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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last modified: 2015-10-11 20:14:06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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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rusades
중세 교황청 주요사건
사건 카노사의 굴욕 십자군 전쟁 아비뇽 유수
벌어진 일 파문을 통한 교황권의 강화 교황권의 절정시기 교황권 분열, 콘클라베 제도 정착

목차

1. 개관
1.1. 십자군 국가
1.2. 소속된 기사단
2. 왜 벌어졌나?
3. 본편
3.1. 제0차 십자군 원정(민중 십자군)
3.2. 제1차 십자군 원정
3.3. 제2차 십자군 원정
3.4. 제3차 십자군 원정
3.5. 제4차 십자군 원정
3.6. 제5차 십자군 원정
3.7. 제6차 십자군 원정
3.8. 제7차 십자군 원정
3.9. 제8차 십자군 원정
3.10. 제9차 십자군 원정
4. 외전
4.1. 노르웨이 십자군
4.2. 소년 십자군의 원정
4.3. 알비주의 십자군
4.4. 아라곤 십자군
4.5. 국토회복운동 (레콘키스타)
4.6. 동방십자군
4.7. 북방십자군
4.8. 대오스만 제국 십자군
5. 영향
6. 평가
7. 재평가
8. 대중매체 속의 십자군
9. 참고자료

1. 개관


1095년부터 1291년까지 간헐적으로 일어난, 예루살렘을 위시로 한 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일어난 전쟁.

1071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마누스 4세가 만치케르트 전투에서 대 셀주크국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 대패한 뒤 혼란의 시기가 오고, 비잔티움 제국의 밥줄이던 아나톨리아 지역의 대부분을 잃었다. 1081년 새로운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즉위한 다음 다시 제국을 일으켜 세운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노르만인, 북방의 피체네그 족을 비롯해서 적들이 너무 많아 제국의 힘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성스러운 교회를 수호할 수 있도록 이교도들에게 맞설 원군을 보내달라."란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우르바노 2세는 이 편지를 받은 것을 기점으로 성지를 보호하고 탈환할 십자군을 모집하게 되었으며 이후로 약 200년간 4차[1]에 걸쳐 십자군을 파견하게 된다. 200년에 걸친 침공이 시작되었다.

1.1. 십자군 국가

Crusader states
십자군 전쟁으로 세워진 나라들을 십자군 국가라고 부른다.

  • 레반트 지역 : 기본적으로 1차 십자군에서 세워진 이 4개국을 십자군 국가라 부른다.
    • 데사 백국
    • 리폴리 백국
    • 티오키아 공국
    • 예루살렘 왕국
    • 예루살렘 왕국 속령
      • 갈릴리 공국
      • 지파와 아스칼론 주
      • 트란스 요르단 영지
      • 시돈 영지
    • 킬리키아 아르메이아 왕국 : 현재 터키 남부의 킬리키아 지방에 아르메니아 인들을 중심으로 건국된 왕국이다. 안티오키아 공국 등 십자군 국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 키프로스 지역
    • 프로스 왕국 : 3차 십자군 전쟁으로 키프로스에 세워진 기독교 십자군 왕국이다.
  • 발칸 반도 : 4차 십자군 전쟁으로 비잔티움 제국에 세워진 십자군 국가이다.
    • 라틴 제국
    • 살로니카 왕국
    • 레아 공국
    • 테네 공국
    • 소스 공국
    • 베네치아 공화국령 : 크레타, 에우보이아, 등의 섬.
  • 발트해 :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과 튜튼 기사단의 활동으로 주교령, 대주교령 등이 형성된다. 이 가운데서 로이센 왕국이 탄생한다.

2. 왜 벌어졌나?

십자군 원정의 목적을 나열해 보면…

  1. "성지"의 회복, 그리고 무슬림이 저지른 신성모독의 단죄.
    이슬람교가 7세기에 생겨난 이후 그리스도교를 믿는 지역은 11세기까지 서아시아북아프리카를 잃는 등 그 영역이 지속적으로 줄어왔다. 거기에 유럽 지역은 이슬람교가 발아한 7세기부터 프랑스알제리식민지배하는 19세기까지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해적에게 약탈을 당한 기록이 있으며, 1200년 동안 납치된 사람의 숫자는 수백만명에 달한다. 문제는 이러한 해적들이 이슬람 세계에서는 어엿한 상인이면서 또한 이슬람 군주들의 해군이기도 했다는것.

    이슬람 군주들이 정권 차원에서 순례자들을 박해한 기록은 전무하지만, 이슬람의 세력권은 유목민(베르베르인 등)의 약탈이 일상화 된 지역이라 약탈당한 순례자들은 굉장히 많았으며, 여기에는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교 순례자가 이슬람 세력에게 박해를 받는다는 소문이 포함되었다.

    이것은 비잔티움 제국서 원군을 얻기 위해 왜곡한 부분이 좀 많지만, 우르바노 2세가 사람들을 동요시키기 위해 다소 과장한 점도 있다. 정확히 따지자면 1009년에 파티마 왕조의 6대 칼리프 알 하킴이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를 대놓고 탄압하며 예루살렘 성묘 교회를 완전히 파괴하기는 했으나, 1040년대부터 비잔티움 제국에서 돈지랄 외교로 파티마 왕조와 타협,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보호하며 성묘 교회를 복구한다. 어쨌거나 아랍인 왕조들은 성묘를 찾아오는 순례자들의 돈을 반겨서 순례자들을 대체적으로 보호해주었지만 문제는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예루살렘을 점령했던 셀주크 투르크는 순례자들이 어떤 이익을 가져다 주는지 감각이 없어서 초반에 순례자들을 박해했던 것이고 우르바노 2세가 이걸 적절히 이용하면서 서유럽 전체가 분노로 끓어오르게 된다.

    사실 그 시대의 성지는 순례하기에 위험한 분쟁지역이었다. 1070년대엔 말리크 샤가 통치하는 셀주크 제국의 에미르 아트시즈가 성지를 포함한 시리아 전체를 파티마 왕조에게서 빼앗았는데, 예루살렘의 저항을 모스크 안에서 수천명을 학살하며 진압해버린다. 1079년엔 말리크 샤의 동생 투투슈가 아트시즈를 처형하고 시리아를 통치하더니, 1086년엔 그 투투슈가 형 말리크 샤에게 쫓겨난다. 말리크 샤가 1092년에 죽자 돌아온 투투슈가 1094년에 시리아를 탈환하나 바로 다음해에 전쟁에서 패하며 사망. 결국 십자군 직전인 1098년에 예루살렘은 파티마 왕조가 재정복한다. 이렇게 이슬람 세력 간에 성지를 차지하기 위한 분쟁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으니, 전쟁에 휘말린 순례자들이 살해당했다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2. 서유럽의 인구증가로 인한 식량부족 해결과 인구감소 효과.(?)
    당시 서유럽은 농업기술 자체가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에 식량생산성이 형편없었으며, 지배자들은 인구를 획기적으로 감소시키는 방법이 전쟁임을 알고 있었다.

    다만 이에 대해서 토머스 매든 교수와 자크 르 고프 교수의 의견을 따르면, 서유럽은 롤링거 르네상스와 수도원 운동에 힘입어 느리긴 하지만 식량공급이 차츰 개선되고 있었으며, 전쟁 같은 대규모 학살을 통한 인구 감소 효과를 불러일으킬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이미 십자군 전쟁 이전에 서유럽은 지방 영주들의 끊임없는 소모전으로 서유럽의 인구가 유지되고 있었기에 십자군 전쟁을 통한 인구감소는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지나친 전쟁으로 서유럽의 피해가 누적되어 이를 막기 위한 "신의 평화" 운동과 "신의 휴전"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고 그레고리우스 7세는 차라리 해외에 나가서 싸우라고 하고 있었다. 이 개념을 이용하여 아예 성지를 탈환하자고 한 것이 우르바노 2세다. 즉 신빙성 없는 가설이다.

  3. 교회 재산의 증대.(?)
    당시 십자군 원정은 굉장히 길었으며, 어차피 돌아올 가능성도 낮을거라고 예상한 교황과 사제들이 원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재산을 위탁받으면 그냥 자기네 것이 될 거라고 계산했었다. 실제로 교회가 원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영지의 관리를 위탁받은 것은 사실이고, 당시 교회는 서유럽에서 가장 발달한 관리 시스템이라서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수도원들은 영주들에 비해 효과적으로 땅을 관리하고 운영할 줄 알았다.
    그런데 교회에서 영주들의 영지에서 나오는 소득을 떼어 갈 지언정, 영지 자체를 먹튀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우선 영주들은 원정 이전에 유사시에 자신이 사망할 경우를 대비하여 제2, 3, 4의 상속권자까지 설정해 두었으며, 자신의 영지는 교회가 신속하게 상속권자에게 양도할 것을 문서로서 약속해두었다. 또한 영주의 사망시 상속권자가 없을 경우에는 그냥 영주와 계약을 맺고 있는 상위의 영주에게 그 영지가 몰수되었다. 애초에 위탁만 했지 양도하겠다고는 안했으니. 역시나 신빙성이 없거나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 요인.

