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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도어 루스벨트

역대 미국 대통령
25대 26대 27대
윌리엄 매킨리 시어도어 루스벨트 윌리엄 태프트
별 의미는 없지만 전임과 후임 대통령이 모두 윌리엄이다.

< 190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
(ɔ)

Photograph: JonathunderMedal: Erik Lindberg (1873-1966)

from
1905 - 베르타 폰 주트너 시어도어 루스벨트 1907 - 에르네스토 T. 모네타, 루이 르노


1869년 큐티 프리티 허니했던 시절.ANFRHRLSK


기병대장으로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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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29.16 KB)]

한창 대통령 할 때.

"Speak softly and carry a big stick, and you will go far."(말은 부드럽게 하되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다녀라.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1][2]

"good to the last drop!!"(마지막 한 방울까지!!) - 미국 맥스웰 커피의 광고 문구

Theodore Roosevelt 1858.10.27 ~ 1919년 1월 6일
(대통령 재임: 1901년 9월 14일 ~1909년)

Contents

1. 개요
2. 일생
2.1. 성장과정
2.2. 재임
2.2.1. 대기업 규제-셔먼 독점금지법
2.2.2. 팽창적, 개입적 대외정책
2.2.3. 기타
2.3. 퇴임
3. 가족
3.1. 프랭클린 루스벨트와의 차이점
4. 평가
5. 일화
6. 픽션에서 등장하는 사례

1. 개요


본격적으로 국제무대에 미국을 등장시킨 대통령 하지만 한국의 입장에선 `좋게 보기 힘든 부분이 굉장히 많은 대통령.[3][4]

미국 제26대 대통령. 20세기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자, 최연소 대통령이기도 하다.

대개 Theodore라는 인명의 표기법을 헷갈리는 사람이 많아서 테오도어, 테오도르, 디어도어 등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표준 외래어 표기법 의하면 시어도어가 맞다. Theodore의 발음기호는 θí:ədɔ́:r(θㅣ-어도어-). 노홍철 돋네

시어도어의 애칭이 'Teddy'라서 테디 루스벨트라고도 알려져 있고 미국에서도 테디 루스벨트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본인은 테디라고 불리는 것을 대단히 싫어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테디'라는 애칭은 'Teddy', 'Teddie'라는 표기가 있는데 가족들이나 그의 친구들은 그를 부를 때 Teddie라는 표기를 사용했다고 하며, 루스벨트 본인은 자신의 이름을 줄여서 Thee라고 쓴 적이 있다. 당시 국민들이 부른 애칭은 Teddy이고 오늘날에도 Teddy Roosevelt라고 쓰는데 Teddie와는 달리 Teddy란 표기를 싫어했다고.

당시 언론에서는 풀네임 머릿글자를 따서 TR이라고 불렸는데, 이것은 언론에서 대통령을 니셜로만 부른 최초의 사례이다. 현재 한국 언론에서 정치인YS, DJ, JP 등으로 부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데, 바로 그 원조격 인물.

여담으로 뉴딜 정책으로 유명한 미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이 사람의 12촌(...) 동생이다. 잼(딸기로 만들어버릴라) 재미있는건 당적이 서로 다르다.

2. 일생


그의 다양한 경력을 보여주는 그림. 왼쪽 위부터 카우보이, 역사가, 경찰청장, 해군장관, 러프라이더(군인), 뉴욕주지사, 부통령, 대통령, 중재자, 그리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헌터(사냥꾼).

2.1. 성장과정

뉴욕의 상류가정에서 태어나서 대단히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는데, 어린 시절에는 심한 천식으로 고생했고 시력도 지독한 근시였으며 성인이 된 후의 모습과는 달리 말라깽이였다고 한다. 또한 요양을 갔다가 요양간 동네의 힘센 아이들에게 몰매를 맞은 적도 있다. 12세가 되자 아버지가 "너는 정신력은 강한데 몸이 약하다. 근데 몸이 약하면 정신도 제 능력을 다 발휘 못하니까 앞으로 체력 단련에 힘써라."하고 말한 이후로 매일매일 몸을 단련하여 건강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후 이분이 가장 좋아한 스포츠는 사냥이었다. 은퇴 후 아프리카 여행을 할 때는 사자, 코뿔소 등을 원없이 잡고 다녔다. 잡은 동물들을 앞에 놓고 당당하게 찍은 사진도 많이 있다.

어쨌든 허약한 몸을 극복하고 하버드에 들어가서 우수한 성적으로 학부를 졸업했고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했으나 1년뒤 중퇴하고 공화당에 입당해서 24세에 뉴욕 주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1884년 그의 아내와 어머니를 2월 14일에 같은 집에서 한꺼번에 잃는 불행을 겪었는데 이에 충격을 받고 아내가 낳은 딸을 여동생에게 맡기고 서부의 다코타로 가서 3년 남짓 카우보이생활을 하면서 지냈다 이때의 경력으로 후에 정적들에게 종종 "빌어먹을 카우보이!"라고 불리기도.

그리고 재혼한 후 뉴욕 시장에 출마했다가 낙방하고 잡지 기사와 을 저술하는 데에 전념했다. 그는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제일 많은 책을 저술한 인물로, 그가 저술한 책은 무려 38권에 이른다. 이후 1888년 벤저민 해리슨 대통령에 의해서 미국시민봉사위원회에 임명되었고 7년 뒤에 뉴욕 경찰국장이 되어 다시 뉴욕에 돌아왔으며 1897년 해군 차관이 되었다.


