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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총통

last modified: 2014-11-13 10:41:26 by Contributors

Contents

1. 설명
2. 구조
2.1. 종류
3. 발사체
3.1. 총통전
3.2. 쇠구슬 탄환
4. 무기 역사에서의 가치
5. 사용자와 후세인들의 평가
6. 관련항목

勝者총통
핸드캐논의 최종버전 조선군의 바주카

1. 설명

조선 초중기에 사용된 대표적인 개인화기. 조선전기에 사용된 일총통, 이총통을 보다 가늘고 길게 다듬어낸 형상을 하고 있다.[1] 뱀처럼 가느다란 모양으로 작대기에 꽂아서 쓰는, 조선초기의 조선병사들이 이용한 개인화기라고 하면 떠올리기 쉬운 무기이다. 하지만 사극에서는 위험성이나 소품등의 문제로 거의 등장한 적이 없는 비운의 무기이기도 하다.

선조 시기에 만들어진 무기로 개발자는 김지(金墀)이다. 나탕개의 난에서 큰 활약을 했으나, 이후에 벌어진 임진왜란에서는 조총에 밀리는 성능으로 개전 초기 조선의 안습한 개활지 전투 능력에 일조하게 된다. 하지만 무기 자체는 중세 핸드건의 직계로서, 여진족 나탕개의 난을 진압할 때 활약했다는 기록에서 알수있듯 철포전술을 익힌 일본이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나름 괜찮은 축에 속하는 무기였다.

요약하자면, 휴대용 화포에서 이 등장하기 직전에 있는 무기체계이다.

참고로, 승자총통으로 대표되는 조선초기의 개인화기들은 이 아니라 핸드캐논의 마지막 세대에 속한다. 본 항목을 읽어보면, 핸드캐논류가 어떤 식으로 사용되었고, 어떻게 에 패배했는지를 매우 적절히 알 수 있다. 나름 최종버전다운 부분도 있지만 상대가 진화했을 때 아직도 핸드캐논에 머물렀다는 게 문제

2. 구조

길이는 대략 50~60cm. 무게는 3kg~5kg 정도이다. 조선 화포답게 청동합금으로 만들어서 연발사격시 안정성이 높았다. 포신에는 죽절이 나 있고 약실에는 심지를 넣는 부분이 있다. 장전 방식은 핸드캐논답게 심지를 이용하는 등 매우 원시적이었다.


뒤쪽에다 나무 막대를 꽂아서 사용한다. 나무 손잡이의 길이는 70~80cm 정도로 포와 결합하면 길이가 대충 110~120cm 내외쯤 되었다[2]. 덕분에 포신이 은근히 무거운데도 불구하고 나무 손잡이를 지렛대처럼 활용하여 방향은 잡을 수 있었으며, 중국의 이화창처럼 고개를 내밀지 않거나 성벽에서 안정적으로 사격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덤으로, 근접전이나 농성전에서 균형이 잘 잡힌 대형철퇴로서의 타격력도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핸드캐논류는 위급시 장병기로서 사용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승자총통을 비롯한 조선초기 화포들은 그 모양이나 설계상 급박한 상황에서 철퇴로 이용하기에도 적합한 밸런스/실용성을 종합한 디자인이었다.성벽에 올라오는 순간 대가리에 똭[3][4]

승자총통은 조총보다는 오오죠쓰 같은 대형조총에 비교하는 편이 그 설계나 운용법을 이해하기 쉽다. 실제로 당시 조선에 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조선군이 생각한 승자총통의 가치는 상대편 보병대열이나 진지를 타격하는 보병용 중화기 개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다 총을 경험하고 바로 바꾼다

2.1. 종류

승자총통에도 종류가 많다. 기본적으로 포신의 용량에 따라서 소/중/대(小/中/大)로 나뉘고, 대형일수록 무거운 대신 화약용량이나 철퇴로서의 내구성이 우수했다. 제식 구분으로는 차승자총통/소승자총통/별승자총통으로 구분했다. 두 발을 동시에 장전하는 쌍승자총통까지 있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물건은 소(小)+차승자총통으로서, 포신의 길이가 50~60cm 내외이며 뱀처럼 가는 형상이었다. 이를 보완한 소(小)+소승자총통은 원시적인 화승총 형태로서, 개머리판을 장착했으며 이순신 함대에서도 유물이 발견되었다. 가장 거대한 끝판왕 별승자총통은 포신의 길이만 50cm 이상이었으며, 결합부를 포함한 전체길이는 75cm 이상, 조립시의 길이는 최대 120cm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소승자총통의 모습.#

참고로, 본 항목에는 一/二자총통에서 이어진 초기형 핸드캐논에 대한 서술이 많다. 조총에 가깝게 운용한 후기형 승자총통은 덤으로 적혀있는 정도.