  4. 교황청은 십자군을 권력확대, 즉 세속 군주들에 대한 교황청의 위세 증진 겸 비잔티움 제국을 누를 수 있는 기회라 판단했다. 1054년의 상호 파문으로 인한 동서 교회 대분열로 기독교 세계가 혼란스러웠는데 이 기회에 동방에 대한 우위를 점할 기회가 될 수 있었다.

  5. 2와 연관된 목적으로 호전적인 기사들과 영주들을 유럽 밖으로 내보냄으로써 유럽의 내적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서유럽 안에서의 지방 영주 간의 다툼은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이에 따라 교회는 따로 전쟁을 하면 안 되는 날까지 만들어서 반포할 정도였다. 오히려 실력자들의 부재로 인한 왕권찬탈 음모가 성행하였고, 각 왕조간의 대립이 성행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리처드 1세필리프 2세의 대립이다.

  6. 이 외에도 무장 순례 기원설이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십자군 원정이 원정이 아니라 무장을 하고 성지순례를 한다는 개념인데, 카롤링거 왕조의 국왕들은 스스로 예루살렘 성지와 그곳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을 보호할 의무와 권리가 있음을 주장해 왔으며, 11세기 후반까지는 이슬람 칼리프들도 이를 인정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10세기부터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자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호위병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는데, 1064~66년에는 7천명의 독일인들이 중무장을 한 상태에서 예루살렘을 여행하였다. 이것에 대한 근거로 "1차 십자군 원정이 예루살렘을 탈환한 뒤에 대부분의 원정군이 유럽으로 돌아가버렸다."를 꼽는다. 말 그대로 "성지순례 왔습니다." 하고 집에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도 수많은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을 찍고 돌아가는 일이 잦아서 예루살렘 왕국이나 여러 십자군 국가의 군주들은 십자군들을 성지에 말뚝 박게 하려고 온갖 수를 써댔다.

이 외에 참여한 사람들의 동기는

  1.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주는 면벌부(대사)를 획득할 목적으로 참여했다. 성지탈환의 성전에 참여하면 교회에서 천국에 갈 수 있는 면벌부를 준다고 홍보했다. 그래서 1차 십자군의 경우 유달리 부랑자,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우선적으로는 교황청의 선언에 열성적으로 반응한 수도자들이 이것을 자극했다. 특히 은수자 피에르의 화려한 말빨에 의해서 우르바노 2세가 계획한 1차 십자군보다 몇달 빠르게 민간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그 뒤에 교황청에서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사람은 고해성사의 보속을 없애주는 '대사'를 행하겠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2. 당시 유럽은 장자 상속제였으며, 차남 이하로는 권력이나 재산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영지를 얻기 위해 많은 기사들이 참여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현대 연구에서는 거의 부정되고 있는데, 당시 십자군에 참가했던 기사들의 목록을 면밀히 추적해보면 대개 당시에 세력깨나 있다는 영주들이었다. 당시 영주들은 바보가 아니었고 비잔티움 제국에 용병으로 고용되어 셀주크 투르크와 싸워본 적이 있던 사람들도 많았다. 얻을 것보다는 잃을 것이 많은 3천 km의 원정길을 땅 좀 넓히자고 간다는 것은 설득력이 낮다. 당시 영주들은 자기 차남들에게 나눠줄 땅이 정 필요하면 그냥 옆동네의 기독교 영주들과 싸웠다.

  3. 성지와 성인들의 묘에 대한 환상이 지원 동기로 나타난 사람도 있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성배를 찾기 위한 원정을 떠나는 셈.

  4. 순수한 신앙으로 일어난 귀족들도 있었다. 오로지 주를 위해서 행한 일이니 어떤 의미론 영광스러운 자들. 이런 사람들은 가톨릭은 물론 적인 이슬람도 칭송했다. 허나,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십자군 전쟁을 위해 많은 토지와 재산을 헌납하거나 처분했기에 전쟁 후에는 몰락해 버리기 일쑤였다. 어떻게 보면 교황청에 사기당했다.

3. 본편

3.2. 제1차 십자군 원정


해당 항목 참조.

3.3. 제2차 십자군 원정


해당 항목 참조.

3.4. 제3차 십자군 원정


해당 항목 참조.

3.5. 제4차 십자군 원정


중세 동-서유럽 관계 역사상 최악의 막장 드라마

가라는 성지는 안 가고[2] 엉뚱하게도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희대의 막장 전쟁. 전쟁 기간은 1202년부터 1204년까지 약 2년.

흔히 제4차 십자군 자체를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인들이 결성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거나, 심지어 베네치아 공화국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위해 십자군을 만들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제4차 십자군의 전개는 우연에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어마어마한 연쇄작용을 이루게 되었다. 다만 그 연쇄작용이라는 것은 일단은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인 비잔티움 제국을 파멸로 몰아넣게 된다.

본래 베네치아 공화국은 제4차 십자군을 결성한 프랑스 제후들의 군대를 중동까지 실어다 주기로 했다.[3] 하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미 이집트 제2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받는 대신 십자군에 협조하지 않기로 살라딘의 후계자 알 아딜과 밀약을 맺은 상태였다. 즉 양다리를 걸친 것이다.

둘 중 하나라도 포기하기 싫었던 베네치아 공화국은 상인답게 잔머리를 굴려서, 십자군에게 성지까지 실어다 주는 뱃삯을 요구했다. 베네치아 공화국 엔리코 단돌로는 십자군들을 선동하며 당초의 약속과 달리 실제로 집결한 제후들이 적어 돈이 거의 없던 제후들은 결국 뱃삯을 몸빵으로 치를 수밖에 없었다… 라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뱃삯'은 십자군 출정 1년 전부터 합의되어 있던 것이고, 십자군에 참여했던 제노바나 피사 역시 뱃삯을 받았던 사례가 있고, 베네치아 공화국은 과도한 수준으로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다[4]

어찌되었건 예상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병력으로 인해 출항이 어려워지자[5] 베네치아 공화국은 '요금' 지불을 유예하는 조건으로 십자군에게 헝가리 왕국에게 빼앗겼던 드리아 해의 식민도시 자라 시[6]를 공격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십자군에 참가한 제후들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고, 같은 그리스도인을 공격하는 데에는 많이 망설였지만, 프랑스에서 손꼽히는 군후들이 모였는데 '돈이 없어' 출발도 못한채 돌아가는 것은 도저히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으므로 '어떻게든 출정하자'는 지도부의 결정에 출정을 결정했다. 애초부터 강력한 방어태세는 갖추지 못했던 자라는 사흘도 걸리지 않고 십자군에게 점령되고 약탈당했다. 헝가리 왕은 교황에게 충성하는 영토였기 때문에 이때부터 제4차 십자군은 막장테크를 탄 것이다.

흔히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 것 때문에 파문당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제4차 십자군이 파문당한 것은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인 헝가리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이미 4차 십자군의 막장성을 제대로 느낀 프랑스 출신의 몬 드 몽포르란 양반이 자라 공격 이후 "이런건 주님의 뜻에 반하는 거다! 이딴짓 때려 치우고 딴 살림 차릴 사람들은 나를 따르라!"라고 나서서 프랑스로 돌아간 뒤 비 십자군에 참가도 하고, 아라곤 왕의 목도 따고, 잉글랜드에 자기 아들도 보내면서 화려한 커리어를 쌓게 된다.

하지만 한 번 약탈과 재물의 맛을 본 십자군은 성지 따위는 잊어버리고[7] 비잔티움 제국의 제위계승전에 용병으로 뛰어들었고,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직접 점령하고 약탈하기에 이르렀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삼촌에 의해 쫓겨난 비잔티움 제국의 황태자 알렉시오스가 십자군에게 막대한 보상[8]을 약속하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를 요청, 이를 받아들인 십자군의 공격이 성공한 것이다.

이 때 그 난공불락으로 유명한 콘스탄티노플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함락될 수 있었는지 궁금한 사람이 많을텐데, 이 과정이 좀 막장이었다. 콘스탄티노플로 갔지만 한 줌 정도밖에 안되는(1453년 오스만 제국의 공격이나 이전의 우마위야 왕조의 공격군 등의 규모를 볼 때 이때 십자군의 규모는 확실히 한 줌 정도의 수준이었다.) 십자군의 규모로 함락시킬수 있을리가 없었고 오히려 맞싸우러 뛰쳐나온 훨씬 많은 수의 비잔티움군에게 역관광당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지속된 권력투쟁과 왕위찬탈로 제국 내부의 분위기와 여론은 막장 상태였고 십자군을 적당히 손봐줬다고 생각한 알렉시오스 3세가 군대를 성안으로 불러들였는데, (십자군 중기병들과 성밖에서 싸우는걸 두려워해서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걸 황제가 무능해서 패주한다고 착각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황제를 쫓아내버리고 알렉시오스 4세를 맞이해버렸다.

