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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last modified: 2015-04-04 21:12:15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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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개요
2. 전두환 대통령의 미얀마 방문
3. 테러
4. 사망자 명단
5. 전두환 대통령이 무사했던 이유
6. 수습 및 후속 조치
7. 후폭풍
7.1. 대한민국
7.2. 미얀마
7.3. 국제사회
8. 그 밖의 이야기들


아웅산 묘소 폭파 사건으로 들어와도 리다이렉트됨.

1. 개요

1983년 10월 9일, 미얀마(당시 국명은 버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 일행의 암살을 시도한 북한폭탄 테러. 간혹 아웅 테러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초기에는 '아웅산 폭파 사건'이라고 칭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부르면 아웅 산이 폭파 테러를 일으킨 것으로 잘못 이해할 수 있다. 때문에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가 정확한 명칭이다.

외국에서는 'Rangoon Bombing', 즉 버마의 수도 랑군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라 부른다.

2. 전두환 대통령의 미얀마 방문


1970~1980년대는 남북한의 제3세계 외교전이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서로 상대방 국가와 단교하고 자기들과 수교하라고 조르는 한편 있는 돈 없는 돈 만들어가며 온갖 선물을 하여 국제사회에서의 외교적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한 양측의 소리 없는 공방전이었다.

특히 70년대를 기점으로 남북한의 국력 격차가 서서히 남한의 우위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남한의 외교전은 전보다 더 거세어졌다. 미얀마는 제3세계 비동맹 국가였지만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친북한적인 외교 자세를 보이고 있었으나 경제 등 현실적인 이유로 이 시점에는 남한과의 관계 개선에도 많은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점들이 감안되어 전두환 대통령은 1983년 가을로 예정된 동남아·대양주 순방에 미얀마를 추가하며 첫번째 순방국으로 결정했다.

사실 가을 해외 순방국에 미얀마가 추가로 결정되기까지 정부 핵심 관료들 사이에서 반대가 상당했다고 한다. 협소한 국가 규모 및 군사독재 국가의 특성상 거의 외톨이 같은 국제적 위상도 그렇고 결정적으로 친북 성향의 국가임을 감안할 때 우리와 정상 외교를 맺기에는 미흡하다는 것이 반대 의견의 주요 근거였다. 이러한 반대 의견은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이었던 노신영외무부 장관이었던 이범석세계 정세에 정통한 외교 관료 출신 핵심 참모들이 중심이 되어 피력되었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북한과의 외교전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욕심에 반대 의견을 뒤로 한 채 미얀마 순방을 무리하게 추진하였다.

1983년 10월 8일, 대통령을 비롯해 핵심 참모 및 관료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정부 수행원 일행은 김포국제공항을 떠나 미얀마로 향했다. 전용기가 무사히 미얀마 랭군공항에 도착하고 공항에서 당시 미얀마 대통령인 우 산유의 영접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영빈관에서 양국 정상간 대담도 나누는 등 첫 날 순방 일정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미얀마 순방 결정까지 참모진의 반대의견이 좀 많았지만 당시 전두환 정권에서는 해외 순방이 워낙 많았고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잘 마무리되었기에 미얀마 순방 또한 대통령의 평범한 해외순방으로 잘 마무리될 것으로 보였다.

3. 테러

전두환 대통령의 미얀마 순방 이틀 째인 10월 9일의 공식 일정은 오전 10시 30분에 미얀마의 독립 영웅 아웅 산 장군의 묘소 참배하는 것으로 이는 미얀마를 방문하는 해외 주요 인사들은 다 하는 의례행사였다. 한국을 방문하는 해외 정상들이 현충원을 참배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라고 생각하면 된다.

행사를 위해서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장관 등의 정부 수행원들과 기자들은 먼저 인야레이크 호텔에서 아웅산 묘소로 별도 승용차편으로 이동해서 10시 18분 쯤 아웅산 묘소에 가장 먼저 도착한다. 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심상우 국회의원,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등 나머지 수행원들은 영빈관에서 대통령 의전 행렬의 선발대로 10시 10분 경에 아웅산 묘소로 출발하여 서석준 부총리등의 일행들과 최종 합류하도록 되어있었다. 현지 도로 사정을 잘 아는 이 대사가 탑승한 차량이 맨 앞에서 선도했다.