리즈시절 러프 라이더 기병대장 시절의 루스벨트.

이 무렵인 1898년 쿠바를 둘러싸고 스페인과의 전쟁이 터지자 의용군 '러프 라이더(Rough Riders - 거친 마부들)'를 조직하여 전쟁에 참전, 공적을 세우고 전쟁영웅이 되었다. 먼 훗날이자 그가 취임한지 100년이 되는 2001년 1월 16일,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이 때의 공으로 루스벨트에게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추서했는데, 이로써 그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명예훈장을 가진 대통령이 되었다. [5]

2.2. 재임


1902년 의회 도서관 앞에서 연설하는 루스벨트. 그는 연설할 때 팔을 강하게 휘두르며 쉴새없이 말을 쏟아냈다고 한다.

전쟁에서 돌아온 후 명성을 얻어 뉴욕 주지사를 거쳐 1900년 선거에서 윌리엄 매킨리의 두번째 러닝메이트로[6]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당선되었는데, 그 직후 1901년 매킨리도 암살되자 대통령이 되었다. 20세기 최초의 대통령.

이 때 나이가 42세였다. 미국 역사의 대통령 중 최연소 대통령 취임(젊은 대통령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존 F. 케네디도 대통령에 취임한 나이는 43세로 두 번째다. 케네디는 '선거로 뽑힌' 최연소 대통령).

2.2.1. 대기업 규제-셔먼 독점금지법

루스벨트는 보수당이자 만년 여당인 공화당 소속이었으면서도 우드로 윌슨 등이 참여했던 신주의 사회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아무 실권 없는 자리인 부통령직에 지명된 것은 이런 그를 제거하기 위한 당내 보수파들의 정략이었는데, 유독 공화당의 원로인 마크 한나는 "그 카우보이놈이 호시탐탐 노리는 게 대통령 자리라는 걸 몰라서 이런 짓을 하느냐"며 반대하였고 결국 그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마크는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된 것을 보고 "보라! 저 무지막지한 카우보이가 대통령이라니!"라고 탄식을 했다고.

위 만화에서 보이듯이 그 시절의 미국은 강도귀족(robber barron) 이라고 불리던 재벌들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대통령이 되어서는 당시 거대화된 대기업을 통제하기 위해 이른바 셔먼 독점금지법[7]을 내세워 대기업의 합병을 막아 대기업을 통제했는데 이 때 록펠러나 모건 그룹 등의 후덜덜한 대기업까지 인정사정 보지 않고 공격해 타격을 입혔다. 당시 기업들의 독점 합병을 '트러스트(Trust)'라고 불렀는데 이 독점금지법을 내세워 대기업에 타격을 입힌 사실 때문에 '트러스트 파괴자(Trust Buster)'라는 별명도 얻었다. 당시 미국의 경제정책은 시장 불간섭정책이 모토였는데 그의 이러한 정책은 자유방임시장에 정부가 통제, 감독을 했다는 것이 큰 의의를 가진다.

2.2.2. 팽창적, 개입적 대외정책

" 태평양 연안에서 미국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는 게 내 꿈이다. "

" 우리나라의 미래는 유럽에 면한 대서양보다는 중국에 면한 태평양에서 우리가 어떤 입지를 차지하느냐에 더 크게 좌우될 것이다."
30년에서 100년 앞을 내다보고 있다!


또한 외교적으로는 파나마 운하를 인수하고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국제적으로는 러일전쟁이 끝난 후 회담인 츠머스 강화조약을 주선하여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 종전 회담의 결과가 어떤 반도국가의 식민지화였다 그리고 일본의 조선 침략을 미국이 묵인한다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루즈벨트 역시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그리고 먼로 독트린에 더 사항을 추가하여 서반구에서는 미국이 국제경찰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정책을 펼쳐 산토도밍고 등 카리브해나 중앙 아메리카 국가들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국이 지금도 주장하는 '세계경찰'론의 기틀을 잡은 것. 그리고 국방 쪽에서는 해군 강화에 열을 올려 '대백색 함대(Great White Fleet)'를 창설했다.

2.2.3. 기타

또한 자연보호에도 힘써서 많은 국립공원을 만들었고 2억 에이커 이상의 지역에서 산림개발을 금지했다. 여러 모로 국내외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겨서 20세기 초기 미국의 국력을 신장시킨 대통령. 그 업적이 인정받았고 인기도 많아서 대통령도 두 번 역임했다. 1907년에는 경기침체를 겪었지만 과감한 정책을 밀어붙여 1909년 즈음에 이를 극복했다.

여담으로 그 유명한 라이트 형제가 비행에 성공한 것도 루스벨트의 재임기였는데, 그래서인지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비행기를 탄 대통령이 되었다. 또한 자동차를 최초로 탄 대통령이고 해군 잠수함에 최초로 탑승하여 직접 잠수함을 조타하기도 했다.

