페인은 당장 역사적 기억 속에서 보여 준 야만적인 잔인함의 스케일이 쉽게 용서해 주고 새로운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 주기에는 너무 컸으며, 또 그게 현재 진행형이었다.[27]

시대가 시대인 만큼 스페인 내전이 끝나자마자 2차 대전이 터져 살아 남은 자들의 운명 또한 파란만장했다. 내전 이후 살아남은 이들 중 많은 수가 프랑스로 망명했으며, 망명자의 수는 약 50만으로 절반만이 결국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이들 중 많은 수가 프랑스가 함락되자 프랑코와 히틀러 사이 협정에 따라 스페인으로 반송 되어 총살 당하거나, 아니면 나치의 강제수용소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대부분은 정치범과 외국인 전쟁 포로들이 수감 된 마트하우젠 강제 수용소행이었다. 나치의 프랑스 점령에도 살아 남은 망명자들은 그후 10여 년 이상 스페인의 파시스트 정부에 대한 게릴라전을 벌인다. 이 중에서 1만 3천명 가량이 2차대전에 휩쓰인 프랑스에서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담해 싸웠으며, 샤를 드 골의 자유 프랑스 군단에도 3천명 가량 입대하였다. 이 중에서도 자유 프랑스군 제2 기갑여단 산하의 9 중대는 대부분 망명한 스페인 공화파 출신 병사들로 구성 되었는데, 1944년 파리 해방 당시 파리에 가장 먼저 입성하여 당시 해방군을 맞이하러 환호하러 나온 파리 시민들은 해방군이 "에보로", "테루엘", "게르니카", "바르셀로나 1936년 6월" 등의 이름이 도장 된 전차들 위에 공화파식 주먹 쥔 경례를 하며 인터네셔널가를 부르며 파리에 들어오는 관경을 보게 되었다. 스페인 공화파 망명 난민들이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이토록 관계가 깊었던 덕에 종전 이후에도 프랑스는 서방 내에서도 반 프랑코 혐오증이 강했으며, 샤를 드골 또한 개인적으로는 프랑코와 더 가까운 우익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잔류한 망명객들을 후하게 대하며, 프랑코 정권을 피하여 계속 도망 나오는 난민들을 적극 받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남아서 활동하는 반프랑코 레지스탕스와 후일 부상한 ETA의 활동을 묵인해 주는 등 스페인 공화파와 긴밀한 사이를 유지했다. 현재 까지도 매년 대통령이 직접 참가하여 치루어지는 파리 해방 기념 행사때는 꼬박 꼬박 프랑스 삼색기와 더불어 스페인 공화파의 공헌을 기리는 공화국 삼색기가 같이 진열 된다.

개중에서 멕시코나 다른 중남미 국가로 망명한 공화파 인사들은 1975년 스페인 민주 정권이 성립 될 때 까지 망명 정부를 새웠고, 또 중남미 각지의 현지 좌파들에게 정치적, 전술적 교육을 해주어 훗날 냉전 시기 중남미 좌파 운동의 부상에 숨겨진 공로자가 되었다. 단적인 예로 체 게바라가 유년기 정치적 의식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게 아버지가 매일 같이 집에 불러 같이 놀던 공화파 망명객들이었다고 회고했다. 거기에다가 공화파 고위 인사 1,000명 가량은 전쟁 말기 소련으로 탈출하여 그 중에서 수백명이 붉은 군대에 입대해서 독소전쟁에서까지 싸운 경력도 있다. 내전 당시 공화파의 가장 유명하고 명망 높았던 장군 중 하나인 리케 리스테르가 그러한 경우인데, 이 사람은 레닌그라드 공방전에도 참가하고 티토의 빨치산들과도 협력하여 결국 스페인, 소련, 유고슬라비아라는 3개국의 군대에서 장군 계급을 딴 진귀한 기록을 새우게 되는 등, 공화파 잔당의 운명은 시대의 격조와 함께 이리 저리 파란만장했다. 또한 프랑코는 자신의 카리스마로 군부와 정치권을 점점 장악하여 결국 독재자가 되어 1975년에 늙어 죽을때까지 스페인을 지배했다. 