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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last modified: 2015-04-15 20:00:40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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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beit[1] macht Frei-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 - 제 1 아우슈비츠 정문의 표어[2]

Contents

1. 개요
2. 구조
2.1. 기차역
2.2. 정문
2.3. 가스실
3. 수용대상
3.1. 식사
3.2. 앞잡이
3.3. 희생자 수
4. 잊혀진 영웅
5. 탈출
6. 관람팁
7. 기타


1. 개요

독일어로 아우슈비츠. 폴란드 현지의 지명은 오시비엥침(Oświęcim). 제1차 세계대전 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토였지만 1919년 이후 폴란드령이 되었다. 폴란드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50km 지점에 있는 작은 공업도시이지만, 홀로코스트를 수행한 절멸 및 노동수용소로 유명하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유네스코가 등재한 정식 명칭은 Auschwitz Birkenau German Nazi Concentration and Extermination Camp. 즉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폴란드식으로는 오시비엥침-브제진카) 나치 독일 강제 말살 수용소.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를 하나로 묶어서 보는 게 일반적이지만, 전쟁 당시에는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 사이에는 건물 한 채 없었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둘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나치는 아우슈비츠 말고도 폴란드에 베우제츠(Beuzec), 헤움노(Cheumno) 수용소를, 독일 본토에 부헨발트(Buchenwald), 다하우(Dachau) 수용소를 세웠다. 이것 이외에도 가스실이 없는 노동수용소는 여러 곳에 건설되었다.

2. 구조

(ɔ) Dominique Natanson from WikiMedia Commons

노란색 부분이 수용소 부지, 보라색이 공장과 SS기지다.

1940년 4월 27일 하인리히 힘러의 유대인 학살 명령 아래 SS가 첫 번째 수용소를 세웠으며 그해 6월 이 제 1 아우슈비츠에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다. 그 뒤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으로 1941년 점멸수용소로 개조, 확대되어 제 2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가 만들어 진다. 전쟁이 지속되자 I.G. 파르벤사[3]는 이곳에 화학공장을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이를 위해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가 건설된다. I.G. Farben은 독일의 전쟁수행을 적극 도왔던 전범기업이다. 전후 합병전의 4개사로 다시 해체되었고 당연히 이 회사들에게는 흑역사다(...)

수용소마다 수감인원과 구조가 조금씩 달랐는데 우리가 잘아는 살인공장은 제2수용소(비르케나우)로 이곳에는 여성과 집시등 노동능력이 떨어저 곧 제거될 인원으로 충당되었고 때문에 비르케나우의 가스실과 시체처리실이 가장 컸다. 상대적으로 노동능력이 있는 남성의 경우 1, 3, 수용소에서 수용후 강제노역을 통해서 서서히 말려 죽여갔다(물론 제 1수용소에도 가스실은 있었다).

화학공장이라 유독 화학품에 대한 위험이 높았으나 여기에 대한 안전장치는 전무해서, 노출된 많은 수용자들이 강제 노역 과정에서 사망했다. 애초에 생존 가능성이 0%라서 그런지 그럭저럭 생산이 돌아가던 굴라그와는 달리 노동 의욕이 매우 낮아 생산성이 아주 낮았다고 한다.

나치는 후에 소련군이 다가오자 증거를 없애기 위해 다른 곳은 모두 폭파시켰지만 예상외로 소련군의 진격이 빨랐고 아우슈비츠 제 1수용소는 미처 처리하지 못한 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30%는 날렸으며 진짜 수용소라고 할 수 있는 제 2수용소는 거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수용소 건립 초기에는 SS 각 사단에서 차출된 인원들이 직접 교도관 등의 역할을 위해 근무했으나, 전쟁이 진행될수록 젊은 장병들의 숫자가 부족해지자 이들은 대부분 일선으로 보내지고 육군과 공군에서 주로 3~50대의 중장년층 예비역들을 파견받아와 투입했다.

