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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

last modified: 2015-03-04 08:05:27 by Contributors


한국 록의 아버지란 말이 단지 록음악으로 최초의 성공을 거둔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압도적인 서구의 문화 앞에서 그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한국적 정체성을 구현하고자 했는가하는 그 창조적인 노력에 경의를 표한 말이 되어야 합니다. - 평론가 강헌[1]

대한민국 을 비롯한 대중음악계의 대부[2]. 1938년 11월 4일생.

Contents

1. 전설의 시작
2. 신중현 사단의 도약
3. 탄압과 시련
4. 복권과 재기
5. 현재
6. 그 외의 이야기들
7. 가족관계
8. 펜더 기타의 경의


1. 전설의 시작

어렸을 때는 좀 사는 집 아들이었다고 하나, 한국 전쟁 이후 가난해져서, 창고지기등의 여러 일을 전전하며 살았다고 한다. 당시 창고지기를 하면서 고물 라디오로 미군방송을 온종일 들었는데, 이것을 계기로 음악에 빠지게 된다. 거의 폐품이 되어 누군가가 내다버린 기타로 연습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것이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뮤지션의 시작이었다.

1955년 미 8군에서 연예단으로 데뷔. 히키 신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 미군부대 순회 공연은 물론이고 기지촌의 클럽들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외국에서도 이제 막 로큰롤이라는 음악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엘비스 프레슬리같은 뮤지션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와 같은 시기다

신중현은 사실 이때까지는 밴드의 프런트맨이라기 보다는 기타리스트로 유명했다고 한다. 실제로 신중현의 전성기 시절의 노래를 들어봐도 훌륭한 보컬리스트는 아니었고, 그래서 당시 기준으로 프런트맨으로 나서기에는 조금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뮤지션들 사이에선 가히 넘사벽급 기타 실력을 보유했기 때문에 그의 기타 연주가 공연장에 울려 퍼지면 미군들이 히키 신을 연호하며 열광의 도가니가 펼쳐졌다고 한다.[3]

동요 른하늘 은하수를 나름대로의 로큰롤 버전으로 편곡한 버전이다! 드럼의 비트나 기타의 연주가 서프 음악과 흡사한 것이 주목할 만하다. 더 놀라운 것은, 서프음악은 1960년도나 되어야 인기를 얻고 차트를 점령하고, 서프 음악의 선두주자로 알려진 데일이나 쳐스이제 막 활동을 시작하려 하던 때였다는 것... 이분은 타임머신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천재는 흔히 시대를 앞서간다고들 하지

1962년경 Add4를 결성하고 1964년 1집 <빗속의 여인>을 발매.[4] 이 시기가 얼마나 대단하냐 하면 비틀즈의 데뷔 시기와 비슷하다. 비틀즈의 1집 데뷔는 1963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밴드의 프런트맨이자 리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국내 첫 창작 록 음악인 <빗속의 여인>을 시작으로 무수한 불후의 명곡을 발표했다.

Add4는 당시 베이스 기타를 도입한 몇 안 되는 밴드였고,[5] 그래서 당시 쟁쟁한 로큰롤 밴드들(키보이스 등)과 더불어 새로운 사운드를 재빠르게 도입한 밴드로 역사에 남았다. 보이스 같은 밴드들이 당시 서구의 최신 음악을 최대한 재현해내는 데에 집중하거나, 엔카식의 멜로디와 록을 접목하는 시도를 했다면, 신중현은 훨씬 진일보한 한국 특유의 로큰롤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6]

2. 신중현 사단의 도약

하지만 당시 한국에서 로큰롤은 생소한 음악이었다. 비록 50년대 후반 엘비스 프레슬리 빈센트같은 뮤지션들이 소개되었지만 외국 음악은 여전히 생소한 음악이었다. 심지어 탠다드 팝(프랭크 시나트라, 앵카, 크로스비 등)같은 음악도 철저히 외국 것이었기 때문에 확산에 한계가 있었다.[7] 그리하여 Add4는 당시 "빗속의 여인"을 발매하고 인기를 끌긴 했지만, 대중음악의 판도 자체를 바꿀 만큼 큰 임팩트는 없었다.[8]

