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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아이히만

last modified: 2015-04-13 17:13:37 by Contributors

© Yad Vashem and the United States Holocaust Museum do not name an author.

The Bayerische Staatsbibliothek website attributes the image to Heinrich Hoffmann (1885–1957) (image: hoff-895; negative: Hoffmann 8841), a German photographer who was known as Hitler's personal photographer. The library obtained the negative and a copy of the image as part of a collection purchased from Hoffmann's son in 1993.

Following an inquiry from a Wikipedian in 2014, the library checked the negative and confirmed "with certainty" that this is not one of Hoffmann's images. His negatives were made of glass and had identifying numbers etched onto them. The library said they cannot determine the authorship of the Eichmann negative.

from

친위대 장교 시절

(ɔ) Israel Government Press Office from

체포된 1961년의 아이히만

Karl Adolf Eichmann 카를 아돌프 아이히만 이름이 하필이면...게다가 이분한테는 치욕 (1906년 3월 19일 ~ 1962년 5월 31일)

나치 독일친위대 장교. 최종계급은 친위대 중령.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1933년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 치하의 독일로 이주해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 축출 전문가로 통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직접 지시를 받고 600만명의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 위치에 있었던 인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 때문에 아이히만이 평범한 공무원이며 나치에 명령에 충실히 따른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아이히만은 언제나 유대인을 독일의 적으로 간주했으며 유대인을 전부 죽여야 한다는 히틀러홀로코스트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던 광적인 신념에 가득찬 나치당원이였다. 독일 졸링겐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의 린츠 지역에서 자란 아이히만은 학교를 중퇴한 후 린츠 지역 정유회사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다가, 훗날에도 자백했듯이 친척의 권유에 따라서 1932년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입당했다 아이히만은 NSDAP(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의 회원 번호 889895번을 받고 오스트리아 분기에 합류했고 그는 1932년 4월 1일에 나치당에 가입하고 7개월 후 슈츠슈타펠의 회원 번호 45326를 받았다. 처음에 아이히만은 그닥 나치당에 관심이 없었으나 아이히만은 곧 동료 나치당원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면서 핵심적인 인물이 되기 시작했다. 1933년 오스트리아가 나치당을 불법화하자 그는 독일로 들어와서 독일 나치당의 친위대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1934년 베를린에 자리잡아 나치 친위대의 보안국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주목할 점은 그가 린츠에서 독일로 들어온 이유는 무엇보다 나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경력을 쌓은 아이히만은 1938년 오스트리아 에서 친위대 보안국의 유대인 추방을 떠맡았던 그는 당시에는 이미 권력을 추구하며 냉혹한 나치당원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 뒤 그는 친위대 소속 대대장으로 진급하며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제국안전중앙부에서 유대인 수송 책임을 떠맡았다. 그는 유대인 추방과 수송의 전문가로서 단순히 하인리히 힘러처럼 서류에 작성만하는 고위층이 아니었다. 1941년 나치 지도부가 유대인 멸살을 결정했을 때 그는 그 집행을 위임받는데 그는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멸살 수용소와 학살 현장을 확인하고 지도하면서 여러 학살 지역에 나타나서 학살을 지시했다. 한마디로 그는 유대인 대학살을 고안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관리자이자 직가로써 유대인이라는 적을 말살하는 일을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그는 이러한 업적(?)을 통해 철십자 훈장까지 받았다. 이때에 유대인들을 얼마나 열심히 쓸어냈는지 아이히만의 상관이였던 하인리히 뮐러는 "만약 우리에게 50명의 아이히만이 있었다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다"이라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

(ɔ) The photographer who took Eichmann's photo used in the passport is unknown. from

