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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왕후

last modified: 2015-04-09 23:05:40 by Contributors

Contents

1. 신정왕후 황보씨(神靜王后 皇甫氏)
2. 신정왕후 조씨(神貞王后 趙氏)
2.1. 소개
2.2. 일생
2.3. 여담

1. 신정왕후 황보씨(神靜王后 皇甫氏)

고려 태조의 제4비.

정식명칭은 정헌의경유명신정왕후(定憲懿敬柔明神靜王后)이다. 태조 왕건의 네번째 왕비로 황주 호족이며 태위 삼중대광, 충의공 황보제공의 딸이다. 정확한 출생년도는 알 수 없으나 서기 900년경 출생한 것으로 추정한다. 성종 즉위 초기인 983년에 사망했다.

슬하에 고려 성종의 아버지 대종과, 광종의 왕비인 대목황후, 두 사람을 두었다. 따지고 보면 고려 경종 이후의 모든 왕은 그녀의 후손이 된다. 친손자로 성종, 효덕태자, 경장태자, 헌애왕후, 헌정왕후를 두었고 헌정왕후로부터 고려 8대왕 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또 외손자로 경종, 효화태자, 성종의 제1비인 문덕왕후를 두었다. 자세히 내력을 살펴보면 고려 초기 왕실족보가 상당히 근친혼으로 얽히고 설킨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에 의해 명복궁대부인(明福宮大夫人)에 책봉되었고 태조가 승하한 후 40년 이상 고려 왕실의 웃어른이었다. 효덕태자와 성종, 경장태자 등은 그녀가 직접 양육하였으며 후손들의 양육에 관심을 많이 두고 애정을 쏟았다고 한다. 성종조에 남긴 조문에 따르면 그녀는 덕이 많고 성격이 후덕했으며, 검소하고 슬기로워 백관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고.


2. 신정왕후 조씨(神貞王后 趙氏)


위의 초상화는 신정왕후 조씨의 초상화인 것으로 전해지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참조
1808~1890

2.1. 소개

조선의 추존왕 익종(효명세자)의 비. 조선 말 '다섯 전하' 중에 가장 서열이 높았던 인물이다.[1]

한국근현대사에서 흔히 말하는 조 대비가 이 사람이다. 대비로서의 공식 명칭은 효유대비지만, 존호가 없었을 때 대비 조씨라고 불렸고 이 명칭이 후대의 기록에서도 통칭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세도정치 기간 중 풍양 조씨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잘 알려져 있다[2]. 풍은부원군 조만영과 덕안부부인 송씨의 딸로 순조 19년(서기 1819년) 세자빈이 되었다.

2.2. 일생

하지만 순조 30년(1830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던 중 승하하고 4년 후 시아버지 순조가 승하함에 따라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른다. 남편이 왕이 되기도 전에 죽는 바람에 중전은 누리지 못했지만 헌종이 아버지를 추숭함에 따라 어머니인 그녀도 추숭되어 대비가 되었다. 왕실의 최고어른인 순원왕후(명경대비)만큼은 아니지만 대비이자 왕의 생모로서 그녀에게도 어느 정도 힘이 생겼기에 그녀의 친정 가문인 풍양 조씨는 안동 김씨만큼은 아니지만 세도정치 기간동안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 떠올랐다. 어떤 면에선 인수대비와 비슷한 케이스. 하지만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그동안 풍양 조씨가 안동 김씨를 적대하거나 압도한 모습은 발견되지 않는다. 안동 김씨의 천하가 된 철종 어간에도 헌종이 총애한 조병헌을 제외한 풍양 조씨들이 안동 김씨 정권에 의해 해코지 당한 적이 없고 안동 김씨가 사실상 만든 헌종실록, 철종실록에도 조인영, 조만영 등 풍양 조씨 인물들이 우호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두 가문은 적대적인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다 1849년에 후사없이 헌종이 승하하고 시어머니인 순원왕후가 왕실의 최고어른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해 철종을 왕위에 올린다. 이 사건을 신정왕후가 순원왕후와 어찌저찌 붙어보려다가 선수를 빼앗겨 후일을 도모해야 했던 것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조선시대에 그것도 왕실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에 개기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가? 이는 조선시대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황당한 추측이라 하겠다. 게다가 헌종 승하시 영조의 후손은 전계군의 아들인 철종 밖에 남지 않았다.[3] 영조의 후손 다음으로 계승권이 가까운 사람은 인조대까지 올라가야 하고...

1857년에 시어머니인 순원왕후가 승하하자 대왕대비로서 왕실의 최고어른[4]이 된다. 1863년에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차기 국왕을 선정할 권한을 갖게 된다. 이 때 옥새를 확보한 안동 김씨[5]에 맞서 기민하게 대처했다는 시각도 있지만 애초에 교지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신정왕후에게 있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다만 그녀가 지명한 차기 국왕이 하필이면 흥선군의 차남 재면인 걸 보면 정황상 흥선군과 그녀 간의 커넥션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실록에는 이들의 커넥션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야사도 그렇고 몇몇 정황을 보면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인다.[6] 어쨌거나 재면을 익종과 자신의 양자로 삼아 즉위시켰다.

