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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last modified: 2015-04-13 19:22:21 by Contributors

일제강점기인 1927년 2월 15일에 조직된 좌우연합 사회운동 단체. 신민회와 엄청나게 헷갈리는 경우가 있다.

안재홍, 이상재, 김병로등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홍명희, 허헌 등 사회주의자들이 합작한 좌우연합 독립운동 단체다.

중국에서 민족주의 단체인 국민당과 사회주의 단체인 공산당이 국공합작을 맺게 되고 이러한 현실 속에 세계 코민테른 협회는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선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단결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한반도에서 정우회 선언을 통해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가 합작해 일제에 저항하겠다는 취지를 발표했고[1] 이에 따라 좌파와 우파가 결합을 하여 신간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단체는 합법 단체로 전국적으로 여러 지회 지부를 두었으며, 최고 절정기때는 회원 수가 4만 명에 육박했었다.

그러나, 이 단체는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시기, 이를 3.1운동에 버금가는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서 허헌, 조병옥 등의 지도부 40여명을 포함하여 약 100여명이 대거 구속되는 사태(민중대회 사건)가 벌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원 수는 오히려 증가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오히려 내부에서 생겨나고 있었다.

본래 신간회는 합법 단체인 까닭에 일제 당국의 탄압하에서 기대한 만큼의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없는 약점이 있었다. 그리고 일제는 우파의 주축이었던 조선일보[2]에게 조선일보의 복간을 조건으로 활동의 온건화를 주문하고 있었다. 여기에 아무래도 사회주의계와 민족주의계라는 서로 다른 집단이 모여있다 보니 알력 다툼도 있었는데, 민중대회 사건 이전 상향식 지도자 선출 방식을 택했던 복대표회의가 사회주의계열 지도부의 대거 탄생이라는 결과로 이어진 상황이었다. 민중대회 사건 이후 기존 지도부가 대거 구속되면서 새로 지도부에 오른 민족주의계의 김병로로서는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장고 끝에 악수라고 김병로의 선택은 결국 최악으로 나왔는데, 같은 우파계열이라고 하지만 자치론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던 최린이나 송진우 같은 이들을 끌어들여서 신간회를 민족주의계, 아니 온건화를 넘어서 자치론에 가깝게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이런 우클릭에 대한 사회주의계의 반발은 엄청났는데, 애초에 신간회는 이광수민족개조론민족적경륜으로 대표되는 자치론에 대한 위기감으로 탄생한 단체였다. 민족주의계에서 특히 조선일보계열이 많았던 것도 이광수가 주로 동아일보에 글을 썼기 때문이었을 정도였다. 그런 신간회가 자치론으로 기운다는 것은 단체의 존재이유와 연결되었다.

여기에 내부 구성도 문제였다. 신간회의 하부구조, 즉 지회 등은 사회주의계가 주로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앙지도부가 민족주의계를 넘어서 자치론으로 넘어가려는 기미가 보이자 이는 지회와 중앙지도부의 대립으로 발전했다. 이 때문에 신간회는 언제 박살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상황 변화가 좌파계열에서 내놓는 신간회 해소의 주요 이유이다.

외부적으로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대륙에서 장개석이 국공합작을 깨트리고 공산당을 토벌하기 시작하자 세계 코민테른 협회는 애초의 방향성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우선 1928년 12월에 있었던 '조선혁명 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 통칭 12월테제인데 '신간회의 존재 자체는 인정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으로 우파계열에 흡수되어서는 안되고 비판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분열의 가능성은 두고 있을지언정 존재 자체는 인정한 것이었다.
문제는 1930년 9월에 있었던 프로핀테른[3]의 '조선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임무에 관한 테제', 일명 9월테제였다. 9월테제는 신간회를 민족개량주의단체로 규정해버렸다. 이런 상황 변화의 이유는 3가지인데 물론 첫번째는 신간회 지도부의 변화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것은 전세계적 변화였다. 우선 1929년 말부터 시작된 세계대공황이 시작되었고, 1930년대에는 러시아 공산당을 스탈린이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스탈린은 코민테른을 독재에 가깝게 끌고 갔고, 그 극단적인 예가 1930년 9월에 있었던 프로핀테른 제 5차대회였다. 이 상황이 얼마나 심했느냐하면, 이 대회에서 신간회 해소 외에도, 서유럽과 북유럽을 중심으로 한 제 2인터네셔널이 사회파시즘으로 규정되었고, 일본내에 존재했던 합법적 노동정당인 일본노농당도 해소되었다.
이런 점이 우파계열에서 신간회 해소를 코민테른의 지시 때문이라고 주장 하는 배경이다.