그 결과 알렉시오스는 알렉시오스 4세(1203~1204)로 즉위하였으나, 애초에 그가 약속한 막대한 보상 자체가 무리였으며 가톨릭 개종 강요와 보상금 징수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이 분노하여 봉기할 지경에 이르자 반대파에게 끔살당했다. 정권을 장악한 시민들은 너네에게 보상준다는 황제가 죽었으니 보상은 없다고 십자군들을 문전박대했고 이에 십자군은 꼭지가 돌아서 알렉시오스 4세의 복수를 한다는 명목으로 아예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기어코 대가를 받아냈다.[9]

그리하여 비잔티움 제국은 일단 멸망했으며, 그 남은 자리에 라틴 제국(1204~1261)과 몇 개의 부속국가가 들어섰다. 비잔티움 제국의 잔존 세력은 각지로 흩어져 망명국가를 건설하여[10] 콘스탄티노플 탈환을 위해 진력했으며 결국 니케아 제국이 라틴 제국을 축출하는데 성공하여 비잔티움 제국은 다시 부활하였지만, 이렇게 국력을 소모해버린 그들은 14세기 폭발적으로 성장한 오스만 제국의 팽창에 대응할 수 없게 되었다.[11] 수도 집중도가 높았던 비잔티움 제국은 결국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인한 국력 손실을 끝까지 회복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동유럽(발칸 반도)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진격을 막아낼 지역 강국이 사라졌으며, 이 때문에 부 유럽오스트리아 비엔나 근처까지 오스만 제국이 거침없이 확장할 수 있게 된 것.

결국 4차 십자군이 터지기 직전의 비잔티움은 누엘 콤네노스 치하 전성기 시절을 구가한 직후, 국력의 최전성기는 아니지만 여전히 동방 최강 단일 국가로서의 위세는 버젓하게 유지하고 있었기에, 결국 십자군의 행동은 여하간에 팀킬에 가까웠다. 근동의 이슬람 세력이 거대해지면 제일 먼저 노리는 목표가 콘스탄티노플이라는 것은 예견할 필요도 없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칼리프 시대의 이슬람 제국이건, 이슬람을 재통일한 셀주크 왕조건 이슬람 세력을 통일하면 다음 목표는 비잔티움 제국과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었음은 4차 십자군 시대 당시에 이미 역사적으로 증명되어 있었던 것. 당장 1차 십자군 자체가 셀주크 왕조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비잔티움가 서유럽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시작되었음을 생각해 보자. (이슬람 세력이 몽골처럼 갑툭튀한 건 아니지 않은가? 프랑크 왕국 시대에도 이슬람의 침입을 격퇴한 비잔티움 제국에 축하사절을 보낼 정도의 분별은 있었음을 생각하자.)


여하튼 십자군이 파문 받을 짓인 헝가리 침공에 이어서 이어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자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크게 분노했다. 거기다 교황 특사가 십자군이 성지까지 향하기로 했던 맹세를 자의로 방면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에 대해 그리스 교회는 로마 가톨릭에서 오로지 지옥의 본보기와 암흑세계의 소행을 보았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세속적인 성향이 강했던 바티칸은 곧 콘스탄티노플 점령이 큰 이익이 된다는 것을 파악했다. 거기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귀중한 보물들을 약탈해서 일부를 교황에게도 진상헀을 뿐 아니라 가톨릭과 갈라선 동방정교회의 중심지에 가톨릭 국가인 라틴 제국(라티노 크라티아)을 세워 명목상 로마 교황의 체면을 높여 주었다. 제4차 십자군은 도덕적으로는 변명할 말이 없을 정도의 큰 수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로마 교회의 세력을 크게 늘리게 되었다.

한편 1187년 이래 계속 몰락하고 있던 중동의 십자군 국가들은 제4차 십자군으로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약체화 된 이들 세력은 이미 무슬림에게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는 중개무역지로 기능하였기 때문에 이슬람 입장에서는 멸망시키지 않는 것이 더 득이었다. 따라서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아딜은 우트르메르(중동 십자군 국가)를 그냥 내버려두었다.

3.6. 제5차 십자군 원정

원정기간은 1217년에서 1221년의 4년간. 가라는 성지는 안가고 엉뚱한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한 제후들의 4차 십자군에 실망한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자신이 직접 주도하여 일으킨 십자군이다. 하지만 준비와중에 인노첸시오 3세가 서거하면서 새로운 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본격적으로 원정을 각국의 지원을 받아 1217년 원정군을 출발시켰다.

이에 헝가리 왕 안드라슈 2세,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6세, 키프로스 왕 위그,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후손)이 참가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참가를 수차례 재촉 받았으나 장기간의 해외 원정을 꺼려 직접참가하지는 않았다.

교황은 명목상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었던 장 드 브리엔[12]을 사령관으로 삼아 시리아를 공격하게 했으나 원정은 지지부진하여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다.

1218년 이에 실망한 제후와 왕들이 하나 둘 씩 귀환해버렸고 이에 제노바 함대의 제안으로 아이유브 왕조가 다스리는 이집트의 항구 도시 다미에타(Damietta)를 공략하기로 하였다. 십자군은 술탄 알 카밀의 반격을 격퇴하고 2년간의 장기간의 포위공격에 다미에타를 함락시키는데는 성공했으나 이미 전력소모가 심해 더 이상 공세로 전환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그들은 1221년까지 다미에타에서 웅거하면서 프리드리히 2세의 지원을 기다렸으나 휘하의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1세의 지원군만이 왔다. 십자군은 그래도 지원군에 힘입어 공세로 전환하여 카이로로 진격하였으나 나일강이 범람하는 에 공격을 고집한 교황 사절인 페라기우스의 실책으로 대패하여 원정군은 괴멸했다. 이후 포로들은 다미에타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석방되고 5차 십자군도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이 시점쯤에는 동방의 수수께끼의 그리스도교 왕국인 프레스터 존이 십자군을 도운다는 전설이 퍼져 있었으나 그 정체는 사실 몽골군이었다.

3.7. 제6차 십자군 원정

원정 기간은 1227년부터 1229년까지 약 2년 동안. '원정'이라고는 하지만 역대 십자군 중 가장 평화로운 원정군은 아니고 협상단 겸 상단이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재위 1227~1241)가 십자군 파병을 조건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임명한 프리드리히 2세(1215~1250)에게 원정을 재촉했으나 황제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따르려고 하지 않자 분노한 교황이 황제를 파문했다.사실 프리드리히 2세는 파문당하기 전에 이미 원정에 나섰으나, 항해 도중 병에 걸려 일시 귀국하자 파문을 당한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두 번이나 파문되고 나서야 겨우 십자군을 일으켰으며, 미리 건조했던 함선들을 이끌고 이슬람 지역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는 당시 아이유브 왕조의 알 카밀 무함마드 빈 알 아딘(살라딘의 조카)과 여러 번 교섭하고, 마침내는 예루살렘 일부의 통치권을 양도받는 성과를 이룬다. 간단히 말해서 예루살렘을 돈 주고 산 것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모스크는 여전히 이슬람교도의 관리 하에 두고, 예루살렘에 군대를 상주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결정이었으나 당연히 교황이 납득할 리는 없었고, 술탄 알 카밀도 성지를 팔아넘겼다는 이유로 이슬람권에서 거센 비난을 받았다. 이슬람 내에서도 이를 '굴욕'으로 간주해 아이유브 왕조와 큰 마찰이 일었으며, 그레고리오 9세를 비롯한 교황 측에서도 프리드리히에게 크게 분노했다. (당시 교황측은 이슬람 쪽이 약세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전투를 하면 옛 예루살렘 왕국령 전역을 회복할 수 있을것이라는 계산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 협정 조건에서 예루살렘에 새로 축성하지 않는다라는 조약도 있었기 때문에 도시를 탈환해봤자 지키기 어렵다는 비판도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이내 교황 측 군대에게 공격[13]을 받으나 돌아와서 이를 간단히 격퇴한다. 결국 교황은 다시 한번 제후들을 선동해서 십자군을 재파병했다. 나바라왕 테오발트 1세, 영국왕 헨리 3세의 동생 콘월 백작 리처드등이 이에 호응해서 갔으나, 재원정군의 규모는 소규모였다. 그들이 도착했던 시기는 프리드리히 2세와 아이유브 왕조간의 휴전협정 기간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전투는 하지 않았고 성지 순례와 아스칼론쪽에 축성을 한 뒤 다시 돌아왔다.

결국 그레고리우스 9세는 프리드리히 2세의 파문을 취소하였으며, 조약이 만료된 1239년까지 이후에도 5년간(즉, 1244년까지) 예루살렘은 기독교 세력의 영향권에 드는 등 이 6차는 십자군 중 두번째(평화적으로 첫째)이자 마지막으로 성공한 사례가 되었다.