사격을 특화시킨 소승자총통은 개머리판을 달고 죽절을 제거하여 에 가까웠다. 전투세에는 철환만을 사용하며, 1회당 3알의 총알을 사용한다. 임란 이전에 개발되어 의외로 많은 양이 만들어졌으나, 조선이 조총 생산라인을 빠르게 가동시키자 주력에서 밀려난다.

3. 발사체

승자총통의 사격법은 크게 3가지로 운용되었다.

1. 총통용 화살포탄 1개를 쏘는 개인화포 방식.
2. 3~5개의 대형 쇠구슬/1발의 피령전을 넣는 조총과 비슷한 방식.
3. 10~20발의 소형 쇠구슬을 넣어서 샷건처럼 쏘는 방식.

3.1. 총통전

총통전은 조선초기의 모든 총통에서 사용했던 화살 모양의 포탄이었다.[5] 이는 철저하게 휴대용 화포라는 개념의 연장에서 나온 설계이다. 위력이 화포급이라는 것이 아니라 설계구조나 운용 방식이 화포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즉 사거리와 위력은 크기에 비해서 강력하지만, 포탄(화살탄)의 조준이 어렵고 곡사로 날아가며, 개인타겟보다는 밀집대열이나 구조물같은 대형타겟을 노려야했다.

그러니까 일반 화포에서 위력만 심각하게 낮춘 소형 미사일이라고 보면 된다. 석궁과의 차이점은, 석궁이 화살의 관통력을 늘려서 보병에 대한 살상력을 높인 무기였다면, 총통전은 본래 목적인 포탄에 가깝게 운용하여 대형타겟에 대한 타격력을 중시했다. 즉 일반적인 핸드캐논이 사용했던 중소형 포환의 연장선상에 있다. 대장군전처럼 대형화포에서 쏘는 총통전이랑 운용목적이 같다.

핸드캐논의 화력(화약량)을 온전히 사거리로 돌리는 운영법인 만큼, 승자총통이 사용하는 총통전도 비행거리나 운동량은 조총보다 강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조준이나 반동제어가 거의 불가능하고 짧은 포신 때문에 에너지 효율이 심각하게 분산되는 문제로 인해서, 개인화기로서는 조총보다 못하고 화포로서의 성능은 대형총통보다 애매했다.[6]

3.2. 쇠구슬 탄환

조란환(쇠구슬)을 넣고 쏘는 방식은 크게 나눠서 두 가지가 있는데 모두 다수의 탄환을 넣고 쏘는 산탄에 가까웠다. 장거리에서는 화살형 포탄에 비해서 정확도와 사거리가 비참할 정도로 낮았지만, 샷건과 비슷한 사용방법 덕분에 근접한 인마를 진압하는 목적으로는 훨씬 효율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그래서 아예 총으로 바꿨지

  • 중형 쇠구슬 3발 이상
첫번째로는 3~5개의 대형 탄환을 넣어서 쏘는 방식인데, 이렇게 소수의 탄환을 넣고 쏘는 방식은 매우 일반적인 운용법이었다. 요컨대 화승총 등장 직전의 개인화기들의 주력 사격법이었다. 이는 1개로는 명중률이 낮으니 여러개를 넣어서 쏘면 조금 더 잘 맞겠지 하는 심정에서 그랬던 것이지만...딱히 그런 거 없었다. 비교적 아래의 근접산탄보다는 정확하고 멀리 날아갔다. 특히 후기형 소승자총통은 이런 사격법을 꽤나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 소형 탄환 10발 이상
두번째는 샷건처럼 10발 가량의 쇠구슬 다발에 대량의 화약을 집어넣는 것이다. 화약을 많이 넣는 만큼 화력은 강력하지만, 유효 사거리가 20m 이하라서 사실상 상대의 보병진에게 근접해서 파편을 끼얹는 형식이었다. 현대인들의 기준에서 생각해보면 보면 터무니 없이 사정거리가 짧지만, 이런 근접 사격법은 조총이 도입되기 이전의 화약무기에서는 자주 사용되었으며, 그런만큼 의외로 위력적이었다.[7]

즉 이화창[8]이나 무적죽장군처럼 근접전에서 파편충격을 주기 위한 화약 장병기의 매커니즘의 흔적으로 보인다.