10시 26분 경 태극기를 단 감색 계통의 벤츠 280SE 차량을 선도로 한 제대 차량이 앞뒤로 경찰의 호위를 받으면서 묘소에 도착하자 공식 수행원, 기자, 경호원들의 시선이 자연히 이 차에 모아졌다. 차량 안은 선팅을 하고 있어 잘 보이지 않았으며 이 차에서 내려 도열에 합류한 이들은 바로 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 일행이었다. 수행원들끼리 간단히 악수로 인사를 나누었고 대통령께서 곧 오실 테니 모두 자리에 정렬하자는 이 대사의 말에 수행원들 모두 2열 횡대로 도열한다. 기자들도 촬영 준비를 하는 등 부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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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이렇게 부산한 가운데 촬영된 한국 정부 수행원들이 참배를 위해 도열한 모습으로 테러가 발생하기 불과 몇 초 전에 촬영된 사진이라 희생된 수행원들의 사망 직전 최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날 예정되었던 참배 대형은 사진과 같은 방향에서 보았을 때 아래와 같으며 참배 대형 명단에 이름이 올려져있는 인물들 중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한 굵은 글씨로 표기된 이들만 생존했다.

최재욱
공보 비서관
하동선
해외단장
황선필
대변인
(미도착)
김재익
경제수석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김용한
과기처 차관
강인희
농산부 차관
이기욱
재무부 차관
이기백
합참의장
심상우
국회의원
함병춘
비서실장
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
서상철
동자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이범석
외무부 장관
서석준
경제 부총리
전두환 대통령
(미도착)

수행원들이 도열을 마치고 난 직후 아직 대통령이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는데 나팔수들이 진혼곡을 1~2소절 연주하다 이내 그친다. 인제 와서 새삼스레 예행 연습을 하는 건가? 대통령이 아직 도착도 하지 않았는데 왜 진혼곡이 울리는 거야? 뭔가 이상한 분위기가 감도는 순간...


테러 당시의 영상. 18초 부분에서 폭탄이 터진다.

4. 사망자 명단

한국(17명)[1] : 서석준(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 이범석(외무부 장관), 김동휘(상공부 장관), 서상철(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대통령 비서실장), 이계철(주 미얀마 한국 대사), 김재익(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하동선(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이기욱(재무부 차관)[2], 강인희 (농림수산부 차관), 김용환 (과학기술처 차관), 심상우(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국회의원)[3], 민병석(대통령 주치의), 이재관(청와대 공보비서관), 이중현(동아일보 사진기자)[4], 정태진, 한경희(대통령 경호원)

미얀마(7명) : 4명(+3명, 테러리스트 검거작전 중 순직자)

북한(1명) : 공작원은 총 3명이었는데 신기철 상위는 체포과정에서 사살되었고 2명은 체포되었다. 자국 국가원수 및 우방국 국가원수에 대한 암살을 시도할 경우 사형에 처해지는 미얀마의 형법에 의거해 진 모(김진수) 소좌는 1984년 사형당했고 강민철 상위는 수사에 협조한 점을 참작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5년간 미얀마 인세인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2008년 옥사했다.[5] 1989년부터 강씨와 같이 수감되어 있다가 2008년에 출옥한 미얀마 야당 정치인이자 언론인의 증언에 의하면 강씨는 생전에 한국으로 가고 싶어했다고 한다. 2007년 말 북한-미얀마 간의 외교가 수복되자 기대를 가졌지만 북한은 강씨가 자국민이 아니라며 송환을 거부했고 남한은 극악한 테러범이라는 이유로 송환을 거부해서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북한의 공식 입장은 당시나 지금이나 "독재자 전두환을 제거하려던 남조선 인민 스스로의 의거이지 북한이 개입한 게 아니다" 이고 따라서 강민철 상위도 북한 사람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토사구팽이 따로 없다.

5. 전두환 대통령이 무사했던 이유

여러 모로 명백히 전두환 대통령을 노린 폭탄 테러였으나 정말 우연히도 현장에 없어서 살았는데 이유는 여러가지다.

원래 일정에 따르면 10월 9일 오전 10시 15분에 미얀마의 외무부 장관(외상)이 대통령 숙소인 영빈관에 도착해서 대통령을 잠시 접견한 후 10시 20분에 묘소로 함께 출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영빈관으로 향하던 외상이 탑승한 승용차가 운행 도중에 길바닥에서 고장이 나버렸다. 문제는 당시 미얀마는 사회주의 국가인 데다 우리나라의 1960년대 수준의 교통 인프라를 가진 나라여서 길바닥에 지나가는 택시가 드물었다. 운전기사는 주변에 사방팔방 뛰어다녀 간신히 대체차량으로 택시 한 대를 끌고 와 다시 출발하게 된다. 이때가 이미 도착 예정 시각이었던 10시 15분이고 당연히 지각은 불가피했다.