3.8. 제7차 십자군 원정

원정 기간은 1248년부터 1254년까지 약 6년 간으로서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주도하여 일으킨 십자군이다.

당시 아이유브 왕조는 시리아와 이집트로 분열되어 있었다. 1244년, 예루살렘은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와 동맹을 맺은 호라즘 제국의 군대에 점령당했고, 이에 맞서기 위해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와 동맹을 맺은 십자군은 라 포르비에(La Forbie) 전투에서 이집트와 호라즘 연합군에게 포위섬멸 당한다. 라 포르비에 전투는 하틴의 뿔 전투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즉 유럽에서의 원정군이 아닌) 십자군이 대규모 전투를 벌인 유일한 사례였으며 최후의 사례이기도 하다.

이렇게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 2세가 이끄는 이슬람 세력에 예루살렘이 넘어가자 이에 자극을 받은 프랑스 왕 루이 9세(1226~1270)는 제7차 십자군을 일으켜 친동생들인 앙주 백작 샤를,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푸아투 백작 알퐁스,성전 기사단 등과 함께 이집트의 항구 도시 다미에타를 점령하고 카이로로 가는 길목인 만수라(Mansura)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바이바르스(Baibars)의 작전과 나일 강의 홍수에 말려들어 보급이 끊겨버렸고, 고립된 십자군은 괴멸당하고 말았다. 결국 루이 9세는 포로가 되어 배상금을 지불하고 석방된다. 그 와중에 친동생 로베르가 전사하는 불운도 겪었다. (여담이지만 루이 9세는 만일 이집트를 정복하는데 성공하면 로베르를 이집트 왕으로 옹립할려 했었다고 한다.)

여하간 석방 된 루이 9세는 남은 원정군의 몸값을 지불하느라고 꼬박 4년 동안이나 중동에 머물렀고, 이 일이 끝난 뒤에야 겨우 프랑스로 귀국했다. (물론 잡병들은 어림도 없었고 노예가 되느냐 이슬람으로 개종하느냐의 선택을 강요 받았다.) 하지만 승리자 아이유브 왕조의 끝 역시 불행했다. 그 해(1250)에 살라딘 2세는 살해되고 아이바크(Aybak)가 맘루크 왕조(1250~1517)를 열었으며, 만수라 전투를 지휘하고 군대의 지지를 얻은 바이바르스는 10년 후에 술탄이 된다.

3.9. 제8차 십자군 원정

13세기는 몽골 제국의 시대였고, 호라즘 제국을 박살내고 달려오는 프레스터 존 몽골 제국은 유럽 세력에게 큰 기대를 안겨주었다. 안티오크 공국은 1260년 몽골군이 쳐들어 왔을 때 몽골 편을 들어 이슬람 세력의 팽창을 저지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술탄 바이바르스에 의해 몽골군이 패배하고 물러나자 완전히 궁지에 몰렸고, 바이바르스는 1268년 자신에게 반기를 든 대가로 안티오크를 함락시킨 뒤 대학살과 파괴를 자행하여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헬레니즘 시대부터 중동의 대도시였고, 아시아(중동) 교회의 중심이었던 안티오크(안티오키아)는 가뜩이나 십자군에게 점령되던 순간부터 꾸준한 하락세였다가 이때 결정타를 입어 지금까지 시골도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에 자극 받은 루이 9세는 다시 십자군을 결성하여 자신의 아들 필리프 3세와 함께 동생인 시칠리아 왕 샤를(카를로 1세, 앙주의 샤를)의 제안을 쫒아 북아프리카 튀니지를 공격한다. 지원군으로 샤를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였고, 사위인 나바라왕 테오발트 2세의 군대 등이 합세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식수부족과 진중에 전염병이 돌아 루이 9세는 튀니스에서 병사한다. 이처럼 2차례나 십자군 원정에 직접 가담하고, 두 번째 원정에서는 왕 자신이 병사까지 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즉각적인 보답을 하여 루이 9세는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이에 따라 루이 9세는 '성왕(聖王)'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한편 진중에서 필리프 3세는 왕위를 이어받고 대관식을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게 되고, 또 나바라 왕 테오발트 2세도 귀국한 후 이내 병으로 사망했다. 남겨진 샤를은 튀니지와 기독교인의 보호와 무역재개, 배상금 지불등의 조건으로 화목하고 뒤늦게 지원군으로 온 에드워드 1세와 아크레로 향했다.

3.10. 제9차 십자군 원정

루이 9세가 튀니스 공격에 실패하고 병사하자, 지원군으로 오고있었던 잉글랜드 왕국의 에드워드 왕자(후에 에드워드 1세, 재위 1272~1307)는 뒷북을 친 격이 되었다. 늦게 도착한 이들 지원군들은 남겨진 시칠리아 왕 샤를과 함께 십자군의 마지막 거점인 아크레(아콘/아코)로 진군하였고, 키프로스 왕 위그 3세가 해군 지원을 해주었다. 이들은 또한 일 칸국(1258~1353)에 원군을 요청하여 기병대를 지원받는다.

연합군은 몇몇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바이바르스가 키프로스 본토를 공격하자 키프로스 해군이 철수하게 되고 에드워드의 군대는 아크레에 고립되고 만다. 여기에 더해 술탄은 암살자(어새신)를 보내 에드워드를 습격하기도 했는데, 에드워드는 암살자를 죽이는데 성공하지만 그 역시 작은 부상을 당하게 된다. 결국 갖가지 악전고투속에 에드워드와 샤를은 바이바르스와 10년간의 휴전 협상을 맺고 1272년 철수하고 만다.

이 후 십자군은 맘루크 왕조의 거듭된 공격으로 토르토사, 트리폴리 등을 잃었다(1289). 또한 십자군을 지원한 일 칸국의 몽골군은 아파미아, 알레포 등을 함락시키며 서남쪽 방향으로 진격, 많은 무슬림들을 학살했으나 이집트 술탄 칼라운이 반격을 개시하여 몽골군을 몰살시킨다. 결국 십자군은 쿠칸에 이어 최후의 거점인 아크레가 함락(1291)당하면서 모든 거점을 잃게 되었고, 200년에 걸친 십자군 원정은 막을 내리게 된다.

4. 외전

4.1. 노르웨이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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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십자군이 끝난 직 후 노르웨이 국왕 시구르드 1세가 일으킨 1107 ~ 1110년까지의 장거리 원정이다. 자그마치 노르웨이에서 중동 팔레스타인까지 원정을 했는데 바이킹의 원정에 버금가는 대원정이었다. 역시 바이킹의 후예 시구르드 1세는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최초의 국왕급 인물이다.

1107년 노르웨이 국왕 시구르드 1세는 5000명의 병력과 60척의 갤리를 타고 노르웨이를 출발하여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의 환대속에 겨울을 보내고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시칠리아로 가게 된다. 와중에 해적의 습격을 격퇴하고 오히려 해적들을 약탈하는가 하면 원조 해적 바이킹의 위엄 이베리아 반도에 있던 주변의 이슬람 소국들을 습격하고 레리아스 제도를 점령한 뒤 보물들을 약탈하고 개종하지 않는 무슬림들을 학살했다.

노르웨이 군은 1109년 시칠리아에 도착해서 국왕 루지에로 2세의 환대를 받은 뒤 키프로스를 거쳐 1110년 마침내 예루살렘 왕국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예루살렘왕 두앵 1세의 따듯한 환대를 받은 뒤 예루살렘 왕국 군과 합세하여 시돈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성 십자가의 파편을 받는 등 많은 선물과 보물을 받았다. 이후 육로로 귀환을 선택, 비잔티움 제국으로 가서 황제 알렉시우스 1세와 면회했다. 이 때 많은 부하들이 랑기안 친위대로 복무하길 원해 남겨젔고 해군과 보물들을 황제에게 바친 대가로 튼튼한 말을 얻어 불가리아-헝가리-오스트리아-독일을 주유하며 육로로 북상했다. 그 와중에 시구르드 1세는 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는 로타르 3세와 면회하기도 하였고, 이후 덴마크에 도착해서 국왕 닐스의 도움을 얻어 배를 빌려 1113년, 6년만에 노르웨이로 귀환했다. 구경 한번 잘 했네

4.2. 소년 십자군의 원정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프랑스와 독일에서 소년 소녀들의 신앙의 힘으로 이슬람교도를 기독교도로 개종시킨다는 목표로 유럽 각지 수만명의 소년들이 십자군을 조직하였다. 성지 탈환의 기치를 걸고 배를 타고 출발하였으나, 그 후 오랫동안 이들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결국 한참 후 이 계획 자체가 어른 사기꾼들이 꾸며낸 낚시로 밝혀졌는데, 배를 모집한 상인들이 이들을 알렉산드리아에 노예로 팔아 넘긴 것. 물론 성지에는 근처도 가지 못했다. 이들 중 불과 수십 명만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소년 십자군의 대표주자는 독일의 니콜라스와 프랑스의 에티엔이 있다. 이들은 모두 사적계시에 의한 십자군이라고 볼 수 있다. 독일의 니콜라스는 십자군 원정의 실패가 어른들의 영적 불결함에 있다고 보았고 성서의 계시대로 천국이 아이들에게 열려있듯이 성지도 아이들에게 열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니콜라스는 또다른 사적계시를 받아, 세의 기적처럼 지중해가 갈려서 도보로 성지까지 갈 수 있을 거라 주장했다. 하지만 이들 무리는 이탈리아로 가던 도중에 대부분이 공중분해 되었으며,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는 교황의 명령에 의해 남은 무리의 대부분이 고향으로 반송되었다. 게다가 약속한 지중해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닷길은 갈리지 않았고 이에 실망한 상당수의 무리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니콜라스와 남은 극렬 빠돌이들이 배를 얻어타고 성지로 가려고 했으나. 그때 노예 상인의 떡밥에 물려서 노예가 되었다.