아이히만의 가짜 여권

1945년 독일이 항복하자 잠시 미군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아이히만은 신분을 숨겨 재판을 피했고 1946년 미군 수용소에서 탈출했다. 그는 옛 친위대 동료들과 가톨릭교회 및 아르헨티나 페론 정권의 도움을 받아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아르헨티나로 몰래 빠져나가 1950년 6월 17일에 독일을 떠나는 것에 성공했고 그는 7월 14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했다. 아이히만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탈출했을 때의 가명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건설사 직원, 물류업체 감독관 등으로 지내며 15년간 도피생활을 했다. 그는 망명지인 아르헨티나에서조차 계속해서 나치 잔당과 모임을 가졌고 독일의 청년 세대에게 새로운 반유대주의 독일인의 사명을 부과하고자 했다. 그곳에서 그는 1960년 옛 친위대 동료이자 출판업자로 활약하던 빌렘 사센(willem sasen)과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의 사상과 유대인을 학살한 것에 대해서 자신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아이히만의 이러한 사상을 잘 드러내는 말을 빌렘 사센에게 고백했다.

"당신에게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나와 내 동료들은 1천만 명의 유대인, 아니 지구상의 모든 유대인을 죽였다면 나와 동료들은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랬어야만 나와 내 동료들이 적을 절멸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난 단순하게 명령을 수행하는 자가 아니였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난 그저 멍청이에 불과한 놈일 겁니다. 나는 나치당원들과 함께 똑같이 생각했으며 지구상에서 유대인을 없애버리고 싶은 이상주의자였습니다"

그렇게 자신은 죄가 없으며 유대인 학살을 후회하지 않은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11일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의 추적으로 검거되었다.

사실 아이히만은 비교적 잘 숨은 편이었는데, 장남이 1957년 여자친구인 유대계 소녀 실비아 헤르만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유럽에서 '유대인 제거'에 앞장섰다고 자랑하다가 덜미가 잡혔다(...) 자식이 웬수 실비아의 아버지 로타어부터가 아이히만의 희생자로 부모를 잃고 자기 역시 수용소에서 수감되었던 것. 그는 이스라엘 외무장관에게 즉시 신고했고, 그녀의 고발로 2년에 걸친 추적, 수사 끝에 모사드는 요원 7명으로 아이히만의 자택에서 그를 검거했다. 차에 태워진 아이히만은 체념한 듯 독일어로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나. 모사드는 그의 신원을 확인한 뒤, '니 여기서 죽을래, 아니면 이스라엘에서 재판받고 죽을래? 편한 대로 해라'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게 한 결정적인 증거는 귀였다고 한다. 코나 입은 성형수술로 고치지만 귀까지 고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 가방에 카메라를 숨겨서 촬영한 사진이 모사드가 그가 아이히만임을 확신하게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예루살렘 법정에서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에서 자신이 수행했던 능동적인 역할과 반유대주의 신념을 숨기고 단순히 자신은 국법과 체제에 따른 선량한 시민이자 공무원으로 행세했다. 결국 이와 같은 아이히만의 생애와 광적인 사악함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법정 앞 자기변호와 거짓 진술에 의해 잘못된 생각을 얻게 되었고, 그녀는 신념에 가득찬 인간의 탈을 쓴 마귀인 나치주의자를 단순한 명령에 따랐던 공무원으로 생각한 것이였다. 결국 아이히만은 1961년 4월 11일12월 15일 텔아비브의 공개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아 1962년 5월 31일 사형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아이히만의 재판은 극심한 외교적 마찰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아이히만 확보는 이유야 어떻건 외국인의 불법 납치였기 때문. 아이히만의 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아르헨티나의 주권을 침해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아르헨티나는 아이히만의 납치가 공개된 즉시 아이히만의 송환을 요구했고 UN 안전보장이사회 역시 이스라엘의 주권침해를 인정하였다. 결국 이스라엘은 아르헨티나에게 사과, 배상함으로써 아이히만을 돌려보내지 않고 사태를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한편 당시 이스라엘 재판소는 불법납치에 의해 확보된 피의자에 대해서는 재판소의 관할권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아이히만측의 주장에 대해, 피의자의 확보수단은 재판관할권과 무관하다고 답변했다. 이는 불법납치를 통한 재판을 긍정했다는 점에서 현재까지도 국제법학계로부터 비판받고 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나하고 연고가 있는 이 세 나라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전쟁 규칙과 정부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나는 준비되었다” 그리고 이 유언 뒤에 참관자들을 향해 이야기했다고 알려진 유언이 있다. “여러분, 또 만납시다. 이게 운명이라는 거요. 나는 지금까지 신을 믿으며 살아왔고, 신을 믿으면서 죽을 거요.”(런던대의 저명한 홀로코스트 역사가 다비드 케사라니의 유언 증언. 다만 증언은 엇갈리는 편이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지금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년 발간)이라는 유명한 책을 내게 된다. 제대로 된 비판정신 없이 상부의 명령에 맹종하면 어떻게 된다는걸 보여준 중요한 표본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아이히만이 보여준 악랄함 그리고 그의 사상들을 고려해 다시 평가했을 때 이 책을 재평가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있다. 그의 자세한 성격과 행동, 평가는 항목 참조.