결국 그렇지 않아도 불안불안한 상황에서 등장한 9월 테제는 신간회의 존속에 치명타를 가했다. 결국 1930년 12월 부산지회를 시작으로 등장한 해소론은 전지회로 확장되었다. 이 때문에 부산지회 이후의 모든 논의는 해소론과 존치론으로 나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중앙본부를 제외한 모든 지회가 해소론을 두고 논쟁과 투표를 벌였고 결국 상당수 지회들은 해소를 결의했다. 특히 1931년 중앙본부를 비판하면서도 해소는 반대했던 서울의 경성지회마저도 해소쪽이 찬성표가 더 나오자 그 충격은 엄청났다. 결국 부산지회를 중심으로 하는 해소론과 마산지회를 중심으로하는 해소 반대론이 중앙본부까지 올라가게 된다. 더구나 이것을 알게 된 일제는 이를 방조 및 유도하였다. 신간회를 일단 해소시키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일제는 창립대회 이후 4년만인 1931년 5월 신간회의 전국대회를 승인한다. 그리고 신간회 전국대회는 그대로 해소대회가 되었다. 대회 직후 대의원이 선출되었고, 이들을 통해서 신간회의 해소가 결정된다. 그리고 신간회 해소파들은 이 대의원들을 통해서 그대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고 하였다. 애초에 해체가 아니라 해소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신간회를 완전히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되는 지도부와 기존 조직을 없애고 판을 새로 짜자는 것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신간회 해소론은 원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속 여부를 두고 벌어졌던 국민대표회의와 유사한 형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해소파가 새로운 조직의 지도부로 등장하려는 순간, 일제가 개입한다. 일제는 '합법적 단체는 신간회 뿐이고, 신간회가 해체되었으니까 집회도 자동으로 금지지. OK?'라고 하면서 모여있던 인사들을 강제 해산시켜버린 것이다. 이에 당황한 이들은 한용운을 중심으로 해소를 비판하는 운동을 벌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후에도 일제는 해소는 해체와 마찬가지이니 집회는 열수 없고 빨리 청산하라는 강압으로 통해서 신간회의 해소를 기정사실화 해버렸고, 그렇게 신간회는 해소론과 존치론 그 누구의 뜻도 아닌 일제에 의해서 해체되어 버렸다.

여담으로 사회주의계 지도부로 감옥에 들어가 있었던 허헌, 조병옥, 홍명희 등은 오히려 해소반대론의 입장이었지만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힘을 쓸 수가 없었다.

한국근현대사의 '한국의 독립운동' 분야, 특히 좌우합작운동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부분. 실제로 신간회의 어처구니 없는 해소를 마지막으로 국내에서의 제대로 된 독립단체와 독립운동은 막을 내린다. 이후에는 자치론과 사회주의계의 노동투쟁, 그리고 일부의 폭력투쟁만이 한반도 내에서 그 명맥을 이어갔을 뿐이다. 특히 민족주의계 독립운동은 거의 완전히 세력을 상실하는 계기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화가 진행된다[4].

신간회 이후에도 좌우합작 운동은 수차례 일어난다. 물론 이미 가능성은 없어진 한반도내는 아니고, 모두 중국 관내에서 벌어졌다. 1935년 난징에서 혁신의회의 후신인 한국독립당(조소앙), 국민부의 후신인 조선 혁명당(지청천), 대한 독립당(김규식), 의열단(김원봉) 등의 단체가 모여서 민족혁명당이 조직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후에도 1939년 다시 좌위 합작인 전국 연합 진선협회가 중국에서 결성되기도 하였고, 광복직전에는 김원봉이 휘하세력을 이끌고 중경 임시정부로 찾아가면서 임시정부 내에서 좌우합작이 소소하게나마 일어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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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당시 민족주의자는 두개의 노선으로 나뉘어졌는데 하나가 일제와 타협하는 타협적 민족주의파, 즉 기회주의자들 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일제에 저항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 이었다. 정우회 선언은 어디까지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단결을 촉구한 선언이었다.
  • [2] 당시 우파의 중심적 인물들의 큰 축이 조선일보 부사장인 석우와 조선일보 주필이었던 안재홍이었다.
  • [3] Profintern. 정식명칭은 적색노동조합 인터네셔널로 코민테른의 자매단체라고 할 수 있다. 서유럽과 북유럽의 소위 제 2인터네셔널에 대항하는 단체로 등장했기 때문에 굉장히 강성이었다.
  • [4] 우파계열에서는 최린과 송진우 등이 신간회에 가입한 것도, 더이상 자치론이 힘을 얻기 어려울 정도로 신간회가 주도세력이 되었기 때문에 마음을 돌려먹고 독립운동에 참여하려고 한 것이라고 좋게 평가를 하기도 한다. 물론 이 경우에도 제대로 된 연구자들은 신간회 해소 이후에는 이들이 친일로 다시 직행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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