프랑스의 에티엔은 자신을 십자군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신저로서 어느날 예수가 자신에게 나타나 프랑스 왕에게 편지를 전하라고 한 메시지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에 따라 자신은 프랑스의 왕 필리프에게 편지를 전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고 다니며 추종자들을 모았고, 이 추종자들과 함께 필리프에게 편지를 전해줬다. 그게 끝이다. 에티엔은 자신의 편지가 필리프에게 전해지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해산되었으며 "이게 다야?" 하며 실망한 추총자들은 알비파 십자군에 참전하는 정도로 끝났다. 사실 소년 십자군의 기록은 그렇게 많지 않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피가 발목까지 차올랐다.", "그분의 영을 받은 용맹한 기사가..." 하는 식의 감상적 기록을 남긴 수사들의 기록인지라 자료로서 객관성이 부족하다. 이고깽 판타지의 중세적 선조 그러다보니 양치기 소년으로 위장한 노예상의 부하가 프랑스 북부에서부터 마르세유까지 소년 소녀들을 낚아서 끌고 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유명한 이야기인 피리부는 사나이는 이 사건을 풍자한 것으로 추측된다.[14]

4.3. 알비주의 십자군

12세기 후반부터 남프랑스의 도시 알비(Albi)를 중심으로 금욕주의와 청빈사상을 내세운 알비파(카타리파)가 창궐했다. 가톨릭 교회를 거부하는 그들은 이단으로 선언되었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알비파를 토벌하기 위해 십자군을 일으켰다. 주로 프랑스 북부의 기사들이 참가했으며, 남프랑스의 알비파 영주들이 대항해서 싸웠다. 십자군은 남프랑스를 깡그리 엎어서 알비파의 씨를 말려버렸다(...).

첫 공격 대상이 된 베지에 시를 점령한 후, 병사 하나가 도시 안에 있는 독실한 가톨릭인과 알비파를 어떻게 구별할지 의문을 던지자, 교황특사 아르노 아모리[15]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16]

Caedite eos. Novit enim Dominus qui sunt eius.
모두 죽여라. 주님은 누가 자신의 백성인지 아신다.[17]

이렇게 베지에 시의 학살로 2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긴 했으나, 그 후의 알비 십자군은 무조건 학살이 아닌 항복 권유와 개종을 권유했다. 물론 개종을 거부하면 얄짤없이 화형시켰다.

알비파는 당시 기준으로 보나 지금의 기준으로 보나 정통 기독교라기 보다는 마니교에 가깝다. 그들은 구약의 성부를 육신을 만든 거짓 신으로 보았고 영혼을 중시한 신약의 예수를 진짜 신으로 보았다. 그들이 금욕주의와 청빈사상에 지독하게 목매단 이유는 육체적 세계는 거짓이기에 육체를 즐겁게 하는 쾌락 역시 거짓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는 육체라는 감옥을 만드는 공장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천시받았으며 관계는 철저하게 금지당했다.(!) 단명할 종파였다. 혹자는 다빈치 코드를 인용하여 알비파가 여자에게 글도 가르친 현대적인 운동가라고 주장하지만. 알비파가 여자에게 글을 가르친 건 "니들이 왜 임신을 하면 안 되는지 알려줄게. 이 감옥 공장아!" 하며 여자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알비파는 남프랑스 지방에서 인기를 끌었고 후에는 알비파 영주들이 늘어나자 알비파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성서를 자의적으로 번역 해석하기도 하여서[18], 후에 프랑스의 루즈에서 이와 관련된 지역주교회의(시노드)가 열렸다.

한편 스페인 바르셀로나 지방의 라곤 왕국은 아이러니하게도 국토회복운동의 선봉이면서도 가톨릭에서 이단으로 찍힌 알비파의 툴루즈 백작 레몽의 후원자였으며, 또한 톨루즈의 알비파 영주들을 자신의 보호령으로 두고있었다. 그러나 레스터 백작이 아라곤 왕국의 보호령들을 이단이라는 이유로 차례차례 뺏어가자, 아라곤 왕국의 왕 하이메는 레몽과 동맹을 맺고 3만의 군사로 레스터 백작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이것이 바로 1213년의 뮈레 전투(Battle of Muret)이다.

당시 레스터 백작의 군대는 고작 870명의 병사(270명은 중기병)로 3만의 군대와 맞서싸운다는 비교도 안되는 숫적 열세에 처하였으나, 알비파와의 전쟁으로 단련된 그들의 정예 중기병들은 순식간에 아라곤 왕국군의 방어선을 뚫고들어가서 아라곤 왕국의 왕, 하이메를 죽이고 겁을 먹고 도망치는 아라곤군을 신나게 썰어댄다. 결국 이 전투는 레스터 백작의 승리로 끝났다(레몽은 영국으로 도망쳤다). 알비주의 십자군의 리더였던 이 백작의 이름은 바로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19] 동명이인이자 영국의 왕 헨리 3세에 대항하여 남작전쟁을 일으킨 시몽 드 몽포르의 아버지였다.

베지에 시의 학살과 뮈레 전투의 여파로 1215년 즈음 십자군은 남부 프랑스를 거의 평정하지만, 알비파는 일시적으로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 전향한 척 했던 알비파는 레몽 백작의 아들(툴루즈의 레몽 7세) 지휘 아래 다시 봉기하여 툴루즈를 되찾았다. 1218년엔 십자군의 리더 시몽 드 몽포르가 툴루즈 공성전에서 전사하기까지 한다. 결국 알비 십자군은 십수년의 악전고투 끝에 1245년에야 남부 프랑스를 완전히 평정한다.

4.4. 아라곤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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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4년경의 시칠리아 왕국

이 전쟁은 크게 칠리아 만종 사건의 한 부분으로 다뤄진다. 위에도 설명한 7,8,9차 십자군에 참가한 시칠리아왕 샤를(앙주의 샤를)은 프랑스왕 루이 9세의 동생으로 원래 앙주로방스의 백작이었다. 근데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다스리던 신성로마제국 엔슈타우펜 왕조 계열이었던 섭정 만프레디[20]가 조카 콘라딘의 시칠리아 왕위를 강탈하고[21] 이탈리아 남부를 넘어서 기벨린파(황제파)의 수장으로 중북부까지 세력을 뻗게 된다.

이에 크게 위협을 느낀 교황 우르바노 4세는 만프레디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고 그를 파문한다. 또 샤를에게 접근에 시칠리아 왕위를 제안했고[22], 샤를은 요시 그란도시즌을 외치며 형의 지원을 엎고 시칠리아를 침공하여 1266년 베네벤토 전투에서 만프레디를 패사시키고 왕권을 강탈하였다. 이듬해 호엔슈타우펜의 정통 계승자였던 콘라딘이 또 처들어왔지만 쉽게 격파하고 붙잡아 나폴리에서 공개처형해 버린다. 이때 사실상 호엔슈타우펜의 정통계승자가 모두 사망하여 대공위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된다.[23]

야심에 불타던 샤를은 시칠리아 왕위에도 만족하지 않고 형과 함께 십자군에 참가하고 헝가리, 제노바와 동맹을 맺은 뒤 크게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자리에도 욕심을 내어, 이미 붕괴해버린 라틴 제국을 지원해 알바니아로 침공을 가하는등 종횡무진 활약했다. 그러나 이에 격노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미카일 팔라이올로구스아라곤드로 3세에게 군자금을 지원해주며 샤를을 치도록 종용했다.

한편 아라곤의 페드로 3세는 만프레디의 딸 콘스탄체와 결혼한 상태이므로 자신이 시칠리아의 적법한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비잔티움 제국의 지원금까지 받자 샤를을 치고 시칠리아 왕위를 되찾을 계획을 확정하게 된다.