프랑코 독재 치하 스페인 또한 냉전 당시 현지 좌파와 정치적 반대파 탄압에 중남미 현지의 우익 군사 독재자들에게 군사 밑 안보 고문을 파견하여 협력 했으니 어찌 보면 스페인 내전은 본토에서 끝나니 냉전 동안 옛날 식민지였던 중남미에서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국제여단의 말로도 그렇게 썩 좋지는 않았다. 1938년 하순쯤 되자 누가 봐도 공화국의 패전이 확실시 되어 국제 여단원들은 이탈리아, 독일 같이 돌아갈 고향이 아예 사라진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두 본국으로 돌려 보내졌다. 이 중에서 영국이나 프랑스 출신 여단원들은 자국내 여론이 공화국에 대해 동정적이라 국제 파시즘에 대항한 최초의 투사들로 환영 받았지만 사회 일반에서 그랬다는 거지, 영국이나 프랑스나 보수적인 정부는 국제 여단원들을 빨갱이 취급하고 훗날 2차대전 중에도 국제 여단 복무 경력이 있으면 무조건 간부로 승진 하는걸 금지 시키는 등 탄압은 여전했다. 그나마 이건 양반인 것이 미국이나 스위스, 아일랜드 대원들은 자국의 중립 노선을 위반했다고 당국에게 붙들려 가는 등의 수모를 당했다. 아예 돌아갈 나라 자체가 없었던 이탈리아나 독일, 오스트리아 병사들이야 말할 것도 없을 정도다.

이 중에서 폴란드의 경우만 하더라도 국제여단에 참여한 폴란드인 병사들의 국적을 박탈해 버렸다. 폴란드 바로 옆이 소련이었기에 폴란드의 레드 컴플렉스가 엄청 심했던 탓. 실제로 국제여단에 참여한 이들 중 일부는 폴란드 공산주의자였지만... 정작 그 폴란드는 소련에 이어 2번째로 스페인 공화국에 군수물자를 많이 지원한 나라였다. 같은 국민들한테 정말 이래도 되는 거야? 이는 정치적인 차원에서는 서쪽 원쑤인 독일의 영향력을 약화 시키기 위해 공화국 정부를 지원한 반면, 사상적인 차원에서는 동쪽 원쑤인 공산 러시아가 국제 여단원들을 중심으로 침투 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취한 행보였다.

그래도 내전도, 2차대전도 끝난 오늘날에는 두 국체 전부 다 '제 2'자가 들어가는 공화국이었으며, 전간기 열강 정치의 냉정한 이해 관계 속에서 파시즘에게 희생 당했으나, 본인들 입장에서는 문화가 꽃피었고, 불안하지만 또 이상주의적이었던 혁명가 정치인들 아래 각종의 사회 개혁을 추구했던 시대였더나는 점에서 폴란드 민족주의자들과 스페인 공화주의자들은 사상적으로는 폴란드 민족주의는 우익, 스페인 공화주의는 좌익 쪽으로 기울지만 서로 동병상련의 정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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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폴란드와 스페인 양쪽의 정치범들이 수용 되어 같이 나치의 억압 아래 강제 노동하며 죽어 가면서도 함깨 투쟁한 마트하우젠 수용소 추도식에 동참한 폴란드 군인들과 스페인 공화파 시민 단체. 엄숙한 군복 차림의 폴란드 의장대와 캐쥬얼한 사복 차림의 스페인 시민운동가들의 대조가 인상적이다.

소련의 경우에는 겉으로 보이는 수지타산은 잘 맞은 경우다. 돈 받고 무기 지원하고, 무기실험도 충분히 했으며 실전 경험도 얻었으니...... 그러나 반대급부로 스페인 내의 공산당 세력이 거의 붕괴상태가 되었고, 이렇게 현지 공산당과 자기 편을 뒤통수 치면서 소련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모습을 유럽인 앞에 보여줌으로서 공산당의 세계 확대에는 큰 걸림돌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독소 불가침조약을 깨고 쳐들어온 독일과 독소전쟁을 치르면서 파시스트 세력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은 댓가를 치르게 된다.