2.3. 퇴임

나는 늘 당신이 워싱턴과 링컨을 제외하고는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될 거라고 말했다. 어쩌면 그 두 사람보다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 최측근이었다가 적으로 돌변한 윌리엄 태프트에게 쓴 편지

재선에 도전하였을 때부터 '이번에 루스벨트가 재선을 하면 삼선도 노릴 게 분명하다'며 반대파가 주장한 것이 재임중에 그가 얻었던 인기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구설수에 오르는 데 부담을 느꼈던 그는 재선에 성공하자마자 '삼선은 없다'라는 돌출 발언을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이 삼선 불출마 선언이 퇴임 이후의 그의 경력에 먹칠을 하였다(그래도 자기 말을 번복하지는 않았다).

퇴임하면서 후계자로 보좌관인 태프트를 밀었다. 루스벨트의 후광 효과로 태프트도 대통령이 되었지만 태프트는 몇몇 상원의원에게 끌려다니거나 인사 문제로 루스벨트와 대립한 끝에 결국 루스벨트의 측근을 해고해 버렸다. 이에 화가 난 루스벨트는 1912년의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후보에 출마하려 했지만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태프트가 후보 지명을 받게 되고 이에 진보당이라는 당을 신설하여 공화당을 분열시켜 버렸다. 그야말로 전직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의 시궁창 배틀(…).

이 때문에 분열된 공화당은 표가 나뉘어 버렸고 1912년 대선은 어부지리로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루스벨트의 재선 때보다도 더 적은 득표수로 민주당이 승리해 버렸다. 루스벨트 본인이 얻은 표는 공화당의 태프트(23.2%)를 능가하며, 제3당 후보가 얻은 표로서는 최다 득표(27.4%, 412만표)). 루스벨트는 선거 유세 중에 매킨리의 암살을 루스벨트가 사주했다는 음모론 신봉자의 저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고, 이 때문에 선거 유세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못했다는 속사정도 있다.

국부인 조지 워싱턴처럼 떠날 때 떠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좀 더 좋은 평가를 받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많이 아쉬운 부분.

이 선거에 출마한 것 외에는 해외를 돌아다니며 탐험과 사냥을 하며 지냈는데 다우트 강을 탐사하다가는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그 후로도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막내아들 쿠엔틴이 프랑스에서의 공중전에서 전사하자 이 무렵부터 쇠약해졌고 공화당에도 1917년 복당했다. 이때 다시 1920년 선거에 재 출마를 생각하고 러닝 메이트를 워렌 하딩으로 정해놨었지만... 마침내 1919년 1월, 뉴욕 오이스터 만의 자택에서 수면 중에 사망했다. 죽은 루스벨트의 베게 밑에도 책이 놓여져 있었다고 한다. 사인은 관상동맥폐색. 루스벨트의 아들 커밋은 외지에 나가 있던 형제들에게 전하는 부고에 "The old lion is dead(노사자가 돌아가시다)"라고 썼으며, 그의 죽음에 부쳐 당시 부통령 토머스 마셜은 이렇게 말했다.

"Death had to take Roosevelt sleeping, for if he had been awake, there would have been a fight."(죽음은 루스벨트가 잠든 사이 그를 데려갔습니다. 만약 그가 깨어 있었다면 그와 싸워야 했을 겁니다.)

3. 가족

그의 딸인 '앨리스 루스벨트'는 아버지를 닮았는지 성격이 꽤 괴팍하고 독설가로 유명했는데, 가장 유명한 독설이 29대 대통령 하딩을 평가한 말 "그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다만 멍청이였을 뿐이지." 그리고 친척인 프랭클린 루스벨트 가족을 두고 "3분의 2는 물러터진 옥수수죽(프랭클린을 말한다)이고 나머지 3분의 1은 앨리너"라고 말했다. 그녀는 조선을 방문한 적도 있이 있는데 무례한 행동을 일삼고 돌아가기도 했다. 대표적으로는...


딸년 교육 한번 잘 시켰다

명성황후의 능에서 마바지채찍을 들고 조형물인 를 타고 있다. 이런 행동만 일삼고 뭔가 속시원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고종순종을 제대로 엿먹이고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당시 그녀 일행은 일본에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왔다.[8] 관련 내용. 한국의 반미세력이 꼭 이 사건을 언급하며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저런 모습처럼 어린 시절에는 워낙 무개념+개년왈가닥이라서 백악관에 손님이 찾아오면 "미합중국 대통령은 맨날 자식을 때려요!"라고 소리지르는 장난을 즐겼으며, 을 목에 걸고 나타나는 바람에 백악관 방문객들을 깜짝 놀래키곤 했다고. 루스벨트 본인도 "저는 미합중국의 대통령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제 딸 앨리스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한 번에 다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 꽤 악동이었던 그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 정도니 말 다한 셈. 말년에 누군가가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묻자, "실리보다는 허세만 가득찬 양반이었죠."라고 꼬집었다.

그런데 앨리스가 아니라도 루스벨트의 자식들은 백악관에 있을 때 모두 나이가 어렸다. 그런데 형제들이 아버지를 닮았는지 하나같이 말썽꾸러기라 숱한 장난으로 백악관을 난장판으로 만들어서 영부인과 백악관 직원들의 속을 뒤집어놓곤 했다고 한다. 특히 막내아들 쿠엔틴이 심한 장난꾸러기였는데 그는 5, 6명 정도의 친구들을 데리고 백악관에서 말썽을 부렸고 심지어는 찢어 뭉친 종이조간을 백악관에 걸린 대통령 초상화에 붙여 놓았다가 루스벨트에게 크게 혼난 적도 있다. 이렇듯 그는 미국의 대통령뿐 아니라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의 역할도 백악관에서 함께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이 개구쟁이 아들들은 장성해서 제1차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했다. 막내아들 쿠엔틴은 1차대전 중에 전사했고 다른 아들들도 커밋은 2차대전 중에 전쟁에 대한 우울증과 알콜중독에 시달리다가 알래스카에 파견 나가 있던 중 그곳에서 자살했으며, 시어도어 주니어는 2차대전 중 프랑스 전선에서 병사했다.