샤를은 계속된 원정을 하는 중이었는데 이때문에 중과세의 세금을 물리고 시칠리아인들을 가혹하게 착취했다. 이에 시칠리아인들의 불만이 크게 고조된 상태였고 결국 반란을 배후조종하던 아라곤의 페드로3세에게 시칠리아 왕위를 바치기로 하고 1282년 일제히 봉기하여 프랑스 군인들을 학살하였다.(시칠리아 만종 사건) 샤를은 비잔티움 제국을 치려던 군대를 돌려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페드로 3세가 얼씨구나 하고 대군을 이끌고 시칠리아로 직접 처들어와 대패하고 나폴리로 퇴각했다. 분노한 샤를은 교황과 프랑스왕인 조카 필리프 3세(루이 9세의 아들)와 동맹을 맺고 아라곤과 전쟁에 돌입했고 교황은 페드로 3세를 파문하고 샤를의 군대를 십자군으로 격상시켰다.(1284년)

그러나 전쟁은 아라곤군의 강력한 공격에 샤를의 뜻대로 풀리지 않아 프랑스 함대가 아라곤 해군에 대패하고 나폴리를 봉쇄해 샤를의 아들 샤를 2세가 포로로 잡히는등 악화일로에 빠젔다. 이에 마요르카의 왕이자 페드로 3세의 조카인 하이메 2세를 지원해 아라곤 내부 붕괴를 노리는등 여러모로 노력했으나 결국 육전에서도 프랑스-나폴리 연합군이 패퇴하여 샤를은 1285년 실의에 빠진 채 죽었다. 이후로도 분쟁은 계속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샤를 2세가 1291년 시칠리아 섬을 포기하고 나폴리왕위만 차지하게 됨으로서 아라곤의 승리로 끝났다.

4.5. 국토회복운동 (레콘키스타)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도 왕국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벌였던 수백년간의 전쟁. 엘 시드 등이 활약했다. 아라곤, 카스티야, 레옹, 포르투갈, 나바르 등등이 있었으며 결국 아라곤+카스티야로 성립한 스페인 제국이 그라나다까지 쓸어버리고 국토회복운동을 완성했다. 보통 현대의 시점에서는 십자군에 포함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국토회복운동에 종군하는 것도 십자군과 대등한 책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때 산티아고 기사단이나 라트라바 기사단이 맹활약 했다.

4.6. 동방십자군

동유럽의 프로이센 일대(현재의 폴란드 서부)에 잔존하고 있던 이교도를 상대로 한 토벌 겸 개척전쟁. 주로 독일기사단이 싸웠다. 이때 독일기사단이 정복한 땅이 나중에 독일기사단이 세속국가화 되면서 프로이센 왕국의 근간이 되었다. 이때의 주요한 기독교 세력으로는 튜튼기사단이 있었고, 주요한 이교도 세력으로는 리투아니아가 있었다. 당시 튜튼기사단은 리투아니아를 들쑤시는 것으로 영토, 관광비[24], 무역 등으로 증흥했으나 튜튼기사단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폴란드에 의하여 리투아니아는 기독교로 개종했고, 이후 1410년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연합군에게 튜튼기사단이 대패하면서 100년에 걸친 튜튼기사단의 쇠락이 시작되었다.

4.7. 북방십자군

작센,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 등이 주축이 되서 스웨덴 북부의 사미족, 핀란드,독일북부,폴란드 서부,리투아니아 서부,에스토니아,라트비아발트해를 둘러싼 지역을 공격한 십자군을 말한다. 발트 십자군으로도 부르며 동방십자군과 같이 취급되는 경우도 있다.

교황 첼레스티노 3세가 1193년 북방지역의 이교도를 공격하라고 촉구하라고 한게 공식적인 시작이지만, 그 이전에도 꾸준히 이미 성전을 명분으로한 공격이 계속되고 있었다. 엘베강과 오데르강 사이에 있던 슬라브족을 웬드 십자군이란 이름으로 공격하여 정복하였고 특히 핀란드에 살던 핀족은 1154년에서 1249년,1293년까지 거의 100년간이나 스웨덴의 공격을 받고 정복당한다.

1193년에서 1227년에 리보니아 기사단이 에스토니아인,리보니아인을 정복하고 기사단령을 세웠다. 또 러시아 동방정교회 국가들도 이 지역을 개종이란 명분으로 자주 침략하였다. 그 와중에 카톨릭 세력과 정교회 세력이 충돌하기도 하였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항목 참조.

4.8. 대오스만 제국 십자군

오스만 제국이 성장하여 팽창함에 따라 그들을 막기 위한 전쟁도 십자군 취급을 받았다. 술탄 바예지드 1세가 1396년 불가리아코폴리스 전투에서 발칸반도를 탈환하기 위해 뭉친 십자군 연합군을 대파하였다. 이 십자군은 사실상 마지막 십자군으로 취급받는다. 물론 그 후의 계속된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막기 위한 전투도 공식적이지는 않았지만 십자군과 동등하게 여겨졌다. 야노슈 후냐디 참조.

5. 영향

십자군 전쟁은 오래 지속되었지만 4차까지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성지인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함으로써 유럽권이 패배한 전쟁이 되었다. 전쟁이 교황권의 예상과 달리 실패했기 때문에 교황권의 몰락과 신앙의 약화를 가져와 결과적으로 카톨릭 교회의 권위가 떨어졌다. 한편으로 기사와 영지를 기반으로 한 장원경제의 붕괴가 찾아왔고,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의 탄생이 이루어졌다. 동방으로 향하는 무역로를 새롭게 개척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도시경제와 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그외에 자세히 언급되지는 않지만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의 공국들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키예프 공국같은 러시아 공국들이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 제국이 북아프리카를 장악하고 사라센 해적들이 판을 쳐 지중해 무역이 불가능하자 아예 흑해와 러시아 공국들을 지나 발트해로 가는 무역이 성행하였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으로 이탈리아 상인들이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고 상권을 장악해 러시아를 지나는 물류의 양이 급감해버리자, 대부분의 수익을 교역에 의지하는 러시아 공국들은 휘청거릴 수 밖에 없었다. 4차 십자군 직후 몽골이 침공해오자 보고르트 공국을 제외한 모든 러시아 공국들은 멸망당하거나 칸국의 봉신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반면에 이탈리아의 공화국들,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공화국은 십자군을 통해 많은 이득을 얻었다. 베네치아는 직접 그리스의 상당 부분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제노바 역시 그에 못지않은 힘을 얻게 되었다. 이들의 경쟁 관계는 키오자 전쟁이 베네치아의 승리로 끝나기 전까지 지속된다.

하지만 이슬람권에서는 분열된 상황에서 갑자기 유럽이 쳐들어와 개박살을 냈기 때문에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몰아낸 유럽이 제국주의 시대에 다시 돌아와서 중동을 공격해 식민지로 만들고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제2의 십자군이라고 자화자찬하자, 이슬람은 십자군을 사악한 악의 화신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가 현대 중동의 시대정서를 형성하는데 이바지하였고 지금도 이슬람은 이스라엘과 미국을 제2의 십자군으로 여기게 되어 증오와 폭력을 더욱 증폭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다.

실제로 이 전쟁 와중에 이슬람과 기독교는 종파와 이해관계로 사분오열되어 서로서로 싸우는 일이 빈번했다. 이슬람의 영웅이라던 살라흐 앗 딘조차도 다른 종파에서 고용한 자객들에게 죽을 뻔 했고, 십자군이 헝가리로 쳐들어갔다가 되려 깨져버린 일이나, 알비주의 십자군 같은 내부의 충돌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이 서로 손을 잡고 적을 공격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에티오피아도 십자군 전쟁에 영향을 받았다. 이슬람권에 포위된 유일한 기독교 국가였던 에티오피아는 십자군 국가들과 연합하여 이슬람 국가들에 대항하려고 했고 실제로 소규모의 지원병을 보내기도 하였다.[25] 살라딘이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키고 순례자들에게 순례세금을 물리자 아예 랄리벨라라는 곳에 제2의 예루살렘을 건설한다고 여러 건축물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14세기에 이르러서는 교황에 사절을 보내 로마,아비뇽,스페인,포르투갈을 둘러보고 프랑스와 같이 이집트를 공격할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이미 십자군 전쟁이 거의 끝을 보는 상황이었고 또 대립교황과 교황이 서로 반목을 하는등 유럽 교회도 혼란이 극심한 상황이었던지라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한편 몽골군이 1200년대 후반에 이슬람권을 공격하면서 유럽에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 퍼졌다. 십자군 국가들은 일 칸국과 연합하여 이슬람 국가들에 대항을 꾀했고 네스토리우스교를 믿었던 몇몇 몽골군주와 그 아내의 영향으로 교황 및 프랑스왕과 서로 사신을 주고 받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 일 칸국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맘루크 왕조의 맹활약으로 몽골군이 처발리자 그 연합도 점차 쇠퇴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십자군전쟁의 여파는 그 당시 창궐하던 흑사병과 맞물려서 유럽인구를 급격하게 줄이는 결과를 초래했고, 이는 자연적으로 농노들의 가치가 올라가는 결과를 낳았다.[26] 또한 예루살렘을 기점으로한 실크로드를 결과적으로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향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던 유럽인들은 실크로드를 대체하는 다른 길을 찾게 되었으며, 이는 대항해시대의 서막이 되었다. 이와 같은 여파는 십자군전쟁의 병크로 실추된 교황권에 맞물려서 유럽 구성원의 머리속에 '개인의 욕구, 권리' 등에 대한 인식들을 크게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르네상스의 발판이 되어 결과적으로 중세가 끝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6. 평가