그나마 내전 당시에 소련과 달리 깽판치지 않으면서 그나마 스페인을 적극적으로 도우려고 했던 멕시코는 스페인 공화국이 망한 이후 수많은 공화파 인사들의 망명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과 같이 공부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컸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자신의 초기 필모그래피에 스페인 내전 관련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28]

국가군 편의 말로도 별로 좋지 않았다. 독일과 이탈리아야 2차대전 때 추축국으로 대전쟁을 일으켰다가 연합국에게 쫄딱 망한 것이야 너무 유명해서 여기서 깊게 다루지는 않겠지만, 스페인의 경우에는 양 국가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2차대전에는 참전하지 않고 중립국을 유지한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독일의 병크짓이 많은 원인을 차지한다. 원래 독일은 최대한 프랑코로부터 물물교환이나 광산 채굴권 획득등의 형식으로 지원한 댓가를 어느 정도 받는 상황이었는데, 헤르만 괴링이라는 나치 독일의 최고위층이 남몰래 무기를 공화군에게도 팔아먹은 것이다. 이때 중간에 다리 역할을 한 사람이 1차대전 독일 에이스 중 하나로 당시 무기상인이었던 벨첸스(Josef Veltjens). 당연하게도 스페인 입장에서는 기분이 안좋을 사유였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무솔리니의 멍청한 판단으로 거의 무상으로 지원을 해 주었으나 스페인은 받아넘기기만 하고 나중에 댓가를 전혀 주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서 앞서 언급한 독일의 경우도 그렇다고 입을 씻고 모른 척 할 사유라고 볼 수는 없다. 결국은 이 사항에 한해서는 그놈이 그놈이었다는 것이다. 도적놈 셋이 참 잘 논다.

물론 공식적인 중립과는 별개로 18,000명 규모의 지상군과 수백명(실전 참가는 수십명)의 조종사를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동부전선에 파견하고 여러 항구들을 유보트 보급기지로 제공했다. 그나마 이들 의용군 병력은 독일의 전황이 불리해지기 시작한 1944년 초에 대부분 스페인 본국으로 귀환했으며 극히 일부만 나치 친위대에 가담해서 싸웠다. 아이러니한게, 이 때 동부전선에 파견된 의용군의 일부는 극렬 파시즘 성향의 팔랑헤들이었고 나머지 상당수는 구 공화파 인사들의 가족이나 친지들이었다. 팔랑헤야 나치를 도와서 참전할 이유가 있었지만 구 공화파들이 참전한 것은 연좌제를 피하고, 수감된 공화파 인사들의 처우와 형기를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해 참전한 것. 물론 이런 점을 악용해서 프랑코 정권이 향후에 골아파지는 문제덩이들을 전쟁에서 소모시키려고 반강제적으로 자원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프랑코의 2차대전기의 중립에 대해서는 프랑코의 현명한 줄다리기라는 의견이 주류였으나, 비버는 이에 대해 프랑코의 무리한 요구(무기, 물자 이외에 북-서 아프리카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거의 전부를 달라고 했다)에 히틀러가 질려서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 교섭이 프랑코의 중립을 위한 의도적인 어깃장이 아니라는 근거로 비버는 프랑코측의 당시 행적에 대해 기술했다.

11.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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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진의 주인공은 공화파 알코이 민병대원 페데레코 보렐 가르시아(Federico Borrell García, 1912.1.3.~1936.9.5, 24)이며, 겨우 23살난 애송이 사진 기자 카파는 이 사진 하나로 퓰리처상을 받으면서 세계적인 사진작가가 되었으나 사진 조작 유무를 둘러싸고 죽을 때까지 의심을 받아야 했다. 무엇보다 사진 어디에도 총을 맞은 흔적이 없다는 점이 그 원인이었다. 오죽 열받았으면 카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사진(이것은 확실하게 인정받았다)을 찍으면서 그 오욕을 갚았다.