3.1. 프랭클린 루스벨트와의 차이점

미국 제32대 대통령이고 뉴딜 정책으로 유명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재임 1933-1945)와 간혹 혼동되기도 하는 인물.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대공황 시대에 재임했던 프랭클린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모자로 오인되기도 한다! (...) 고로 관련사항을 인용하거나 행적을 밝힐 때는 반드시 이름을 함께 써 주거나 구분해서 써 주면 좋을 것이다. 안된다면 Teddy(테디), TR이나 FDR 같은 니셜도 괜찮다. 하도 미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라...

굳이 촌수를 따지자면 테디가 프랭클린의 먼 친척 형 뻘이다. 나이 차이 때문인지 흔히 조카와 당숙 사이로 알려져 있지만, 루스벨트 가문의 족보를 보면 둘은 12촌 형제에 해당한다. 뭐 12촌이면 거의 남남이니 같은 가문 사람이라는 것 정도로 알아두면 된다.[9]

하지만 둘의 관계는 대단히 친했다. 우선 테디의 조카인 엘리너가 프랭클린과 결혼하여 프랭클린은 테디의 조카사위도 된다. 둘이 막 결혼한 시절 테디가 프랭클린에게 결혼생활에 대한 조언을 해 준 편지도 남아 있으며 1905년 두 사람의 결혼식 때 신부인 엘리너를 테디가 직접 프랭클린에게 인계해 주며 장인 역할을 했다. 테디 본인은 프랭클린을 두고 "그 녀석을 위해서라면 그 녀석이 맞을 총알도 내가 대신 맞을 수 있다."라고 했을 정도로 대단히 프랭클린을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둘의 정치 노선은 다소 달랐던 편. 일단 테디는 공화당, 프랭클린은 민주당이었고 프랭클린은 테디의 정적이었던 윌슨을 지지했다. 야심만만했던 젊은이 프랭클린은 테디를 존경했고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았지만 한편으로는 반드시 넘어야 할 라이벌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그를 넘어섰지

4. 평가

영국의 역사가 휴 브로건은 그를 "에이브러햄 링컨 이후 백악관에서 제일 유능한 사람, 앤드류 잭슨 이후 가장 정열적인 사람, 존 퀸시 애덤스 이후 최고의 독서가"라고 평가했으며, 루스벨트의 아들은 "아버지는 결혼식장에 가면 신랑이 되기를 원하셨고, 장례식장에 가면 죽은 사람이 되고 싶어한 분이셨지요."라고 회상했다. 주인공 기질이 강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노엄 촘스키는 그를 "악랄한 제국주의자이자 최악의 정신병자"라고 혹평했으며 미국 진보계열 사학자의 대표적인 인물인 워드 진 역시 "혁신주의의 탈을 쓴 보수주의자", "전쟁광이자 제국주의자"이라고 혹평했다. 실제로 그는 분명한 제국주의자였다. 유럽아메리카의 상호 불간섭을 표방한 먼로 독트린에 수정조항을 달아 라틴아메리카에 간섭하기 시작하였는데, 파나마 운하 건설중에 콜롬비아와 마찰이 생기자 파나마의 반란과 분리독립을 배후조종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말은 부드럽게 하되 몽둥이는 큰 걸 들고 다녀라"라는 루스벨트의 말은 당시 미국의 외교정책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당대의 대문호 마크 트웨인도 그를 보고 "남북전쟁 이래 미국에 내린 최악의 재앙. 정치계의 톰 소여이며 무게 잡을 기회가 50%면 캐나다까지 가고, 그 기회가 100%면 지옥까지도 갈 작자"라고 혹평했다. 아들의 평가와 마크 트웨인의 평가를 조합하면 자의식이 대단했던 것은 사실이었던 듯. 오늘날에도 미국의 진보 계열 지식인들은 전임자인 매킨리와 함께 미국 역사상 최악의 전쟁광이자 제국주의자로 혹평하고 있다. 반면에 네오콘 계열에게는 위에 나온 독점금지법 때문에 자유시장경제를 억압한 사회주의자로 혹평받는다. 어쩌라고.;;

조금 부연하자면 이 시기는 누가 해도 제국주의 시기였을 것이라는게 정평. 어차피 미국내부는 오랜 산업화를 거쳐 자본이 남아도는 시기였기에 침략전쟁은 이 시기에는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물론 더하고 덜한 차이는 있었겠지만. (마치 이토 히로부미가 죽지 않았다면 혹은 다른 인물이 식민지화를 진행했다면 향방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가정과 그다지 진배 없다. - 물론, 조지 W. 부시와 같은 예외적 케이스는 전쟁이 반드시 필연은 아니라는 좋은 증거.) 예컨데 학자로서는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였던 민주당의 윌슨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도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였다. 그에 비해 사회주의자 기믹은 어느정도 루스벨트 개인의 성향과 관계가 크다. 물론, 제국주의와 식민지화가 잔인한 범죄라는 것은 기억해두자.