2.1. 기차역

(ɔ) Unknown. Several sources believe the photographer to have been Ernst Hoffmann or Bernhard Walter of the SS from WikiMedia Commons
© Michel Zacharz AKA Grippenn[1] (cc-by-sa-2.5) from WikiMedia Commons
1944년 비르케나우 기차역에서 분류되는 헝가리 유태인들오늘날의 비르케나우 기차역 입구

독일 점령지와 추축국에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유대인들은 처음에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기차역으로 모두 모여서 남자와 여자, 어린이와 노인을 나눈 후, 다시 군의관이 약식으로 성인 남녀 중 노동 가능/불가능자를 나눈다. 이때 구분 기준은 지멋대로라 수용소의 남은 자리에 따라, 가끔은 정리하는 놈의 기분에 따라서 지멋대로 바뀌었다. 하지만 가끔은 이 분류 작업을 거치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이것은 수용소에 남는 자리가 없으니 모조리 가스실로 보내버리겠다는 의미였다.

분류 작업은 SS나 의사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지만 실질적인 분류 작업은 Sonderkommando(특수직무반)라 불리는 남성 유대인 수감자들이 담당했다. 수용소장 루돌프 헤스루돌프 회스(Rudolf Höss)는 이들 덕분에 유대인들의 저항이 많이 줄었다고 말한다. 설마 같은 유대인들이 우리를 죽이겠냐며 안심했다고... 하지만 이들이 만약 조금이라도 연민을 보였다가는 정리하는 쪽에서 정리당하는 쪽으로 바뀔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들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였다.

이렇게 위 사진 가운데의 사람들 처럼 노동불가 집단으로 구분된 어린이, 노인들 그리고 질병이나 장애로 노동이 불가능한 성인들은 정리후 즉시 가스실로 직행하게 된다. 때문에 후술하겠지만 등록되지 않은 희생자수를 집계하는데 대단히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아주 가끔 기차역에서 어린이 몇 명을 데려가 특별대우해주는 SS가 한 명 있었는데, 다른 수용인들이 매우 부러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SS는 희대의 인간쓰레기 요제프 멩겔레로 이렇게 선별된 멩겔레의 아이들은 모두 인체실험으로 끔살당했다.

이 분류 과정이 끝나야만 비로소 등록이라고 하는 죄수 등록 마냥 사진찍고, 수감번호를 부여하는데 일부 유대인 수용소를 포함한 대부분의 수용소는 옷에다 수감번호는 새겼으나, 아우슈비츠에서는 가축처럼 팔뚝에 숫자 문신을 박아넣었다. 수감인원이 너무 많고, 옷 주인이 너무 빨리빨리 바뀌어서 그런것으로 추정된다. 그나마 사진도 초반에만 찍었다. 여기에서 생활하면 얼굴이 변형되어 사진으로 신분 확인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2.2. 정문

제1 수용소 입구의 유명한 표어인 '노동이 자유를 가져온다(Arbeit macht Frei. Work makes you free. 직역하면 '노동은 자유롭게 한다.')'는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의 좌우명이었다. 아우슈비츠는 이 말이 얼마나 기만적인 말인지 똑똑히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다. 수감자들은 자유의 몸이 되기는커녕 강제노동을 하다가 허약해지면 가스실에서 학살당하고 시신은 화장터에서 소각처리되었기 때문이다. 정문을 자세히 보면 ARBEIT(노동) 중 유독 B가 이상하게 거꾸로 붙여진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이 표어를 만들던 자들 최대한의 저항이었다고 한다. "이 말은 거짓말이다, 현실은 반대다." 즉 "거꾸로다"라는 의미로 뒤집어 붙였다고 한다.