그리하여 신중현은 음악적 커리어와 음반 발매 경험을 살려서 본인의 음악뿐 아니라 당시 여러 실력 있는 가수들을 발굴 후 곡을 주고 프로듀싱까지 해서 데뷔도 많이 시켰다. 이때 여러 가수와 곡이 히트해서 신중현 사단이라는 말도 있었을 정도. 이 신중현 사단의 유명한 가수로는 박인수, 시스터즈, 정화, 김추자, 장현, 정미 등이 있고, 유명곡으로는 '거짓말이야', '커피 한 잔', '꽃잎', '봄비', '봄' 등이 있다. 한마디로 60~ 70년대 대중음악계에서 신중현의 무게가 어마어마했다는 뜻.

또 하나의 놀라운 점은 대부분의 기성 작곡자나 가수들이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면서 새로운 음악의 흡수에 다소 인색한 반면, 신중현은 당대의 새로운 음악을 주저없이 받아들이면서 자신만의 색깔을 잃지 않았다. 일례로 1960년대 중반에 그는 이미 "솔 사운드"(소울 사운드)를 받아들여서 소울 스타일의 음악을 만들어냈고, 60년대 후반 사이키델릭 록음악이 부흥하자,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또 한 번 소화해낸다. 사람들이 잘 모르고 지나가지만, 사실 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이 사이키델릭 록 사운드의 곡이다. 잘 들어보면, 퍼즈톤의 기타와 스트레이트한 비트가 영락없는 사이키델릭이다. #

3. 탄압과 시련

그러나 3공 시절 박정희를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라는 요구를 거절했다가 많은 곡이 금지곡으로 묶이는 고난을 겪기도 했다. 박정희 찬양곡 요구를 거절한 이후 얼마 후에 발표한 곡이 아름다운 강산이다.[9][10] ㅎㄷㄷ

원래 10월 유신체제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큰 탄압은 없었다고 한다. 검열은 그 이전 시대에도 존재했지만 한국은 서브컬쳐나 반문화가 대대적으로 퍼지기에는 생각보다 보수적인 국가였기 때문에 그렇게 심각한 '반체제 뮤지션'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 점점 음악의 붐이 불기 시작하고, 포크음악이 서서히 밀려옴에 따라 관계 당국이 허용하는 수위를 넘는 음악이 자꾸 등장하기 시작한다. 시대는 급변하고 있었는데 당국은 소프트웨어적으로나 하드웨어적으로나 아직 전근대적 독재국가였던 것.

1960년대부터 급속히 활발해진 한미간의 교류로 당시 한국인의 이민자 수와 유학자 수가 연간 수만 명에 이루게 되고, 1970년대를 지나면서 연간 수십 만 명으로 확대되는 그야말로 확장 일변도로서 그 중심에는 1940~50년대 비교적 초기에 이민을 간 한인들이 자신 혹은 그 자식 세대들이 한국으로 유입되는 반이민 혹은 일시귀국 형태가 굉장한 규모로 확대된다. 그리고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한국 히피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한대수였다.

1971년쯤 되면 한국에서도 드스탁같은 페스티벌이 열리기 시작한다. 평 페스티벌이 대표적인 것인데, 이로 인해 한국의 음악은 진일보하게 된다. 하드 록 밴드가 나이트 클럽에 등장하고, 소울이나 펑크음악의 영향으로 소위 말하는 "브라스 밴드"들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아울러 디 거스리밥 딜런, 안 바에즈를 추종하는 일군의 포크 음악 세력도 등장하게 된다.