참고로 쇠구슬 다발+화약 듬뿍으로 사격하는 두번째 방식은 근접한 상대를 끔살시키는 용도로도 쓰였다. 개인 표적에게 정확히 맞추는데 성공하면 갑옷을 입은 인마를 상대로도 치명적인 살상력을 가진다.[9] 다만 다수의 쇠구슬들이 비거리가 짧고 불확실했으며, 보다 화력이 약한 조총으로도 충분한 관통력이 나온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오버파워라서 야전에서의 효율성은 떨어졌고, 수성전에서 더 효과적이었다.[10]

4. 무기 역사에서의 가치

화승총의 등장 이후의 개인화기, 즉 의 가장 큰 목적은 적군 보병 제압이다. 승자총통이 사용한 화살탄/산탄 모두, 조선군이 사용하던 화포를 소형화해서 보병끼리의 싸움에서 주도권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설계한 운용법이었다. 하지만 승자총통은 임진왜란에서 으로서의 모든 가치, 즉 편의성 및 정확도를 어느정도 달성한 조총을 만났다. 그리고 화약무기의 설계이념이 이룬 발전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패배를 달성했다(…).

하지만 현대 연구가들에게서도 화승총 등장 직전의 핸드캐논이 가진 미덕으로만 평가하면 어찌되었든 위력 자체는 쓸만했으며 설계도 그럭저럭 세련되게 다듬어진 형태라고 평가받는다.[11] 즉 승자총통은 핸드캐논 사이에 걸친 무기의 마지막 도달점 중 하나라고 평가할 수 있다.그 위력이란게 20m~40m 이내의 갑주보병/기병을 상대하기 위한거라서 문제

승자총통에도 장점은 있었다. 첫째, 조선의 주력무기인 에 부족한 파괴임무를 수행하는 보병용 중화기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둘째, 위력이 비하면 나름 늘씬한 외형으로 운반이 쉽고, 유사시 균형잡힌 철퇴로서 사용하기에 편리했다.[12] 아직 총을 경험해보지 못한 조선에서 승자총통과 같은 개인화포의 목적은 강력한 보병용 중화기를 지급하여 파괴력을 올리겠다는 지극히 화력덕후적인 개념이었던 것이다(…).

즉 승자총통은 집단으로 운용하여 대형타겟을 파괴하는 소형화포/백병전에서 집단으로 샷건을 발사하는 중세 장병기/초기적인 화승총의 중거리 사격까지 결합한 과도기적인 무기체계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무기가 을 상대로 어떻게 패배했는지도 보여준다(…). 안습하지만 무기 발전의 역사에서 의 가치를 보여주는 매우 적절한 유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5. 사용자와 후세인들의 평가

아무튼 조총이 도입된 이후로는 압도적인 성능 차이 때문에 주력에서 밀려난 안습한 무기. 임진왜란이 종료되고 나서는 삼안포, 신기전 같은 고전적인 화약무기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신호용으로 이용되는 수준에 그쳤다.

심지어는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이 진행되는 도중에 2만개의 조총을 명에서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즉 당시 조정에서도 안습한 무기로 취급을 받았다(…). 임진왜란 발발 1년여가 지났을 때는 적게나마 승전을 거둔 대부분의 부대가 조총을 운용하는 상태였다. 아예 전쟁 후반기에는, 상당수의 정규군이 조총으로 무장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들이 발견된다. 사용자들도 승자총통 같은 보병용 중화기보다는 총이 유용하다는 평가를 내린 것이다.[13]

그렇지만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진주성 전투이치 전투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 왜군이 조선군의 방어진영에 닥돌하다가 수많은 주검을 쌓고 전략적인 목표가 좌절되었던 상황에는 승자총통의 몫도 상당했다.[14]특히 변이중화차의 경우에는 승자총통 40여문을 장비한 화차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시대적으로 조총에 완벽하게 발린 안습함의 대명사이긴 하지만, 최소한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무적죽장군 같은 화기에 비한다면야 그럭저럭 괜찮은 무기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하늘은 왜 승자총통을 내고 조총을 만들었는가!