원래 이 말 자체는 독일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평범한 격언이였다. 1872년에 로렌츠 디펜바흐라는 사람이 소설 제목으로 쓴 것을 시작으로 독일에서 유행하기 시작해서, 1차대전 직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공공사업 슬로건으로 내걸 정도로 대중화된 격언이였다. 하지만 골수 나치인 루돌프 회스가 나치즘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아우슈비츠의 정문에 박아 넣는 바람에 대우가 비참해진 말이다. 덕분에 독일에서는 이 말 자체가 금기시된다. 실제로 방송 도중 한 여성 아나운서가 청취자에게 이 말을 했다가 방송이 바로 중지되고 아나운서는 퇴출됐다.

여담으로 2009년에는 저 문을 고물상에 팔겠다고 한밤중에 싸그리 떼어간 사건#이 있었다. 이후로 표어 부분은 레플리카로 교체했다고.

2.3. 가스실

나는 총살에 관여할 때 군중이나 여자들과 아이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참혹함과 혐오감에 사로잡혔다. 나는 히틀러나 국가보안본부의 명령에 의한 인질처형이나 집단적 총살에는 진절머리가 나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듯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보지 않아도 되었고, 한편으로는 희생자들도 최후의 순간까지 친절하게 돌보아 줄 수도 있겠고 해서 나로서는 마음이 편했다.
-루돌프 헤스의 고백록에서 치클론 B를 이용한 처형을 실험한 뒤

나치는 수용소 인원들을 "정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다. 처음에는 주로 구덩이를 파고 총살을 시켰다. 하지만 이 방법은 곧 한계에 다다르게 되는데 전쟁 통에 귀한 총알을 사형에 쓰느라 낭비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루에 수십, 수백 명을 쏴 죽인 병사는 PTSD 증상을 호소했고 지휘부는 병사의 고충을 받아들여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나치 지휘관들은 인간백정의 면모와 부하를 아끼는 장교의 면모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이중사고의 실적용사례

그래서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바로 가스였다. 이 가스형을 생각하게 된 동기는 한 장교가 교외에서 차를 멈추고 잠을 잤는데, 이때 시동 끄는 것을 깜빡 잊었고 문득 잠에서 깨보니 자신은 배기가스의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어서 사지는 굳어 있고 정신은 혼미한 상황이였다. 간신히 혼신의 힘을 다해 탈출했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가스형을 개발했다그때 뒤지지. 최초에는 가스실은 자동차의 배기가스를 이용한 것으로 '''S트럭''이라 불렸는데, 지하실에 수감자들을 가두고 꼼꼼히 빈틈을 막은 후, 자동차 배기구에 호스를 달아 지하실에 연결해서 열심히 공회전을 돌리고, 배기가스 속 일산화탄소가 희생자를 산소부족으로 죽이는 원리였다. 하지만 S트럭을 이용한 학살은 독소전쟁에서 한동안 유지되다가 공회전으로 귀한 석유를 낭비한다는 지적을 받고 중지된다.

하지만 가스실을 이용한 학살은 효율적인(?) 대량학살이 가능하다고 평가되었는데, 이때 일산화탄소 대신 사실 마굿간 방역용으로 쓰던 '살충제 치클론 B를 이용하자'라는는 주장이 나왔다. 치클론 B는 밀폐공간에 터트려서 방역을 하는 살충제인데 나치는 치클론 B의 농도를 높이면 사람도 죽일 수 있겠다는 미친 생각을 떠올렸고, 마침 독일군의 물자수송을 담당하던 짐말 때문에 게파르벤에서 대량의 치클론 B를 납품받아서 석유보다 물자에 여유가 있었다. 이를 두고 이게파르벤이 전범재판에서 자기들은 치클론 B 독가스가 아닌 살충제로 쓰는줄 알고 팔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지만, 그 변명이 씨알도 않먹혔는지 거대기업 이게파르벤은 전쟁 후 연합군에 의해서 산산조각 나서 지구에서 사라져 버렸다.올래!!

치클론 B를 쓰게 된 계기가 지극히 우연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나치는 자기들이 개발해놓고도 그게 뭔지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치클론 B를 맨 처음 사용할 목적은 정말로 수감자들을 소독하기 위해서였는데 뿌려보니 수감자들이 전멸해버렸고 나치는 이걸 절멸 목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하는 얘기도 있다.