젊은이들은 머리를 기르고 대마초를 피우기 시작했다.[11] 그리고 당시 정부에서는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사실상 전체주의 체제였기 때문에 국가 총력전에서 이탈할 소지가 큰 이러한 청년 문화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의 모토 중 하나였던 "건전한 민족문화 창달"은 이러한 '서양에서 유입된 환락적인' 문화를 제거 대상으로 여겼다.

박정희 정권은 신중현에게 탄압의 강도를 서서히 높여갔다. 탄압에 대한 가장 최초의 발단은 앞서 말했듯 박정희의 작곡 요구를 거절했다가 미운털이 박힌 것이 시작이었다. 물론 당시에 신중현은 그냥 별 생각 없이 거절한 것이었다고 한다. 딱히 하기 싫다기 보다는 별로 생각해 본 적도 없고 해 볼 생각도 없던 테마의 곡을 주문한 것이기 때문에 안 할란다에 가까운 입장이었던것 같다. 애초부터 파격적이고 새로운 음악을 지속적으로 도입하고 실험했던 신중현에게 검열 당국은 너무나도 높은 벽이었다.[12]

1971년경 신중현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신중현이 시도한 다양한 기획이 실패한 것도 있었고, 음반을 내는 족족 검열에 걸려서 발매가 금지되는 등 사업을 펼치기에 너무나도 악재가 끊이지 않아 사실상 파산 상태에 빠진다. 게다가 이 시기, 신중현은 더더욱 실험적이고 예술적인 록 음악의 작업에 몰두한다. 음악의 소재도 민중(아름다운 강산)[13], 마리화나(잔디. #) 등 그 스펙트럼이 넓어지게 된다. 음악적으로는 후대에 훌륭한 곡을 남긴 시기가 되었지만, 음악 자체에 몰두하면 몰두할수록 상업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멀어져 갔다.

하지만 신중현은 여전히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며 김추자를 비롯한 뮤지션들과의 작업으로 작곡가로서의 명성은 건재한 상황이었다. 이때 신중현은 다시 한번 밴드로 대중 앞에 나설 생각을 갖게 된다. 이러한 생각으로 만들게 된 밴드가 바로 레전드급 밴드 중현과 엽전들이었다. 베이스에 이남이, 드럼에 용남을 기용한 수퍼 세션 밴드가 탄생한 것이다. 신중현과 엽전들은 등장하자마자 1집 수록곡 "미인"을 대 히트시키며 1974년부터 1975년 중반까지의 1년을 강타한다.[14] 심지어 "미인"은 영화화 되어서 한국에서 보기 드문 음악영화로 개봉하게 된다. 당시 영화의 일부 영상. 지금봐도 드럼 비트가 보통 그루브한 게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기가 바로 10월 유신과 맞물려 있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에 애초부터 미운털이 박혀 있던지라 신중현과 엽전들은 당국의 집중 감시대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음반 수록곡이 금지곡에 묶여 방송이고 음반 판매고 모조리 막혀버린다(1975년 7월 12일). 비록 1975년 상반기를 강타했을지언정 그 다음이 막막한 상황이 된 것. 그렇게 음반이 규제당하는가 싶더니 공중파 방송에서도 복장 불량 및 퇴폐를 이유로 신중현에게 "머리를 자르지 않으면 출연을 금지시키겠다"라는 통보가 날아온다. 그래서 신중현은 아예 1975년 10월에 발매한 신중현과 엽전들 2집에서는 정장넥타이 차림으로 앨범 커버에 등장한다. 노래도 죄다 행진곡이나 군가풍의 노래로 채웠고 이게 신중현의 곡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충격과 공포의 2집 재킷을 볼 수 있는 곳. # 쉽게 말하면 이 시기는 신중현이 아예 대놓고 개기기 시작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어김없이 이 앨범에 수록된 곡들도 금지곡으로 지정되고 말았다. 행진곡에 군가풍의 노래를 발매했는데도 금지곡으로 선정되었다는 점에서 이 음반의 의도와 당국의 시각이 어떠했는지에 관해서는 설명이 더 필요한지?