와패니즈 항목을 참조하면 써 있겠지만 한국 입장에서는 반한 와패니즈 성향[10]에다가 한일합방을 강력하게 지지한 까닭에 좋게 볼 수 없는 인물이지만 단순히 대통령으로써의 업적과 능력만 놓고 보면 미국의 국력 신장을 이끈 우수한 대통령으로 뽑히며 매번 미국 대통령 평가 순위나 인기 랭킹을 조사하면 항상 5위권 내로 들었는데 2010년 시에나 대학에서 시행한 대통령 업적 평가에서 결국 2위에 드는 기염을 토했다. 2010년에 시에나 대학[11]에서 한 이 조사에서 1위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3위는 에이브러햄 링컨. 참고로 이 조사에서 현직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는 15위를 차지했다. 이것으로 두 루스벨트가 부동의 1위 링컨을 누른 셈. 가문은 용감했다(?).

정치학자들에게는 '현대적 대통령의 모델'을 최초로 제시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본인 역시 가문빨도 빵빵한 데다가 본인의 능력이 대단하여 학자, 농장주, 카우보이, 군인, 경찰, 탐험가, 사냥꾼,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엄친아스런 면모에다가 대통령 시절 남긴 많은 업적과 일화, 개인적 매력 등과 맞몰려 지금까지도 미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러시모어 산에 있는 큰 바위 얼굴에도 그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것은 그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잘 말해준다 할 수 있다. 심지어 미국 역사학자들이 생각한 대체역사 시나리오를 모은 약에라는 책에서는 루스벨트가 3선(+4선)에 성공했으면 독일 제국을 강하게 압박하여 제 1차 세계대전은 조기 종결되고 러시아 혁명도, 나치스도 없는 평화로운 20세기가 되었을 것이라는 시나리오까지 있을 정도다. 물론 남북갈등[12]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근본적인 모순을 모두 제거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보며 마무리.

5. 일화

사냥복 차림의 루스벨트

"당신 나라에는 특이한 것이 두 개 있는데, 바로 나이아가라 폭포와 당신네 나라 대통령이오." - 루스벨트 재임기에 미국을 방문한 한 영국 외교관

그 숱한 미국 대통령들중 이 사람만큼 많은 이야기거리를 남긴 사람은 흔치 않다.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음에도 어딘가 특이한 면이 있어서 아래의 일화에서 보듯 기행도 많이 일삼았다. 오죽하면 영국 외교관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을까.

  • 프랑스 대사인 주세랑이라는 사람과 함께 산책을 했는데 산책하다가 너무 깊어서 걸어서 건너가기 힘든 을 만나자 대통령은 갑자기 옷을 훌훌 벗고 주세랑 대사에게 옷을 벗을 것을 권했다. 결국 그 프랑스 외교관도 웃통을 벗고(...) 미국 대통령과 함께 헤엄쳐서 개울을 건넜다. 또한 그와 함께 산책한 영국 대사는 그 날 일기에 죽는 줄 알았다. 산책이라더니 어떻게 두시간 반 동안 등산하냐. 이런 식의 일기를 남겼을 정도였고, 그 영국 대사가 지쳐서 움직이지 못하자 앞서가다 말고 내려와서 영국 대사를 잡아끌고 끝까지 올라갔다. 또한 한 친구와 산책하다가 산 속에서 폭발음이 들렸는데, 이것은 채석장에서 굴을 터뜨린 소리였다. 당연히 바위조각들이 튀고 머리 위로 쏟아지는데 되려 친구에게 '바위조각 많이 떨어지는 곳으로 가 보자'고 억지로 끌고 갔다고 한다. 이게 뭐 산책인지 유격훈련인지 분간이 가지 않지만 이런 일화를 보면 마이페이스 기질이 있었던 듯.

  • 운동을 너무 좋아해서 대통령 시절 복싱선수 존 설리번을 백악관에 불러 복싱연습을 했을 정도. 연습 중 부상당한 적도 많지만 눈이 찢어져도 끝까지 연습을 했다. 정통으로 한쪽 눈을 얻어맞은 적도 있었는데 결국은 그 눈의 시력을 잃었다. 국회의원들을 데리고 장애물 경주를 하기도 했다. 루스벨트의 하버드 동기였던 가네코 겐타로[13]는 루스벨트가 운동을 좋아한다는 점을 알고 일본 유도선수들과 스모선수들을 백악관으로 초빙해 일주일에 세번씩 대련할수 있도록 주선해주기도 하였다. 백악관에 요코즈나(橫綱)를 초청한적도 있다.

  • 유도와 스모뿐 아니라 일본 문화 자체에 상당히 관심이 많아서 오륜서추신구라, 무사도를 애독했다. 특히 추신구라에 대해서는 최고의 이야기라는 극찬을 했다. 루스벨트 시절 미일관계는 단순히 태평양 방면에서 미국의 외교적 이익을 얻기 위한 차원을 넘어 루스벨트 개인의 일본에 대한 호감이 작용한게 아닌가 하는 말까지 나올 정도.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BANZAI"라고 글을 메모하기도 했다.