가스실은 작은 공장처럼 생겼고 지하에는 샤워실처럼 꾸며진 가스실이 있었다. 나치는 가스실을 샤워실처럼 꾸미고 희생자들에게 지금부터 샤워하러 간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한데 스스로 옷을 벗게 하기 위함이었다. 나치는 철저할 정도로 자원을 아끼고 재활용했는데 옷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누군가 죽으면 그 옷은 별다른 절차 없이 신규 입소자에게 지급되었다. 배기가스로 죽이던 처음에는 일일히 병사들이 옷을 벗겼지만 알다시피 이건 대단히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든 작업이다. 그런데 희생양이 스스로 옷을 벗고 잘 개켜서 한 곳에 모아준다면? 매우 효율적이고 일사천리로 작업은 진행될 것이다. 나치의 썩은 아이디어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물론, 이 썩은 아이디어는 게토에서 이주시킬 때 모든 짐을 싸들고 나오게 만들어 수거하는 과정에서도 써먹었다. 이렇게 하면 굳이 남은 물건 수집하러 게토를 뒤질 필요가 없으므로…

이렇게 탈의한 유대인들이 가스실로 들어가면 고체 치클론B를 옥상을 통해 주입하는데 농도와 인원에 따라 5분에서 30분정도 걸렸다고… 때문에 희생자들은 살기 위해 유일한 탈출구인 문 앞에 많이 모여 있었는데 가장 위에는 힘센 남자가 있었고, 그 아래로 약한 노인이나 아이들이 아래에 깔려 있었고 살려고 발버둥치다가 팔이 탈구되어 자기 키만큼 팔이 늘어난 시체도 있었다[4]

학살이 끝난 후 당연하게도 유태인들의 시체를 독일인이 만지기는 싫었으므로 뒤처리는 위에서 언급된 유대인 특수직무반 Sonderkommando이 맡았다. 시신은 머리카락과 금니 같은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뺀후 시체를 처리했는데, 처음에는 매장이였으나, 나치가 홀로코스트를 은폐하기 위해 소각로에 넣어 화장했다. Sonderkommando들은 좀 더 좋은 빵, 그러니까 톱밥이 덜 섞인 빵을 지급받았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따르면 이들은 수용소에서 유일하게 거의 무제한으로 술을 공급받았다고 하나 창작의 가능성이 높다. 정신적으로 힘들어 하는 유태인들은 술보다 가스를 먹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전쟁 후반기에는 전쟁포로와 그동안 홀로코스트를 미뤘던 헝가리, 이탈리아의 유태인 등 수용인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실려들어왔고, 반대로 거듭되는 패배로 물자는 모자라서 수용소를 운영할 물적, 심적 여유가 부족했던 나치는 거의 대부분의 입소자를 바로바로 처리했다. 이를 위해 비르케나우 수용소에는 거대한 규모의 샤워실을 빙자한 가스실이 여러개 증축되었으며 닥치는 대로 학살을 시작했다. 어떤날에는 가스실에서 죽어나오는 시체가 화장터 처리 용량을 초과해서 시체를 구덩이에 모으고 석유와 시체기름으로 불을 질러서 처리하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 헝가리는 정부가 유대인 학살을 차일피일 미루어서 동유럽 유대인들의 마지막 희망같은 곳이였다. 적어도 전쟁중인 영국이나 소련보다는 탈출하기 쉬운 경로라서 만화 의 주인공 블라덱 슈피겔만등 많은 유대인들이 헝가리로 탈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전쟁말기에는 헝가리에서도 유대인 학살이 진행되어서 헝가리 유대인과 탈출했던 유대인들이 위 사진처럼 한꺼번에 잡혀오게 된다

한편 나치 수용소에 대량의 방역용 약품이 공급되는 것을 보고 언론에서는 나치 수용소가 정말 위생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 같다고 기사를 쓰는 병크를 저질렀다. 가스실이 생겨난 과정을 읽어보면 알지만 정말 나치는 미친 놈들이다. 물자가 아깝다고 하면서도 기어코 독가스를 생산해서라도 죽이려 들었다. 전 유럽과 나라의 존망을 건 전쟁을 치르는 중에도!