결국 신중현은 1975년 12월 5일,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당시 신중현은 대마초를 피우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신중현의 이야기에 따르면 60년대 후반에 대마초를 경험해 본 바가 있고, 이에 따라 당시 주간지 선데이 서울에 "신중현의 해피 스모크 탐방기"라는 글도 기고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당시 대마초 흡연 혐의로 관계 당국에 불려가서 간단히 조사를 받고 약식 기소가 되어 사건이 종결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인데도 무리하게 후에 개정된 마약 관련법으로 법 조항을 소급 적용 하여 잡아 넣은것.[15]

이로 인해 신중현은 약 2년간 감옥에서 썩게 된다. [16] 그리고 더불어 연예인협회에서 제명당한다. 당시에는 완전한 국가 통제하의 사회였기 때문에, 연예인 협회에 등록하지 않으면 아예 활동이 불가능했다. 심지어 야간에 나이트 클럽에서 공연하는 밴드들도 모두 관계 당국에 등록되어서 "무슨 공연을 하는지 관계 당국이 알고 있는" 나라였다. ㅎㄷㄷ. 등록이 취소되면 "비등록 밴드" 취급을 받게 되어 사실상 활동이 불가능하던 시대였다.

1978년 초, 신중현은 무대 출연은 가능하도록 당국에 의해 구제를 받았다.[17] 하지만 신군부가 등장할 때까지 긴 침묵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4. 복권과 재기

하여튼 여러 대표작이 1987년까지 방송 금지곡으로 묶여버리는 등 상당한 수난을 겪으면서 고생고생하면서 음악생활을 하였지만, 신군부 집권 뒤 방송 금지 조치가 풀린 후에는 대세가 디스코와 댄스 음악으로 바뀌어 제대로 된 록 뮤지션으로서는 재기를 할 수 없었다. 1980년대 초반 "신중현과 세 나그네"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했지만, 한국은 이미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디스코 메들리의 광풍에 빠져 있었다. 이 시기 이후 신중현은 작곡가로서만 활동을 하게 된다.[18] 90년대 이후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분위기가 형성됐지만 일부 음악인들과 평론가, 애호가 중심의 재평가라 큰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5. 현재

2006년 12월 17일 은퇴 공연을 가졌다. 다만 현재는 다시 복귀. 음악 활동을 하고 계시다.

6. 그 외의 이야기들

앨범 <신중현과 엽전들>이 가슴네트워크 선정 한국대중음악 100대명반에 선정되었다.
대중음악 전문지 '대중음악 사운드(SOUND)' 3호에서 최고의 작곡가 10인 중 한명으로 선정되었다.

7. 가족관계

가족 관계로는 부인과 아들 셋이 있는데, 가족들 모두 음악인으로 부인인 명정강씨는 미 8군 출신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 드러머이며 아들 3형제 역시 음악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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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도 음악계에서 상당한 유명인으로, 맏아들인 신대철은 거의 한국 최초의 헤비메탈 그룹인 시나위의 리더이자 세션 등 기타리스트로서의 활동도 다수 하였다. 최근에는 2012년의 나가수출연을 계기로 시나위 미니앨범을 내고 활동하다가 시나위 정규 10집을 준비하고 있다. 둘째인 신윤철더버드 시절부터 천재로 이름을 날리다 현재 막내인 신석철과 함께 울 전자 음악단을 결성해 활동 하였다가 후에 해체하고 여러 프로젝트성 그룹을 결성하고 음악을 하는중. 신석철 또한 최근 서울 전자 음악단 해체 이후 여러 뮤지션의 드럼 세션 활동과 그루브 올스타즈에서 활동하고 있다. 2012년 말에는 신윤철과 신석철 그리고 송홍섭과 함께 프로젝트 그룹인 카도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여담으로 가족들 모두가 굉장히 과묵한 편으로 인터뷰라도 할라 치면 굉장히 느린 말투로 네... 아니오.... 정도의 단답형 대답만 하는지라 인터뷰어가 인터뷰를 진행하기가 굉장히 힘든편이다. 김창완이나 배철수같은 레전드급 뮤지션들이 3형제를 인터뷰 하면서 굉장히 진땀빼는편. 신대철이 형제중에 가장 달변에 수다스러운 편이라고 하니... ㅎㄷㄷ