  • 1912년 대선에 출마하여 밀워키에서 연설을 준비 중에 괴한[14]에게 피격당해서 오른쪽 가슴에 총을 맞았는데 갈비뼈가 부러지고 가슴에 총탄이 박힌 채로 한 시간 동안 연설을 한 후에 병원으로 갔다. 그나마 연설도 숨을 헐떡이면서 겨우겨우 해냈으며 연설 후 의사에게도 '들것에 누워 가기 싫다. 내 발로 걸어가겠다'며 끝내 병원까지 걸어갔다. 총탄이 루스벨트의 상의 가슴 주머니에 있던 안경 케이스와 연설문을 뚫고 가슴 근육에 박혔는데, 워낙 운동과 탐험으로 다져진 강건한 체구였던 덕택에 폐를 뚫고 들어오는 치명상을 입지 않았다. 이 행동에 대해서 그의 반대자인 우드로 윌슨 등도 '나는 루스벨트의 정치 노선에는 반대하지만, 그 기개는 존경한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또한 루스벨트가 총상을 치료하는 중에는 같이 대선에 출마한 윌슨과 태프트 모두 선거운동을 중단했다고 한다.

  •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당시 대통령 윌슨에게 "나도 1개 기병 사단을 지휘해서 참전하겠소!"라고 요구했다. 물론 윌슨의 대답은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오."

    무스(moose)를 타고 있는 시어도어 루즈벨트

  • 모험심이 강해서 당대 최고의 모험가이자 사냥꾼으로 유명했다. 사격 실력도 꽤 우수한 편이었다고. 사냥과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바로 테디 베어 이야기로 관련 일화는 해당 항목 참고. 그리고 자연환경보호정책을 편 것 치고는 상당히 사냥한 동물들이 많았는데, 이 당시에는 자연보호활동과 사냥을 하는 것의 괴리가 문제되지 않았던 모양으로 이를 가지고 루스벨트를 비판하는 이는 없었다. 사실 자연보호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 자체가 프로 사냥꾼인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이는 그들 사냥꾼이야말로 동물 숫자의 감소를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10년 전에는 초원에 우글거리던 코끼리떼가 지금은 손꼽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면 경각심을 느끼는 것도 자연스럽다. 코끼리가 다시 많아져야 내가 사냥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 탐험에 대해서는 1909년 대통령에서 퇴임하자마자 스미소니언 협회의 지원을 받는 과학탐험대를 인솔하여 바로 아프리카 탐험을 떠났다. 1913년에는 브라질에 위치한 지도에 나와 있지 않는 미탐사 지역인 다우트 강 탐험을 직접 이끌기도 했다. 탐험을 마치고 루스벨트는 "소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 위의 아들이 한 말처럼 진짜로 장례식장에서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말려서 실패했지만 그는 에 들어가 보고 싶다고 징징댔다고.

  • 골치를 앓고 있던 중요한 사안에 대해 정부의 고위관리와 회의하던 도중에 조카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아저씨, 4시가 넘었어요!"라고 말하자 관리에게 "저 아이들하고 4시에 사냥을 가기로 했는데, 미안하지만 이 문제는 나중에 논합시다. 원래 애들에게 있어서 기다린다는 것은 아주 견디기 힘든 일 아니오?"라며 회의도 대충 끝내고 냅다 사냥을 나가버렸다(...).

  • 뉴욕 경찰청장 때와 주지사 시절에는 검은 망토로 변장하거나 경찰관으로 변장하고 공무원들이 있는 곳을 돌며 졸거나 근무를 똑바로 안 하는 공무원들을 보면 즉석에서 질책했다고 한다. 일종의 암행어사를 직접 했던 셈.

  • 아이들을 무척 좋아해서 대통령 시절에도 자식이나 조카들을 데리고 어울려 놀곤 했다. 함께 사냥을 가거나 승마를 하기도 했으며 베개싸움까지도 했다. 심지어는 아이들과 함께 백악관 만찬장의 쥐잡기를 진두지휘(?)했다고 한다. 영부인 이디스는 이렇게 말했다. "제 아이가 7명인데(원래 루스벨트 부부의 아이는 6명인데, 남편까지 합쳐서 한 말) 시어도어가 제일 어려요."


그가 편지에 그린 그림. 두 번째 그림은 백악관 정원의 풍경이다.

  • 그림실력이 "출중"했다. 자식들이나 어린이들에게 직접 편지를 썼는데 어린이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아이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항상 그림을 그려서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의욕과는 달리 실력은 그다지... 그래도 일본의 모 성우보다는 나은 수준이다.