3. 수용대상

이 수용소에서는 유대인만 수용되었다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폴란드인, 집시, 러시아인 등 약 30여 개국 인종이 수용되었다. 또한 독일인 수용자도 상당수 있었는데 주로 범죄자, 나치에 반대하던 독일인, 정신 이상자, 동성애자 등으로 히틀러의 순혈주의에서 낙오자라고 판단되는 독일인들이었다.[5] 그러므로 할리우드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홀로코스트가 유대인만이 대상이었다는 부분은 왜곡이다. 홀로코스트 피해자=유태인이 아니라 홀로코스트 피해자⊃유태인이란 말이다[6].

물론 인종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이런 독일인들은 피수용자 중에서는 비교적 좋은 처우를 받았다고 한다. 프랑스인 같은 경우에는 적십자에서 소포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 '비교적 좋은 처우' 의 예를 들자면 (아우슈비츠가 아니라 다카우 수용소의 일이긴 하지만) 독일인 수용자의 주검에서 가죽을 벗기는 것이 금지된 것 정도를 들 수 있다. 다른 인종들 중 깨끗한 등과 가슴을 가진 자, 특히 문신을 한 자는 독극물로 죽여 가죽을 벗겨 무두질해 친위대원들이 자기 장갑이나 실내화, 말 안장을 만들어 쓰거나 핸드백을 만들어 애인에게 선물하거나 했다.[7] 다만 사람가죽으로 만든 제품에 대한 내용은 설화 비슷하게 퍼져나간 경향성이 있다. 특히 전등갓이나 유태인 비누같이 나치의 비인간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소재로 사용되는 이야기들은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가 많다. 오히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아우슈비츠 가짜론을 펼치는 역사학자들마저 있을 정도. [8]

소련군이 접근하자 독일 측은 6만여 명의 수용자들을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끝내 이동시키지 못한 수용자들도 있었으며 6,000여 명에 달하는 이들은 소련군에게 해방되었다. 소련 측은 이 수용 시설을 접수 후 한동안 감옥으로 사용했다. 아주 운이 나쁜 사람들은 나치에게 수용당한 건물에서 스메르시(소련 방첩대)에게 심문 받은 뒤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3.1. 식사

아우슈비츠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나간 것은 노동의 혹독함 탓도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영양공급의 부재였다. 식사 메뉴는 톱밥을 섞어 구운 돌덩이 같은 [9], 병사들의 식사를 만들고 남은 상한 야채로 끓인 묽은 국[10], 그리고 커피였다. '커피는 사치품 아닌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당연히 그런 걸 줬을 리가 없다. 아우슈비츠 커피는 썩은 양배추 뿌리와 완전히 버려지는 야채 부산물을 불태운 잿가루로 만들었다. 아무리 강인한 인간이라도 이런 식사를 해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보통 하루 800~1,200칼로리가 공급되었다 한다. 음의 수용소에서 라는 책에 이와 관련된 일화가 몇개 언급된다. 그중 한 이야기에 따르면 묽은 국을 배급받을 때 배급하는 자와 친분이 있는 사람만 국자를 밑바닥까지 내려서 퍼온 국을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즉, 저 상한 야채국의 건더기조차 제대로 못먹는 자들도 많았다는 것.

3.2. 앞잡이

하지만 일부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자들도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카포였다. 이들은 수용된 유태인들을 감독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말하자면 나치의 앞잡이.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3.3. 희생자 수

희생자 수는 학자마다 논란이 가장 큰 부분으로 나치는 홀로코스트을 철저하게 은폐하기 위해서 기록말살과 시신소각을 지시했다. 처음 가스실 희생자는 매장했으나 이후 다시 화장했는데 이때 집계된 시신이 17만 구였다.