같은 시각 10시 15분, 영빈관에 있던 전두환 대통령은 도착해 있을 외상과 함께 차량을 타고 묘소로 출발하려 1층 로비에 내려갔으나 외상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는다. 국가 원수가 로비에서 외상을 기다리는 격이 되어서는 모양새가 이상할 것도 같고 또 그럴 경우 외상이 더 미안해할 것 같아 전두환 대통령은 그냥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올라와서 이왕 기다리는 김에 영빈관의 영접 요원들에게 격려라도 하자며 영접 요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4분 뒤인 10시 19분에 미얀마 외상이 도착하였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격려인사를 중간에 멈추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다며 격려인사를 끝까지 했고 미얀마 외상과 함께 묘소로 출발한 시각은 예정 시각보다 4분 늦은 10시 24분이었다. 오전 일정이 우리나라 수행원들끼리 진행하는 묘소 참배다 보니 스케줄이 조금 늦어도 외교적 결례가 될 일은 아닌지라 굳이 서두르지 않은 것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스케줄 지연이 전두환 대통령을 살린 것이다.

한편 영빈관에서 선발대로 출발했던 이계철 주 미얀마 한국 대사를 비롯한 일부 수행원들은 10시 26분에 묘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당시 이계철 대사가 머리 스타일이 전두환 대통령과 매우 흡사한 대머리에 안경까지 착용한 상태였고 또한 태극기를 펄럭이는 의전 차량에서 내려 나머지 선발대 일행들과 함께 묘소로 진입하면서 먼저 도착한 수행원들과 악수를 나눈 뒤 앞 열 가운데 자리에 도열했다. 멀리서 보면 이 대사가 마치 대통령인 것처럼 오인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를 본 아웅산 묘소의 나팔수들은 "저쪽 대빵 오신 듯?"이라고 착각했고 "이제 행사 시작하자. 얘들아, 진혼곡 연주하자"라고 해버린 것이다. 이 대사가 대통령이 아닌 것임을 알고 이내 진혼곡 연주를 중단했으나 아웅산 묘소 참배 현장을 직접 볼 수 없었던 북한 공작원들은 애초에 폭탄의 폭파 시점을 대통령의 묘소 참배를 알리는 진혼 나팔 소리에 맞추기로 했었기 때문에 결국 진혼곡 연주가 나오고 이내 곧바로 폭탄이 터진 것이다.

이 외에도 노신영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이 미군과의 연계를 통하여 항로를 변경하는 예리한 판단(항로를 변경한 덕분에 스케줄이 미루어졌다)으로 전두환 대통령의 목숨을 구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는 단순히 미군과의 연계를 위해 항로를 변경한 것이지 이걸 가지고 직접적으로 해당 사건으로부터 대통령을 구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일단 항로 변경으로 미루어진 스케줄로도 전두환 대통령이 죽을 뻔했다.

테러의 배후였던 북한은 자신들의 소행을 부정하기 위해 이 항로수정안을 가지고서 노신영장세동이 계획한 전두환 대통령 암살 작전의 증거라고 주장하지만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일단 장세동은 대통령 경호실장이었기 때문에 전두환 대통령과 언제나 행동을 같이 해야했으므로 묘소 방문 일정 차질이 없었으면 함께 죽을 뻔했다. 더욱이 군인 출신인 장세동과 외교관 출신인 노신영은 특별한 연줄이나 접점도 없었기에 이 두 사람이 맞잡고 일을 꾸밀 가능성도 대단히 낮다. 더욱이 이 둘은 사이가 영 좋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서 국가안전기획부 항목 참조.

6. 수습 및 후속 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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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랑군(양곤)에는 2개의 육군 병원이 있었는데 테러로 사망한 순국자들은 제2병원으로, 부상자들은 제1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이 마침 일요일 이어서 2명 뿐인 당직 의사가 수십 명의 사상자를 치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약품과 의료기재의 부족이었다. 소독약품이 없어서 물로 상처를 씻어야 했고 가위가 없어서 면도칼을 사용하기도 했다.

본격적인 치료는 사건 발생 3시간이 지나서야 랭군 시내의 각 병원에서 의사, 간호원들이 동원되어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대사관 직원들과 상사원 가족들은 가정에 비치하고 있던 구급약들을 아낌없이 병원에 제공하였고 환자들을 가족 이상으로 밤새워 간호함으로써 부상자 치료에 큰 힘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전두환 대통령은 순방 일정을 전면 중단 및 취소하고 바로 서울로 귀국했고 이후 인도, 스리랑카, 호주, 뉴질랜드, 브루나이 등 미얀마와 같이 순정 일정이 잡혔던 나라들의 방문도 연기되었다.