물론 다 아는 사실이지만 신해철은 신중현의 아들이 아니다[19]

8. 펜더 기타의 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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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펜더(Fender) 마니아. 특히 수십여대를 보유하고 있는 스트라토캐스터펜덕후 컬렉션을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젊은 시절부터 모아와서 단종된 기종도 있고 하니 전부 합치면 엄청난 가치가 있을 듯하다. 안타까운 건 과거 젊은 시절 부침이 있어 더 많이 못 모았다고. 하나만 고집 하기 보단 음악에 따라 62년형 모델을 쓰는 등 노래에 따라 여러 가지 모델로 연주하는 모양. 아들인 신대철이나 신윤철 등은 집에 굴러다니는 펜더[20]로 기타를 배웠다고 한다.

2009년 12월에는 펜더에서 아시아인 최초이자 한국인 최초로 커스텀 기타를 선물했다. 이 펜더 사의 헌정 기타(Fender Customshop Tribute)는 자사의 1명의 장인인 마스터 빌더 데니스 갈루즈카(Denis Galuszka)가 직접 음악인의 특징을 살려 단 한 대만 제작하는 것인데 과거의 모습을 스크래치와 흠집 하나하나 완벽히 복원한, 새 것이지만 헌 기타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전 세계에서 5명만이 받은 적이 있고(에릭 클랩튼(Eric Clapton), 제프 벡(Jeff Beck), 스티비 레이 본(Stevie Ray Vaughan), 잉베이 말름스틴(Yngwie Malmsteen), 에디 밴 헤일런(Eddie Van Halen). 뭐 개인에게 판매하기도 한다. 가격은 사이트에서 스스로 확인해보자(...).#, 아시아에서는 그가 최초로 받았다는 데 또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야말로 최고 중에서도 최고에게 선물하는 기타. 단, 펜더 기타로 전설이 되어야 받는다는 전제가 붙지만 그의 음악 시작이 짭기타였다고 하니 그야말로. 덕분에 미국에서 그의 음악이 리마스터링되어 발매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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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2006년 6월 29일 방송 콘서트 7080 내 인터뷰 中. 화면 상태를 보면, 과거 인터뷰를 재탕한 듯하다.
  • [2] 후술하겠지만 단순히 록음악뿐 아니라 다양한 대중음악을 발전시켰다. 록의 대부라기보단 대중음악의 대부가 더 어울린다.
  • [3] 여담으로 이 당시 음악 대학 교수였던 이교숙 선생님에게 인생 최초이자 최후의 음악 이론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완전히 독학으로 음악을 배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엄청난 굇수급 능력임에는 이견이 없다.
  • [4] 여담이지만 이 당시 드러머가 유튜브에서 인기를 얻은 리안 드러머 Add-K의 순근이다.
  • [5] 베이스 기타가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2세대 로큰롤 뮤지션들이 등장하는 1957~58년 이후인데, 거의 비슷한 시기에 Add4의 베이스 연주자가 되는 분이 악기점에 베이스 기타 사진을 들고 가서 최대한 똑같이 만들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 [6] 물론 키보이스의 작업도 훌륭했지만 신중현은 민요나 전통음악에 훨씬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뿌리 자체가 좀 다르다.
  • [7] 당시 미8군 부대 공연을 통해 성장한 가수들이 티김, 니 리, 복희 등인데, 이들의 당시 음원을 들어보면 오히려 재즈나 스탠다드 팝 시대의 창법과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정통 스탠다드 팝 음악을 통해서가 아니라, 한번 탈색되고 현지화된 곡들을 취입하고 나서야 가능했다.