그나마 남은 나치의 기록상 아우슈비츠 수용자는 20만이지만 그보단 더 많은 수용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사망한 사망자는 더 큰 논쟁인데,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는 처음엔 200만명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100만명으로 수정 집계 했으며, 전쟁 후 소련은 300만명을, 2005년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국립 박물관은 최대 130만 명 정도가 수용되어 그중 110만 명 정도가 사망하였다고 보고한 바 있다.

이렇게 인원에 대해 지금도 학계의 논란이 분분한 것은 이 수용소의 수용 구조 때문이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수용자 등록 이전에 분류하는 과정에서 수십 퍼센트는 반드시 죽었고 가끔은 기차역에 도착한 인원 전부를 학살하고 이 학살을 피한 인원만 등록되었으므로 이 인원은 애초에 집계가 불가능하다. 때문에 나치가 부여한 식별번호의 숫자로 총 몇 명이 수용인원이나 희생자 숫자는 파악하기 어려울 듯하며 모든 인원이 번호를 받았을거라는 보장도 없기에 수용한 인원 파악은 더더욱 어렵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극단적인 편차가 나오는 실정이다.

4. 잊혀진 영웅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지옥과도 같은 아우슈비츠에 자진해서 들어간 사람이 있다. 폴란드의 장교였던 비톨트 필레츠키(Witold Pilecki)라는 사람인데 수용소 내부에서 저항 조직을 만들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예상보다 참혹한 현실과 조건에 저항 조직으로 수용소를 탈환할 수는 없었지만 수용소 내부의 상황을 외부로 전하고 기밀 서류를 훔쳐내는 등 첩보 활동을 훌륭히 수행했다. 하지만 화물 열차 정권으로 위세를 떨쳤던 폴란드 공산당은 여기서 크나큰 병크를 터뜨리고 마는데… 폴란드 해방 후 그를 서쪽과 내통한 간첩으로 몰아 사형에 처해버린 것이다.

소련군이 폴란드를 향해 진격해 오는 와중 SS는 상당수의 입소자를 서쪽으로 이송시켰다. 소련군이 폴란드를 탈환한 뒤 공산 폴란드 정권과 소련군은 서쪽으로 이송된 폴란드인의 명단을 그에게 요구했는데 그는 그들이 겪을 고난을 잘 알고 있었기에 명단 제공을 거부했다.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그는 견뎌내었고 결국 바르샤바에서 처형당하고 만다. 뒤늦은 1963년 폴란드의 백독수리 훈장을 수여받지만 드라마틱한 삶에 비해 지명도는 낮다.

5. 탈출

지옥 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지만 어디에나 능력자는 있는 법. 탈출에 성공한 사례도 몇몇 있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몇 가지 있는데 철저한 계획, 기발한 발상(예를 들면 결혼식 작전이라든가), 불굴의 정신력, 그리고 귀신 같은 체력이다. 3일을 아무것도 안 먹고 뛰었단다. 물론, 그 안에서 살아남는 것만 해도 엄청난 체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기필코 살아남은 그들의 정신력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는 그들 모두가 다시 돌아와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으며 그뿐 아니라 눈부신 성과를 이뤄냈다는 것이다. 탈출하기만 해도 영웅인데 싸워서 또 영웅이 되었다. 사실 저기서 탈출할 정도의 육체능력이면 싸웠을 때 무시무시할 것이다.

보통 그런 지옥을 경험하면 공포증이 생겨 나치 군복만 봐도 두려움에 떨 텐데 그들은 그것을 극복하고 영웅이 되었다.