이후 고종의 법적인 어머니로서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3년 후에 고종이 15세가 되자 수렴청정을 거두고 물러났다. 대원군에게 전권을 주고 물러났다고 적혀 있기도 했는데, 수렴청정하는 왕대비가 대원군에게 전권을 준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명목상으로는 신정왕후 조대비가 수렴청정에서 물러나면서 고종이 친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원군의 막후정치가 꾸준히 이어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다.

다만 아주 물러난 것은 아니고 여전히 흥선대원군이 그녀와 의논하여 새 개혁정책을 짜면 고종의 입을 빌리거나 비망기를 내리는 형식으로 여전히 조정의 권력의 한 축이었고 어찌보면 대원군의 개혁 파트너로 해석할 수도 있다[7]. 한편 안동 김씨 가문에 빼앗겼던 세력을 되찾아오고자 했던 그녀는 자신의 친정 일가인 조면호의 딸과 고종을 결혼시킬 계획을 짰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반대로 취소해야 했으며, 결국 그녀는 뒷방으로 밀려났다고 한다. 차라리 이게 더 나았을지도, 아깝다. 그러나 자신의 친정에게 주려는 특혜에 반대했다는 기록 등을 보면 신정왕후가 자신의 친정의 정치적 영향력을 무조건적으로 키우려고 한 게 아닐 가능성이 크고, 왕실의 법도를 보면 왕실의 최고 어른인 그녀의 뜻을 거스르고 대원군이 왕의 생부란 이유로 며느리를 멋대로 정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것에 가깝다. 왕의 결혼은 대비를 포함한 내전의 뜻이 최우선이기 때문. 만약 진짜로 대원군이 신정왕후의 뜻을 거스르고 자신의 외가 쪽 친척인 명성황후 민씨를 밀었다면 오히려 이게 기존의 관례에 어긋나는 일이다.

대원군 실각 이후에는 고종과 명성왕후가 효심어린 군주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대원군 대신 신정왕후를 매우 극진히 모셨다. 갑신정변이 터졌을 때는 궁녀들에게 업혀다니면서 여기저길 왔다갔다 하기도 했다. 수렴을 거둔 후에는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고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2.3. 여담

특이한 기록을 여럿 갖고 있는데, 그녀의 정식명칭은 효유헌성선경정인자혜홍덕순화문광원성숙렬명수협천융목수령희강현정휘안흠륜홍경태운창복희상의모예헌돈장계지경훈철범신정왕후(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弘德純化文光元成肅烈明粹協天隆穆壽寧禧康顯定徽安欽倫洪慶泰運昌福熙祥懿謨睿憲敦章啓祉景勳哲範神貞王后)로서 조선 왕비들 가운데 가장 시호가 긴 왕비다. 또한 정식 왕비는 아니지만 조선 역대 왕후 중 첫번째로 가장 장수한 왕후(두번째가 정순왕후 송씨)로, 조선의 대비들 중 가장 오랜기간 대비로 있었다. 그리고, 조선에서 수렴청정을 한 대비들 중 유일하게 정식 왕비가 되지 못한 사람이다. 실로 격동의 조선 후기를 온몸으로 체험한 '살아있는 역사'라고 할 만했던 인물.

1899년 대한제국 성립 이후 남편인 익종이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자 함께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로 추증되었다. 능은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수릉으로 남편 효명세자와 함께 합장되어 있다.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에 등장한다.

KBS 사극 찬란한 여명, 명성황후에서는 김용림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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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효명세자빈 신정왕후, 고종, 고종비 명성황후, 철종비 철인왕후, 헌종비 효정왕후
  • [2] 고구마를 조선에 들여온 조엄은 그녀의 증조부다.
  • [3] 조선왕조실록 헌종 16권, 15년(1849 기유 / 청 도광(道光) 29년) 6월 6일(임신) 14번째 기사에 따르면, “종사(宗社)의 부탁이 시급한데 영묘조(英廟朝)의 핏줄은 금상(今上)과 강화(江華)에 사는 이원범(李元範)뿐이므로, 이를 종사의 부탁으로 삼으니, 곧 광(㼅)의 세째 아들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4] 철종이 순조의 양자이기 때문에 철종의 아내인 철인왕후는 신정왕후의 아랫동서가 되고 헌종의 아내인 효정왕후에겐 숙모가 된다.
  • [5] 옥새와 내탕고의 열쇠는 내명부의 수장인 중전이 보관하는데 철인왕후의 친정이 안동 김씨였다.
  • [6] 정통성이란 측면에서 볼 때 흥선군에게는 3명의 형이 있었고 그 아들들의 서열이 더 높았다. 굳이 흥선군의 아들이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흥선군의 정통성은 숙종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양자입적을 고려하지 않으면 인조까지 가야 한다. 그나마 남연군 집안이 효종 이후로 유일한 법적 후손이라 정말로 인조까지 가야하는 다른 방계 왕족들보다는 유리했다.
  • [7] 개혁 파트너 설은 박시백 역시 주장하였지만, 수렴청정에서 물러난 다음에는 주도적 위치에서는 완전히 빠진 것으로 이해하였고, 이 역시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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