  • 이승만도 루스벨트를 만나본 적이 있다. 이승만은 1905년 호놀룰루의 한인 선교부를 책임지던 와드먼 박사를 통해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태프트와 접촉했고, 태프트의 소개장을 통해 루스벨트와 만난 적이 있다. 개인적인 용무로 만난 건 아니고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만난 건데,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맺어진 때였고(밀약을 TR이 조인한지 5일된 시점이었다) 상기된 앨리스 루스벨트의 방문에 고종이 신경쓴 것처럼 미국에 대해 걸고 있는 고종의 희망과 관련있다. 루스벨트는 이승만을 만나러 와서 이승만이 내미는 미국의 거중조정을 요청하는 문서를 쓱 훑어보고는 "이렇게 하지 말고, 정식 외교 창구를 통해 공식적으로 제출하시오"라고 하고 바로 가버렸다고 한다. 거절 의사를 완곡하게 표현한 외교적 수사이었으나 당시 서양 외교를 잘 몰랐던 이승만은(이 일을 끝내고 나서 미국에서 국제법 관련 학위를 땄다) 이제 다 된 줄 알고 주미 한국 공사관의 공사 김윤정에게 미국 외무성에 문서를 보내달라고 했으나 김윤정이 '본국 훈령이 없인 움직일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고 한다. 며칠을 거듭한 요구에도 김윤정이 거절하자 이승만은 격분하여 김윤정과 그 가족들에게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김윤정에게 욕하던 중 김윤정 공사의 가족이 오자 애들에게 '너희들 아버지로 인해 너희는 노예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고... 공사 김윤정이 일본과 내통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정확한 것은 불명. 그러나 한일 병합 이후 일본이 '한국 병합에 지대한 공헌을 함'이라는 평가와 함께 중추원 참의직을 수여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었다고 한다. 김윤정의 자손 측에서는 분명히 그걸 미 국무성에 전달했으나 '12시에 오라'며 사실상 거절당했다고 주장한다. 여담으로 이승만은 일기에 김윤정 가족에게 온갖 욕을 퍼붓고는 기운이 설사하듯 빠져나갔다고 기록했다.

  • 유명한 맥스웰 커피의 광고 문구인 "마지막 한 방울까지(good to the last drop)"[15]가 바로 이 양반 작품. 1907년 그는 맥스웰하우스 커피점에서 커피를 마시게 되었는데 커피가 어찌나 맛있던지 저 말을 하며 격찬했다고 한다. 루스벨트의 이 말은 오늘날에도 맥스웰의 광고 문구로 쓰이고 있다. 덧붙여 그는 엄청난 커피광이었다고.

  • 미국의 상징동물을 흰머리수리에서 회색곰으로 바꾸려고 했다. 물고기나 잡아먹고 사는 흰머리수리가 강한 미국의 상징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다고... 하긴 미국도 대륙국가지... 러시아와 매치!? 곰도 물고기나 잡아먹고 살지 않나

  • 텍사스라는 애마가 있었다. 여기에 얽힌 이야기도 꽤 된다.

  • 사진기억력을 가져 매일 아침 커피타임에 책 한 씩을 읽었다고 한다. 한 번은 친구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책을 빌려줬는데 책의 분량이 좀 많았다. 그러나 저녁 식사 때 초대되어 다시 찾아가보니 대통령은 이미 그 책을 독파하여 '그 책 읽어보니까 어떤 부분은 어떻고...'라며 인상 깊었던 부분에 대해 친구에게 열심히 설명했을 정도. 속독 능력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다독으로도 유명했다. 덧붙여 친척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속독 능력자였다고 한다. 이거슨 우월한 가문과 학벌[16]의 힘?

이 외에도 루스벨트는 대단히 많은 화제를 뿌린 인물로 그의 다혈질이지만 능동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는 꽤 많다.

6. 픽션에서 등장하는 사례


'박물관이 살아있다 2'라는 영화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이 역으로 등장했다. 영화 리뷰어들 중에서 역사에 별 관심이 없는 리뷰어들이 이 영화의 루스벨트를 프랭클린 루스벨트로 착각하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이 작품 속에서는 주인공 래리 델리(벤 스틸러 분)의 좋은 조력자. '행복의 열쇠'에 대한 이야기가 포인트. "난 루스벨트가 아니라 공장에서 나온 밀랍 인형이야. 그런데 자네는 뭔가?"라며 래리에게 용기를 주는 장면은 나름 멋지다. 본인은 테디라고 불리는 걸 싫어했는데 여기서는 테디라고 불러도 별 반응이 없다. 배우 보정인가?


위 영화의 주요 촬영장소가 된 뉴욕의 미국 자연사박물관 입구의 동상 주인공이 바로 루스벨트다. 이 동상 옆의 아메리카 원주민 때문에 인종차별 상징 등으로 싫어하는 사람도 많은 듯.

2011년 개봉 예정인 '라이즈 오브 시어도어 루스벨트(The Rise of Theodore Roosevelt)란 영화에서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루스벨트 역으로 출연한다. 이 영화는 동명의 루스벨트 전기를 원작으로 하는데 이 전기는 버락 오바마가 애독하는 책 중 하나라고. 루스벨트의 삶을 다룬 3부작 전기중 1부에 해당된다. 루스벨트의 탄생부터 전임 대통령 암살 소식을 듣는 곳까지 1부, 2부인 시어도어 렉스는 대통령 퇴임까지를 다루고 있다. 참고로 이 논픽션의 작가는 80년대 레이건 친화적인 전기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1997년 작품인 '러프 라이더즈'에도 주인공격. 루스벨트가 러프라이더로 참전한 미국-스페인 전쟁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루스벨트 역으로 톰 베린저가 출연. 미국의 입장에서만 전쟁을 해석하고 있지만, 시대적 고증은 괜찮은 편이니 19세기 말엽의 무기나 전쟁에 관심이 있다면 볼 만한 영화.

레드얼럿3에서는 러시모어 산에 있는 그의 머리 위에 ICBM 발사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름하여 '루스벨트 지구 멸망'이라는 병기로 개조되었다. 오오 테디 오오.