전쟁이 끝난 후 19세기 전까지는 사실 이슬람이나 기독교나 이 전쟁에 큰 관심이 없었다. 무슬림들은 일단 자신들이 승리한 전쟁이고, 곧이어 터진 몽골 제국의 침략이 더 관심을 기울일만한 큰 사건이었다. 기독교 측 또한 언급해서 좋을게 없는 전쟁으로 여겼고 근대 계몽주의 학자들은 십자군 전쟁을 중세의 암울한 역사 정도로 생각했다. 그야말로 흑역사

하지만 19세기 이후 십자군 전쟁은 재조명 받게 된다. 유럽국가들이 중동 지역을 침략하기 시작하면서, 위에 '영향' 항목에 나온대로 명분을 위해 자신들을 제2의 십자군이라 자화자찬한 것이다. 서구국가들이 이렇게 십자군 전쟁의 이미지를 차용하자 이슬람 측에서도 그에 맞서기 위해 살라흐 앗 딘 등 영웅을 재발굴해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십자군 전쟁은 순식간에 역사의 화두로 떠올랐다.

이러한 기류는 현대에도 이어져와서, 걸프전으로 시작해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등의 전쟁에 서방세계의 다국적군이 중동으로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하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서양인들이 십자군 전쟁을 또 벌이고 있다!"라고 호도하며 언플을 시도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십자군 전쟁에 대한 밑의 이해타산적 재평가와 맞물려서 '테러와의 전쟁'은 핑계고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이 실제로는 석유를 노리고 중동을 침략하는거라는 음모론내지 선입견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식민지 시대가 저문 이후, 십자군 전쟁은 유럽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드러낸 대표적인 전쟁이며 신의 뜻이란 이름 하에 벌어진 종교적 광기의 전쟁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2000년 3월 5일 교황청은 <회상과 화해: 교회의 과거범죄>라는 문건에서 십자군을 '교회가 저지른 범죄'라고 공식 인증했다. 또한 같은해 3월 12일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집전된 미사에서 십자군 전쟁을 교회의 잘못으로 거론하며 용서를 구했다. 1년후 2001년, 교황은 그리스를 방문하여 십자군의 침략과 약탈과 학살 등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했다. 9.11이 터진 이후엔 미국과 서방에선 무슬림들이 어째서 우리를 이렇게 적대하는가? 라는 의문이 던져졌고 이에 서방-이슬람 관계의 역사에 대한 전체적인 고찰이 이루어졌는데 십자군 전쟁이 서방-이슬람 관계 악화의 첫 타자로 지목되어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고 이러한 기류에 편승한 것이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류의 저서와 "관대한 이슬람" 떡밥이다.

7. 재평가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는데, 십자군 전쟁을 이해타산[27]으로 일어난 전쟁일지언정 단순히 종교적 광기로 일으킨 전쟁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계속 나오고 있다.

왜 이런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우선 십자군의 종교적 광기 운운하는데 맨 처음으로 성전 드립을 쳤던 것은 서유럽도 이슬람도 아닌 동로마의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대 사산조 성전 선포였고 이후 서유럽의 첫 성전은 프랑스로 몰려오는 무슬림들을 막기 위한 방어전 개념이었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 자체도 단순한 기독교vs이슬람의 전쟁이 아니었고 조금만 파고들면 기독교도끼리도, 이슬람교도끼리도 죽어라 싸운 전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정교회 나라인 비잔티움 제국에선 같은 기독교라고 칭하는 십자군을 사람으로 생각하느니 차라리 이단자인 이슬람인들이 더 사람이고 십자군은 짐승이라고 증오하는 기록까지 가득 남겼을 정도. 하지만 십자군들도 비잔티움가 자신들을 야만인 취급하고 투르크와 협상으로 뒤통수 친 일 때문에 이를 갈고 있었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같은 황제인 신성로마제국 황제도 자신에게 충성을 강요하기도 하여 십자군이 펄쩍 뛰기도 했다.[28] 서로가 서로를 엿먹였다는 얘기다.

게다가 이슬람 국가들도 자기들끼리 싸워 댔고 시리아에선 아예 친 십자군 영주들이 줄줄이 예루살렘 왕국에 동맹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걸 단지 기독교-이슬람 전쟁이라고 가볍게 여기는 거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중세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듯이 이 또한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다. 토머스 매든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세계의 기독교 침공에 따른 반작용이라고 한다. 무어인들의 이베리아 반도 점령과 투르크군에 의해서 동방정교회의 영역이 점령당해, 기독교 세계는 동서 할 것 없이 샌드위치 식의 압박을 당했다는 것이다. 기존의 유럽이 제국주의적이고 종교 근본주의적인 시각에 경도되어 일방적으로 칼들고 쳐들어간 것이란 시각은 부당하다는 시각이다. 여기에는 십자군을 미화한 당시 유럽인들의 책임도 있다. 그런데 현재는 정반대라 유럽 일반인들에게 십자군 전쟁은 종교적 광기로 무작정 전쟁을 일으킨 기독교인들의 수치 정도로만 여긴다. 문제는 이러한 시각 역시 편협하고 옳지 않다는 것이다. 십자군 전쟁은 훨씬 더 복잡다양한 뒷배경과 양상을 보인다. 단순히 기독교 vs 이슬람교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십자군 전쟁을 완전히 잘못 본 것이다.

셀주크는 분열되어 있었고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이슬람 세력의 공세도 주춤했으니 이슬람 세력은 큰 위협이 아니었고, 십자군은 군사적 위협에 대한 반작용일 수가 없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와 반대로 1차 십자군이 결성되던 무렵 이슬람 세력에 의한 기독교권에 대한 공격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29]

그리고 그동안 십자군 전쟁의 야만성 운운하면서 십자군의 안티오키아 학살, 예루살렘 학살, 마라트 안 누만 식인 사태 등이 거론되었지만 문제는 그거 십자군만 한게 아니고 십자군 역시 관용을 베푼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게다가 애초에 십자군이 정복한 아르메니아, 에데사 지역이 무슬림 영토였나면 그것도 아니고 거긴 정교도들이 사는 곳이다. 또한 이슬람 군대 역시 장기나 바이바르스는 허구한날 학살을 벌였다. 이런 건 무시하는 것을 악질적 취사선택과 허수아비 찌르기라고 한다. 까놓고 말해서 십자군 전쟁은 그냥 규모가 크고 전장이 달랐을 뿐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전쟁이다. 십자군의 광기로 지목되는 성전 드립, 학살과 약탈은 이슬람이고 동로마고 십자군이고 가리지 않고 지난 수천년간 당연하게 행해온 일이며 그 이후에도 행해진 일인데 마치 십자군만 특별했던 것처럼 비난하는 것은 웃긴 일이다. 이슬람이 스페인, 이탈리아, 시리아, 이집트를 공격한 것은 확장이고 거기에 대한 기독교권의 반격은 제국주의적 침략 운운하는 것조차도 심각한 이중잣대다. 이런 극단적 시야의 대표주자가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인데 해당 항목에 들어가면 십자군=제국주의적 전쟁론이 얼마나 황당한 논리인지 가루가 되도록 까놨기 때문에 차라리 그 항목을 보는 것을 추천한다.

8. 대중매체 속의 십자군

십자군 전쟁은 영화의 소재로서 관심있는 분야지만, 기독교와 얽혀 있기 때문에 쉽게 건드리기 힘든 소재 중 하나이다. 현재로써는 킹덤 오브 헤븐이 십자군 전쟁의 일면을 잘 그려냈다는 평을 받고 있으니 당시의 광기와 복잡다양한 힘의 역학관계를 느껴보고 싶다면 볼 만하다. 그리고 킹덤 오브 헤븐 시청시에는 반드시 감독판으로 찾아서 보는 것을 권한다. 무려 40여분 가까이 차이가 나는 건 둘째치고, 그 40분이 대부분 본편(편집본)의 '엉성한' 스토리 서브플롯을 연결해주는 부분들이다.

물론 킹덤 오브 헤븐도 영화이니만큼 실제 역사와 차이나는 점이 있다. 애초에 주인공 이벨린의 발리앙은 20대의 멋쟁이가 아니라 50대의 늙은이였으며, 예루살렘 왕국 공주 시빌라와의 로맨스도 사실과 다르다. 영화에서 시빌라 공주는 무능한 악역 기 드 뤼지냥과 억지로 결혼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얼굴만 잘 생긴 희대의 무능남 기에게 반해서 왕관을 들어다 바쳤다. 그러나 발리앙이 살라딘과 싸웠던 예루살렘 공방전에서 "덤비면 주민이고 포로고 뭐고 다 죽이고 모스크 전부 때려부술 거야!" 하고 협박했던 것은 사실이고, 발리앙이 군사들에게 기사 작위를 줬다는 것도 사실이다. 모든 인원을 기사로 서임한 건 물론 아니고, 60명 정도를 날림으로 기사로 서임했다. 이는 당시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기사 숫자가 터무니없이 부족했기 때문. 말하자면 장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병사들을 대충 골라서 장교로 임명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뭐 이해가 안가는 일은 아니다.