현대에 들어서는 천자총통, 현자총통 같은 대형화포에 비하면 인기가 밀리는 편이고, 다른 매체에서는 단 한번도 등장한 적이 없다. 아무래도 조총에게 밀린 무기라는 인식이 강해서일까? 하지만, 요즘 진행되는 연구를 보면 승자총통도 최소한의 화약값(?)은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승자총통 자체는 일전에 사용된 일/이총통에 비하면 발전된 무기체계다.

심지어 조선 후기 기록에도 승자총통은 다시 등장한다. 동조총(銅鳥銃), 동소총(銅小銃), 승자동포(勝字銅砲)등의 이름으로 등장하며 현재 남아있는 승자총통 유물 중에는 임란 이후에 만들어진 것도 상당수 존재한다. 故 이강칠 교수의 저서 '한국의 화포'에 실려있는 사진/실측자료를 보면 기술적인 차이를 화력의 향상으로 메꾸기 위해 총에 두른 죽절과 약실이 더 두꺼워지고, 총 자체도 약간 크고 튼튼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15]

덤으로 승자총통도 시대에 비하면 뒤떨어진 무기지만, 이후의 조총도 서양의 발전한 카빈이나 강선소총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조선에서는 이를 지속적으로 개량해서 마침내 조선의 주력무기나 다름없게 되긴 하지만.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각종 전쟁과 산업혁명을 통해서 부쩍 성장하는 서양의 문명을 따라잡지 못해서, 그때까지도 조총이나 궁술에 만족하던 조선은 또다시 시대에 뒤쳐지고 만다.[16] 이쯤되면 무기체계만의 문제가 아니지만 사실 이 문제는 조선뿐만 아니라 비 유럽 문화권 전체의 문제이긴 했지만 말이다.