6. 관람팁

현재 박물관으로 개장되어 있으며 입장료는 무료이다. 오전 10시부터는 유료로 가이드 투어를 할 수 있으나 한국어 가이드는 한국 여행사를 통하지 않으면 선택할 수 없다. 한 가지 팁을 주자면 한국 관광객 팀의 아우슈비츠 박물관 입장 시간은 일반적으로 점심시간 이후로 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관람 후에 식욕을 상실한다는 이유다. 따라서 12시경에 근방 식당에서 식사를 먼저 하고 박물관 입구에서 한국인 관광객이 보이길 기다렸다가 입장할 때 따라다니면서 설명을 들으면 매우 유익하다. 가이드 성격에 따라 싫은 티 내는 사람도 있지만 한국인 학생을 반겨주는 사람도 많다. 이곳 입구에 있는 화장실은 유료인데 비교적 깨끗하지만 사람도 많고 비싸다. 2010년 8월기준 3인당 1유로를 받았다. 만약 용무가 급한 사람이 있다면 수용소 안쪽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자. 무료다. 특히 가스실 옆에 있는 화장실은 으스스한 분위기가 절정이라 한 번쯤 가보길 권한다. 참고로 비르케나우 수용소까지는 가이드를 해 주지 않는다. 한국패키지의 빡빡한 시간관계상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비수기에 운이 좋다면 비르케나우까지 설명을 해준다.

이곳의 첨탑에 걸려 있는 시계는 시간이 멈춰져 있는데 관리 소홀로 멈춰진 것이 아닌 소련군이 수용소를 해방한 바로 그 시각에 멈춰져 있다. 그러니 혹여나 시계가 멈춰 있다고 비웃지는 말자.

원하는 사람은 아우슈비츠에서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비르케나우 수용소까지 둘러볼 수 있다. 버스를 타고 약 10분 정도 걸린다. 여기 가면 영화 쉰들러리스트의 배경으로 나온, 수용소에 처음 들어가면 나오는 철로를 볼 수 있다. 안쪽으로 쭉 걸어서 들어가면, 독일군이 시체를 화장한 다음 재를 뿌린 연못이 있다.

참고로 비르케나우에서 아우슈비츠로 돌아오는 버스는 5시까지만 운행한다(동절기 기준). 주위에 아무것도 없으므로(숙박시설은 커녕 심지어 가게도 없다.) 꼭 버스를 놓치지 않도록 주의할 것.

7. 기타

아우슈비츠의 모습을 잘 그린 작품으로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리모 레비(유대인)의 《이것이 인간인가》가 널리 알려져 있으며 위에서 언급한 아트 슈피겔만(유대인)의 《》도 추천한다. 또한 아우슈비츠 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가 연합군에 체포된 뒤 감옥에서 쓴 자서전 성격의 진술서인 《헤스의 고백록》#(정확히는 '회'스가 옳은 표기. 루돌프 헤스와 혼동하지 말자.)도 있다. 참고로 그의 손자는 학창시절 홀로코스트 피해자로부터 구타를 당해야만 했다고 한다.# 조상 잘못으로 후손들만 죽어나가는 안습한 사례. 프리모 레비와 마찬가지로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타데우쉬 보로프스키(Tadeusz Borowski)(폴란드인)의 《우리는 아우슈비츠에 있었다》도 읽어볼 만한 책으로, 아우슈비츠를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ɔ) Stanisław Dąbrowiecki, a press photographer. [1] from WikiMedia Commons
루돌프 회스의 처형.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의 최후는 아이러니 하게도 여기서 이루어졌는데, 그는 전범 재판 뒤 이곳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왔다. 그리고 화장터 옆, 수용소와 회스 자신의 사무실이 아주 잘 보이는 위치에 회스만을 위한 특설 교수대가 설치된다. 그는 그렇게 굴욕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처형 당시 과거 수용수들도 몇몇 참관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언급으로는 회스는 최후에 매우 담담하게,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죽었다고 한다.[11] 회스의 교수대 근처는 풀이 자라지 않아 으스스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물론 사람들이 많이 밟고 다니는 곳이라 그럴 것이다.

비디오 시스템이 개발한 게임 스피널 브레이커라는 게임에서는 1스테이지가 독일 국방군 망령을 상대하는 스테이지인데 위의 아우슈비츠 정문같은 게 보인다. 이외에도 전국시대 등 다양한 시대적 배경을 넘나들면서 망령을 상대한다.

