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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전투

last modified: 2014-10-29 23:35:52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영국 동양함대 궤멸
3. 말레이 반도 점령
4. 싱가포르 함락
5. 전투 결과
6. 여담


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1년 12월 8일부터 다음해 2월 15일까지 영국군일본군이 말레이 반도를 놓고 벌인 전투.

2. 영국 동양함대 궤멸

일본말레이시아싱가포르 일대를 장악하여 연합군의 동남아 지역에서의 세력 약화와 동남아 공략의 발판 및 싱가포르에 영국이 오랜 세월 구축한 각종 시설을 포함한 강력한 해군기지를 얻으려 했고, 영국군은 당연히 그러한 일본군의 공격을 수비하는 처지였다.

우선 태국과 협의라고 쓰고 강요라고 부르는 것을 해서 미리 공격의 발판을 마련한 다음,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이끄는 일본군은 제로센을 이용해 말레이 지역의 비행장들을 공격해 영국 공군을 무력화시킨다.

이에 영국군은 급히 최신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순양전함 리펄즈를 주축으로 함대를 꾸려 지원에 나서지만 이미 개전 초의 기습으로 인해 손상된 공군 전력으로는 아군 전투기로 공중엄호를 할 수 없었으므로 말레이 해전에서 뇌격기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침몰하고 만다. 이것은 전함이 함대결전 없이 항공기의 공격만으로 격침된 초유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연합군 측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일본군은 이 전과를 바탕으로 한 영국동양함대궤멸이라는 군가까지 만들어가며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그리고 1년 뒤 천조국의 등장으로 일본항모함대궤멸을 당한다

3. 말레이 반도 점령

결국 일본군은 말레이 반도에 별 다른 방해 없이 상륙하는 데 성공하지만 일본군은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했다. 그 이유는 일본군의 총병력이 겨우 3만인 데 비해 영국군은 그보다 더 많은 병력을 동원했으며, 진격로는 정글을 통과하는 길 3가닥, 게다가 정글에 총 3개 라인의 진지를 구축한 뒤였고, 더군다나 싱가포르까지 거리는 800km를 넘을 뿐 아니라 보급은 일본군이 더더욱 나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군은 이미 제공권을 상실한 상태인데다가, 정글에서는 전차 같은 거 소용없다고 생각해서 말레이 반도에 전차가 한 대도 배치되지 않았던 반면 일본군은 치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과부제조기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형편없는 전차이지만, 당시 연합군측은 전차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대전차 능력이 매우 부족했다. 그리고 치하의 좁은 전폭과 가벼운 차체로 인해 대활약을 했다. 특히 진격로상의 대부분의 교량이 20톤 이상의 차량은 통과할 수 없는 수준의 허름함을 자랑했으니 영국군이 전차가 소용없는 지역이라고 할 만했다. 그런데 치하는 15.8톤이었으므로 현지의 빈약한 교량과 밀림의 험로 등을 통과하는데 강력한 이점으로 발휘되었고, 여기에 치하의 없다시피한 장점중 하나인 순간가속능력 등도 보탬이 되어 보병 위주의 영국군를 상대로 전투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게다가 현지의 영국군은 기존의 숙련된 병력은 얼마 안 되는 숫자에도 불구하고 더 긴급한 유럽전선으로 파병된 지 오래였다. 그래도 말레이 반도에 남아 있던 영국인 연대들의 일부 대대들[1]이 남아 있었고, 이들은 이후의 전투에서 밥값은 다했다.
문제는 그 자리를 메꾸기 위해 파견된 인도인 부대였다. 일단 제3인도군단 예하 제11인도사단과 제9인도사단 및 4개 보병여단이 있었는데, 그나마도 3개 보병여단은 1월 중순 이후에나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일본군 지휘관 야마시타 토모유키는 아시아인들로 구성된 부대들 중에서 일본군을 이길 수 있는 부대는 없다고 자신만만해 했다. 오스트레일리아군조차도 별 걱정거리가 되지 않았고, 일본군이 골치를 썩힌 부대는 오직 영국인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이런 인도인 부대를 주축으로 해서 여기에 제8오스트레일리아 사단이 주축이 된 오스트레일리아인 부대 및 현지 원주민까지 동원해서 급히 징집된 병력이 주력이었는데, 이들은 실전경험이 없는데다가 훈련도 부족한 상태여서 습기 많고 벌레가 들끓는 정글의 방어선을 지켜야 하는 사태가 되자 곧바로 사기가 떨어지면서 일본군의 포위섬멸작전에 쉽게 와해되어 갔다. 게다가 인도인들은 뭐하러 이런 곳까지 와서 영국놈들 입맛대로 싸워야 하냐는 인식이 가득했다.[2]