게임 어쌔신 크리드의 배경이기도 하다.

홍콩 만화 <회전사>는 십자군이 서하국까지 쳐들어오는 스토리라는 판타지만화이다(…).

미디블 토탈워를 해보면 십자군과 지하드를 지겹게 경험할 수 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도 살라딘 미션이 있어 플레이할 수 있다.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는 이름 그대로 십자군 전쟁시기 왕 또는 제후를 선택해서 가문의 번영을 목표로 움직여야 한다. 당시 시대상을 완벽하지는 않지만 잘 구현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물론 직접 십자군 또는 지하드에 참전이 가능하다.

9. 참고자료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아민 말루프 저, 김이선 역, 아침이슬 발행, 2002년): 중립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철저하게 아랍인의 관점에서 서술하여 그 쪽 입장에서 본 전쟁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십자군 전쟁에 대한 최근 논쟁이나 연구성과를 담은 연구서는 단 한 권도 번역되어있지 않다.(사실 서양사 전반이 이 모양)

토머스 매든의 <십자군>이 그나마 최신 경향을 담고 있지만 그게 전부다. 국내 인문학의 암울한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나 할까..

그외에는 w.b 바틀릿의 십자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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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작은 규모로는 7차~8차로 계산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는 9차까지 정의하는 경우도 있으나, 8차와 9차를 묶어 8차까지라 보는 경우도 있다.
  • [2] 엄밀히 말하면 '가겠다던'도 포함되어야 한다.
  • [3] 십자군 대표단과 베네치아 공화국 간의 '계약'에서 목적지를 특정하지 않았다. 일단은 '적이 방비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곤 했지만. 계약서는 최대한 구체적으로 써야한다는 소중한 교훈을 남겼다.
  • [4] '사전에 합의한' 계약조건이었음을 상기하자. 더군다나 이들을 싣기 위한 각종 물자와 배를 만드는데 베네치아 공화국의 경제력이 총동원되었던 만큼 일정 수준의 뱃삯을 받지 못하면 베네치아 공화국의 경제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 [5] 십자군 참여를 약속했던 군후들 상당수가 참여하지 않았고, 지원병들은 최소한의 지참금도 가져오지 않아 군후들이 대신 내어주는 형편이었다.
  • [6] Zára, 현 크로아티아다르-Zadar. 정확히는,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기 싫었던 자라 시가 헝가리 왕에게 청원해서 자발적으로 헝가리의 영토로 편입된 것. 자라는 전통적으로 베네치아에 반항적인 도시였다. 동유럽의 강국이었던 헝가리가 이후 베네치아를 족치지 않은 이유도 어차피 전통적으로 베네치아의 도시였기 때문인 이유가 컸다. 사실 당시 베네치아의 국력도 만만하지는 않았지만.
  • [7] 함께 재미를 본 교황 특사가 이들의 성지 수복 맹세를 무효화해버렸다.
  • [8] 십자군에게 거액의 일시불 지급,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성지 수복에 참여하는 것, 제위에 있는 동안 1천여 명의 기사를 보내 성지를 수호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동방의 정교회를 로마 가톨릭으로 통합한다는 4가지 조건이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매력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양대 종교의 흡수 통합이라는 점이 가장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 [9] 이번에는 해안가 쪽 낮은 성벽을 공격했고, 한 차례 도시가 뒤집어진 이후라 수비군이 상당히 막장화된 뒤였다.
  • [10] 니케아 제국, 페이로스 전제군주국. 트레비존드 제국은 십자군 국가와는 별개로 건국되었다.
  • [11] 여담이지만, 비잔티움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당한 뒤 오스만 제국의 공격대상이 된 나라들은 비잔티움 제국이 있었을 적에 제국을 무던히 골치 아프게 했던 불가리아, 세르비아, 베네치아 같은 나라들이었다. 결국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에 아예 정복당해 민족사에서 최악의 흑역사를 경험한다. 그야말로 순망치한이요, 역사의 인과응보. 베네치아의 경우 역시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 이후 동지중해가 오스만 제국의 내해가 되면서 섬들에 설치한 해상기지가 오스만 제국의 공세에 치명적으로 노출되었다.
  • [12] 이 사람은 프랑스 출신 기사로, 예루살렘 왕 콘라드의 딸 마리와 결혼한 부마였다. 사실 이미 몰락 테크를 타고 있던 예루살렘 왕국의 왕좌에 아무도 앉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황과 프랑스 왕이 억지로 임명하여 보낸 인물이었다. 결국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한 후에 라틴제국으로 가서 섭정이 된다.
  • [13] 교황이 무슨 공격을 감행하는지 의아할 수도 있지만, 1870년까지 약 천년 동안 교황은 이탈리아 중부의 영토를 다스리는 군주이기도 했다. 당연히 주민을 징발하고 물자를 모아 군대를 조직할 수 있다. 교황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가 그 힘으로 유명세를 떨친 것이다. 참고로 교황 뿐 아니라 주교나 신부를 비롯한 성직자들 또한 중세에는 실질적으로 영주이자 기사인 경우가 많았다.
  • [14] 또는 독일 동부의 식민지 개척화 사례를 풍자한 이야기라는 말도 있다.
  • [15] 나중에는 대주교까지 올라갔다.
  • [16] 베지에 학살에서 20년 후에 독일 시토회 수도사가 적은 책에 나오는 말이다.
  • [17]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모두 죽여라. 주께서 가려 내실 것이다(Kill them all. Let God sort them out.)"라고 번역되기도 하였으며, 오히려 이 쪽의 번역이 더 잘 알려져 있다. 다만 두 문장 모두 결국 뜻은 같다. 누가 이단인지는 주님이 알고 있을테니, 일단 다 죽여서 신이 심판하게 하라는 것.
  • [18] 교회로서는 중대한 사항이다. 교리의 자의적인 해석은 교회의 일체성을 훼손하기 때문.
  • [19] 4차 십자군에도 참여했다가 자라 공방전이 끝난 후(그는 계속 자라 공격을 반대했다.) 우크르메르에서 6년간 싸우고 부친의 서거에 따라 몽포르로 돌아와 몽포르 백작이 되어 있었다.
  • [20]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서자로 정식 계승권이 없었다.
  • [21] 슈바벤의 공작이었던 콘라딘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독일에 있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만프레디가 왕위에 올랐는데, 후에 오보인 것이 밝혀졌으나 왕위를 양도하지 않고 그대로 강탈했다.
  • [22] 처음엔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의 둘째 아들 에드먼드에게 제의했으나 최종적으론 샤를이 선택되었다.
  • [23] 프리드리히 2세의 장남 하인리히는 아버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폐위된 뒤 비참히 죽었고 차남 콘라드 4세는 1250년 아버지가 죽자 독일왕으로서 신성로마제국 제위를 놓고 대립 황제들과 싸우다 4년만에 급사했다. 콘라딘이 바로 콘라드 4세의 아들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서자가 많았는데 만프레디와 더불어 또 다른 서자였던 엔조는 롬바르디아 동맹과의 전쟁 와중에 볼로냐에서 포로로 잡혀 감옥에서 대우는 받았지만 끝내 풀려나지 못하고 사망했다.
  • [24]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기사들이 동방에서 튜튼 기사단에게 얼마의 돈을 지급한 뒤 성전을 뛰었다.
  • [25]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흑인기사는 이걸 의식한듯 하다.
  • [26] 당연하게도 100의 영지를 10명이 농노가 경작하던 기존과 달리, 7~6명의 농노가 경작을 하게 되면, 자연히 생산물이 증대되고, 이러한 잉여생산물은 농노들이 더 많은 부를 얻고자 하는 욕구로써 영주가 의도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주들이 흑사병/십자군 전쟁을 기점으로 이전과 같은 요구를 할 수 없게됨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 [27] 사실 상 대부분의 전쟁은 이해관계의 충돌로 일어났다.
  • [28] 서열상 알렉시오스가 위고 비잔티움이 신성로마제국을 황제 책봉을 해준 일이 있기에 명분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동양 조공책봉처럼 절대적이지 않았다.
  • [29] 서유럽 지원군을 요청한 알렉시우스황제는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소아시아 대부분을 잃어버렸으며 이과정에서 혼란에 빠진 제국의 제위를 두카스 가문에게서 빼앗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위기간 내내 이슬람(룸술탄국의 킬리지 아르슬란), 북방유목민(페체네그족), 시칠리아 노르만족(십자군 지도자이자 오트빌 가문의 보에몽)의 침입에 시달려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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