  • [8] 게다가 당시 대중음악은 "저질 음악"으로 철저히 다른 취급을 받았다.
  • [9] 후에 이선희가 커버해 유명해진 그 곡 맞다.
  • [10] '아름다운 강산'은 처음에 "신중현과 더 멘"의 곡으로 박광수가 보컬리스트로 있을 때 처음 녹음되었다(1972년).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파동 이후 아름다운 강산은 한동안 본 의미와는 한참 다른 건전가요로 소개되었다.
  • [11] 재미있는 것은 1970년대 초 마약법을 비롯한 관련 법안이 개정되기 전까지는 대마초는 규제 법안이 없는 상태였다.# 대마초가 문제가 된 것은 1966년 경부터인데, 이 당시에는 환각 물질이 있다고 여겨진 인도산 대마의 성분이 한국산 대마에도 있다 하여 문제가 된 것. 그러다가 10월 유신이 선포된 뒤 사실상 한국 전체가 완전한 통제국가로 변화한 뒤에는 박정희의 직접적인 지시로 최고 사형까지 구형할 수 있게 했다. 이전까지는 단순 투약자는 그냥 벌금형으로 서구권의 방식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당시 대마초 문제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이 한 말이 가관이다. 당시 정권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 "공산주의와 싸워야 할 이 중요한 시기에 젊은이들이 대마초나 피우고..."
  • [12] 실제로 신중현은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개인 작업 외에도 프로듀서로서 다양한 가수들을 키워냈는데, 이 시기 발매한 곡들이 금지곡으로 묶여서 제대로 활동하지 못한 가수들도 존재한다. 예를 들면 중현과 퀘션즈든 그레입스.
  • [13] 게다가 그 당시 10분짜리 대곡이었다.
  • [14] 당시 베이시스트 이남이씨의 생전 인터뷰를 보면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좋아할 수가 있나 싶었다"라고 말할 정도.
  • [15] 이 시기에 워낙 많은 숫자의 가수, 밴드, 작곡가가 대마초 관련 법으로 잡혀 들어갔고 이를 두고 현대사 연구가 중 일각에서는 1975년의 가요대학살이라고 부른다. 국가권력이 직접 나서서 문화 정화를 명분으로 당시 국민 총동원에 방해가 되는 대중문화를 때려잡은 것. 이 피해자 중에서는 조용필도 포함된다.
  • [16] 신윤철이 이끌었던 울 전자 음악단의 2집에 실린 첫 곡인 '고양이의 고향 노래' 가사는 이 시절 아들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의 편린을 찾아볼 수 있다.
  • [17] 당시에는 조그마한 공연장에서 공연하는 뮤지션까지도 다 국가가 통제하며 관리하던 시대였다.
  • [18] 작곡가로서 신중현의 마지막 히트곡은 김완선의 '리듬 속의 그 춤을'이다. 이 곡 중간의 기타 솔로는 신대철의 연주. 당시 80년대 후반 컴퓨터 음악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신중현 또한 컴퓨터 음악을 배워 이곡에 사용하였다. 곡 초반 인트로의 빠른 비트는 노가다 성으로 찍어서 표현했다고. 이는 신중현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새로운 조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 [19] 그러나 이름이 비슷한 인연으로 신대철이 신해철과도 친형제처럼 생각하여 친분을 유지하면서 지낸다는 말은 한 적이 있다.
  • [20] 김종서가 시나위 시절 신대철 집에 놀러가면 펜더같은 고가의 기타가 막 굴러다니는 점에 상당히 놀랐고, 중고등학생이던 신대철의 동생 신윤철이나 신석철 등이 잉베이 말름스틴의 노래 등을 카피하는걸 보고 또 한 번 놀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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