한편 테러를 저지른 북한 공작원들은 군경의 추적을 따돌리며 양곤강으로 향했다. 여기서 대기 중인 쾌속정을 타고 북한 화물선에 숨어 북한으로 귀환한다는 게 탈출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양곤강에 도착해보니 대기하고 있어야 할 고속정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그들은 다시 산개해 북한 화물선까지 갔으나 그마저도 없었다. 결국 북한은 처음부터 그들을 탈출시킬 생각 따윈 없었던 것.

결국 공작원 3인 중 신기철은 총격전 중 사살되었고 강민철과 김진수는 수류탄을 던지려다 안전핀을 뽑는 순간 터져버려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하나도 아니고 두 사람이 던지려던 수류탄 두 개가 동시에 이런 오작동을 일으킨 이유는 북한이 애초에 수류탄을 안전핀이 뽑힌 순간 터지게 몰래 조작해놨었다는 추측이 있다. 폭발로 팔 하나과 눈 한쪽을 잃은 김진수는 계속 진술을 거부하다 처형되었으나 역시 한 팔을 잃은 강민철은 북한의 테러를 시인하고 집행유예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 뒤 강민철은 가톨릭에 귀의해 마태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북한의 암살 위협에 괴로워하다 2008년 5월 18일 간암으로 옥중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7. 후폭풍

7.1.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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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한판 붙어보자는 선전포고[6]나 다름없는 엄청난 도발 행위였다.

북한이 이미 1.21사태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등으로 이미 암살을 시도한 전례가 있지만, 적어도 그 두 사건은 오직 국가원수 한 명을 노린 것이었고 한국 내부에서 저지른 사건이었으며 각각 특수부대 일부와 조총련 소속 재일교포 문세광을 활용한 일이라 전자는 좌경맹동주의자들이 헛짓한 것이다, 우리는 모르는 일이다 라고 발뺌이 가능했지만, 이 테러는 그런 수준을 넘어서 대한민국 정부 핵심 인물들을 몽땅 제거해 국가를 혼란에 빠뜨릴 목적으로 제3국에서 저지른 테러라는 점에서 심각함이 아주 크다고 볼 수 있다.

사망자 명단만 봐도 부총리, 장·차관에 청와대 비서진 등 당시 대한민국의 국가 수뇌부가 한가득이었다. 부상자까지 확대해보면 장·차관이 몇 명 더 있고, 합동참모의장 등 장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대로 터졌다면 국가 행정부 및 군 지휘부가 하루아침에 소멸되었던 것. 설치했던 폭탄 2발 중 1발만 터지고 나머지 1발은 불발. 특히 나머지 1발은 소이탄으로, 이게 터졌으면 섭씨 4천 도의 고열로 인해 부상으로 그친 나머지 '생존자'들의 상당수가 사망자 명단에 추가되었을 확률이 높다.

전두환 대통령이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한 나라의 핵심 인물이 갑자기 죽으면 국가를 통제할 구심점이 사라지면서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특히 독재정권일 경우에는 더더욱. 만약 전두환 대통령이 죽었다면 군부가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12.12 군사반란 시즌 2를 찍거나, 북한이 남한의 최고지도부 공백을 노려 전격 남침을 감행함으로서 6.25 전쟁 시즌 2를 찍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둘 중 하나는 일어났을 것이라는 점으로 남한의 대통령이 북한의 공작원에게 살해당한 상황이니 복수론을 들고 일어나면 어떤 반론일지라도 씨알도 안 먹혔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당시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까지 테러 발생 한 달 뒤에 전격 방한하여, 이례적으로 최전방까지 시찰하는 등 한·미 동맹 결의를 재확인시켜 주며 전두환 대통령을 달랬고, 결정적으로 전두환 대통령이 '주석궁으로 진격하자'는 군부의 동요와 반발에 "내 명령 없이 한 사람이라도 움직였다간 반역으로 간주하겠다"며 지휘관들을 설득 내지 위협하며 군부를 통제하여 실제 전쟁이 터지진 않았다. 독재정권이 이럴 때는 효율적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전두환 대통령이 만약 죽었더라면 전쟁이 터졌거나, 군부가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어쨌든 현직 대통령이 북괴 공작으로 살해된 상황이므로 전쟁론에도 명분이 선다. 전두환 대통령이 10.26 사건 이후 정권을 장악한 과정을 잘 생각해 보자.