  • [2] 미국, 영국, 폴란드, 벨기에, 네덜란드, 캐나다, 스웨덴, 스위스, 아일랜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왕국, 그리스 왕국, 헝가리 왕국, 불가리아 왕국, 키프로스가 참전했다.
  • [3] 2월의 선거에거 인민전선이 승리하여 파시스트들이 쿠데타를 감행했다.
  • [4] NO PASARAN, 이 말은 안티파 사이에서 유명한 구호가 된다.
  • [5] 실제로 오열(五列)은 첩자, 간첩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미션 임파서블의 원작이었던 TV 드라마 시리즈의 국내 방영 당시 제목이 "제5전선"이었다.
  • [6] 이 과정에서 소련 눈에 띈 사람이 당시에는 공화 정부의 재무장관이었고 나중에 총리가 되는 후안 네그린이다.
  • [7] 그런데 이쪽은 부르봉-파르마계, 다시 말하면 원래는 이탈리아 출신이라서 망명이라고 하기도 거시기 하다.
  • [8] 이 사람은 대단한 친독일 인사였다. 어쩌면 이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을 때 스페인이 독일과 연합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면 망한다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일찍 찾아온 전쟁" 편은 이 사람이 죽지 않고 뮌헨협정에서 체임벌린이 히틀러의 요구를 거절해서 2차대전이 일찍 벌어진 시대를 그리고 있다.
  • [9] 직역하면 'The Leader'라는 의미.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자기 자신을 대령이라 칭한 것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 [10] 스페인 제2공화국은 4월 1일에 프랑코에게 항복했고 나치 독일폴란드 침공은 9월 1일에 있었다.
  • [11] 이는 전체 참전 병력으로, 실제 단 한번도 단일 인원이 800명을 넘은 적은 없었다고 한다.
  • [12] 특히 돔브로프스키 대대원(Dąbrowszczacy)들은 위의 마드리드 방어전에도 참여한 역전의 용사들로,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공산주의 성향의 반독 빨치산인 인민군(Armia Ludowa)과 역시 공산주의 성향의 폴란드 인민군(Ludowe Wojsko Polskie)에 많은 이들이 참여했다.
  • [13] 참고로 이런 부류의 문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닌게...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가한 영국과 프랑스인들도 이런 문제로 그리스 독립투사들의 골칫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게릴라 전쟁인데 마케도니아팔랑크스 전법 사용을 주장했다고 할 정도니...다만 이건 고대에 집착해서 그런게 아니라 당시는 유럽 군대도 팔랑크스 식으로 대열 갖추고 싸우던 시절이다. 그리스 도우러 온 유럽인들이 그런 정규 전술대로 싸우려고 했던건 그들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 [14] 위치나 위상이나 딱 스페인의 서울대학교라 보면 된다
  • [15] 당시 모로코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분할하여 식민지로 만든 상태였다. 즉 "모로코 지원병"은 다른 나라의 지원병들처럼 스스로의 명확한 의사에 의해 참가한 병사가 아니라 원래 스페인 식민당국이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식민지에서 모집한 현지인 외인부대이다. 스페인 정부는 내전 전에도 의도적으로 이들을 본토의 반란 진압 임무에 투입하고는 했는데, 이들은 평소 식민지 종주국인 스페인인들로부터 멸시와 차별대우를 받아왔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복수할 기회가 생기면 한없이 잔인해졌다고 한다. 프랑코 휘하에서 공화정부와 싸우기 위해 투입된 내전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 [16] 이들은 극우파/파시즘적인 아일랜드 의용대였다. 이들은 아일랜드 공화국 성립 당시부터 정치집회당시 푸른색 셔츠를 착용했는데, 이것은 훗날 "청색 셔츠단"이라는 이름으로 길이길이 남게 된다. 물론, 스페인 내전에도 같은 방식의 복장을 입고 참전했다. 그런데 전선이 꼬여서 아군의 오인사격을 한번 받더니 놀라서 그냥 본국으로 철수해버린다. 이거 뭐...