여담으로 현대보병끼리의 싸움에서도 각종 중화기의 우선도가 보다 떨어지는 이유도 승자총통과 조총의 교훈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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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일/이총통은 조선초 세종대왕 시기에 개발된 무기이다. 승자총통의 직계조상이며, 크기나 모양새 자체는 그쪽이 더 굵고 가볍다. 중기에는 관리의 편의성 및 화약사용량 같은 실용적인 이유로 승자총통이 대세가 된 것으로 보인다. 즉 총으로 바뀌어가던 핸드캐논의 단계
  • [2] 포 본체에 따로 소켓식 결속부가 있기 때문에 합치면 짧아진다
  • [3] 다만, 총에 가까운 후기형 승자총통들은 내구성이 약해서 철퇴로 쓰면 금방 구부러졌고, 이렇게 구부러진 유물도 상당수 발견된다(…). 또한 승자총통을 비롯한 여말선초의 총통들은 값비싼 청동합금(무쇠보다 비싸다)을 써서 만들었기 때문에, 철퇴로서의 용법을 주로 사용하기보단 어디까지나 임시변통 철퇴로서 쓰는 정도였다.
  • [4] 아예 대놓고 철퇴로서의 용도를 겸하게 만든 것은 임란 때 중국에서 들어온 핸드캐논인 쾌창. 이 쾌창은 아예 재질부터 청동합금이 아니라 쇠로 만들어졌으며, 사용법도 중근거리에서 장전해 놓은 산탄을 한 방 쏜 뒤 돌격해서 철퇴처럼 휘두르는 것이었다.
  • [5] 원래는 중세초기 포탄의 빈약한 명중률과 사거리를 보완하고자 만들어진 것으로서, 영국의 피스트리에도 대포에서 화살을 발사하는 장면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일반화된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처럼 화살에 집착한 나라는 드문 편. 활 덕후 국가
  • [6] 참고로, 기록을 보면 피령전의 사거리는 600보, 현대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480M 이상이다(1보는 6자/약1.8미터). 서양의 대형 화승총인 머스킷이랑 비슷하거나 긴 비거리이다. 동시대 기록이 다소 과장된 점을 감안해도, 화약 에너지가 대부분 사거리로 전환되는 만큼, 비거리 자체는 확실히 조총보다 훨씬 길었을 것이다. 조준이 불가능해서 문제지만.
  • [7] 이런 근거리 파편사격은 근접한 적(갑옷을 입은 보병, 기병)의 대열을 제압하기 위한 용도로서 널리 쓰인 방식이다. 밀집대형과 갑주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중세에는, 근접전이 일어날 때 여러명의 총통수를 섞어서, 장대가 달린 핸드캐넌으로 적군대열에 파편충격을 주는 방식이 자주 사용되었다.
  • [8] 창 끝에 인화성 물질과 화약을 집어넣고, 공성/농성전에서 화염으로 상대편을 제압하는 화약 장병기. 한두명이 쓰면 애매한 무기처럼 보이지만, 수십명이 집단으로 눈앞에서 불똥을 지져대면 얼마나 짜증날지 효과적일지 생각해보자.
  • [9] 작은 쇠구슬들이 송송 구멍을 뚫고 중앙 부위에는 주먹만한 바람구멍이 뚫린다. 갑옷을 입지 않았다면 살아남기 어렵고, 갑옷을 입었더라도 쇠구슬이 겹친 부분에 치명상.
  • [10] 그러나 승자총통이 정확한 원거리 공격에 비중을 둔 무기라고 생각한다면 화승총이 등장하기 이전의 화약무기 운영법을 모르는 소리다. 이런 초기적인 개인화기들은 정확한 원거리 사격이 아니라, 갑옷 보병이나 적군 진영을 확실하게 제압하는게 최우선 목적이었다. 애초에 승자총통의 본래 목적은 총이 아니기도 하고
  • [11] 3종류의 포탄으로 각 상황에 맞춘 운용을 고려하고, 급박하게 전쟁이 터진 직후에 각 지방에서 농성전이라도 그럭저럭 이길 수 있게 만들었던 무기로 평가받는다. 즉 이라는 무기의 발전사에서 보면 비판 받아야 마땅한 물건이지만, 당시 한정된 기술을 가진 조선군의 경험 내에서만큼은 잘 만든 무기라는 평가. 물론 당사자들도 전쟁 도중에 대부분의 병력이 조총으로 교체하는 타당한 행동을 보였다
  • [12] 어디까지나 임시변통인 사용법이라서 무시하기 쉽지만, 역사학계에서도 핸드캐논의 원시적인 재장전 속도를 고려하여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주력철퇴로서 이용했을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다. 철퇴로서의 스펙을 계산해보더라도 길이 100cm 내외/쇠막대의 무게만 3~5KG에 달하는 양손철퇴라는 실용적인 타격병기가 탄생한다. 구식 핸드캐논에 비교하더라도 장병기로서의 형태나 위력면에서 굉장히 실용적이었다.
  • [13] 애초에, 지원용 중화기로서는 대형총통 중에서 가장 가벼운 현자총통(팔코넷급)을 쓰는 편이 낫고, 승자총통급은 어디까지나 으로서 운용하는 편이 효율적이라는 것을 사용자들도 깨달았던 것이다. 실제로 실록에서도 선조가 대조총을 보고 수군은 이미 다른 포가 있어 이런 거 쓸모없을 테니 포 부족한 육군에나 좀 만들어줘라라고 말한다.
  • [14] 당시 조선에 보급되어 있었던 화기의 개수로 따져보면, 지자총통 이상급의 대형화포만 가지고 수만명의 왜군을 막았다는 것은 있기 어려운 일이다. 활이나 투석구만 가지고 성벽으로 기어올라오는 갑옷입은 수만명을 저지한다는 것도 어려운 이야기다. 즉 조총보다 허접한 무기이기는 해도, 지휘관따라서는 승자총통 급의 소형화기도 왜군을 막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뜻이다.
  • [15] 임란 이후의 재래식 소형화기들은 일본 대조총의 영향을 받아 조총이나 서양 핸드캐논과 유사한 개머리판을 장착하여 보병의 화력 지원용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구한말 신미양요 당시 미군의 기록에도 조선군이 징겔(아시아의 핸드캐논류를 서양에서 부르던 이름)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 [16] 효종 숙종대에 박연이나 하멜등과 접촉하고 나선정벌 등이 일어남으로써 조선도 수석총의 존재를 인지하고 개발 및 생산에까지 성공한다. 그러나 습기를 비롯한 환경적 문제와, 비싼 가격 때문에 실용화되지는 못했다...
  • [17] 샷건이 효율적인 대인 저지력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라이플보다 천대받는지, 승자총통과 조총의 예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전장에서 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무기인 셈. 승자총통이 남긴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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