일단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은 최종 군 통수권자이기에, 이런 일은 당연한 것이다. 특히 이 당시에는 박정희 정권 때와 마찬가지로 군부세력들이 정치권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지만, 알다시피 전두환 대통령이 바로 그 군부세력의 수장 출신으로 대통령에 오른 인물이다. 따라서 당시 군부가 아무리 정치권에 세력을 뻗치고 있고 북한의 대규모 도발에 대한 응징이라는 분명한 명분이 있는 상황이더라도, 결국 그 권력의 중심은 전두환 대통령이었기에 그의 말 한마디에 반발이나 의견제시는 엄두도 못 내고 데꿀멍해야 했을 것이다.

한편 미국이 불편해한다는 이유로 개발을 중단했던 지대지 백곰 미사일의 개발을 대북 위협용으로 재개했는데 그 결과물이 현무. 그런데 관련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애초에 미사일 개발을 중단시켰던 것도 전두환 대통령이다.

7.2. 미얀마

나라 자체가 뒤집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내에서 테러를 저지르면 최소한 직접적으로 투덜댈 건 당사자인 대한민국 뿐이나, 명백한 주권국가인 미얀마 영토 내에서 그것도 미얀마의 국부 아웅 산의 묘소라는 성지급 장소에서 미얀마의 국빈인 대한민국 대통령 일행을 제3자가 공격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폭탄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니므로 북한은 대한민국만이 아니라 미얀마도 공격한 셈이다. 미얀마 사람들도 많이 다쳤다.

거기다 성지라는 아웅산 묘소가 폭탄으로 파괴되어 쑥대밭이 돼버렸다! 미얀마에서 아웅 산의 위치는 우리나라의 이순신이나 세종대왕, 터키의 아타튀르크, 베트남의 호치민이나 쩐흥다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정도의 위치라 보면 된다. 단순한 국부 수준을 넘어 신성불가침의 수준이다. 미얀마 군부독재정권이 눈엣가시인 아웅 산 수 지 여사를 자택연금시키는 정도밖에 못했던 것도 아웅 산 장군의 딸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군 내부에서부터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의 묘소에서 폭탄이 터졌으니 미얀마가 뒤집어질 수밖에.

우리나라로 현지화하자면 국립현충원에 방문한 외국 대표들을 과격주의자들이 테러하여 독립유공자나 전쟁용사들이 묻힌 현충원 묘소가 참담히 파괴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사건에서 미얀마는 억울하게 피해를 봤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체면을 크게 깎이는 망신을 당했다. 어쨌든 한 국가 내의 치안 유지는 그 국가가 하는 것이 원칙이다. 특히 타국 국가원수가 방문할 때는 자국의 국가원수급으로 최고의 보안 조치를 하는 것이 외교적 관례이자 상식인데 이런 상황에서 폭탄 테러를 당했다는 것은 그만큼 치안 유지 및 사전 조치가 허술했다는 것이므로 미얀마에게는 외교적으로 매우 치욕스러운 사건이었다.

게다가 미얀마는 이전부터 북한과 연결이 있었으므로 사건이 잘못 꼬이면 미얀마가 북한과 짜고 한국 대통령을 초청해서 암살하려 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고 심각할 경우 이 역시 전쟁의 명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미얀마의 관계가 나빴던 것도 아니고 테러범도 명확한 데다 미얀마도 자국민의 인명피해를 비롯하여 성지급 장소가 쑥대밭이 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까지 북한과 이런 일을 작당할 이유는 없기에 별 탈 없이 좋게 넘어간 것이다. 고려시대 몽고 사신 저고여가 살해당한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해 보자. 당장 제1차 세계대전의 결정적인 발발 원인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암살당한 사라예보 사건이었다.

미얀마의 대통령인 우 산유 뿐만 아니라 당시 미얀마의 실권자우 네윈 사회주의 계획당 의장이 사건 당일 오후에 이례적으로 전두환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정중히 사과를 할 정도였으니 미얀마 측에서 이 사건을 얼마나 심각히 여겼는지 충분히 알 수 있겠다.

테러 발생일로부터 25일째가 되는 1983년 11월 4일, 미얀마 정부는 마침내 암살폭발범이 북괴군 특공대원임을 밝히고 범죄 집단인 북한과 외교 관계를 단절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 정권의 승인 자체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고 공식 발표하였으며 한국에 위로 및 사과 사절단을 보냈다.