  • [17] 전차뿐만 아니라 여러 요소들이 겹쳤지만.
  • [18] 가령, 백인들 사이에서도 인종차별적인 경향은 강했는데, 영국이나 독일, 북유럽인들이 백인 중에서 가장 우월하다고 했고, 그 다음 프랑스(물론, 국가적 위상을 보면 프랑스는 이탈리아, 스페인보다야 훨씬 나았지만)나 이탈리아, 스페인인들, 최하층 취급을 받던 이들이 러시아인들이다. 흔히 말하는 이탈리아군의 졸전 드립 역시 어느 정도는 이러한 경향의 산물이기도 하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도 이 영향을 받은 바 있다.
  • [19] 얘들은 한때 아나키스트들과 손잡으려고 했던 경력이 있었고, 코드 역시 이들과 맞아 떨어지는 면이 있었다가 그 경력 때문에 스페인 내전 당시 국민 진영 내의 다른 집단에서 경원시 되었다.
  • [20] 국가군 진영 내에서 막대한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국내외적으로 명망이 높던 장군이었다. 당시 스페인에 파견된 콘돌 군단의 독일군 장교들은 은근히 스페인 장교들을 한 수 아래로 취급하던 경향이 있었는데, 이들도 후안 야구에 만큼은 인정했다.
  • [21] 다만, 레케테는 그런 가톨릭 성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국민진영에서는 가장 포로에 대한 대우를 제대로 한 군사집단이었다. 그리고 내전 발발 이전에는 카를리스타들의 전통적인 지방자치적 전통을 스페인 군부의 중앙 국가주의에 대치 되는 우익 내의 맞불로 쓰기 위해 공화 정부에서 이들을 무장시키고 훈련 시킨 전적이 있어 모로코 용병대 다음으로 국민진영에서 정예로 꼽히기도 했었다. 스페인 현지의 미디어 묘사나 당대의 평가에 따르면, 레케테는 군사적으로는 정예인데 인간은 대체로 나바라 지역의 농촌 출신자가 많아서 그런지 그나마 좀 순수한 집단, 팔랑헤는 군사적으로는 그닥 유능하지 않은데 후방에서 사상정화랍시고 약자나 괴롭히는 못된 집단 기믹을 보였다. 정작 사상적 스펙트럼이나 행동하는 코드(가령, 서로를 동무라고 지칭하거나 노동자의 상징인 푸른색을 자기 제복 색깔로 하거나, 인민전선의 인사법인 팔뚝질을 활용하거나) 팔랑헤가 가장 공화 진영과 유사하다는 것, 내전 이전에 CNT와 연대를 모색했던 점은 잊고서. 실제로 모 영화에서는 레케테 출신 장교와 내전 이전 공화진영 쪽에서 일한 여자가 아무 생각없이 연예하는 장면이 나왔다.
  • [22] 이 때 부터 뭔가 친좌파적인 색채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프랑코 사후 스페인의 우익 진영 내분 중 쩌리가 되고 1976년 몬테후라 살인 사건에서 꼴통 극우 경찰들에게 테러 당해 빡칠대로 빡친 카를리스타들은 아예 공개적인 사회주의 정당으로 전향한 후 공산당과 합작으로 현재 스페인의 통합 좌파당을 만든다 애초에 저 쩌리가 된 이유도 저런 '빨갱이 정화에 소극적이고' '자유주의의 사상적 독약인 휴머니즘'이 의심 된다는 이유, 즉 나머지 국가군과 달리 그나마 자국민 학살하는 도살자 처럼 굴지 않는다는 이유였으니 카를리스타들 입장에서는 분통 터질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현대 카를리스타들은 친-카톨릭, 친-왕정이면서도 또 자본주의와 중앙 정부에 반대하는 오묘한 좌파 중에서도 이단아로 분류된다. 그런데 따지고보면 이것도 재밌는 것이 그 옛날 19세기 카를리스타 내전이 벌어졌을 당시 이들은 카탈루냐나 바스크 지방과 연계하기도 했다.