여기다가 방어전력의 핵심으로 파견된 영국인 편성의 제18사단은 1월 25일에나 싱가포르에 도착했고, 여전히 전차는 보유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싱가포르의 해군기지를 유지하던 해군병력들은 육군에게 알리지도 않고 영국군 사단을 수송한 선박편을 타고 철수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싱가포르 전투 당시 치하가 활약한 것이 동등한 입장에선 그저 "쯧쯧, 저거 전차 맞나요?" 하는 허접전차도 운용하기에 따라서는 치하나 티거나 대전차화기가 부족한 보병에겐 사신임을 보여주는 부분으로 평가받는다. 이중 가장 대표적이면서 전형적인 사례가 말레이 반도 북단의 지트라에서 벌어진 전투로 97식 전차보다 더 약체이던 95식 전차를 소대 규모로 지원받은 600명 규모인 일본군 혼성부대의 우회공격에 방어하던 제11인도사단의 병력은 말 그대로 단 하루도 못 버티고 도망만 쳤다. 정예부대인 구르카 대대까지 도망쳤는데, 행군 도중에 삼림에서 갑자기 전차가 튀어나오면서 사격을 해댔으니 도망 외에는 달리 방법도 없었다. 그나마 구르카 대대는 나중에 다시 모여서 전투에 들어가기라도 했는데 기타 인도인 부대들은 훈련 부족으로 인해 한번 무너지면 그대로 궤주하면서 재규합이 도통 되지 않았다.

다만 영국 입장에서는 대전 말기까지 아시아 전선은 구식무기의 처분장에 가깝게 인식했기에 무기의 질이 매우 형편없었다. 하지만 이미 구식병기화된 마틸다 전차도 투입되자마자 이동벙커 소리를 들을 정도로 강인한 능력을 발휘했으니, 소수라도 전차가 있었다면, 하다못해 치하의 장갑을 관통할만한 보병화기만 있었더라도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하지만 만일 공격받는게 일본군이었다면 그런게 없었어도 화염병을 던져대면서 결사항전 했을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식민지군의 감투정신이 부족했다는점은 어쩔수 없었을듯.

참고로 일본측 기록에 나오는 싱가포르 전투 당시의 연합군 전차는 브렌건 캐리어 등의 무한궤도가 달린 운반차량이다. 당연히 이런 차량으로는 치하를 격파할 수 없다. 그 이하 장갑차 정도라면 모를까(...) [3]

승기를 잡은 일본군은 은륜부대라고 불리는 자전거 부대까지 편성해서 쾌속 전진을 하고 영국군이 다리를 끊는 걸 저지하고 공병들을 기둥으로 한 인간 다리를 세우면서까지 빠른 진격을 해내는 일본판 전격전을 하여 영국군이 전열을 정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진격했다. 결국 말레이 반도는 빠른 시간 내에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결국 영국군은 수많은 물자와 병력을 잃고 싱가포르로 퇴각했다. 이때 얼마나 많은 물자를 상실했는지 말레이 반도 전격전 당시에 일본기가 영국제 연료를 비행기에 넣고, 영국제 항공폭탄을 달고 영국군에게 폭격을 한다든지 하는 일이 많았다.

4. 싱가포르 함락

영국군은 싱가포르 방어에 들어가지만 기존의 방어물과 중포대는 먼 바다에서 공격하는 적을 막는 용도로 건설된 것이라서 말레이 반도쪽의 육지에서 공격하는 것에 대항하기에는 위치도 안 좋을 뿐 아니라, 심지어 중포탄도 적 군함을 격침시킬 목적의 철갑탄이 대부분이라 좁은 해협을 건너오는 일본군 보병에게는 별 피해를 줄 수 없는 물건이었다.
결국 싱가포르 섬 북쪽에 임시진지를 가설하고 섬 전체의 해안선을 경계하느라 병력의 분산이 심해졌다. 일본군은 상대적으로 도하거리가 짧고 포병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조호르 해협의 맹그로브 지대에 상륙했으며 영국군과의 격전 끝에 승리한다.