추가로 이 사건으로 인해 미얀마에서는 법이 바뀌었는데 자국 내에서 외국의 국가원수를 살해해도 자국의 국가원수를 살해한 죄와 똑같이 사형에 처하는 법을 제정했다. 이런 일이 또 발생한다면.. [7]

다만 북한과의 외교 단절 관계는 시간이 다소 지나 몇번의 쿠데타로 정권이 교체된 지금에 와서는 다시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미얀마라는 국가가 독재로 인해 국가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나라라 외교 관계를 맺을만한 국가가 몇 안 된다.

7.3. 국제사회

이 테러로 인해 미국 등 세계 69개국들이 대북한 규탄 성명을 발표하였고 미얀마 외에도 코스타리카, 코모로, 서사모아 등 친북 성향의 제3세계 국가들이 전격적으로 북한과 단교하였다. 자기 나라도 아니고 대한민국도 아니고 생판 남의 나라의 제일 중요한 장소에서 그 나라 국빈을 폭탄테러한 놈들 따위를 용인하는게 말이 되겠는가? 이로서 치열하게 전개되던 제3세계 남북외교전은 북한의 장렬한 시밤쾅자폭으로 인해 남한의 KO승북한의 반칙으로 인한 몰수패으로 끝나게 되었다. 2014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한국 정부가 외교적으로 북한을 응징하기 위해 노력한 것도 한몫 했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은 테러범들이 북한 사람들도 아니고 자신들과 관계 없다며 범행 사실을 잡아 떼었고 뒤에서 미얀마와 이면 교섭으로라도 붙잡힌 테러범들을 구출할 생각조차도 전혀 없었다. 미얀마는 친북 성향의 국가이기에 북한이 보이지 않게 외교적으로 손을 쓸 여지는 있었다. 그래도 아웅산 자체가 미얀마의 국부급이다 보니 미얀마 국민들의 반감이 장난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망명한 황장엽 前 북한노동당 비서의 말에 따르면 1983년 당시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부자는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와 관련해 수습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소행임을 인정하는 문제를 놓고 대립했다고 한다. 김일성이 예전의 1.21사태와 같이 "저 밑의 일선 과격분자가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얘기하는 게 어떻겠느냐" 뭔 일만 나면 아래의 누군가를 '과격', '반혁명' 딱지를 붙이고 몰아부치는것 같은데고 먼저 제안했으나 김정일은 절대 부인해야 된다고 강경하게 대립하였다가 결국 김정일의 의견이 반영되어 오리발 모드로 나간 것이라고 한다. 부정했는데도 외교 관계가 저렇게 꼬였는데 당시에 곧바로 부분 인정했으면 북한의 외교적 고립은 더욱 심각해졌을 듯하다.

8. 그 밖의 이야기들

제5공화국에서는 전두환 대통령이 버마를 순방하게 된 계기를 허문도 문화공보부 차관이 우 네윈의 섭정을 벤치마킹하는 게 좋겠다고 건의해서인 것으로 묘사하였다.

아웅산 묘소와 폭파 사건 이야기. 테러 당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로 상당히 자세한 내용이 적혀있으니 관련 자료를 확인할 요량이라면 한 번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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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테러로 희생된 대한민국 정부 수행원들은 전두환 대통령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독재정치로 국민들을 탄압하긴 했어도 나름대로 국가 발전을 위해 의욕적으로 기용한 그야말로 S급 인재로 불리는 정부 핵심 참모들이었다. 법학계에서는 이 사건에서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이 순직한 것을 아깝게 여기고 있다.[8](이 때문인지 함병춘 비서실장은 일본어 위키백과에서 이 사건의 순국자들을 언급할 때,유일하게 생애,업적 등이 자세히 적혀있다.) 한국법사회학의 아까운 인물을 잃었다는 평.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은 한국 법철학과 법사상사, 법제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몇십 년에 한 번 나오는 천재라는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법학도라면, 특히 연세대학교 법학부의 재학중인 학생의 경우 법철학과 법제사 등의 과목을 수강할 때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이 확립한 체계를 배우게 된다. 법사회학 쪽에선 민법의 곽윤직 교수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 밖에 이범석(독립운동가 이범석과는 동명이인) 외무부 장관 등 테러로 희생된 다른 참모들 또한 상당한 능력을 가진 인재들이었다.[9]

경제계 쪽은 서석준 경제 부총리,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등 당시 한국의 경제를 책임지던 주요 인사들과 경제통들이 한꺼번에 가버리는 바람에 이후 한국 경제가 기울었다는 관측이 있다. 특히 김재익 경제수석의 경우 전두환 정부의 가장 뛰어난 경제정책통이자 사실상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였다. 그러나 그 당시 죽은 사람들의 방식으로는 그 시점이 이미 한계였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개그맨 심현섭의 아버지인 상우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또한 이 테러로 희생되었는데 2002년 보수계열 정당의 대선후보였던 회창을 지지 선언을 하는 것을 시작으로 10년 후인 2012년 대선 당시 때까지도 심현섭이 보수파 계열에서 정치적 지지 행보를 꾸준히 이어가는 근본적인 동기로 분석된다.