그런데 아이히만이 유대인이라고 썰도 있다. 이스라엘 법정에서 왜 동족들을 배신하고 나치 편으로 들어가 대학살을 저질렀냐는 질문을 하자 거리낌없이 "내가 유대인이니까 유대인이 얼마나 위험한 종족인지 알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했다고 국내서적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심지어 90년대 중후반 군부대 정신교육 서적에서도 아이히만을 잡은 이스라엘을 두고 동족을 배신한 자에 대한 응징이라고 나오기까지 했다. 매국노! 하지만 친위대에 들어간 게 1932년인 걸로 보아 유대인 혈통은 아닐 확률이 높다. 그게 아니면 만슈타인과 같은 이유 일수도 있을 확률도 있다. 그리고 이 소문은 충공깽스럽게도 아이히만이 퍼뜨린 소문이였다. 그는 텔아비브 근처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히브리어에 능통하며 유대인 문화를 잘 알고 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정보였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오히려 그 소문을 자신의 출세에 활용할 정도로 교활했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시켜서 소문을 계속 확산하도록 만들었는데, 그것으로 한편으로는 유대인 사회에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시켰고[1] 다른 한편으로는 조직 내에서 전문가로써의[2] 지위와 인정을 강화했다.

모사드요제프 멩겔레와 아이히만의 소재를 모두 파악해냈고 그중에서 누굴 먼저 잡을까 고심하다가 아이히만을 먼저 잡기로 결심했는데 멩겔레는 아이히만이 잡히는 것을 보고 다시 잠적해버려 멩겔레는 잡지 못했다는 낭설이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멩겔레의 본거지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죽은 뒤에나 간신히 그놈의 무덤을 발견했다. 게다가 이둘의 행선지를 실제로 파악했다면 둘다 체포조를 보내서 동시에 잡으면 되지 뭐하러 이놈 먼저 잡자 이놈은 나중에 잡자 하겠는가? 애초에 앞뒤가 안맞는다. 이러한 소문은 이스라엘에서 퍼뜨린 것으로 추측중이다. 다만 실제로 멩겔레와 아이히만의 소재를 동시에 파악하고 동시에 체포조를 보내서 잡으려고 했으나 멩겔레는 알려준 정보가 잘못 되었는지 기가 막히게 도망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잡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2007년 아이히만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헝가리, 영국 합작으로 개봉되었다. 아이히만 역은 토마스 크레치만이 담당. 이번에도 나치 역이다...

<남편이자, 아버지자, 군인이자,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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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가장 악랄하다고 소문이 난 아이히만이 자신들 사이에서 활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조성시키기 위해서였다
  • [2] 자신이 유대인을 잘 알고 있으므로 자신이 유대인을 처리하는데 최고의 적임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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