이후 영국군은 싱가포르섬의 수원지를 빼앗기는 등의 악재가 겹쳐서 완전히 와해되어버렸고 아서 퍼시발 장군 등 영국군 지도부는 결국 일본군에 항복, 개전 60여 일 만에 9만에 가까운 영국군이 포로가 되어버린다. 항복 회담장에서 퍼시발 장군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야마시타 토모유키 장군이 일갈한 "예스카, 노카?(예스냐, 노냐?)"라는 말은 한동안 일본에서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나중에 퍼시발 장군은 일종의 보복행위로서 미주리호의 일본 항복 조인식에 참관 명목으로 나온다. 바탄의 조나단 웨인라이트 중장과 함께 지속적으로 영미 잡지에서 다루어졌었지만 의외로 졸장으로 이름이 남았다. 실제로 전시 중 중립국을 통해서 출간된 일본 포로수용소 선전잡지에서 웨인라이트와 즐겁게 낚시하면서 띵가띵까 노는 퍼시벌의 사진이 공개되며 여러모로 패장으로 알려졌다.

단, 웨인라이트는 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가 대통령 직접 명령에 의해 탈출한 후 사방 천지에 적뿐이며 고립되고 부서져가는 코레이도르 요새에서 물자부족에 시달리며 지친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한동안 저항을 더 지속, 미국내에서의 평가가 크게 나빠질 일이 없었다. 이에 비하면 어찌 되었든 현지 일본군보다 더 많은 병력과 물자, 해군지원까지 받던 퍼시발 장군이 더 안 좋게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이고 그래서인지 일본 항복 조인식 이후에는 영국의 주요 정치가, 저명인사, 군인들에게 없는 사람 취급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웨인라이트가 전후 대장으로 진급하여 대통령에게 명예 훈장을 직접 수여받고 제4군 사령관으로 영전한 것과는 천양지차. 이는 힘이 세다고 시건방진 사촌인 미국인이나 자국보다 훨씬 열악한 국력을 가진 네덜란드보다도 위대한 영국의 군대가 먼저 백인 흉내를 내는 일본군에게 항복했다는 인종차별의식이 적용된 괘씸죄가 아주 크게 작용한 흔적이 보인다. 어딜 가나 괘씸죄는 있는 법.

그러나 퍼시발에게 주어진 전력의 상태라는 것은 숫자는 많아도 훈련과 사기가 부족한 인도인-호주인 부대를 주력으로 삼아 작전기간 막바지까지 싸워야 했고, 지상군을 지원해야 할 공군력은 일찌감치 사라진 상태여서 싱가포르 방공만도 힘에 겨웠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싱가포르 공략을 위해 일본 육, 해군이 동원한 항공기는 작전기만 617기고 예비기도 182기였지만, 영국 공군은 싱가폴과 말레이에 고작 246기만 전개시키고 있었고 그 주력도 F2A 버팔로같이 제로센에게 대적하기 힘든 구식 비행기였다.
설상가상으로 해군 전력조차 작전 초반에 사라지면서 나중에는 싱가포르에 주둔한 해군은 육군에게 알리지 않고 해군기지를 포기하고 대부분의 기지병력을 먼저 철수시켰다.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은 당장 영국 육군이 반도를 방어하는 가장 큰 전략적 목적이 오직 싱가포르 북안의 세레타에 건설된 거대한 해군기지를 지키는 것이었고, 이를 일본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려면 싱가포르 섬만 방어해서는 안되고 말레이 반도를 방어하는 것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육군에게 해군이 해군기지를 방폐하고 철수한다는 사실을 통보하지 않고 그 파괴조차 육군에게 떠넘긴 것은 분명 잘못된 행위였다.

오히려 일본 해군은 말레이 해협 북단에서도 주정을 이용한 소규모 상륙전을 반복해가며 반도에서의 일본 육군 작전을 지원했고, 심지어는 페낭 섬까지 함락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걸 막아야 하는 영국 해군은 그냥 가만히 보기만 했다. 영국군의 막대한 물자 보급 물품 중에서도 1차대전 이래 지상전에서 가장 중요한 물품으로 인정된 전차는 단 1대도 없었다. 거기다가 퍼시발 자신은 작전기간 내내 말레이 육군의 사령관으로 지휘했고 말레이와 싱가포르 전체의 영국 육, 해, 공군을 지휘하는 권한은 전혀 없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설령 퍼시발이 아니라 몽고메리가 말레이군 사령관이었더라도 말레이와 싱가포르를 방어해낼 수는 없다는 것이 전사가들이 내리는 결론이다.