지금은 서비스가 종료된 제2차 세계대전 FPS 온라인 게임 에선 아우슈비츠라는 맵이 있었다. 그곳에서 연합군과 추축군 유저들이 총격전을 벌였다. 투워를 계승한 BN1944에서는 수용소라는 이름의 맵으로 다시 등장했다. 맵의 형태는 투워의 아우슈비츠와 거의 같다.

가장 엄숙해야 할 이 공간에서 춤을 춘 용자도 있다. http://flager8.egloos.com/2636780
정신나간 네오나치가 아니라, 실제 수감되었던 부부가 가족들을 데리고 글로리아 게이너의 I will Survive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동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와 논란이 되었었는데 당사자인 아담 콘 씨는 "나는 더 이상 희생자가 아닙니다. 나는 살아남았습니다. 나는 이겼어요."...라며 자신의 행동이 일종의 승리선언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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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우리가 알고있는 그 아르바이트의 어원이다. 원래 아르바이트는 독일어에서 유래된 것이며, 영어의 work 혹은 job에 해당하는 단어다. 자세한 내용은 아르바이트 항목 참조.
  • [2] 원래 이 표어는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는 독일의 관용어구였으나, 하필 강제수용소에서 이따위 방식으로 쓰인 것 때문에 이후로 사실상 금지어가 되버렸다.
  • [3] Agfa, BASF, Bayer, Hoechst 4개사와 나머지 독일의 이런저런 화학공업회사들이 나치 집권기간동안에 합쳐져서 만들어진 기업집단. 참고로 아그파 2004년 필름사업을 분사시킨 뒤 파산시키는 식으로 접었고, Hochest사는 1999년 프랑스 롱프랑한테 잡아먹혀서(...) 아방티스사가 되었다가 2004년 사노피사에 또 잡아먹혔다(...)
  • [4] 출처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
  • [5] "난 이 유대 놈들 속에 있을 수 없소! 나도 독일인이란 말요! 난 황제한테 받은 훈장도 있어요. 내 아들은 군인이고요!" / "정말 그 사람이 독일인이었나요?" / "낸들 알겠니. 실제로 독일인도 꽤 있었으니까… 하지만 독일군한테는 이 친구도 유대인이었지!" - 아트 슈피겔만, 中.
  • [6] 한양대학교 사학과 임지현 교수가 이에 대해서 몹시 씁쓸하고 슬픈 일화를 소개한 바 있다. 뉴욕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의 위령비에는 홀로코스트의 희생자 수가 1000만명으로 기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미국내 유태인들의 강경한 반대와 압력으로 실제로 세워진 위령비에는 희생자가 600만명으로 기록되었는데, 이 400만명이 바로 집시, 슬라브인, 공산주의자, 정신 이상자나 동성애자등이었다. 이는 결국 유태인들 자신이 다른 희생자와 스스로를 구별하려 들었다는 것이고, 비판적으로 평가한다면 희생자인 유태인들 자신이 유태인 문제를 제외한 영역에서는 나찌의 끔찍한 행태와 같은 행동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수도 있을 것이다.
  • [7] 출처 : 존 캐리의《역사의 원전》146. 다카우 수용소의 의학 실험(1941~45)/ 프란츠 블라하
  • [8] 출처 : 사람들은 왜 이상한 것을 믿는가.
  • [9] 임레 케르테스는 아우슈비츠 등의 수용소 수감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운명에서 '지푸라기가 씹히는 묘한 빵' 이라고 서술한 바 있다.
  • [10] 운명에 서술된 표현을 빌리자면, '도저히 삼킬 수 없는 맛' 을 가졌다고 한다. 질도 개판, 맛도 개판 아주 훌륭하다
  • [11] 출처 - BBC 다큐: Auschwitz: The Nazis and the 'Final S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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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5 20: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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