당시 합동참모의장이었던 이기백 대장의 경우 일반 정장 차림의 다른 인사들과는 달리 장교 정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정복에 붙은 금속제의 각종 휘장, 약장 등이 방탄복 역할을 해주어서 비록 중상을 입긴 했지만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이때 중상을 입은 이기백 장군을 구한 사람이 現 육군 장성전인범 중장이다. 당시 중위 계급이었던 그는 합참의장의 전속부관으로 아수라장이었던 폭파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이기백 장군을 구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보국훈장 광복장을 수여받았다. 동아일보 기사. 폭탄 테러 때에 대한 전인범 중장의 회고에 따르면 두부에 중상을 입고 쓰러진 이기백 장군의 두발이 길어서 피와 머리카락이 응고되어 정확한 상처 부위를 찾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위의 사진이 바로 이기백 장군이 사건 당시 착용했던 정복으로 이기백 장군은 귀국하는 즉시 이 정복을 자신의 모교인 육군사관학교에 기증했다.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가면 전시되어 있는데 확인해보고 싶으면 육사를 방문하면 된다.

참고로 이 사건으로 순직한 희생자들의 유족에 대한 지원과 장학사업을 목표로 1983년 12월 발족한 재단이 그 유명한 일해재단이다. 이 재단은 결국 전두환 대통령의 장기집권 음모에 이용되었고,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은 일해재단 기부금을 적게 냈다는 이유로 1985년 국제그룹이 해체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다가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새세대 육영회와 함께 5공비리의 대표적 사건으로 취급되어 5공비리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대상이 되었다.

또한 당시 유족들과 국민 정서를 감안하여 테러 당시 촬영된 장면이 테러 직후에는 방영되지 않다가 1년 뒤 9시뉴스에서 방영되어 충격을 준 바 있다. 당연하지만 잔인한 장면은 최대한 편집해서 방송했다.


유신정권 때부터의 관례로 대통령이 해외 순방길에 나서면 체신청에서 기념우표를 발행했는데 당연히 해외 순방이 지속될 리가 없었으므로 해당 우표를 회수 후 폐기 처분하였다. 덕분에 아직도 액면가 이하(...)로도 거래되는 순방 기념 우표도 많지만 이 우표는 가격대가 꽤나 높은 편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우표 이야기.

테러 1주기인 1984년 10월 9일, 파주시 임진각 관광단지에 버마 아웅산 순국 외교사절 위령탑을 건립했다. 높이 17m 탑신, 계단 등 각 17개는 희생된 열 일곱 위령을 상징하며 중앙 1개 지주에는 대통령이 쓴 탑명이 조각되어 있고, 4개의 청동군상은 외교를 통한 국력신장, 민족화합, 조국번영, 승천영생의 뜻을 나타내고 있으며 탑 정면에 마련한 "구원의 불꽃" 대는 순국자들의 명복과 영생을 빌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경의선 임진강역에서 하차 후에 관광단지 쪽으로 가다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2006년 한국인 최초로 UN 사무총장으로 내정되어 화제가 되었던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은 10월 9일에 서울 국립현충원에 방문 및 참배하여 아웅산 테러 순국 영령들의 넋을 기렸다. 특히 반기문의 참배는 외교관 시절 은인이었던 故 이범석 외무부 장관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큰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범석 장관이 반기문을 전격 발탁한 일화는 외교가에서는 상당히 유명한데 반기문이 주 인도 대사관에서 4급 서기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그의 탁월한 업무처리 능력과 겸손함, 총명함을 눈 여겨보던 이범석 당시 외무 장관이 3급 부이사관급이던 외무장관 보좌관으로 그를 전격 발령하였다. 이를 계기로 반기문은 외교 관료로서 요직을 두루 거치며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지금의 위치에 이르게 된 것이다. 테러가 발생하던 1983년 10월 당시에 반기문은 외교부의 지원으로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수를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아웅산 테러 소식을 전해듣고 그 날 집에서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1달 이상 추모의 뜻으로 모든 방송이 중단되고 뉴스만 방영하였다. 천안함 사건이나 삼풍 사건 때와 비슷한 분위기였지만 앞의 두 사건 때는 예능 프로만 방영이 제한된 반면 이때는 뉴스를 제외한 전 방송이 스톱되었었다. 그리고 당연히 장례식은 생중계되었다.