그렇지만 퍼시발은 1930년대에 말레이 식민지 육군의 참모장으로 근무하면서 올바른 전략적 판단에 의거한 제대로 된 방어계획안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말레이 육군 사령관으로서의 자신의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진행되는 사태에게 질질 끌려다녔다. 특히 계속 후퇴만 요구하는 제3인도군단장인 루이스를 휘어잡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그 결과 영국군은 반도에서 지리멸렬한 전투만 하다가 결국 싱가포르까지 점령당하고 말았다. 퍼시벌의 졸렬한 지휘는 그가 처한 상황을 동정하는 전사가들조차 당연하게 인정하고 있고, 이것만으로도 퍼시벌에 대한 비판의 여지는 넘쳐난다.

5. 전투 결과

이 패배로 영국은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 및 그 주변의 식민지를 상실하였으며 수상 윈스턴 처칠은 영국 역사상 가장 참담한 패배라고까지 표현했다.

이 전투로 싱가포르를 얻은 일본은 쇼난(昭南)이라는 새 이름을 붙인다.
그렇지만 일본군은 이 전투 때문에 영국군 = 약체라는 선입견을 가지게 되었고, 그 선입견 때문에 생긴 작전이 바로 희대의 병크, 임팔 작전이었다.[4]

그리고 당시 야마시타의 참모로는 엄청난 뻘짓으로 인해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의 칭호를 획득(?)한 자칭 "작전의 신" 츠지 마사노부가 있었는데, 마사노부에게 너무 시달린 야마시타는 그를 필리핀으로 보내버린다. 자세한 건 츠지 마사노부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게다가 말레이와 필리핀 및 인도네시아에서 작전하면서 노획한 거대한 물자들로 인해 일본군은 이후의 공세조차 보급은 현지조달을 위주로 세우게 되었는데, 유럽인에 의한 식민화 이전부터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문명화된 물자가 풍부한 이들 지역과는 달리 과달카날, 솔로몬이나 뉴기니는 훨씬 궁벽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싸운 일본군은 기아에 시달리게 된다.
여담으로, 이때 싱가포르에서 노획한 온갖 사치품과 군수물자로 일본군은 본국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영양상태가 좋아지고 장비도 충실해졌다. 대표적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은 위스키를 마실 수 있었다. 또한 중국 전선에서는 차가 없어서 사단장 이하는 모두 말을 타고 다니는 경우가 흔했는데도 싱가포르에서는 위관급 장교도 노획한 고급 승용차를 배차받을 수 있었다고. 물론 보병 소대장 따위가 아닌 사령부 참모 이야기다.

게다가 싱가포르 지역은 영국이 탈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미 잘 알려진 것과 같이 독일과의 싸움에 우선 집중해야 했던 영국의 처지로는 태평양이나 인도양에서 본격적으로 전력을 집중하는 시기는 1945년 초에나 가능했고, 따라서 싱가포르의 탈환은 1945년 가을에나 실행하기로 결정되었다.
결과적으로 싱가포르는 연합군의 반격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쪽에 배치되어 있던 일본군들은 재수 없게 격전지로 증원간 병력이나 일부 수상함을 제외하고는 말 그대로 놀고 먹다가 전쟁이 끝나서 상대적으로 편하게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병력이 격전지로 차출되었고 1945년에 들어서 연이은 폭격에 전후에는 말레이 진격전이나 싱가포르 점령시 벌인 잔학행위(주로 화교에 대한 학살)에 대한 전범재판으로 인해서 그렇게 편한 말로는 겪지 못했다. 군인, 특히 일본군은 어디 가나 편하지 않는다.

6. 여담

싱가포르를 점령하여 영국군을 무장해제시키는 일본군은 영국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브 유 간(Have you gun?)"

그러자 영국군은

"Have you can?"

으로 알아듣고 다량의 통조림을 비롯한 물자를 넘겨주었다. 일본군은 이를 받고 처칠 급식을 받았다며 좋아했다. 예나 지금이나 영어 못하는 일본이나 저걸 저렇게 알아들은 영국군이 대단할 뿐. 사실 do you have a gun?이나 have a gun?이 맞다는 건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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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주로 스코틀랜드 연대 예하였다.
  • [2] 1차 세계대전 당시 인도인들이 영국군 휘하에서 열심히 싸웠지만 영국은 약속하던 인도 독립을 어겼던 기억이 있던 터라 해외 주둔 인도인들은 대충 복무하며 그만이다라는 시각이 가득했던 점도 컸다.
  • [3] 일본군에서 전차 판정도 못받을 정도로 장갑이 빈약한 장갑차량들은 정말로 소총탄에도 뚫렸다. 치하는 명색이 전차였기에 소총탄 막을 수 있었다.
  • [4] 하지만 정작 이 작전을 담당한 사령관은 싱가포르 학살을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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