타임라인-191 시리즈[17]에서는 1편에서는 농장주를 하다가 의용병을 이끌고 캐나다의 영국군을 무찌르는 영웅으로 나오고 이후 민주당 대통령이 돼서 북부를 부흥시켜 1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대통령으로 나온다. 최전선에 시찰가는 장면이 버젓히 나온다. 다만 여기서는 퇴임후 골프를 치다가 사망하는 걸로 처리된다.

영국에서 나온 대체역사 소설 시리즈에서는 루스벨트가 1912년에 진짜로 암살된 후 혼란의 와중에서 트로츠키주의에 감화된 사회주의자들이 공산혁명을 일으켜 대통령 일가를 참살하고.. 유럽 자유주의의 강대국인 러시아와 냉전구도를 이끄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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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루스벨트가 즐겨 사용한 말. 루스벨트는 이 말을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아프리카 속담'이라고 소개했다. 루스벨트의 외교 정책은 물론 개인적 인품도 잘 보여주는 말로 특히나 'Big stick'은 거의 그를 상징하는 키워드가 되었다.
  • [2] 이 말은 Dawn of War 1편에서 가브리엘 엔젤로스의 "Walk softly and carry a big gun"으로 패러디 된다.
  • [3] 이건 좋게 말한 수준이고 사실상 천하의 개쌍놈.
  • [4] 카츠라-태프트 밀약도 시어도어의 재임 시절에 일어났다. 그가 대학 시절에 일본 친구를 만났다는 과거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와패니즈를 넘어 일빠이자 혐한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아둔하고 무지하다'라는 요지의 글을 보고 극찬했으며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는 모습을 꼭 보고싶다'라는 소리를 남기기도 했다. 혐한 와패니즈의 전형적인 모습. 한국의 입장에서 이런 인간이 노벨평화상 수상자라는 사실은 매우 불편할 것이다.
  • [5] 솔직히 말해서 그의 공적이 과장된 면이 많았다. 그가 빛을 발휘한 산후안 고지 전투때는 러프 라이더 보다 흑인 보병들이 앞장서서 싸우고 피해를 제일 많이 보았고 오히려 미군의 10분의 1밖에 안됐던 스패인군들은 가망도 없었지만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앞서 말한 흑인부대에서 용맹히 전사한 이들은 비록 루즈벨트가 있었던 곳 보다 더 위험한 곳에서 싸웠지만 훈장도 못받은 경우가 많았다. 루즈벨트는 미디아 때문에 크게 부각되어서 이득을 본샘 이라는 의견도 많다.
  • [6] 인기 있던 가렛 호바트Garret Hobart가 1899년 병사해버렸다. 선거를 눈앞에 둔 시점이라 남은 1기 임기의 후임자는 없음.
  • [7] 이것은 원래 23대 대통령이었던 벤저민 해리슨 시절에 제정된 것이지만 그 시대에는 큰 효용을 보지 못했다. 이 법안을 제대로 사용한 인물이 바로 루스벨트.
  • [8] 이 사건은 당시 대한제국 홍실 의전담당차 있던 독일 여성인 엠마 크뢰벨(Emma Kroebel)이 본국에서 <내가 어떻게 조선의 궁정에 들어오게 되었는가(Wie ich an den koeanischen kaiserhof kam)>라는 책을 저술하면서 알려지게 된다. 하지만 1909년 11월 16일자 뉴욕타임즈에서 그녀의 무례한 행동에 대한 기사가 실리자 마자 다음날 그녀의 남편인 니콜라스 롱워스(Nicholas Longworth) 공화당 의원이 찔렀는지내용이 전부 다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 심지어 그녀는 이 기사를 보고 비웃었다고 한다 이런 쳐 죽일 년! 결국 코넬대학교 도서과네 근무하던 한국인 사서가 관련사진을 발견함으로서 엠마의 말이 맞았다는 것이 나온다.
  • [9] 12촌이면 할아버지와 손자만큼 나이차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시어도어와 프랭클린은 23살 차이.
  • [10] 자신의 친구인 '아웃룩 매거진(Outlook Magazine)'의 편집장 조지 케난(George Kennan)이 1905년에 출간했던 '나태한 나라, 한국'에서 조선인은 나태하고 무기력하며, 몸과 옷차림이 불결하고 아둔하며, 매우 무식하고 선천적으로 게으른 민족이라고 악평을 적었는데 루스벨트는 케난에게 “한국에 관하여 쓴 당신의 첫 번째 글은 정말 마음에 든다”며 극찬을 하였다.
  • [11] 이 대학은 1982년 이후 자주 미국의 정치학자들이나 역사가, 정치인 등을 모아서 대통령 업적평가를 한다.
  • [12]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간의 갈등. 제국주의 국가가 주로 북반구에 있던 것에서 유래.
  • [13] 이토 히로부미내각에서 농무상과 법무상을 지냄
  • [14]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매킨리 암살을 사주했다는 음모론을 믿는 자였다.
  • [15] 정확하게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좋구만!"이지만 한국에서는 저 표현으로 쓰인다.
  • [16] 두 대통령 모두 하버드 졸업생이다.
  • [17] 남부연합이 승리해서 미국이 분단되는 대체역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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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1 00:4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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