  • [23] 내전 당시 바스크 자치 공화국은 이념적으로는 우익이었지만 공화국 정부에게 자치권을 약속 받아 공화국 편에 섰으며, 따라서 나머지 공화군과 다르게 군종 사제, 군인들의 축성 등 종교적 영향력이 여전히 유지되었다.
  • [24] 도시 자체가 옛날 옛적 로마 제국이 산 위에 새우고, 몇 세기 뒤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무슬림들이 산 주위로 성벽을 쌓아 놓은 구조이다
  • [25] 현재 톨레도의 알카사르는 스페인의 군사 박물관 역할을 하며 사건의 장본인인 모스카르도 본인도 그곳에 묻혀 있는데, 무덤에 왔다가는 사람들마다 침 뱉거나 헌화 하려는거 둘 중 하나여서 이걸 막으려고 주변 경비들의 신세가 참 피곤하다(...). 이제는 스페인도 엄연한 민주 국가니 파쇼 독재자를 위해 싸운 인간을 대 놓고 기릴 수는 없고, 또 그렇다 해서 엄연히 프랑코 정권의 계승자인 현 스페인 왕국이 아예 프랑코와 국민군을 버릴 수는 없으니 또 아예 부정도 못하고... 여러모로 아직도 스페인에서 스페인 내전은 과거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가까운 역사라는걸 명백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 [26] 유대인과 동유럽인 수 백만명을 학살한 또라이가 왠일로 남의 나라에서 저지르는 만행에는 또 양심을 보이냐 싶은데, 여기서 또 고려해야 할 요소가 나치의 요상한 인종주의적 관점이다.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수뇌부는 위에 열거한 대로 '2류 백인'인 라틴족 중에서는 정치적인 동맹은 이탈리아였지만, 사적인 자리에는 스페인 제국시절에 기원하는 스페인인들의 '상무정신'을 높게 평가했다. 훗날 2차대전 중 서부 전선이 개판으로 꼬이면서 프랑코가 노골적으로 양다리를 걸치려고 들자 측근들이 누가 상전인지 보여주고 지브롤터를 손에 넣기 위해 스페인 침공을 건의 했을 때, 히틀러는 "스페인인들은 라틴족 중에서는 유일하게 싸움 좀 할 줄 아는 족속이다"라며 거부했다. 여기서 힘러의 반응은 즉 지 눈에서는 스페인인들은 1.5류 인간이라도 어쨋든 인간으로 치기는 하니 나온 반응으로 보면 될 듯 하다
  • [27]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이러한 2차대전 이후 스페인 내전에 대한 나머지 세계의 기억과 이에 따른 프랑코 치하 스페인의 고립을 "민주 스페인에 대한 자유 세계의 철저한 방기와 무시는 전후 자유주의의 양심에 남아 있었던 마주하기 걸끄러운 오점으로 남았다"라고 표현했다
  • [28] 데뷔작인 크로노스악마의 등뼈. 그리고 비교적인 최근작인 의 미로.
  • [29] 카를리스타들의 지도자
  • [30] 판의 미로는 스페인 내전, 악마의 등뼈는 멕시코인데 주인공은 스페인 내전 피난민이다. 감독 본인 가족은 스페인 내전과 관련 없지만 아는 사람들 중에 스페인 내전으로 스페인에서 멕시코로 넘어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 [31] 스페인 내전 자체를 다룬다기 보다는, 내전 이후 지식인들의 절망감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풀어냈다.
  • [32] 이 쪽도 에리세랑 비슷하다.
  • [33] 인민전선의 병사들에 관한 노래다. 3집 "London calling"에 수록되어 있다.
  • [34] 3등분된다(...)
  • [35] 무려 4등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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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1-08 06:2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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