대구MBC에게는 이 사건이 의미가 있었는데, 사건이 터진 다음날인 1983년 10월 10일이 음악FM 개국날이었기 때문이다. 음악FM 개국을 하긴 했는데, 추모 분위기상 당연히 축하한다며 잔칫집 같이 들썩이지 못하고 장송곡만 틀 수 밖에 없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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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SBS 수목드라마 시티헌터의 첫 방영분에서는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를 재현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웅산 묘소도 아니고 그냥 아웅산이라고 나오는 건 신경 쓰지 말자. 무식한 제작진이 아웅山이라는 지명이 있는줄 알았나보다. 드라마의 주요 줄거리는 윤성(이민호 분)의 아버지 박무열(박상민)은 이진표(김상중)와 함께 정부 수행원 자격으로 버마(현 미얀마)에 갔다가 북한의 테러를 받는다. 두 사람은 곧장 테러에 대한 복수를 나섰으나 정권의 버림을 받고 박무열은 작전 도중 숨을 거두고 겨우 살아남은 이진표는 무열의 아들 윤성을 킬러로 길러내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당연히(...) 반공드라마의 소재로 나왔는데 지금 평양에선에서는 천하의 개쌍놈 김정일이 광분하면서 꾸민 사건으로 나온다. 다 아는 사실이잖아? 공작원들을 훈련시키고 납치한 최은희에게 자랑하고 버마로 보내기 전에 여자를 보내서 회포를 풀게 하고 여자를 덮치는 장면이 그대로 방영되었다.


2012년 5월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1983년 테러의 현장이었던 아웅산 묘소를 방문하였다.[10]

사진에서 보는 묘소의 모습이 1983년 당시와는 많이 다른 형상을 하고 있는데 그때 테러로 목조 건물은 파괴된 데다 유사 테러에 취약한 점을 감안하여 미얀마 측에서 아예 시멘트로 만든 육중한 기념탑으로 새로 바꿨기 때문이다. 사고 이후 콘크리트로 복구한 아웅산 묘소는 보안을 문제로 외부인의 출입과 촬영이 통제되었으나 최근 다시 외부에 공개하기로 결정되었다.

2013 한국사 검정 교과서 사태가 벌어졌을 때, 아웅산 사건이 실려있는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교학사가 유일한 것으로 밝혀졌다. #

2014년 4월에 임명되었던 강병규 전 안전행정부 장관이 아웅산 테러 사건 현장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다. 행정고시에 합격하자마자 대통령 순방에 따라갈 기회가 생겼는데 가자마자 죽을 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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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10월 13일 합동 국민장으로 전원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 [2] 사고 당시에는 생존해 있었으나 부상자들이 후송된 미얀마 제2육군병원의 의료상태가 소독 약품이 모자라 물로 상처를 씻고 가위도 없어 붕대를 면도칼로 자를 정도로 열악한 탓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결국 사고 4일만에 순직하고 말았다.
  • [3] 개그맨 심현섭氏의 아버지
  • [4] 이 사건에서 사망한 유일한 언론인
  • [5] 강민철 상위의 이름은 후일 미국에서 나온 한국전 관련 소설에서 스파이의 이름으로 사용된다.
  • [6] 국제법적으로도 국가 원수에 대한 암살이나 암살 시도는 상대국의 선전포고로 간주할 수 있다.
  • [7] 보통 자국 내에서 외국 국가원수, 혹은 거기에 준하는 요인이 사상당하는 일이 일반적으로 잘 일어나기도 않기에 이런 일을 대비해서 법률을 제정해두지 않다보니 의외로 이런 부분을 담당해야할 법률에 빈틈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 [8] 그의 아들 함재봉은 2005년까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이후 미국 대학으로 옮겼다.
  • [9] 이범석 장관은 소련, 중국 등 공산권과의 관계정상화를 골자로 하는 '북방정책;의 선구자격 인물이었고, 이는 후임 노태우 정부에서 결실을 이루었다.
  • [10] 1983년과 같은 불상사를 막기 위해 미얀마에 도착한 후에야 이를 대외에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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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04 2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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